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리의 이야기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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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 소설이다.


'거리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거리의 이야기. 집을 잃고 버려진 땅에 자신들의 거처를 만들고 생활하는 사람들 이야기다.


소설은 단 하루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하루라는 시간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일생이 담겨 있다. 처절히 파괴되어 가는 그들의 삶이.


킹은 개 이름이다. 개를 서술자로 삼아 소설을 전개한다. 킹은 떠돌이 개다.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를 말해주지 않지만, 부두에서 비코를 만난 이후 이들과 함께 지낸다. 일정한 거처가 없는 개가 함께 살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지내면서 그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해준다. 


즉 가장 낮은 시선에서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없는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가면 좋겠지만, 버려진 땅이 언제까지나 버려진 땅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자본은 그런 땅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개발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개발이라는 이름에는 쫓겨남이라는 이름이 늘 함께 한다.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개발을 통해 그곳에서 삶을 이어나가지 못한다. 그들은 그곳에 남을 만한 여력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우선 되는 능력은 바로 지불할 능력이 있느냐다.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나가야 한다. 


하지만 나갈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은 버틸 수밖에 없다. 결국 개발은 강제 철거와 연결이 된다. 돈이 있는 사람이 살기 위해서 없는 사람들을 쫓아내야 하는 현실. 그런 현실을 존 버거는 소설을 통해서 고발하고 있다.


킹은 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 사이에도 갈등이 있고, 또 돈이 개입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 킹 역시 마찬가지다. 떠돌이 개를 서술자로 등장시켰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 역시 정착되지 못하고 또다시 떠돌 수밖에 없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남기 위해서 저항하려 해도 결국은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최루탄에 쫓겨 모여 있던 곳에서 외치는 말은 '우리 여기 있어!'(204쪽)다. 그렇다. 그들은 거기에 있다. 그곳에도 사람이 있다.


사람이 있는데, 보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사라져야 한다. 보이지 않아야 한다. 철거되어야 한다. 그것도 그들에게 다른 삶터를 마련해주는 오랜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냥 집행할 뿐이다.


오래 전에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을 본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어 세계에서 많은 손님들이 오는데, 그 손님들에게 보여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고 했다. 판자촌, 노숙인, 노점상 등등. 선진국임을 과시하기 위해 좋지 않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밀어붙였다.


어떻게 했는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쫓겨났다. 아무리 저항해도 강한 힘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쫓겨난 그들이 다시 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났다. 그 영화는 그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일을. 지금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거처를 잃는 사람들이 있으니...


존 버거의 이 소설은 그때 일, 또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 떠오르게 했다. 여전히 자본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보지 않는다. 자본은 사람을 가린다. 사람을 보이지 않게 한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외친다.


"우리 여기 있어요!"라고... 바로 여기에 우리가 있다고. 우리도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 외침은 자본에게까지 가 닿지 않는다. 자본에 가 닿기 전에 공권력이라는 이름 앞에서 산산히 흩어진다. 소멸해버리고 만다. 이 소설에서처럼.


너무도 슬픈 모습.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저려온다.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우리나라 현실이 겹쳐져서 마음이 편치 않았는데... 그럼에도 이런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게 하려는 사람들을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조세희 작가가 생각난다. 그의 작품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공'도 생각이 나고. 고인의 명목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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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러웨이 선언문 - 인간과 동물과 사이보그에 관한 전복적 사유
도나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 옮김 / 책세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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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손이 가는 사람이 있다. 이해하려면 그 사람만 집중적으로 읽어도 될까 말까 한데, 그렇게 하기는 힘들고, 그렇다고 읽지 않으면 무언가 마음이 찜찜하고...


그런 사람들 중에 해러웨이가 있다. 언젠가 해러웨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꼭 읽어봐야지 했었는데, [한 장의 잎사귀처럼]을 읽고는 잠시 뒤로 미뤄뒀다. 아직은 해러웨이를 읽을 때가 아니구나.


그러다가 해러웨이 선언문 중에 [사이보그 선언]이 자꾸 언급되는 책을 읽게 됐다. 이거 한번 읽어봐야지 하고 구입했다가, 미루다 미루다 읽다가 또 손을 뗐다가 다시 읽다가.


그럼에도 잘 이해가 안 된다. 나중에 좀더 시간이 지난 다음에 읽어봐야겠다. 그럼에도 사이보그나, 반려종 선언에 들어있는 의미를 내 나름대로 추측한다.


해러웨이의 주장을 이해했다기보다는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외쳤는데, 해러웨이는 '인간은 죽었다'고 외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신이 죽으면 그 자리에 인간이 들어서야 한다. 유발 하라리 말대로 '호모 사피엔스'에서 '호모 데우스'가 되어가고 있는 인간이다. 벌써 인간은 신의 자리에 올라섰다. 니체가 19세기에 외쳤던 신은 죽었다가 21세기에 와서는 현실이 되었다고 할까.


니체식의 초인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겠지만, 이미 인간은 지구에서 군림하는 유일한 종이 되지 않았는가. 지구를 좌지우지하는 인간. 


아직 공식 명칭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만, '인류세'라는 지구 역사에서 한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인간 아닌가.


이렇게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올라섰다면, 이제는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인간은 죽었다'고 외쳐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을 죽이지 않고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해러웨이가 쓴 두 선언문을 나는 '인간은 죽었다'는 외침으로 읽었다.


인간이라고 할 때는 주로 남성을 지칭했는데, 해러웨이는 그를 부정한다. 이제는 남성만이 인간이 아니다. 여성을 비롯해서 성소수자들뿐만 아니라, 사이보그까지도 인간의 대열에 합류한다.


여기에 반려종까지 합세해서 이 지구라는 장소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 인간은 죽었다. 해러웨이가 대담에서 '아기 대신 친족을 만들자'가 다음 선언이 될 것이라고 하는데, 이때 친족엔 인간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


사이보그를 비롯해서 다양한 종들이 포함된다. 그렇게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를 인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 얼마 전에 읽은 [빅이슈]에서 뜨개질에 관한 글을 생각나게 했다. 해러웨이 역시 다양한 종들이 뜨개질처럼 서로 엮어서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그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도, 단일하지도, 또 쉽지도 않겠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나는 종 안팎에서 맺어진 모든 윤리적 관계는 관계-속의-타자성에 대한 지속적 관심이라는 가늘고 섬세하며 질긴 실로 뜨개질한 편직물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나가 아니며, 함께 살아감으로써 존재한다. 누가 있으며 누가 생겨나고 있는지 묻는 것이 의무다.' (178쪽) 


'다른 이와 나누는 애정, 헌신, 솜씨에 대한 열망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191쪽)


이런 해러웨이 글을 읽다보면, 같은 인간들끼리도 잡아먹지 못해서, 또 같은 정당 안에서도 제 권력만을 위해서 상대를 비방하고, 상대가 무너지기를 바라는 말과 행동을 하는 존재들을 보면 이들은 도대체 어떤 종일까 한다.


그렇다고 이들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이들을 배척하더라도 그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러웨이는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고 한다.


진화론을 믿지 않는 창조론자들에게 '진화'라는 말을 빼고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면 어떤가 제안한다.


'"창조/보살핌"파의 사람들은 기독교인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적인 자연 관리의 실패에 정말 화가 나 있어서, 동물을 더 잘 보살피고 기후를 망치지 않으려 대단히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화"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문을 열고 나가버리겠지만, 좋은 관리란 어떤 것인지 물으면 실용적인 대화를 할 수가 있지요.' (355쪽)


이렇게 함께 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같은 종에서도 같은 관점을 지니고 있다는 사람들끼리도 소통이 안 되는 사회에서는 더욱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인간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기때문이다. 인간과 다른 존재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시대다. 그래서 해러웨이는 아이보다는 친족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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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시'가 과연 설 자리가 있나 싶다. 참 시적이지 않은 세상이다.


  '이전투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진흙탕에서 서로 뒹굴고 있으면서, 서로가 상대가 더럽다고 말한다.


  서로에게 묻은 진흙만 보고, 제 몸에 붙은 진흙은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싸움은 멈추지 않는데...


  자신들이 진흙탕 속에서 싸우고 있음을 깨달아야 진흙탕에서 나오려는 노력을 할 텐데, 전혀 모르고 있다.


  왜? 멈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멈춤! 여기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긴다. 시선을 바깥에서 안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시 안에서 바깥을 볼 수 있게 한다.


멈출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관성의 법칙을 거스를 염두도 두지 못하고, 그냥 가는 대로만 가려고 한다. 멈추고, 성찰하고, 질문하고, 다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친다면, 진흙탕 속에서 싸울 이유가 없어질 텐데.


이렇게 해서 '시'는 요즘 세상에 필요하다. '시'는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잠시 멈춰서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 시들이 좋은 시다. 신미나 시를 읽다가 '시'라는 제목을 단 시를 발견했다.


이 시에서 '멈춤'을 생각했고, 시는 곧 생명을 주는 피라는 생각, 그러나 자신의 안에 머무는 피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영양을 주는 피인 선지와 같은 피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에만 고여 있어서는 안 된다. 피는 밖으로 나와 응고되어서 다른 사람의 영양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그냥 안에만 고여 있든지, 또는 나와도 응고가 되지 않고 뿔뿔이 달아나버리고 만다.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응고되어야 하는 피, 시들. 그렇게 잠시 멈춰서 성찰을 할 수 있게 하는 시들. 하지만 세상은 '한쪽 귀가 흔들리는 냄비'와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넘어져 버리고 만다.


응고되기 전에 쏟아져 흩어지게 한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잠시 멈추게 하는 것, 바로 시다. 이 시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닷새면 피가 상한다고 했다


     선지피 받아온 날

     한쪽 귀가 흔들리는 냄비를 들고 가다

     눈 쌓인 마당에 자빠졌다


     돈벌레의 작은 발처럼 

     수백갈래로 퍼져서

     흰 눈을 갉아 먹는 붉은 다리들, 붉은 이빨들


     응고된다는 것은

     누군가 잰걸음을 멈추고

     문득 멈춰 선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지금 고인 것은

     한사발의 붉음인데

     처음 본 붉은빛은 다리를 달고 달아났다

     뿔뿔이 흩어져 천만갈래 비슷한 붉기만 번지고 있다

   

신미나, 싱고,라고 불렀다, 창비. 2016년 초판 3쇄.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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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3-01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저도 좋아해요^^

kinye91 2023-03-01 09:58   좋아요 0 | URL
가끔 시를 통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돼요. 이 시집도 좋았어요.
 
구의 증명 은행나무 시리즈 N°(노벨라) 7
최진영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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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다. 그렇지만 괴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들 사랑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으므로.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랑이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더 오래 살라고 하는 죽은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기 싫어서 자신의 몸의 일부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나. 그들이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므로, 이들의 사랑을 괴기스럽다거나 공포스럽다고 느낄 수가 없다.


막다른 골목. 딱히 내가 잘못한 일도 없는데 더이상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돈으로 판단되는 세상에서 그럼에도 너와 함께 있어서 살 수 있다는 그런 사랑.


소설은 현재와 과거, 과거와 현재가 얽히면서 전개된다. 담이와 구의 시점이 번갈아 가면서 나오고, 둘의 이야기가 달라지는 지점도 있지만 겹치게 되면서 그들의 사랑을, 그들의 상황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사람으로 살고자 했으나 사람으로 살게 하지 않는 세상에서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구와 그를 보낼 수 없는 담. 그들의 사랑.


처절한 사랑이다. 죽어서도 잊지 못하는, 죽은 사람을 잊지 못하는 그런 사랑.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내버려둘까?


그들의 사랑을 순수하게 바라볼까? 아마도 세상에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괴기스러운, 정상이 아닌, 미친, 사이코패스인 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이들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의 흥미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담은 구를 보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담은 누구보다 오래 살아남기를 바란다. 자신이 이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살겠다고 한다.


이 세상에서는 절대로 인정받지 못할 사랑이기에, 이 세상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담은 그렇다. 구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다시 만난다는 믿음을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은 뒤 죽은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렇기 때문에 구는 담이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런 담을 자신이 바라보고 있으므로. 천년 만년 그렇게 담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영원한 사랑 이야기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되지만, 이들을 이렇게 내몬 사회, 아이 때는 모든 것을 사람으로 보지만, 어른이 되면 사람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 이 소설에 나오는데, 그렇게 사람을 돈으로, 물건으로 판단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 둘의 사랑에서 보게 된다.


그것을 거부하는 삶이 얼마나 힘든지, 그렇게 살 수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적어도 담이와 구가 말했듯이 아이들에게 그런 세상을 물려주지는 말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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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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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을 대변한다.


'몸은 힘들겠지만 고통과 불만족을 겪어내면 이윽고 단순한 기쁨이 찾아온다. 가을이 되면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 여기에 단순한 기쁨이 있다. 물론 겨울과 봄과 여름에도 단순한 기쁨은 있다. ... '어두운 시간'이 '빛으로 가득 찬 이 몸'을 만든다. 지금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언젠가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273쪽)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자신이 끝났다고 생각할 뿐이다. 몸이 살아 있는 한, 정신은 계속된다. 몸이 살아 있지 않더라도 정신은 더 계속된다. 언제가 사라질 정신이라도 당분간은, 그 당분간을 이 소설집 마직막에 실린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라는 소설에서 미래 80년이라고 한다.


이 소설의 배경이 2020년인데, 2100이라면 80년 뒤의 미래다. 소설 속 할아버지는 그렇게 자신의 삶 80년, 과거 조상의 삶 80년, 그리고 미래의 삶 80년 해서 240년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당분간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포함되고, 이 미래를 현재로 끌어오기에 비관이 아닌 낙관으로 살아갈 수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니라, 그 미래를 지금에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과거만을 생각하면서 현재를 살아가지 말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현재를 살아가자고 이 소설집은 말한다.


첫번째 소설에서 그래서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면'(34쪽.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결코 죽음에 이르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이 소설집은 바로 이것이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 미래를 생각하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결국 우리는 이런 삶 속에서 기쁨을 느끼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런 미래는 결코 화려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그냥 평범한 미래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은 낙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두운 시간'이 '빛으로 가득찬 몸'을 만든다고 작가가 말한 것이리라.


소설집에 실린 여덟 편의 소설들이 어떤 끝을 보여준다. 끝을 보여주는데, 그 끝이 다시 시작이 된다. 왜냐하면 현재의 끝은 바로 미래의 시작이기 때문이고, 그런 미래의 시작은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간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미래와 현재가 만난다. 그런 만남을 통해 끝을 시작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그 중에 이 소설집의 주제를 잘 알려주는 소설이 제목이 된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통의 와중에서도 비관이 아니라 낙관을 지녀야 함을 마지막 소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에서 잘 나타난다.


우리 삶은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을 수 있다. 한 순간의 삶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가 지속되는, 영속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이 끝이 아님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지금 살아가야 함을 작가는 소설 속 여러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한편 한편에서 이런 주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지만, 또 각 편이 지닌 상황의 개별성이 있다. 이는 다양한 삶 속에서 펼쳐지는 고난, 그 고난 속에서도 삶은 지속되어야 함을 이 소설집에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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