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도담서림(道談書林) (kinye91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 /><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ue, 15 Sep 2026 08:44:34 +0900</lastBuildDate><image><title>kinye91</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t_7744201131137417.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kinye91</description></image><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문학이야기</category><title>소설로 보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 - [킬러 문항 킬러 킬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515234</link><pubDate>Mon, 14 Sep 2026 10:0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51523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52934328&TPaperId=1751523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183/30/coveroff/k95293432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52934328&TPaperId=1751523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킬러 문항 킬러 킬러</a><br/>이기호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br/></td></tr></table><br/>'교육' 답이 없다.&nbsp;답이 있어서 그것을 찾는 것이 교육이라고 알고 지내왔던 시절이 있었다. 정답은 있다. 그것을 찾기만 하면 된다. 그것도 실수 없이. 시간 안에. 이것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교육 방식이었다.<br>하지만 '교육'에 답이 있을까? 있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답을 스스로 만들어가게 하는 것, 따라서 답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교육 아니었을까?<br>답이 여럿이 있다. 복수 정답? 아니다. 복수 정답이라고 해도 그것은 이미 정해진 답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복수 정답이라는 말이 아니라 정해져 있지 않은 답을 만들도록 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br>수능을 없애고 자율적으로 학생을 뽑는 대학? 상상하기 힘들다. 공정이라는 벽이 가로막고 있다. 그렇다면 서술형 출제를 하자? 이것 역시 공정이라는 벽에 막힌다. 그 채점이 공정하냐고 하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br>이렇게 학교에서, 초중고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교육은 늘 정답을 찾는 과정이었다. 답이 있다는 가정에서 비롯한 교육. 그 답을 잘 찾는 사람이 우수한 학생이 되는 현실.<br>이런 현실에서 교육에 관한 다른 많은 것들이 감춰지거나 억압된다. 오로지 답 찾기. 답을 잘 찾아 높은 점수 기록하기. 이것이 교육의 목표가 된 듯하다. 그러니 사교육이 기승을 부리지. 왜냐? 모두가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br>나만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다는 느낌. 그래서 모두들 사교육으로 내몰린다. 단지 사교육만일까? 아니, 공교육을 한다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성적, 성적, 대학 진학... 이것이 학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br>공통의 기준이 있고, 여기에 도달하느냐 마느냐로 학교를 평가하면, 학교의 다양성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nbsp;<br>학업이라는 면에서 이렇게 획일화를 추구하고 있는데, 교육이 성적만을 획일화할까? 아니, 학생이라는 특정 시기에 거의 모든 사람이 거쳐야 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br>학생이라는 시기에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기준이 있다는 듯이, 그 기준에 맞지 않는 것은 미뤄두거나 없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지 않은가.<br>그것이 무엇일까? 다양하다. 너무도 많다. 그 많은 것들 중에 각 소설가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소재로, 주제로 삼아서 소설을 썼다. 그리고 한 권의 소설집으로 엮어냈다.<br>성적도 있고, 교우관계도 있고, 사교육도 있고, 가족 간의 관계도 있고, 무어라 하나로 정리할 수 없는 수많은 교육에 관련된 일들. 그러한 일들이 이 소설집에 잘 나타나 있다.<br>이 소설집에서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더욱 안타까운데, 얽히고 설켜 도무지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우리나라 교육 문제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br>여전히 대학입시라는 것에 목 매다는 학생들, 여기에 특정 대학에 모든 것을 거는 입시 과정, 그러한 과정 속에서 포기해야 하는 다른 많은 것들.<br>관계도 관계지만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성적이 좋다는 말과 같은 뜻으로만 여기게 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문제다.<br>짧은 소설들이 모여 있는데, 그래서 읽기에 편한데, 읽은 다음에 뒷맛이 개운하지는 않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음에... 소설 속 인물들의 고민이 지속되고 있음에...<br>인공지능 시대를 앞두고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교육 문제들, 이 소설집을 통해 만나보자. 그리고 그것들이 지속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도록 하자.<br>다른 소설들도 생각을 많이 하게 하지만 서윤빈이 쓴 '소나기'가 섬뜩하게 다가왔다. 성적을 내기 위해 늘 고1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아이. 우리가 그렇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오로지 성적이 제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런 세상을 만들어온 것은 아닌지...<br>어쩌면 아이들이 다른 학년으로 진학을 해도 그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니라, 성적이라는 쳇바퀴 속에서 계속 같은 곳을 달리게 한 것은 아닌지. 하, 이 소설 속 윤이와 같은 아이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183/30/cover150/k95293432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1833090</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이야기</category><title>김상미 시집- 밥은 삶의 성기라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511539</link><pubDate>Sat, 12 Sep 2026 15:1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51153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45232&TPaperId=1751153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0846/53/coveroff/895464523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nbsp; 오랜만에 시집을 읽는다. 소설보다 짧은 시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더 긴 시간이 있을 때에야 시집에 손이 간다.<br>&nbsp; 짧음을 짧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길게 느끼기 위해서, 드러나지 않은 것들을 찾는 시간이 있어야 하기에. 그럼에도 늘 찾기에 실패하고, 도대체 시인은 무엇을 숨겨놓았을까 생각해야 하기에.<br>&nbsp; 이번에 고른 시집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다. 하긴 시인을 모르는데, 선택을 하려면 여러 조건을 따져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제목이다.<br>&nbsp;'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비열한 거리' 중에서. 59쪽) 라니. 이만큼 현대인의 생활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br>함께 산다고 하지만 현대인들은 각자 살고 있다. 그 각자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하지만, 이상하게도 남을 더 의식한다. 주체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면서 살아간다고 해야 할까.<br>그래서 시인이 제목이 된 구절이 있는 시에서 '비열하게 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 '예스'라고 말해줘야 한다-고'('비열한 거리'에서. 59쪽)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것 아닐까 했다.<br>자신이 아니라 남이 바라보는 자신으로 살아가려 하는 것. 현대인의 삶 아닐까. 그만큼 남을 의식하면서 산다는 것인데... 그런 삶을 '기하학적 실수'란 시에서 발견했다.<br>&nbsp; &nbsp; &nbsp; &nbsp;기하학적 실수<br>모든 사랑의 체위는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감각이다.그걸 알면서도사랑을 나눌 때나는 한 번도 내가 좋아하는 체위를 요구하지 않았다.말없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다.<br>그게 내 사랑의 비극이고내 사랑이 실패한 이유였다.<br>아무것도 원하지 않고어떤 체위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늘 꿈꾸어왔던 나만의 체위는내 마음속 깊이깊이에만 간직해두고척추를 타고 흐르는 파르르한 사랑의 경련에만전율했다는 것.<br>모든 물이 다 증발하고 난 뒤에 남는 소금처럼사랑의 체위야말로 그 사람의 유일한 진실임을모른 체하고 모른 체했다는 것.<br>김상미,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2017년. 33쪽.<br>이 시를 보면 사랑을 나눌 때조차도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의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주체로 서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것. 결국 '비열한 거리'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러한 관계는 '아무 관계도 아니'게 된다. 마찬가지로 '예스'만 하는 삶은 상대와 하나가 될 수 없음을 뜻하기도 하고.<br>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헤미안 광장에서'란 시에서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br>&nbsp;보헤미안 광장에서<br><br>갑자기 내리는 비그 비를 피하기 위해여기저기서 펼쳐지는 우산들<br>그러나 우산은 지붕이 아니다아내 있는 남자가 남편 있는 여자가몰래 잠깐 피우는 바람 같은 것이다<br>갑자기 내린 비가 멎으면아무런 소용이 없는<br>그러니 사랑을 하려거든&nbsp;진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하려거든한 지붕 아래에서 하라<br>갑자기 내린 비는 금방 지나가고젖은 우산에 묻은 빗방울들은우산을 접는 순간 다 말라버린다<br>김상미,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문학동네. 2017년.40쪽.<br>이 시에서 우산이 상대에게 맞춰주는 사랑이라면, '한 지붕 아래에서 하는 사랑'은 나를 잃지 않으면서 상대 또한 인정하는, 다르면서도 함께하는 그런 삶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br>이런 한 지붕 아래서 우리는 함께 밥을 먹으며 살아가게 된다. 희노애락을 함께 겪으면서... 오로지 상대에게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또 상대를 나에게만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따로 또 같이 사는 장소로서의 한 지붕 아래, 그러한 곳에서 하는 사랑은 자신을 주체로 서게 하고, 상대 역시 주체로 서게 하는 사랑이지 않을까 한다.<br>이런 곳에서 먹는 밥,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게 해주는, 또는 사랑을 지속시키는 '성기'와 같지 않을까. 하여 시인이&nbsp;'밥은 삶의 성기다'(밥의 힘'에서. 96쪽)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br>하여 이 시들을 읽으면서 상대의 눈에 비친 나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당당하게 살 때에야 비로소 상대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이 때 먹는 밥이, 시인이 이 시에서 말한 것과는 다르지만, 두 시와 연결지으면, 삶의 성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nbsp;<br>식구(食口)라는 말. 사랑의 지속. 그것 또한 밥심아니겠는가. 밥심은 곧 사랑이다. 주체로서의 당당한 사랑. 이런 생각을 하게 한 시들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0846/53/cover150/895464523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08465360</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이야기</category><title>부끄러운 사법살인, 그 생생한 증언 -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509248</link><pubDate>Fri, 11 Sep 2026 12: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509248</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7800&TPaperId=17509248"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97/coveroff/k992137800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92137800&TPaperId=17509248"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a><br/>유시민.김세라 지음 / 은빛 / 2026년 03월<br/></td></tr></table><br/>정의. 최후의 보루.<br>독재정권에 맞선 사람들이 그나마 기대었던 곳, 법원. 하지만 그런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던 한국 현대 법원.<br>지금 법원은 삼권분립이라는 이름 아래 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고 있을까? 행정부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에 따라, 법에 따라 재판을 하고 있을까?<br>그것을 하라고 삼권분립 운운하는 것 아닌가. 당당하게 정권에 맞서 진실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런데 정의가 눈 멀면 어떻게 되는지, 사법부가 독립되지 않고 저들 권리는 주장하되, 법과 정의를 지켜야 할 의무는 소홀히 할 때 그때 일어날 수 있는 비극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보여주는 사건.<br>인혁당재건위 사건. 있지도 않은 당을 만들어 사건을 조작하려 했을 때 그나마 몇몇 검사들은 기소할 수 없다고 사표를 냈다고 하는 것이 1차 인혁당 사건. 그래, 1차 인혁당 사건이 조작이었고, 그 정당은 있지도 않았는데, 세상에 있지도 않는 정당을 재건한다고 하는 2차 인혁당재건위 사건이라니...<br>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온갖 조작 증거에는 눈을 감고, 피해자들의 호소에는 귀를 막고,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재판을 진행한 사법부.&nbsp;<br>그래서 세계는 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인해 그들이 희생당한 날(1975년 4월 9일)을 사법살인의 날이라 한다고, 세계에 부끄러운 이름을 새긴 한국의 사법부. 그들은 반성했을까? 과연 그럴까?<br>이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희생자들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기금을 출연해서 만든 단체가 4.9통일평화재단이라고 한다. 4월 9일... 참 우리나라 4월엔 일도 많다. 3일, 16일, 19일. 어느 날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 날들. 여기에 9일을 추가한다. 알고는 있었지만 잊고 있던 날을.<br>그 계기가 바로 이 책이다.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유가족인 강순희 여사의 기록. 93세가 되어 본인이 세상을 뜨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는. 자신이 살아온 역사가 바로 한국의 현대사라고... 그래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더 늦기 전에 남기고 싶었다고.&nbsp;<br>이런 마음으로, 유시민 작가에게 부탁해서 그 전에 했던 인터뷰 자료와 또 새로 인터뷰한 내용, 그리고 역사적 사실들을 자료로 해서 유시민 작가가 재구성한 기록이 바로 이 책이다.&nbsp;그 사법살인을 생생하게 폭로하고 있는 책이라고 해도 좋다.<br>인혁당재건위 사건으로 희생된 우홍선의 부인. 그래 이 사건으로 희생된 8명의 이름을 적어본다. 편의상 가나다 순으로 적으면&nbsp;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이렇게 여덟 분이다.&nbsp;<br>이 책은 이 분들 중 우홍선의 부인 강순희 여사의 말을 중심으로, 유시민 작가가 인터뷰한 형식으로 이루어졌지만, 이 사이사이에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 나온다. 그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이어지고 있으니...<br>읽으면서 독재정권, 그 숨막히는 시대에도 정의를 위해서 나섰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결코 조작사건에 모두가 넘어간 것은 아니었음을 강순희 여사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서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쳐 87년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br>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독재가 성립하기 힘든 대한민국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고.<br>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강순희 여사가 펑펑 울었다는데, 기자가 왜 무죄가 되었는데 우느냐고 한 어리석은 질문. 와, 이게 기자들의 수준이었다니... 아니, 자신이 겪지 않았어도 그 사건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이라도 있었으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 텐데...<br>무죄로 밝혀졌는데 이미 사형당해 돌아가신 분들. 그 분들을 생각하면 더 억울하고 분통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것은 기쁨의 눈물이 아니라 억울함의 눈물이었을 텐데... 독재정권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그 무죄 판결을 통해 함께 분노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고 언론이 (적어도 자신들이 제4부 권력이라고 여긴다면)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어야 하는데...<br>왜 우느냐는 질문을 하다니, 참... 이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자.&nbsp;<br>유시민 : 2007년 1월 23일 재심 무죄 판결이 났어요. 어떠셨어요?강순희 : 법정 나오면서 막 울었어. 그런데 기자들이 이겼는데 왜 우냐고, 그 따위로 묻는 거야. '이겼으니까 더 억울하지! 이렇게 죄 없는 사람을 죽였으니까!' 그랬는데, 아니 어떻게 기자들이 그렇게 뭘 몰라? (237쪽)<br>기가막혔을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간 꿋꿋하게 남편의 무죄를 주장해왔고, 또 조작임을 밝혔던 강순희 여사.<br>그들과 함께했던 많은 성직자들, 변호사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적극적으로 나서진 못해도 마음으로 응원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리라. 강순희 여사의 말에 의하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와준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하니까.<br>또한 가족들 역시 꿋꿋하게 살려고 노력을 했다고 하니까. 그럼에도 국가의 사법살인. 사법부의 정의를 저버린 행동 등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독재자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권력을 동원해 사건을 조작하고, 거기에 동조해 사법부가 판결을 내리는 기가 막히는 과거의 현실.<br>정말 부끄러워해야 한다. 당시 재판관들, 검사들, 그리고 중앙정보부원들(지금 국가정보원). 그래야 하는데, 이들이 끝까지 뉘우쳤다는 얘기를 들어보지는 못했으니, 참.<br>지금에 와서 늦었지만 그래도 재심을 열어 무죄로 판결한 것이, 국가가 배상을 한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할까?<br>하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강순희 여사가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 국민들이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면 독재가 고개를 내밀 수 있다는 것.<br>사법부, 제대로 독립하지 못하면 독재정권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 강순희 여사의 말에도 나오지만 언론 역시 제대로 정부를 감시하지 못하면 받아쓰기만을 하는 또 하나의 권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br>강순희 여사가 기자들에게 호통을 친 내용, 당신들은 왜 이 사건에 대해서 보도를 하지 않는가. 이렇게 조작되었다는 내용이 밝혀졌는데도... 그래, 언론이 눈을 감고, 사법부가 정의의 편에 서지 않으면 독재가 눈을 떠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 점을 강순희 여사의 증언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br>이 책은 강순희 여사 한 사람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현대사를 보여주는 책이다.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 특히 독재시대를 거쳐온 사람이 후대에게 그러한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책.<br>귀한 책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그리고 그 잘났다고 하는, 영감님이라는 소리를 듣는 판사님들부터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기자님들도 마찬가지고... 자신들이 제대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정권이 어떻게 제 멋대로 하는지 강순희 여사의 책을 통해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테니.<br>무어라 말해도 역시 시민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시민들이 깨어 있으면 법원이 눈을 감지 못하고, 언론이 침묵할 수가 없다. 그들을 눈 뜨고, 귀 열고, 입을 열게 하는 존재들, 우리 시민들이다. 그러니 시민들인 우리들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사법살인을 고발하는 이 책, 읽어야 한다. 알아야 막을 수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br>참고로... 인혁당재건위 사건 8인의 약전이라고 [다시, 봄은 왔으나]라는 책이 있다고 한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읽어봐야겠단 생각. 그리고 소설가 김원일이 쓴 [푸른 혼]이라는 소설이 이 사건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물론 실명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이름 석 자 가운데 한 글자만 바꿔서 썼으니... 이 소설을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nbsp;<br>강순희 여사의 이 책과 더불어 함께 읽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850/97/cover150/k992137800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8509769</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여러이야기</category><title>삶은 단절(들)의 연속이다 - [단절(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506666</link><pubDate>Thu, 10 Sep 2026 09: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5066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92139972&TPaperId=175066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87/coveroff/k89213997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92139972&TPaperId=175066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단절(들)</a><br/>클레르 마랭 지음, 류재화 옮김 / 사람in / 2026년 05월<br/></td></tr></table><br/>무척 어려운 이야기를 할 것 같은 제목이지만 아니다. 단절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책이다.<br>사실 우리 삶은 하나로 주욱 이어지지 않았다. 여러 단절들이 모여 삶을 이룬다. 생애 주기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바로 단절들의 이어짐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br>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단절을 경험한다. 아니 단절이 없으면 태어나지 못한다. 사실 태어나기 전에 잉태하는 과정을 봐도 그렇다. 단절 아니겠는가. 남자의 몸에서 단절되어 나온 정자가 난자와 만나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br>자궁 속에서 단절을 넘어 새로운 출발을 하지만 여기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또다시 단절해야 한다. 이번엔 자궁 밖으로 나와야 한다. 탯줄로 이어진 것을 끊어야 한다. 단절이다. 이 단절이 삶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삶.<br>그러므로 단절은 삶이다. 단절들이 모여 우리 삶을 이룬다. 그리고 마지막 단절은 죽음이다. 죽음은 한 개체로서의 완전한 단절이지만 이 개체의 삶은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새로운 모습으로.<br>죽음이라는 단절이 인간이라는 종 전체를 보면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한다.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단절이 없다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을.<br>그래서 인간의 삶 자체는 단절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늘 보는 시계를 보라. 시간은 단절이다. 연속이 아니다. 단절들이 순서대로 이어질 뿐이다. 이 시간을 좀더 길게 끌며 단절이 되면 계절이 된다. 계절 역시 단절이다. 그렇지만 이 단절이 끝이 아니다. 다른 단절을 이끈다. 계절을 더 길게 끌자. 바로 생애 주기가 된다.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중장년기, 노년기 등등.<br>더 길게 늘려볼까? 바로 인간의 역사가 된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단지 시간만? 아니다. 공간 역시 단절들이다. 이 단절들이 모여 지구를 이루고, 우주를 이룬다. 우주 역시 처음에 단절로부터 시작했다. 나중에 팽창하다 다시 수축해서 원점으로 돌아간다면(과연 그런지는 과학자가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다) 역시 단절들의 연속이다.<br>저자는 바로 이러한 단절을 단지 상실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잃어야 얻는 것이 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듯이.<br>당장은 단절이 괴롭고 힘들다. 고통스럽다. 맞이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것이 단절이다. 하지만 단절을 피하기만 하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바로 자신을 알 수 없기 때문. 즉 단절이 없다면 자신도 없다. 자신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과 다른 존재를 단절시킬 수 있겠는가.<br>그렇기 때문에 우리 삶에 단절은 필수적이다. 피할 수 없는 단절. 이 단절을 통해서 성장해갈 수 있음을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단절을 하지 못했을 때 더욱 괴로워질 수 있음을 '불면증'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br>'불면증은 내려놓지 못함이다. ... 잠들지 않는 의식은 과거를 무한정 늘린다. 과거가 사라지는 것을 거부한다. 불면증은 현재를 확장하고, 과거와의 단절을 거부하는 통에, 헛된 노력을 하는 줄도 모르고 지쳐간다.'(183쪽)고...<br>이것은 과거와 단절하지 못한 모습이다. 단절을 해야 하는데, 단절을 하지 못해 괴로움에 처한 상태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과거가 현재를 장악하더라도 한계를 정하고, 살아있는 순간을 과거가 침범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182쪽)고 한다. 이것이 바로 '단절'이다.<br>따라서 우리는 단절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우리 삶에서 이러한 단절들이 없다면 주체적인 삶이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절은 결국 주체를 찾아가는 방법이다.<br>이런 극단적인 예가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를 둔 아이다. 그 아이는 부모와 단절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죽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는 단절이 반드시 필요하다. 부모로부터의 단절.&nbsp;<br>남과는 다른 나를 찾아가는 과정, 내 삶을 살아가는 과정, 그 과정 속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단절들. 이 단절들을 다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삶을 지속해가는 과정. 사람들이 다 똑같아서는 안 되니까. 똑같다면 이런 단절이 생길 일도 없겠지만, 자아라는 것도 없게 될 테니까.<br>읽다가 뜬금없이 [장자]에서 '혼돈'에 관한 글이 떠올랐다. 이 책과 연결될 것 같지 않은데, 그것은 단절이 아니라 같음을 이야기하는데, 결국은 같은 이야기 아닌가 하는.<br>혼돈에게 대접을 잘 받은 두 바다의 왕이 자신들에게는 있지만 혼돈에게는 없는 구멍을 만들어주려 한다. 하루 하루 구멍을 만들자 결국 혼돈이 죽어버렸다는.<br>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혼돈은 이미 다른 바다의 왕들과 다르다. 그들과 단절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이 이런 단절을 부정하고 같아져야 한다고 한다. 즉 단절을 거부한다. 그 결과가 바로 혼돈의 죽음이다. (단절을 다름이라고 한다면)<br>단절은 그런 것이다. 죽음이 최후의 단절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생물이 피해갈 수 없는(불멸을 추구하는 실리콘밸리의 노력이 진행 중이지만...) 숙명이라면 죽음의 당사자는 빼고, 이 죽음으로 인한 단절을 겪는 사람들을 비롯해 살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단절들, 태어남에서부터 사춘기 때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 연인과 사귀다 헤어지거나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 질병 특히 치매와 같은 질병으로 자신을 잃어가는 것 등등이 바로 단절이다.<br>이 중에 인생에서 겪지 않을 수도 있는 일도 있지만 겪는다고 해서 삶을 포기하거나 무너져 내려서는 안 될 단절들이다.&nbsp;이 단절들 속에 나란 존재는 단일한 하나만의 존재가 아니라 여러 존재가 있음을, 하여 나 자신조차도 단절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br>저자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단절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nbsp;그러면서 결론은 참 단순하다. 각 단절의 순간들은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그 속에서조차 우리는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아니, 기쁨을 찾아야 한다는 것. 저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책을 끝내고 있다.<br>'삶의 위험을 감수하는 것, 그것은 가능한 모든 기쁨을 느끼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비극적인 밤을 보낼 때조차, 자신 안에 깃든 기쁨의 작은 불꽃을 기억하는 힘을 갖기.'(195쪽)&nbsp;<br>그렇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단절들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 또다른 출발을 의미한다. 그러니 단절들 속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기쁨을.<br>너무도 당연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단절들을 통해 얻은 상처들이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1/87/cover150/k89213997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018761</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여러이야기</category><title>해양포유류에서 삶을 배우다 - [떠오르는 숨 - 해양 포유류의 흑인 페미니즘 수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502251</link><pubDate>Tue, 08 Sep 2026 09:5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50225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42932167&TPaperId=1750225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78/18/coveroff/k24293216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42932167&TPaperId=1750225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떠오르는 숨 - 해양 포유류의 흑인 페미니즘 수업</a><br/>알렉시스 폴린 검스 지음, 김보영 옮김 / 접촉면 / 2024년 07월<br/></td></tr></table><br/>이야기가 마치 시와 같이 들려온다. 속삭이듯이. (번역을 잘했다고 해야 할 듯)<br>해양포유류 이야기지만, 결국은 인간의 이야기다. 세상 만물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저자도 말하듯이 지구는 둥글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으니.<br>돌고 도는 삶들. 관계들. 이 돌고 도는 원의 관계를 끊으면 생태계가 위험해진다. 그러한 위험을 초래한 존재가 누구인가? 바로 인간이다.&nbsp;<br>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또는 단순한 즐거움을 위해 해양포유류를 대량학살했던 과거의 인간. 대놓고 학살하지는 못하지만 그들이 살아갈 서식지를 파괴함으로써 또다른 대량학살을 유발하고 있는 지금의 인간. 해양포유류의 대표격인 고래를 생각해 보자. 인간으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한, 또 이미 멸종한 고래들을...<br>이러한 학살적 인간과 더불어 그들과 공생하려는 인간도 있다. 이렇게 해양포유류를 보면서 저자는 바로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 인간이 그들과 맺는 관계가 인간이 인간과 맺는 관계와 다르지 않음을.<br>해양포유류를 인간의 관점에서 재단하고, 그들의 삶을 인간이 주도하려고 하고, 그들에게 쓸모 있음과 없음의 딱지를 붙이는 인간들은, 다른 인간들에게도 그렇게 해왔다는 것.<br>결국 우리가 다른 종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인간을 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음을, 그래서 해양포유류의 삶을 살피면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방향을 알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br>때로는 객관적으로, 때로는 서정적으로, 해양포유류에게 말을 거는 듯한 표현을 하기도 하면서 이렇게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그 연결고리를 끊으면 안 됨을 보여주고 있다.<br>이런 관점을 지니고 있기에 저자는 용어 하나하나에도 신경쓰고 있다. 차별적인 언어를 쓰지 않으려 하는 것. 그래서 저자에게는 기존에 나와 있던 해양포유류에 관한 책들의 문제가 눈에 들어온다.<br>'해양포유류에 관한 안내서 연구에서 발견한 주요 사항 중 하나는 인종차별, 성별이분법 등의 억압을 부추기는 언어가 해양포유류에 관한 '과학적' 설명에서도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132쪽)<br>이렇게 과학의 껍질을 쓰고 차별을 조장하는 사례를 우리는 역사에서 많이 보아왔지 않은가. 인간에 대해서도 그랬는데,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 관해서는 더더욱 심했으리라.<br>그러니 인간중심의 관점을 버리고 그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한다. 그런 눈을 지니기 위해서는 먼저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단지 귀로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nbsp;<br>저자가 처음을 '듣기'로 시작하는데 (저자는 이를 장이라고 하지 않고 주제별 운동이라고 한다) 각 부분의 제목이 그러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br>그 주제는 '듣기 - 숨쉬기 - 기억하기 - 연습하기 - 협력하기 - 취약해지기 - 존재하기 - 맹렬해지기 - 갈등의 교훈 - 경계 존중하기 - 털 존중하기 - 자본주의 끝내기 - 거부하기 - 항복하기 - 깊이 들어가기 - 감정으로 있기 - 속도 늦추기 - 휴식 - 축복 보살피기 - 활동'이다.<br>'듣기'로 시작해 '활동'으로 끝난다. 그렇게 듣기의 중요성, 단지 듣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활동으로 나아가야 함을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주장하고 있는데...<br>해양포유류의 다양한 삶들에서 인간의 삶을 이끌어낸 저자의 통찰력을, 저자의 말 그대로 창발적 전략(21쪽)을 만날 수 있는 책이다.<br>해양포유류의 삶에서 어찌 평화만 있겠는가? 그들의 삶에서도 갈등이 있고, 죽음이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대량학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러한 갈등, 죽음 속에서 자신들의 종만이 아니라 다른 종들과도 맺는 관계들 속에서 인간의 삶을 살필 수 있는 여러 모습이 있다.<br>어느 한 종이 다른 한 종을 멸절시켰을 때 자신들의 생존에도 문제가 생김을 생각해야 하는데, 하물려 인간들이 인간을 분류하고 배제하고 제거하려 한다면 과연 인간이라는 종이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을까?<br>해양포유류가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숨을 쉬는 방법을 찾아냈듯이, 인간 역시 자신들의 숨을 위해 어떻게 다른 존재들과 관계맺으며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278/18/cover150/k24293216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2781806</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문학이야기</category><title>정권 유지를 위해 이렇게 조작 사건을 만들다니... - [툴라예프 사건]</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99679</link><pubDate>Mon, 07 Sep 2026 08: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9967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62130926&TPaperId=1749967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04/94/coveroff/k862130926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862130926&TPaperId=1749967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툴라예프 사건</a><br/>빅토르 세르주 지음, 조재룡 옮김 / 빛소굴 / 2026년 08월<br/></td></tr></table><br/>혁명은 성공시키기 보다 유지하기가 더 힘들다. 그만큼 기대가 높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저항하는 존재들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nbsp;<br>혁명이 성공하면 외부의 위협도 있지만, 내부의 위협도 있다. 이렇게 혁명은 성공 직후 내외적으로 어려움이 발생한다. 외부의 위협이야 명확하니까, 대처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사람들을 설득하기도 마찬가지고.<br>그런데 내부의 위협은 (여기서 내부라 함은 혁명을 이룬 나라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이룬 사람들, 또는 지지자들을 의미한다) 적이 명확하지 않다. 사람들에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혁명의 지지자와 반대자를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들 모두 한때 혁명에 가담했던 사람들이기에.<br>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혁명이 성공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내부 단속이 필요하다는, 하나가 되어 나아가야 한다는 쪽이 권력을 잡으면, 그것을 비판하는 세력들은 모두 반혁명 세력이 될 수 있다.<br>아니 반혁명 세력이라고 불린다. 그들을 용인하면 혁명의 속도가 정체된다. 어떤 때는 후퇴하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생각들을 억압하기 시작한다.&nbsp;<br>하지만 이 억압은 혁명의 대의에 어긋난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며 행복하게 사는 세상 아닌가?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공존하는 사회 아니던가. 이런 사회를 꿈꾸었는데, 내부에서 반발이 나온다고 억압을 한다면 그것은 혁명 정신을 배반하는 것이 아닌가?<br>이때 택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혁명이 지지부진해지는 책임을 묻는 것이다.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면 이중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혁명이 제대로 완수되지 못하는 것이 권력자의 책임이 아니라 반대 세력 때문이며, 동시에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br>이 방법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은 사건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도 혁명에 반대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br>툴라예프라는 고위 관료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범인이 현장에서 잡히지 않았다. 기회다. 만약 범인이 잡혔어도 그 과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지만, 잡히지 않아야 일이 더 쉽게 된다.&nbsp;<br>많은 사람들이 관련자로 잡혀들어간다. 그 많은 사람 중에는 권력자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도 있고, 혁명의 이념에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들을 엮어서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낸다.<br>반혁명 사건...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만들어낸 사건에 사람들을 집어넣으면 된다. 자백을 받아야 한다. 어떻게? 고문이라는 방법도 또 혁명의 이념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다.<br>여러 방법으로 결국 세 명이 처형된다. 이들이 살인에 가담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권력자에게 위협이 되느냐 아니냐, 권력자의 뜻을 효율적으로 집행했느냐 하지 못했느냐가 중요하다. 또한 이들에게 혐의를 덮어씌움으로써 권력자가 말하는 혁명을 지속시키는 힘을 얻을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br>그러니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자의 의지다. 다음은 권력자의 의지를 실현하는 관료들이다. 그 다음은 이런 사건 결과를 받아쓰기 하는 언론들이다. 이렇게 사건은 만들어지고 결론지어진다. 진실은 없다.<br>아니, 진실은 있다. 다만 밝히지 않을 뿐이다. 진실이 밝혀져서는 안 된다. 진실은 어둠 속에 묻혀야 한다.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는 점이다.<br>이런 사건 과정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그들이 왜 하지도 않은 일을 인정하는지, 그들이 생각하는 혁명이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한다. 권력자에게는 반대하지만 자신이 몸담았던 혁명의 대의는 배반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혐의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으니...<br>개인보다는 당을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수없이 고민하는 사람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는데, 이 점이 이 소설을 진실을 왜곡하는 사건을 건조하게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속에서 사람들이 대처하는 여러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br>러시아 역사 중에서 스탈린 치하의 역사를 알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한데...&nbsp; 소설 시작 전에 작가의 말인 듯한 '이 소설은 문학적 허구일 뿐이다. 소설가가 창조해낸 진실은 역사학자나 연대기 작가의 진실과 어떤 정도라도 혼동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말이 있다.<br>그러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스탈린 숙청 당시의 사람들과 소설 속 인물을 일 대 일로 대응시키려고 할 필요는 없다. 굳이 대응시키려 하지 않아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고, 또 이것이 단지 스탈린 치하에서만이 아니라 독재자들이 군림하는 사회에서 독재권력을 정당화하고, 공고하게 하기 위해서 벌어졌던 일들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br>이렇듯 좋은 작품은 현실을 반영하고, 그 반영을 통해서 현실을 겉모습만이 아니라 감춰진 속도 볼 수 있는 관점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br>빅토르 세르주의 이 소설 [툴라예프 사건] 하나의 조작 사건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진실이 어떻게 가려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904/94/cover150/k862130926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9049409</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여러이야기</category><title>우리에게 따뜻함을 선물했던 사람들 - [광부일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97402</link><pubDate>Sun, 06 Sep 2026 10:2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974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096927&TPaperId=174974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334/40/coveroff/8974096927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096927&TPaperId=174974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광부일기</a><br/>전제훈 지음 / 눈빛 / 2024년 07월<br/></td></tr></table><br/>이제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는 탄광촌.<br>이곳에서 나온 석탄은 여러 연료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특히 연탄으로 요리를 하거나 추위를 물리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br>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일이 되어가고 있다. 연탄이 아직도 곡 필요한 사람들이 있지만,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연탄은 과거의 물건이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 속에서나 보는.<br>이런 연탄으로 대표될 수 있는 탄광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광부라고 한다. 이들에 대한 기사가 심심치 않게 나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사들이 즐거운 기사가 아니라 대부분 사고 기사였으니...<br>이들의 일터는 너무도 힘든 곳이었다. 막장이라고 했다. 지하로 땅을 파고 들어가 석탄을 캐야 하는 직업. 방진 마스크를 쓰고, 온몸을 잘 가리려고 해도 온몸에 들러붙는 석탄가루들, 몸 속으로 들어오는 미세가루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br>갱도로 들어갈 때 그들의 모습과 갱도에서 나올 때의 모습은 다르다. 색깔이. 완전히 검은 색으로 뒤덮인 그들의 모습. 그들이 사진기 앞에 서기 좋아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br>이런 그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사진작가 역시 갱도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다. 그는 화약기사로 광산에서 일을 한다고 한다.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br>소중한 기록들.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노동들. 당당한 그들의 모습이 이 사진집에 있다.&nbsp;<br>그렇다. 그들의 노동이 있었기에 우리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힘듦을 바탕으로 편안함을 추구하던 생활. 그러니 더더욱 그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노동을.<br>지금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우리들의 생활에서 필수적이었던 그들의 노동 생산물을... 그런 기록들. 사진으로 남은 기록.<br>이렇게 사진이라는 기록으로 남아 있도록 한 작가의 노력이 고맙기도 하다. 이런 작가들이 있기에 우리의 과거가 사라지지 않고 기억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334/40/cover150/8974096927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3344078</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여러이야기</category><title>노동신문을 통한 북한말 살펴보기 -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우수한 말 - 평양문화어에서 험한 재미를 파헤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90977</link><pubDate>Thu, 03 Sep 2026 09: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9097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9619&TPaperId=1749097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17/78/coveroff/k60213961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02139619&TPaperId=1749097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우수한 말 - 평양문화어에서 험한 재미를 파헤치다</a><br/>정소운 지음 / 황소자리(Taurus) / 2026년 06월<br/></td></tr></table><br/>'주둥이박치기, 얼음보숭이, 꼬부랑국수, 가락지빵'<br>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겠는가? 한때 북한말을 알자는 프로그램이나 교육이 있었다. 그리고 북한에서는 순우리말로 외국어를 많이 바꾸었다고, 대표적으로 거론된 말들이 바로 앞에 인용한 말들이다.<br>주둥이박치기는 '키스'를, 얼음보숭이는 '아이스크림'을, 꼬부랑국수는 '라면'을, 가락지빵은 '도넛'을 말한다고 했다. 그런가보다 했다. 북한에 가본 적도 없고, 북한 사전을 찾아본 적도 없으니.<br>아니, 우리나라에서 북한 사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자칫하면 국가보안법에 걸려 잡혀갈 수도 있는데... 예전에 '이적표현물 소지 금지법' 비슷한 것이 있었으니...<br>하지만 많은 책에서 순화한 북한말이라고 이 말들을 소개하곤 했다. 그래서 북한에서 이 말들이 쓰이는구나, 조금 어색한 말도 있지만, 괜찮은 말도 있네 했었는데...<br>이 책을 읽어보니, '잘못 알려진 북한말'이라는 부분에서 이 단어들 실제로 북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403-412쪽). 그만큼 북한과 우리가 교류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때 공통 사전을 편찬하자는 움직임까지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도.<br>여기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북한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로 '날래'가 나오는데, 이 말은 평안도 사투리라고 한다. 북한에서 우리 표준어라고 할 수 있는 '평양문화어'는 사투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노동신문에서는 이 말이 전혀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br>이렇게 이 책의 저자는 노동신문을 중심으로 북한에서 쓰이는 말들을 살피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도 있지만 처음 보는 말도 있다.<br>또 그 말을 어떤 의미로 쓰는지, 어떤 말들이 사라졌는지를 살피고 있다. 노동신문이면 북한의 공식 신문 아닌가. 그러니 이 신문에 쓰이는 말들은 북한의 공식언어라고 보면 된다.<br>저자가 방대한 양의 노동신문과 다른 매체들을 살펴서 북한에서 쓰고 있는 말들을 알려주고 있기에, 북한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떤 말들을 쓰고, 어떤 말들은 쓸 수 없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br>거기다 공식 매체인 노동신문에 실리는 글 중에 정말로 찰진 욕들이 왜이리 많은지, 북한은 그러한 찰진 욕들을 북한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 퍼붓는다고,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북한 사람들을 대상으로는 그러한 욕설을 싣지 않는다고 한다.<br>참. 가끔 북한에서 나온 성명서를 보면 와, 저런 심한 욕을 하기도 하는구나, 어떻게 정부의 대표라는 사람이 공식적인 문서에서 저런 표현을 하지 했었는데, 자신들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강하게 외부를 향해 표현하는 방식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br>이렇게 이 책은 북한의 공식 매체를 통해서 사용되는 말들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낯설지만 친숙한 말들이기도 하다. 북한과 우리는 한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또한 많은 어휘들이 여전히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고.<br>그럼에도 분단으로 인해 달라진 말들, 이 책에서 저자는 이제 북한이라는 말도 쓰면 안 된다고 하는데, 남한이라는 말이 북한에서 사라지는 과정도 살펴주고 있으니, 어떤 말들이 북한에서 쓰면 안 되는 말인지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된다.<br>다만, 공식적인 매체에 쓰인 언어를 살피고 있기에, 아마 북한 당국이 특정한 말들을 금지했다고 해서 그 말들이 쓰이지 않을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br>말은 탄압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에... 오히려 억압이 심해지면 그 언어를 몰래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그 말이 더 오래 살아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br>그런 일상에서의 말까지 살필 수 없는 것이 한계이긴 하지만, 그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북한과 관계가 단절되어 있으니까. 아마도 관계가 회복되어 서로 교류가 된다면, 이 책의 2부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br>노동신문에서 다루는 말들과 실제 생활에서 쓰는 말들의 같고 다름을 살피는 책. 공식적인 매체를 통해서 살핀 북한말이기 때문에 좀 답답한 느낌도 있다. 재미가 아니라 답답함. 언어를 꼭 이렇게 통제해야 하나 하는 생각.<br>하지만 교류가 끊긴 이때 북한에서 쓰는 말들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으니, 이 책을 읽으면서 남과 북은 아직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면 그나마 위안이 될까.<br>하루빨리 남북이 자유롭게 교류해서 실생활에서 쓰는 북한말에 대한 책이 나왔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17/78/cover150/k60213961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177845</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문학이야기</category><title>이름을 갖고 환한 낮에 함께 살 수 있는 세상 - [이름 없는 것들의 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89442</link><pubDate>Wed, 02 Sep 2026 16: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894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0711&TPaperId=174894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27/79/coveroff/k382130711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82130711&TPaperId=174894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름 없는 것들의 밤</a><br/>정보라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07월<br/></td></tr></table><br/>백창우 노래 '우리의 노래가 이 그늘진 땅에 햇볕 한 줌 될 수 있다면'에서 이런 가사가 있다. '이름 없는 꽃들 다 이름을 얻고'라는...<br>이 소설 제목을 보자 이 노래 가사가 떠올랐는데, 이름 없는 것들의 밤에서 '이름 없는'이라는 말과 '밤'이라는 말이 힘든, 어려운,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등등을 의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 '이름 없는 것들의 밤'은 말 그대로 힘든 사람들이 힘들게 사는 삶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그런 삶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말이지 않을까 했다.<br>연작소설이라고 한다. 첫소설 제목을 보고서는 어, 어디서 본 소설인데, 아니 내가 읽은 소설인데 했다. 읽으면서 역시 읽은 소설이야 했는데, 이 소설은 짧은 소설로 먼저 출간이 되었다. 그러니 이 소설을 시작으로 연관된 내용의 소설 두 편이 묶여 이 소설집을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br>&nbsp; 흡혈인, 인조인간, 인간, 기계 등이 등장하는데, 이름 없는 것에 이들이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첫번째 소설에서는 흡혈인과 인간 마리카, 그리고 인조인간 빌리가 등장하는데, 인조인간이 빌리라는 이름을 얻고 기계로서의 삶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물론 흡혈인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은 인간의 피로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기계에 종속된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온다.<br>&nbsp; 두번째 소설에서는 인간 마리카의 이야기다. 아니 인조인간 마리카의 이야기라고 해야 하나? 처음 읽으면서는 앞 부분에서 잠깐 언급된 마리카의 삶을 두 번째 소설에서 펼치고 있구나 했는데, 읽으면서 반전이 일어난다.<br>&nbsp; 마리카가 생각하는 자신이 자신이 아닐 수도 있음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기계에서 이용당하게 되는데... 그럼에도 마리카는 자신이 기계 또는 기계의 일부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과거의 의식이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에...<br>이런 의식이 과연 인간일까? 그런 의식으로 인해 다른 존재에게 자신도 모르게 피해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마리카는 그렇게 기계를 위한 첩자 역할을 하게 되고, 여기에 기계로 인해 아이를 낳는 기계로 변해버리기도 한다.<br>세 번째 소설에서는 이런 마리카의 아이라고 하는 존재가 흡혈인 앞에 나타난다. 그런 그에게 흡혈인은 '모르다'는 뜻을 지닌 '네빔'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네빔과 흡혈인 또다른 인간들, 그리고 인조인간들이 모두 나와 기계에 저항하는 장면.<br>그렇다고 기계에 승리하는 장면으로 끝맺지 않는다. 그런 행복한 결말을 내기에 지금 세상은 불확실하다. 우리는 이 소설에 나오는 기계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으니.<br>그것들이 일으킬 부작용을 생각하기보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이로움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그러한 이로움만을 추구하다가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될지 생각하지 않으면서. 어쩌면 기계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킬수록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해갈지도 모르는데...<br>그러면서 이러한 기계 시대에 소외되는 존재들의 문제에 대해서 눈 감게 되는데... 이 소설에서 말하듯이 끝까지 저항하는 존재들은 소수자들이다. 기존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던 존재들이 아니다. 특권을 누리던 존재들은 기계 시대에도 자신들의 특권을 잃지 않기 위해 기계에 협조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존재들, 사회에서 배제되었던 존재들은 그러한 기계 시대에도 역시 배제될 수밖에 없다.&nbsp;<br>그들은 계속 이름 없는 것들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가지려고 할 수록 탄압은 거세질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밤'에 살던 사람들... '밤'에 묻혀 영원히 이름 없는 것들로 살아갈 수는 없다.<br>이들은 이름을 가져야 한다. 당당한 삶의 주체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그래서 '밤'이 아닌 '낮'으로 나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 사회에서 그들은 '악마'로 분류되어도 된다.<br>이 소설의 끝에서 "우리는 모두 악마에게서 왔다'(286쪽)는 말이 이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br>뭐, 이런 저런 생각을 해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이 소설집이 좋은 이유는 재미있다. 한번 잡으면 끝까지 읽고 싶어진다. 흥미진진한 소설. 그러면 됐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827/79/cover150/k382130711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8277981</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여러이야기</category><title>한글, 창제 이후 거쳐온 과정 - [한글, 불편한 진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86051</link><pubDate>Tue, 01 Sep 2026 10: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8605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52139942&TPaperId=1748605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7/34/coveroff/k0521399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52139942&TPaperId=1748605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한글, 불편한 진실</a><br/>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06월<br/></td></tr></table><br/>제목이 자극적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반론이라고 여기는 제목이다. 불편한 진실이라니...<br>그렇다면 한글에 대해서, 세종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이 진실이 아니었던 말인가? 이런 주장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br>설득력을 지니기 위해서는 꼼꼼하게 자료를 살펴야 한다. 한글의 창제과정부터, 창제된 이후에 한글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주로 누가 사용했고, 남아 있는 기록은 무엇인지 등을 살펴야 한다. 그런 다음에 한글에 대한 진실을 주장할 수 있다.<br>그런데, 한글이 창제된 지 600년이 되어 간다. 1443년에 창제했고, 1446년에 반포했다고 기록에 남아 있으니 반포한 년도로 따져도 한글은 580년이라는 세월을 우리 곁에 있었다. 그동안 한글에 대한 연구도 많았고...<br>하지만 한글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두 가지 요인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당시에 인쇄술과 종이의 문제다. 금속활자가 있었다고는 인쇄를 나라에서 관리를 했기에, 누구나 인쇄할 수는 없었다. 여기에 그것을 찍어낼 종이는 많지 않았던 시대 아니던가.<br>그래서 옛날 이야기를 읽다보면 종이가 없어서 이면지를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그러한 이면지조차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개울가에서 모래에 쓰던지, 아니면 바위에 글씨를 썼다고 하지 않던가. 정보를 장악한 국가가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인쇄해서 유포하느냐, 인쇄하지 않느냐를 결정했으니, 한글로 인쇄된 종이가 많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br>또한 신분제 사회에서 문자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였다. 근대에 들어서도 문맹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가. 조선시대에는 문자를 읽고 쓰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을 것이고, 그것이 그들의 삶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처럼 수시로 문서를 주고받는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인쇄 역시 대량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br>또 하나는 우리나라가 겪었던 전쟁이다. 한글 창제 이후에 겪은 큰 전쟁만 해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해방이 되고나서 벌어졌던 전쟁까지.<br>대체로 전쟁은 많은 기록을 없앤다.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할 때에 기록물까지 챙기기는 힘들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벌어졌던 많은 전란으로 기록들이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 몇 안 되는 한글 기록들이 사라진 것.<br>여기에 그러한 기록물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근대 이후의 삶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먹고살기 바빠서 불쏘시개로 쓴 경우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br>국가에서 편찬한 기록물들이야 철저하게 관리를 했겠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경우), 또 권세가들에서, 나름 전통있다고 자랑하는 집안에서는 자신들의 문집을 보관했겠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민중들은 그러한 기록물을 보존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쓴 글들이라야 주로 계약에 관한 사항이거나 개인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편지글들이었을 테니.<br>이런 기록물의 제약을 염두에 두고 한글에 대한 논쟁을 살펴야 한다. 당연히 지금 우리가 살필 수 있는 자료들은 국가의 공인을 받은 기록물들이 많고, 명문가라고 할 수 있는 집안들에 전해져 내려온 기록물들인 경우가 많다.<br>저자가 살피고 있는 기록물도 그렇다. 그런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저자의 주장은 제목에서 제시한 것처럼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다.<br>훈민정음에 세종의 서문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서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큰 차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서문을 읽으면 세종은 백성을 가엾게 여긴 것이 맞다. 그들이 편리하게 쓰도록 한글을 만들 생각을 한 것도 맞다. 이 점은 '불편한 진실'이라고 제목을 단 저자도 인정한다.<br>다만, 창제 이후의 과정에서 백성들을 위한 문자가 그들에게 다가갔느냐, 또한 그들이 편리하게 썼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자료들을 살피면서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br>그 중 대표적인 것이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이라고 한다. 지방 수령이 잘못했을 때 그 고을의 사람들이 수령을 고발하는 제도. 조선 초기에 이 제도가 살아있었다고 하는데, 이 법이 폐지된 때가 바로 세종 때라고 하는 것.<br>백성들이 자신들의 뜻을 펼치게 하려면 수령들의 잘못을 한글로 적어 호소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 법을 폐지했으니, 어떻게 백성들이 자신들의 뜻을 쉽게 펼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br>이 점을 들어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글을 사용한 사람들이 과연 일반 민중이었을까? 오히려 사대부라고 하는 양반들이 더 많이 사용했다고 하는 여러 자료들을 인용하면서 이 역시 '불편한 진실'이라고 한다. 저자는 이 두 가지를 구체적인 사료(史料)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br>그렇다.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한글이 창제된 이후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은 당연히 양반층이 많았을 것이다. 왜냐? 이들에게는 시간이 많았으니까. 또한 이들은 읽고 쓰는 일이 생활이었으니까.<br>반면 민중들은 먹고살기 바빴다. 글을 배워 읽고 쓸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루하루 노동하면서 사는 사람들, 그들이 한글을 익힐 여유가 있었을까? 결국 한글에 얽힌 불편한 진실은 세종의 의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아니다.<br>그동안 우리 사회가 민중들이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노력해왔는가를 살피는 일이다. 소수의 집권층이 자신들은 경제적 부와 정치 권력, 그리고 문화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삶을 받치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을 문제삼아야 하는 것이다.<br>한글이라는 훌륭한 문자로 누구나 문화 생활을 할 수 있는 조건은 갖추어졌으나, 사회제도로써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했다는 것, 이것을 세종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br>세종이 살았던 조선 초기, 왕권이 막 강화되기 시작한 때, 세종은 한글이라는 누구나 익히고 쓸 수 있는 문자를 선물로 남겨둔 것이 아닌가. 그 한글을 통해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는 후대의 몫이지 세종의 몫은 아닌 것이다. 물론 후대 왕들이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조선은 왕조 사회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br>왕-사대부-양인-천민으로 구성된 신분제 사회에서 문자를 익힐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집단은 사대부 이상이었다. 그것이 경제가 발전하면서 양인들도 여유가 생기게 되니, 여항문학이 생겨나게 되고, 이들에게도 문자의 필요성이 대두했을 것이다.&nbsp;<br>마찬가지로 천민들도 삶에 여유가 생기면 문자를 익히려고 한다.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이때 한글은 그들에게 배우기 쉬운 문자로 다가갈 수 있다. 아니, 다가갔을 것이다. 그러니 1894년에 한글을 나라의 공식 문자로 선포할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br>즉, 한글은 처음에는 양반층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지만 점차 백성들에게로 다가갔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세종 당대에 일어난 일이 아니더라도, 한글이 있었기에 민중들이 점차 문자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br>그러므로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주로 사대부(양반)층에서 한글을 사용했다고 하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br>하지만 이 책은 한글이 창제된 이후 그 쓰임이 어떠했는가를 살피고 있어서, 한글 창제 이후 한글의 쓰임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한글이 꾸준히 살아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배우기 쉽고, 우리 말을 문자로 표기하는데 좋은 문자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오히려 '불편한 진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저자의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다.<br>한글 창제 이후, 한글의 쓰임을 알고 싶으면 꼼꼼하게 읽어볼 만한 책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47/34/cover150/k0521399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473463</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이야기</category><title>점점 유령화 되는 시대, 관계맺기에 대하여 - [고스팅 - 유령화 시대의 사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82456</link><pubDate>Mon, 31 Aug 2026 09: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8245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2142&TPaperId=1748245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17/25/coveroff/897297214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972142&TPaperId=1748245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고스팅 - 유령화 시대의 사랑</a><br/>도미닉 페트먼 지음, 최리외 옮김 / 동녘 / 2026년 06월<br/></td></tr></table><br/>'유령화 시대의 사랑'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실체를 만나지 않고 관계를 맺어가는 사회를 유령화 사회라고 할 수 있다면, 현대처럼 기술이 발전한 시대는 분명 유령화 시대가 맞다.<br>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사회적관계서비스망(SNS)을 통해서 맺고 있다. 어떤 이는 엄청나게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사회학자 로빈 던바의 연구에 의하면 '150명이 넘어가면 진정한 추동력을 가진 우정이나 지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으며, 관계는 공허한 유사-사회적 제스처로 허물어진다'(16쪽)고 하니, 이런 관계를 중심으로 유지되는 사회를 유령화 시대라고 할 수 있겠다.<br>이런 유령화 시대에 너무도 쉽게 관계를 끊는 일이 발생한다. 끊기도 하고 끊김을 당하기도 하고... 이를 '고스팅'이라고 한다.<br>'2012년에 나온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고스팅은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행동, 특히 SNS나 문자 메시지 등에서 갑작스럽게 응답을 중단하는 행동. 모든 의사소통을 중단함으로써 관계나 연결을 끝내는 행위'(26쪽)라고 정의된다.<br>이 정의만 봐도 지금 시대는 유령화 시대가 맞다. 너무도 쉽게 고스팅을 하고 또 고스팅을 당한다. 많은 관계를 맺고 있지만 그 관계가 계속 유지될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끊든, 끊김을 당하든.<br>하여 '고스팅은 우리 자신의 내면과 영혼에 빈 공간을 만든다'(12쪽)고 하는데, 저자는 이러한 고스팅을 연인 관계, 가족이나 친구 관계, 그리고 사회 관계로 나누어 살피고 있다.<br>가장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가족 간에도 고스팅이 빈발하고 있음을 문학, 영화, 그리고 실제 사례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사람의 삶에 큰 상처를 남긴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br>같은 공간에서 지내는 가족 간에도 이런 고스팅이 일어난다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연인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어느 순간 연락을 끊어버리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는 것. 상대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런 암시도 없이 연락을 끊는 경우도 많다고.<br>영화나 소설을 보면 이러한 일들을 만나볼 수 있으니 이러한 고스팅이 낯선 일은 아니다. 다만, 고스팅으로 인해 상처를 받게 된다는 점. 그러한 고스팅이 빈번하다면 그 사회는 실체들이 관계를 만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유령들과 같이 실체가 없는 관계들만 난무하게 된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하고 있다.<br>이런 고스팅이 빈발하게 된 데는 사회-문화적 요인이 크다고...특히 이윤을 앞세우는 기업들이 자신들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회적으로 고스팅을 유발하고 있다고...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정치-경제적 권력자들도 사람들을 한 순간에 고스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br>이러한 고스팅 중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우리가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하는 것들과 '재개발'을 들 수 있겠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한 순간에 쫓겨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 이것은 정치권이 시민들을 고스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br>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을 쉽게 고스팅 하는 사회라면 다른 분야에서도 고스팅이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고스팅은 전염성이 강하니까.<br>그렇다면 대책은 무엇인가? 가상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관계들.&nbsp;SNS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계들. 이런 관계들을 모두 끊어야 할까? 아니, 그런 관계들을 모두 끊으라는 주장을 하지는 않는다.<br>이미 우리는 그런 세상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되돌릴 수는 없더라도 우리가 잊어서는, 잃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은 직접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br>즉 특정한 공간에서 서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존재, 지금처럼&nbsp;SNS 속 관계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 관계는 우리 몸과 몸이 만나는 관계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는 것.<br>하여 '가까운 이들과의 싸움, 갈등 그리고 좌절은 그저 진솔한 대인관계의 연결감으로부터 형성되는 질감, 역사, 궁극적으로는 보상의 일부'(178쪽)라고 한다. 즉 이러한 갈등은 피할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어가는 데 필수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보상이라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으니...<br>기술이 발전하고, 인공지능 시대가 온다고 해도 인간들이 인간들과 만나 관계를 맺는 일은 사라져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상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야말로 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유령이 될 것이다. 그러니 만나야 한다.<br>만날 수 있는 장소들, 그런 장소들의 소중함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들이 나와 다르다고, 나를 귀찮게 한다고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나를 조금 내어주고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nbsp;<br>이것이 '고스팅'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이 아닐까, 결국 이 책은 비대면 사회를 지향하는 우리에게 '대면 사회'의 중요성을 알리고, 사람들이 서로 만나 함께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br>* 고스팅을 우리말로 '손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무언가 다른 느낌을 주고 있으니, 손절, 배제, 따돌림 또는 자발적 고립 등이 모두 포함된 말이 고스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 그것이 바로 고스팅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517/25/cover150/897297214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5172569</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이야기</category><title>실리콘밸리에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고! - [불멸의 설계자들 -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바이오해킹까지, 실리콘밸리 영생 프로젝트를 추적하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76712</link><pubDate>Fri, 28 Aug 2026 09:4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7671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82138634&TPaperId=1747671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56/90/coveroff/k18213863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182138634&TPaperId=1747671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불멸의 설계자들 -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바이오해킹까지, 실리콘밸리 영생 프로젝트를 추적하다</a><br/>알렉스 크로토스키 지음, 최정숙 옮김 / 미래의창 / 2026년 06월<br/></td></tr></table><br/>이 질문에 대답을 해 보자.<br>불멸주의자 중 한 사람인 존슨이 한 말이라고 한다.<br>"인생 최고의 신체적-정신적-영적 건강을 주는 알고리즘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그 상태에 닿는 대가로 여러분은 알고리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알고리즘이 먹으라고 할 때 알고리즘이 짚어준 것을 먹는 겁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하겠습니까?" (337쪽)<br>죽음을 늦추는 방법. 그 대가는 자율성을 잃는 것이다. 알고리즘, 인공지능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 과연 그런 삶을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니...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겠지만...<br>두려운 죽음. 삶과 늘 함께하지만 그 존재를 의식하고 싶지 않은 죽음. 어떻게든 멀리 떨쳐버리고 싶은 죽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죽음. 하지만 아직까지는 피할 수 없는 죽음. 필멸의 존재, 인간.<br>필멸의 존재이기에 불멸을 꿈꾼다. 인간이 애초부터 불멸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신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러한 신이 불멸의 존재를 창조한다면 과연 그에게 생식 능력을 부여할까?<br>아마, 생식 능력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생식 능력이 있다면 불멸의 존재들이 한 없이 늘어날 텐데, 그것을 감당할 장소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에...&nbsp;<br>또한 신을 믿지 않고 진화론을 믿는다면, 과연 불멸의 존재에게도 생식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을까? 신의 창조와 마찬가지로 진화의 관점에서도 불멸의 존재에게는 생식 능력은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화란 적응과 생존인데, 불멸의 존재가 계속 생식을 한다면 적응과 생존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br>이렇게 창조론과 진화론을 보아도 인간은 또 생물은 불멸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필멸,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것이 바로 이 지구에서 인간이나 생물들이 살아가는 온당한 방식이다. 그것이 그들의 생존을 유지하는 비결이기도 할 것이고.<br>그런데 불멸을 추구하는 존재들이 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이 의식을 통해 죽음을 생각하면서, 또 주위 존재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지니게 되었다.&nbsp;<br>알지 못함이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다는 욕망을 낳는다. 그러한 욕망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한다. 인류가 기록을 남긴 때부터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들이 얼마나 많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가?<br>하지만 성공한 사례가 있던가? 없다. 없으니 지구에서 인류가 계속 생식을 통해 지구 상에 존재했으리라. 이것이 지금까지의 과정이다. 그런데 다른 변수가 생겼다. 인간이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하고, 오를 수 있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나타났다.<br>범용인공지능, 그것을 통해서 인간은 불멸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를 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몰랐던 사실을 인공지능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고, 늙지 않는 법을 발견하고, 그를 실현할 수 있는 시대가 곧 올 것이라고 믿는 존재들... 이 책에서는 그들을 불멸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br>불멸주의자들(IMMORTALISTS). 최첨단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실리콘밸리에서 불멸을 추구하는 집단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그 가능성을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있다.<br>이런 이들의 사고를 지탱하는 것은 우선 인간은 기계라는 관념과 객관적이고 측정가능한 정보이론, 그리고 시스템 이론이라고 한다.<br>인간도 디지털처럼 0과 1로 나눌 수 있다는 것, 고도로 복잡한 기계가 바로 인간이라는 것, 인간의 신체를 이렇게 해체하고, 부분들로 나누어 그 부분들의 역할을 파악한다면 죽음을 극복할 수도 있다는 것.<br>그래서 다양한 관점을 지닌 불멸주의자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이론과 지금까지 해왔던 실험들을 살피고 있다.<br>지금까지는 인간의 능력을 동원해 실험과 연구를 했다면, 이제는 인공지능을 통해 그것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다고...<br>하여 '실리콘밸리의 독실한 불멸주의자들은 ... 죽음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그저 기계에 문제를 맡긴 후 답을 찾아내게 만드는 일 뿐이라고'(157쪽) 한다. 즉 '끊임없이 전진하는 기술이, 인간존재 자체를 포함해 우리가 직면한 모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리란 신념'(173쪽)을 지닌 이들이 바로 실리콘밸리의 불멸주의자들이라고 한다.<br>엄청난 규모의 자본을 투자하고, 네트워크 국가를 창설한다고 한다. 단지 네크워크 상에만 존재하는 국가가 아니라 국가로부터 땅을 사들여 그 나라의 법에서 자유로운 자신들의 이념을 자유롭게 실행할 수 있는 국가를 마련하고 있다고... 좀 섬뜩하기도 하다. 이들이 국가로부터 땅을 구입해 자신들의 네트워크 국가를 만들 때,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쫒겨나고 말 뿐이니...<br>또한 이들이 불멸을 추구하는 사업을 하는데, 여기에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특히 무슬림)은 그들의 네트워크 국가에 들어갈 수도 없다. 또한 그들이 수명 연장을 위해서 하는 갖가지 방법들도 돈이 없는 사람들은 시도조차 해볼 수도 없다.<br>즉, 이들이 추구하는 네트워크 국가, 이 앞에 '불멸'을 붙이고 싶겠지만 이들 역시 아직 범용인공지능이 나오지 않았기에 '불멸'이란 말 대신 '장수'라는 말을 붙여 '장수 네트워크 국가'라고 하기도 한다는데... 그런 국가에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이 자리할 수 있는 장소는 없다.<br>이 책의 저자는 많은 불멸주의자들을 인터뷰한 결과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과연 현재의 삶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가진 자들의 미래를 더욱 있게 만드는 데 기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br>그런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가?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저자는 '죽음은 결국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뿐이다.'(333쪽)라고 하고 있다.<br>이렇게 죽음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함께하는 삶을 인식하고,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현재의 내가 만족스러운 삶,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br>죽음, 그것을 피하는 불멸. 하지만 인간에게 불멸은 생물학적으로 몸이 죽지 않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일 수도 있음을, 그래서 인간과 다른 생물들에게 생식 능력이 존재함을, 나라는 개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집단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불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br>실리콘밸리에서 추구하는 인간의 몸을 기계로 대하면서 고치려고 하는 모습과 더불어 먼 미래 기술을 바라면서 냉동하는 기술도 지금 쓰이고 있다고 하니, 인간에게 죽음이란 여전히 피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물론 내게도.<br>그래서 더 많이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기에.]]></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56/90/cover150/k18213863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569008</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이야기</category><title>샘 올트먼과 오픈 AI로 보는 AI개발의 문제 - [AI 제국: 권력, 자본, 노동 - 샘 올트먼과 오픈AI의 빛과 그림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74640</link><pubDate>Thu, 27 Aug 2026 09: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7464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5153&TPaperId=1747464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79/5/coveroff/k90213515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902135153&TPaperId=1747464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AI 제국: 권력, 자본, 노동 - 샘 올트먼과 오픈AI의 빛과 그림자</a><br/>카렌 하오 지음, 임보영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02월<br/></td></tr></table><br/>오픈&nbsp;AI. 아마 이 회사는 이제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들의 이름에 있는 '오픈'이라는 말을 부정하기 시작했으니까.<br>인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기술을 함께 공유하자는 의미로 '오픈'이라는 말을 썼을 테고, 이 '오픈'이라는 말은 독점이 아니라 공유를 의미하는데, 그 동안 오픈AI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이들은 '오픈'과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였다.<br>오픈AI의 최고경영자라 할 수 있는 샘 올트먼이 권력을 독점하고, 자신의 이윤을 위해서는 앞뒤 안 가리고 기술 개발을 해 온 결과, 또 그러한 기술 개발로 이윤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독점하기 위해서 '오픈'이라는 말을 부정하고 비밀로 하는 모습이 이 책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br>이 책을 쓴 저자는 기자다.&nbsp;AI 열풍이 불 때, 그것을 심층 취재한 사람이다. 특히 오픈AI에 대해서 직접 방문해서도, 또 관계자들을 만나고 다양한 학자들을 통해서, 여기에 오픈AI의 기술을 위해 일하는 세계 각국의 노동자들을 만나서 오픈AI라는 회사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재구성하고 있다.<br>처음부터 박진감 있게 시작한다.&nbsp;<br>'2023년 1월 17일 금요일 ... 올트먼은 해고되었'다고.&nbsp;<br>어라? 샘 올트먼이 우리나라에 온다고 하면 정치인들부터 기업인들까지 열광을 하는데, 그가 해고된 적이 있었다고? 무슨 스티브 잡스야?<br>모르던 사실, 관심이 없었으니... 미국의 한 회사 최고경영자가 해고되었든 말든 그것이 내 삶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하지만 아니다. 지금은 샘 올트먼이라는 사람이 해고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내 삶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br>그가 오픈AI를 통해서 독점적 권력을 행사하고 있으니까. 초창기에 그의 비전에 동의하고 함께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고 이제 남은 것은 이윤을 선점하기 위한 기술개발밖에 남지 않았으니까.<br>그에게는 인류의 행복이라는 것은 이윤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 그(또는 그와 같은 신념을 지닌 사람)가 오픈AI에서 계속 권한을 행사하면 우리 삶이 어떤 쪽으로 가게 될지 예측할 수가 없다.<br>바로 이 책의 제목에서 말한 것처럼 '빛과 그림자'인데, 이것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인류를 유토피아로 이끌지 않고 디스토피아로 몰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br>이 책에서 오픈AI라는 회사가 발전할 때 자신들의 기술이 초래할 위험을 인지하고, 그것을 막을 방법이 구체화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제품을 출시하자는 쪽과 다른 기업이 제품을 내기 전에 먼저 내야 한다는 쪽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br>아무리 좋은 기술이라고 여러 측면에서 검토를 해야 한다는 쪽이 오픈AI에 있었을 때, 샘 올트먼이 자신의 이윤을 위해서 그들을 기만하는 말을 하는 모습을 여러 취재를 통해서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도록 서술해주고 있다.<br>그러한 서술이 상상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하고 있음을, 따라서 소설처럼 인물들의 갈등이 잘 드러나고 있지만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한 표현기법이지 결코 허구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br>수차례 자신의 서술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르니 검토해 달라고 오픈AI쪽에도 글을 보냈다고 하니, 저자 역시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오픈AI 쪽에서 답변읋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br>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침묵으로 무시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내용은 부풀려서 홍보하는 거대 기업의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br>샘 올트먼이 해고되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그러한 결론을 이사회가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이 방대한 분량으로 펼쳐지고 있는데, 결국 올트먼의 해고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그가 다시 복귀하고, 그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오픈AI를 떠나는 것으로 이 책은 끝나게 된다.<br>아니, 그들이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술이 사회적 책임, 인류의 행복에 대한 공헌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방향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음을, 또한 오픈AI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음을 보여주면서 끝내고 있다.<br>그러니 이 책은 무조건&nbsp;AI기술을 반대하는 책이 아니다.&nbsp;AI를 인류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고민하자는 책이다.<br>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또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nbsp;AI를 활용할 수 있다면 누가 반대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기술이 독점되고 권력이 집중되어 통제하기 힘들어졌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고민해야 한다.<br>또&nbsp;AI의 뒤에 가려져 있는 최소한의 임금으로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이 있음을, 또한 자원을 수탈하는 거대 기업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거대 기술은 독점으로 나아가기 쉽다. 왜냐하면 그것은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필요하고, 그러한 자본을 조달할 수 있으려면 거대 기업이 되어야 하고, 그 투자 기금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기술을 독점하려고 하기 때문이다.<br>그 점을 샘 올트먼과 오픈AI라는 기업을 통해서 저자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는 책인데,&nbsp;AI라는 기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을 이용한 기업의 행태를 보여주고, 인류를 위해서 과연 그러한 기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br>AI에 열광하는 사람, 또 비판적인 사람 모두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579/5/cover150/k90213515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5790556</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여러이야기</category><title>의료인류학으로 보는 몸 - [몸, - 살아내고 말하고 저항하는 몸들의 인류학]</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72582</link><pubDate>Wed, 26 Aug 2026 09:49: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7258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3852&TPaperId=1747258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816/85/coveroff/893232385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2323852&TPaperId=1747258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몸, - 살아내고 말하고 저항하는 몸들의 인류학</a><br/>김관욱 지음 / 현암사 / 2024년 09월<br/></td></tr></table><br/>'몸'에 관한 책이다. 생물학이 아니다. 몸이 무슨 기능을 하느냐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질병에 관해서, 그 질병의 치유에 관해서 알려주는 책도 아니다.<br>처음부터 몸에 대한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들어가며'에서 세 개의 몸을 이야기하는데, 그 몸들은 '지하철 속 무거운 몸, 멈출 수 없는 택배기사의 몸, 빨간 조끼 속 몸'이다.<br>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몸'에 관한 책이 아닌 것이다. 의료인류학이라고 하는데, 몸을 인류학적 관점에서 살피고 있다고 보면 된다.<br>즉, 생물학적인 몸에 국한하지 않고, 생물학적인 몸에 영향을 주는 사회-문화를 살피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몸이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되고 있음을, 그래서 몸에 대한 이해나 반응이 상황에 따라 달라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br>'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지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말한 '몸의 가장 큰 특징은 보인다라는 사실'(193쪽)에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 우리 몸은 내 몸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 몸은 보이는 것이다.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br>따라서 몸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모두 들어가 있다. 남을 의식해서 자신의 몸을 그들의 시선에 맞추려는 노력을 하기도 하고, 그런 시선을 의식해서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바로 몸이다.<br>이런 몸을 저자는 '문화가 사람들의 몸을 통제하는 머리 위 양동이 속 물과 같다'(195쪽)고 사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br>몸이 생물학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은 보이기-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문화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한 문화에 자신의 몸을 맞추려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 문화에 맞지 않는 몸은 위축될 수밖에 없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기도 하고.<br>하지만 몸은 이렇게 보여지기에 문화라는 통제에 어느 정도 따르기도 하지만, 보여주기에 문화를 바꾸려는 능동성을 발휘하기도 한다.&nbsp;<br>이런 경우는 개인의 몸이 다른 개인의 몸과 만나 함께하는 순간, 변화의 지점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기존에 몸을 규정짓던 틀을 벗어날 수 있고,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br>저자는 이를 '나의 몸이 타인의 몸과 마주칠 때 새로운 시공간의 궤도가 형성될 수 있다'(242쪽)고 표현하고 있다. 몸은 이렇게 규정당하기도 하지만 규정하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몸이고, 몸을 생물학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br>하여 저자는 사람의 변화가 의식(이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도 많이 의존하고 있음을 3부에서 다르고 있다. 바로 몸이 변해야 하는 것이다. 몸이 기억한다는 말이 있듯이, 몸은 기억을 통해서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br>'몸'이 경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이러한 몸에는 사회-문화가 담겨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 이러한 관계는 추상적 관계가 아니라 직접 몸을 맞대는 관계일 때 더 좋다는 것을 '포옹'의 예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br>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 사회는 '보여지는 몸'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나, 그런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만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과 그럼에도 '보여주는 몸'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회-문화적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 그렇게 우리는 몸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경계를 인식할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br>'몸'에 관해서 다양한 방향에서 설명하고 있어서 새로운 관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저자는 끝부분에서 문화적 시공간을 넘어선 세 몸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장애, 퀴어, 애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br>'들어가며'에서 만난 몸과 연결이 될 수 있는데, 이러한 몸들을 통해서 경계에 대해 생각하고,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몸에 대해서, 꼭 자신이 그러한 몸이 아니더라도 그 몸들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함께할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br>'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던 책이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816/85/cover150/893232385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8168557</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이야기</category><title>멸칭 문화로 보는 연령차별주의 - [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70497</link><pubDate>Tue, 25 Aug 2026 11: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7049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47049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off/k692138162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92138162&TPaperId=1747049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a><br/>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05월<br/></td></tr></table><br/>'나이 묻는 사회'<br>우리 사회에 딱 맞는 말이다. "너 몇 살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 이런 말을 많이 쓰는 사회 아니던가.<br>이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쌍둥이에게도 위아래를 정하는 나라가 이 나라니, 한 해, 두 해 이상 차이가 나면 어떻겠는가.<br>나이에 따라 철저한 위계를 따지던 나라에서 이제는 그것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최근에 듣기로는 대학가에서도 학번에 따라서 너나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따져서 형-누나 한다고 하던데... 적어도 예전에는 너무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으면 같은 학번은 그냥 친구였는데...<br>이렇게 같은 학년에서도 나이를 따지는 사회이고, 학년이 다르면 철저하게 위-아래를 구분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니, 나이를 묻지 않을 수 없다.<br>초중고등학교에서 학년은 넘을 수 없는 벽이 되는 사회, 고작 한 해 먼저 학교에 입학했다고 마치 윗사람이 된 양 행세하게 하는 학교라니... 학교의 이런 위계질서를 12년 받고 나면 자연스레 나이에 따른 위계가 고착되지 않겠는가.<br>단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존중하면 그것은 좋다. 그런데 존중을 넘어서 위-아래를 구분지으려 하니 문제다. 또 그 나이 대가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하면 다른 나이 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침해할 수 없다고도 여기기도 하고.<br>대표적인 예가 저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교통약자석 아닌가. 말 그대로 교통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좌석인데, 예전에 '노약자석'이라고 노인들의 전용 좌석이라고 착각해 다른 사람들이 앉으면 무슨 큰일이 나는 것처럼 얘기한 때가 있었다.<br>노약자라는 말에도 노인이라는 말과 약자라는 말이 합쳐져 있는데,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자리인데, 노인만의 자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서 이제는 '교통약자'라는 말로 바꾸었는데도 여전히 편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br>이러한 편견이 언어에 반영이 되면 멸칭이 된다. 특정 세대를 비하하는 말이 쓰이게 되는데, 이것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세대 간에 담을 쌓는 결과는 낳는다. 저자는 이 책에서 각 세대를 비하하는 멸칭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떤 세대도 이러한 멸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멸칭들이 버젓이 쓰인다면 세대 갈등이 내면화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된다.<br>그래서 저자는 이러한 멸칭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이 멸칭이 특정 세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쓰이고 있다고 하니, 이것 참 문제다.<br>세대가 무엇인가? 누구나 한번은 거쳐야 하는 시기 아닌가. 사람이라면 모두가 겪어야 할 그런 시기들을 비하하면 결국 자신을 비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br>세대라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함께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만날 수 있어야 한다.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다. 관계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 부대끼면서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br>만나야 이해든 뭐든 할 수 있으니, 세대를 가르거나 또는 특정 세대를 배제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 하여 저자는 '노 키즈 존'이나 '노 시니어 존'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다. 어떤 공간에서 특정 세대를 배제하는 것은 연령 차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고, 이런 행위가 일어나면 다른 차별도 우리 삶에 들어오게 된다.<br>따라서 이렇게 특정 세대를 배제하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 다양함이 사회를 풍요롭게 하듯이 각기 다른 세대가 어울리면서 살아가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nbsp;<br>이렇게 서로가 어울리는 사회라면 늙지 않으려는, 젊음을 유지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도태될 것 같은 느낌은 사라질 것이다. 오히려 자신들의 나이를 받아들이고, 그 지점에서 다른 세대들과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려 할 것이다.<br>연령차별주의가 낳은 멸칭 문화. 이것은 하루바삐 사라져야 한다. 지금은 많이 순화가 되고 있지만, 여전히 특정 세대를 겨냥해 쓰고 있는 멸칭들, 쓰지 않도록 해야 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169/84/cover150/k692138162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1698413</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이야기</category><title>민주주의 살리기 위해 ‘극우‘의 온상 알고 막아야 - [극우는 어디서 태어나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68389</link><pubDate>Mon, 24 Aug 2026 09: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6838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2627086&TPaperId=1746838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2/89/coveroff/896262708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2627086&TPaperId=1746838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극우는 어디서 태어나는가</a><br/>신시어 밀러 이드리스 지음, 조인석 옮김 / 동아시아 / 2026년 05월<br/></td></tr></table><br/>전세계적으로 극우가 세력을 얻고 있다. 보통 좌와 우로 나눌 때, 좌는 과거나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기에 미래에는 과거-현재가 아닌 다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 또는 집단이라 하고, 우는 과거-현재가 만족스럽기에 과거-현재를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 또는 집단을 말한다.<br>그런데 극우라고 하면 문제가 좀 달라진다. 물론 극좌도 마찬가지다. 극단으로 치우치면 문제가 생기는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허점이 있고, 이 허점들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를 이룬다.<br>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인간인데, 그런데 극단으로 치우치면 나는 허점이 없는 존재가 되고, 상대는 허점이 많은 존재가 되니,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즉, 나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로 상대를 규정하게 되는 것이다.<br>누가 말했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사회에는 좌도 있고 우도 있다. 이런 좌우가 서로 공존하면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왔다. 그렇게 인간은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지 않았는데, 이는 서로가 살 만하다고 느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br>그런데 살기 힘들다고 할 때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남에게서. 그러면서 남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저들만 없었다면, 또는 없으면 내 삶이 더 나아질 텐데. 단순히 생각에만 그치지 않는다. 상대를 몰아내려 한다. 몰아내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위협을 가한다. 혐오, 증오 표현. 그리고 폭력까지.<br>이렇게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이제 상대는 나와 어울릴 수 없는 존재, 배척해야만 하는 존재가 된다. 이들이 있는 한 내 삶은 더욱 힘들어진다. 이제 내 삶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시작한다. 개인에서 집단으로.&nbsp;<br>집단이 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자신은 이미 그 집단에 빠져 나오기 힘들어진다. 혐오감정은 더욱 거세지고, 폭력으로 나아가기는 더욱 쉬워진다. 결국 폭력으로 폭발한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증오 폭력이 발생하고 있다.<br>이 중 많은 폭력이 '극우'에게서 나오고 있는데, 극우는 과거의 삶을 회상하면서 지금 이렇게 된 데에는 상대에게 책임이 있다고, 그들을 몰아내고 과거의 우리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간다.<br>그렇게 극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의 영광을 현재에 구현하고자 한다. 남을 배척하면서. 이렇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민주주의는 포용과 타협, 다양성의 조화 아니던가. 그런데 '극우'는 이러한 다양성을 부정한다. 오로지 순수성, 단일성을 주장한다.<br>이런 순수성-단일성을 위해서 상대는 배척해야만 한다. 그러면서 온갖 논리를 끌어온다. 과학까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한다. 사실을 왜곡한다.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긴다. 그러면서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유머로 위장한다.<br>혐오 표현을 하면서도 남들이 문제 삼으면 농담이었어요라고 한다. 그런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이는 우리도 많이 겪은 일 아닌가? 단지 재미로요 라는 말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 하지만 이는 재미가 아니다. 알고 있다. 이들도. 혐오라는 것을. 다만 빠져나가기 위해서 이중으로 해석할 수 있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남들은 다 혐오 표현이라는 것을 알지만, 이중의 뜻이 담겨 있기에 넘어갈 수 있다는 듯이.<br>이런 '극우'가 갈수록 힘이 세지고 있다.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더 심한가 보다. 이 책을 보니, 미국의 극우는 정도를 넘어섰다. 하긴 그들 나라는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할 수 있는 나라지. 미국 극우들 중에는 백인들만의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br>이런 극우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 책은 그 지점을 추적한다. 극우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극우들이 활동하는 공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특정한 공간에서만 극우들이 활동한다면 해결은 간단하다. 그 공간에 집중하면 된다.<br>한데, 이 책을 보니, 아니다. 극우들은 자신들의 이념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일상으로 이미 들어왔다. 그것도 세련된 외양을 하고서. 이는 극우들이 의류 산업에까지 진출해서, 의류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홍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한다.<br>음식 쪽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여기에 스포츠 특히 격투기 분야에 극우들의 진출이, 또 청소년(청년)들을 극우로 끌어들이고 있다고 한다. 남성성을 강조하면서, 신체의 강인함을 키워야 한다면서, 그러면서 그것이 멋있는 남성이라고 하면서. 단지 신체의 강인함을 키우는 것이라면 문제가 안 되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극우 이념을 퍼뜨린다고 하니...<br>게임도 마찬가지고, 온라인 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단체들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문제가 되니 언급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을 테고...<br>더욱 심각한 것은 학교, 대학교를 극우들이 공격한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교수, 학생들을 위협하거나 또는 자신들의 주장을 홍보하는 장소로 삼고, 대학가가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함으로써 지식을 신뢰할 수 없게 하고, 지식의 권위를 떨어뜨리려 한다고 한다.<br>또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전문가(?이들에게 과연 전문가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지 의문인데, 교수나 또는 박사, 석사 등의 자격증을 지닌 인간들이라고 해야 하나?)들을 양성해 자신들의 논리를 공론장으로 끌고 온다고 한다.<br>극우 논리를 지식의 공론장으로 끌고 온 것,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은가. 이렇게 되면 소수의 주장이었던 또는 드러나지 않았던 극우 논리가 공개적으로 표명된다고 한다. 주류 언론이라고 할 수 있는 방송을 통해서도 극우의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면 자연스레 정치계로 넘어간다.<br>즉 주류 정치계에 극우가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극우는 자신들의 영역을 조금씩 조금씩 넓혀간다고 한다.<br>읽으면서 이거 무섭네. 이렇게 해서 세계에서 또 우리나라에서도 극우가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왔구나 하는 생각. 이런 극우들이 더 힘을 얻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br>그런데도 해결책은 조금 아쉽다. 물론 이렇게밖에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br>독일의 한 정치인이 했다는 말.<br>"모든 사람이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편안함으로 느끼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288쪽)<br>그것은 민주주의가 강화되어야 한다. 아니 민주주의가 정착이 되어야 한다. 하여 저자는 '극단주의 예방과 민주주의 보호가 본질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인식에서 찾아야 한다. ... 모든 개인이 자신의 일상적인 공간과 삶의 현장에서 포용성을 증진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며,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이에 맞서 싸워야 할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자각하도록 해야 한다.'(311-312쪽)고 하고 있다.<br>그러기 위해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또 가정에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그것이 가능하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하고... 저자는 책의 끝부분에서 독일의 사례를 들고 있는데, 참조할 부분이 많지만, 과연 우리나라에서 가능할까 하는 지점도 있다.&nbsp;<br>무엇보다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안정감, 미래에도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삶의 예측가능성이 확보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현재가 만족스럽지 못하고, 미래가 불안하면 그 책임을 다른 이에게 전가하기 쉬우니 말이다. 그러니 우선 우리들의 생활을 살펴야 한다.<br>생활이 안정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누군가의 부유함이 누군가의 궁핍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다. 생활이 안정되고, 미래가 예측 가능하면 '극단'이 설 자리는 자연스레 없어진다.<br>이렇게 서로가 살 수 있는 사회로 가기 위한 방편, 그것이 민주주의 아니었던가. 남을 딛고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는 것. 그러니 '극우'에 대해 생각할 때는 '민주주의'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위태로울 때 '극단'이 준동하니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02/89/cover150/896262708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028953</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과 나 그리고 책</category><title>문태준 시집-제비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65094</link><pubDate>Sat, 22 Aug 2026 09: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6509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6424718&TPaperId=1746509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28952/12/coveroff/8936424718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nbsp; 따스하다. 시집을 읽으면서 봄의 따스함을 느끼게 된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시들 한편 한편이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br><br>&nbsp; 마치 시집 제목이 된 시 '아침은 생각한다'처럼, 자신만이 아니라 누군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이 시집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br>&nbsp; 자연스레 읽으면서 그러한 마음에 동화가 된다. 많은 말이 필요없다. 그만큼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짧다. 짧지만 오래 간다.<br>&nbsp; 그 중 만난 시. 제비. 봄이 오면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새. 예전엔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우리와 함께 살던 새.<br>&nbsp; 우연히 원주에 있는 '빙하미술관'에 갔다가 그곳에 집을 짓고 사는 제비들을 만나게 되었다. 반갑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제비와 제비들이구나. 새끼들에게 부지런히 먹이를 날라주는 어미-아비 제비들.<br>집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먹이를 보채는 새끼 제비들. 그런 제비들을 본 행복. 문태준의 시집에서 '제비1, 제비2'를 만나고 그곳에서 본 제비들이 생각났다.&nbsp;<br>지금쯤 새끼들은 자라서 스스로 날개짓을 하며 먹이를 찾아다니겠지. 그러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제비집을 두고 다시 떠나가겠지. 그렇게 그들의 삶이 반복되겠지.<br>제비 1<br>&nbsp; 제비를 뒤쫓아 날아가리 광평빌라 제일 아래층 모서리에 지은 제비집으로 날아가리 콘크리트 벽 모서리에 지은 당신의 집으로 날아가리 당신의 진흙집으로 날아가리 달무리 같은 집으로 날아가리 날아가 엄마, 하고 불러보리 둥지에서 부리를 족족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던 딸 넷과 아들 하나를 기른 내 엄마&nbsp;<br>문태준,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년. 40쪽<br><br>------------------------------------------------------------------------제비 2<br>&nbsp; 제비 가족을 보러 광평빌라에 갔다 제비집에 제비들이 없었다 내부가 대낮처럼 텅 비었다. 사랑의 둘레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세계 곳곳은 진흙을 쌓아 지은 제비집 아닌가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야 제비집에 어떻게 오목하게 환하게 상공(上空)이 담기겠는가 제비집을 떠나 제비들은 흰 빛과 치렁치렁한 빗속과 엉긴 안개와 무너지는 노을 아래를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제비야, 내 언젠가 맑은 물과 꿈 위에 띄워놓은 꽃 같은 제비야<br>문태준, 아침은 생각한다. 창비. 2022년. 41쪽<br><br><br>&lt;원주 빙하미술관에 자리잡은 제비 가족과 제비집. 2026년 6월 30일&gt;&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28952/12/cover150/893642471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9521289</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여러이야기</category><title>언어의 유래를 알면 지식과 재미가 동시에 온다 - [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 읽기만 해도 어휘력이 늘고 말과 글에 깊이가 더해지는 책]</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63261</link><pubDate>Fri, 21 Aug 2026 10: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6326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036029&TPaperId=1746326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687/69/coveroff/k552036029_3.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52036029&TPaperId=1746326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연 없는 단어는 없다 - 읽기만 해도 어휘력이 늘고 말과 글에 깊이가 더해지는 책</a><br/>장인용 지음 / 그래도봄 / 2025년 02월<br/></td></tr></table><br/>[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소설을 생각한다. 제 멋대로 단어의 뜻을 바꿔 쓰는 사람 이야기. 그는 왜 그 단어를 이렇게 써야 하지? 란 생각을 했다. 내 맘대로 그 단어를 쓰면 어떨까 하면서 자기가 만든 의미로 단어들을 쓴다.<br>그에게 그 단어들은 사연이 있지만, 문제는 이미 그 단어가 지니고 있던 사연을 무시하고 다른 사연을 덧붙인 데 있다.<br>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단어. 그러면 소통이 되지 않는다. 고립될 수밖에 없다. 자기 세계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 언어는 자기 세계와 다른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 이음을 끊어버리는 것이 바로 자신만의 언어를 쓰는 것이다.<br>그러니 우리는 단어를 쓸 때 그냥 막 쓰는 것이 아니다. 이미 남들과 의미를 공유하는 말들을 쓴다. 소통하기 위해서. 남들과 의미를 공유하기 힘든 말을 쓰는 작가들이 있지만, 공유하기 힘든 것이지 공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nbsp;<br>그들은 여러 장치를 통해서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넣고 있기 때문인데, 특히 시인들이 그렇다. 따라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보통 알고 있는 그 단어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의미를 품고 있을까를 고민한다.<br>이렇게 시인의 경우는 [책상은 책상이다]에 나온 사람과는 다르다. 그는 아예 언어의 연결을 끊어버렸다면, 시인은 연결을 유지하되, 그 연결을 찾으라고 한다고 보면 된다.<br>하지만 우리가 처음부터 단어를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학습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 단어의 의미를 익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그 단어들을 사용하게 된다.&nbsp;그 단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생각하지 않으면서. 단어가 세상에 나오고 사람들에게 쓰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 단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잊힌다. 단어의 유래를 알지 못하게 된다.<br>다른 말로 어원(語源)을 잊어버린다. 더 시간이 흐르면 어원을 모르는 말들이 더 많아진다. 물론 어원을 몰라도 그 말을 쓸 수 있다. 어원을 모른다고 단어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원을 알면 그 단어에 실린 사연을 알기에 그 단어를 좀더 잘 알게 될 수 있다. 또한 그 단어의 유래를 통해서 비슷한 어원을 지닌 말들을 만나기도 하고.<br>따라서 어원에 관한 책을 읽으면 재미 있다. 맞는 어원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간혹 이런 어원. 오징어. 한자어로 오적어(烏賊魚)였다고. 까마귀를 유인해 잡아먹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오적어가 오징어가 된 것이라고.<br>하, 과연 까마귀가 바다에 떠 있는 오징어를 먹으려고 하다 도리어 잡혀먹히는 일이 생길까마는 이런 오징어란 말의 유래에 대해 정약전이 쓴 [자산어보]에도 나온다고 하니(116쪽), 그런가 하면서 읽는 재미도 있다.<br>이 책에서는 오징어에 관해서 또 다른 사실.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야말로 재미와 지식이 함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인데... 우리가 지금 오징어라고 하는 것은 옛날에는 '피둥어꼴뚜기, 곧 꼴뚜기의 한 종류'(116쪽)라고 한다.&nbsp;<br>처음 알게 된 사실. 예전에 오징어는 지금 우리가 '갑오징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고 하니, 참...<br>이와 비슷한 말이 '오이와 참외'다.&nbsp;<br>'원래 '외'였던 참외가 줄기와 잎이 비슷한 오이에게 이름을 빼앗기고 '참외'가 되었다. ... 실제로 참외는 삼국 시대부터 있었고, 오이는 그보다 천 년 뒤인 1500년 즈음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참외를 지금은 과일로 여기지만 사실 장아찌를 담가 반찬으로 먹기도 했다.'(141-142쪽)<br>'참외' 이름에서 '외'가 오이의 줄임말일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참외가 오이에게 밀려 제 본래 이름 앞에 '참'자를 붙이게 되었다니...&nbsp;<br>동네 이름으로 가면 더 재미있는 말들이 있다. 많은 곳에 있는 '가좌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같은 동네가 많은데, '가좌'가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 책에서 저자가 '가좌'는 '가재'를 한자어로 쓴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다.<br>즉 '가좌동'은 '가재동'인 것이다. 물이 맑아 가재가 살고 있던 마을들 이름이 가좌동이었던 것.&nbsp; 이런 식으로 이 책에는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들에 실린 유래, 사연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읽는 재미가 있다. 또 읽으면서 우리말에 대한 지식을 넓힐 수도 있고.<br>앞에 든 몇몇 단어들 말고도 참 많은 단어들이 그 사연을 지고 이 책에 나온다. 한번 읽어보면 우리말에 깃든 사연들, 또 그 단어들이 어떻게 자리잡고 변해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br>천천히 내가 쓰고 있는 말이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한번 들춰보자.&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687/69/cover150/k552036029_3.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6876984</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문학이야기</category><title>2026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다 - [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61395</link><pubDate>Thu, 20 Aug 2026 11: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6139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137415&TPaperId=1746139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89/43/coveroff/k2321374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232137415&TPaperId=1746139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a><br/>김채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03월<br/></td></tr></table><br/>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어왔다. 무슨 의무 같은 것은 아니고, 그냥 최근에 발표되는 소설들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br>이번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은 다 다르다. 그만큼 작품 하나하나가 저만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나 우리 삶을 표현하는데 작가의 주제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br>이 중에 제일 선명하게 다가온 작품은 길란이 쓴 '추도'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 남의 생활을 엿보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회. 한 가정에 닥친 비극이 아니라, 그러한 비극 속에서도 그들의 삶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고 있는데...<br>이는 다양한 SNS를 통해서 남의 생활을 만나는 우리의 모습, 그런 남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생활을 보고 동경하는 모습. 그래서 이런 책 제목도 있지 않은가.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는.<br>여기에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니까. 또 그러한 자본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 되니까. 하지만 자신이 자본을 이용했다고, 또는 자본을 지닌 사람을 이용했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자본에게 또 자본을 쥔 자들에게 이용당함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br>다른 소설들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들 소설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br>무언가 분명하게 말을 하지 않고 부연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가는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 가령 서장원이 쓴 '히데오'를 보더라도, 일본에서 조선인이라고 차별받던 히데오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차별을 극복한다기보다는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그 속에서 또다른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br>일본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나중에는 스스로 떠벌리고 (밝히고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히데오는 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자신이 살아가는 발판으로 삼으니, 떠벌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다니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br>그렇지만 그를 바라보는 화자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겉돌고 있다는 느낌. 이러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소설이 위수정이 쓴 '귀신이 없는 집'이다.&nbsp;<br>귀신이 없는 집은 좋은 아닌가?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귀신이 없어서 망해버린 마을 이야기가 나온다. 귀신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는데, 그렇다면 귀신은 무엇인가?<br>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하게 하는 존재, 즉 자신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하는 존재가 아닐까. 여기에 '크로스드레서'인 재원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의 또다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크로스드레서의 삶.<br>하지만 그것은 남 앞에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비밀. 이런 비밀을 아는 아내 상미. 상미도 없는 집, 적막만이 있는 집. 그런 재원에게 귀신은 무엇일까? 왜 그는 귀신이 없다고 했을까를 생각하는데...<br>어쩌면 귀신은 자신의 또다른 성향을 인정하는 존재 아닐까? 그런 존재가 없는 집에는 적막만이 있을 뿐이지 않을까 하는데...<br>그렇다고 명확하게 무엇이 귀신이다 말할 수가 없다. 마치 믿음과 광신을 구분하기 힘들듯이. 이렇게 이분법으로 저것은 광신이야, 이것은 믿음이야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믿음과 광신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br>누군가에게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광신이 될 수도 있음을 함윤이가 쓴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에서 만나게 된다.<br>이렇게 무어라 명확하게 정리할 수 없는 소설들. 그런 소설들이 이번 수상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상을 이것이다 저것이다고 딱 정리할 수 없음을, 그렇게 분명한 목표를 보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의 삶이라는 것을 이번 수상작품집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989/43/cover150/k2321374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9894398</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문학이야기</category><title>콸쾅 울리는 가자의 소리, 들어야 한다 - [뜨거운 태양 아래서]</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57110</link><pubDate>Tue, 18 Aug 2026 08: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57110</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92130702&TPaperId=17457110"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25/32/coveroff/k49213070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92130702&TPaperId=17457110"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뜨거운 태양 아래서</a><br/>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07월<br/></td></tr></table><br/>하, 사람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더니, 아니 강대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만 펼친다고 해야 할까?<br>'팔레스타인, 가자',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땅. 이토록 집요하게 괴롭힐 수 있을까? 괴롭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절멸을 노리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자신들도 '디아스포라'를 겪었으면서, 그런 이산의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팔레스타인에서 박해자로, 이산을 강제하는 존재로 군림하는 이스라엘을 보면...<br>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는 테러범이기 때문에 처단해야 한다고, 가자에 있는 민간 시설을 폭격하고, 자신들에게 저항한다는 이유로 표적 살인을 저지르는 그들에게,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br>비판을 하는 나라도 있겠지. 그런데 잠시 뿐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가자를 폭격한다. 봉쇄한다. 자신의 땅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사람들. 가족들끼리도 왕래하기 힘든 사람들. 가자 사람들.<br>그런 사람들의 비극, 우리나라에도 이젠 제법 그들의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 우리 곁에 팔레스타인 문학이 다가오고 있는 것.&nbsp;<br>이 소설집, 가산 카나파니의 소설에 나오는 내용,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라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br>"왜 당신들은 물탱크의 측면을 노크하지 않았지? 왜 물탱크의 옆구리를 쾅쾅 치지 않았던 거야? 왜? 왜? 왜?"(124쪽)<br>쿠웨이트로 밀입국을 하기 위해 트럭 물탱크에 들어간 세 사람. 지금 우리나라도 푹푹 찌는 날씨인데, 사막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밀폐된 물탱크. 그야말로 비유적 의미로 찜통이 아니라 사실적 의미로 찜통이었을 것이다.<br>밀입국을 시켜주는 브로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그 역시 팔레스타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성불능이 된 사람. 하여 그는 7분만 참으라고 한다. 그 정도면 죽지는 않을 거라고. 두 번의 검문.&nbsp;<br>한 번은 7분만에 통과한다. 찜통 속 사람들은 기진맥진한다. 밀입국. 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것. 지구에는 국경이 없지만 나라끼리는 임의적으로 국경을 만들어낸다. 자유롭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갈 수가 없다. 특히 약한 나라 없는 사람들은 더더욱.<br>그러니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런 방법밖에 없다. 그동안 브로커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을 테고... 이들을 물탱크(물은 없다. 그러니 그 물통 안이 얼마나 덥고 산소가 없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에 들어가라고 하는 '아불 카이주란'을 미심쩍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첫 번째는 성공했지 않은가.<br>두 번째 관문. 변수가 생긴다. 이리저리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관리가 나온다. 시간은 흘러간다. 아불 카이주란은 초조해진다. 빨리 해결하려 하지만 뜻대로 안 된다. 7분이 지나고 또 지나고, 또 7분이 지난다.&nbsp;<br>이들이 견딜 수 있는 시간의 세 배가 흘러간다. 황급히 차를 몰고 물탱크를 열어보는 카이주란. 아, 결국 그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살기 위해서 밀입국을 하려 했으나 그들은 죽어서 밀입국을 하게 된다. 이런 밀입국자들, 뉴스에서 많이 보아왔다.&nbsp;<br>세계는 가자뿐이 아니라 도처에서 이런 비극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충분히 함께 살 수 있는 나라들임에도, 자신들의 몫에서 조금만 떼어도 되는데, 안 한다. 모르쇠로 일관한다.<br>오히려 그들이 밀입국을 하려고 하면 기를 쓰고 막는다. 어쩌다 성공한 사람이 있어도 다시 추방하기도 한다. 그러니 밀입국을 하려는 사람들,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또한 밀입국을 하지 않고 자리를 잡고 사는 사람이라도 카이주란처럼 불임의 존재가 된다.<br>그들은 세대를 영속시킬 수 없다. 강제로 세대를 단절당했음을 이 카이주란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소설집 첫소설은 가자의 비극을 밀입국을 하려는 세 사람과 이들을 밀입국시키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브로커 역할을 하는 카이주란은 동포애보다는 돈이 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도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동포애는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br>소설에서는 왜 쾅쾅 치지 않았느냐고 절규하지만, 아니다. 이들은 쾅쾅 치고,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런 소리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방음벽을 치고, 귀를 닫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br>오랜 시간 방음벽을 치고, 귀를 닫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반복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귀를 닫고 있다. 그들은 계속 소리치고 있는데도. 하여 소설의 결말을 다시 읽어야 한다.<br>"왜 그들이 그렇게 외치고, 쾅 쾅 치고 있는데도, 할 수 있는 사람들, 할 수 있는 나라들은 듣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가? 왜 대답하지 않는가? 왜 이토록 오래 모른 체하고 있는가?"라고.<br>첫소설말고도 가자의 비극을 보여주는 소설로는 '슬픈 오렌지의 땅, 움 사아드, 가자에서 온 편지'가 있다.<br>'가자에서 온 편지'에서 주인공은 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치 작가의 인생을 보여주는 듯한 구절인데.<br>"나는 이곳에 머물면서 결코 떠나지 않을 거야.(210쪽) ...... 내 친구여, 돌아오게나! 우리 모두는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네.(219쪽)"<br>이때 자네는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난 팔레스타인 사람들만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들이다. 그렇다. 이들은 결코 소리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소리치고 있다. 그 소리를 단지 우리가 듣지 않고 있었을 뿐.<br>이제는 세계가 그러한 외침에 응답해야 한다. 그래, 우리 그 소리 들었다고. 당신들의 닫힌 문 열어주겠다고.<br>최근에 읽은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만큼 울림을 주는 소설이다. 아마 그 책을 읽고 이 소설을 읽으면 더 마음에 다가올지도 모르겠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725/32/cover150/k49213070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7253240</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여러이야기</category><title>밭과 무덤과 숲-김덕일 사진집 - [사라진 숲은 어디로 갔을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55363</link><pubDate>Mon, 17 Aug 2026 10: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5536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939440&TPaperId=1745536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712/9/coveroff/k61293944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12939440&TPaperId=1745536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사라진 숲은 어디로 갔을까</a><br/>김덕일 지음 / 상상창작소 봄 / 2024년 03월<br/></td></tr></table><br/>인간과 자연의 경계. 서로가 서로를 넘나들면서도 어느 정도는 서로의 경계를 인정해주어야 하는 관계.<br>하지만 인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자연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느 종의 번식이 왕성해지면 한정된 지구라는 공간에서 다른 종의 영역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br>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공간의 줄어듦. 줄어들어도 생존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이 줄고 줄어 결국에는 생존에도 문제가 된다면, 그때는 한 종의 생존만이 문제가 아니라 많은 종들의 생존에 문제가 된다.<br>이렇게 다른 종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종. 인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예전 왕들은 백성들의 안전과 생활을 위해서 자신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했는데, 적어도 말만이라도 그렇게 했는데, 또한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시늉을 내서, 백성들의 삶이 완전히 피폐해지게 하지는 않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다른 종을 멸종에 이르게 하고 있다.<br>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인류세라는 말이 굳어지지 않도록, 지속가능이라는 말이 정말로 지속가능하도록 해야 하는데, 여전히 인간은 성장 신화에 갇혀 있다.<br>성장, 성장이 안 되면 인간이 살아갈 수 없다는 듯이, 해마다 성장해야 한다. 그렇게 성장하는데 문제는 지구가 유한하다는 것. 즉 정해진 공간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계속 성장한다면 다른 종들이 살아갈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심지어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br>그 중 하나가 바로 '숲'이다. 숲을 없애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들이 지속되어 왔다. 우리나라 역시 산림이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한다고 했었는데, 과연 그런가.<br>여전히 우리나라는 숲이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계속 줄어들고 있다. 줄어들어서 인간의 경작지로 변하든지, 주거지로 변하든지, 그도 아니면 인간의 관광지로 변하고 있다.&nbsp;<br>그 변한 곳에서 살아가던 종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고, 숲도 제 기능을 많이 잃어간다. 그런 변화, 그것을 사진으로 담은 작가, 그가 바로 김덕일이다.<br>자신이 살던 곳에서 5년 동안 그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논과 밭과 그곳에 있는 무덤, 그리고 숲의 사진이다.<br>이들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함께 공존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점점 그러한 공존에서 인간의 영역은 넓어지고, 자연의 영역은 좁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br>공중에서 찍은 사진들. 사진으로 보고 멋있다 할 수 있겠지만, 점점 줄어드는 숲을 보면서, 또 숲을 파헤치고 파괴하는 인간들의 행위를 보면서 마냥 멋있다고는 할 수 없다.<br><br>밭과 숲, 그 사이에 있는 무덤은 자연과 공생하는 인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진처럼 숲의 한 가운데를 파괴한다면 과연 이것이 공생일까?<br>인간이 살기 위해서 자연을 어느 정도는 침해할 수는 있지만, 자연이 회복불능의 상태로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지경까지 가면 인간도 살기 힘들어진다.<br>이 사진집을 보면 마냥 멋있다고만 할 수 없는 것, 인간의 영역이 이처럼 자연의 영역을 계속 잠식해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인간과 자연의 경계, 공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712/9/cover150/k61293944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7120916</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문학이야기</category><title>귀신으로 보는 여성의 주체성 - [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48005</link><pubDate>Thu, 13 Aug 2026 09: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4800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12931384&TPaperId=1744800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4112/6/coveroff/k412931384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12931384&TPaperId=1744800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a><br/>김이삭 지음 / 래빗홀 / 2024년 06월<br/></td></tr></table><br/>성주단지, 야자 중 ××금지, 낭인전, 풀각시, 교우촌  &nbsp;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괴력난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괴력난신, 어렵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그냥 귀신 이야기라고 하면 될 것을.  &nbsp;  불가사의한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를 귀신의 소행인가 한다. 귀신, 괴력난신.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존재. 아니 현실의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   &nbsp;  현실의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아니, 현실에 좌절했을 때 우리는 다른 존재를 불러낸다. 도저히 내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다른 존재의 힘을 빌리려는 마음.  &nbsp;  그러한 마음들이 귀신을 불러낸다고 보면, 이 소설에 나오는 귀신 또는 귀신과 비슷한 존재들은 모두 현실의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편이 된다.  &nbsp;  ‘성주단지’에서 주인공은 ‘저는 귀도 보고 신도 보았던 거예요’(42쪽)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또는 알 수 없는 존재도 소중히 여기고 마음을 다해주는 사람에게 귀신의 해코지가 닿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nbsp;  이때 귀신은 누굴까? 교제 폭력(데이트 폭력이라고 하는 말을 더 많이 쓰나?)을 행사하는 사람은 주로 남성이다. 단지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끝없는 괴롭힘을 당하는 여성들이 많다.   &nbsp;  이런 여성들에게 교제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은 귀(鬼)라고 할 수 있다. 귀신이다. ‘신’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귀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누가 이 귀를 막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막아주는가? 도움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nbsp;  이 소설에서는 알지 못하는 존재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겨지지만 이 알지 못하는 존재의 도움을 이끈 것은 바로 주인공의 행위다. 그러니 결국은 자신의 의지, 행동이 귀신을 물리쳤다고 할 수 있다.  &nbsp;  이러한 주체성, 능동적 대응이 나머지 소설들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문을 열 수 없을 때 그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문을 부수고 나오는 주인공. 이는 자신의 한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 그 한계를 남들이 깨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nbsp;  그래, 닫혀 있으면 열어야 하는데, 열쇠가 없다면 문을 부수면 된다. 그렇게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다른 존재도 보았기를... 문을 여는 방법이 하나만이 아님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 ‘세 사람의 마지막도 지켜보지 않았을까? 목검으로 문을 부숴버리던 모습을? 정말로 그러했다면, 아영은 소녀도 같은 방법을 쓰기를, 그곳에서 나오기를 바랐다.’(113쪽)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nbsp;  이 소녀는 아영과 친구들이 다른 세계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다. 자신도 그쪽 세계로 넘어와 갇혀 있었으므로... 상대의 어려움을 알기에 힘이 되어주고자 했던 존재이기에, 아영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동으로 그 소녀 역시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nbsp;  이런 연대 의식, 약자들의 연대 의식이 드러나는 소설이 ‘풀각시’다. 화려한 영화 뒤에 감춰진 다른 존재들의 고통. 그렇게 고통을 약한 존재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존재들.  &nbsp;  하지만 약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로 연대한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고통받더라도 상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행위를 한다.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더더욱. 이런 연대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에서 구하게 된다.  &nbsp;  ‘살을 날린다는 것은 그 살을 맞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의 팔을 자를 때는 당연히 내 몸도 잘릴 것을 각오해야지요. 같은 팔이 잘리지는 않더라도 어딘가는 잘리기 마련입니다.’(229쪽)라는 말.  &nbsp;  이렇게 자신이 아플 것을 알면서도 하게 되는 행위. 이것이 바로 연대다. 상대의 고통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기에. 이러한 연대를 통해 고통은 잊힐 수가 없다. 잊히지 않기에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수가 없다. 그래, 꼭 당사자이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의 모습이 김이삭의 이 소설집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nbsp;  ‘낭인전’도 마찬가지다. 변강쇠전을 비튼 소설인데, 옹녀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등장한다. 그렇다. 늑대인간이든 유랑하는 사람이든, 그들은 그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열심히 살려고 해도 사회가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nbsp;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그들을 아예 없애려고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는 오래갈 수가 없다. 이는 ‘교우촌’이라는 소설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던 조선 후기. 그 사회에서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들을 괴물 취급하는 사람들.  &nbsp;  하지만 다름으로 괴물을 만들어내면 그 괴물에 먹히는 것은 결국 자신들일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천주께서 저희 마을을 정말 가련히 여기시나 봅니다. 특히 굶주리는 아버지를요.’(276쪽)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nbsp;  다른 존재를 괴물로 취급하고 밀어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괴물임을, 따라서 자신 역시 파멸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서 여성들은 그러한 점을 잘 안다.  &nbsp;  하여 여성들은 내 안의 괴물을 키우지 않는다. 남들이 괴물이라고 여기는 존재가 괴물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괴물을 만들어낸 사회에 저항한다. 홀로 또 함께...   &nbsp;  이렇게 이 소설집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즉 괴력난신이든 귀신이든, 그러한 존재들을 만들어내는 존재는 사회에서 권력을 쥔, 남들의 고통 위에서 자신의 영화를 좇는 이들임을 보여준다.  &nbsp;  그리고 약자들이 연대를 통해서 또 자각을 통해서 괴력난신에서 벗어나 삶의 당당한 주체가 됨을 보여준다.   &nbsp;  주체로 서는 여성들의 모습. 이 소설집을 통해 만날 수 있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4112/6/cover150/k412931384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41120649</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사람이야기</category><title>죽음을 선택한 엄마, 그를 돕는 딸 -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42347</link><pubDate>Mon, 10 Aug 2026 09: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42347</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12035658&TPaperId=17442347"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5496/97/coveroff/k012035658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12035658&TPaperId=17442347"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a><br/>남유하 지음 / 사계절 / 2025년 01월<br/></td></tr></table><br/>아름답고도 슬픈,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만 할, 상대를 사랑하기에 상대의 죽음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그러나 우리나라 법으로는 불법인.<br>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언젠가 온다. 그 언젠가를 우리는 모른다. 모르기에 행복할 수도 있지만, 모르기에 더 두렵기도 하다.<br>잠을 자듯이 죽음에 이르기를 꿈꾸지만 그런 사람은 만에 하나도 드문 경우.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과정을 고통 속에서 (이 놈의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질병이 유발하는 고통이란 놈도 의학의 발전에 비례해 증가하고 있으니)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br>[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을 읽고 우리나라에도 조력존엄사법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저자들의 주장처럼 이 법과 더불어 호스피스법이라든지 다른 죽음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법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생각.<br>아직 죽음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다른 여러 제도들조차 갖춰지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조력존엄사법이라니? 하는 생각도 하지만...&nbsp;<br>이 책을 읽으면서 조력존엄사법이 현대 사회에서는 꼭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깨끗한 죽음이라는 환상]에서 이 책을 언급했기 때문인데... 저자의 경험이 묻어났기에, 더욱 실감이 나는 그러한 이야기.<br>엄마의 고통, 그것을 바라보는 딸. 이런 딸도 엄마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데, 거의 평생을 함께 지낸 남편인 아버지는 어떨까? 딸은 나중에 아버지가 왜 조력존엄사를 반대하지 않았는지 이해하게 된다.<br>아내의 고통을 가까이서, 날마나 지켜봐야 했던 남편으로서 그런 고통 없는 세상으로 아내가 가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br>그러면서 외국에서 조력존엄사법이 통과되기까지의 과정에서 환자의 고통을 곁에서 지켜본 의사들의 역할이 컸다는 것. 환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의사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자신들의 일이지만 살릴 수 없는데 고통만 지속되는 환자를 보면서 그들은 의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를 더 고민하지 않았을까?<br>여기에는 돈이 개입하지 않는다. 연민, 사랑이 개입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 그것은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관점에서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무엇이 최선일까?<br>사람은 누구나 살려는 욕망이 있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말로는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지만 아니다. 옛말에 어른들이 빨리 죽어야지라는 말은 3대 거짓말 중에 하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사람은 살고자 한다. 죽고자 하지 않는다.<br>그런데 거꾸로 죽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 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고통이기 때문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현대 의학으로도 줄여주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 그렇다고 고통과 함께 계속 살 수 있다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들은 곧 죽음에 이른다. 죽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1-2년 내에. 어떤 사람은 더 빨리.<br>이미 그들은 죽을 때를 알고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 때까지 견디기에는 고통이 너무도 크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 그런 고통에 몸부림치는 환자를 바라보는 가족들. 이들에게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br>우리나라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환자는 고통 속에서 임종을 맞이해야 한다. 그것이 법이다. 하지만 조력존엄사법을 제정한 나라에서는 그 고통의 시간을 줄일 수가 있다.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br>가족의 선택이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로 또 자신의 행동으로 선택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에게는 견디지 못할 슬픔이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 슬픔. 하지만 그러한 자신들의 고통과 슬픔보다도 환자인 당사자의 고통이 더 심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 의지에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br>그런 사람들을 외면하는 법. 하여 엄마와 딸은 스위스로 가기로 한다. 그곳에서는 외국인도 조력존엄사를 할 수 있도록 받아주는 곳이 있으니까.<br>막대한 비용을 들여 외국에까지 가서 죽어야 한다는 현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마음. 그럼에도 더는 견딜 수 없는 고통.&nbsp;<br>엄마는 스위스에 가서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nbsp;"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115쪽)<br>죽음보다 무서운 고통, 아니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죽음이기에 그런 고통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엄마의 말. 딸은 가슴이 미어지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렇게 엄마와 헤어지고, 엄마와의 이별을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 딸. 그리고 남편인 아버지.<br>그러한 과정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엄마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존엄하게 우리나라에서 세상을 뜰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스위스에 가는 과정과 죽음을 촬영하도록 허가한다. 그것이 생명을 경시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사랑하기에 하는 행위라고.<br>엄마의 말. "다른 환자들이 나처럼 힘들지 않았으면, 우리나라에서도 존엄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어." (194쪽)<br>어느 행사에서 딸이 한 말.&nbsp;"조력사망을 막는 것이 오히려 생명 경시입니다." (260쪽)<br>엄마의 죽음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한 딸이 한 말. 이런 죽음을 과연 생명 경시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생명을 사랑하기에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조력 사망 아닐까?<br>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 또는 다른 존재를 위해 그들의 목숨을 끊어주는 행위가 나올 때가 있다. 이 때 사람들은 그 행위를 살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생명을 경시했다고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존재를 고통에서 구해줬기에 사랑을 실천한 고귀한 행위라고 한다.<br>문학이나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보면서는 그런 행위를 칭찬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로 보면서 어째서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은가? 영화나 문학에서보다 더 큰 고통을 겪으면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어째서 그들에겐 연민을 품지 않는지.<br>아직도 우리나라는 존업사법이 통과되지 않았다. 다만 이 책을 보면 의사, 변호사, 그리고 환자와 환자 가족들을 중심으로 존엄사법을 제정하기 위한 노력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br>더 많은 사람, 단체들이 반대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이 말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nbsp;<br>"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정말 무엇이 그러한 사람들을 위하는 것인지... 여기에 이 글을 쓴 딸도 분명히 말한다. 존엄사법과 완화치료 빛 다른 치료법도 함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그러나 어느 것을 먼저 해야지만 다음 것을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라고...<br>진한 슬픔이 밀려오는, 그러나 그러한 슬픔 속에서도 사랑이 흘러넘침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 진한 여운이 남는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5496/97/cover150/k012035658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54969710</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과 나 그리고 책</category><title>최보기 시집 -우리도 ‘직설‘하자</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40742</link><pubDate>Sun, 09 Aug 2026 14: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4074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742937829&TPaperId=174407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3107/76/coveroff/k742937829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nbsp; 다 좋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첫시부터 어렵지 않다. 그야말로 직설이다. 상징이 있고, 비유가 있지만, 상징과 비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게 하지 않고, 오히려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더 명확하게 하고 있다.<br><br>&nbsp; 이처럼 상징과 은유는 직설과 상반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직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상징과 비유다. 다만, 직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직설은 없고 오로지 상징과 은유만 있을 때 그것은 직설과 상반된다.<br>&nbsp; 즉, 길을 잃게 만든다. 길이 어디 하나뿐인가? 또 길이 어디 다 똑같던가? 아니다. 길은 다 다르다. 폭도 길이도 평평함도 높낮이도 모두 다르다. 모두 다르지만 길은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다. 때로는 우리가 길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것도 길임에는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상징과 은유다.<br>길이 직설이라면 그 길이 지니고 있는 특성들, 길에서 발견하는 많은 것들이 바로 상징과 은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직설을 뒷받침하는 상징과 은유는 직설과 상반되지 않는다.&nbsp;<br>그런데 문제는 직설을 하지 않고 상징과 은유만을 사용할 때다.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면 될 텐데, 일부러 에둘러 말한다. 이때 상징과 은유는 직설을 완화하거나 가리는 역할을 한다. 좀 심하게 말하면 '사기'다.<br>제 이익을 위해 말을 비트는 것, 직설을 감추고 상징과 은유, 또는 번드르르한 말들만 하는 것, 그것은 거의 '사기'에 가깝다. 아니, 사기꾼들의 말이 그렇지 않은가. 앞에서 듣기에는 좋은 말들이지만 결국은 피해로 돌아오게 되는 말들.&nbsp;<br>이런 에둘러 말하기, 상징과 은유가 직설을 가리고 있는 말하기를 가장 잘하는 집단은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모두 국민을 위한다는, 국민의 뜻에 따른다는 말로 자신들의 의도를 가린다. 정작 자신들의 의도는 그것이 아닌데, 그 의도를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게 하면서도 직설을 하지 않는다.<br>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식으로, 에두르고 에둘러 결국은 자신들의 말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었을 때 그때 비로소 직설을 한다. 이것을 하자고... 이게 국민의 뜻이라고... 참... 이런 말하기가 정치에서 판칠 때 사람들은 헷갈린다. 무엇이 진실인가? 도대체 저 정치인이 말하는 의도는 무엇인가?<br>마치, 시인이 시에서 사용한 은유와 상징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갸웃거리듯이, 정치인의 말을 직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냥 뒤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생각한다. 그 저의를 의심한다.<br>명확한 말하기, 이것은 정치인의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도 있다. 그만큼 정치인은 자신의 속내를 숨겨야 한다고 말이 이 나라 정치판에 정설처럼 되어 있었으니,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고 해야 하나.<br>자신의 의견을 명확히, 직설로 하는 정치인은 사방에서 공격을 당했으니까. 어떨 때는 세련되지 못했다고까지 비판을 받았으니까. 그러면서 자신들의 의도를 감추고 에둘러 말하기, 은유와 상징을 동원하기가 정치인의 덕목인 것처럼 말하는 정치인들이 득세를 했으니까.<br>하지만 이제는 바꿔야 한다. 정치인은 명확하게 자기 의견을 말해야 한다. 정치인의 말하기는 직설이어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다.<br>앞에서도 언급했듯 은유와 상징을 직설을 뒷받침하는 말로 쓰는 정치인은 직설을 하지 않았다고 하지 않는다. 고 노회찬 의원 같은 경우를 보라. 그가 사용한 은유와 상징들을 누가 직설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 직설을 감추려고 하는 은유, 상징들을 사용하는 정치인, 그것이 문제다.<br>자기 의도를 감추고 국민의 뜻 운운하는 정치인들 말이다. 그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특히 헌법에 분명히 있는 조항조차 알지 못하는 듯한 말하기를 하는 정치인들은 참...&nbsp;<br>최보기 시집을 읽으면서 최근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개헌'논의가 떠올랐다. 이들에게 제발 직설하자로 하고 싶을 정도로.&nbsp;헌법조차도 저들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그러한 정치인들에게 이 시를 들려주고 싶다.<br>&nbsp; 시여, 직설하자<br>그러니까 말인데시를 쓰는 시인이<br>육이오 때 삼팔선에서 죽은 예수가식은밥 한 덩어리에 운다<br>저리 써놓으면뭐가 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그게 무슨 말인지 시인 저도 모르더라.<br>그러니까 말인데시는 은유와 상징이라는 법률이지나치게 상징적인 바,직설로 가슴을 울리고 뇌를 충격하자.은유와 상징이 머리카락 꼭꼭 감추는 사이세상은 직설이 바꾸더라.<br>'나라를 확 혁명하자'는 말얼마나 쉽고 간결한가.<br>그러니까 말이지시여, 직설하자.<br>최보기. 가타하리나 개부치 씨. 달아실. 2023년. 18-19쪽.<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3107/76/cover150/k74293782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31077693</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문학이야기</category><title>천사와 악마로 보는 세상2 - [악마의 시 2]</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38766</link><pubDate>Sat, 08 Aug 2026 09: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3876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88284&TPaperId=1743876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065/76/coveroff/8954688284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88284&TPaperId=1743876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악마의 시 2</a><br/>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09월<br/></td></tr></table><br/>2권이다. 이제 현실과 상상이 구분되기 시작한다. 아니 상상이 바로 현실에 나타난다. 지브릴의 꿈이 현실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사람들은 지브릴의 과대망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지브릴은 아니다.<br>자신의 꿈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통해서 참차와 다시 만나게 되고, 당시 영국에서 자행되고 있던 차별이 명확하게 드러난다.<br>그런 차별에 항의하는 사람들, 이를 환상 속에서 불길로 응징하려는 지브릴. 그리고 그런 지브릴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 참차.<br>이상하다. 왜 참차는 지브릴에게 복수를 하려 하고 있는가? 자신은 영국인이 되고 싶어하지만 영국인이 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고 있는데, 또한 영국인 아내에게 버림받고(?) 있는데, 지브릴은 영국인이 되려는 생각도 없거니와 영국인(유대인이지만 국적인 영국인이고 또한 백인이니)과 사랑을 하고 있으니...<br>자신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증오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향해 표출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참차는 자신의 복수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br>그들이 아무리 영국인을 비판하고 또 추앙하더라도 참차와 지브릴이 지닌 차이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들에게 추앙을 받더라도 이방인이다.&nbsp;<br>중심부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이 중심부에 들어가는 것은 영국이 아니라 인도(파키스탄, 방글라데시 포함,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전의 인도라고 하면 되겠다)에서 가능한 일이다.<br>참차가 아무리 영국인이 되려 해도 참차는 인도인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참차가 인도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때 악마로 변했던 참차가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br>하지만 지브릴은 돌아와도 살지 못한다. 그는 환상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도에서도 지브릴은 스스로 세상을 뜬다. 스스로 자유를 얻었다고.<br>이런 결말로 가기까지 지브릴의 꿈을 통해서 종교 이야기가 나온다. 신념.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현대인이 지니고 있는 이성을 버리고 나아가는 사람들. 환상적인 이야기. 그들에게 속삭이는 악마의 시... 타락을 유도하는.<br>그러나 악마의 시는 인간의 타락을 유도하지만 결국은 인간은 자신의 신념, 생활을 회복하려고 한다.&nbsp;<br>이런 과정. 환상적인 과정, 이것을 해설에서는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했는데, 왜 사실주의냐면 꿈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실에서도 분명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수많은 차별들.<br>그러한 차별을 고치려고 하는 사람들. 탄압. 폭력. 시위. 종교적 갈등이 참차를 통해서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고, 지브릴을 통해서는 환상을 통해서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현실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작가는 참차와 지브릴을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데...<br>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소설을 읽어가면서 자신을 잃고 남이 되려하는 것은 악마의 유혹일지도 모른다는 것, 참차의 모습을 통해 그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br>좀더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소설이다. 작가의 신상 문제는 차치하고, 작품 자체만을 이해하는데도 어려운 소설이지 않을까 싶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065/76/cover150/8954688284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0657669</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문학이야기</category><title>천사와 악마로 보는 세상1 - [악마의 시 1]</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37102</link><pubDate>Fri, 07 Aug 2026 11: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3710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88276&TPaperId=1743710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065/74/coveroff/895468827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88276&TPaperId=1743710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악마의 시 1</a><br/>살만 루시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09월<br/></td></tr></table><br/>살만 루슈디. 오래 전에 들은 이름이다. 이슬람에서 적으로 규정한 사람. 그를 처단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단지 소설을 썼을 뿐인데... 그 소설이 바로 이 소설 [악마의 시]다.<br>어떤 소설이길래 그렇게 극단적인 탄압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이슬람과 반대로 다른 종교에서는 그에 대해 이러한 반감을 가지지 않았는데...<br>문득 종교를 종교로 인정한다면, 그 종교의 특성을 인정해야 하고, 그 종교에서 꺼리는 일(표현)은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는데...<br>종교인이라면 자기 종교를 무시하거나 비판한다는 것을 견딜 수 없으니,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종교와 같은 대우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만 루슈디가 기독교 신자던가?&nbsp;<br>현대에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를 배척하는 경향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살만 루슈디는 인도의 봄베이(요즘은 뭄바이라고 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봄베이라고 나온다)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그는 무슬림에 대해서 잘 알고 또 무시하지 않을 사람일 테다.<br>그런 그가 이슬람으로부터 탄압을 받는다? 도대체 이 작품의 어느 부분에서 이슬람의 분노를 샀을까? 소설을 읽을 때 그것을 중점으로 읽으면 안 되는데, 작가의 이력이 그러하니, 자연스레 그 점을 먼저 생각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다.<br>그런데, 어, 그런데 1권을 읽으면서 도대체 어느 부분이 이슬람의 분노를 일으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슬림이 아니라서, 그 종교에 무지해서, 그 종교에서 금기시하는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를 몰라서 그러는지 모르겠다.<br>하지만 적어도 1권을 읽으며 이슬람이 분노한 이유를 찾지는 못하겠다. 다만 선지자 무함마드를 작품 속에 등장시켰기 때문인가 하는 생각. 소설 속에서도 잠깐 나오는데 무함마드에 대한 영화를 만들더라도 그를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소설에서는 직접 등장하고, 그것도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 또 당시 사람들에게 악마인 '마훈드'로 불렸다는 표현이 있으니 이런 점에서 선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br>'예언자가 되겠다고 산을 오르는 이 고독한 인물도 여기서는 중세부터 아이들을 겁주던 이름, 악마의 동의어, 즉 마훈드라고 칭한다.'(149쪽)<br>한 종교에서 신성하게 모시는 인물에 대해서 표현할 때 조심해야 하지만, 문학의 역사에서 신을 표현한 경우, 신을 인간처럼 여러 고뇌하는 모습으로 표현한 경우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고뇌를 딛고 경지에 오르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에게 신성한 존재를 더욱 신성하게 여기게 하지 않나 하는데...<br>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굳이 이 작품에서 작가가 이슬람의 분노를 일으킨 장면을 내가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냥 작품을 읽으면 되지 않나 하면서 작품 전개에 중심을 두고 읽기 시작.<br>이야기는 두 사람과 두 장소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지브릴 파리슈타와 살라딘 참차라는 인물이 인도의 봄베이(뭄바이)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br>우연히 같은 비행기를 탄 두 사람. 비행기가 폭발하고, 둘은 살아남는다. 그런데 지브릴은 천사로 변하고, 참차는 악마로 변한다. 지브릴, 가브리엘이라고 할 수 있는 대천사로 변한 그의 꿈에 무함마드도 또 이란의 이맘도 나오는데 그들에게 계시를 주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br>참차는 염소의 형상을 한 존재로 변하는데, 이를 악마라고 할 수 있다. 즉 참차는 악마로 변신해 사람들을 피할 수밖에 없지만 그를 보호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지내게 된다. 1권까지는.<br>1권의 마지막에 참차는 극도의 분노를 보이고, 이 분노로 인해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는데...<br>'무서운 증오심을 터뜨린 덕분에 도로 '인간화'된 모양이었다'(452쪽)는 표현으로 참차가 인간으로 돌아온 것으로 1권은 끝나고 2권으로 이어진다.<br>이 1권에서 지브릴을 통해서는 종교를 통해 당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막의 도시에서 이슬람이 펼쳐지는 과정을 '마훈드'와 '아예샤"라는 장에서 보여주고 있다면, '엘오엔 디오엔'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는 현대의 모습, 즉 이민자들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다.<br>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 독립하면서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와 인도로 분리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영국인처럼 되고 싶어하는 살라딘 참차의 모습. 이런 참차가 악마로 변하는 것은 바로 영국인을 비롯한 제국주의자들의 눈에는 인도인이나 또는 아프리카계 사람들, 동양인들은 괴물과 같은, 그들과는 다른 인간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br>그들에게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살라딘 참차의 변신이고, 이러한 참차를 보호하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경찰, 또 그들에게 언제 어디서든 폭력을 휘두르는 식민주의자들이다. 그러한 두려움이 참차의 변신을 통해 잘 그려지고 있는데...<br>이러한 폭력에 저항하는 존재는 악마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무함마드를 '마훈드'라는 악마로 지칭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존재니까. 그들이 악마로 부르고, 또 스스로도 악마로 지칭하는 것은 그들의 인식을 뒤집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모습일지도 모른다.<br>'퀴어'라는 말을 전복하여 쓰고, '이반'이라는 말을 쓰는 것처럼 이 소설에서 '악마'는 악마가 아니다. 기존의 틀을 깨는 존재다. 그러니 이러한 악마는 기존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존중받을 수밖에 없다. 참차의 흉측한 모습에도 그를 꺼리지 않는 인물들의 모습에서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br>하여 '종교'는 지브릴을 통해, 현대 이민자들의 삶은 참차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소설. 서구 사회에 만연한 편견과 차별을 잘 드러내고 있는 소설이다. 2권을 기대해 본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065/74/cover150/895468827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0657463</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건축이야기</category><title>장애의 시좌(視座)로 건축을 보다 - [장애 건축 - 취약성으로 연결되는 공통의 세계 짓기]</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35173</link><pubDate>Thu, 06 Aug 2026 08:4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35173</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82139399&TPaperId=17435173"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23/97/coveroff/k682139399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82139399&TPaperId=17435173"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장애 건축 - 취약성으로 연결되는 공통의 세계 짓기</a><br/>데이비드 기슨 지음, 박우진 옮김, 최춘웅 감수 / 가망서사 / 2026년 06월<br/></td></tr></table><br/>장애인을 위한 건축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장애인을 위한 건축은 주로 장애인의 접근성을 중심으로 하는 건축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저자가 말하는 장애 건축은 건축에서 장애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 즉 접근성의 문제를 넘어선다고 말한다.<br>'&lt;장애 건축&gt;은 건축, 조경, 도시 계획이 인간의 손상 개념, 그리고 장애인의 경험과 맺는 관계들의 역사에 대한 탐구'(12쪽)라고 하면서, '궁극적으로 &lt;장애 건축&gt;은 우리가 장애인으로서 건축물과 도시의 역사, 이들 공간의 재설계 가능성, 그리고 미래의 건축을 만들어 나가는 일과 맺을 또 다른 관계의 방식을 제안'(13쪽)하는 것이라고 한다.<br>그러니 장애인을 위한 건축에서 어떻게 하면 장애인도 소외되지 않고 건축에 접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면, 장애 건축은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한다. 그것도 장애를 감추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형상화해야 한다는 것.<br>시작부분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부터 충격이었다. 아크로폴리스. 파르테논 신전, 세계적인 건축 아닌가. 이곳에 장애인도 관람할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고 하는데, 저자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br>아크로폴리스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최근에 파르테논 신전까지 오르는 길은 이 신전에 이르는 과정에서 신성함을 느끼도록 했다고 하는데, 걸어서 올라가면서 느낄 수 있도록 잘 설계한 길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이것으로는 놓치는 것이 있다고 한다.<br>그것은 바로 아크로폴리스가 안고 있는 역사, 거기에 과거에는 장애인들도 파르테논 신전까지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다는 것. 이런 것들이 개발의 역사에서 사라지고, 지금 장애인을 위한 건축에서는 그러한 역사를 알게 하지 못한다고... 장애 건축은 바로 이러한 역사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br>읽으면서 생각해보니 파르테논 신전이다. 신전의 역할이 무엇인가? 기원하러 가는 곳 아닌가. 기원을 한다? 무언가를 기원해야 하는 사람들, 약자 아닌가. 물론 이 신전에 강자들도 갔겠지만, 더 많은 약자들이 무언가를 기원하기 위해서 가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장애인들이 분명 있었을 테니..<br>당시에도 장애인들이 신전에 가서 빌 수 있도록 분명 길을 내었을 것이다. 그러한 길이 있었음을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데, 성당도 마찬가지, 성당에도 장애인들이 분명 갔을 테고, 그러니 그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을 테니...<br>단지 접근성만이 아니라 그 건축의 목표에 맞는 형태로 만들어졌음을 생각하면 어찌보면 장애인이 다닐 수 있는 길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역사 속으로 묻어버리고 말았으니.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됐고.<br>또한 건축에서 인간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들이 바로 정상/장애의 이분법을 만들어내고 있으며,그러한 이분법에서는 장애인을 위한 접근성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br>저자는 이렇게 장애 건축은 장애를 숨기거나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장애를 보존-보전하고 도시화하고, 형상화하고, 구축하는 노력이 결국 장애 건축 그리고 향후 장애의 실천을 촉진한다'(209쪽)고 하면서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일어났던 빈 정착민 운동을 예로 들고 있다.<br>상이군인을 비롯한 '빈의 전쟁 생존자들은 ... 자선의 대상인 불우한 국민으로 인식되기를 거부한 채 건축 공간을 생산하고 재상상하는 권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198쪽)고, 그들이 자신들이 살 집을 스스로 짓고 공동체를 구성해 자립해가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정부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lt;장애 건축&gt;의 한 예를 보여준다.<br>이렇게 저자는 &lt;장애 건축&gt;을 통해서 장애인을 '위한' 건축이 아니라 장애와 함께하는 건축임을, 이러한 &lt;장애 건축&gt;은 사회를 바꾸어가는 일임을 보여주고 있다.<br>&lt;장애 건축&gt;에서 쓰이는 용어가 '장애의 시좌 perspective of disability라는 말인데, 이 말에서 '시좌'는 사물과 사회를 보는 시점이라고 한다. 즉 장애로 사물과 사회를 보고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br>이는 정상/장애의 관점을 버리고, 오히려 장애의 시점에서 사회를 바라보고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장애인의 접근성을 중심으로 하는 건축이 어쩌면 시혜로서 장애인들을 동등한 주체로 대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br>그런데 저자의 이런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아직 장애인의 접근성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건축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저자 역시 장애인의 접근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기본으로 여기고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하니...&nbsp;<br>장애인의 접근성조차 힘든 우리나라 곳곳의 건축들을 보면서, 갈 길이 너무 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lt;장애 건축&gt;은 커녕 &lt;장애인을 위한 건축&gt;도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23/97/cover150/k682139399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239743</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여러이야기</category><title>진정한 사랑을 하기 위해 - [이성애의 비극]</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31304</link><pubDate>Tue, 04 Aug 2026 07:3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31304</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12139490&TPaperId=17431304"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44/12/coveroff/k31213949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312139490&TPaperId=17431304"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성애의 비극</a><br/>제인 워드 지음, 노지양 옮김 / 라우더북스 / 2026년 06월<br/></td></tr></table><br/>'동성애의 비극'이 아니고? 책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든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는 이성애 중심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이 책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이성애에 대한 생각을 뒤집고 있다.<br>'앨라이(얼라이ally)'라는 말에서 이 뒤집힌 관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보통 앨라이는 이성애자들이 동성애자들에 동조한다는 의미로 쓴다. 다수가 소수와 함께 한다는 의미로...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로.<br>그런데 이 책에서는 '앨라이 관계'를 반대로 뒤집어 보는 일 안에는 어마어마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내포되어 있다. 퀴어들은 여성혐오의 역설 아래에서 고통받는 이성애자들에게 페미니스트로서 개입하고 퀴어 관점에서의 가이드를 제공해줄 수 있다.' (70쪽)고 하고 있다.<br>그간 이성애자들의 사랑은 여성 혐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여성 혐오라고 하기가 그렇다면 여성 억압이라고 해도 좋겠다. 남성의 기준에 맞는 여성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이성애적 사랑 아니었던가?<br>여성으로서 지녀야 할 자세, 행동, 외모, 말투 등등, 그리고 집 안에서 여성으로서 해야 할 일 등등... 그러한 것들이 이성애적 사랑으로 감춰진 여성 억압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데... 이러한 억압에 바탕한 사랑이 과연 진정한 사랑이냐고...<br>오히려 남성의 욕망을 해소하는 대상으로서 여성을 필요로 한 것이지 동등한 인간으로서 사랑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책 '이성애의 비극'에 담겨 있는 뜻이다.<br>책의 앞부분을 보면 '이성애의 비극'은 여성들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가부장적 폭력의 세계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잃어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바로 '이성애의 비극'이란 이름으로 나타나니까.<br>그래서 '앨라이 관계'를 뒤집는다는 것은 퀴어들이 이성애적 사랑을 하는 여성들에게 동조하면서, 그들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사랑에 대해 알려주고 함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데...<br>남성 욕망의 객체가 아니라 자기 사랑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그러한 사랑을 가르쳐줄 수 있는 존재가 퀴어들이라고... 특히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모델을 참고해야 한다고...<br>그럼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모델은 뭐지? 간단하다. '각자의 성적 욕망은 본인의 책임이라는 것'(295쪽). 이는 누구를 의식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에게 충실한 사랑이라는 것. 자신만큼 상대에게도 충실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다.<br>이런 사랑에서 에로틱은 '동일시이고 상호 인정이며 기쁨이 피어난 자리'(294쪽)라고 한다. 주체/객체의 분리가 아니라 서로가 주체가 되는, 존재 자체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가부장적 권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상대를 내 욕망의 객체로 삼는 것도 있을 수가 없다.<br>이런 점에서 퀴어들이 이성애자들의 '앨라이'가 될 수 있다고, 그간 사회의 통념을 뒤집는 주장을 한다.&nbsp;<br>보통 퀴어들이 힘들게 사랑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사랑에 충만함과 기쁨을 느낀다고...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는 관계로 만들어간다고... 그럼에도 동성애 혐오가 사회에 있는 이유는 '이성애적 불행과 비참함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217쪽)고 하는데,&nbsp;<br>이것은 '반복되는 퀴어의 시련 서사는 그 고통에 동반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것을 상쇄해주는 퀴어로 사는 것의 심오한 기쁨을 무화하고 이성애적 삶은 젠더화된 폭력과 고통에서 자유롭다고 암시하면서 이성애 규범성을 더욱 공고하게 이 사회에 심어놓는다'(23쪽)는 말로 구체화하고 있다. 결국 동성애 억압은 이성애자들 또는 가부장적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불행이나 억압을 덮으려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는 현상이라고 보면 된다.<br>차별은 결국 내 안의 결핍을 외부에게 전가하는 것인데, 내 안의 결핍이 결핍이 아니라 바로 자신일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다른 존재들을 차별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다는 것을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된다.<br>이렇게 저자는 그간의 통념을 뒤집는다. 동성애자들이 힘들다는 생각을, 이성애자들이 얼마나, 특히 여성 이성애자들의 비극에 대해서 여러 사례를 통해, 그것도 동성애자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br>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br>'극이성애적인 남성 hyperstraight man'은 여성의 몸에 끌릴 뿐 아니라 여성이라는 종의 집단적 자유에 대해서도 끌린다. 여성을 좋아한다는 것은 여성을 위한다는 뜻이다. 진정으로 이성애적인 남성, 다시 말해 깊은 이성애자가 되고 싶다면 ... 그 사람은 반드시 페미니스트여야 한다.'(315-316쪽)<br>이보다 명확하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사랑에 굳이 성별 구분을 할 필요가 있을까? 지금까지 성별 구분을 해왔다면 앞으로는 그러한 구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냥 사람을 사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을 해야 할 뿐이라는 것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br>이를 이 책의 해제를 쓴 한채윤의 말로 끝을 맺는다. 이보다 더 명확하게 사랑을 하려면 이렇게 해야한다고 정리할 수 있을까 싶다.<br>"같다고 하기엔 우리 모두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다. 그러니 평등한 관계를 상상하는 힘이 없다면, 그것이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사람 사이의 관계는 결국 '꽝'이 될 뿐"(329쪽)<br>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책은 퀴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하고, 사랑에 대해 더 깊은 생각을 하게 한다.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nbsp;]]></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444/12/cover150/k31213949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4441248</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이야기</category><title>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살인을 방지하기 위해 - [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 강압적 통제는 어떻게 관계를 지배하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29742</link><pubDate>Mon, 03 Aug 2026 11:1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29742</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82034142&TPaperId=17429742"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8283/85/coveroff/k682034142_2.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682034142&TPaperId=17429742"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처럼 친밀한 살인자 - 강압적 통제는 어떻게 관계를 지배하는가</a><br/>허민숙 지음 / 김영사 / 2026년 01월<br/></td></tr></table><br/>마음이 불편하다. 목숨을 걸고 사귀어야 하다니... 세상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만났는데, 그 만남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면? 도대체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나?<br>특히 친밀한 관계, 부부나 연인 관계에서 벌어지는 폭력, 살인은 정말,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불행, 죽음으로 가는 길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그야말로 사랑을 목숨 걸고 해야 하는 판이다.<br>비유가 아니다. 목숨 걸고란 말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말로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사랑을 한다는 말이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nbsp;<br>그런데 그 상대를 어떻게 알아보나. 처음부터 난 당신을 죽일 거야 하면서 접근하는 연인이 있을까? 당신을 사랑해, 당신에게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어.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 아니면 우리 행복하자 하면서 만남을 시작하지 않나.<br>그러던 관계가 어느 새 집착으로 변해 사사건건 간섭하게 되고, 그 간섭이 통하지 않으면 폭력을 휘두르고, 더 나아가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br>가정폭력, 교제폭력(살인)이라고 하는 범죄들 이야기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사람을 만나는데 목숨에 위협을 느끼게 되면 그런 만남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도 상대가 따라줘야 가능하다.<br>가정폭력이나 교제폭력은 상대의 집착과 폭력으로 인해 벗어나기 힘들다. 그것도 친밀한 관계, 사적인 관계라고 해서 경찰이나 공권력이 잘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nbsp;<br>이 책에 나와 있는 통계를 보라. 무시무시하다. 무섭단 생각이 들 정도다. 우선 2024년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8만 8,394건(17쪽)이라고 한다. 한 해 교제폭력으로 경찰에 신고된 건수만 8만 건이 넘는다. 이를 하루로 환산하면 하루에 242건의 신고가 있었다는 말이다. 약 6분마다 한 건의 신고가 들어온다는 얘기니...<br>신고하지 않은 교제폭력까지 합친다면 거의 매 순간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는 교제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신고가 사건으로 접수되는 건수는 대폭 준다는 사실.<br>신고하고 출동한 경찰에 의해 자체 종결되는 건수가 반이 넘는다고 한다. 앞에서 든 2024년 통계를 보면 신고 건수 88.394건 중에서 4만 8,065건이 현장에서 종결되어 현장종결률 54.4 퍼센트를 기록(19쪽)했다고 한다.<br>이 통계를 봐도 신고도 많이 되지만 현장종결로 더이상 수사가 되지 않는 경우도 절반이 넘는다는 것인데, 이런 와중에 교제살인을 당하는 사람이 나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br>너무도 많은 교제폭력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통계인데, 이런 교제폭력을 막을 제도나 법은 아직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고. 이제 교제폭력을 규제하는 법이 발의되었다고 하는데...<br>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당신들의 문제니 당신들이 해결해 하는 것이 아니라, 친밀한 관계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위협을 받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사회가,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br>그러기 위해서는 교제폭력이 일어나는 전조를 파악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첫번째는 바로 과장된 자상함과 친절함이다. 물론 자상함과 친절함은 좋은데, 다만 남을 자신이 통제하기 위해 접근하는 위장된 자상함과 친절함이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이 자상함과 친절함을 처음부터 위장인지 진실인지 알 방법이 없다.<br>그렇지만 다음 단계, 의심과 질투로 상대의 행동을 통제하려는 것은 파악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이 보이면 이는 교제폭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조심해야 하고, 관계를 고민해야 한다고...<br>의심과 질투에서 교제폭력으로 넘어가는데 폭력을 넘어서 살인으로까지 나아가는 전조는 바로 '스토킹과 목조름'이라고 한다.<br>우리나라도 이제는 스토킹에 관해서는 범죄로 다루고 있는데, 아직 교제폭력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있다고 한다. 특히 목조름은 다른 나라에서는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엄한 처벌을 한다고... 그러한 엄한 처벌을 통해서 살인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에 관한 법이 없다고 한다.<br>하여 저자는 우리나라도 교제폭력을 규제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면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br>첫째, 연인, 배우자, 파트너 등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통제 행위'를 범죄화하는 법적조항을 마련해야 한다.(175쪽)<br>둘째,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통제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친밀한 관계'에 대한 법적 정의가 필요하다. (176쪽) - 저자는 외국 사례를 검토하면서 친밀한 관계에는 현재의 관계만이 아니라 과거에 맺었던 관계도 포함된다고 하고 있다.&nbsp;<br>셋째, '친밀성'이라는 관계의 특수성을 반영해 가해자 처벌을 규율하기 위해서는 '반의사불벌죄' 배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177쪽)고 한다.<br>왜냐하면 친밀한 관계에서는 상대의 가족관계나 직장 또는 어디를 언제 가는지 등을 가해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피해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자신과 관계맺고 있는 다른 존재들이 위험에 처할까 봐 가해자를 신고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nbsp;<br>또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가해자는 위협적인 존재이기에 그 앞에서 직접 처벌 의사를 밝히기도 힘들다고 한다. 그러니 반의사불벌죄를 폐지해 교제폭력은 현행범으로 그 자리에서 피해자와 격리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br>이렇게 하기 위해서 기술적 도입으로는 '스마트 워치'의 보급이 아니라 'GPS위치추적장치'를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스토킹 처벌법에 따라 이 위치추적장치가 반영되어 시행되고 있다(183쪽)고 하는데,&nbsp;'GPS위치추적장치'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정 거리 이내로 가까워지면 경보가 울리는 시스템(183쪽)이라고 하니, 피해자가 가해자를 피하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라고 한다.<br>무엇보다 지금 교제폭력을 당하는 존재가 여성들이 많으니 성적 차별, 무시를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이 (이는 여성만이 아니라 소수자 누구에게나 해당될 테고,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이러한 교제폭력이 다른 소수자들에게 가해지지 않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들이 신고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테니, 어떤 성별이든 또 종교를 가졌든 아니면 여타 어떠한 이유에서든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법이 차별금지법이니) 시행되어야 하고, 이런 법이 적용되지 않는, 실질적으로 차별이 없는 사회가 되는 노력을 해야 한다.<br>단지 교제폭력을 방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차별도 일어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저자 역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br>읽으면서 서글펐다. 만남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만나면서 목숨이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그것도 아주 많이. 하루빨리 이러한 일이 없어지도록 제도로 또 문화가 있는 나라가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8283/85/cover150/k682034142_2.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82838599</link></image></item><item><author>kinye91</author><category>세상이야기</category><title>로봇(인공지능) 뒤에 감춰진 노동을 볼 수 있어야 - [로봇은 오지 않는다 - 자동화 신화와 은폐된 인간 노동의 진실]</title><link>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26711</link><pubDate>Sat, 01 Aug 2026 12: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74420113/17426711</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9666&TPaperId=17426711"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75/33/coveroff/k592139666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592139666&TPaperId=17426711"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로봇은 오지 않는다 - 자동화 신화와 은폐된 인간 노동의 진실</a><br/>안토니오 카실리 지음, 변정수 옮김 / 이상북스 / 2026년 06월<br/></td></tr></table><br/>'로봇은 오지 않는다'가 아니다. 로봇은 온다. 오는데, 로봇이 온다고 해서 인간 노동이 줄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흔히 우리가 지금 하는 일들을 로봇이 하게 되면 우리는 그 시간에 다른 활동을 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우리 인간에게도 좋은 일이라고들 한다. (여기서는 로봇과 인공지능을 묶어서 하나의 개념으로 쓴다)<br>그런데 이 책의 저자인 카실리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로봇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온다고 해도 인간 노동은 줄지 않는다고, 오히려 인간 노동은 작게 작게 쪼개져 노동이라고 판단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게 되어, 보상받지 않는 노동을 하게 된다고 한다.<br>지금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인공지능들이 속속 나오고 있는데, 그들이 그 정도 수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는 살피지 않는 경우가 많다.<br>그냥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열광하거나 두려움에 빠지거나 하는데, 카실리는 보이는 현실 너머, 그러한 현실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핀다. 지금 인공지능이 이 정도 능력을 발휘하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이 있었다는 점. 또 지금도 그렇게 사람들의 노동이 뒤에 있다는 점을 수년 간의 조사를 통해서 밝히고 있다.<br>그럼에도 그들의 노동은 노동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이고,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은 노동자들이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br>플랫폼들이 기를 쓰고 자신들에게 이윤을 창출해주는 사람들을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개인사업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이윤은 챙기지만 그들을 보호하지는 않겠다는 방침인 것이다.<br>또 개인이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재미로 하는 활동이기에 노동이 아니라고, 자신들이 그에 대해 어떤 보상을 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재미로 하든 돈을 받고 하든 클릭을 하는 순간순간이 플랫폼들에게는 도움이 된다.<br>더욱더 빠르고 정확한 인공지능을 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우리가 좋아요를 누르든 링크를 타고 들어가든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가 모두 플랫폼들에게는 유용한 자료가 된다. 저자는 디지털이라는 말을 '손가락'이라는 뜻도 있다면서, 이 디지털 세상은 결국 우리들의 손가락에서 비롯된다고도 하고 있다.<br>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주 적은 수입으로 라벨링을 하는 사람들, 그냥 플랫폼에 접속해 재미로 클릭하는 사람들 모두의 행위가 플랫폼의 이윤을 창출하는 일이 된다는 것. 그러므로 로봇이라는 현상 앞에서 사람들이 잊고 있는 노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br>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 노동은 사라지지 않고 또 줄지 않을 것이라고... 물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일들은 로봇(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수 있다. 그것을 보고 인간 노동이 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일자리, 지금까지 인간이 하는 노동으로, 인간의 일자리였던 것이 로봇으로 대체된 것일 뿐.<br>로봇이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학습이 있어야 하는데, 학습하기 위해 필요한 데이터를 누가 만들어내는가 하면 그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인간이 바로 인간이다. 즉 로봇이 일을 하면 할수록 인간이 해야 하는 일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br>로봇은 수많은 데이터, 새로운 데이터를 필요로 하고, 그러한 데이터를 창출해내는 존재는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것. 그럼에도 그러한 인간들의 노동을 보지 못하고, 또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그러한 사회는 인간의 행복을 구현하는 사회가 아니라 소수 인간은 행복할지 몰라도 다수의 인간들은 불행한 사회가 된다고...<br>그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노동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노동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카실리는 주장한다.&nbsp;<br>이런 점에서 이 책 표지에 있는 작은 제목 '자동화 신화와 은폐된 인간 노동의 진실'이라는 말이 다가온다. 자동화로 인간의 노동이 사라질 거라는 것은 허상이라고... 자동화 뒤에 오히려 잘게잘게 쪼개진 일들을 하는 인간이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고...<br>이 책의 장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인간 노동을 보게 하는 것. 그러한 인간 노동이 있기에 인공지능, 로봇, 자동화가 가능한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가 편리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이러한 구조를 지탱해주는 것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또 그것이 노동인지 생각하지 않고 하는 우리 모두의 활동들이니 '보편 디지털 소득'을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nbsp;<br>카실리는 '나는 로봇이 노동자를 대체하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는, 로봇이 아니라 더 낮은 임금을 받는 다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보편적 기본소득은 실업을 보상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착취에 맞서기 위한 필수적인 수단'(439쪽)이라고 주장한다.<br>그러면서 '사유재산은 사회적 재산으로, 종속된 노동은 자기결정적 노동으로, 데이터와 노동을 둘러싼 울타리는 진정한 공유 인프라로 대체되어야 한다'(443쪽)고 한다.&nbsp;<br>이렇게 카실리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인간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노동과는 다른 노동으로 인간들이 계속 일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인간들의 노동이 인공지능(로봇, 자동화)을 이끌고 유지하게 하니, 그들이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nbsp;<br>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카실리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과 인공지능이 공존하는 사회는 충분히 가능하고, 또 사회의 불평등을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br>소수에게만 집중되는 부와 시간의 여유가 아니라 모두에게 분배되는 부와 시간의 여유,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카실리가 꿈꾸는 세상이고, 우리 역시 그러한 꿈을 꿔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br>덧글<br>참고로 나는 여기서 로봇, 인공지능, 자동화를 같은 의미로 썼고, 카실리가 이 책을 쓴 때가 2019년이라고 해서 인공지능이 한창 떠오르는 지금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나 했는데, 영문판을 2025년에 냈다고 하고, 이 책의 번역은 주로 2025년을 기준으로 했다고 하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인공지능 논의와 동떨어져 있다고 할 수 없다. 그의 주장을 참조하는 것도, 특히 결론 부분에서 제시하고 있는 대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9375/33/cover150/k592139666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93753347</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