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 있는 건 다 꽃이지" (엄재국, 정비공장 장미꽃. '문' 중에서. 애지. 2006년. 100쪽)


  이것이다. 꽃 하면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그 아름다움이 어디에서 왔을까 했더니 열려 있음에서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귀엽다고, 순수하다고 한다. 왜? 바로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이들은 꽃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말이 있다. 안치환이 부른 노래 제목이기도 하고, 가사에도 이 구절이 나오는데, 이때 아름다운 사람은 열려 있는 사람이다.


  꽃보다 아름답다는 표현은 우열을 가르는 말이 아니라, 꽃을 아름답다고 하니, 사람 역시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사람도 꽃이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려면 열려 있어야 한다. 자신을 활짝 연 사람에게는 벌이 찾아드는 꽃처럼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열려 있음, 이것은 곧 나의 것을 다른 존재에게 준다는 말이다. 내 것을 가져가시오. 맘껏 가져가시오. 이것이 바로 열려 있음이다. 꽃은 자신을 통째로 내어준다. 그래서 꽃은 아름답다. 또한 그런 사람도 아름답다.


시 제목이 '문'이다. 문은 열려 있기도 하고 닫혀 있기도 한다. 하지만 문의 기능이 무엇인가? 안과 밖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나. 안과 밖의 소통 창구. 


문은 닫혀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늘 열려 있기만 해도 안 된다. 열릴 때 열리고, 닫힐 때 닫혀야 한다.


꽃도 마찬가지다. 꽃이 늘 활짝 열려 있지는 않다. 꽃도 자신을 내어줄 수 있을 때 열린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문'이라는 시에서 아이를 꽃에 비유하고 있다. 아이의 말은 벌이다. 꿀을 발라 나르는 벌들. 그렇게 아이는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달콤함을 함께 선사하고 있다.


엄재국 시집을 읽다가 만난 구절. 


"열려 있는 건 다 꽃이지"


마음을 열어야겠다. 꼭꼭 걸어 잠그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환대할 수 있게 활짝 열린 문처럼. 


어쩌면 시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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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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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분서갱유(焚書坑儒)


학창시절, 중국 역사를 배울 때 분서갱유에 대해서 배운다.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묻었다고. 이는 지식의 탄압이다. 결코 성공하지 못한. 이 분서갱유는 아무리 탄압을 해도 지식을, 교양을, 학문을 막을 수는 없다는 역사적 증거로 언급이 된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조차도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다른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분서갱유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후대 사람들에게 학문을 탄압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준다.


사상의 다양성.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또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고 각자의 사상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임을, 분서갱유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서갱유를 서양에서 실천한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히틀러. 그 역시 나치에 반대하는 책들과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순수한 예술작품들도 불태워버렸다. 나치는 바로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해야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나치가 성공했는가?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패한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같은 실패를 반복할 뿐이다.


진시황과 히틀러의 실패. 이는 사상의 자유는 억압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다. 꼭 책만이 아니다. 말을 막는 사회 역시 성공할 수 없다. '입틀막'이라는 말이 나오는 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입을 막으려는 사람들은 예전 역사를 다시 찾아보아야 한다. 자신들의 미래가 어떠할지를.



장면2  학년말 학교 풍경과 수능 국어 시험


학년말 시험이 끝나면 또 수능이 끝나면 많은 학교에서 비슷한 장면이 연출된다. 학교 운동장에 트럭이 오고, 그 트럭을 향해 학생들이 교과서를 들고 나른다. 들고 나른다는 표현보다는 트럭에 교과서를 내던진다.


폐휴지로 팔려가는 교과서들. 더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이 학년말에 교과서들은 트럭으로 직행한다. 현대판 분서갱유라고 할 수 있을까?


교과서의 용도는 시험이나 입시에만 해당하는 걸까? 그런 교과서를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학생들은 달달 외운다. 교과서가 없으면 교사에게 지적을 당하거나 점수를 깎이기도 한다.


진리추구를 하는 책이 아니라 점수추구를 하는 책이다. 수많은 사상들이 실려 있는, 다양한 생각을 만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추게 하는 책이 아니라 점수를 위하여, 대학을 위하여 하나의 정답만을 좇게 하는 책이다.


다양성은 없고 오직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는 책. 그런 책은 시험이 끝나면 더이상 필요가 없다. 현대판 분서는 점수와 관련이 있다. 자발적인 분서다. 태우지는 않으니 분서(焚書)가 아니라 갱서(坑書)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런 교과서 버리기는 책의 쓸모를 없애는 역할을 한다. 책은 시험과만 관련이 있을 뿐 - 고전이라 불리는 많은 문학 작품, 철학 책 등등이 시험을 위해서 요약되거나, 문제풀이용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책을 태울 필요가 없다. 책에 대한 환멸을 자연스레 심어주면 책은 사람들에게서 멀어진다 -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않는다. 귀찮은 존재다.


이런 관점, 태도를 교과서가 심어준다. 마찬가지로 수능에서 국어 시험이 그렇다. 오로지 점수를 올리기 위한 글읽기다.


문학 작품, 실려 있어서 삶의 다양성을 체득하는 읽기로 나아가지 않는다. 문제풀이, 오로지 정답은 하나, 인물의 행동이나 작가의 생각은 하나여야 한다. 다른 관점에서 파악하면 안 된다. 그러면 틀린 답이 된다. 다른 답이 아니라.


이마저도 수능 국어 시험에서는 문학 작품을 많이 다루지 않는다. 비문학이라고 해서 문학이 아닌 다른 글들이 지문으로 채택이 된다. 아예 다양한 관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게, 그 글에서는 정답이 단 하나밖에 없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배운다. 그나마 다양한 삶이 표현되어 있는 문학은 수능 국어에서도 찬밥이다. 다양성은 시험과는 상극이다.


굳이 분서갱유를 할 필요도 없다. 학교 교육을 착실히 받고, 대학에 진학을 하려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책과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에 나오는 방화수처럼 책을 불태울 필요가 없다.



장면 3  브레드버리의 [화씨 451]


책을 불태우는 사회, 불태우는 직업이 있다는 얘기는 책의 효용성을, 책이 삶과 관련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다. 책을 무시하는, 책의 존재 자체가 귀찮아진 세상에서는 책을 불태우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


[화씨 451]에서는 책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억압하면 할수록 그들은 책을 암기한다. 자신들이 책이 된다. 소설에서는 책 사람들이라고 나온다. 


"사악한 정치 소설인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를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찰스 다윈이고,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이고, 이 사람은 아인슈타인, 그리고 여기 바로 이 사람은 아주 관대한 철학자인 앨버트 슈바이처입니다. 몬태그, 여기 있는 우리 전부가 아리스토파네스, 마하트마 간디, 석가모니, 공자, 토마스 러브 피콕, 토마스 제퍼슨, 링컨입니다. 그리고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임이기도 하고." (232쪽)


아무리 책을 불태워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책을 보존하려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종이책을 보존하면 발각이 될 염려가 있다. 그러니 이를 통째로 외울 수밖에. 사람들이 각자 책이 된다.


그리고 그 책들이 다음 세대들에게 책을 전수해준다. 문자가 아닌 음성으로. 물론 사라지는 책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종이책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방화수들에게 모두 불태워지면 그보다 더한 피해는 있을 수 없으니...


"... 우리 아이들에게 입으로 책을 전해 기다리게 하고, 또 그 아이들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물론 그런 과정에서 잃는 것도 많겠지. 하지만 사람들이 강제로 듣게 만들 순 없소. 자신들이 필요할 때 와야 하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고, 왜 세상이 날아가 버렸는지 궁금해하면서, 결코 오래 걸리진 않소." (233쪽)


몬태그라는 방화수가 책을 보존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일들을 그린 소설이 바로 [화씨 451]이다. 화씨 451도는 책이 불타 없어지는 온도라고 하는데 (과학적으로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지지는 말자고 한다. 당시 작가는 소방서에 문의해서 그런 온도로 제목을 정했다고 하는데, 온도의 정확성이 여기서는 중요하지 않다) 불태워지는 종이책들과 그 책들의 내용을 보존하려는 사람들이 소설에 등장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책을 불태우는 사회가 소설 속에만 존재할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닫힌 사회에 대한 은유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지속되어온 현실이 아닐까. 지금은 이렇게 대놓고 책을 불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 속 집 벽면을 차지하고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텔레비전처럼, 이미 너무도 많은 기기들이 우리를 책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자연스레 우리는 생활에서 책을 불태우고 있다.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서, 학교를 떠나서는 다른 최첨단 기기들을 통해서 책을 만나지 않게 한다. 굳이 소설에서처럼 방화수를 등장시켜 책을 불태울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책을 소중히 여기고 책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로 인해서 책은 인류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소설에서 아무리 책을 불태우고 탄압을 해도 책 사람들처럼 책과 함께 하는 존재들이 있듯이.


이 소설을 다른 방면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소설에 나오는 방화수들과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또 소설에서 텔레비전이 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과연 이 시대는 책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가?


1950년대에 나온 소설인데, 지금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놀랍다. 놀라운 소설이다. 디지털 디지털, 입틀막 입틀막 하는 시대에 이 소설은 여전히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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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여름을 이 하루에 레이 브래드버리 소설집 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이주혜 옮김 / 아작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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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을 읽었다. 몇 권 읽으면서 이 작가도 대단하구나 했고, 특히 그가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는 화성이 최근에 인류가 이주할 행성으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어서 더욱 흥미가 가는 작가다.


이 작품집은 그의 소설들을 두 권으로 나누어 번역 출간한 책 중 두 번째 책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 중 가장 길다고 할 수 있는 '지구에 마지막으로 남은 시체'는 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시대는 먼 미래고, 이때 지구의 풍습을 잘 이해 못하는 사람에게는 '화성에서 갓 돌아왔느냐'는 질문을 한다. 지구와는 다른 세상으로 화성을 설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지구인이 이주해서 지구의 풍습을 가장 오랫동안 지니고 있는 화성으로 레이 브래드버리는 화성을 선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화성의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는 다르게 펼쳐진다. 이상하게도 이 작품집에서 화성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구인이 화성에 도착하고 나서 화성인으로 변해간다. '백만 년 동안의 소풍'의 결말은 지구인이 여행을 떠났는데 이들이 화성인이 되어버린 모습으로 끝나고 있으며, '검은 얼굴, 금빛 눈동자'라는 작품 역시 지구의 재난을 피해 이주한 사람들이 화성에서 화성인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 브래드버리가 당시 지구의 모습에 많이 실망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래 작품을 보자. '백만 년 동안의 소풍'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지구의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평화, 책임감을 찾고 있지"

"지구에는 그런 것들이 다 있었어요?"

"아니. 지구에서는 못 찾았단다. 이제 지구에는 그런 것들이 아예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나타나지 않을 거다. 어쩌면 예전에 있었다는 것도 그저 우리가 속아서 그렇게 믿었던 걸지도 모르지." ('백만 년 동안의 소풍'에서. 210쪽)


이미 지구에는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평화, 책임감을 찾을 수가 없다. 먼 과거의 용어가 되어버렸고, 그 용어가 한때 존재했던 것들을 표현한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것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꾸며낸 이야기인지도 헷갈려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지구에서 살 수 없으니 화성이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다.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이것은 나중에 거론될 문제다. 우선 이주한 사람들은 소수고, 그들은 정부랄 것 없는 아나키즘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 협동, 호혜, 평등, 자율 등등을 생활헤서 자연스럽게 실천하는 초기 공동체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 평화, 책임감이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하지만 브래드버리는 결과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이 변했다까지만 서술하고 있다. 그 다음은 독자의 상상에 맡긴다. 다만, 이 지구에서 그렇게 우리가 밀려나지 않도록 머언 우주의 어느 행성에서 그런 가치들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에서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있지 않나 한다.


'그분'이라는 소설을 보면 그렇다. 사랑과 평화를 가져온 그분이 우주의 어느 행성에 나타났다고 한다. 하지만 선장은 믿지 않는다. 그는 그분을 찾아 다시 우주 여행을 떠난다. 그분은 그 행성에 있음에도.


이 소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서 '그분'과 같은 평화, 사랑, 책임감 등을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분'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그분'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러나 '그분'을 다른 곳에서 찾는 사람 눈에는 '그분'은 보이지 않는다. '그분'은 늘 앞서 떠날 수밖에 없다. 영원히 '그분'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 사랑과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를 찾아 계속 떠나가기만 한다면 결국 내가 살고 있던 곳은 폐허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집에 실린 많은 소설들에서 지구가 파괴되는 것으로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파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과기스러운 소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브래드버리의 이 소설집이 어둡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문명을 파괴하는 시대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미소'란 작품을 보아도 그렇다. 아주 작은 그림의 조각을 지니고 있는 소년. 모나리자의 미소를 지니고 있는 소년에게 미소는 '따뜻하고 다정하게'(264쪽) 머무르고 있다.


이는 인류가 초래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님을, 그런 새로운 문명을 우리가 건설해야 함을 브래드버리가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미소'라는 소설에서 사람들의 말을 통해 브래드버리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맞아. 예쁜 것들을 볼 수 있는 영혼을 가진 자가 나타날 거야. 어느 정도는 우리에게 되돌려줄 거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런 문명 말이지."

"무엇보다 문명에는 전쟁이 있다는 걸 알아둬!"

"하지만 다음 문명은 다를지도 몰라." ('미소' 중에서. 260쪽)


브래드버리가 2012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때까지 그는 전쟁을 얼마나 겪었을까? 1920년에 태어났으니 1차 세계대전을 제외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많은 전쟁들을 겪었을 테니, 그가 소설에서 인류를 화성으로 이주시키는 장면을 많이 표현한 것도 이해가 간다.


단지 화성의 이주만이 아니라 인류가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음을 '다음 문명은 다를지도 몰라'라는 말과, 소년이 지닌 미소를 통해서 그것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화성에 정착한 사람들이 지구인의 모습이 아닌 화성인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표현하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검은 얼굴, 금빛 눈동자'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화성인들은 대단히 평화적으로 보입니다. ..."(292쪽)


이것이 바로 브래드버리가 꿈꾸던 세상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작품을 읽으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지구의 모습과 지금이 얼마나 비슷한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논리와 상식, 훌륭한 정부, 평화, 책임감'이 지금 시대에도 남아 있지 않다면 이건 너무나 끔찍한 일이다. 지금까지 겪어왔던 숱한 전쟁과 학살들, 지구가 망가져가는 데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들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면, 그건 이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는 결과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 브래드버리가 이 작품집에서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은 변하지 않고 이대로 지구의 생활을 지속했을 때 만나게 되는 미래가 아니겠는가. 그런 미래가 바람직하지 않음은 이 소설집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테니... 한번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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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체 (반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64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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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으로 시작한다. 일명 난쏘공으로 불리는 소설. 유명한 소설인데, 그 소설은 비극으로 끝난다. 난쟁이들이 난쟁이가 아닌 삶을 살기 힘든 세상을 보여준 소설이다.


이렇게 난쟁이로 시작하면 난쏘공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난쟁이들의 비극을 생각하면서 읽게 된다. 이 소설에서도 아버지 역시 난쟁이라 할 수 있다. 쌍둥이 아들 둘인 합과 체도 난쟁이라고 놀림을 당할 만큼 작은 키를 지니고 있다.


작은 키. 신체가 중요한 요소로 작동하는 사회. 그것도 청소년기에 작은 키는 여러모로 불리하게 작동할 때가 많다. 특히나 번호를 키 순으로 정하는 학교에서는 번호가 곧 키 순서가 되니, 대놓고 신체로 차별당하게 된다.


이런 차별의 요소가 소설의 초반에 등장한다. 이건 아니다 싶은 반인권적인 모습. 어쩌면 과거 우리 사회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인권을 중시해야 하는 학교에서 비일비재로 일어났던 차별이기도 하고.


아이들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신체를 비하하는 말을 하거나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체에 따른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교과서에나 존재하는 말이었다. 


자신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들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모르고 있는 상태. 이는 교사라고 다르지 않다. 


소설에서 난쏘공을 작품으로 수업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뜩이나 작은 키로 서러움을 당하는 체에게 하필 그 부분을 읽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교사가 그 부분의 내용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조금만 생각하면 다른 아이에게 읽힐 수 있을 텐데, 그런 배려를 하지 않는다. 어쩌면 교사는 그게 뭐? 키 작다고 난쏘공의 아버지는 난쟁이였다라는 부분을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그런 부분에 신경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그렇지 않다. 놀림거리를 찾아 눈을 번뜩이며 찾는 학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는 그 놀림이 자신들의 유흥거리에 불과하겠지만 놀림을 당하는 아이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를 주게 된다.


작은 것을 고려하면서 수업을 진행해야 하는 교사들도 힘들겠지만, 그것이 바로 교사들이 지녀야 할 자세 아니겠는가.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은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상처를 받은 체. 합과 체는 쌍둥이지만 합은 공부로 작은 키에 대한 놀림을 어느 정도는 모면한다. 성적이 좋지 않은 체에겐 더 많은 놀림이 따라오고. 


그래서 우연히 만난 이상한 노인에게서 계룡산에서 33일을 지내면 된다는 말을 듣고 체는 합을 데리고 계룡산으로 간다. 거기서 둘은 노인이 말한 수련을 하는데...


우연히 들은 라디오에서 노인이 치매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33일을 채우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달라진 것이 없다. 하긴 키가 한 번에 큰다면 뭐가 문제겠는가. 소설 역시 개연성을 얻지 못할테고.


2학기 체육시간. 농구 시합. 누구도 같은 편으로 하기 싫어하는 함과 체. 이번엔 다르다. 둘은 정말 열심히 한다. 골도 넣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정말 열심히 뛰었으니까. 열심히 뛰다보면 이들의 실력을 의심해도 이들에게 공을 건네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합도 마찬가지고.


이제 자신들의 키를 그렇게 의식하지 않고 나름 학교 생활을 하는 합과 체. 어느 날 키가 커진 자신들을 발견한다로 소설은 끝을 맺고 있는데...


얼마나 컸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키는 이제 자신들의 모든 것이 아니니까. 자신들이 처한 자리에서 노력하고 그에 만족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으니까.


합과 체는 이제 신체로 자신들을 가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으니까. 바로 이것이다. 자존감.


이 자존감은 그냥 키워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자존감이 강할 수도 없다. 자존감은 자신의 약점을 알고 그 약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했을 때, 그래서 약점에 더 이상 마음을 쓰면서,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이겨냈을 때 생긴다.


약점이 없는 사람이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약점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자존감이 있는 사람이다. 합과 체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신체를 인정하고, 거기에서부터 최선을 다하는 것. 이때부터 그들에게는 자존감이 들어찼고, 이제 그들은 당당하게 지낼 수가 있게 된다.


조세희가 쓴 난쏘공과는 달리 소설은 합과 체의 이런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청소년 소설답다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기적이 아니라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로 소설이 전개되고 있어서 마음 졸이고 읽지 않고, 함과 체의 이야기에 빠져들 수 있다. 그 점이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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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3-13 07: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합, 체, 이름이었군요!
이 책 아이들하고 읽어봐야겠어요.
같이 생각할 부분이 많은듯요!
감사합니다 ~^^

kinye91 2024-03-13 08:38   좋아요 1 | URL
박지리 문학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박지리 작가 작품을 읽어봐야지 했는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괜찮은 작가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파과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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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도덕적 감정'은 내려놓아야 한다. 도덕적 감정을 앞세우면 읽기 힘든 소설이다. 살인자들의 이야기라니... 그것도 살인을 방역이라고 지칭하다니. 살인자들을 방역업자라고 하다니.


세상에 죽어야 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람을 마치 해충 취급하면서 방역을 해야 한다는 의뢰를 받고 청부살인을 하는 사람이 주인공이라니... 자신이 죽였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까지는 없애지 못하겠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무감각해지고, 죽은 이들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그런 주인공이라니...


읽으면서 주인공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그런데 소설에는 반전이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청부업자가 어느 순간 마음 쓰는 사람이 생긴다. 일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우선은 버려진 개를 데려와 키운다. 변화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마음이 약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생명을 자신의 곁에 둔다는 것은 피가 돌고 눈물이 있는 존재로 바뀌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다 또 신경쓰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 부분부터 주인공의 변화에 마음이 쓰이기 시작한다. 살인청부업자에게 감정이 생긴다? 이는 살인청부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영화 '똥파리'가 떠올랐다. 청부업을 하는 주인공이 지켜야 할 것들이 생기면서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지켜야 할 것이 생기면 자신의 죽음에 이르게 된다. 소설에서 주인공은 이런 변화를 보인다.


그렇게 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소설이 죽음으로 끝나면 너무 단조롭다. 하여 또다른 살인청부업자가 등장한다. 이름을 투우라고 한다. 투우, 우리가 먼저 떠올리면 싸우는 소 아닌가. 상대에게 달려드는 그런 존재. 이 투우가 주인공인 조각의 삶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조각이 마음에 두고 있는 존재들을 제거하려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조각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고, 결국에는 조각을 파멸에 이르게 하려는 것. 투우의 아버지가 조각에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투우 역시 살인청부업에 뛰어들었으니, 그에게서도 어떤 도덕을 찾을 수는 없다.


이제 투우가 조각에게 어떻게 접근하는지, 조각은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소설의 중심 내용이 된다. 끝까지 가는 과정에서 조각이 마음을 주고 있었던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고, 조각이 계속 살아남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제목이 '파과'인데 파과란 말이 여자와 남자 나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떨어진 과일, 또는 흠집이 난 과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흠집이 나기 전에 과일은 좋을 때를 지닌다. 좋은 때, 누구에게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좋은 때는 그것이 지나갔을 때 그때가 좋았지라는 말을 하게끔 한다.


하여 살인자의 삶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보면 '파과'에 해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도 찬란한 삶의 한 순간이 있었음을 생각해야 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살인을 실행하는 사람보다 그것을 사주하는 사람들에게 더 분노를 느끼게 된다.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지만 다른 사람을 이용해 피를 묻히는 그런 존재들. 


돈이나 권력을 이용해 남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 그런 사람들에게 저항할 수 없는 살인청부업자들. 이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살벌한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물론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직접적인 살인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그런 권력들이, 돈이 얼마나 많은 파멸(죽음)을 이끌어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의 삶은 이지러진 삶이라고 할 수 있고, 흠집이 있는 과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이 이지러지는 것을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이지러진 삶에도 기댈 존재들이 등장하고, 기댈 존재들로 인해 변해가는 모습들을 통해서 사람이 변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그것이 이지러진 삶이 아닌 한창의 삶, 찬란한 삶임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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