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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숙과 제이드
오윤희 지음 / 리프 / 2024년 11월
평점 :
나는 초등학교 시절인 1980년대를 대구의 연립주택 단지에서 보냈다. 좁은 골목을 경계로 똑같이 생긴 집 24채가 마주 보고 서서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블록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다보니 요즘과 달리 거의 대부분의 집들을 다 알아 엄마들끼리 왕래도 잦았고, 이웃집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아 비밀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 중 골목의 입구 쯤에 사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미군한테 시집간 딸이 가끔 내 또래 혼혈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오면 이제는 이름도 기억이 안나는 그 애와 골목에서 신나게 놀았었다.
그때마다 그 아줌마는 당시만 해도 정말 귀한 미제 초콜릿(아마도 키세스였던 것 같다)과 짜장면보다도 더 비싼 바나나를 주며 먹으면서 놀라고 하셨었는데, 그 맛에 홀려서였는지 그 애와 신나게 놀았었다.
그러다 어느 날 동네 아줌마들이 그 아줌마가 술집에서 일하다 미군하고 결혼했다며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그 아줌마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
지금은 외국인을 보는 것이 흔하다 못해 자연스럽고, 다문화 사회가 되어 단일민족이라는 말도 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길에서 백인이나 흑인을 보는 것은 동물원에 가서 호랑이나 사자를 보는 것만큼 드문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차별 아닌 차별도 심했고, 이런 사회적 차별을 견디다 못해 고국을 떠나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오윤희가 쓴 <영숙과 제이드>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소설인데, 미국 1세대 이민자인 엄마와 2세대 딸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 작품이다.
엄마 영숙은 미군 기지에서 살았던 이른바 양공주이고, 딸 제이드는 엄마의 죽음이후 옷장 깊숙이 숨겨져 있던 상자에서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사진 속의 젊은 엄마는 동양인 남자와 환하게 웃고 있는데, 한번도 엄마에게 다른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제이드는 사진 뒷면에 적힌 이름과 주소를 토대로 엄마의 삶을 알아보기 위한 길을 떠난다.
그리고 엄마의 지난 여정을 찾다 알게 된 영숙의 지난 삶은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숙의 삶이 어린시절 나에게 초콜릿을 주었던 아줌마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가슴 먹먹한 아픔이 느껴졌다.
과거 안정효의 <은마는 오지 않는다>에서 보았던 기지촌 여인들의 한많은 삶이 떠오르면서 더 이상 이러한 슬픔의 역사가 이 땅에서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책장을 덮었다.
주위에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직접 읽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