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닷새는 모처럼 연휴의 이름값에 걸맞은 기간이라고 생각한 내가 어리석었다. 닷새를 쉬어도 또 닷새를 더 쉬고 싶다.

    

 

이번 추석 연휴는 유독 제발 어디 내려가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고 정부 차원에서 권하니, 원래도 어디 내려가고 하지 않았던 나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라는 명분까지 얻어 정말로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연휴 전야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최소한의 생활(, 식사, 화장실) 이외에는 이것저것 잡히는 대로 종이책이며 전자책이며 읽었다. 그야말로 꿈의 연휴였다. 잠깐, 꿈이라고?

    

 

응 꿈이야.

    

 

그렇지, 배우자와 아이가 있으면 아무도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나의 휴식을 위해 다른 사람의 수고가 더해질 수는 없다. ‘제사를 위해 내려간 일이 없는 것도 맞고 연휴 기간 동안 책을 평소보다 더 읽은 것도 맞지만 연휴에 주로 한 것은 바깥바람 쐬기(동네 산책)와 집안일이었다. 다른 때의 주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고로 제목에서 아무 걱정 없이낚시. 죄송.

    

 

이웃 분들의 연휴 독서 기록을 보고 닷새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애매한 재야 고수’(김영민)라는 표현도 있지만, 내 독서의 양질을 견주어 보면 나는 애매한 고수도 아니고 그저 명확한 먼지 1일 따름이다. 다음은 먼지의 기록.

    

 

연휴 전 주(9.21.~9.27.)에는 지역 도서관에 대출예약을 한 세 권을 무사히 빌리는 데 성공했다. 그 중 한 권은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2! (원제 品三國 下) 전자책으로도 나와 있다면 조금 더 좋을 텐데 생각했다가, 대출한 종이책 실물을 보고 생각을 바로 거두었다. 이 정도 두께의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옮기면 몇 날 며칠을 스마트폰 화면 들여다보느라 눈 나빠지겠구나... 차라리 다행이다. 뭐 이런 심정.

 

여튼 대출한 그 날부터인지 그 다음날부터인지 읽기 시작해서 3분의 1 지점 즈음까지 읽었다. 여전히 설득력 있는 논증으로 가득한 글이라 읽는 데 행복했으나 중간에, 그러니까 연휴의 시작과 함께 샛길로 빠지는 통에 진도가 예상보다 더디었다. 다음은 샛길의 목록.

    

 

신라 공주 해적전은 곽재식의 근작인 경장편인데, 삼국지 강의의 영향으로 고문체(古文體)에 중독된 나의 갈망을 맞춤형으로 해소해 주었다.

 

결말에서 주인공의 심리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아 나는 나대로 그의 심리를 추측해 보았다가, 그런 일련의 추측들이 실은 기존의 영웅 서사들이 지닌 문제(도구화의 문제 등)를 반영하기 때문에 작가가 일부러나타내지 않은 것은 아닌지, 하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다.

 

문장이 가-끔 어색한 것을 제외한다면, 곽재식은 진정 21세기형 하이브리드 스토리텔러가 아닐까. (그러나 그가 글쓰기 책에서도 이야기했듯 완전무결한 글을 쓰느라 마감이 늦는 작가보다 마감에 맞추어 평균적인 글을 써 내는 작가가 독자에게 더욱 사랑받는다. 그는 의심할 바 없는, 21세기 한국에 맞춤한 작가다.)

 

 

이희호 선생의 자서전은 그의 서거 이후 전자책이 출간되었기에 서둘러 구입했으나 그때는 하루 이틀 안에 읽기는 어려워 보여 제쳐 두었었다. 무려 나흘이라는(이미 하루 줄었다) 시간이 주어졌으니 한 번 읽는 데까지 읽어 보자는 심산으로 첫 페이지를 열었고, 연휴가 끝나기 한 시간 전에 다 읽었다.

 

책에는 간략하게 표현된 한 구절 한 구절에 얼마나 많은 인고의 시간과 번민, 고통이 담겼을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상상조차 어렵다. 그렇기에 절반의 반가움 한편으로 절반의 아쉬움도 느끼는 사치를 독자로서 누리는 것이겠지. (절반의 아쉬움에는 이희호 선생에 대한 것도,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선택했던 정치적 타협의 과정에 대한 것도 있다.)

 

다음과 같은 대목에서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동등한 인격체로 인정받으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세상의 실현을 평생 염원했던 이희호 선생의 지향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던 것이 이번 독서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전문직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영부인이 된 힐러리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힘이 느껴졌다. 그는 클린턴에 결코 뒤지지 않는 실력과 젊음을 겸비한 여성이다. (...) 이 같은 친분 관계를 떠나서 유능한 여성이 지구상에서 가장 힘센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날을 나는 손꼽아 기다린다. 여성이라는 상징성만으로도 세계의 여성들, 특히 제3세계에서 자라나는 여자 아이들에게 여성의 가치와 힘을 자각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힐러리 대통령이 외국 원수들과 정상회담을 하는 동안 그 배우자인 클린턴이 국빈의 배우자와 차를 마시면서 가벼운 담소를 하는 광경을 상상하면 무척 통쾌하고 한없이 즐겁다. 그는 평소의 풍부한 유머 감각으로 내조 외교도 천연덕스럽게 잘할 것이다. 지금까지 수동적이었던 배우자의 역할과 외교를 새로운 차원으로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유쾌한 상상인가. 이 상상이 언젠가는 현실이 되면 좋겠다.

-동교동으로 돌아와서

 

 

 연휴를 하루 이틀 까먹다 정신 차려 보니 전자책 캐시 두 배 마일리지를 받을 수 있는 기간(매월 1~3)이 지났다. 어제는 기간이 지난 것을 알고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으나(‘한 달을 어떻게 기다려!’), 오늘은 평소 완전 도서정가제의 취지에 동감한다면서 두 배 마일리지 적립에 불을 켜고 있는 것이 왠지 이율배반적으로 보인다고 메타적 성찰을 했다. 관심 분야의 신간은 나오는 대로 사서 읽지 않으면-최소한 사지 않으면- 논의에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는데, 한 달쯤 늦는다고 아주 많이 뒤처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이번 달 독서목록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과 사 놨지만 안 읽었던 책으로 채워야겠다. (과연 계획대로 될지는...?)

    

 

일단은 잠을 자자. 그래도 이번 주는 나흘 출근하면 쉬는 날이라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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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0-05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먼지 1 아닌데요, 인간의과도기 님!
저는 연휴 마지막이라는 것 때문인지 어제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이번주는 나흘 출근이라는 것으로 다시 힘을 내야겠네요.

인간의과도기 2020-10-05 08:39   좋아요 0 | URL
새벽감성 덕(?)에 무의식적으로 자기연민에 빠졌었나 봅니다. 다락방 님 응원 감사합니다!
연휴 뒤의 출근 첫 날은 유독 적응하기 어려운 것 같아요. 나흘만 같이 버텨 보아요! 이번주도 힘!

라로 2020-10-1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 먼지 1 아닌데요, 인간의과도기 님! 2
연휴 덕분에 님의 글을 읽게 된 것 같아 반가와요!!^^;;
암튼 덕분에 새로운 정보도 알게 되었는데 그게 알라딘 애기 인가요? ˝전자책 캐시 두 배 마일리지를 받을 수 있는 기간(매월 1일~3일)˝? 저는 늘 1000월의 적립금이 들어오던데 그걸 몇 일 안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금방 없어지더라구요. 그건 뭔가요?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일인,,,제가 먼지인듯)

인간의과도기 2020-10-10 20:3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라로 님. 시간 내어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제가 얘기한 건 알라딘에서 전자책을 살 때 쓰는 전자책 캐시였어요. 전자책 캐시를 충전해 놓으면 충전금액의 5%만큼을 마일리지로 적립할 수 있는데, 매월 1~3일에는 마일리지 적립율이 두 배(10%)가 됩니다. 예를 들어, 해당 기간에 10만원을 전자책 캐시로 충전하면 10000원의 마일리지가 적립이 됩니다.
라로 님께서 말씀하신 적립금은 일종의 기한부 적립금으로 이벤트나 알림 등으로 잠깐 생겼다 쓰지 않으면 없어지지요. 전자책 캐시로 발생하는 마일리지와는 다른 것으로 이해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라로 2020-10-11 07:24   좋아요 0 | URL
설명 감사합니당! 그런데 설명을 듣고 보니 저와는 상관이 없는 얘기네요. 흑 해외 카드로는 전자 캐시가 안 된다고 하네요. 그것이 되면 좀 더 할인을 많이 받을테니 책을 더 많이 사겠죠? 어쩌면 잘 된 일일까요??ㅎㅎㅎㅎ

인간의과도기 2020-10-13 19:20   좋아요 0 | URL
아, 전자책 캐시가 해외에서 적용이 안 된다는 것은 저도 댓글을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ㅜㅜ 저는 손에 책 살 돈이 있으면 그만큼 더 사게 되지만, 더 사지 않으면 주위에 있는 책을 더 유심히 보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되어 어느 쪽이든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
 

 

 

 

 

 

 

 

 

 

지지난주 중에는 장강명의 소설을 마저 읽었다. 배경이 북한이라는 것을 빼면 무엇이 이 소설의 특기할 만한 장점인지, 이런 킬링 타임용 소설에 특기할 만한 장점을 바라는 것이 과한 기대인 건지 등 내면에서 여러 질문이 일어났으나 책을 덮고 나니 곧 잠잠해졌다.

 

 

장강명의 신작 알림이 떠서 이번엔 어떤 소설을 썼나 했더니 독서 에세이다. 그래도 미운 정이라고 장강명의 신작 알림을 차마 해제하지는 않아서 알림이 오면 한 번 쳐다는 보는데, 이번에는 내가 수많은 분야들 중 그나마 자주 쳐다보는 독서 에세이라니. 어쩌면 단 한 번뿐일 교집합일지도 모르겠구나 싶어 하마터면 바로구매를 누를 뻔했다. ‘바로구매를 실행하지 않은 것은 간만에 자제력이 발휘되어서라기보다는 책 소개 페이지에 있는 인용구 하나(‘정치적 올바름어쩌구 운운하는)를 보고 약간 울화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닌 글을 쓰는 장강명은 교묘하게 삼천포로 빠지는 일을 잘 하는구나. 물론 인용구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우니 전후 맥락을 읽으려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는 해야 할 텐데, 싫어하는 주장의 확인을 위해 내 돈을 쓰는 것은 어쩐지 저어되었다. 내 돈 주고 사기는 싫은데 무슨 책인지 한 번 보기는 해야 할 때, 책을 어떤 방식으로는 제공받을 수 있는 쉽고 현실적인 방법은 없을까?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지만 이내 그런 방법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기에, 사인본도 놓쳤겠다, 지금은 그저 전자책 출간일이나 기다리고 있다.

드라마를 볼 때마다 건강이 나빠질 정도로 스트레스(또는 열)를 받지만 이내 다음 편을 기다리는 한국인의 얼(K-Soul)이 나에게도 있는 것일까?

 

    

 

지난 주말 중 하루를 잠까지 쫓아가며 플레저에 과몰입한 탓일까? 덕분에 이번 주는 내내 피곤을 달고 지냈고 심지어는 입술 위에 수포도 생겼다. 누가 보면 일이 많아 그런지 알겠다만. 플레저는 넷플릭스에 있는 중국판 삼국지드라마였다. 한 편당 평균 재생시간 40. 95.

 

왜 하필 삼국지를 봐야겠다고 의식의 흐름이 점프했을까? 다는 알지 못해도 어느 정도는 아는 이야기니까, 라는 막연한 생각도 점프의 시도에 한 몫 했으리라 본다. 그리고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정확히는 나의 상위인지meta-cognition)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막연하게 파악했다고밖에 여길 수 없었다.

 

15세 관람가인데, 모자이크 처리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잔인한 장면은 끊이지 않는가. 나는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영상을 못 본다. 그걸 회피형 방어기제라 부르든 뭐라 부르든, 못 보는 건 못 보는 거다. 문학 작품에도 잔인한 장면이 나오면 못 보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똑같은 내용이 영상으로 실감 나게’ ‘시청각적 감각으로다가오는 것보다는 낫다. 예를 들어 화웅의 기세에 부장들의 목이 일합에 달아났다를 문장으로 보는 것과, 목이 달아나기까지의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지켜보는 것과의 차이란…….

(우리의 소원은 전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격투 신이 만약 영상화되었다면? 나는 적어도 99%의 확률로 그 영상의 관객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삼국지니까 드라마는 재미있었으나 영상으로는 못 보겠다. 나중에야 다시 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플레저에 대한 갈망은 곧 다른 방향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삼국지 책을 보자!’ 그러나 이문열이나 황석영이 번역한 열 권짜리 소설 삼국지를 읽기 시작했다가는 한 4~5권쯤에서 중도 하산할 것이 빤히 보였다. 내 시간은 소중하고 주말은 더더욱 소중한데 그럴 수는 없다. ‘어쨌든 삼국지를 다룬 한 권짜리 책을 찾다 보니 이 책이 나왔다.

    

 

 

 

 

 

 

 

 

 이중톈의 저작은 처음이다. 삼국지 강의는 말 그대로 삼국시대에 대한 대중 강의를 책으로 묶은 것인데, ‘소설 삼국지(삼국연의)’가 아닌 삼국시대(의 주요 인물)’가 강의의 주제다. 1차 사료를 주 근거로 하되 삼국연의와 근대 역사가들의 견해 또한 다양하게 참고하는 방식이 꼼꼼해서 좋았는데, 사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기로 결정을 내리게 한 부분은 서두에 있었다

    

 

 우리들이 저 난세의 영웅들을 찬미하거나 좋아할 때, 그 당시 백성들이 받았던 고통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서문-"장강은 동으로 흐른다" 中)

 

 

이중톈의 실제 생각을 반영한 말인지, 아니면 그의 실제 생각과 상관없이 대중 강의의 특성상 체면치레를 위해한 말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전쟁 이야기를 대중적으로 다루는 이들에 대한 의심을 항상 가지고 있다. 전쟁의 승리를 가져다 줄 영웅전략’, 화려한 전술병기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이 전쟁이라는 비극의 원천을 한낱 이야깃거리로 만드는 땔감은 아닌지 하는 의심.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런 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어려운 시대일수록 영웅이나 초인과 같은 비범한 존재를 고대하는 집단 무의식은 힘을 키우지만, 그럴수록 영웅주의에 쉬이 빠지지 않는 태도(또는 결기)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여튼 일주일이 넘도록 꾸준히 읽어서 드디어 어제에야 다 읽었는데, 문제가 생겼다. 아주 조금의 여지도 남기지 않고 바로 다음 강으로 이어지는 질문을, 1권 마지막에서 던진 것이다. 다른 강의 말미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래서야 2권을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한자와 나오키는 각 권의 서사가 기승전결 구조를 독립적으로 갖추었다 보니, 3권까지 보았어도 4권은 나중에 보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한 강 한 강이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구조의 대계에서 나머지 절반의 흐름이 끊긴 시간이 오래 된다면 이 책은 안 본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책을 며칠 전에 사서 또 책을 살 수는 없고, 배우자에게 대출 신청을 부탁했다. (우리 지역 도서관은 무기한 휴관중이지만 내일부터 회원에 한해 최대 세 권까지 대출 신청을 하면 개별적으로 대출해갈 수 있게 해 준다고 한다.)

 

코로나 빨리 끝나라도서관 가고 싶다…….

    

 

 

 

 

 

 

 

이번 주말에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공개를 앞두고 복습 차원에서 보건교사 안은영특별판을 사서 만 하루 사이에 독파했다. 독서 기록을 찾아보니 5년 전에도 사흘 만에 후루룩 읽었다. 취준 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2회독을 하게 만들 정도로 나에게는 특별한 작품이지만 정작 나는 이 작품의 리뷰를 재미도 감동도 없게 쓴 전과가 있으니. 작품의 디테일에 대한 감상을 이 글에 옮기지 않고 넷플릭스 시리즈나 조용히 기다리는 게 충성 독자로서 다할 의무라 생각할 따름이다.

 

특별판에서 달라진 것은 표지 일러스트, 작가의 사인이 인쇄된 페이지, 20209월 시점에 쓰인 작가의 편지, 다섯 편의 추천사, 정도이다. 초판에는 안은영홍인표의 이름을 어디서 빌려 왔는지에 대해 작가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반해, 특별판에서는 초판 작가의 말을 앞서 언급한 작가의 편지로 갈음했다. 특별판으로 보건교사 안은영을 처음 접하는 분들은 참고하기를.

    

 

이 글에 담긴 기간은 약 2주다. 이 기간 동안에는 본문에 언급하지 않은, 그러나 중요한 통찰을 일깨워준 책을 한 권 더 읽었는데 글의 주제가 판이하게 달라질까 봐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책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쪼록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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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길티플레저를 일부러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소설집 한 권을 읽고 난 후 감상이 마치 삼단 논법처럼 연쇄 반응을 일으킨 결과였다. (특히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서) 윤리적, 미적 감각이 전반적으로 구리다’(전제1), 이런 식으로 PC한 감각을 포기할 거면 재미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재미가 있지도 않았다(전제2), 그러면 이 다음부터는 길티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최소한 플레저가 보장되는 작품이라도 찾자(결론).

 

한 사람이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평소에 주로 어떤 책을 읽으세요?’라는 질문을 들으면 사회과학 책, 아니면 한국사회 비평이나 시사 칼럼집 등입니다.’라고 답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읽어온 내게 순수한 오락적 의도만을 위한 독서평소에 안 하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유가 있다니까...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스트레스다. 하찮고 똑똑하지도 않은데 별로이기까지 한 그저 그런 인간이 되어 간다는 자기인식, 분명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적 요인, 어떠한 지적 활동(책읽기와 글쓰기, 비판적 사고와 자기 성찰 등)에도 에너지를 온전히 쏟기 힘든 상황, 비관적 자기인식의 심화.

 

한 사람이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려면 평소에 하던 일을 하려는 것보다 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단순한 플레저를 찾는 길은 실은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자갈길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지역 전자도서관에 들어가 소설로 분류되어 있는 7백 몇 십 권의 목록을 휙휙 넘겨보다, 그저 느낌이 오는 대로 책을 골랐다. 별도 예약자가 없어 바로 대출이 가능한지도 중요한 선정(?) 기준이었다. 지금 당장 읽을거리가 필요한데 예약이 수십 건씩 쌓인 베스트셀러는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고른 게 이 시리즈.

    

 

 

 

 

 

 

 

 

 

 

 

 

 

한자와 나오키는 두 명의 콤비인 한자나오키가 아니고, 시리즈의 주인공 이름이다. 성이 한자와, 이름이 나오키. 명문대를 나와 남들이 선망하는 은행에 입사했으나 이후의 인생이 출세가로를 달리기만 했다면 이 소설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터. 그의 입사 시점은 일본의 거품 경제에서 거품이 꺼질 즈음이었으니, ‘인생은 타이밍이라는 말을 떠올려보자면 그의 회사 인생은 시작부터 최악의 타이밍에 끼어든 셈이다. 다행히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는 시점은 한자와의 입사 후 10여 년 뒤로 그가 어느 정도 은행에서 자리를 잡은 때이나, 사건의 주도자이자 한자와의 적대자가 그의 상사라는 점은 결코 다행이 아니다.

 

이런 유의 추리 소설을 읽어 본 지도 상당히 오래인지라 책의 내용을 이야기할 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가능한 범위로 잡아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어차피 깊게 비평을 해야 할 부분이 많지는 않으므로, 혹시나 이렇게 재미없게 쓴 책 소개글을 보았음에도 내용이 궁금하다면 혹시 지역의 전자도서관에 책이 있는지 확인을 해 보시라고 권유하고 말 따름이다.

 

 

그렇게 지난 2주 동안 한자와 나오키시리즈를 3권까지 읽었다. 전자도서관에는 얄궂게도 3권까지만 있고 완결권에 해당하는 4권이 없어, 4권을 살지 말지 이틀 정도 고민했다. 그러다 다른 인터넷서점에서 패턴이 어느 정도 예측되어 빌런만 바뀌고 전개 구도는 유사하다는 취지의 평을 보고 4권 구입은 일단 보류쪽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분명 이런 평을 본 것 같은데 이 글을 쓰는 지금 찾아보니 또 없다. 뭐가 씌었던 것일까?) 나는 역시 귀가 얇고, 자기 주관이 희미하다. (내 주관을 굳이 덧붙인다면, 1, 2권에서는 꼬장꼬장 옳은 말만 했던 한자와 나오키가 3권 들어서 보이는 후배 세대와 엮이면서 보이는 약간 꼰대스러운 면모,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약간은 뜬금없이 튀어나온 것처럼 처리된 종반부가 4권 구입 보류의 여러 원인중 하나였다.)

 

전반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다. 추리 소설의 형식이지만 서사의 진행을 위해 쓸데없이 사람이 죽거나 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책 한 권 단위로 한자와가 해결해야 할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서술되어 있어,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다라서야 한자와의 다음 행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다는 점도 몰입도를 높였다. 그렇게 몰입하고 난 뒤에야 문득, 사람들이 이래서 옛날부터 권선징악의 스토리를 좋아했구나, 실감하기도 했다. 한국문학사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소설은 오래도록 주류 계층에 의해 잡문취급당했던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군담소설, 영웅소설 등이 기층 민중 사이에서 활발히 보급되어 널리 읽혔다.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만큼 선명한 판타지가 있을까? ‘좋은 놈은 상을 받고 나쁜 놈은 벌을 받는다는 원칙은 현실에서 항상 실현되지 않기에 판타지이며, 현실에서는 누가 좋은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 구분조차 애매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쉬이 허무주의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현실이 더러워도 언젠가는 판타지가 비슷하게나마 현실의 세계로 내려올 날을 꿈꾼다. 권선징악의 주제가 아무리 진부해도 현실을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당대의 권선징악 드라마를 찾아 읽는다. 나 역시 어느덧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권선징악 드라마는 반복해서 봐도 재미있다. ‘한자와 나오키드라마 시즌1 전편이 왓챠에 있다고 해 충동적으로 회원가입을 할 뻔했으나2주가 훌쩍 지나고 어느덧 유료구독의 열차에 나도 모르게 올라타 있을 것 같아(나라면 충분히 그러고 남는다) 회원가입 자체를 포기했다. 대신 오래 전에 읽다가 만 장강명의 소설을 집어 들어 어제오늘 60% 정도를 읽었다.

 

 

 

 

 

 

 

 

 

 

 

 

 

 

장강명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약간 (좋은 표현으로는) 변한 것 같아 3년 전에 그에 관한 글을 하나 쓰고는 굳이 더 찾아 읽지 않았는데, 어느덧 다시 제 발로 돌아와 읽고 있다. 이쯤 되면 장강명은 나에게 애증이 맞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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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7 0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07 08: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20-09-07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한자와 나오키 라는 책 제목을 보고 마법 천자문 같은, 한자 공부 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몇달전에 회사 동료가 소설이라고 재미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름이 한자와 나오키 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읽어볼까 싶네요. 그렇지만 네 권씩이나 된다니.... 흐음.....

인간의과도기 2020-09-07 08:36   좋아요 0 | URL
한국 한정으로 오해를 부르는 이름 한자와인 것입니다... ㅋㅋㅋ
주인공은 같지만 각 권마다 독립된 에피소드를 다루는 옴니버스 형식이라 우선 1권만 읽어보신 후 이후의 독서를 계속하실지 결정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공립 중등학교 교사 임용 후보자 선정 경쟁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 소위 ‘임용고시생’에게 새해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필기 전형인 1차 시험의 합격자 발표가 새해 연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정을 조금 당겨줘도 될 텐데, 그 얄궂은 일정은 변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못 붙은 사람이 패배자니 일정 정도의 문제는 사소하다는 건가. (임용시험 ‘바닥’을 떠난 지금 찾아보니 1차 합격 발표 일정을 연말로 당긴 모양이다. 수험생들에게는 다행일 따름이다.) 새해 벽두부터 오지랖 넓은 누군가로부터 ‘안녕? 너는 패배자란다. 올 한해도 한번 잘 해 보렴!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식의 인사를 듣는 기분이었으니, 자연스레 새해를 의식하지 않는 삶을 살게 되었다. 새해고 자시고 뭐가 된 다음에 시간을 구분하는 삶을 살든지 하자, 이런 마음가짐으로.

 

  그런데 막상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도 새해를 왜 굳이 구분하는가 하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회사 특성상 시간을 구분하는 일 자체가 매우 중요하므로, 일을 1인분만큼 하기 위해서는 시간의 구획에 익숙해져야 한다. 마치 예전부터 쭉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고 나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일을 일부러 못 해야겠다는 마음이 없으니,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의 단위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굴 것이다. 회사에서는.

 

  그러나 한 편으로는 ‘중간에 하루 쉬고 또 일 나가는데 새해라니, 너무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회사 다닌 지 1년이 채 안 되었는데, 나는 벌써 소진이 된 것인가.

 

 

  한 해를 마감하는 시점이 다가오고 나서야 마감을 주제로 글을 쓴다. 솔직한 이유를 들자면, 내가 이런 글(=블로그에 올리는 글) 쓰기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내 글쓰기 공모전에 낼 글은 적어도 ‘당선이 되면 최하 얼마이니 이건 마감을 무조건 지켜야 돼!’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비록 끝은 벼락치기의 형식을 띠었지만 어쨌든 마감을 지켜 응모를 할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좋은 결과를 거두긴 했으나, 글 잘 쓰는 사람이 천변 자갈 수보다도 많은 인터넷 세상에서 나는 그저 평균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일 뿐이라고, 글을 등록하기 위해 알라딘 서재에 들어오며 마음을 다잡는다.) 그러나 이 글을, 일과 가정의 균형을 다시 조정하면서까지 굳이 써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 초년생으로서 ‘워라밸’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읽고 쓸 시간과 체력은 늘 ‘엥꼬’ 상태였고, 읽은 것이 적어지니 자연스레 할 말과 쓸 글이 줄었다. 남에게 쉽게 드러내지 못할 생각만 늘었는데 그것을 굳이 글로 적어야겠다고 한다면 블로그가 아니어도 괜찮을 것이다. 마감의 중요성과 꾸준한 글쓰기의 필요는 곽재식 작가가 그의 글쓰기 책에서 훌륭히 강조한 바 있다. 이 책을 다 읽자마자 그의 다른 책을 얼른 찾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날 정도로 훌륭했다.

 

 

 

 

 

 

 

 

 

 

 

 

 

 

 

  아직까지 돈을 받고 글을 써서 넘기는 원고 청탁이나 계약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조차도 역시 마감은 중요하다. 그런 경우에도 언제까지 무슨 글을 쓴다거나 하루에 얼마만큼씩 글을 쓴다는 마감을 스스로 정해놓고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를 추천한다. (중략) 취미로 재미 삼아 틈틈이 일상이나 경험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면 어떤 주기로 최소한 어느 분량의 글을 쓰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마감을 어기는 것은 비극이다. 그렇게 마감까지 어기고 쓴 글이 과연 『안나 카레니나』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인가?

 

-「마감에 강한 작가 되기」 中, 중략 및 강조는 인용자  

 

  ‘마감 하루 전에 확 몰아서 쓰면 원고지 80장 충분히 다 쓰지, 뭐. 매일 원고지 15장 분량씩 써야 하지만 오늘은 피곤하니까 글 쓰지 말고 놀자. 대신에 미뤄놨다가 주말에 마음잡고 확 다 쓰면 되지. 전에는 하루에 150장 쓴 적도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지옥에 마감은 없다.

 

-「글 쓰는 데도 분위기가 중요하다」 中, 강조는 인용자

 

 

  사실은 자발적으로 마감 기한을 설정한 글이 하나 있었다. 한 출판사에서 ‘내가 시를 읽는 이유’에 대한 독자 투고 글을 올 연말까지 공모했는데, 결국 올해를 이틀 조금 넘게 남겨 둔 지금까지 쓰지 못했다. 사실 글을 썼더라도 그 글은 기만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몇 년 전에 비해 시를 현저하게 덜 읽는, 그리하여 거의 안 읽는 수준에 있는 지금의 내가 ‘왜 시를 읽는지’에 대한 글을 써서 대외적으로 ‘시 사랑꾼’의 인식을 얻는다니, 이것이야말로 ‘기만’이자 ‘모순’이다. 몇 년 전, 그러니까 대책 없는 문청 시절의 나였다면 누구보다도 ‘내가 시를 읽는 이유’에 대해 잘 쓸 수 있었을 텐데.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글을 못 쓴 데에는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지만, 이전에 시를 쓰던 경험을 생각해보건대 그런 식의 이유는 대면 댈수록 구차해진다. 그러므로 새해에는 차라리 두세 문장짜리 일기라도 매일, 안 되도 주기적으로 써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새해 목표’의 하나로 설정을 한다. ‘1번: 꾸준히 글쓰기’

(곽재식의 책에서도 블로그나 SNS 글쓰기를 꾸준히 쓴다는 측면에서 실험하기 좋은 글쓰기로 소개한다. 자세한 것은 「책 말고도 쓸 것은 많다」 편을 참조하시길.)

 

  글쓰기가 꾸준히 안 되었던 이유의 하나는 체력 문제도 있었다. 체력이 안 되니 배우자에게도 아이에게도 너그럽지 못했던 나날이 많았고, 회사에서는 조금의 일 가지고도 힘들고, 이런 상태에서 글쓰기는 그저 언감생심일 뿐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지속가능한 운동의 형태는 뭐가 있을지 생각하며 또 하나의 새해 목표를 세운다. ‘2번: 운동’

 

  새해와 작년의 구분 없이 살던 것과 별개로, ‘어차피 실현 안 될 계획 왜 세우나’ 식의 냉소를 쭉 마음 한편에 간직해 왔던 고로 여태껏 새해 목표 없이 잘 살아 왔다. 아이 태어나기 전에 금연한 것 빼고는 그랬는데, 이렇게 나로 하여금 새해 목표를 ‘자발적으로’ 세우게끔 하다니, 회사의 힘이란…….

 

 

  그렇게 평소에 나와는 거리가 멀었던 ‘새해 목표’를 하나둘씩 헤아려 보던 중에, 정희진 선생님의 칼럼을 ‘시의적절하게’ 보게 되었다. (칼럼 링크)

  글 전체가 핵심이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적으로 찌르고 들어온 부분.

 

 

   “새해 모든 이의 소망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연말 즈음 또 하나의 재앙 담론이다. 건강, 돈, 취직, 국회의원 당선… 사람들의 소망은 비슷하다. 점입가경, 소망을 대의로 포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이 지옥인 이유는 모든 이들이, 자기 소망을 동시 달성하려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의미 없는 대립이 계속된다. 바로 올해처럼.

 

 

  1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고, 정희진 선생님의 글을 읽다 보면 ‘산통 깨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 ‘박살’은 ‘시의적절’하다. 그 깨진 틈으로부터 새로운 사유가 피어오른다. 지금의 구태를 내려놓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를 바란다면, 우리에게는 익숙한 사유의 ‘부수고 깨고’가 가장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적이고 세속적으로 충족 가능한 희망을 대신할 수 있는, 내일모레부터 시작될 내년에 가지고 있을 나의 ‘소망(또는 욕망)’을 이야기하는 것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나는 그저 가족과 회사, 사회에서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서 역할을 맡기 바랄 뿐이다. 사람과 사회에 대한 너그러움의 선이 내가 지향하는 최소한의 가치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기계적 중립이 아닌 역동적 균형을 이루기 위해 분주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 줌의 위로나 휴식이 없어 지나치게 빨리 소진된 탓으로 타인에게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지지는 않았으면 한다. (따뜻한 카페에서 이 글을 쓰느라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든 것일 수도 있다.)

 

 

  책은  올해 19권 읽었다. ‘취준’할 때보다는 많이 읽었으나, ‘백수’ 시절보다는 적다. 그러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는 않다. 기록이 중요하다. 나날이 조금씩 써 보고, 그 중에 공개해도 되겠다 싶은 글은 블로그에 올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까 한다. 내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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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2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는 과도기 님의 글을 자주 볼 수 있는 겁니까?
해피 뉴 이어! :)

인간의과도기 2019-12-30 12:38   좋아요 0 | URL
마지막 문단에 쓴 것처럼, 일상적으로 쓴 글 중에 다락방님을 비롯한 좋은 독자분들 보시기에도 부끄러움 없는 글이 많아지도록 해야겠지요. 저를 조금더 많이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새해에 더 많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

syo 2019-12-29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도기님의 컴백을 기대하는 사람이 줄을 섰어요. 보이시죠? 이 열성 팬들의 변하지 않는 갈망의 마음들이 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인간의과도기 2019-12-30 12:40   좋아요 0 | URL
쇼 님 덕분에라도 알라딘 서재에서 절필을 하려야 할 수가 없겠네요. ㅎㅎ 구체적으로 어떤 지점이 좋다고 호명할 수 있는 글을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직장 생활을 포함하여 새해에 시작하는 새 생활에 행운과 행복이 따르시기를!
 

  원래 (즉흥적으로 떠올린) 이 글의 제목은 ‘글 쓸 거리만 많고 본격적으로 쓴 글은 없어 우리 동네 도서관에 대해서라도 쓰자는 마음을 먹고 쓴 글’이었다. 사람들은 첫 문장을 읽고 생각할 것이다. ‘개그 센스가 되게 특이하네’. 또는 ‘되도 않는 개그 치네’. 내가 대학 다니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의 변주다. ‘ㅇㅇ야(ㅇㅇ선배). 너는 안 웃겨(요).’

 

  여튼, 처음에 떠올린 제목은 나의 심경을 잘 반영한다. 책과 글에 할애할 시간은 적은데 뭐라도 읽고 쓰고 싶고, 그 와중에 무엇을 쓰게 된다면 잘 쓰고 싶고. (날로 먹겠다는 심보 아니냐?) 아니, 책 한 권을 읽고 어떤 식으로든 쓰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그 책에 대한 인상이며 내용이며 다 잊는다는 그간의 경험칙상, 뭐라도 써야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들자 나중에는 글쓰기가 숙제처럼도 여겨졌다. 숙제, 숙제라. 매 시간마다 제출해야 하는 숙제를 거의 안 해서 F 받고 결과적으로 졸업이 한 학기 늦어지도록 만들었던 졸업필수강의가 생각난다.

 

  그렇다. 숙제는 안 해 가면 페널티를 받지만 자발적인 글쓰기는 무기한 연기할 수 있다. 무기한 연기의 끝은 대부분, 경험칙상,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다. 아무리 내가 아마추어지만, 이대로 백년 천년 아무 것도 안 쓸 수는 없다. 글쓰기의 감각은 계속 갈고 닦지 않으면 퇴화되니까. (어떤 강의의 숙제든 성실히 해 가고, 글쓰기 숙제면 심지어 즐겨서 했던 1n년 전의 글이 때때로 지금의 그것보다 더 나아 보인다.)

 

 

  최근에 읽은 책, 혹은 읽으려고 빌린 책을 일별해 보았다. 마음 속 판단: ‘주제적인 측면에서 유사성 없음. 큰 주제로 글쓰기는 못 함’. 그렇다면 이 책들을 가지고 무슨 글을 쓸 수 있을까? 오래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발상의 전환. 내용이 아닌 형식을 보자. 이 책들은 다 어디서 왔나? 내가 아껴 마지않는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도서관 이야기도 언젠가는 쓸 것이었으니, 오늘은 간략하게라도 적자.

 

 

  우리 동네 도서관을 내적으로 아끼는 가장 큰 이유는,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지 않아서이다. 무슨 소리일까? 열람실 어디를 보아도, 취업이나 자기계발을 목적으로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도서관에서 아예 금지를 해 놓았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서는 수험서를 볼 수 없다.

 

  더 많은 주민, 특히 조용히 공부할 환경이 필요한 이들에게 개방되어야 할 ‘공공기관’으로서의 책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얼마 전까지 ‘취준생’이었던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든다. 한편, 한 사람의 독서인의 입장에서는 ‘독서 환경을 조성하고 독서 문화를 보급하는’ 도서관 본연의 모습을 갖춘 곳이 의외로 드물지 않나, 그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반길 만한 곳이라는 생각도 든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취준생이었을 때에도 오롯이 독서를 위한 도서관이 있어 반가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 취업 준비를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생각이다.

 

  이 도서관에서 나는 비로소 ‘사회에서 탈락한 잉여존재’가 아닌, 한 명의 오롯한 ‘독서인’이 되는 것 같다. 불완전하고 흠 많지만 나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책 읽는 사람.

 

 

  우리 동네 도서관은 반납일까지 책을 반납하지 못하면 두 가지의 후속조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냥 연체한 일수만큼 책 못 빌리기. 또는 연체한 일수*책 권수*하루당 연체료를 계산해서 연체료를 내고 책 빌리기. 나는 후자를 주로 선택한다. 책 욕심이 없어지는 시기에는 전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이 글을 쓰는 오늘(9/28)은 반납일을 하루 넘긴 시점이다. 하루 연체료*3부터 시작되겠다.

 

 

  3주 전에 빌린 책은 총 세 권이다. 『헌법 쉽게 읽기』, 『소년의 레시피』, 그리고 제목을 밝힐 수 없는 한 권. 제목을 못 밝힌 이유는 뒤에서 적을 것이다.

 

 

 

  『헌법 쉽게 읽기』는 원래 대출 계획이 없던 책이었다. 그냥, 한때 공시생이었던 나의 눈에 띄어 빌리게 되었다.

 

 

  다른 시험의 법 과목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되지만, 공무원시험에서의 법 과목은 처음부터 끝까지 ‘암기’가 성패를 좌우한다. 조문도, 판례도, 그 배경을 알면(‘이해하면’) 좋겠지만 그 ‘이해’도 나중은 다 ‘암기’를 위한 것이고, 그렇게 암기된 것은 시험에서 정오를 빠르게 판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르게 말하면, 조문이나 판례를 둘러싼 역사적, 사회적 맥락은 소거하는 편이 수험 공부에 도움이 된다. 사실은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은 그에 대한 비판만 책 한 권이고(『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무엇이 문제인가?』, 김선수 대표 집필, 도서출판 말, 2015), 지금은 ‘사법농단’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고 있지만, 공시생에게는 그저 ‘위헌정당해산심판청구의 유일한 판례’로 기억될 뿐이다.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극복의 가능성이 있지만, 선발 시험이 공직자 또는 공직후보자를 맥락맹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는 구조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한편으로는 공시를 준비하면서 법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도가 높아졌다. 법은 쓰는 말 자체가 어렵다. 그렇다 보니 정보의 불균형이 극심하게 일어나는 분야이기도 하다. 소수의 ‘법 기술자’들이 보편적인 법 감정을 무시하고, 그것을 ‘니네가 법을 잘 몰라서 그래’라고 합리화하는 풍경을, 그간 많이 봐 오지 않았나. 아는 게 곧바로 힘이 되지는 않지만, 힘의 가능성은 품게 할 수 있다. 공시생이 아닌 지금의 처지에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헌법 쉽게 읽기』는 제목에서도 쉬이 짐작할 수 있듯, 대한민국 최고의 법이지만 이것이 우리 실생활과 어떤 식으로 연관을 맺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을 위해 쓰여진 헌법 교양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과 제2장의 조문 중 일부를 그 조문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례와 함께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완독한 지 3주 가까운 시간이 흘러, 책을 읽었던 당시의 감정을 정밀하게 복각하는 것은 어렵다. 아래는 그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방점을 찍었던 사례 두 개.

 

 로스쿨 입학을 준비하던 엄 모 씨는 각 학교의 입학 전형을 살피던 중 이화여자대학교의 입학 전형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남성인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에 지원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의 정원은 100명인데, 매년 100명의 여성만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에 입학할 수 있고 그만큼 남성의 자리가 줄어든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엄 모 씨는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 입학 전형이 남성의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헌법 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엄 모 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평등권의 침해 요소는 있지만 전체 로스쿨 정원 2,000명에 비해 이화여자대학교 로스쿨의 정원은 100명으로 비율이 매우 낮고, 엄 모 씨는 이화여자대학교 외에도 나머지 1,900명의 정원에 지원할 수 있기 때문에 기본권 침해 정도가 매우 미미하다고 판단했다(헌재 2013.5.30. 2009헌마514). 평등권을 침해받기는 했지만 참을 만한 수준이라는 것이다.

  헌법이 규정하는 평등은 절대적 평등이 아닌 상대적 평등이다. 모든 차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합리적 근거가 있는 차별은 가능하다. (...) 차별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합리적 근거는 ‘적극적 우대 조치Affirmative action’다. 불평등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일시적 불평등 조치는 불평등이 아니라는 것이다.

(...) 매년 남성에 못지않은 비율로 여성 법조인이 배출되고 있지만 2017년 9월 현재 대법관 13명 중 여성은 3명, 헌법 재판관(현재 1명 공석) 8명 중 여성은 1명에 그친다. 고위 법관과 검사 사정도 비슷하다. 이처럼 여성의 지위가 현저히 낮은 법조계에서 25개 로스쿨 중 1곳, 2,000명의 로스쿨 학생 중 100명을 여성에게 부여한 것을 남성에 대한 역차별이라 주장하기는 어렵다.

 

(p.82~85, 「여성만 들어갈 수 있는 로스쿨은 차별일까?」 중)

 

  ‘역차별’ 운운하는 ‘일부’ 남성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들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보장될 것 같은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수가 많아지면 거기에만 ‘역차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교사, 공무원, 법조인, 등등. 노동 환경이 상대적으로 열악한 직군에 여성 종사자 수가 많다고 거기에 남성도 더 뽑아달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가? 그 ‘일부’들이 자주 간과하는 것 중 하나가 ‘빈곤의 여성화’이다. 참고로 빈곤의 여성화는 1970년대부터 제기된 개념이다.

 

 

  다소 거북스러운 표현이지만 “군대에서 죽으면 개죽음”이라는 말이 있다. (...) 군대에서 죽었을 때 적정한 보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은 헌법 규정 때문이다. 헌법 제29조 제2항은 군인 등이 전투나 훈련 중 사망해도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매우 특이한 조항이다. 같은 조 제1항이 국가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인정하고 있는데, 바로 다음 항에서 군인은 배제하기 때문이다. (...)

  유독 군인만 국가배상청구권에서 배제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헌법이 형식에 어긋나면서까지 군인의 국가배상을 직접 제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의문은 헌법 제29조 제2항의 연혁을 살펴보면 쉽게 풀린다. 헌법 제29조 제2항은 1972년, 제8호 헌법에 처음 도입되었다. 제8호 헌법은 소위 유신헌법이라 불린다. (...) 197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중요하다. 당시는 1965년부터 시작된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막바지였다. 이듬해인 1973년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한국은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미국의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는 등 경제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었다(한국의 베트남 파병의 결정적 계기가 된 브라운 각서의 주요 내용은 미국의 경제원조였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베트남전쟁 상이군인이나 전사자의 유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국은 베트남에 32만 명에 달하는 군인을 파병했다. 이 중 5,000여 명이 전사했고 1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들이 모두 국가배상을 청구한다면 적지 않은 금액을 지출해야 했을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전한 직후인 1967년, 국가배상법을 개정해 군인 등의 국가배상을 제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해당 조항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대법원 1971. 6. 22. 선고 70다1010 전원합의체 판결). 헌법재판소가 1988년 개소開所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대법원이 위헌 법률 심판을 맡고 있었다. 대법원의 결정까지 무시할 수 없었던 박정희 정권은 고민에 빠졌지만 곧 묘수를 찾아냈다. 법률이 헌법에 위반된다면 법률 자체를 헌법에 넣어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헌법이 헌법을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헌법 제29조 제2항(당시는 제26조 제2항)은 1972년, 유신헌법과 함께 헌법에 들어오게 되었다.

 

(p.240~244, 「군대에서 죽으면 개죽음인 이유」 중)

 

 

  물론 군인의 부상이나 사망 시 보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관계 법률이 따로 있다. 하지만 그 법률을 통해 보상을 받으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는 불가능하다는 것. 이유는 위에서 인용한 대로, 유신 그 분 덕분.

  

  왜 나는 이 부분에 방점을 찍었을까. 오늘은 일단 개인과 구조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할 계획이 있다는 것만 밝혀둔다.

 

 

『소년의 레시피』는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처음 보고, 한 번 읽어봐도 괜찮겠다 싶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사지는 않고,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렸다. 다행히 도서관에 소장본이 있었다.

 

  지은이는 남편, 그리고 아들 둘과 함께 살고 있다. 지은이는 요리를 못 한다. ‘안’은 의지 부정이고 ‘못’은 능력 부정이라고 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다. 처음에 ‘안’이었다가 나중에 ‘못’이 된 것도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못’이었고 쭉 ‘못’이다. 집안의 식사는 처음에 줄곧 남편이 담당해 왔고, 이제는 첫째 아들 ‘제규’가 지은이 집안의 저녁 식사를 책임진다.

 

  ‘제규’가 저녁 식사를 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첫째, 무의미한 ‘야자’를 하기가 싫었다. 둘째, 자신이 저녁 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단순하지만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제규’는 고등학교 입학 세 달만에 야자를 그만두고 집안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 읽는데 뭔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야자를 빠지겠다는데 그 단순한 이유를 듣고 선뜻 허락한 담임선생님도 그렇고, ‘제규’가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하든 마음속으로부터 인정하고 공부를 닦달하지 않는 지은이와 지은이 남편도 그렇고. 내가 너무 갇힌 세계에서 모범생처럼 살다 보니 이러한 삶을 사는 이들에 대한 상상력도 없어졌나 싶어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끊임없이 다른 사람, 특히 내 아이와 비슷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다른 아이와 특질이나 성격을 비교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도 해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나는 왜 내 고유한 육아 철학이 없을까’ 하고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가정을 내내 부러워하고, 내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고 그랬다.

 

  문장은 짧고 평이하면서 나름의 탄력이 있다. (누구의 글처럼) 늘어지지 않는다. 그 짧은 문장들 사이로 지은이의 유머 감각이 내비친다. 정도가 일관된 나머지 ‘일상이 너무 휙휙 지나간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뭐 내 일상도 나한테나 의미 있지 구구절절 쓴다고 남이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다만 레시피 부분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데, ‘제규’의 오리지널 레시피 노트가 이런 식인지, 아니면 ‘요알못’인 지은이가 ‘제규’를 인터뷰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축약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재료의 ‘분량’이 없다. 이건 꽤 치명적이다. 이러면 레시피로써의 기능을 못한다.

 

  여하튼 ‘제규’는 꽤 멋진 사람이다. 친구들과 다 놀러 다니면서도, 자신의 요리에는 집중할 줄 아는 그 모습도 그렇고, 요리에서 ‘자기만족’과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을 모두 발견한 것도 그렇고. 나는 그맘때쯤 야자는 야자대로 하면서 집이 학교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학교 식당에서 석식 안 먹고 굳이 집까지 와서 라면 끓여먹고 그랬었는데. 철딱서니가 없었다.

 

 각설하고, 글 전반에 흐르는 풍요롭고 밝은 기운이 플러스(+)가 되었다가, 레시피의 ‘비실용성’ 때문에 마이너스(-)가 되어서, 이 책을 최종적으로 구입할지 안 할지는 ‘잠정 보류’ 상태다.

 

 

  요리 얘기가 나왔으니 내 개인적인 이야기로 사족. 어제(9/27)는 요새 체력적으로 힘들어하는 배우자와, 요새 부쩍 고집이 세진 아이가 같이 먹을 수 있도록 점심으로 나주곰탕을 했다. 고기와 향신 채소를 물에 넣고 한 시간 20분을 끓이면 된다, 는 부분만 기억한지라 정오가 다 되어서야 장을 봐 왔는데, 문제가 있었다. 핏물 빼는 시간이 1~2시간이라는 부분을 내 뇌가 선택적으로 기억 탈락시킨 것이다. 다행히 아주 늦지는 않게 곰탕을 끓여 세 식구가 사이좋게 먹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주곰탕의 꽃말은 ‘오래 끓인 고깃국’이다. 배우자는 ‘고기가 부드러워서 좋다’고 이야기했다. 고기야 뭐... 어떻게 먹어도 맛있을 테니까(배우자와 나 모두 결혼 전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결혼 후에는 둘 다 이상하다 싶게 고기를 자주 찾는다. 덕분에 아이도 고기 채소 가릴 것 없이 다 잘 먹던 시기를 지나 채소는 뱉고 고기만 찾아 먹는 아이로 크고 있다).

 

 

  제목을 밝힐 수 없는 책은 SNS에서 언급이 된 것을 보고 도서관에서 빌렸다. SNS에서 비혼모 당사자 이야기가 화제였던 때였다. 이 책은 그 흐름에서 언급되었다. 비혼모 당사자 이야기를 다룬 참고사례라고.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읽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서문을 쓱 들추어보고는, 읽기를 포기했다.

 

  이 어린 친구들이 제대로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줄긋기입니다. ‘키스, 성관계, 동거’와 같은 항목은 ‘짜릿함, 행복’ 같은 내용하고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임신, 출산, 불행’ 같은 내용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더욱이 ‘에이, 그런 일이 설마 나한테 있을라구’ 하고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펴기도 합니다.

 

  이 책에서 만나게 되는 많은 소녀들은 그런 실수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솔직한 성관계를 가졌다는 실수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사소한 행동 하나가 몰고 올 수 있는 폭풍 같은 결과들에 대해 무심했던 것이 실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 냉혹한 현실들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

 

  우리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자신의 행동과 결과에 책임질 줄 알고, 인간 경시 풍조에 물들지 않고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나가는 행복한 사회의 주역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엮은이-

 

(p. 4~7, 「책머리에」 중) 

 

 

  SNS에서 본 비혼모 당사자의 이야기 중에서 인상적인 지점이 하나 있었다. 비혼모 공동체와 페미니즘은 사실 친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고. 책임이 일방에 과도하게 지워지고, 그 책임을 어떤 식으로 수행해 가든 지속적으로 지탄과 조롱, 몰이해의 대상이 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것조차 버거운 개인은 어떤 지점에서는 사회적 맥락에 어두워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개인을 돕고 그 개인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맥락맹인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내가 책을 읽지 않은 이유다.

 

  이 책의 초판은 15년 전에 나왔고, 개정판이 나온 지도 10여 년이다. 비성년 임신 문제에서 ‘남자 책임’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다. 지금은 그때보다야 나아졌겠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오히려 후퇴한 것도 같고,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서울지방조달청 옆에 있는, 여성가족부 산하 양육비이행관리원이 문득 떠오른다. 그 기관의 일은, 잘 진행이 될까. 책임을 지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전(前) 양육자들을 지긋지긋하게 보다 지친 실무자들이, 어느 순간에 맥락맹을 자처하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새벽에 두 시간이 넘도록 글을 쓰다 잠을 잤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오후에 글을 다시 쓰니 글이 더 길어진다. 이러다 글을 매듭지을 수는 있을까? 오늘이 지나면, 연체료가 두 배가 된다. 예약도서가 어제 도착했다는데, 빨리 책을 반납하자. 연체료를 낸 다음, 도착한 책을 빌리자. 새 독서를 시작하고, 적당한 시간을 둔 뒤 또 새로운 글을 쓰자.

 

 

 

  그나저나 이렇게 긴 글을, 누가 금요일 저녁에 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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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9-28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로 제가 읽습니다! 언제나 과도기님을 지켜보고 기다리고 있는 사생팬 1번이요!

인간의과도기 2018-09-28 23:22   좋아요 0 | URL
긴 글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syo님의 댓글이 저로 하여금 다음에도 좋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합니다. 주말 잘 보내시기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