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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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라고 하면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남에게 읽히려고 쓴 글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담은 글. 그것이 일기다. 그러므로 일기는 솔직하다.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드러냄. 드러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된다.


자기 성찰의 도구가 일기라면, 왜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을까? 다른 사람의 내밀한 마음이 담긴 글을 통해 어떤 위로를 느끼려고 하는 걸까?


나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통해 내 생각을 비춰보기도 한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일기는 더더욱.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세월호에 관한 글을 읽을 때는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아픈데도 읽을 수밖에 없다. 세월호는 여전히,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진행 중이니까. 아직도 그와 비슷한 일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래서 작가가 이런 문장을 들고 갔다는 내용의 글을 읽을 때 먹먹하기도 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109쪽)


이것은 특정한 누구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런 일들 속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


누군가의 고통으로 내 행복을 만들 수는 없다는, 그런 사회는 되지 않아야 하고, 물신, 돈에 사람을 종속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여기서 생각의 힘, 아니 생각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발견한다.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행동한다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하면 그것이 쉽게, 너무도 쉽게 '혐오'와 연결이 된다는 것.


사건, 사고, 혐오.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이런 사회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너무도 쉽게 다른 존재들을 비난하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 '일기'에 이런 문장이 있다. 


'조금만 경계심이 풀려도 누군가를 즉시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다'(141쪽)


경계심이 풀린다는 말,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각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 그런 존재들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과연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없음을 게으름이라고 한다면, '혐오라는 태도를 선택한 온갖 형태의 게으름을'(72쪽)이라는 문장을 곱씹어야 한다.


더 살펴보고 더 고민해보고, 더 들어보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생략하는 게으름, 그냥 자신이 살아온 관성대로 행동하는 게으름. 그것은 나만을 고수하는 게으름이다. 오로지 나만이 있을 뿐. 하지만 나는 남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일기'를 읽으면 그런 게으름에서 조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 적어도 읽는다는 일이 게으름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되니까. 그렇게 황정은의 '일기'를 읽으며 작가도 나도 건너왔던 시대를 다시 생각한다.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고정관념이라는, 편견이라는 게으름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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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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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하다. '나는 사람들을 웃기면서도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해왔다.'(12쪽)고 커트 보니것은 말하고 있다. '웃음은 안도를 갈구하는 영혼의  산물이'(13쪽)고,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다. ... 어떤 웃음은 두려움에서 나온다.'(13쪽)고 하고 있으니, 보니것이 살았던 시대가 결코 행복한 시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베트남 전쟁을 목격했으며, 부시가 대통령일 때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 왜 세상이 좋아지지 않고 더 나빠지냐고 분노했던 사람. 또한 인간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걱정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는 신랄한 풍자로 사람들을 각성시키려 했다. 그러한 풍자에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풍자가 아니라 비난이 될 것이다. 고도로 세련된 비난, 이것이 바로 풍자 아니겠는가. 당하는 사람조차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그러나 이러한 풍자를 아무나 할 수 없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더욱이 강자를 풍자할 때는. 사실 풍자라는 말은 약자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약자를 풍자할 수는 없다. 약자를 풍자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약자를 더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것이니. 풍자는 강자에게 해야 하는 것. 강자를 풍자해 약자의 곁으로 강자를 내려보내는 것. 그것이 풍자다. 그러니 풍자를 통한 웃음은 사실 두려움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강자에 대한 두려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 풍자를 통한 웃음.


이와 비슷한 말로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126쪽)가 있다. 그는 평생을 웃음으로 이 세상을 이겨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풍자, 풍자를 통한 웃음은 바로 세상을 향한 그의 발언이다.


세상이 아무리 개떡같아도 살아야 한다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지금 이 순간 행복을 느껴야 한다고... 그의 삼촌이 했다는 말...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이랴!"(129쪽)


그럼에도 그는 절망한다. 그렇게 신랄한 풍자를 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았기에. 그래서 뒷부분을 읽으면 슬퍼진다.


'나 역시 더이상 농담을 못 할 것 같다. 농담은 더이상 만족스런 방어 메커니즘이 아니다. ... 너무 많은 충격과 실망을 겪은 탓에 이제 나는 더이상 유머로 방어를 할 수가 없다. 웃음으로 처리할 수 없을 만큼 불쾌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에 까다로운 사람이 돼버린 듯하다.'(126-127쪽)


웃음으로 넘길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망가져버렸다는 인식. 그럼에도 그는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사람믈에게 웃음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127쪽)고 하고 있으니, 그는 웃음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는지도, 그것이 안 되더라도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그는 신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신에게 맡기기보다는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한다.


'우리 휴머니스트들은 사후에 받을 어떤 보상이나 처벌을 고려하지 않은 채 최대한 점잖고 공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자 노력한다. 우리 휴머니스트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추상성에 최선을 다해 봉사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사회다.'(81쪽)


이 얼마나 현실적인 말인가? 신에게로 도피하지 않고 자신이 발딛고 살고 있는 현실에서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자세. 그렇게 살겠다는 자세. 그것이 바로 예술을 하는 작가들의 일이라고.


'얘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32쪽)


그렇다. 보니것의 글을 읽으면 영혼을 생각하게 된다. 사후의 영혼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영혼. 어떻게 살아야 내 영혼이 건강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작품들.


보니것의 신랄한 풍자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 우주의 전존재들에 대한 사랑. 그러므로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는 것에 마음 아파하고 있으며,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 절대로 안 된다고...


그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글들이 실려 있는 이 책.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면 좋다. 여기에 촌철살인의 경구들이 그림과 더불어 실려 있으니, 그것들을 곱씹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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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배 시인을 몰라도 이 시집을 읽으면 시인의 개인사를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또한 시인이 교류했던 문인들, 스승으로 모셨던 분들도 이 시집을 통해 알 수 있고.


  그렇다고 이 시집이 어렵냐 하면 전혀 아니다. 아주 쉽다. 읽기에도 쉽고 내용도 쏙쏙 들어온다. 이토록 쉽게 시를 쓸 수 있다니, 그런데 이 시들이 이렇게 마음에 들어오게 되다니 하는 마음에 경탄하게 된다.


  자고로 고수일수록 단순해진다고 했던가,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를 보면 선 몇 개로 달마의 모습뿐만이 아니라 달마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드러나게 했으니, 시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울 필요가 없다. 쉽게 사람들 마음에 다가가게 하면 된다. 그런 시인이 내겐 좋은 시인이다. 머리를 쥐어짜게 하는 시가 아니라, 

도대체 어디서 끊어 읽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읽어야 하는 시가 아니라, 

엄청난 상징 속에서 헤매게 하는 시가 아니라, 

평이하게 그러나 읽을수록 운율이 느껴지고 또 마음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시.


이근배 시인의 시들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간결한 언어, 단순한 언어. 그러나 그러한 언어들의 조합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비극이 들어 있고,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들의 삶이 들어 있고, 그의 개인사가 들어 있다.


읽으면서 자연스레 익히게 된다. 그러니 시인의 첫시인 '절필'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붓을 꺾는다는 의미의 절필은 작품 활동을 그만둔다는 말로 쓰는데, 작품 활동을 그만둔다는 말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절필을 선언하는 문인은 이미 한 자리에 들어선 문인이다. 그는 정점에 올랐기에 거기서 멈출 수가 있다. 그렇지 못한 문인들이 절필을 한다고 하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는 더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지니고 '절필'을 읽어보면 시인은 아직도 자신이 정점에 서지 않았다고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작품이 아직 나오지 않았음을, 그러므로 절필을 바라는 시인의 마음에는 좋은 시를 쓰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시를 보자.


 절필絶筆


아직 밖은 매운 바람일 때

하늘의 창을 열고

흰 불꽃을 터뜨리는

목련의 한 획,

또는

봄밤을 밝혀 지새우고는

그 쏟아낸 혈흔血痕을 지워가는

벚꽃의 산화散華,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드는

단풍으로 알몸을 태우는

설악雪嶽의 물소리,

오오 꺾어 봤으면

그것들처럼 한 번

짐승스럽게 꺾어 봤으면

이 무딘 사랑의

붓대.


이근배, 사람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문학세계사. 2004년. 11쪽.


절정에 이르러서야 사그러지는 그러한 자연. 자연을 닮고 싶은, 짐승스럽게라고 했지만 이는 자연이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보겠다는, 작품도 그렇게 쓰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말이라고 하겠다.


앞뒤 가리지 않고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것, 그럴 때 정점에 도달할 수 있고, 절필도 할 수 있다. 시인의 바람. 그것은 시인의 바람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 역시 삶에서 불꽃을 피울 때를 기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로 이 시를 읽었는데... 나도 내 삶에서 이렇게 꽃을 피워야지, 불꽃을 쏘아 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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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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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소설들 모음집이다. 역시 보니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반전이 일어나는 작품. 그 특유의 유머와 풍자가 들어있는 소설들.


소설집에 실린 소설 중에 돈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소설이 있는데, 그렇다. 우리는 자본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성장, 성장하는 것은 바로 이윤을 남기는 일이고, 이윤은 곧 자본이 추구하는 기본 목표이니, 이러한 자본에 잠식당한 삶은 다른 것을 볼 수 없게 한다.


하지만 다른 것을 보아야 한다. 소설 '탱고'에서처럼 자본에 둘러싸인 삶들 속에서도 자본이 아닌 즐거움을 추구하는 모습, 그러한 모습이 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점을 보여주는 소설도 있는데...


다른 소설들보다 마지막에 실린 '사기꾼들'이라는 소설이 마음에 남는다. 사기꾼들. 우리가 생각하는 남을 등쳐먹는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다. 두 화가가 등장한다. 한 화가는 보통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 또 다른 화가는 평론가들에게 인정받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


쉽게 이야기하면 달력에 들어가는 듯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무엇인지 모를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라고 할 수 있다. 두 화가는 자신에게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좋은 그림이라고 해도, 비평가들이 훌륭한 그림이라고 해도 그들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 점을 감춘 것이 바로 사기꾼과 같다고 여기고.


그렇지만 예술이 그러하지 않은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예술 아닌가. 당신은 왜 저 사람처럼 그리지 않느냐고 하는 말이 통용될 수 없는 세계가 바로 예술가의 세계 아닌가.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지금도 세계에서 뛰어난 화가로 일컬어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보라.


둘의 사이가 좋았던가. 둘이 서로의 그림을 그렇게 훌륭하다고 인정했던가. 속으로는 인정했을지 모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그다지 좋은 평을 하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으니...


예술은 그러한 것이다. 자기만의 것. 자기만의 표현이 있고, 자기만의 관점과 기법이 있다. 그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면 그야말로 그것이 사기일 것이다.


표절이 가장 엄격하게 금지되고 처벌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따라서 예술은 다른 사람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 자신만의 길, 그 길을 가는 것.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를 비교한다. 누가 더 좋은가? 누가 더 잘 그리는가? 문학으로 치면 누가 더 잘 쓰는가?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오히려 이러한 비교가 예술가들을 나락으로 몰지 않는가.


예술가는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을 혼신의 힘을 다해 했을 때 작품은 그것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그런 작품을 사기라고 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활동을 한 것이기에.


그 점을 이 소설의 뒷부분에서 잘 보여준다. 다른 사람의 평가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자신들은 안다. 자신의 작품이 지닌 의미를, 훌륭함을. 


이를 거꾸로 생각하면 자신들의 작품이 지닌 한계를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한계를 알고 있음에도 굳이 언급하지 않으면 그것을 사기라고 할까? 아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예술가가 제 작품은 이 점이 부족해요 하면 겸양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서 다른 의미를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러니 굳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지닌 한계, 부족한 점, 자신이 무엇을 못하는지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자신이 잘하는 것을 하면 되고, 다른 예술가들이 잘하는 것을 인정하면 되는 것 아닌가.


비교가 불필요한 곳. 오히려 비교가 작품이나 작가를 망치는 곳, 그곳이 바로 예술이라는 장 아니겠는가. 


이 '사기꾼들'이라는 짧은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보니것 역시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고.


이런 예술의 장이니 '표절'이 범죄 취급받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고 이윤을 위해 남을 따라하고, 그것을 감춘 것이니. 자신의 한계를 말하지 않은 것과는 다른 차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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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10-1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트 보니것, 에세이를 재밌게 쓰던데 소설은 어떨지 궁금하군요.

kinye91 2025-10-17 17:51   좋아요 1 | URL
소설도 에세이만큼이나 위트와 풍자가 넘쳐난다고 생각해요. 저는 커트 보니것의 에세이와 소설 둘 다 좋더라고요.

yamoo 2025-10-18 1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보니것 소설 10권 있는데 아직 3권밖에 안 읽었어요! 세상이 잠든 동안...이거 저도 읽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생각이 안나네요..ㅜㅜ 보니것의 대표작 <제5도살장>을 읽어야 하는데...아직까지 못 읽고 있네요..하~

kinye91 2025-10-18 11:56   좋아요 1 | URL
저는 요즘 보니것 소설을 찾아 읽고 있는데 제5도살장 좋았어요.

페크pek0501 2025-10-19 17:01   좋아요 1 | URL
제5도살장, 저 읽었어요. 완독했죠. 그러니까 보니것의 소설을 제가 읽은 거네요.
와!.. 이젠 저자와 책 제목을 연결시키지 못하는 지점에 제가 온 것 같습니다. 이렇게 제 기억력이 엉망인 것은 너무 책을 많이 알고 있어서라고 애써 합리화, 해 봅니다. 합리화하지 않으면 제가 너무 바보 같아서...ㅋ

kinye91 2025-10-20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 책을 너무 많이 읽으신 것 같아요. 그러다가 가끔 읽은 책 또 읽는 것은 아닌지... 저는 그런 의심이 들 때도 있거든요.
 
가장 파란 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9
토니 모리슨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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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고 싶단 생각을 하다가도 선뜻 손에 잡지 못하는 이유는, 무언가 마음에 묵직하게 들어앉은 무거움 때문이다.


쉽지 않다. 편하게 읽기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극이 마음에 남아 글을 읽기 힘들게 한다. [빌러비드]도 그러했고, [술라]도 그러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어쩌면 '읽어야만 해'라는 당위가 나를 자꾸 토니 모리슨의 소설로 이끄는지도 모른다.


왜냐 토니 모리슨이 소설에서 펼쳐 보이는 세계가 지금도 진행 중이기 때문에... 소설 속 흑인들(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 책에서도 흑인이라고 하니, 그냥 흑인이라고 하자)이 겪었던 일들을 지금 흑인들이 겪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를 툭하면 걸고 넘어가는 나라에서 여전히 인종에 따른 차별이 있다는 사실.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 그러니 토니 모리슨의 소설을 읽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토니 모리슨의 소설에서는 흑인 중에서도 더 약자라고 할 수 있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기 때문에.


속된 말로 하면 징글징글한 억압 속에서 그럼에도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 그런 모습들. 하지만 그 삶이 결코 녹록치 않음을 소설 속에서 만나게 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가장 파란 눈'.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 없이 백인들이 지닌 파란 눈을 의미한다. 흑인소녀 페콜라가 원하는 것은 '가장 파란 눈'.


당시 소녀들이 가지고 있던 인형들이 하얀(분홍빛 피부라고 나온다) 피부에 금발, 파란 눈을 했다고 하고, 인기 있던 소녀배우들이 그러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하니, 아름다움의 기준이 백인에 맞춰져 있었던 것.


이런 현실에서 아름다움이란 상대적인 것이라고, 너도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결코 그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말이다.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아름다움의 기준을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도 한참 자랄 나이인 어린 시절에. 하여 토니 모리슨은 직간접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이 정해지고, 그것이 아니라면 아름답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사회를 그리고 있다. 여기에 자신의 가치 기준을 백인의 기준에 맞추는 어른들의 모습도. 어린 시절의 흑인 소녀를 서술자로 하면서도, 페콜라의 엄마와 아빠도 역시 소설 속에 중요하게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이 왜 페콜라가 '파란 눈'을 원하게 되었는지, 또한 그것이 어떤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백인들의 기준을 자신의 기준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을 토니 모리슨은 '그녀는(페콜라의 엄마) 신체적 아름다움을 미덕과 동일시하면서 정신을 빈약하게 하고 구속하고 자기비하는 산더미처럼 쌓아올렸다. ... 영화를 통해 교육 받고 나니, 눈에 들어오는 얼굴마다 절대적 아름다움이라는 저울 위 특정한 범주에 넣는 일을 안 하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 저울은 은막에서 그녀가 오롯이 흡수한 것이었다.'(152쪽)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백인들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자식들에게도 대물림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니야, 너는 너야." 라고 한다고 그 말이 먹힐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소설 속 페콜라는 비극으로 치닫는다. 자신이 파란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믿지만, 그것은 미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즉 페콜라가 소망하는 일은 정신을 잃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때 '검은 것이 아름답다'는 운동이 있었다. 이는 백인의 기준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에는 기준이 여럿 있다는 것. 그러니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는 것. 즉 백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너 미쳤구나, 너는 너 자체로도 아름다워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런 인식을 강요하는(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회를 인식하고, 사회의 기준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만드는 일도 함께해야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나라 현실을 생각했다. 성형천국이라는 말을 듣는 우리나라. 의사들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의사들이 성형에 매진하는 경우가 많은, 성형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사회 현실이.


그렇게 만드는 은막(텔레비전, 영화, 각종 인터넷 매체 등등)이 성행하는, 너무도 당당하게 '전과 후(before, after)'를 보여주는 광고들. 그러니 아름다움의 기준이 이미 정해져 있고, 너는 그런 기준에 미달하니 성형을 해서라도 거기에 도달해야 해라는 암묵적인 강요.


특히 연예인들을 통해 내면으로 파고드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에도 파고들어 있지 않은가. 우리 역시 소설 속 페콜라와 비슷한 경험, 생각을 하지 않는가.


추하다고 놀림을 받고, 성형을 하면 그것에서 벗어나 남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소설 속 페콜라는 파란 눈을 가질 성형을 하지 못한다. 가난한 흑인 집에서,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집에서 그러한 일은 할 수도 없다. 그러니 엉뚱한 사람을 찾아가 소원을 말하지. 하지만 이 소원을 듣는 사람도 백인이 아닌 백인성을 추구하는 혼혈인이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특정 기준을 따르려고 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자연스레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성형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 역시 페콜라처럼 자신은 아름답지 않다는 생각에 좌절에 빠지지 않을까. 그러면 안 되는데... 라고 말을 하는 것은 쉽지만 소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사회 분위기가 그러한데, 그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할 텐데...


토니 모리슨의 [가장 파란 눈]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되니... 쉽게 읽을 수 없는 소설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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