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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종말은 투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위래 외 지음 / 황금가지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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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황금가지 출판사의 서평단 이벤트에 당첨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하였습니다.


11월에 반소매 셔츠를 입을 정도로 덥다니. 이렇게 마음속으로 놀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한파특보라니. 기후위기를 더 자주, 더 강렬하게 체감하는 만큼 종말을 상상하는 빈도도 잦아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본인의 상상만큼 종말을 진심으로 믿지는 않는 것 같다. 마치 내 살아 있는 동안 종말이 오기야 하겠어?’라는 식으로. 마치 태어날 때부터 죽을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처럼.


부정해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대로라면 인류 모두가 종말 코앞까지 가게 될 수도 있는데, 진짜 종말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나는,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거대한 운명 앞에서의 선택이라는 주제는 이미 많은 영화에서 채택되었을 만큼 서사적으로 매혹적인 아이디어지만, 영화를 안 보는 나같은 사람은 책이나 보다가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인류의 종말은 투표로 결정되었습니다는 인류 종말을 주제(테마)로 한 여섯 편의 단편 기획선이다. 사람도 저마다 삶을 꾸리는 방식이 제각각이듯 여섯 편의 단편에 묘사된 종말의 원인도, 종말을 맞이하는 태도도 제각각이다. 이 인간적인 서사의 태도들이 마음에 든다.

 


죽이는 것이 더 낫다에 묘사되는 종말은 운석이나 외계인 같은 외부 요인의 개입 없이 인류의 일부 개체가 종말을 직접 결정했다는 점에서 스스로 불러온 재앙(스불재)’의 표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살해주의’, 그러니까 사람을 죽이는 게 결과적으로 이득이다라는 사상이 책을 매개로 전파된다. 사상에 도취된 사람은 시간이 지날수록 많아진다. “워킹 데드와 같이 미디어에 표현된 좀비의 변형된 버전인 셈이다. 사상의 디테일은 생략되어 있는데(이를테면 ’, ‘어떤 측면에서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나은지) 단편의 분량과 서사의 전개를 고려하면 탁월한 전략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무에 가려 숲을 못 보면 안 되니까, 그렇게 망했다는 것이 요점이니까.


서평단 이벤트 공지를 통해 책 제목을 처음 접하고 솔직히 떠올린 생각은 시대정신이 투표만능주의라 미디어에서도 살인 투표니 오디션이니 하더니만 이제는 종말까지 투표로 정하네였다. 그런데 투표로 정해지는 인류 종말의 아이디어가 담긴 표제작(이라면 표제작) 침착한 종말을 읽다 보면 시종일관 느껴지는 분위기가 제목의 어그로와는 딴판이라 일종의 배신감(?)마저 든다. 미래 사회에는 일주일에 고작 2, 그것도 8시간 미만을 일하고 여유 시간에는 각자 보내고 싶었던 시간을 보낸다. 예전 유행했던 슬로건처럼 저녁이 있는 삶을 마음껏 누리는 셈이다. 대신 그 저녁의 끝에는 종말이 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한 번 경험하면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나는. 아마도 인류 종말이라는 전 지구적 이벤트 앞에서 우리의 현실은 작품에서 묘사된 것만큼 다소 우왕좌왕하며 나아가지 않을까.


종말은 인류라는 종()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이벤트다. 적용 범위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존재의 끝이라는 차원에서 죽음은 종에 속한 개체가 맞이하는 개별적인 종말이다. 캐시는 종말의 스펙트럼이 개인을 접점으로 교차할 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을 숙고하게끔 한다. 불행을 예견하여 피하도록 한 것과 비극을 포함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결과론적으로 같은 사실을 공유하는 동전의 양면이다.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무거운 분위기이지만, ‘종말이라는 사태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를 상기한다면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주인공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네필()의 마지막 하루에서도 종말의 직전까지 삶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이어진다. ‘시네필스러운농담이 유쾌한 분위기로 군데군데 깔려 있는데, 덕분에 진성 시네필이 아니라 작품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패러디된 영화 원작의 결을 알아차리지 못한 내 입장에서도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트위터(현재 ‘X’라고 불리는)를 하는 시네필이라면 작품 곳곳에 포진한 은유와 패러디, 농담을 만끽하며 마음껏 즐길 수 있으리라 본다. 물론 시네필이 아니어도 괜찮다.


멸망을 향하여는 게임 마니아(그냥 겜덕이라 쓸게요)라면 한 번쯤 해 보았을 법한 상상을 기반으로 한다. ‘만약 지금 내가 하는 게임이 서비스 종료를 한다면, 게임 속 캐릭터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소설의 무대는 서비스 종료를 앞둔 게임 속 세계이며, 소설은 비인기캐의 관점에서 세계가 어떻게 닫히는지를 종말전후로 드러내 보인다. 파국은 예정되어 있고 그 경로를 틀어버릴 수는 없다는 점에서 게임 속 캐릭터와 사람은 닮았다. 어쩌면 유한한 운명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게임의 세계를 창조하고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위바위보 세이브 어스는 제목 그대로 가위바위보가 인류 종말을 앞에 두고 지구를 구하는 문제로 격상하게 된 이야기다. 가위바위보에서만큼은 100%의 절대적인 승률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에는 이렇다 할 것 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영웅이 되는지, 어떤 방식으로 영웅의 성장 서사를 수용하고 또 어떤 식으로 비껴가는지를 다루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주제가 주제인지라 책을 덮고 나면 자연스럽게 숙연해진다. 아무래도 개체로서의 내가 맞이할 끝도 생각하게 되니까. 내 예정에 없는 삶을 간접적으로 겪어 보는 것이 독서가 가져다주는 효용 중 하나라면, 이 책의 수록작을 읽으며 예정된 에 대해 미루어서 체험하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니 나는 가치 있는 시간을 보냈다고 이야기해도 되겠다.

 


p.s. 별을 한 개 뺀 이유는 한눈에 보기에도 심각하다 싶은 초반부의 오탈자 때문이다. (2쇄에는 고쳐졌으리라 생각합니다. [갑자기 존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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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공녀 강주룡 - 제2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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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들어보는 이름은 아니다. 대통령이 광복절 축사에서 그 이름을 언급했기에 그런 것은 더욱 아니다. 공무원 시험에 잠깐 관심을 두었을 때, 한국사능력검정시험과 공무원 시험 한국사 과목에 각각 한두 번 언급되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시험에서 여러 번이 아닌, 한두 번 언급되는 인물이나 사건이라는 것은 곧 수험생들에게 생소한, 잘 모르는, 그래서 앞으로는 굳이 알 필요 없는, 딱 그 정도의 의미로만 기억된다. 시험과목으로서의 역사는 그러한 면에서 보면 편리한 측면도 있다. 사가들이 ‘객관적’으로 정리한 ‘팩트’만 외우면 되니까. 내 삶을 굳이 당대에 추구했던 가치에 이입하지 않아도 되니까. 여성인권에 하등 관심이 없어도 ‘식민지 조선 최대의 여성운동단체는 근우회’라는 것을 알 수는 있다.

  앎과 삶의 간극은 일부 수험생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님이 언급하셨으니까, 이전에 알려져 있지 않던 여성독립운동가에게 손수 축사로써 조명해 주신(심지어 그는 축사가 있기 십 년 전에 훈장을 받았는데도 말이다!) 이 ‘역시 대통령 은덕亦君恩’이샸다, 하고 편히 주워섬길 수 있는 일부의 사람들. 달을 가리키니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열심히 보는 사람들에게도 역사는 현재와 만날 일이 없는 과거의 장식품일 뿐이다.

 

 

  을밀대상의 체공녀, 여류 투사 강주룡 회견기? 제목 한번 걸작이다. (239)

 

 

  나라고 해서 그들, 그러니까 아는 것 따로, 사는 것 따로 하는 이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소설 제목을 처음 접하고 한 번, 그리고 줄거리를 접하고 또 한 번, 나는 어느새 반듯한 차림의 평가자가 되어 소설의 책을 잡았다. 읽지도 않은 소설을.

  지금이 어느 때인데 ‘○○녀’ 같은 비하적 호칭을 제목에 버젓이 붙이는가. 그런데 줄거리는 여성 독립 운동가이자 노동 운동가의 삶을 전기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니, 이건 또 시류에 적당히 편승하고자 하는 ‘속 보이는’ 내러티브 아닌가. 뭐 이런 식으로.

  그렇게 시작한 독서는 이내 패배의 독서로 결론지어졌다. 나의 전근대적 무의식이 패배한 독서.

  어쩌면 나도 모르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고공 농성자니까, 나와 같이 세상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을 매양 달고 살지는 않겠지, 두려움이 잠시 스쳤더라도 초인과 같이 이겨냈겠지, 하고 쉽게 상정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 속의 강주룡은 충분히 사랑했다. 그의 남편을, 남편의 일을, 평원고무공장의 동료들을, 정나기, 혹은 정달헌을. 사랑이 있었기에 연대할 수 있었고, 그보다 앞서 그 주위의 사람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두려워하고 망설였으며 불안해했다.

  소설을 읽으며 그의 삶에 전적으로 공명하기 위해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내가 지닌 삶의 흔적 몇 조각이 소설을 읽다 보면 문장의 모습으로 고요히 앉아 있다.

  강주룡은 ‘체공녀’이기도 하지만, ‘체공녀’만은 아니다. (힌트: ‘체공녀 강주룡’의 ‘체공녀’는 ‘미스 함무라비’의 ‘미스’와 작품 속 맥락이 비슷하다.) 강주룡은 조선 최초의 고공농성자, 여성 노동운동가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이지만, 역시 그뿐만은 아니다. 강주룡은 강주룡일 따름이다. 이 소설이 그것을 내게 알게 해 주었다.

 

 


*〈체공녀 강주룡〉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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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8-30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동 거신다 아싸 과도기님 시동 거신다 ㅎㅎㅎ^-^

인간의과도기 2018-08-31 06:27   좋아요 0 | URL
ㅎㅎ 간만에 쓴 글이라 그런지 품이 좀 떨어져 보여 면구합니다. 간간이 소식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
 
詩누이
싱고 지음 / 창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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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시인이 되고 싶어서 시를 많이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이 되려면(=등단을 하려면) 시를 ‘잘’ 써야 하는데, 잘 쓰려면 우선 시를 많이 읽어야 한다는 조언을 여러 경로로 접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을 기점으로 시 읽기에서 손을 떼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은연중에 생각했었다. 앞 문장을 ‘생각했었다’라고 끝맺은 이유는, 생각만 야심차게 하고 생각만큼 많이 읽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집에는 사 두고 읽지 않은 시집만 많다. 어쨌든.

  ‘시인 되기’에 대한 미련이야 아직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보다, 그러니까 남들보다 시를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던 시절보다는 확실히 시를 덜 보는 요즘이다. 그렇다고 시에 대한 감각이 아예 제로베이스로 돌아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생활이 목표하는 바가 단순해지다 보니 단순한 사고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시 읽기가 그 경향에 맞지 않는다고 설명하는 것이 낫겠다.

  그러니까, 예전에 시를 조금 읽긴 읽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시와 거리를 두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는 초심자를 위한 시‘선’집도, 눈 밝은 시 마니아를 위한 시집이나 시 ‘전’집도 애매하기만 하다. 초심자와 마니아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는 나 같은 독자에게 다시 시 읽기의 즐거움을 매개해 줄 책이-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없었다.

 

  『詩누이』의 저자는 시인이다. 시인은 아무래도 시와 친연한 사람. 시를 보는 안목이 빤하지는 않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시와 너무 친연하고 익숙한 나머지 시가 막연히 어렵고 낯선 사람들에게 어떤 고난이도의 ‘과제’를 던져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가질 수 있다(“어때요. 참 쉽죠?”). 시의 목록을 찬찬히 보았다. 앞의 기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과 뒤의 우려가 현실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낌적으로’ 느낄 수 있다.

  ‘느낌적으로’라는 말은 중요하다. 학교에서는 언어와 사물이 일대일로 대응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사람의 감정과 사람의 일, 세계에서 목격하는 사물과 현상들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언어를 현실에서 단박에 찾아본 일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원래 세계는 복잡하다. 그리고 우리는 늘 그 복잡함에 어울리는 언어를 찾지 못해 주저하기 마련이다. 그저 ‘느낌’으로 우리 주위의 감정과 일과 사물과 현상을 파악할 뿐이다. 그 주저하는 가운데, 언어의 첨단을 탐색하는 시도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詩)다. 그래서 시의 언어는 ‘느낌적’이다. 어떠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詩누이』의 그림은 시의 이러한 ‘느낌적’인 성격과 어울린다. 시와 최소한의 연결 고리를 가지고 풀어가는 에피소드도 있고, 시의 구절을 이미지화한 에피소드도 있고, 시의 이미지를 고유한 서사로 변주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이들 그림-이야기는 시의 해석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중고등학생 시절에 받았던 시 교육을 생각해 볼 때 시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가 그림 안에 숨어 있을 것도 같지만, 그런 것 없다. 이 포근한 만화는 우리로 하여금 시를 더 잘 ‘느끼게끔’ 해 주는 역할을 할 따름이다.

책 띠지에 있는 ‘토닥토닥’이라는 단어가 나로 하여금 이 책의 성격을 오해하게 할 뻔했다(띠지에 있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시로 ‘마음의 온도’를 맞춰주는 싱고의 ‘토닥토닥’ 웹툰 에세이). 그러니까, 섣불리 자신과 독자를 위로하려 하는, ‘힐링’ 계열의 책으로 잠깐 생각했었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생각이 짧았다. 시는 아무 것도 단정하지 않는다. 앞서 나는 이 책의 그림(자꾸 그림이라고 부르게 되는데, 저자님께 양해를!)이 시의 성격과 어울린다고 했는데, 단일한 해석을 내리거나 섣부른 답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책의 그림과 시는 닮아 있다. 그러므로 또한 어울린다.

  “이 책에서 봤던 시와 그림이 떠오른다면, 그것대로 보람”일 것이라는 저자는 마음껏 보람을 느껴도 좋을 것 같다. 나만 하더라도, 이 책의 그림에서 보았던 차분한 유머에 피식거렸던 순간, 시와 그림의 절묘한 컬래버레이션에 나지막이 감탄을 내뱉던 순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책의 유일한 결점(?)이라면, 제목이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어떠한 ‘느낌’. 짐작건대, 대다수의 기혼 여성들에게 ‘시’자가 앞에 붙은 존재들은 마냥 편한 느낌을 가져다주지는 않을 것이다. 시어머니, 시아버지, 시댁, 시누이 등등……. 부디 그러한 ‘느낌’ 때문에 이 책이 일부 독자들에게 부수적인 외면을 당하는 것은 아닌지, 객쩍은 생각을 해 본다. 이런 시누이라면, 시를 즐거이 나눌 수 있는 누이-언니라면 나로서는 언제나 환영이다.

 

ps. 글의 제목은 블리자드 사의 게임 ‘오버워치(Overwatch)’ 등장 영웅 중 한 명인 트레이서(Tracer)의 대사("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이야!")를 변용했다.

 

 


 

*본 서평은 ‘<詩누이> 사전 서평단’ 활동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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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6-1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내용이 쉬울수록 좋아요. 그런데 내용이 쉬운 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아마추어 시인이 쓴 시가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천대받습니다. 표현이 어설퍼도 시를 읽을 때 좋은 느낌을 가졌다면, 그것도 ‘좋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의과도기 2017-06-19 23:56   좋아요 1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읽는 사람에게 좋은 느낌을 주는 시는 좋은 시입니다. 몇몇 지하철 시나 SNS에서 공유되는 창작 시 같은 것들에서, 감정이 절묘하게 포착된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쉬운 시를 무시하는 경향은, 아무래도 중등학교에서 시를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문학 갈래‘라고 전제한 후 시 교육을 한 것에 따른 부작용 같습니다.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오는 자신의 느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읽지 않고 ‘여기 뭔가가 더 있을 거야‘라고 의심하고 고민하다 보니 결국에는 시 읽기를 포기해 버리는 거지요. 우리가 언제부터인지 잃어버린 ‘느낌적인 시 읽기‘에 이 책이 기여할 수 있는 바가 있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귀한 댓글 감사합니다. :)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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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창의성을 길러주지 못하는, 틀에 박힌 교육’. 한국의 제도권 중등 교육에 붙은 가장 흔한 비판 중 하나다. 교육 문제에 있어 일종의 내부자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 교육에 대한 이 비판은 일반적인 만큼 무성의한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가 진정으로 개성과 창의성을 반기기는 하던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은 아직도 한국 사회의 암묵지이며, 창의성과 열정은 정부와 기업이 국민과 직원을 보다 효율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전유한 지 오래다. 그러나 개성과 창의성이 기발한 질문과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처음에 언급한 ‘틀에 박힌 한국 교육’이라는 언설은 결국 질문이 사라진 교육 현장, 질문의 실종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육의 현실을 지적하는 것일 테다.

 

  책 제목은 참으로 정직하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라니. 의문문의 형식이지만 사실 무엇이 정말로 궁금하여 묻는 문장이 아니다. 이 문장에는 이미 ‘인간은 어떠한 대상에 대해-그 대상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질문을 던져야 한다’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다. 해답보다는 질문이다. 해답을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닌, “본래의 질문을 정확히 파악”(97)하고 추구하는 일부터 선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제목에서 방점을 찾는다면 ‘질문’이 아닌 ‘어떻게’일 것이다. 답이 정해진 질문, 질문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질문이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까운’1) 질문, 하나마나한 질문 등의 ‘유사 질문’은 질문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텅 빈 말의 형식일 뿐이다.

 

  저자는 질문의 단초를 고전에서 찾았다. 너무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사실 고전을 시대적, 역사적 상황에 맞게 재해석한 ‘2차 고전’은, 과장 조금 보태자면 고전의 수만큼 나왔을 것이니 그러한 생각이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책은 고전의 재해석에 관심이 없다. ‘재해석’이라는 개념 자체가 질문보다는 대답의 성격이 강하다. 저자는 자신의 고전 감상에 굳이 불필요한 무게를 싣지 않는다. 그저 한 명의 책 읽는 사람으로서 고전을 통과하고, 그 접점에서 발생한 생각의 실마리들. 그 실마리들을 저자는 잠시 붙들었다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다시 날려 보낸다. 또 다른 생각과 질문의 확산을 위해서. “영원히 반복해서 읽을 수 있으면서도 똑같이 두 번은 읽을 수 없는 책”(271)이 비단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긴의 경야』뿐이랴. 그렇게 생각하면, 이 책을 발판으로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통과하는 고전 읽기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질문을 기획하는 데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도 있겠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저자가 다루고 있는 책은 고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2년 전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줌파 라히리의 소설, 거기다 아직 한국에는 출간되지 않은 다양한 저작들까지 망라한 저자의 독서 이력에서 부지런함과 기민함이 느껴진다. 그의 독서 리스트 중 내가 읽은 책은 거의 없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한 기민한 독서가의 독서 리스트를 공유할 수 있는 것에 나름의 기쁨을 느낀다.

 

  교수/학습 모형 중 ‘현시적 교수법’이라는 것이 있다.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발생하여 어떤 식으로 확산되는지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지극히도 낮은 해상도의 글로 표현하기에는” “내 머릿속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수많은 생각”이 “너무나도 애매모호하고 복잡”하기 때문이다(254). 글을 읽을 때 어떤 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의 머릿속으로 일일이 들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이 먼저 자신의 사고 과정을 입으로 풀어 설명하는 것, 즉 ‘사고 구술’을 통해 배우는 사람에게 시범을 보이는 것이 현시적 교수법의 핵심이다. 이러한 교육학적(?) 시각에서 보자면, 이 책은 한 독서가의 사고 구술을 채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함께 홀로”(25) 있으니 생각은 혼자서 한다. 그러니 책을 읽고 생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참조할 수는 있겠지만, 전범(典範)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질문을 스스로 떠올리는 과정을 거치면 공동체의 질문 역시 단단해지고 정교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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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김현영,「질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페미니스트 모먼트』, 그린비, 2017, p. 34.

 

 

*본 서평은 출판사 서평이벤트로 도서를 제공받고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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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선생님 9
다케토미 겐지 지음, 안은별 옮김 / 세미콜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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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 서평은 출판사의 서평단 이벤트에 따라 출판사로부터 『스즈키 선생님』 9~11권을 제공받아 쓴 것입니다.

 

 

  학교와 사회는 공통점이 많다. 그렇기에 학교는 종종 사회라는 추상명사를 대신해서 호명되는 하나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가령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라는 명제에서처럼.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교 구성원을 온전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성 세계의 시각에서 출발한 수사일 뿐, 학교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사회다. 다시 말하자면, 학교 문제는 곧 하나의 사회 문제이며, 학교로부터 출발한 문제의식은 현재 학교에 속하지 않은 사회 구성원들도 깊게 숙려해야 할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스즈키 선생님』 9~11권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사건은 세 가지이다. 학생회 선거 출마자들의 연설회, 문화제를 앞두고 이루어지는 스즈키 선생님과 2-A반의 연극 지도 및 연습, 문화제 직전에 발생한 ‘공개 강간 예고’ 사건. 여느 학교에서 경험할 수 있을 법한 일과 일상에서 차마 상상으로라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 혼재되어 있지만 이 사건들의 기저에는 독자들이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의식들이 물음표를 드리우고 있다. 작가는 학생회장 후보로 출마한 니시의 입을 빌려서 ‘현대 대의민주주의 제도(시스템) 자체의 정당성/제도 하에서의 한 표가 지니는 가치’를 따져 묻고, 스즈키 선생님과 오타의 갈등을 통해서는 ‘격려와 위로의 딜레마’를 제기하며, ‘공개 강간 예고’ 사건 이후의 일들을 묘사하며 ‘사회의 변화 가능성’을 재고한다. 이 문제와 고민들이, 과연 학교에서만 발생하는가?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들의 사회’로 나아가면 모든 문제는 개인의 고민과 노력 없이도 저절로 해결이 되는가?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 세상을 살아가는 성원 모두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이 호의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더 많은, 유효한 질문들이 필요하다. 『스즈키 선생님』을 읽으면서, 우리는 더 많은 질문에 답할 힘을 얻게 된다.

  『스즈키 선생님』 완독자로서의 나는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스즈키 선생님』을 읽는 경험은 분명 가볍지 않을 것이다. 만화이지만 결코 오락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느 지점부터는 만화를 읽는다는 느낌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스즈키 선생님』은 성가시고 복잡하게 여겨지는 질문을 자주 건넬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들을 귀찮아하지 않고 내면화하여 스스로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성장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스즈키 선생님』의 마지막 권을 덮으며 독자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다는 아니더라도, 나의 이야기였어, 라고.

  개인의 내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성장이 왜 필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성장은 개인의 안위를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성장한 사람들이 많아질 때, 그 사람들이 손을 잡을 때, 비로소 사회는, 세상은 바뀔 수 있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학교 사회를 한정지어 이야기해 본다면, 지금도 분명 문제는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 모두에 산적해 있지만, 과거보다는 나아졌다. 적어도 현재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촌지와 체벌, 차별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과거보다 나아졌으니 현재에 만족하라’는 것이 아니다. 당연한 것처럼 여겼지만 실은 그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임을 인식하고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확산될 때, 그리고 그 열망이 변화를 꿈꾸는 행동에 힘을 더할 때에만 사회는 과거의 문제를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스즈키 선생님』을 읽는 나의 경험은 복잡다단했다. 때로는 스즈키 선생님의 견해에 동조하고 때로는 길항하며 많은 것을 고민했지만 답이 명쾌하게 나오지 않은 영역이 많다. 그러나 흔들리고 고민하는 상태 그 자체가 성장의 가도 위에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지금 겪지 않는, 감히 상상되지도 않는 시련 앞에 서게 될 때, 『스즈키 선생님』을 처음부터 다시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의 역할을 충실히 ‘연기’하기 위해, 그리하여 더 나은 학교와 세상에서 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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