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토니 모리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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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술라]를 읽었다. 번역으로 읽었으니, 영어 원문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번역문으로도 참 변화무쌍한 문장을 구사하고, 작품의 구조가 특정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정확하게 이것이다라고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읽고 나서 마음에 묵직하게 무언가를 남기는 작품이었다. 미국 흑인들의 생활, 역사. (흑인이라는 말을 그냥 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표현보다는 토니 모리슨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흑인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었는데, 이번엔 [재즈]다. 재즈가 흑인 음악에서 출발했다고 들었는데, 딱딱한 형식에 갇히지 않고 변화무쌍하게 연주하는 음악이 바로 재즈라고 들었는데, 제목만 보고서 흑인 음악에 관련된 이야기인가 보다 착각했다.


읽어보니 재즈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브루스라는 말은 좀 나오기는 하는데, 그렇다면 왜 제목이 재즈일까?


당시 - 이 작품의 배경이 1926년 경이다- 흑인의 삶은 백인에 의해 차별받는 삶이었을 것이다.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지만, 짐 크로법이라든지 해서 흑백분리가 일어났던 시대고, 백인에 의해 흑인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던 때였다.


그런 때 흑인들의 삶은 어땠을까? 비참함, 그것뿐이었을까? 아니다. 그들 역시 백인들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갔다. 즉 삶의 형태는 인종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사랑하고 갈등하고 욕망하고 좌절하고.


누군가 백인의 삶은 이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리지 않듯이 흑인의 삶도 그렇다. 이것이 재즈와 비슷한 점이 아닐까?


삼각관계(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의 반복이 이루어질 것 같지만, 아니다. 변주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통해 서로의 삶을 재정립해 나간다.


도카스-조-바이올렛의 관계에서 펠레스-조-바이올렛의 관계. 얼핏 같은 구조를 지닌 갈등이 나타나고, 비슷한 상황이 전개될 것 같지만, 아니다. 다른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를 작가의 말을 빌리면 '즉흥성, 독창성, 변화, 이 소설은 그러한 특징을 가지기보다는 오히려 그 특징 자체가 되고자 했다.' (358쪽. 작가의 말에서)고 할 수 있다.


하여 이 소설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서술자인 나(아마도 작가로 추정할 수 있는)가 나오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재즈는 다음에 어떻게 변주될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 속에서 다음이 나온다.


마찬가지도 이 소설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나'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그 인물들도 자신들의 생각이나 행동을 다른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수시로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술자 또한 수시로 바뀐다. 어떤 때는 조가, 또 다른 곳에서는 바이올렛이, 또 도카스가 그리고 펠리스, 여기에 도카스의 이모인 앨리스 역시 서술자로 등장한다. 이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른 인물들이 한 이야기와 중첩되기도 하고, 그 인물들의 행동을 더 잘 이해할 수도 있게 된다.


이렇게 하나가 아닌 여러 구조는 작가가 '이 소설에서는 구조가 의미와 동등할 것이다. 그 시도는 기교를 노출하거나 감추고 규칙들을 넘어서 실행하는 것이었다. 나는 단순히 음악적 배경이나 혹은 음악에 대한 수사적인 언급을 원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 음악의 지성, 관능성, 무질서, 다시 말해 그것의 역사, 범위, 그리고 현대성이 현현될 작품을 원했다.' (359-360쪽. 작가의 말에서)고 한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한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의 관점을 만나게 된다. 또한 그것들이 모여 소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정해져 있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관계들이 모여 새로운 길을 만든다.


도시로 온 조와 바이올렛이 겪은 일들에 도카스와 같은 다른 인물이 끼어들고, 이 사건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과거의 사건들이 소환되고 있다. 하여 처음에는 이미 벌어진 사건,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과거 회상의 이야기일지 모른다고... 단순한 구조일 거라는 생각이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서술자인 '나'는 '나는 누가 다른 누구를 죽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걸 묘사하기 위해 기다렸다. 사건이 발생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과거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 없이 홈을 따라 끊임없이 돌아야 하는, 이 세상 어떤 힘도 바늘을 붙들고 있는 대를 들어올릴 수 없는, 혹사당하는 레코드와 같다. 나는 그렇게 확신'(337쪽)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재즈는 그러한 변화없는 틀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그래서 소설에 나오는 이 문장은 바로 실재하는 삶은 고정된 삶이 아닌 변화무쌍한 삶임을 깨닫게 한다.


'이제 내가 보는 그들은 미래의 오후 햇살에 윤곽선이 흐릿하게 번진 움직임 없는 묵화가 아니다. 지나간 과거와 미래의 당위 사이에 붙들린 존재가 아니다. 나에게 그들은 실재하는 존재다.' (346쪽)


이미 정해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은, 인생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즉흥적으로 독창적으로 변화할 수밖에 없다. 관계 속에서... 그러한 관계가 만들어가는 삶. 그것을 1920년대 흑인들의 삶을 통해서 작가는 보여주고 있다.


오랜만에 읽은 토니 모리슨의 소설. 특정 인종의 삶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여러 면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소설 제목이 된 '재즈'는 소설의 내용, 구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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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공지능 시대에 인공지능이 시도 쓴다. 그렇다면 시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닌 것인가? 시에도 물질과 같은 구조가 있는 것인가. 아니, 시가 물질인 것인가.


  시가 물질이라면 인공지능도 당연히 시를 쓸 수 있다. 물질적인 것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인공지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단순하게 시는 물질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시에는 물질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언어의 기본적인 기능인 의사소통 말고도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어떨 때는 누군가와 의사소통하는 것이 아닌, 자신과만 소통하기도 하는 그러한 기능도 있기 때문에, 시는 단순한 물질은 아니다. 그렇다고 물질이 아니라고 하기도 그렇다. 언어로 쓰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우리 눈에 물질처럼 눈에 보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게 해주는 것, 그것이 언어다. 이렇게 언어로 이루어진 시도 역시 물질이 될 수 있다. 물질의 개념을 넓게 보면 말이다. 


물질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물질이 우리 세계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물질은 우리 생활과 뗄 수 없고, 또 우리 생활에 끊임없이 들어와 우리를 끌어들인다.


시는 그러한가? 시가 물질이라고 해도, 이 물질을 가깝게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한 이 물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쓸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다. 시집을 꽤 읽었다고 하는 나도 시는 아직도 미지의 세계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 물질이다. 그러니, 시는 물질이라고 해도 우리의 생활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물질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냐면 시집의 제목이 된 '시와 물질'이란 시 마지막 구절에 이런 말이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가 / 폭발물도 독극물도 되지 못하는 세상에서 / 수많은 시가 태어나도 달라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시와 물질' 중에서. 67쪽)


참 많은 시가 나오는데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시의 영향력이 참 적다는 시인의 한탄일 수도 있다. 물질의 폭발력에 비해 시의 파급력은 별로 크지 않다는 시인의 자조가 아닐까 하는데...


그렇지만 시의 파괴력은 물질의 폭발력처럼 순식간에 터져 나오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다시 사람들을 손잡게 한다. 시는 그때까지 서두르지 않는다. 먼저 나서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길을 간다. 사람들 마음 속으로. 결코 서두르지 않고.


이런 시의 모습이 바로 '평화의 걸음걸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과 통하지 않을까 한다. 시가 지향하는 것은 결국 평화다. 달라진 이 세상은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평화의 걸음걸이란 / 총탄의 여울을 건너는 숨죽임과도 같은 것 / 두려워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두려움과 싸우며 / 총탄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나 기척으로 걸어가는 것 / 심장을 겨눈 총구를 달래고 어루만져서 거두게 하는 것 / 양쪽 산기슭의 군인들이 걸어내려와 서로 손잡게 하는 것 / 무릎으로 무릎으로 이 땅의 피먼지를 닦아내는 것' ('평화의 걸음걸이' 중에서. 89쪽)


시란 물질은 이렇게 평화의 걸음걸이와 같다. 이 세상의 속도에 맞추지 않는다. 자신의 속도로, 갈등이 아닌 화해로, 함께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천천히,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쉬지 않고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시 아닐까? 하여 시인은 세상을 달라지게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아주 조금씩 조금씩 세상이 달라지게 하는 것이 시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하여 시를 가까이 하고 시를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어느 순간 달라진 세상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번 시집에 있는 시들이 현대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사회의 모습을 환기하면서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으니, 그럼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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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생각 사는 핑계 매일과 영원 11
이소호 지음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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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호 시인. 내게는 낯선 시인이다. 아니 들어본 시인이다. 예전에 쓴 글을 읽다가 이소호 시인의 시를 인용한 글을 발견했다. 햐, 내가 이 시인의 시를 읽었구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시집을 산 기억이 없다.


찾아본다. 시집이 없다. 역시 사지 않았군. 그렇다면 어디서 읽었을까? 분명 읽었기에 시를 인용했을 텐데... 그 시에 섬뜩한 마음이 들었던 것을 기억하는데, 우리 사회가 지닌 모습을 이리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검색해본다. '이소호'라는 이름을 치고, 어떤 책들을 냈는지 찾아본다. 그러다 아, 여기서 이소호 시인을 만났구나, 발견한다.


[2021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수상후보작에 이소호 시인 이름이 있다. 여기였군. 다시 펼쳐본다. 예전에 읽었을 때보다는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워졌다. 왜냐? 바로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쓰는 생각 사는 핑계]


이소호 시인의 자전적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자신의 생각을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시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면 그 시가 더 친숙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서 다시 읽은 이소호 시인의 시 몇 편은 내게 더 잘 다가왔다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시집을 읽고, 그 다음에 시인의 에세이를 읽는데, 이번에는 순서가 바뀌었다. 뭐, 바뀌면 어떠랴, 내 맘에 드는 글을 읽는 즐거움을 주었는데... 시집을 읽기 전에 시 몇 편은 읽지 않았는가.


이 에세이 읽기는 즐겁다. 시인이 왜 시를 쓰냐고? 쉽게 말하면 먹고 살기 위해서다. 얼마나 진솔한가. 뮤즈가 영감을 줘서 나는 그냥 받아쓰기만 했을 뿐이라고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서 더 좋다고나 할까.


시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먹고, 자고, 싸는 사람임을, 그 역시 소비하는 인간임을 알게 되니, 소비하는 인간, 현대를 함께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자신이 느낀 점을 시로 썼다는 점을 알게 되니 시인이 한결 친숙하게 느껴진다.


나만의 느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렇게 솔직한 사람이 좋다. 취미가 쇼핑인 시인이라니... 생각해 보지 않았던 모습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제목에 쓰인 두 단어 '쓰는, 사는'이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우선 '쓰는'이란 말은 시인이니까 '글(시나 소설, 에세이)을 쓰는'이라는 뜻과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돈을 쓰는'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러고보니 둘 다 '쓰는' 행위였구나 하는 생각. 그럼 돈을 쓰기 위해서 글을 쓸 수도 있겠구나, 시인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분야를 직업으로 가진 생활인으로 봐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으니...


시인 역시 이 글에서 자신의 책을 팔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단지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팔기 위해서다. 살아야 하니까. 그래서 출판사가 아닌 자신이 직접 여러 상품(굿즈라고 하는데)을 만들어 함께 주기도 한다고 한다. 쓰기 위해 쓰는 모습을 이 책에서 많이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그런 모습 속에서 좋은 시도 나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는'이라는 말도 '삶을 사는'이라는 뜻과 '물건을 사는'이라는 뜻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핑계라는 말을 의미라는 말로 바꾸면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면 더욱 알찬 삶을 살 수 있다고, 또 어려운 지경에 처하더라도 의미를 잃지 않으면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 치료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의미는 삶에서 중요하다. 그와 더불어 물건을 사더라도 의미를 부여한다면 더욱 가치가 있겠지.


이 책을 보면 정말 많은 물건을 사는데, 이 물건들을 사는데 나름의 기준이 있다. 이 기준이 바로 핑계라고 할 수 있지만,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무언가를 주기 때문에 물건을 사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정말 다양한 물건을 사는 모습이 이 책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그런 글을 읽으면서 과소비라는 생각, 낭비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마도 시인의 핑계가 내게 통했나 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시인의 시집을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시인이 이 에세이를 쓴 목적이 달성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사고 싶다인데, 샀다가 되는 순간, 시인의 바람에 부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자신의 글이 묻혀 잊히기를 바라지 않으니까. 누군가에게 계속 읽히길, 시집도 물건처럼 그 사람 곁에 머물길 바라니까.


곁에 두고 어느 순간이라도 꺼내 볼 수 있는, 때로는 잊고 있다가도 아, 이 시집이 있었지 하면서 빼어 읽을 수 있는 물질로서의 시집을 사람들이 지니길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도 시인의 기준을 한번 적용해 볼까.


좀 시간을 두고 꿈에 시집이 나오면 사는 걸로, 아니면 계속 시집 제목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으면 사는 걸로... 하하.


즐겁게 읽었다. 그러면서 시인이 자신에게 시란 무엇인지를 말한 이 글은 기억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여기에 옮겨 적는다.


'나에게 시란, 인생에서 시선을 고이 두고 오랫동안 툭 잘라 기억하고 싶은 한 장면을 뜻한다. 그것이 비극일지라도 나는 필요하다면 잘랐고, 세밀하게 관찰했고, 그 시선을 단 한 차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 시는 모났다. 불편했다. 그리고 가끔은 아름다웠으며, 처연했다.'(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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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전쟁 - 가장 사적이면서도 공적인 공간에서 펼쳐진 특권, 계급, 젠더, 불평등의 정치
알렉산더 K. 데이비스 지음, 조고은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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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인간 생활에서 필수적인 요소다. 식사와 배출은 우리 인간이 생존하는데 하지 않을 수 없는 행위 아닌가. 


이런 화장실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지금도 있다. 어떤 화장실이냐에 따른 갈등인데, 우리나라에서도 최근에 성중립 화장실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를 두고 갈등이 일기도 했다. 트랜스젠더들을 위한 공간 아니냐고, 아직도 케케묵은 윤리 운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성중립 화장실에 대해서 찬성하고 있다.


누구도 눈치보지 않고 화장실을 이용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 화장실을 놓고 다양한 갈등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젠더 갈등으로만 국한시켜 보자.


예전의 화장실은 남녀 구분이 없었다. 누가 힘들었을까? 여성이다. (논의의 편의를 위해 법적으로 인정하는 단 두 성만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화장실 문제 또한 제기할 수밖에 없다.


남녀 분리 화장실이 만들어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성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의미에서 남녀 분리 화장실이 만들어졌다. 거의 같은 크기로?


다시 문제가 된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시간이나 행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심심찮게 보는 모습이 남녀 화장실 앞에 줄이 길다면 이는 십중팔구 여성화장실 앞이다. 


그래서 화장실 비율이 대두되었다. 남자 변기보다 1,5배 이상 많은 변기를 배치해야 한다는 주장. 그것이 받아들여져 여성의 화장실이 더 확장되어 편리를 증진시키고 있다. 이게 평등일까?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트랜스젠더와 같은 사람들은 어느 화장실을 이용해야 할까다. 그러니 이제는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온다. 그렇게 만든다. 성중립 화장실을 만드는 과정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이러한 화장실을 두고 겪어온 갈등들도 잘 나와 있고.


성중립 화장실을 만드는 문제가 미국의 진보적인 대학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들의 진보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으니... 또한 그러한 대학들은 지명도만큼이나 재원을 쉽게 확보할 수 있었기에 빠르고 쉽게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다른 계급, 계층의 문제가 발생한다.


화장실을 두고 단지 성별 갈등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특권층은 이상하게도 진보적인 문제에 쉽게 접근한다. 그리고 수용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들의 특권을 뒷받침하는데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고 싶어도 하기 힘든 곳이 있다. 법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남녀 분리 화장실이 있는 곳에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려고 하면 배관의 문제, 즉 건축의 문제가 발생한다.


쉽게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장소에 만들고 싶은데, 기존 건물이 지니고 있는 환경이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화장실에는 역사가 개입한다. 문화와 건축이 개입한다. 또 재력, 돈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각 장에 걸쳐서 잘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중립 화장실은 확산되어 나갔다. 지금도 확산 중이다. 왜냐하면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가족들, 장애인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 모두에게 이로운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즉 사회적 약자층이 쉽게 이용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더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 건축, 시설의 기준을 약자에게 두어야 한다. 가장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 쉽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여 이렇게 만들어진 화장실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사회적 편리가 증대한다. 여기에 많은 젠더 갈등들이 있었지만, 조금 더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는 쪽으로 화장실이 개선되어 왔음은 자명하다.


왜 화장실인가 했더니, 이 화장실에 젠더 갈등을 볼 수 있는 요소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관습과 문화 또 갈등들을 볼 수 있고, 특권층이 오히려 더 쉽게 화장실을 개선하고 있었다는 다소 의외의 모습 (그것이 바로 자본의 힘이기도 하고, 그들이 계속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약자들에겐 도움이 되는 방향이기도 했다)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화장실은 단지 젠더 차원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장애-비장애, 부유층-빈곤층, 명문대-비명문대, 보수-진보, 관습-개혁 등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그래서 지금 화장실을 보면 어떻게 사회의 관습이 변해왔는지를 파악할 수가 있으니... 성중립 화장실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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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받아치기'


  먼저 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치기 위해 들어오는 상대에게 펀치를 날리는 일. 


  한 방에 역전하기. 또는 극적인 역적을 바라는 행위일 수도 있다. 당하고만 있을 수 없기에 온 힘을 실은 펀치를 날리는 일.


  적중해야만 한다. 적중하지 않는 순간, 그 다음 나는 상대의 펀치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여 카운터펀치는 힘과 속도, 그리고 정확성이 필요하다. 공격해야 할 때와 방어할 때를 아는 것. 공격해야 할 때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 민첩성, 폭발력. 


삶에서 카운터펀치를 날릴 만큼 위기에 처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디 삶이 뜻대로 되던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공격하는 수많은 것들. 그것들이 나를 툭툭 건드리고 톡톡 치고 때로는 세게 때려 나를 휘청거리게 하지 않던가.


금속도 피로가 쌓이면 깨지게 되는데, 삶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렇다면 더이상 깨질 정도까지 당하지 않도록 카운터펀치를 날려야 한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삶에서 누구나 이런 카운터펀치 한 방쯤은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무력하게 당하다 쓰러지기보다는 한 방 카운터펀치를 날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삶을 파고들어 나를 점점 줄어들게 만들고 있는 시대에, 나는 내 삶을 위해 한 방을 지녀야 한다.


다만, 그 카운터펀치는 길게 자주 써서는 안 된다. 길면 카운터펀치가 아니라 단순한 공격이고, 자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단 한 방. 아주 짧게. 순간적으로 강한 타격. 그리고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카운터펀치 아니겠는가.


김명철 시집을 읽으며, 도대체 제목이 된 시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찾는 것 그만두기로 했다. 그것 역시 시인이 지닌 카운터펀치일 테니.


그러면서 우리가 카운터펀치를 날려야 할 때를 이 시를 읽으면서 찾아야 한다고... 카운터펀치는 기회를 엿보다 날리는 단 한 방이니까. 그렇게 내 삶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들 중 쫓아내야 할 것에 날릴 수 있는 카운터펀치. 하나쯤 지니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틈


몸과 마음을 단단히 여며도

당신은 아무도 모르게 습격당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전면적이어서

낮과 밤 뼈와 살을 구분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는 은행알과

육삼빌딩과 모난 돌과 핸들 꺾인 세발자전거와

지표를 뚫고 올라오는 지하철 탄 사내가 여자가 당신을 습격해온다


빈틈없는 생활

방심하지 않는다 해도

어느 틈엔가 당신에게 틈이 생기기 시작한다 틈은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나가고 당신은

저항하다 마침내 붙들리고 만다


그 틈으로 당신의 절반이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당신은 마지막 일전을 치를 수도 투항할 수도 없다

틈은 처음에 은밀하게 찾아와서 그러나 나중에는

당신을 완벽하게 장악한다


김명철, 짧게, 카운터펀치. 창비. 2010년. 112-113쪽.


나를 완전하게 장악하기 전에 치를 수 있는 마지막 일전, 그것이 바로 카운터펀치 아니겠는가. 그러한 기회를 놓치면 '완벽하게 장악당'할 수밖에 없다.


방심하지 않아도 나를 파고드는 틈. 그러한 틈을 인식하려고 해야 한다. 내가 다 빠져나가기 전에. 적어도 그 전에 카운터펀치 한 방은 날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기에 이기지는 못해도 종료 소리와 함께 골을 넣는 버저비터와 같이, 그렇게 내가 내뻗은 카운터펀치로 내 삶의 주체가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버저비터'-60, 61쪽- 참조. 시인의 시에서는 버저비터는 성공하지 못하고 말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본다. 시도조차 하지 못하면 더 힘든 삶이 될 테니.


그래서 나는 내게 언제든 뻗을 수 있는 한 방, 카운터펀치를 간직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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