[eBook] 민주주의 잔혹사 -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이름들
홍석률 지음 / 창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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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유명 역사 강사의 강의 캡처가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링크). 수능에 ‘비교적 중요하지 않은’ 인물이 등장한 것에 불만을 토로한 수험생들의 반응을 전하며, 진정 역사에서 ‘중요한’, 또는 ‘중요하지 않은’ 인물은 누구인지를 되묻는 내용이다. 비록 그는 시험을 대비하기 위한 한국사 강의를 주업으로 하지만, 그런 그가 보기에도 ‘시험에 중요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수험생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진 이름들을 ‘지나칠 정도로 가볍게’ 넘어가는 현실은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무시당하고 말 이름일지언정 역사에 남게 된다는 것은, 그것도 한 사람, 또는 그 시절의 단체명이나 사건, 운동 등의 이름이 오롯이 남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하고 사라져 간 많은 이들의 삶이 역사책에서 ‘이후 몇(십) 년 동안 과도기가 지속되었고, 사람들의 삶은 힘들어졌다.’ 식의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사례를 의외로 흔하게 본다(교과서가 가장 대표적인 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를 안다’고 말할 때의 평가 척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의 한 시기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 누구이며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얼마나 아는지의 여부가 된다.

 

 

 

  이 사람 누군지 알아? 이토 히로부미? 안 되겠네. 민족의 역사도 모르는 매국노!

 

 

  서벌턴(Subaltern)이라는 개념은 우리말로 ‘하위자’ 또는 ‘하위주체’쯤으로 번역된다고 한다. ‘~고 한다’라고 앞 문장을 끝맺은 이유는, 학부 시절에나 개념을 얼핏 익혔을 뿐 개념의 정확한 정의나 관련된 논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이 주는 문제의식만은 이후 내 역사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이들은 누구인가? 왜 그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잊히는가?

  잠깐, ‘그들’이 잊힌다고? 나는 그럼 민중이 아니고 엘리트쯤 되나? 이쯤에서 질문을 수정해 본다. 민중의 정확한 이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공기처럼 여기는 사회에서 살고 있고, 그 바탕에는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한 피와 눈물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민중이 민주주의의 주체라는 것도, 권력의 근본이라는 것도 상식으로써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나간 민주주의를 반추할 때 떠올리는 이름은 4.19 혁명의 김주열, 87년 항쟁의 김종철과 이한열, 이 정도다.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이름값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민중은 그들의 피를 기억하고 그들과 ‘함께’ 이 땅의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사실상 ‘들러리’ 취급을 받는다. 기껏해야 ‘몇십(또는 몇백)만’의 ‘인구수’로 다루어지는 게 현실이다.

  이 책의 문제의식은 ‘민중이 잊힌 민주주의’라는 현실에서 비롯한다. 필자는 서문에서 말한다.

 

“‘민주주의 잔혹사’라 할 때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탄압, 국가폭력 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혹은 희생된 사람이 여전히 가려지고, 역사에 잘 기록되지 않는 것 역시 잔혹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책은 주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건’에 대한 ‘잘 모르는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우리는 4.19 혁명의 결과가 무엇인지, 5.18이 어떤 날인지, 6월 항쟁이 대략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정도는 이미 잘 안다고 생각한다(여담이지만, 나의 학부 시절 때도 5.16과 5.18을 구분 못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기사가 교내 신문에 나고 그랬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 때 억울하게 끌려간 삼청교육대원들에 대한 진상조사가 아직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 4.19 혁명 때 이승만 하야를 분명하게 외친 이들이 마산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라는 이야기, 산업화 시대에 ‘민주노조’를 이루려 노력했던 이들이 여성 노동자들이며 그들이 정부, 한국노총 및 남성 노동자들에게까지 핍박받았다는 이야기들은 생소할 것이다.

  역사 주체의 행위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면 그 주체는 역사의 진보와 발전에 있어 수행한 역할이 미미한 것일까? ‘그렇다’라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어떤 주체와 그 주체의 행위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관련 기록이 부족한 것이다.

  승자는 패자의 역사를 끊임없이 지워내는 한편, 자신의 역사를 치장하여 더욱 빛나도록 한다. 5.16 군사정변 관련자들은 ‘4.19 혁명 이후 사회는 어지러웠고 기존 정권이 부정과 부패로 얼룩졌으므로 불가피하게 새로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라는 식으로 ‘거사’를 일으킨 이유를 댔다. 이러한 서술이 민주화 도래 이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으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내가 군인이던 2010년대에도 버젓이 군 정신교육 자료라는 이름으로 유포되고 있었다. 군 정신교육을 진지한 마음으로 듣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민주시민과 국가를 수호한다는 집단에서 왜곡된 역사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설마, 지금도 정신교육 내용이 그러하려나). 개인적으로는 군사정변 관계자들이 내걸었던 명분이 그 당시의 실제적인 정치적 상황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를 낱낱이 지적하는 5장의 내용이 이 책의 백미라고 생각했다.

  아, 직전의 서술은 취소해야겠다.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중심과 경계를 구분 짓고 있었다. 이 작은 책에서조차! 어느 것 하나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외면했던 작은 역사들, 그 역사에서 살던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그 이야기의 명료한 뜻을 지금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역사적 가능성에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우리가 미래의 역사를 준비하는 데 있어 좀 더 넓은 시선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 가정법은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 명제는 반만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명제는 우리나라가 저 고구려 때와 같이 드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등과 같은 민족주의적, 영웅주의적 사관을 포기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역사적 가능성을 소거해 버림으로써 일반의 역사의식을 결과 중심적으로 굳어지게 한다. 역사가 과거를 토대로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정의에 가깝도록 역사를 체화할 필요가 있다. 주변부를 배제했던 민주주의의 지난날, 그 잔혹한 역사를 되짚어보는 것은 가능성의 호출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맞이한 지 이제 겨우 30년 지났다. 그 중 10년 가까이는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형식적 껍데기만 남은, 민주주의가 사실상 뒷걸음질하던 시절이었다. 김광석의 노랫말처럼, ‘이제 다시 시작’일 뿐이다. 위대한 몇 사람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결코 위대하지 않은, 평범해서 눈에 띄지 않는 민중들이 만들어가는 역사에도 이제는 주목해야 한다. 사실, 그 역사는 우리가 만드는 역사다. 여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계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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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스트 한국말’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이 영상(링크)에서 말을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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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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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창의성을 길러주지 못하는, 틀에 박힌 교육’. 한국의 제도권 중등 교육에 붙은 가장 흔한 비판 중 하나다. 교육 문제에 있어 일종의 내부자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 교육에 대한 이 비판은 일반적인 만큼 무성의한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개성과 창의성을 반기기는 하던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은 아직도 한국 사회의 암묵지이며, 창의성과 열정은 정부와 기업이 국민과 직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전유한 지 오래다. 그러나 개성과 창의성이 기발한 질문과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처음에 언급한 ‘틀에 박힌 한국 교육’이라는 언설은 결국 질문이 사라진 교육 현장, 질문의 실종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육의 현실을 지적하는 것일 테다.

 

  책 제목은 참으로 정직하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라니. 의문문의 형식이지만 사실 무엇이 정말로 궁금하여 묻는 문장이 아니다. 이 문장에는 이미 ‘인간은 어떠한 대상에 대해-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질문을 던져야 한다’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해답보다는 질문이다.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닌, “본래의 질문을 정확히 파악”(97)하고 추구하는 일부터 선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제목에서 방점을 찾는다면 ‘질문’이 아닌 ‘어떻게’일 것이다. 답이 정해진 질문, 질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질문이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까운’1) 질문, 하나마나한 질문 등의 ‘유사 질문’은 질문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텅 빈 말의 형식일 뿐이다.

 

  저자는 질문의 단초를 고전에서 찾았다. 너무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실 고전을 시대적, 역사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2차 고전’은, 과장 조금 보태자면 고전의 수만큼 나왔을 것이니 그러한 생각이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책은 고전의 재해석에 관심이 없다. ‘재해석’이라는 개념 자체가 질문보다는 대답의 성격이 강하다. 저자는 자신의 고전 감상에 굳이 불필요한 무게를 싣지 않는다. 그저 한 명의 책 읽는 사람으로서 고전을 통과하고, 그 접점에서 발생한 생각의 실마리들. 그 실마리들을 저자는 잠시 붙들었다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시 날려 보낸다. 또 다른 생각과 질문의 확산을 위해서. “영원히 반복해서 읽을 수 있으면서도 똑같이 두 번은 읽을 수 없는 책”(271)이 비단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긴의 경야』뿐이랴. 그렇게 생각하면, 이 책을 발판으로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통과하는 고전 읽기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질문을 기획하는 데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도 있겠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저자가 다루고 있는 책은 고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2년 전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줌파 라히리의 소설, 거기다 아직 한국에는 출간되지 않은 다양한 저작들까지 망라한 저자의 독서 이력에서 부지런함과 기민함이 느껴진다. 그의 독서 리스트 중 내가 읽은 책은 거의 없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한 기민한 독서가의 독서 리스트를 공유할 수 있는 것에 나름의 기쁨을 느낀다.

 

  교수/학습 모형 중 ‘현시적 교수법’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발생하여 어떤 식으로 확산되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지극히도 낮은 해상도의 글로 표현하기에는” “내 머릿속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수많은 생각”이 “너무나도 애매모호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254). 글을 읽을 때 어떤 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의 머릿속으로 일일이 들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의 사고 과정을 입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 즉 ‘사고 구술’을 통해 배우는 사람에게 시범을 보이는 것이 현시적 교수법의 핵심이다. 이러한 교육학적(?) 시각에서 보자면, 이 책은 한 독서가의 사고 구술을 채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함께 홀로”(25) 있으니 생각은 혼자서 한다. 그러니 책을 읽고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참조할 수는 있겠지만, 전범(典範)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질문을 스스로 떠올리는 과정을 거치면 공동체의 질문 역시 단단해지고 정교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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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김현영,「질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린비, 2017, p. 34.

 

 

*본 서평은 출판사 서평이벤트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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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철학, 역사를 만나다 (개정증보판) - 세계사에서 포착한 철학의 명장면
안광복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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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 사상가들의 철학이 어떠한 역사적 흐름 안에서 형성되고 발전했는지를 조망한다. 철학은 당대와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당대의 시대적 요구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철학 사조의 맥락을 파악하기에 좋으나, 보다 깊은 철학적 질문은 다음 단계의 독서를 통해 보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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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위대한 여성 과학자들 - 살림지식총서 389 살림지식총서 389
송성수 지음 / 살림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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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알려졌다고 해서 덜 위대한 것은 아니다. 배제와 차별을 극복하고 과학사에 인상적인 족적을 남긴 여성 과학자들은 남성 과학자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이미 그 자체로 충분히 위대하다. 책에 소개된 일곱 명의 여성 과학자는 주류 역사와 과학사에서 겨우 드러난 일부분,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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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우리 음식의 언어 - 국어학자가 차려낸 밥상 인문학 음식의 언어
한성우 지음 / 어크로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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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먹고 마시는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언어학적으로 톺아보았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 생활의 흔적이 음식과 관련된 말에 어떻게 남았는지를 기록한 엑스선 정지 사진으로 볼 수 있겠다. 입말에 대한 저자의 태도가 유연하여 편견을 주입하지 않고, 문장도 수월하게 읽힌다. 소화가 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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