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까지 다섯 걸음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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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소설들. 이 길이를 지구의 종말에 비유한다면 어떨까? 그만큼 지구의 종말까지 남은 기간도 짧지 않을까?


우주가 탄생한 지가 약 138억 년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 지구는 한참 뒤에 태어났고, 그 지구에 인간이 나온 것은 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우주의 나이로 보면 갓 태어난 아이가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격이라고나 할까? 우주에 늦게 온 자가 우주의 종말을 앞당기고 있다는 현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류가 하고 있는 일 아닐까.


그런데도 종말을 부정한다. 지구에서 살아갈 날이 무한하다고 여기는 듯이 살아가고 있다. 점점 지구는 살기 힘들어지고 있는데... 그래서 우주에 인간이 살 수 있는 행성을 개척하자고 하는데... 화성으로 인류를 이주시키자고 하고도 있는데...


[종말까지 다섯 걸음]이란 소설 제목을 봤을 때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를 떠올렸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 과정을 볼 수 있는데, 그런데 인류의 종말 앞에서도 과연 이 과정을 밟을까. 비슷할 거라는 생각은 하는데... 소설집은 이 과정을 약간 다르게 표현했다.


'부정-절망-타협-수용-사랑'


이러한 다섯 단계를 통해 다른 내용의 짧은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이 주제들의 맨 앞에 실린 소설은 연결이 된다. 연작소설로 봐도 된다. 그렇지만 나머지 소설들은 딱히 연결이 된다고 볼 수는 없는데... 그럼에도 종말이라는 주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냥 각 주제의 처음에 실린 소설 제목을 보면 '종말을 부정하고 - 종말에 절망하고 - 종말과 타협하고 - 종말을 수용하고 - 마침내, 종말을 사랑하고'로 되어 있다. 이 소설들에서 각 장의 주제가 만들어졌다고 보면 되는데...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예정이란다. 그때 지구는 파괴될 것이고, 모두가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현실 앞에 소행성을 폭파한다는 영화 '아마겟돈'과 같은 일은 불가능하니, 인류가 지구에서 벗어나는 길밖에는 생존의 방법이 없다.


우주선을 만든다. 방주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를 보라. 모든 생명체가 탈 수 있는가? 아니다. 선택받은 소수만이 탈 수 있다. 생명의 가치가 동등하다면 우주선에 탈 수 있는 존재와 타지 못하는 존재를 어떻게 가를까? 여기서부터 갈등이 시작된다.


배제된 사람들은 이판사판이 된다. 어차피 이들은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 물귀신 작전을 쓰기도 한다. 나만 죽을 순 없다가 된다. 그럼 선택받은 사람들은? 우린 살 수 있다. 그러니 살아야 한다가 된다. 저들과 다른 우리가 생겨난다.


이때 죽기살기로 덤비는 사람들이 우주선을 파괴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인간은 또다른 우주선을 만들어낸다. 물론 탑승 정원은 대폭 줄어든다. 이 줄어든 인원을 어떻게 선발할 것인가? 


이미 첫 선발 때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이 우주선 기지로 왔다. 그 다음에는 제비뽑기다. 추첨으로 결정하면 된다. 그 전에 자발적으로 남을 사람을 모집한다. 그리고 추첨. 과연 추첨은 공정한가?


과학기술의 발전 앞에서 추첨 역시 조작이 가능하지 않을까? 여기서도 권력과 이익이 개입하지 않을까? 작가는 그 점을 암시하고 있다. 그렇게 우주로 나아가는 사람들. 남은 사람들. 이제 남은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마지막 소설에서 남아 있는 사람의 '사랑과 행복'이 펼쳐진다. 그렇다. 무엇인가를 욕망하지 않을 때 그 자체로 사랑을 찾고 행복할 수 있음을...


종말까지 남은 시간의 길이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하루하루가 충만했고 행복했으며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으니까. 


'아직도 우리에게 삼 일이나 있다는 거야.'(208쪽)라는 말에서 이들은 종말까지 충만한 나날들을, 사랑으로 넘치는 나날들을 보낼 테니, 그 나날들이 결코 불행하지 않다.


지구의 종말을 이야기하지만, 아니다. 어차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니 그 끝을 거부할 수는 없다. 끝을 거부할 수 없다면 현재를 다시 정립해야 한다. 현재에 살아야 한다.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존재들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한 사랑으로 현재를 채워야 한다. 그러면 종말까지 다섯 걸음이라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다. 다섯 걸음이나 남았으니까. 그동안 사랑할 일이 너무도 많으니까. 


하여 이 소설집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지구의 종말이 다가온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인류세라는 시대 개념을 만들자고 할 정도로 인간이 지구에 해를 끼치고 있는데, 지구의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데, 이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할까? 마지막 소설에서 그에 대한 해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연결되는 다섯 소설말고도 마음을 울리는 소설들이 있으니, 찬찬히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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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 왕국 - 연산군부터 윤석열까지, 권력은 왜 신을 빌리는가 카이로스총서 117
김가현 지음 / 갈무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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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부터 윤석열까지 권력은 왜 신을 빌리는가'라는 작은 제목.


조선시대 몇몇 왕들을 살피면서 윤석열까지 분석하고 있는 이 책은 주술이라는 사적인 영역이 정치라는 공적인 영역에 들어왔을 때 어떻게 파국에 이르는지를 잘 살피고 있다. 아니 이미 파국에 접어들 징조가 보이는 정권이 주술을 활용한다고 해야 할까.


주술은 예방적 차원이 아니라 결과를 옹호하기 위해서 끌어들일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합리적이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얻지 못할 때, 그렇지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 싶을 때 동원하는 것이 바로 주술이다.


주술은 합리와 이성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기 때문에, 여기에 어떤 과학적 합리성이라든지, 논리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하면 좋대 이것이 바로 주술 아닌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좋지 않다고 해 하는 것. 


이분법이다. 따르든지 따르지 않든지. 여기에 이성으로 분석하고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주술은 철저하게 사적인 영역이다. 개인의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기도를 하든, 굿을 하든 그것이 개인에 국한될 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남과 엮이면, 남을 저주하는 데 쓰이거나 (이 저주의 효과가 있든 없든 이것은 남을 해코지 하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는 것이니 이미 좋지 않다)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오면 커다란 문제를 일으킨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볼 때 주술이 공적인 영역에 들어온 경우가 많았겠지만 이 책에서는 세 명의 왕을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연산군, 광해군, 고종. 두 명의 왕은 조나 종이 붙지 못하고 군이 되었는데, 이는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뜻이고, 고종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 역할을 한 왕이니, 이 세 왕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그들에게는 부정적인 면이 많음은 인정해야 한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주술을 권력 행사에 활용했고, 결국 권력이 붕괴되었다는 것인데, 저자는 '주술 의존형 권력 붕괴 모델'이라고 4단계를 제시한다. (38-41쪽, 239쪽)


1단계 : 권력 기반의 취약성과 불안의 발현 (취약한 정통성을 가진 권력의 불안)

2단계 : 공적 시스템의 붕괴와 고립 (소통을 거부하는 고립)

3단계 : 비합리적 대안의 부상과 도구화 (이성적 근거가 결여된 대안에의 의존)

4단계 : 자기 파괴적 악순환과 몰락 (자기 파괴적 몰락)


이 단계를 보면, 앞에서 언급한 세 왕에게 모두 해당이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불안 속에서 소통을 하지 못하고 주술에 빠져 결국 권력을 잃게 되고 만다.


하지만 이들은 조선시대라는 시대 상황 속에 있었다. 왕국이었다. 절대 권력으로 존재한 왕은 신하들의 의견을 듣기도 하지만 자신의 말을 일방적으로 전할 수도 있었다. 비록 조선시대에 삼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라고 해서 왕을 견제하는 기관이 있기는 했지만 이들이 지닌 한계는 명확했다. 


그럼에도 유교를 표방한 조선에서 주술에 의존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었다. 하여 주술에 의존하는 왕들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신하들은 수시로 상소를 통해 바로잡을 것을 건의했다. 그럼에도 그것을 굽히지 않고 밀어붙였던 왕들의 최후는 결국 몰락이었다. 주술을 정치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주요 수단으로 활용했던 왕들의 최후.


연산군 때의 무당이나 광해군이 풍수지리를 신봉해 궁궐을 짓고 천도를 하려 했던 이유, 또 고종이 비선 특히 흥선대원군과 민비(명성황후라고 해야 하나 - 이 둘 역시 강력하게 주술을 이용했으니)에게 휘둘린(?) 모습들은 위의 네 단계에 맞아떨어진다.


이런 역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렇게 하면 망한다는, 절대로 이들과 같이 하면 안 된다는... 그래서 역사의 기록을 살피고 미래를 예측해 현재를 살아가고자 하는 것 아니겠는가.


특히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더더욱 그래야 한다. 그 권력이 자신의 사적인 영달을 위해서 쓰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발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권력자의 말과 행동은 사적이지 않고 공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실시하려 하는 정책은 공개되어야 하고 토론되어야 하며, 합리적이어야 한다. 즉 공개되어야 하고 많은 논의를 통해 결정되어야 한다. 여기에 다른 사람들의 비판이 있어야 하고,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을 통해 공적인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이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당연히 이루어져야 할 모습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의견을 막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며, 사적인 영역을 공적인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정치가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 


그런 자격 없는 사람이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할 의무가 국민들에게 있기도 하고. 그러니 이 책의 끝부분에서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주술적 언어가 정치를 잠식하려 할 때 그것을 한낱 가십으로 소비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협하는 명백한 위험 신호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퇴보한 역사의 민낯 앞에서 우리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시대적 책무다.'(240쪽)


이런 민주주의 나라에서, 선진국이 되었다는 대한민국에서 세상에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손바닥에 왕(王) 자를 쓰고 나왔는데, 그런 사람을 지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왕국이 아니라 민국인데... 민국에는 왕이 없는데,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데도 대통령의 부인을 '국모'(222쪽 주 참조)라고 하는 국회의원이 있다는 사실에 할 말을 잃기도 하는데... 이건 그냥 가십으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다.


왕(王)처럼 군림하는 사람이 대통령인 민주주의 국가는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런 대통령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그러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 다음 단계는 이 책에서 언급한 권력 붕괴 4단계를 밟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했고.


읽으면서 연산군, 광해군, 고종의 실패를 모두 합친 실패를 한 권력자가 현대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사실. 세 왕들이 행했던 것들을 모두, 마치 선물 종합세트처럼 다 행한 그러한 인물이 존재했다니... 이 책에는 그러한 모습이 잘 분석되어 있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 왕국이 아닌데, 왜 여전히 왕국이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지...


이런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어떻게 되는지, 저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맺는다.


'주술에 빠진 권력은 단순히 세상을 잘못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기어코 파괴하고야 마는 것이다.' (226-227쪽)

'무속은 그 자체로 현세의 이익과 복을 추구할 뿐,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지향하는 윤리적 체계나 공공성이 결여되어 있다.'(235쪽)


무속을 없애자는 말이 아니다. 공과 사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사적인 것이 공적인 영역에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고. 


명쾌한 분석, 구체적인 역사적 사례. 그리고 이해하기 쉬운 설명으로 주술이 어떻게 권력에 이용되었고, 그들이 어떻게 몰락해 갔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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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에 침묵하는가 - 잔해 속의 그리스도
문터 아이작 지음, 김상기 옮김 / 동연출판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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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휴전 협정을 맺었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보았다. 휴전 협정이라니? 이들이 언제 전쟁을 했던가?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가자를 공격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거나 쫓겨난 사건 아니었던가. 여기에 무슨 휴전? 그냥 잠시 이스라엘이 공격을 멈추었다고 봐야겠지.


공격을 멈추었다는 표현을 이 책을 쓴 문터 아이작이 본다면 어이 없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분쟁'이 아니라, 그러니까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니까.


몇 십 년에 걸친 학살. 하지만 세계는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인권을 중시하는, 홀로코스트는 절대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참극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상하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벌이는 일들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들은 하마스의 무차별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방어에 나섰다고 옹호하고 있다. 


이에 문터 아이작은 몇 십 년 동안 이스라엘에 의해 자행된 일들을 고려하지 않은,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한 시점을 분쟁의 시작으로, 아니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방어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옹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역시 학살에 동조하는 일이라고...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의해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되기도 했다. 이 책에 보면 '(2024년) 1월 26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이 집단학살방지협약을 위반하는 행동을 저질렀을 '개연성'이 있다고 판결했다'(162쪽) 그러면서 임시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기가 막힌 일은 다음에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의 임시 명령이 나온 다음 날,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핀란드, 호주 캐나다 정부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 UNRWA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163쪽)니...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보면 비록 '개연성'이라고 했지만 이스라엘이 집단학살방지협약을 어겼다는 판결인데, 이스라엘에 압력을 넣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을 돕는 기구에 대한 억압에 들어간 것. 그것도 우리가 인권 선진국이라고 믿고 있는 나라들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만큼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미디어를 움직이고 있고, 또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굳건한 동맹을 맺고 있으니... 그 동맹으로 인해 트럼프가 강제하다시피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가자 지구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고 하니...


그러한 공격이 학살임을 증언하고 있는 문터 아이작.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기독교 목회자이다. 그의 종교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다. 그래서 그는 서구의 기독교가 이런 학살에 침묵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와도 맞지 않는다고, 세계의 기독교가 이러한 학살에 침묵하는 것은 학살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팔레스타인이 처한 현실을 알리고 있다. 함께 행동하자고 하고... 단순히 기도가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고 성경을 인용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놀랍다. 이슬람을 증오하는 것이야 이해하겠는데, 같은 기독교도들이 살해되고 있는데도 기독교 단체들이 침묵하고 있다니... 아니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민족, 국가가 중요한가? 이들이 어느 민족, 인종, 나라 사람이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나? 그러면 안 되지 않나?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음을 팔레스타인 목회자인 이 책의 저자 문터 아이작이 말하고 있다.


'너무 오랜 세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무시당하고, 비인간화되고, 심지어 악마화되어 왔다. 우리는 종종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경험이 폄하되고, 존재 자체가 배제되었다.'(230쪽)고 토로하고 있으니... 이건 아니다 싶다.


이런 내용,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이 책 곳곳에 나타나는데... 그렇다고 문터 아이작이 하마스를 지지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하마스는 이슬람이고 이 책의 저자는 기독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폭력에 반대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역시 비폭력,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지 않은가. 그러니 기독교도가 폭력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폭력도 구분하고 있으니... 


하마스를 반대하지만 그런 그이지만 하마스의 변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마스 역시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시온주의라고 하고 있는데, 이 책의 저자 역시 시온주의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시온주의는 침략주의고, 폭력이라고.


분명 학살이 일어났고, 이에 대해서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학살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반유대주의로 뭉뚱그려 비난하는 것은 문제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학살에 반대하는 것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다. 홀로코스트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 책에 보면 이러한 반대 운동에 유대인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고 하니, 가자 지구 침공에 반대하는 것을 반유대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기독교 단체에서 이러한 학살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성경에도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너희가 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태복음 25:40, 45)라는 말이 있다. 앞의 문장은 천국에 가는 사람을 의미하고, 뒤의 문장은 지옥에 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어려운 사람을 도왔느냐, 모른 체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데,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작은 자에 속하는 사람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기독교인이 어떻게 천당에 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꼭 기독교인만이 아니겠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읽으면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했고,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에 조금의 위안을 받기도 했는데...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희망을 선택한다. 살아남기를 선택한다. 존재하기를 선택한다.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끝까지 주장하기를 선택한다. 우리는 회복할 것이다. 회복의 뿌리를 인내에 두고, 우리 민족을 위한 정의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382쪽)


이런 희망, 이런 인내를 그들은 '수무드'라고 한다고 한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게 팔레스타인이 회복되기를... 종교인들이 이러한 환난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그들에게 희망이 되기를,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저자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사람들과 함께한 '잔해 속의 그리스도'가 많은 반향을 얻었다고 한다. 재난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학살이 없어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정보를 다양한 방면에서 얻는 것이 중요하니까.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진 출처 : https://www.instagram.com/p/DQdkMLugZT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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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5-12-06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5-12-07 00: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서 열전 2 한서 열전 2
반고 지음, 신경란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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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엄청난 양이다. 벽돌책이라고 하기도 한다. 1000쪽이 넘는 분량이니. 중국 한나라 때의 인물들을 수록했으니 양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능력 있는 사람들과 또 역사에 남길 인물을 선정해서 수록했으니...


하지만 열전에 포함된다고 해서 모두 본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다. 또한 모두가 잘살았던 것도 아니다. 끝이 안 좋은 사람도 많았고, 자신 때는 성공했을지라도 자식 대에, 그것도 아니면 자손 대에 망한 집안도 꽤나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전제군주 시절이니, 능력보다는 황제의 인정을 받아야 살 수 있었던 시대의 한계가 명확하다.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건의해도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면 사형에 처해졌으니... 상소문을 보면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는 그만큼 목숨 걸고 의견을 내야 하는 시절이라는 말이다.


또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자리를 보전할 수는 있겠으나 사서 편찬자의 말에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반고가 찬하여 말한다에서 00는 수년 간 승상이라는 직위에 있었으나 특별히 공을 세우지 못했고, 자리만 지켰다고 하는 인물들이 꽤 있었으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하는 승상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는데 중국 한나라 때 승상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갔다는 얘기고,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런데도 이들의 목숨은 파리와도 같아, 황제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으니...


열전을 쓴 이유가 무엇인가? 역사 속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찾으라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황제라는 절대 권력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면, 이런 열전을 읽으며 목숨 보전을 하기 위해서는 또 집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려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반대로 그렇게 목숨을 부지해도 욕된 이름만 남기니까 좋은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껴서는 안 된다고, 옳다고 여기는 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2권에서는 무신에서 문신으로, 즉 나라를 세우고 안정을 이뤄가는 과정이 지나 이제는 안정기에서 다시 쇠퇴기로 접어드는 때에 활동했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 무신보다는 문신의 비중이 커지고 있고, 이들을 통해서 유학이 중용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유학이 나라의 학문으로까지는 정립되지 않았음을, 황제에 따라 또 열전에 나오는 인물에 따라 유학을 숭상하고 공부한 사람과 다른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 함께 실려 있음으로 알 수 있다.


여기에 인재를 추천하는 방식도 여전히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하여 과거제와 같이 선발로 관리를 뽑는 제도는 더 뒤에 나올 것임을...


이러한 추천제는 장점도 있지만 추천하고 추천받은 사람끼리 작당한다는 문제도 있으니 능력있는 사람을 어떻게 발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황제가 중심일 수밖에 없는 전제군주 시대에는 그러한 인재들을 잘 등용하는 것이 백성들에게도 행복한 시절을 만들어주는 길이었을 텐데, 다른 말로 하면 '적재적소'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알게 해주는 '한서열전' 2권이다.


이 권에서 주목한 사람은 '금일제'다. 투항한 흉노의 태자라고 하는데, 무제에게 중용되어 무제 사후에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꼭 필요한 인재라면 국적을 따지지 않고 중용하는 황제. 그러한 황제를 통해 '적재적소'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데...


뒤로 갈수록 '적재적소'라는 말이 무너지면서 아첨을 일삼거나 또는 외척 세력이 대두하는 모습을 '한서열전' 2권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 나라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적재적소'


이 말은 지금도 유용하다. 선출직으로 대통령을 뽑지만, 그 대통령을 뽑는 과정에서도 이 말을 생각해야 하지만, 선출된 대통령이 임명하는 많은 장관들과 다른 공직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과연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제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많을수록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통령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미디어가 발달해서 많은 것들이 공개된 세상에서도.


착각 속에 살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열전'을 읽을 필요가 있다. 중국 한나라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니까. 그들의 다양한 행적을 통해서 지금을 살필 수 있으니까. 


적재적소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은 '유취만년',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유방백세' 아니겠는가... 그 점을 명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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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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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의 아침식사라는 제목을 생각한다. 제목을 보고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예상한다면 소설을 읽으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게 소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어쩌고 저쩌고'다. 그렇다. 우리가 흔히 기타 등등이라고 하는 etc.가 소설에 나오기도 하니, 왜 이렇게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걸까?


수많은 이야기를 이렇게 섞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읽다보면 이야기가 연결이 되기도 한다. 작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뤄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제목이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먹고 자고 싸기. 인간이라면 누구도 해야만 하는 일. 먹는 일을 제목이 대변한다면, 그렇다면 나머지는? 자는 일은 이 소설에서 찾기 힘든데 싸는 일은 찾기 쉽다. 왜냐하면 '어쩌고 저쩌고'만큼 특색있게 다가오는 말이 '우주의 똥구멍'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보면 '이곳은 우주의 똥구멍이야(224쪽), 이곳은 우주의 똥구멍이 분명해요,'(265쪽)라고 한다. 똥구멍은 싸는 곳. 그러니까 먹는 것이 제목이라면 소설 속에 나오는 똥구멍은 싸는 곳이다. 무얼 싸지?


당연히 소화가 되지 않은 것을 싼다. 소화가 되지 않은 것? 과다 생산된 것. 필요 없음에도 필요하다고 광고해서 남들로 하여금 사게 하는 것. 그리고 곧 쓰지 않게 되어 쓰레기가 되어 버려지는 것. 버려진 다음 자연스레 분해가 되지 못해 인간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에 더 해를 끼치는 것.


소설에서는 그러한 예가 많이 나오는데, 주인공인 드웨인과 관련된 일들이 그렇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싸버리는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다면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끝모를 성장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우주의 똥구멍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성장, 성장하는 미국 또는 지구의 나라들로 인해 더욱 살기 힘들어지는 지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들이 편하자고 썼다가 버린 것들이 어떻게 돌아오는지는 '트라우트는 슈거크리크의 범람을 막는 콘크리트 홈통에 자신의 예술적인 발을 담갔다. 그러자마자 수면에 떠 있던 투명한 플라스틱 물질이 발을 코팅했다. ... 한쪽 발을 물에서 꺼내자 플라스틱 물질은 공중에서 즉시 마르며 진줏빛의 얇고 타이트한 단화로 변해 그의 발을 감쌌다.'(302쪽)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미세플라스틱으로 인한 피해는 잘 알려져 있으니, 보니것은 그런 미래를 선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때의 성장, 발전이 지닌 위험을 내다보고 있던 것이다. 그런 위험이 어디 플라스틱 뿐이겠는가. 그는 미국 사회가 지닌 많은 모습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노예제에 대한 비판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인간이 그러한 노예 또는 기계와 별반 다름이 없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미국 사회는 '우주의 똥구멍'일 뿐이다. 그것을 인식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여전히 자신들이 먹는 것이 소화가 되지 않고 똥으로 변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성장과 발전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구에서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현실이니, 우리는 여전히 우주의 똥구멍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똥구멍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곳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보니것은 비관적이었다가 생각을 바꾼다. 이 장면이 소설 속에 있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 역시 자본의 먹이로서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자본에 먹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을 잃지 않는, 기계로서 존재하지 않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 있음을 소설 속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도 하는데...


너무도 짧은 이야기들, 소설 속의 이야기와 작가가 직접 등장해서 자신의 등장인물과 대화하는 장면까지 사실주의 소설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이야기 전개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낯설기도 한데... 그럼에도 비사실적인 표현이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표현하고 있는 일들을 우리가 계속 겪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제목을 생각한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자본과 성장이 결국 먹는 것과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었을까? 작가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모하게 먹어치운 것들이 결국은 배출될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제목인 아침식사와 소설 속에 나오는 똥구멍이라는 말이 연결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는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라는 표현은 제너럴 밀스사에서 만든 아침식사용 시리얼 상품의 등록 상표다.(17쪽)라고 해서 다른 오해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여기서도 우리는 자본이 얼마나 우리 생활에 깊숙히 들어왔는지 알 수 있다.


'아침식사용 시리얼'이라고 하지 않나? 기본적인 먹는 것조차도 거대 기업이 잠식하고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 먹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게 우리 삶으로 들어와 우리를 삶으로부터 더욱 떨어뜨리고 있는 현실을 보니것은 비판하고 있다.


계속 보니것 작품을 읽고 있는데, 이 작가의 작품 읽을수록 매력적이다. 다음 작품을 찾아 읽게 만든다. 그리고 이 작품 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겹치고 있기에, 그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지구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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