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빨치산의 딸 1~2 세트 - 전2권
정지아 지음 / 필맥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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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금서였던 책. 금서가 된 이유는 단순하다. 빨치산을 다루고 있기 때문. 빨치산이 누구인가? 북한을 주적으로 하고 있는 지금, 빨치산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었으니,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못하는 존재다.


오죽하면 종북좌빨이라는 말이 상대를 옥죄는 용어로 쓰이겠는가? 그럼에도 예전처럼 금서로 지정해서 판매를 금지할 수는 없다. 형식적 민주주의나마 이루었기 때문인데...


예전에 발간되었다가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다시 시일이 흐른 다음에 발간이 되었다는 소설.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읽어보지 못했던 소설.


그러다 의문이 생겼다. 이상하네... 소설을 읽다보니 이태의 남부군 이야기가 나오던데, 남부군이야말로 빨치산의 수기 아닌가. 그런 빨치산 수기도 판매가 되었었는데, 어째서 소설인 이 작품은 판매가 금지되었지?


  무언가 다른 점이 있을텐데... 하다못해 남부군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지 않은가. 도대체 이 소설과 남부군이 무엇이 다르지? 궁금증이 일었다.


  이런 궁금증은 읽어가면서 해소되겠지 했는데, 그래도 소설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처음 부분은 제목에 걸맞게 빨치산의 딸이 자라면서 겪는 일을 중심으로 서술이 된다.


  빨치산의 딸. 좀더 강하게 말하면 빨갱이의 딸. 1970년대 빨갱이의 딸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연좌제라는 것이 있어서 취업에도 제한이 있었기 때문. 특히 공무원이 되려면 신원조회라는 것을 해서 공산주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친척 중에 없어야 했다.


  하물며 아빠-엄마가 빨치산 출신이라면 살아가는데 엄청난 제약을 받을 테다. 그래서 좌절에 빠진 딸의 성장사가 소설의 첫부분을 장식한다. 슬프다. 자신의 의지가 아님에도 자신의 인생을 뜻대로 살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그러다 딸은 차츰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의 결과가 소설에서 펼쳐진다. 아빠의 빨치산으로서의 삶과 엄마의 빨치산으로서의 삶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개인의 경험에 기반해서 서술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사실성이 높은 소설이다. 그것도 직접 체험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니.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아산, 백운산 등등 빨치산들이 지내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고, 그럼에도 그들이 지녔던 사상, 희망이 소설 속에서 가감없이 표현되고 있다.


이런 가감없는 표현이 판매금지를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지운다고, 가린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빨치산들이 벌였던 일들 역시 우리 현대사의 일부분이다. 그러니 가려서는 안 된다.


그들이 왜 산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원하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으며, 그렇게 힘든 조건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야 한다.


사상이 다르다고 해도 역사 속에서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소설은 험난한 빨치산 생활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그런 조건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지냈던 생활들을 보여준다. 


그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좌절. 그런 역사가 있었음을 소설은 너무도 잘 보여준다. 소설로 읽어도 되지만 빨치산의 수기로 읽어도 좋을 작품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냥 읽으면 될 것을... 아직도 남과 북이 나뉘어 있는 이 현실이. 그리고 소설을 다 읽으면 어떤 점에서 이태의 [남부군]과 다른지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남한에 남겨진 빨치산들.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살아갈 수 없게 된 그들이 느꼈던 마음에 대한 서술에서 두 작품은 차이가 있으니...


이 소설을 읽은 다음 같은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 그 후 그들의 삶을 알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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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최후의 심판 + 두 개의 세계 + 삼사라 + 제니의 역 +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
한이솔 외 지음 / 허블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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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었다. 당선작 1편과 우수작 4편. 작가들은 낯설다. 낯선 만큼 신선한 느낌을 준다. 과학문학상이라는 이름처럼 소위 SF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쓴 소설. 하긴 소설에서 과학적 상상력은 늘 있어왔던 일이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다만 요즘 이런 소설들이 장르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다섯 편의 소설은 내용이 다르지만, 공간을 기준으로 나누어보면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지구를 공간으로 하는 소설, 다른 하나는 지구가 아닌 우주(공간)를 공간으로 하는 소설.


먼저 지구를 공간으로 하는 소설은 한이솔이 쓴 '최후의 심판'과 박민혁이 쓴 '두 개의 세계', 최이아가 쓴 '제니의 역'이다. 지구가 공간적 배경이지만 사건의 전개는 무척 다르다.


'최후의 심판'이 인공지능을 다루고 있다면, '두 개의 세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인간들이 나무로 변해가는 디스토피아(등장인물들의 발언에 따라 디스토피아로 또는 다른 세계로 받아들일 여지를 남겨두고는 있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나무로 변하는 일은 재앙으로 주로 여겨지니,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면, '제니의 역'은 다문화 시대에 소통을 위해 도입한 로봇(인공지능)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공지능이 판사가 되어 판결을 한다? 이것은 지금도 상상하고 있는 일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수많은 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고 하고, 그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는데, 소설은 그 점에 착안하고 있다.


하지만 제목이 최후의 심판이다. 누구를 심판한다는 것일까? 소설에서는 인공지능 솔로 3.0을 재판정에 세운다. 인공지능 판사로 탁월한 판결을 하던 솔로 3.0이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는 이유로 재판정에 선다.


재판정에서는 검사와 솔로 3.0의 논쟁이 전개된다. 결국 인공지능은 파괴되고 마는데, 최후의 심판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말일까? 아니면 인간이 인공지능을 창조해 신의 위치에까지 오르려 하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함일까?


결국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인공지능을 심판하지만, 심판 당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의미로,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배경으로 삼는 장르소설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과 같은 소설은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두 개의 세계'와 같은 소설은 지금도 진행 중인 재앙에 대해서, 그것도 인간이 모두 알 수 없는 질병들이 계속 창궐하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다만, 이 소설은 어떤 사람이 살아남는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아서, 다가올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인간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 인간인지가 나타나 있지 않다. 하긴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신이 아닌데...


'제니의 역'은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한다. 다문화 가족이 많은 지역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로봇 제니를 도입했다. 각 가정에 도입된 제니는 여러 언어를 통역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게 한다. 그럼 된 것 아닌가? 아니다. 권력은 활발한 의사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권력은 일방적인 전달을 원할 뿐이다. 자신의 말을 관철하려고 하지 다른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의 말에 거역할 수 있게, 의사소통이 잘되는 사회가 되면? 그때는 권력구조가 바뀐다.


따라서 권력자들은 언어를 통제한다. 활발한 의사소통을 막는다. 그 점을 다문화 사회에 도입된 의사소통 로봇(일도 잘하는 로봇이니, 만능로봇이라고 해야겠다)인 제니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제목이 명확하게 해석이 안 되는데, '제니의 역'에서 '역'이라는 말이 역할의 줄임말인지, 또는 수학에서 반대를 뜻하는 '역'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역'은 두 개의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이것도 문제다. 다문화 사회에서 의사소통이 잘 되게 하기 위해 한국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이주민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소리는 잘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주해 온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원주민들도 이주민들의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배워서 소통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사람들에게는 제니의 역할이라고 '역'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니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대화가 문제 없이 이뤄지도록 해주고 있기 때문에, 다문화 사회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제니가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니의 역은 제니의 '역할'이다.


반면에 기존에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제니의 역'에서 '역'은 반대다. 부작용이다. 그들의 권력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온 이 부분을 보면 이런 사실이 명확해진다.


'... 그는 집사람이 제니를 잘 활용하고 있기는 하나 그것 때문에 자신이 피곤한 일이 많아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평소 같으면 집사람이 모르고 지나쳤을 내용을 이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긴다는 것이다.' (208-209쪽)


의사소통이 원활해 지면서 권력에는 틈이 생긴다. 그동안 알 수 없던 사실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알면 과거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들에게 제니는 '부작용'이다. 이들에게 '제니의 역'은 '제니의 부작용'이다. 그리고 이런 권력 지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 부분이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제니를 파괴하는 원주민 남성. 나중에 제니의 부작용만을 보도하는 언론. 그렇게 사회는 다시 한쪽의 언어만을 강조하게 된다. 그런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누군가의 희생 위에 유지되는 사회가.


장르소설의 장점이 잘 나타난 소설이다. '제니의 역'은. 읽으면서 여러모로 토론이 가능한 그런 소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읽을 만하다. 조서월의 '삼사라'와 허달립의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가 이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이다.


우주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유가 지구가 살기 힘들어져서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야 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지구가 인간이 살기 힘든 행성으로 변해간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우주로 나아가는 소설들이 창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에 정착하려는 인간들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삼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윤회를 뜻한다고 한다. 인과응보라고 해도 좋겠다. 즉 지구와 똑같은 행태를 보이는 인간들은 다른 행성에 정착할 수 없다. 그들은 다른 행태를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다른 행성에 도달해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음을 이 소설 '삼사라'는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다. 지구를 파괴한 인간이 어떻게 다른 우주 행성에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 역시 마찬가지다. 선장을 제외한 모든 승무원들이 다른 행성의 원료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 이는 지구에서 사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결국은 지구로, 인간의 생활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결국 SF라고 하는 장르소설은 인간에 대한 물음이다. 다른 소설들과 같이. 흥미로우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소설집이다. 


특히 이 중에서 '제니의 역'은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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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 50주기 기념 신동엽문학상 역대 수상자 신작시집'이다. 2019년에 발간되었다. 그렇다면 신동엽 시인은 1969년에 돌아가셨단 말인데...


  강산이 다섯 번이 바뀌었을 시간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신동엽은 소중한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의 시도 가끔 인용이 되고, 예전에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시가 실려 있었는데...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주로 '통일'을 바라는 시였다. '봄은'이라는 시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가 있었고... 그렇게 그는 남북이 통일되기를, 남북이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를 회복해서 함께 지내기를 시를 통해서 표현했다.


  그런데 다섯 번이나 강산이 변했는데, 이놈의 남북관계는 돌고돌아 제자리로 와버렸으니...


더 갈등이 심화되고, 서로를 적이라고 하는 지경이 되어버렸으니, 시인이 알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이라는 시에서 


'총부리 겨누고 있던 /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 하더니, 눈 깜빡할 사이 / 물방게처럼 / 한 떼는 서귀포 밖 / 한 떼는 두만강 밖 /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 총칼들 내던져 버리데 // 꽃피는 반도는 / 남에서 북쪽 끝까지 / 완충지대,  /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 사랑 뜨는 반도, /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85년 3판. 76쪽.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부분)라고 했는데...


그것이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에 꾼 꿈이었다고 했는데... 그 꿈이 개꿈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꿈일 거라고 시인은 믿었을텐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신동엽 50주기 기념시집을 읽으면서 신동엽 시인이 꿈꾸던 세상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만 들었으니.


그럼에도 이 기념시집의 제목처럼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희망찰 것이라 믿고 싶다. 시인은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라고 했다. (앞의 책 106쪽-107쪽)


이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의미가 깊다. 시인의 꿈이, 바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신동엽 시인의 시처럼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송경동 시인의 '잊지 못할 여섯 번의 헹가래'라는 시를 읽으며 웃음 속에 슬픔을 느끼게 된다.


남과 북만이 아니라 아직도 제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사람이 있음을, 그들이 있음을 잊지 않으려는 시인이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고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총 21명의 시인들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한편 한편이 모두 귀한 시라 특별히 어느 한 시를 선택해서 인용하기도 힘들다. 그냥 지금 다시 '밤'처럼 어두운 시절, 어둠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다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아니 나아가야 함을 시인들이 보여주고 있음을 이 시집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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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다독 2024-02-02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통일이 되면 좋겠지만, 갈수록 어려워보이네요. 통일이 된다해도 대부분 공산국가들과 맞닿고 있어서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질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북한이 없었으면 남한이 이 정도로 안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글을 읽다보니 드네요. ㅎ

kinye91 2024-02-02 17:09   좋아요 1 | URL
통일이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요. 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사용 설명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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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는 삶이다. 자신의 삶을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경제학자에게만 맡겨서야 되겠는가? 그래서는 자신의 삶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객체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배워오지 않았던가. 그 배움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경제학자에게 경제를 맡겨만 놓아서는 안 된다.


언론에서 경제 관련 소식을 전할 때 무슨 무슨 교수(소위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사람)를 초빙해 그 사람의 말로 현 경제의 상황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언론사에서 선호하는 교수를 초빙해서 그 사람의 의견만 듣는다. 다른 의견은 잘 전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언론을 접하느냐에 따라 경제에 관해서도 다른 관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각자 다른 관점을 지니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관점만이 옳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관점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매도하는 태도가 옳지 않다는 말이다. 다른 의견도 있음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의견들을 듣고 스스로 판단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 책의 끝부분에서 저자는 바로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변화는 힘들기 때문에 이론은 지적으로는 비관주의, 의지로는 낙관주의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것이다. 경제를 경제학자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 왜냐하면 경제는 바로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내 생활을 남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서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문 지식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전문가는 말 그대로 아주 좁은 영역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하나 이상의 넓은 영역이 결부된 문제(즉 대부분의 문제)에서 다양한 인간적 필요와 물질적 제한, 도덕적 가치를 모두 고려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려 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전문 지식을 가지게 되면 시각이 더 편협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전문 지식에 약간 회의론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경제학뿐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포장을 씌운 정치적 주장인 경제학에서는 이 태도가 특히 중요하다.'(441쪽)


이 책을 읽으면 이와 비슷한 말이 계속 나온다. 장하준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남에게 자신의 판단을 의존하는 태도이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점점 어려운 용어로 포장이 되고, 이해하기 힘든 숫자들로 채워진 통계를 앞세우면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고 만다.


이런 포기의 순간, 내 삶은 경제학자들의 손에 넘어간다. 아니 경제학자들의 손이라고 하기보다는 경제학자들을 이용하는 정치권력의 손에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정치가들이 경제학자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인다. 무슨무슨 경제학 박사들이 늘 정치권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들은 현란한 용어와 통계를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나는 모르니, 전문가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내 삶에 대한 주도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된다.


장하준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경제학이 어렵다고 하지만, 전문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경제학 지식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검색을 하면 다 찾을 수 있는 시대라고 해도, 검색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경제학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경제학이 무엇인지, 경제는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 경제학에는 어떤 학파들이 있는지를 이야기한 다음에 경제학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해준다.


경제학 사용하기라는 2부에서 생산의 세계, 금융, 불평등과 빈곤, 일과 실업, 정부의 역할, 국제적 차원(무역과 이민) 등등에 대해서 설명한다. 명쾌하다. 그리고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고 여러 경제학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려주고 있으니, 전문가가 아닌 나같은 일반인들이 읽으면 꽤 도움이 된다. 경제학에 대한 거리를 조금은 좁힐 수 있다. 경제학이 무엇보다도 정치와 관련이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


그냥 경제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치'경제학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을 왜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경제가 경제로만 떨어져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는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고, 경제 정책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정치를 포함하고 있으니, '정치경제'학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여 저자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경제학 전문가들에게 경제를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는'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더 이상 경제를 전문 경제학자와 '기술 관료'에게 맡겨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처참하게 깨닫게 해 주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능동적인 경제 시민이 되어 경제의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 (444쪽) 고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이 그냥 경제학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부분에 계속 전문가에게만 맡겨두었을 때 정치와 관련이 없다고 여기고 실천을 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것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 씁쓸한 뿐인데... 그의 말을 명심하자. 아래 인용한 것이 재반복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일단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은 자신의 잘못이고, 돈을 많이 번 사람은 그럴 만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며, 열심히 노력하면 자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부자들이 살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렇게 설득당한 가난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기의 이익과 상반되는데도 부의 재분배를 촉진하는 세금과 복지 지출을 낮추고 기업 규제와 노동자 권리를 줄일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단지 소비자로서의 선호뿐 아니라 납세자, 노동자, 투표자로서 개인의 선호도 고의로 조작될 수 있고 자주 그렇게 된다. 개인은 개인주의 경제이론에서 묘사하듯 '독립의지를 가진 ' 존재가 아닌 것이다.' (197쪽)



덧글


아주 소소한 오타... 97쪽에 '러스크 벨트(rust belt)'라고 나오는데 이건 누가 봐도 러스트 벨트니 다음 판본에서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내가 읽은 책은 2023년 3월 개정판 1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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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월 시문학상 작품집을 읽는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시인. 적어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김소월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데...


  그의 시를 많이는 몰라도 또 '진달래꽃'을 몰라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는 시구를 들으면, 아, 그 시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만큼 김소월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시인을 기리는 문학상도 의미가 있다.


  아마도 시인들에게 김소월 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큰 즐거움이리라.


이 작품집의 수상 소감에서 수상자인 정일근 시인도 그런 식으로 말을 했으니... 서정성. 이것이 우리 마음을 울리기도 하리라. 김소월의 서정성이 지금까지도 우리 마음을 울리듯이, 김소월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도 계속해서 우리들 마음을 울리리라는 생각을 한다.


이번 수상작은 정일근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이다. 둥글다는 표현과 두레라는 말, 그리고 밥상이라는 말이 모두 모여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다.


모나지 않았음은, 다른 존재를 밀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래서 둥근이라는 말에서는 보름달을 연상하기도 하고, 또 보름달 중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한가위(추석)의 달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한가위의 보름달... 풍요롭고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만족을 전해주는 달 아닌가. 여기에 두레라고 하면 홀로가 아닌 함께라는 의미가 있으니, '혼밥'이 대세인 요즘과 달리 '함께하는 밥'이라는 의미로 '두레밥상'이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식구(食口)라는 말 자체가 밥을 함께 먹는 존재들이라는 의미니, 두레밥상에는 이미 식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가족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확장된 가족이 바로 식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식구들이 모여 함께 먹는 밥상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너 잘났니, 나 잘났니 싸울 필요가 없다. 


그냥 따스한 밥 한 끼 함께 먹으면 된다. 그렇게 모여 함께 먹는 밥, 함께 모이는 밥상은 둥글 수밖에 없다. 두레밥상이 둥근 까닭이 여기에 있겠다.


서로의 모난 점들을 서로 보듬어주어서 둥글게 둥글게 만드는 두레밥상. 시인이 꿈꾸던 두레밥상이 벌써 20년이 지났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두레밥상'은 의미가 있다. 우리 마음을, 몸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시를 읽으며 마음을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 듯이 그냥 내어주면 된다. 그러면 된다. 더 말이 필요없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2004년도 제18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03년 초판.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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