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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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부동산 재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그것도 자유민주주의를 선도한다는 미국에서.


이 때 필립 로스의 이 소설이 소개되었다. 대체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대서양 횡단 비행으로 인기를 얻은 린드버그가 1940년대에 미국 대통령이 된 상황을 가정해서 전개된다.


린드버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어린시절 위대한 비행사, 모험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그가 전쟁을 반대했으며, 반유대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고, 반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이라는 것은 몰랐다.


그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 대통령이 된 적이 없었고, 따라서 그의 반유대주의나 반공산주의를 펼칠 권력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반유대주의는 심각한 상황까지 초래하지는 않았지만, 반공산주의는 뒤에 매카시즘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뒤흔들었다. 


그렇다면 린드버그라는 사람이 만약 자신의 인기를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되었다면, 반공산주의 뿐만이 아니라 반유대주의가 미국에서 기승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소설은 바로 그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정착된, 근대 초기 유럽에서 민주주의의 나라로 칭송한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


소설 속 인물은 린드버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서서히 다가오자 그의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매일 스스로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져. 어떻게 이 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런 사람들이 이 나라를 맡게 되었을까?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내가 환각을 일으켰다고 생각할 거야."(274쪽)


과연 이것이 소설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에게 이 말을, 이 태도를 우리에게 그대로 돌려주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미국에서 트럼프라는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또다시 그는 대통령 후보로 나오겠다고 설치는 이 시대에, 또한 한때의 인기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있는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로도 슬퍼진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 삼권분립이 이루어지고, 이 삼권이 독립적으로 권한 행사를 하면서 서로를 견제해야 하는데... 소설 속 미국에서는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통령 한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사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이고, 그런 추세 속에서 삼권분립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여전히 삼권분립을 믿는다. 아니,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민주주의를 포기한 순간, 그는 이민을 가든지 하는 방식으로 그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소설 속 인물이 한 말...


"... 우리의 대법원은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해요."(276'쪽)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우리의 대법원은? 소설보다도 못한 현실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 속 인물처럼 이렇게 대법원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좋겠는데... 


2023년 11월 대법원은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해경 수뇌부는 무죄라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비난을 받을 수 있어도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세상에 높은 자리는 높은 만큼 권력이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망각한 판결. 다시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에 대해서 어떤 판결을 내릴지, 아니 기소라도 할 수 있는지, 이런 대법원을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지... 소설 속 인물은 아직도 행복한  꿈을 꾸고 있다고 해야 할지.


이런 대체 역사 속에서 유대인 가정이 겪는 일들이 펼쳐지는데...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은 언제든지 있다. 유대인들이 역사 속에서 겪어온 일들을 보면.


그런데 소설은 유대인 가정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고 있지만, 지금 현실은 이제 반유대주의는 유럽에서 미국에서 자리를 잡을 수 없다. 오히려 반유대주의에서 반이슬람주의로 바뀌었지 않나 싶다.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이후 반공산주의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방에 나라로 자리를 잡은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반유대주의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난 사람들, 또 기독교의 적이라고 일컫는 이슬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니 이 소설을 반유대주의의 대체 역사소설로 읽어도 좋지만 반이슬람주의를 경계하는 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종교와 집단을 바꾸어서 읽으면 그렇다는 것이다. 결국 소설에서는 어떠한 종교나 집단에 대해서 경원시 하고 그들을 몰아내려는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 그들과 함께 이루는 공동체가 바로 민주주의 사회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유대인 가정을 지켜주려는 이탈리아계 이민 가족의 모습, 어려운 상황에서도 기꺼이 도움을 주는 기독교 가정, 적극적으로 유대인들을 보호해주려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이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은 반유대주의가 설 자리는 없지만 반이슬람주의는 여전히 활개치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을, 인물을 이슬람 가정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어떨까? 그러면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가 옳지 않음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소설을 읽을 때 주의할 점은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점. 절대로 역사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미국 정치에 대해서, 인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읽어야 한다.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읽었다면 이 책 뒤에 실린 등장인물에 대한 실제 역사적 사실을 꼭 읽어야 한다. 이것이 대체 역사소설을 읽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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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폐지하라 -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는 법
소피 루이스 지음, 성원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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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제목에 찬성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가족을 폐지하라니... 마치 패륜을 저지르라는 말과도 같이 들린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속했던 가족인데, 이 가족을 폐지하면 도대체 어떻게 된단 말인가? 태어남과 자라남, 그리고 죽음에 가족이 모두 관계를 하고 있는데, 이런 가족을 폐지하라고 하면 가족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다. 가족을 해체한 다음, 가족 대신에 어떤 무엇을 넣는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고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가능하다고 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힘을 우리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족을 해체해야 하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굴레로 사람을 뒤집어 씌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동체가 책임져야 하는 일도 가족이 해야 하고, 일례로 복지 혜택을 받으려고 해도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또는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때 가족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있어서 피해를 주는 가족인데... 또한 가족이 과연 행복하느냐에도 의문이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오히려 경제라는 면에서 가족을 인정하고, 가족이 불변하는,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하는 편이 더 자본주의를 유지하는데, 또한 차별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가족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가 계속 강고하게 유지되었고, 가족을 해체한다는 주장은 허황된 주장으로 매도되었다고 한다.


어쩜 타당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경제활동의 주체를 찾아보니, 가계, 기업, 정부라고 한다. 가계라는 말을 쉽게 말하는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기본적인 조직이 가족인 것이다. 그러니 가족이 경제활동을 하고,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경제는 가족이 우선 책임져야 한다는 이런 관념은, 자신들의 생활을 가족이 해결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공동체의 의무, 책임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 살기 힘든 가족을 돌보면 그것은 공동체가 제 할일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무슨 혜택을 베푼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 가족은 경제를 바탕으로 누군가를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유지되어야 하고, 사회의 책임을 개인이 넘겨받게 만들기 때문에, 이런 가족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예전부터 논의되어 왔던 가족 해체 주장과 새로운 공동체 실험 등을 소개하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가족이 해체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인 키부츠만 해도 가족이 해체되지는 않는다. 또한 지금은 사라졌지만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도 가족은 해체되지 않았다. 인류가 존속한 이래 어떤 형태로든 가족은 존재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지금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핵가족은 더욱 문제가 많다고 한다. 굳이 가정폭력을 예로 들지 않아도, 핵가족 제도로 인해서 개인들이 지니는 어려움은 많다고 볼 수 있다.


돌봄이나 교육 등을 가족에 맡기고 있으니, 이는 공동체의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는, 즉 기존의 가족을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니, 저자의 주장이 맹랑하다고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기존 가족이 하던 일을 공동체에서 할 수 있다는 상상, 아니 하게 해야만 한다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는 기존의 가족을 완전히 해체하자는 주장으로 대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책의 말미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국가가 특히 의지처가 필요한 사람들을 자기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돌봄제공자들의 품으로 돌려보내도록 만드는 동시에, 민간에 내맡겨진 돌봄에 반기를 들고, "부모의 권리"에 저항하고, 모든 사람이 다수의 돌봄을 받는 게 정상인 세상을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158쪽)


가족을 핏줄로만 제한하지 말자는 제안, 그리고 다른 여러 종류의 가족들이 있을 수 있음을, 특히 특정 가족으로 한정하면 가족-국가가 구분이 되고, 내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과는 분리되고, 또한 국가들끼리 분리된 상황을 유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한 구별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가족을 해체하자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목에서 풍기는 반감을 잠시 묻어두고 한번 읽어보자. 과연 가족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니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족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가족의 울타리를 공고하게 하면 할수록 사회공동체는 책임을 덜고, 공동체 의식은 더 옅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책은 그런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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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곳.


  지금이 전부가 아니다. 그 장소에는 수많은 삶들이 거쳐간 역사가 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많은 삶들이 겹쳐져 있는 곳이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이런 삶의 축적으로서의 장소를 서효인이 시로 썼다.


  장소가 시가 된다. 장소에는 사람의 삶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지명이 아니다.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또 삶을 이루고 있는 곳이 바로 장소다.


그런 장소에 대한 시들... 많은 지명이 나온다. 우리가 잘 아는 지명들만 꼽아도 여수, 이태원, 강화, 남해, 부평, 강릉, 목포, 인천, 진도, 평택, 서울, 구로, 안양, 나주, 안성,, 파주, 마산 영광, 철원 등등 많은 장소들이 나온다.


우리가 살아온 장소들. 또 조상들이 살아온, 미래 세대가 살아갈 장소들. 이 장소들에 얽힌 삶들. 그것을 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 중 '진주'란 도시를 생각해 보자. 진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논개? 남강? 기생? 냉면?


이 모든 것이 진주란 도시에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시인은 진주에서 백정을 떠올린다. 형평사 운동을 되살려낸다. 형평사를 불러오기 위해 돼지고기를 소환한다. 그렇게 시인은 '진주'란 장소에서 많은 것들을 불러낸다.


진주


  지난 주말에는 동네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두 근을 떼서 먹었다. 수육용이요, 비계는 싫어요, 했을 뿐인데 돌인지 고기인지 알 수 없는 돼지가 몸을 털었다. 이번 주말에는 기차를 타고 진주에 갔다. 옆자리에는 지난번 그 정육점 주인이 탄 것 같은데 그때 감히 따지지 못했던 고객으로서의 품위와 권리 같은 것이 떠올라 백정처럼 분해지는 것이다. 진주에 도착할 때까지 분한 마음으로 졸다가, 창밖을 보다가 했다. 왜 질긴 돼지고기를 성토하지 못한단 말인가. 졸리지도 않으면서 눈꺼풀을 닫은 채 진주에 닿았다. 작년 여름에 누구는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다 보기 좋게 실패했다. 돼지고기에 술추렴하며 몸을 털었다. 진주에 도착하니 남강이 보이고 강에서 부드러운 비계 같은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정육점 주인이 날아가고 없다. 어디 갔지? 어디 갔노? 흩어지고 없다. 질긴 고기처럼 입을 다물고 동덩이처럼 자리에 앉아서 전화고 받고 서류도 쓰고 했다. 문득 관광객의  품위와 권리가 떠올라 남강에 몸을 비추어보았다. 때는 1923년이었다. 진주 남강에는 백정들이 모여 운동 단체를 만들었고 그것을 형평사라 했다. 비닐봉지에 든 고기 두 근이 바스락 소리를 내었고, 나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 몸을 털었다.


서효인, 여수. 문학과지성사. 2017년 초판 2쇄. 100-101쪽.


형평사 운동은 성공했을까? 백정 자식과는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할 수 없다는 그 완고한 사람들이 있던 시대에... 그들은 평등을 외쳤는데, 21세기에 와서 노동자도 사람이라고 단결할 권리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도 노조 결성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또는 노조를 만들어도 무력화 되는 경우가 많은데...


돼지고기에서 시작하여, 진주, 노동조합, 백정들의 단체인 형평사까지... '진주'에 얽힌 이런 삶들을 시인은 우리에게 풀어내 주고 있다.


그렇담 내가 살고 있는 장소는 어떤 삶들이 얽혀있을까? 문득 살펴보고 싶어진다. 지금 내 삶이 그 장소에 얽힌 삶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이런 생각을 들게 한 것만으로도 이 시집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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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자이언트 픽
이유리 외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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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읽는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없다. 그냥 소설을 따라가면 된다. 한편 한편이 모두 그렇다. 하지만 읽고 나면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한다. 그런 힘이 있는 소설들이다.


SF소설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라는 노래 가사가 제목이 된 소설도 있으니, 사랑이야기인가 보다 했다.


사랑이야기. 그렇다. 소설은 모두 사랑이야기다. 어떤 사랑을 다루느냐에 따라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물과 사건이 다 달라질 뿐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다른 인공물 등등, 소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을 다룬다. 소설의 인물이 꼭 인간이 아니어도 되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고전소설인 [토끼전]을 읽으면서 '우화소설'이라는 말을 쓰지만, 아마도 'SF소설'이라는 말이 이미 있었다면 우화소설이라는 말과 함께 SF소설이라는 말도 함께 썼을 테다.


그만큼 요즘 소설은 다양한 인물들이 나와 삶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작가들의 상상력이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읽어가면서 아, 이 소설집은 SF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인물과 배경, 사건들에서 다양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SF소설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 소설집의 끝부분에서. 참고할 만하다. 그리고 이런 정의를 SF소설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다고 본다. 모든 소설이 이렇지 아니한가.


'시간을 뛰어넘는 타임 슬립이나 루프를 다루는 소설, 인간과 비슷한 로봇이 등장하는 소설, 비슷한 맥락에서 인간 복제를 다루는 소설, 외계인과의 접촉을 다루는 소설, 우주를 탐험하고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소설,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사건을 경험하는 소설(SF를 사변 소설이라고 봤을 때) 대체 역사를 전개해보는 소설 등 종류는 다양하다. 장르 작가는 이러한 세부 장르를 선택하여 장르의 규칙을 지키되 나름의 방식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간다. 반복-장르에 충실한 독자가 읽었을 때 대번에 어떤 세부 장르인지 알 수 있다-과 변주-러나 뻔하게 전개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를 통해 장르의 규칙은 재확인되고 동시에 장르의 경계는 확장된다.' (281-282쪽)


그렇다면 이 소설집에는 어떤 소설들이 실렸을까? 최근에 SF소설가로 김초엽과 천선란 작품들을 읽었는데,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이번 기회에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작가와 작품은 다음과 같다.


이유리,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

김서해, 폴터가이스트

김초엽,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설재인, 미림 한 스푼

천선란, 뼈의 기록


첫번째 소설 '내게 남은 사랑을 드릴게요'는 감정 전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최근에 몸을 고치는 성형이야 일반화되어,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안 들어 수술하는 사람이 많아졌는데, 이를 감정에까지 확대하면 어떨까?


내게 쓸모없는 감정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 감정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전이해준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효과를 거두는 일 아닐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다. 우리가 감정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을 받는가? 고통 받는 감정을 수술로 없앨 수 있다면 누구나 할까? 그렇다면 그렇게 빼나간 감정의 빈자리는 어떻게 되는가? 소설은 이 점을 추구한가?


성형부작용이 있듯이, 감정 전이 부작용도 분명 있을터. 부작용? 과연 그것만을 걱정해야 하는가? 감정을 남에게 전이한다. 자신의 감정을 깊게 들여다 보고, 그 감정의 문제들을 받아들이며, 해결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수술로 없애버린다. 그리고 필요한 감정을 돈으로 사면 된다.


좋은 세상일까? 이런 세상에서 과연 제대로 된 관계가 유지될까? 관계를 맺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수많은 과정들이 수술을 통해서 단번에 해결된다면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람과 다른 존재의 관계가 더 지속적이고 좋아질 수 있는가? 


어느날 상대가 싫어지면 그냥 수술로 지워버리면 되지 않나? 고통을 겪으면서, 지속적인 시간을 거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감정 또는 관계란 오히려 귀찮다고 여기게 된다. 그런 인물이 감정 전이를 한 주인공에게 나타난다. 자, 유토피아라는 생각이 드는가? 아니, 이는 디스토피아다. 감정마저도 돈으로 해결되는 사회라니... 인간들의 감정이 거세된, 그저 프로그래밍된 관계, 그런 삶일 뿐이다.


꼭 이렇게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자신이 힘들다고 그 감정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그냥 자신의 마음만 편하면 된다고. 그러면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갈 수 없다. 그 점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감정만이 아니라 몸을 고치는 성형에 대해서도 생각을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


이 소설과 대변되게 감정을 존중하는 로봇이 나온다. 빠로 '뼈의 기록'이다. 장의사로 일하는 로봇. 그 로봇은 사람의 마지막을 보내주는 일을 한다. 최선을 다해서. 그렇지만 입력된 대로 하지는 않는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모미가 죽었을 때, 로봇은 모미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생각한다. 그간 맺어온 관계가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 화장하는 것을 거부하게 한다. 로봇은 모미를 우주선에 태워 우주로 보내준다. 멀리 멀리 우주로 나아가게.


바로 이것이다. 감정 전이 수술과 다른 점이. 상대의 뼈에 새겨진(이를 마음에 새겨진 바람이라고 해도 좋겠다) 감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그런 관계는자기가 싫다고 거부하지 않는다. 나를 중심에 놓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를 중심에 놓는 관계다. 이렇게 두 소설은 관계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관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나머지 세 소설도 결국은 관계의 문제다.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이 인정받았을 때 남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폴터가이스트', 다른 존재라서 완전히 인정을 받지 못한 존재가 자신의 로봇 정체성, 그리고 금속으로서 서서히 녹슬어가는 것을 추구하는 '수브다니의 여름휴가', 외계 생명체와 지구 생명체 사이의 폭력, 지구 생명체 사이의 폭력을 다루고 있는 '미림 한 스푼'


관계다. 상대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그렇다면 다른 소리에 의해서 파멸에 이르지 않게 되고(폴터가이스트), 다른 정체성을 지닌 존재들을 이상하게 보지도 않게 되며(수브다니의 여름휴가), 비록 낮고 어두운 공간에 있지만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미림 한 스푼) 된다.


이런 관계는 무엇인가? 사랑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은 사랑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의 모습이 어떤지 보여주고 있다. 평탄한 삶만을 추구해서는 관계를 맺기 힘들다. 관계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더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다. 이런 소설을 읽는 일은. 가상의 공간, 시간, 인물들이 펼치는 사건들을 통해서 내 삶을 생각할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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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오브 차이니즈 SF : 중국 여성 SF 걸작선
시우신위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아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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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여성이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성적 지향이 세칭 주류가 아닌 사람들이 쓴 소설이라고 하면 된다. 중국 작가들이 쓴 소설.


SF라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친숙하다. 서양 사람들이 쓴 SF가 주로 우주 공간과 외계 생명체들을 등장시키고 있다면, 이번 소설집은 그러한 외계생명체와 우주 공간도 나오기는 하지만, 고전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인물, 배경들이 등장한다.


마치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라고 알려진 [금오신화]를 읽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누군가는 그것을 괴력난신 이야기라고 했지만, 괴력난신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의 이성이 인식할 수 없는 수준의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이니까, 이것이 SF와 통하지 않을까 한다.


많은 소설이 실려 있는데, 중국의 신화, 전설이나 문화를 알면 더 잘 이해되는 작품들이 있다. 그런 작품들을 읽으면 SF소설이 아니라 고전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니...


그림이 지닌 주술성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도 있으며, 주술을 통해서 현대의 환난을 피하는 내용도 있다.


그렇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해결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집에 실린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두 편 있는데, 결말이 상반된다. 하나는 음식의 맛을 간직하는 쪽이라면, 하나는 음식으로 인해서 사람이 죽어가는 쪽이니, 음식점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작품들 중에 [아가야, 아가야, 난 널 사랑해]라는 작품. 아이 낳기를 거부하는 우리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 아기를 낳는 일이 힘들고, 키우는 일이 더 힘드니, 점점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사회. 그러한 사회에서 홀로그램으로 아이를 키우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


자신이 창조한 아이와 실제 아이의 차이. 과연 무엇일까? 편리함만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라주기만을 바라는 것이 과연 사랑일까? 그것이 인간의 삶일까?


이 소설은 홀로그램 아이와 실제 아이에 대한 주인공의 태도를 살펴보면서 살수록 인공물에 의존하는 우리들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이 소설집은 광활한 우주 이야기,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런 내용보다는, 우리 고전 소설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들을 만나볼 수 있는 소설집이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SF소설의 다양한 면을 만날 수 있는 소설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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