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에서 '수자리'를 찾아보면 '국경을 지키던 일, 또는 그런 병사'라고 나온다. 그러니 수자리는 군인이라고 보면 된다.


  나라가 있으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헌법 39조에 국방의 의무라고 해서 1항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 2항 누구든지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이런 군인들이 있는 곳이 군대인데, 군대가 좋은 경험으로 남아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오죽하면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말이 있겠는가. 군대에서 갖은 고생을 했기에 군대는 생각만 해도 싫다는 말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이와 비슷하게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이 제대하고 나서도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꾼다고 한다. 악몽이라고... 얼마나 군대가싫었으면...


이와 반대로 '군대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말이 있는데,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지내보면 조금 성숙해진다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이때 사람된다는 말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따른다는 부정적인 의미로도 쓰이니... 하여튼 군대는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군대에 관련된 헌법에 있는 2항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병역의무의 이행으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는 이 구절...


불이익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예전에(지금도 그럴지도)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은 불이익을 받았다. 무엇이 불이익일까?


쉽게 군대 가산점이 있으니 불이익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경제활동을 하는 만큼의 보상이 주어졌느냐 하면 아니다. 


요즘에야 병사들 월급을 인상해준다고, 병장 월급이 200만 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지만, 2-30년 전만 해도 병장 월급이 1만 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최소한의 용돈을 주고 젊은이들을 군대에 잡아놓았던 시절.


헌법에 위배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다면 군대에 있는 1년 6개월 동안 그에 합당한 보수를 국가가 지불해야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에 맞는다.


여기에 군대에서 자행되던 온갖 폭력들, 반인권적인 행위들을 생각해 보라.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불이익이다.


구타라는 말, 지금은 그것이 범죄로 인식되어 거의 없어졌다고 하지만 예전에는 '얼차려'라고 해서 구타는 일반적이었다. 오죽하면 '구타 없는 부대'를 만들겠다고 하는 사단장이 있었겠는가. 그것이 구호로만 그친 경우가 많았지만.


소원수리라고 해서, 군대에서 일어난 비리, 억울함 등을 호소하는 활동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눈 감고 아웅하는 그런 요식 절차였다. 편지까지 검열당하는 군대에서 누가 용감하게 군대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반인권적인 행위는 헌법에 위배된다.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서로를 존중하는 군대가 강한 군대가 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은 시인이 군대에 가는 과정부터 군대 생활, 제대, 그리고 예비군과 민방위에 편입되는 과정을 거쳐 아들에게 신체검사 통지서가 오는 것으로 끝난다.


한 사람이 군대에서 겪는 일이 모두 들어가 있다고 보면 된다. 예전 군대가 이랬다고, 지금은 안 그런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군대였으면 좋겠다.


군대가 없는 나라가 거의 없으니 (예전에 코스타리카가 군대 없는 나라라고 했는데, 더 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군대가 적어도 이 시집에 나온 행위들을 더이상 하지 않는 군대였으면 한다.


'양조장집 아들은 무종을 받았고 / 산업과장 아들은 폐결핵이란다 / 무종을 받고 폐결핵이면 / 군에 가지 않는단다' ('신체검사' 중에서 17쪽)


이 구절은 다음에 '이 땅의 젊은이면 가야하는 군대'('영장' 중 20쪽)과 어긋난다. 원칙적으로는 다 가야하지만, 이상하게 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앞의 신체검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반인권적인 내용을 보자.


'우리를 서로 마주 향해 세우더니 / 앞에 선 전우의 빰을 치란다' ('소등 이후' 중에서 48쪽)

'5초안에 식사를 못 마쳤다고 / 식기를 입에 물고 오리걸음 연병장을 수도 없이 돌았네' ('식사시간 '중에서 58쪽)

'사실을 사실대로 쓸 수도 없는 / 군사우편 서신검열 우리들 편지' ('첫 편지' 중에서 66쪽)

'내무반에 돌아오면 사나운 내무반장의 / 가학적 기합이 기다리고 있었다 /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성적(性的)인 학대를' (내무반 내무생활' 중에서 112쪽)

'현역병 제대는 무기한 연기되고 / 제대특명 조치는 금지되었다' ('제대명령을 기다리며' 중에서 149쪽)


이런 일들이 당시의 군대에는 비일비재했다. 헌법에 있는 말들은 그냥 말일뿐인 세상.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 그렇지 않아야 한다. 군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 시집이었다. 한 편의 이야기. 이제는 할 수 있는 군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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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런틴 워프 시리즈 4
그렉 이건 지음, 김상훈 옮김 / 허블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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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


그 중에서도 과학적 지식이 많이 필요한 소설. 그냥 재미로 읽어도 되지만 과학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양자역학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어라 이 소설의 개연성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 수많은 경험들을 기억하고 조직하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단일한 존재일 수가 없다는 점만은 명백하다.


이 소설에서는 수축과 확산이 나온다. 수축은 우리가 지금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는 실존으로서의 인간이라면 확산은 자신을 널리 분산시키는 가상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영화 [매트릭스]가 생각났는데, 수축은 실제 인간, 즉 가상 세계에 접속하지 않은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한다면, 확산은 가상 세계에 접속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므로 확산된 상태에서 인간은 어느 곳에든 갈 수가 있는데, 그런 확산 상태가 수축이 되면 실제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만, 수축이 될 때 누가 실제 인간이냐는 문제는 남는다. 즉 확산된 존재인 '나'는 수많은'나들'이기 때문이다.


이 '나들' 중에 살아남은 '나'가 수축된 나이고, 이런 나가 살아 있는 존재인 인간을 구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확산은 어떤 의미일까? 자신을 수없이 확산시킨다는 것은 다른 존재들을 수축시킨다는 의미가 될까?


함께 확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지구를 둘러싼 버블이 우주로부터 지구를 가려버렸다. 제목이 '쿼런틴(Quarantine)'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구는 격리되었다. 왜? 인간들이 지나치게 확산해서 우주의 생명체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인간들은 수많은 인간들을 죽이기도 한다. 수축된 인간, 자각이 돌아온, 지금 살아 있다고 느끼는 인간은 많은 확산된 인간들의 죽음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을 통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 우리였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학살하는 일인 것이다.' (343쪽)


이 말을 이해하기가 힘든데, 다른 면으로 생각해보면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들' 중에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나'를 제외하고 많은 부분들이 잊혀지거나 사라져버리게 되니, 이를 죽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그래서 과연 인간의 몸에는 얼마나 많은 세포가 있을까 궁금했다. 하나의 세포가 바로 '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세포들이 모여 '나'를 구성하고 있으니... 또한 우리 몸에서 수많은 세포들이 죽어가고 새로 태어나고 하니, 이 소설에서 아주 빠른 시간 동안에도 많은 '나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우리 몸 세포들이 죽어가는 과정으로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또한 수축된 인간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경험해 왔던 일들 중에서 많은 부분들을 지워버린 현재의 나라는 생각. 현재의 나는 미래를 알 수가 없고, 현재도 알 수가 없다. 현재는 경험하고 그것을 인지하고 기억하는 순간 과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축된 인간은 현재의 인간이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동안 많은 부분들을 묻어버리게 되니, 이는 다른 죽음을 바탕으로 지금의 나가 존재한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왜 버블이 필요할까? 인간을 격리하는 버블을 왜 설정했을까? 인간의 확산이 다른 생명의 죽음을 불러온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이 버블을 누가 설치했을까?


소설은 버블이 설치된 다음에 일어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파견된 닉의 관점으로 진행이 된다. 닉이 사건을 해결하려 하는 과정에서 수축과 확산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버블을 누가, 왜 설치했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버블이 인류에게 필요할까? 소설은 버블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해석이 되는데, 그것은 인류의 무한정한 확산이 다른 생명체뿐만 아니라 인류에게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당한 격리는 필요하다. 이때 격리를 가둬둠으로 해석하지 말고 적당한 거리 둠으로 해석하면 어떨까 한다.


인류의 발걸음이 닿는 곳에 사라지는 생명들도 있음을, 그렇다고 무조건 격리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다. 인류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생명들의 죽음을 전제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자신들의 영역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거리, 그것이 바로 이 소설에서 말하는 '쿼런틴(버블로 상징되는)'이 아닐까 한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게 읽었고, 이렇게 양자역학이나 또다른 과학 지식에 무지해서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읽기를 멈추려는 생각도 했는데, 소설을 그냥 소설로 읽자고 생각하고 읽어나가니,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로워졌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나들'이 중첩되어 존재한다는 생각, 우주는 단일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하면서, 그리고 영화 [매트릭스]도 생각하면서, 또 엉뚱하게도 [장자]의 '호업몽(胡蝶夢)'도 생각하면서, 그래서 결말이 뭔데? 하면서 읽었다.


아마도 이 소설을 곱씹으면서 읽으면 더 많은 것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이렇게 많은 '나들'이 지금의 '나'라는 사실, 이런 '나'가 존재하기 위해서 많은 '나들'이 사라져야 했음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더 많은 '나들'이 계속 존재한다면, 그것은 혼란에 불과할 뿐이라고, 적당한 수축, 즉 격리가 있어야 한다고, '나'를 많은 '나들'로부터 수축해서 격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많은 '나들'을 다 없애라는 것은 아니다. 이 '나들'이 '나' 속에 융합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으니...


다만 지나친 확장은 나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다른 생명체에게도 좋지 않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덧글


소설을 읽으면서 '아바타'도 생각났고, 홀로그램도, 또 서유기의 손오공도 생각이 났으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에 얼마나 많은 '나들'이 있을까, 이 공간과 시간은 유일무이한 존재인가? 아니면 공간과 시간이 다양하게 이곳에 중첩되어 있는가 등등... 복잡한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모르겠으니, 어쩌겠는가 그냥 소설로 읽을 수밖에.


궁금해서 인간의 몸에 세포가 몇 개나 있을까 찾아봤더니, 인터넷의 특성에 걸맞게 많은 수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차이가 너무 심하다. 30조에서 60조까지 벌어지니... 실체로 존재하는 인간의 세포 수마저도 잘 모르니, 인간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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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려 있는 건 다 꽃이지" (엄재국, 정비공장 장미꽃. '문' 중에서. 애지. 2006년. 100쪽)


  이것이다. 꽃 하면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왔을까 했더니 열려 있음에서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귀엽다고, 순수하다고 한다. 왜? 바로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말이 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 제목이기도 하고, 가사에도 이 구절이 나오는데, 이때 아름다운 사람은 열려 있는 사람이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우열을 가르는 말이 아니라, 꽃을 아름답다고 하니, 사람 역시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사람도 꽃이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려면 열려 있어야 한다. 자신을 활짝 연 사람에게는 벌이 찾아드는 꽃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열려 있음, 이것은 곧 나의 것을 다른 존재에게 준다는 말이다. 내 것을 가져가시오. 맘껏 가져가시오. 이것이 바로 열려 있음이다. 꽃은 자신을 통째로 내어준다. 그래서 꽃은 아름답다. 또한 그런 사람도 아름답다.


시 제목이 '문'이다. 문은 열려 있기도 하고 닫혀 있기도 한다. 하지만 문의 기능이 무엇인가?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나. 안과 밖의 소통 창구. 


문은 닫혀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늘 열려 있기만 해도 안 된다. 열릴 때 열리고, 닫힐 때 닫혀야 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꽃이 늘 활짝 열려 있지는 않다. 꽃도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 때 열린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문'이라는 시에서 아이를 꽃에 비유하고 있다. 아이의 말은 벌이다. 꿀을 발라 나르는 벌들. 그렇게 아이는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함께 선사하고 있다.


엄재국 시집을 읽다가 만난 구절. 


"열려 있는 건 다 꽃이지"


마음을 열어야겠다. 꼭꼭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환대할 수 있게 활짝 열린 문처럼. 


어쩌면 시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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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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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분서갱유(焚書坑儒)


학창시절, 중국 역사를 배울 때 분서갱유에 대해서 배운다.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묻었다고. 이는 지식의 탄압이다. 결코 성공하지 못한. 이 분서갱유는 아무리 탄압을 해도 지식을, 교양을, 학문을 막을 수는 없다는 역사적 증거로 언급이 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조차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다른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분서갱유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후대 사람들에게 학문을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준다.


사상의 다양성.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또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각자의 사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임을, 분서갱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서갱유를 서양에서 실천한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히틀러. 그 역시 나치에 반대하는 책들과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순수한 예술작품들도 불태워버렸다. 나치는 바로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야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나치가 성공했는가?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패한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같은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진시황과 히틀러의 실패. 이는 사상의 자유는 억압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꼭 책만이 아니다. 말을 막는 사회 역시 성공할 수 없다. '입틀막'이라는 말이 나오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입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예전 역사를 다시 찾아보아야 한다. 자신들의 미래가 어떠할지를.



장면2  학년말 학교 풍경과 수능 국어 시험


학년말 시험이 끝나면 또 수능이 끝나면 많은 학교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학교 운동장에 트럭이 오고, 그 트럭을 향해 학생들이 교과서를 들고 나른다. 들고 나른다는 표현보다는 트럭에 교과서를 내던진다.


폐휴지로 팔려가는 교과서들. 더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이 학년말에 교과서들은 트럭으로 직행한다. 현대판 분서갱유라고 할 수 있을까?


교과서의 용도는 시험이나 입시에만 해당하는 걸까? 그런 교과서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학생들은 달달 외운다. 교과서가 없으면 교사에게 지적을 당하거나 점수를 깎이기도 한다.


진리추구를 하는 책이 아니라 점수추구를 하는 책이다. 수많은 사상들이 실려 있는, 다양한 생각을 만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추게 하는 책이 아니라 점수를 위하여, 대학을 위하여 하나의 정답만을 좇게 하는 책이다.


다양성은 없고 오직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책. 그런 책은 시험이 끝나면 더이상 필요가 없다. 현대판 분서는 점수와 관련이 있다. 자발적인 분서다. 태우지는 않으니 분서(焚書)가 아니라 갱서(坑書)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런 교과서 버리기는 책의 쓸모를 없애는 역할을 한다. 책은 시험과만 관련이 있을 뿐 - 고전이라 불리는 많은 문학 작품, 철학 책 등등이 시험을 위해서 요약되거나, 문제풀이용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책을 태울 필요가 없다. 책에 대한 환멸을 자연스레 심어주면 책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진다 -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 귀찮은 존재다.


이런 관점, 태도를 교과서가 심어준다. 마찬가지로 수능에서 국어 시험이 그렇다. 오로지 점수를 올리기 위한 글읽기다.


문학 작품, 실려 있어서 삶의 다양성을 체득하는 읽기로 나아가지 않는다. 문제풀이, 오로지 정답은 하나, 인물의 행동이나 작가의 생각은 하나여야 한다. 다른 관점에서 파악하면 안 된다. 그러면 틀린 답이 된다. 다른 답이 아니라.


이마저도 수능 국어 시험에서는 문학 작품을 많이 다루지 않는다. 비문학이라고 해서 문학이 아닌 다른 글들이 지문으로 채택이 된다. 아예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그 글에서는 정답이 단 하나밖에 없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배운다. 그나마 다양한 삶이 표현되어 있는 문학은 수능 국어에서도 찬밥이다. 다양성은 시험과는 상극이다.


굳이 분서갱유를 할 필요도 없다. 학교 교육을 착실히 받고, 대학에 진학을 하려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책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에 나오는 방화수처럼 책을 불태울 필요가 없다.



장면 3  브레드버리의 [화씨 451]


책을 불태우는 사회, 불태우는 직업이 있다는 얘기는 책의 효용성을, 책이 삶과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다. 책을 무시하는, 책의 존재 자체가 귀찮아진 세상에서는 책을 불태우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화씨 451]에서는 책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억압하면 할수록 그들은 책을 암기한다. 자신들이 책이 된다. 소설에서는 책 사람들이라고 나온다. 


"사악한 정치 소설인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찰스 다윈이고,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이고, 이 사람은 아인슈타인, 그리고 여기 바로 이 사람은 아주 관대한 철학자인 앨버트 슈바이처입니다. 몬태그, 여기 있는 우리 전부가 아리스토파네스, 마하트마 간디, 석가모니, 공자, 토마스 러브 피콕, 토마스 제퍼슨, 링컨입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임이기도 하고." (232쪽)


아무리 책을 불태워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책을 보존하려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종이책을 보존하면 발각이 될 염려가 있다. 그러니 이를 통째로 외울 수밖에. 사람들이 각자 책이 된다.


그리고 그 책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책을 전수해준다. 문자가 아닌 음성으로. 물론 사라지는 책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종이책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방화수들에게 모두 불태워지면 그보다 더한 피해는 있을 수 없으니...


"... 우리 아이들에게 입으로 책을 전해 기다리게 하고, 또 그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물론 그런 과정에서 잃는 것도 많겠지. 하지만 사람들이 강제로 듣게 만들 순 없소. 자신들이 필요할 때 와야 하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고, 왜 세상이 날아가 버렸는지 궁금해하면서, 결코 오래 걸리진 않소." (233쪽)


몬태그라는 방화수가 책을 보존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린 소설이 바로 [화씨 451]이다. 화씨 451도는 책이 불타 없어지는 온도라고 하는데 (과학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지지는 말자고 한다. 당시 작가는 소방서에 문의해서 그런 온도로 제목을 정했다고 하는데, 온도의 정확성이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불태워지는 종이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소설에 등장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책을 불태우는 사회가 소설 속에만 존재할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닫힌 사회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지속되어온 현실이 아닐까. 지금은 이렇게 대놓고 책을 불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 속 집 벽면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텔레비전처럼, 이미 너무도 많은 기기들이 우리를 책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자연스레 우리는 생활에서 책을 불태우고 있다.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서, 학교를 떠나서는 다른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서 책을 만나지 않게 한다. 굳이 소설에서처럼 방화수를 등장시켜 책을 불태울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책을 소중히 여기고 책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서 책은 인류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에서 아무리 책을 불태우고 탄압을 해도 책 사람들처럼 책과 함께 하는 존재들이 있듯이.


이 소설을 다른 방면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소설에 나오는 방화수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또 소설에서 텔레비전이 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이 시대는 책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가?


1950년대에 나온 소설인데,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놀랍다. 놀라운 소설이다. 디지털 디지털, 입틀막 입틀막 하는 시대에 이 소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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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여름을 이 하루에 레이 브래드버리 소설집 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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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읽었다. 몇 권 읽으면서 이 작가도 대단하구나 했고, 특히 그가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는 화성이 최근에 인류가 이주할 행성으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어서 더욱 흥미가 가는 작가다.


이 작품집은 그의 소설들을 두 권으로 나누어 번역 출간한 책 중 두 번째 책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가장 길다고 할 수 있는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는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는 먼 미래고, 이때 지구의 풍습을 잘 이해 못하는 사람에게는 '화성에서 갓 돌아왔느냐'는 질문을 한다. 지구와는 다른 세상으로 화성을 설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지구인이 이주해서 지구의 풍습을 가장 오랫동안 지니고 있는 화성으로 레이 브래드버리는 화성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화성의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는 다르게 펼쳐진다. 이상하게도 이 작품집에서 화성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구인이 화성에 도착하고 나서 화성인으로 변해간다. '백만 년 동안의 소풍'의 결말은 지구인이 여행을 떠났는데 이들이 화성인이 되어버린 모습으로 끝나고 있으며, '검은 얼굴, 금빛 눈동자'라는 작품 역시 지구의 재난을 피해 이주한 사람들이 화성에서 화성인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 브래드버리가 당시 지구의 모습에 많이 실망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래 작품을 보자. '백만 년 동안의 소풍'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지구의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평화, 책임감을 찾고 있지"

"지구에는 그런 것들이 다 있었어요?"

"아니. 지구에서는 못 찾았단다. 이제 지구에는 그런 것들이 아예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거다. 어쩌면 예전에 있었다는 것도 그저 우리가 속아서 그렇게 믿었던 걸지도 모르지." ('백만 년 동안의 소풍'에서. 210쪽)


이미 지구에는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평화, 책임감을 찾을 수가 없다. 먼 과거의 용어가 되어버렸고, 그 용어가 한때 존재했던 것들을 표현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것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꾸며낸 이야기인지도 헷갈려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지구에서 살 수 없으니 화성이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다.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이것은 나중에 거론될 문제다. 우선 이주한 사람들은 소수고, 그들은 정부랄 것 없는 아나키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 협동, 호혜, 평등, 자율 등등을 생활헤서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초기 공동체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평화, 책임감이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브래드버리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이 변했다까지만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다만, 이 지구에서 그렇게 우리가 밀려나지 않도록 머언 우주의 어느 행성에서 그런 가치들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에서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있지 않나 한다.


'그분'이라는 소설을 보면 그렇다. 사랑과 평화를 가져온 그분이 우주의 어느 행성에 나타났다고 한다. 하지만 선장은 믿지 않는다. 그는 그분을 찾아 다시 우주 여행을 떠난다. 그분은 그 행성에 있음에도.


이 소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서 '그분'과 같은 평화, 사랑, 책임감 등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분'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그분'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을 다른 곳에서 찾는 사람 눈에는 '그분'은 보이지 않는다. '그분'은 늘 앞서 떠날 수밖에 없다. 영원히 '그분'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사랑과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를 찾아 계속 떠나가기만 한다면 결국 내가 살고 있던 곳은 폐허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집에 실린 많은 소설들에서 지구가 파괴되는 것으로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파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과기스러운 소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래드버리의 이 소설집이 어둡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문명을 파괴하는 시대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미소'란 작품을 보아도 그렇다. 아주 작은 그림의 조각을 지니고 있는 소년. 모나리자의 미소를 지니고 있는 소년에게 미소는 '따뜻하고 다정하게'(264쪽) 머무르고 있다.


이는 인류가 초래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님을, 그런 새로운 문명을 우리가 건설해야 함을 브래드버리가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소'라는 소설에서 사람들의 말을 통해 브래드버리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맞아. 예쁜 것들을 볼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자가 나타날 거야.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되돌려줄 거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런 문명 말이지."

"무엇보다 문명에는 전쟁이 있다는 걸 알아둬!"

"하지만 다음 문명은 다를지도 몰라." ('미소' 중에서. 260쪽)


브래드버리가 2012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는 전쟁을 얼마나 겪었을까? 1920년에 태어났으니 1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많은 전쟁들을 겪었을 테니, 그가 소설에서 인류를 화성으로 이주시키는 장면을 많이 표현한 것도 이해가 간다.


단지 화성의 이주만이 아니라 인류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음을 '다음 문명은 다를지도 몰라'라는 말과, 소년이 지닌 미소를 통해서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화성에 정착한 사람들이 지구인의 모습이 아닌 화성인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표현하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검은 얼굴, 금빛 눈동자'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화성인들은 대단히 평화적으로 보입니다. ..."(292쪽)


이것이 바로 브래드버리가 꿈꾸던 세상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지구의 모습과 지금이 얼마나 비슷한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평화, 책임감'이 지금 시대에도 남아 있지 않다면 이건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숱한 전쟁과 학살들, 지구가 망가져가는 데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들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면, 그건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결과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브래드버리가 이 작품집에서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은 변하지 않고 이대로 지구의 생활을 지속했을 때 만나게 되는 미래가 아니겠는가. 그런 미래가 바람직하지 않음은 이 소설집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테니... 한번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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