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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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에서 슬픈 학살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슬픈 학살? 이런 말이 성립할 수 있나?


학살은 잔인하다고 표현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잔인함보다도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바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일어났다. 소위 말하는 민생단 사건.


스탈린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킨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인들이 일제의 첩자노릇을 하지 않나 하는 의심. 그 의심을 송두리째 없애기 위해서 강제 이주를 시켰다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민생단이란 단체는 독립운동에서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죽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나라를 구한다는, 여기에 세상을 구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담고 행동한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한다? 이는 서로를 죽임으로써 그 믿지 못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니...


소설은 김해연이라는 지식인을 서술자로 택한다. 그는 독립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러니 소위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근무한다. 식민지 시대, 일제에 부역하는 일을 하는 것. 그 일에 그는 잘못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게 지내던 그에게 이정희라는 사랑이 찾아오고, 어느날 이정희가 죽었다고, 그 죽음에는 독립운동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을 잃고 폐인처럼 지내던 그는 용정에서 간도로 가고, 거기서 이정희의 흔적을 만나게 된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고, 여옥이라는 여인과 다시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또다시 일본 토벌대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하는 공산주의 조직에 가담하게 되고, 무장투쟁을 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학습하고 무장투쟁을 위한 몸을 만들게 된다. 이때 바로 민생단 사건이 소설에 등장한다.


민생단, 첩자로 일제에 독립군의 활동을 알려주던 역할을 하는 단체라고 여기고, 민생단원을 색출해 제거하기로 한다. 하지만 민생단원이 누구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결국 민생단은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상대를 숙청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저자가 민생단원이다, 하면 총살이다. 그냥 죽음이다.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이렇게 죽어간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자신과 사상이 다른 사람을 민생단원으로 몰아 처단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중학시절 뜻을 같이 했던 네 명의 인물들이 어떻게 다른 길을 가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지를 이정희를 사랑했던 김해연을 통해 하나하나 밝혀지게 된다.


서로를 팔아버리는 이유가 어쩌면 한 여성 때문일 수도 있음을, 자신의 개인적 사랑 때문에 이들은 서로를 죽이기에 이르게 되고...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김해연은 자신의 복수를 하지 못한다. 왜? 그에게는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본 다음에는 그를 죽일 수 없게 된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 서로 죽이는 관계가 된 친구들과 다른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정희를 둘러싼 네 명의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죽이게 되지만, 과연 그것이 사랑일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다. 소설에서 사랑을,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김해연뿐이고, 이정희는 그것을 깨닫는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이정희의 편지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바로 세상을 구하려고 뛰어든 사람들, 어떤 사상으로 무장하기 전에 바로 그들을 움직인 것은 사랑 아니겠는가? 그러던 것이 사상으로 인해서 사랑을 잃게 되면 죽음이 찾아오게 된다. 사랑을 잃고 사상만으로 건설한 세상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 수 있음을, 그런 세상은 만들어질 수 없음을, 김해연이 겪어온 일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다. 이 세상은 지옥이지만, 이 지옥에서도 천국을 맛볼 수 있음은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계산하지 않는 사랑. 그런 사랑을 본 김해연은 복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가 복수를 한다면 그 자신 또한 사랑을 버린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우리나라 역사에 부끄러운 과거로 남은 민생단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사랑에 있음을, 사랑이 없는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임을, 그 사랑은 집착이 결코 아니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개인은 개인으로 살아남아야 함을, 그냥 역사 속에 자신을 묻어버리면 그때 그에게 사랑은 올 수 없음을, 그에게는 오로지 사상만이 남고, 그 사상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죽일 수 있음을 김해연과 그가 만나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김연수 소설은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데, 그 역사적 사건이 한복판에서도 개인을 중심에 놓고 있다. 앞에 읽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도 그랬는데, 이 소설 역시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개인의 사랑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정희가 어떻게 죽게 되었을까? 과연 범인은 누구인가 하는 생각에 끝까지 읽어야만 전모가 밝혀지는 소설이기에 흥미진진하게 읽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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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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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 소설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1991년을 중심으로 1990년에 벌어진 일들, 그리고 그 일들과 관련하여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현재로 점점 깊어지고 있으며, 공간 역시 우리나라에서 외국으로 점점 넓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필연의 세계에서 우연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대, 또 당위의 시대에서 선택의 시대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넘어가는 시대를 다루고 있다.


서술자는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는 학생이다. 그러나 운동권이 지니고 있는 당위와 필연은 1990년을 기점으로 변하게 된다.


소위 공산권의 몰락. 그리고 해외여행 자유화.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이런 바람들로 인해서 세상을 변혁하겠다는 필연의 세계에 자신들을 올려놓았던 사람들이, 그 세계에서 내려와 우연의 세계에서 자신의 선택을 강조하는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또한 집단 윤리가 중시되고, 집단 윤리에 따라 희생이 강요되던 세상에서 개인의 선택이나 감정을 중시하는 시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런 모습을 작가는 90년대 만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운동권으로 불리는 사회에서 개인의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초반에 그려지고 있지만, 그런 사랑으로 인해서 소설은 과거의 인물들을 불러내게 된다.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정민과 내가 소설의 중심에 있다면, 이 나를 중심으로 강시우(이길용)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어쩌면 나를 통해 들려주는 강시우의 이야기를 통해서 필연의 세계에서 우연의 세계, 당위의 세계에서 선택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강시우의 과거 이야기를 통해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복판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1960년대 필로폰 밀수부터 시작해서, 노동자,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의 이야기, 노동자를 대하는 지식인들의 태도, 이길용을 강시우로 변신시키는 정보당국의 모습...


여기까지가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는, 필연과 당위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라면, 이길용을 만난 상희의 변화, 그리고 상희의 죽음을 알게 된 이길용이 강시우로 살아가게 되는 모습에서 이제는 필연에서 우연으로, 당위에서 선택으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프락치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오히려 그를 이용하는 삶. 자신에게 주어진 흐름을, 자신이 선택함으로써 자신 인생의 주체는 자신임을 보여주는 강시우의 모습. 그런 모습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다.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개인은 속절없이 그 흐름 속에서 잊혀져 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소설을 통해서 찾아보려는 노력을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강시우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자신을 잃고만 살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는 그런 흐름 속에서도 자신을 찾을 수 있고, 또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을 강시우가 된 이길용이 보여주고 있다. 소설 제목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 그 점을 시대의 흐름 속에 휩쓸려 살아가던 나와 강시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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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한 선진국 - 대한민국의 불평등을 통계로 보다
박재용 지음 / 북루덴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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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주문


이젠 우리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한다. 한강의 기적을 넘어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랑스레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하지만, 한순간에 선진국에서 떨어질 수는 있다.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만 난무하고 있으니까.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좋은 말은 다 뱉어내고 있으니까. 정책으로 실현해야 하는데, 정책은 실종되고, 말만 나부끼고 있으니...


불평등한 선진국이란다. 당연하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평등하지는 않다. 불평등하다. 그러나 그들은 불평등을 인지하고 있다. 불평등하기 때문에 정책으로 평등을 지향하려 한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고, 그 상황을 타개하려 하고 있다. 그래야 선진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통계지표를 활용해서 선진국이라고 하는데, 평균치로 잡힌 통계에서는 불평등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화려한 숫자만 보일 뿐이다.


이 평균 숫자를 보지 않고, 평균을 이루게 된 숫자들을 보면 불평등이 보인다. 불평등이 보여야 평등을 지향할 수가 있다.


일인당 국민소득을 4만 달러라고 하자. 선진국이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 되던 나라에서 4만 달러라니...(이 책은 세계은행 자료를 인용해(2019년 기준인지, 2017년 기준인지는 조금 모호한데...2019년 기준으로 하면 1인당 평균소득은 3,528만원이라고 한다-이러면 환율을 1달러당 1300원으로 계산하면 약 27,138달러가 나온다 ) 43,430달러로 전세계 27위라고 한다.14쪽)


하지만 평균값은 상위 수준이 아주 높으면 상위 20%의 소득으로 나머지 80%의 소득과 같을 수가 있다. 평균은 올라가지만, 실질적으로 소득은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수가 있다. 통계의 함정이다.


이 책은 이렇게 통계 수치를 평균으로 보지 않고, 구간별로 나누어서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나라 평등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결론은 불평등이다. 그것도 이 불평등이 점점 심화되어 가고 있다고 한다.


문제다.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오히려 평균소득은 높아지지만 불평등은 심해지고 있다고 하니...


특히 노동에서 격차가 벌어지고 있으며, 청년들 사이에서도 경제적 차이에 따른 차이가 더 벌어지고, 기존에 어렵게 살던 사람들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을 4부에서 가족 해체, 노인 자살, 지방 소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소수자들이 얼마나 힘들게 지내는지를 이주노동자, 이주여성, 장애인 여성, 모자 가구, 주거 취약계층을 다룬 5부에서 보여준다. 


이들이 계속 더 힘들어지는 생활을 한다면, 우리나라는 무늬만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다. 무늬만 선진국이 아닌 실질적인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불평등을 인정해야 한다.


인정해야 고치려고 한다. 그것도 정책과 제도를 통해서.


책의 결론 부분에서 대책을 제시한다. 그런데 이 대책이 당연하다고 하는 사람과 얼토당토 않다고 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갈등으로, 정책은 길을 잃고 불평등은 더 심화된다. 저자의 대책을 보자.


'먼저 소득에서의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최저임금을 올리고, 비정규직의 노동권을 확실하게 보호하고, 노동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정부의 소득 재분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소득세 등 직접세 세율을 더 올리고 공공복지 예산을 늘려야죠. 부의 세습을 막기 위해 상속세와 증여세의 세율을 올리고 면제 범위를 축소하면 됩니다.

  불평등이 줄어들면 교육 문제의 기본이 해결됩니다. 소득 격차가 적어지면 기를 쓰고 명문대를 갈 이유가 줄어들고 자연스레 사교육도 감소합니다. 부모의 소득 중 교육비로 빠져나가는 비용이 주니 그 또한 좋은 일입니다. 소득 격차가 줄고 국가의 소득 재분배가 더 활발해지면 중산층이 넓어지고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출산율로 높아지고, 지방 소멸도 더뎌지겠지요. 

  이렇게 결론은 쉽습니다.' (458쪽)


아니, 결론이 쉽지 않다. 우선 최저임금 문제부터 갈등이 일어나니 말이다.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말, 지금은 거꾸로 가고 있지 않은가. 직접세 세율, 깎으면 깎았지, 높이지 않으려 하고, 교육, 사교육이 심화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불평등이 심해지고 있는데, 그동안 불평등을 일으키고 그 간격을 더 크게 벌리는 제도들을 없애기는커녕 더 밀어붙이고 있는 형국 아닌가.


그러면 불평등한 선진국이란 말이 없어지지 않는다. 어디에서 불평등이 더 심해지고 있는지를 통계를 통해서 살펴야 한다. 평균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점에서 이 책은 불평들이 나타나는 숫자들을 우리들이 보게 한다. 그 숫자들을 통해 평균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저자가 제시한 해결 방법, 정책에 반영될 수 있도록 많은 토론이 필요하다. 감정이 아니라 구체적인 자료를 통한 토론이.


결코 어렵지 않게 우리나라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책이다. 숫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도 생각하게 해준 책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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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검찰을 떠난 이유 - 검찰 부패를 국민에게 고발하다
이연주 지음, 김미옥 해설 / 포르체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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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복마전이 있을까? 책을 읽으면 분통이 터진다. 이들에게 분노하지만, 어떻게 할 수 없으므로. 내부 개혁은 불가능하고, 외부 개혁은 저항에 부딪혀 좌절되고... 그렇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나 같은 모습을 지닐 것이라는 예감.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라는 노래 가사도 있는데, 검찰의 모습은 예언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면.


우선 이들에게는 너무 막강한 권력이 주어졌다.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서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통제받지 않는 권력은 절대권력이 되고, 절대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 자신은 부패한지도 모르면서 지내는 상황. 그렇다. 오물을 뒤집어쓰고 지내는 사람에게는 그 오물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미 오물 냄새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절대권력은 자신의 부패를 알지 못한다. 그냥 부패한 자들만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부패하지 않는 자들이 배제되고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못하게 된다. 자기들만의 사회. 밀어주고 끌어주고.


이런 막강한 권력은 반성을 하지 않는다. 반성이란 잘못을 인정했을 때 나오는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 감싸주는 경우도 있지만, 이 책을 읽으니, 이들은 정말 자신들이 잘못했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인 줄 모르고 있으니, 인정할 일이 없고, 인정하지 않으니 사과를 하고 반성을 할 일이 없다. 그냥 그때는 그랬어라고 하면 끝이다.


지금 많은 재판 결과들이 뒤집어지고 있는데, 과거의 판결에 대해서 사과하는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한다.


그것도 형식적으로.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가 일본에게 요구하는 것도 바로 진정한 반성과 사과를 동반한 배상임에도 일본은 형식적인 사과 -그마저도 부정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에 그치고 있다.


검찰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니, 이들이 절대권력일 수밖에.


절대권력은 내부비판이 거의 불가능하다.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인의 장막을 뚫으려는 사람을 내치기 때문에.


조직을 해치는 자.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자들이 모인 집단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학교폭력은 별것 아니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학교폭력으로 인생이 망가진 피해자들이 많은데, 그것에는 엄단 운운하면서 자신들 조직에서 이보다 더 심한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그들은 수사를, 기소를 하지 않는다.


책임을 지지 않는다. 법을 집행한다는 자들이 행하는 많은 범법 행위들을 보라. 그냥 그들에게는 그것이 범법이 아닐 뿐이다. 자신들이 하면 합법 또는 적어도 불법은 아닌, 비법이 되고, 남들이 하면, 그것도 자신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힘든 약한 사람들이라면 관용없이 무조건 불법이 되게 한다.


모든 검사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 속에 있으면 같은 취급을 받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 문제인데, 조직에서 나는 안 그래 한다고 조직이 변하고, 다른 대우를 받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내부개혁을 해야 하는데, 내부개혁 목소리를 내면 배제시켜버리는, 아이들 용어로 왕따 시켜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니,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내부비판을 하기도 힘들다. 


소수 검사가 내부비판 목소리를 냈을 때 동조하기보다는 관망하거나 또는 비판하는 경우가 많게 되는데 이런 조직 우선의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한다.


이밖에 이 책을 읽으면 검찰은 복마전이구나 하는 일들을 만나게 된다. 왜 이들이 그렇게 지내는지 알게 된다. 검찰의 내부개혁이 거의 불가능함을. 그래서 검찰 개혁은 외부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외부개혁을 통해 이 복마전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실체를 명확히 아는 데서 출발해야한다. 실체를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실체가 이 책에 잘 드러나 있다.


검찰의 실체를 알고 싶은 사람,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아마, 복마전도 이런 복마전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검찰 개혁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검찰공화국이 될 것이다.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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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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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가지고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소설이다. '일곱 해의 마지막'이라니... 그런데 책을 넘기면 처음에 시인 백석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문장] 1940년 1월호에 발표된 백석 소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장을 넘기면 소설이 시작하는 '1957년과 1958년 사이'라는 제목이 나오고, 그 밑에 한 편의 시가 인용되어 있다.


  백석이 쓴 시란다. 일부분이다. 그런데 처음 듣는 제목이다. 아마도 나중에 발간된 전집에는 수록이 되었겠지만, 내가 갖고 있는 백석 전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석탄이 하는 말'이란다. 


  '우리 빨갛게 타련다 / 일곱 해의 첫해에도 / 일곱 해의 마지막 해에도'(9쪽)


 이 시에서 제목을 따왔다. 제목에 대한 뜻은 잘 모르겠지만, 소설은 1957년부터 1959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멀리 삼수로 발령이 난 백석. 그곳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백석. 그러나 소설은 백석이 좌절하면서 시와 멀어지고, 결국 시를 버리는 쪽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북쪽에서 백석은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시와 그들이 생각하는 시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새로운 시들은 공장에서 미리 제작한 벽체를 올려 아파트를 건설하듯이 한정된 단어와 판에 박힌 표현만으로 쓰였다.'(162쪽)


시는 이래서는 안 된다. 특히 백석이 생각하는 시는 이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는 시를 쓸 수가 없다. 안 쓰는 것이 아니라 못 쓰는 것이다. 그가 쓰는 시는 그쪽에서는 시가 아니다. 개인의 푸념에 불과하다. 서정은 사치다. 아니 반동이다. 그러니 백석은 이제 시를 쓸 수가 없다. 


가장 개인적이고 자유로와야 할 예술가들조차도 하나의 틀에 갇힌 작품활동을 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서 문학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190-191쪽) 


이 표현을 보면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떠오르고, 나치의 퇴폐예술을 퇴치한답시고, 많은 예술작품을 태워버린 일이 떠오를 수 있다. 이런 일이 그 이후에도 일어나고 있었음을 김연수는 이렇게 백석을 통하여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문학은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형식으로든 문학은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니, 벗어날 수밖에 없다. 문학을 사상으로 옥죌수록 문학은 다른 언어들을 통하여 그 통제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당대에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는가? 아니다. 소설에서 백석이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삼수에서 아이들의 시를 읽고 감상평을 써 주는 장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미래세대들이 쓴 시를 보면서 백석은 자신의 시를 미래세대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래야 한다. 아무리 통제가 거세더라도, 통제는 언젠가 풀린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천불'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문학을 통제하려던 모습을 '지불'이라고 한다면, 그런 통제를 한순간에 뒤집어 엎는 것이 바로 '천불'이다. 


이 천불이 현재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겠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그렇게 문학은 전복을 꿈꾼다.


문학을 묻어두려해도 문학은 천불을 통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백석은 한때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시인이었지만, 지금 적어도 남한에서는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의 시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렇게 백석은 '천불'을 통해서 다시 우리에게 왔다. 아니, 그는 우리들의 문학이 다시 불타오를 수 있는 숯이 되었다. 그는 그런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석탄이 하는 말'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소설 끝부분에 나타난 '지불과 천불'을 작가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보자.


'화전민들이 개간하기 위해 피우는 불이 땅속 뿌리로 타들어가는 지불이라면, 그래서 석 달 열흘씩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보이지 않는 불이라면, 천불은 저절로 생겨나 순식간에 숲 전체를 활활 태우며 나무들을 서 있는 숲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 불을 보고 두메의 화전민들은 생을 향한 어떤 뜨거움을, 어떤 느꺼움을 느낀다고 했다. 불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살길이 열리는 것이기에.' (238쪽)


이렇게 쓰고보니, 문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소설같지만, 그렇지 않다. 백석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백석의 과거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북쪽의 생활까지를 소설 속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연수가 쓴 [굳빠이, 이상]과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백석에 대해서 관심있는 사람, 이 소설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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