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평범하다는 것, 두드러지지 않다는 얘기인데, 두드러지지 않다는 말은 곧 사회에서 어떤 힘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통한다.


남 위에 군림하지 않고 제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이렇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질문을 하면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물 흐르듯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도처에 물이 흐르는 것을 막는 댐, 보를 설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물 흐르듯 산다는 말이 행복한 삶과 연결이 되겠는가.


지리산 주변에 골프장, 케이블카가 들어온다고 하는데, 이것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겨들어야 하는데... '빌어먹을 멍청이들'(75쪽)


이번 호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다룬 예술가 케테 콜비츠 이야기가 있다. 아들과 손자를 전쟁에 잃은 케테 콜비츠. 약자들과 연대하고, 약자들이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함을 예술로 보여줬던 작가, 케테 콜비츠.


그에 관한 글(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을 읽으면서 힘에 의한 평화를 부르짖는 모 정치인이 생각났다. 힘에 의한 평화, 그래서 나치가 평화를 유지했던가?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힘으로 인해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 정치인들로 인해서 평화가 오는가? 오히려 긴장과 불안... 케테 콜비츠는 이런 상황을 이미 자신의 예술로 보여줬는데, 과거에서, 예술에서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다 나도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정부 예산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맞다. 정부 예산이 우리 세금이지. 그렇다면 정부 예산은 우리 돈인데... 왜 우리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참여할 수가 없지 하는 문제의식.


<2024년 정부 예산, 656.9조 원 속 노동자>라는 글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정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금은 내가 낸 돈이다. 내게도 이 돈을 어떻게 쓸지, 어디에 쓸지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 정부나 국회가 전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많은 돈에 내가 돈은 일부라고? 허어, 돈의 액수로 따지면 안 된다. 돈의 출처,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 살펴야 한다. 그러면 국민 개개인은 세금의 주인이다. 주인이니 주인답게 세금을 쓰는 용처, 즉 정부 예산에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이게 지나친 발상일까 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직접민주주의가 힘든 현대에,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단체를 통해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어디인가. 세금을 쓰는 일에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단 얘기잖은가. 


'남아공 헌법은 정부예산안을 이중적으로 한다. 하나는 행정부가 마련하는 예산안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예산위원회가 만드는 예산안이다. 민중예산위원회는 남아공의 NGO, NPO,노동조합총연맹,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다. 공공재정이 담아야만 할 국민의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인 것이다. 남아공에서는 이 두 가지 예산안이 마련되면, 서로 조정과정을 거치고 난 이후에 국회의 승인을 받는다.' (20쪽)


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 최근에 정부는 노조들에게 회계공시를 고용노동부의 노동조합회계공시시스템을 통해서 하라고 했다. 민간(그들이 말하는) 단체를 정부 시스템을 통해서 돈의 사용처를 공개하라고 한 것. 하지 않을 때에는 불이익을 주겠다고, 특히 하지 않는 단체는 기부금 공제를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민간 단체의 회계를 정부가 관리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정부의 회계를 국민들이 관리해도 된다는 말이잖은가. 그러니 이 정책을 뒤집으면 바로 남아공에서 하는 예산안 조정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니, 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정부 스스로 국민들을 대변하는 민간단체들이 정부예산안을 짜는데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것과 그것은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듯하니...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회계를 정부시스템을 통해서 공개한다. 그렇다면 정부예산, 즉 우리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들의 권리인 정부예산안을 조정하는데,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라고.


그래야만 정부가 노동조합에 회계공시를 하라고 한 일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그런 정부가 되길 바란다고...


[삶이보이는창]13호(2023년 가을호)를 읽으면서, 내년 예산안을 그냥 넘길 게 아니라, 국회심의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예산안을 계획하는 데서부터 국민들이 참여해야 함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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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는 되도록이면 다수가 아닌 소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의문을 가지고 계속 잡지를 만들고 작은 목소리라도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집장의 말. 8쪽.)


  그렇다. 소수가 행복한 사회는 다수도 행복할 수 있다. 가장 약한 사람이 불편함이 없이 살아가는 사회,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그런 사회 아닌가.


  이제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존재, 청년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대학입시제도를 개편하겠다는 얘기가 최근에 나왔다. 청년들의 미래가 온통 대학에 달려 있는 듯이 대학입시, 대학입시에 목매달고 있다. 누가? 기성세대들이.


기성세대들이 대학이 청년의 모든 것인양 이야기를 하니, 대학에 가지 못한 청년들은 언론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다.


모든 청년들이 대학에 가야 한다는 듯이 대학입시에 대해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그 제도에 대해서 분석하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대학에 가지 않는 소수(?소수라고 해야 한다. 대학 진학률이 60-70%대에 해당한다고 하니)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을 위한 정책이 있기는 할까?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것을 마치 실패한 인생처럼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빅이슈 이번 호에서는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청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빅이슈는 소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조앤 K. 롤링이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연설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롤링이 그때 말한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실패가 주는 미덕과 상상력의 중요성이다.

(영상 주소 : https://www.youtube.com/watch?v=_9-ajTbM838)


빅이슈 이번 호하고도 통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데, 청년 때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늘 성공만 하고 살 수 없기 때문에... 롤링은 이 연설에서 실패로 인해서 자신은 삶의 군더더기를 없앨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고 하고, 그로인해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그런 실패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상상력, 그냥 공상이 아니다. 롤링이 말하는 상상력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아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에 대한 공감. 즉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실패로 인해서 얻게 되는 점과 상상력의 중요성은 청년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빅이슈가 이번 호에서 청년들에 대해서 다룬 것, 롤링의 연설이 떠오른 것도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청년들을 가연 잘 대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말이라도 학원가에 줄지어 서 있는 학원 버스들, 여기에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하니, 상위권 학생들이 의대 지원을 하겠다는 현실, 또 대학입시가 청년들의 전부인 양 떠들어대는 언론들...


대학입시만큼이나 대학에 가지 않는 청년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잘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지 않은 청년들에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청년들의 처지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빅이슈 이번 호 읽으면서 우리나라 청년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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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적 지향과 몸의 불일치. 내 몸에 다른 이가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이의 몸에 내가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든 몸에 둘이 있다. 둘은 나와 남이라는 분리 의식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이분법의 세계에서,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일 수도 있다는 너와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은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는 수많은 나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나라는 존재들 사이에 너는 없다. 그러므로 내 몸에 들어온 너는 잘못 들어온 너가 되고, 너 안에 들어간 나는 잘못 들어간 내가 된다.


  과연 그런가? 성적 지향과 몸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 들어간 나, 또는 잘못 들어온 너라고 할 수 있는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 중에, 너도 있을 수 있고, 그런 나와 너 중에는 서로 다른 지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런 너와 나를 어떻게 한몸에서 융합할 것이냐에 있다. 하나를 내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또 하나가 받아들여 다른 하나로 함께 지내는 일.


이번 시집 제목이 된 '슬픈 게이'란 시에서 통합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부만 인용한다.


1

손바닥에 너의 두 눈 / 내 눈을 빼고 그걸 끼운다. / 코와 입 귀를 지우고 / 너의 코와 입 귀를 덮는다. / 머리카락을 뽑고 / 너의 머리카락을 / 씌운다. // 내 얼굴은 사라지고 / 거울 속에 비친 네 얼굴 / 웃는다 너처럼. / 너무나 생생한 예전의 너의 미소 / 그걸 흉내낸다. / 내 생각이 너의 생각이도록 / 반복하고 반복한다.  // 너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냐. / 네가 되어 너의 삶을 살아가는 거지.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슬픈 게이' 중 부분. 86쪽)

 

쉽지는 않은 일이다. '네가 되어 너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 쉬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슬프다. 하지만 슬프다고 해서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계속 노력한다. 살아가려고, '반복하고 반복한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힘든 일이지만 너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게이 1' 시를 보면 이 점이 더 잘 나타난다.


게이 1


내 몸을 다 / 뒤지고 돌아다녀도 / 내 들 곳은 없어라, 내 몸의 / 벼랑에 서서 생각하느니 / 저 꽃의 몸으로 / 저 바위, 저 파도의 몸으로 / 저 새의 몸으로 / 태어났다면 나는 지금껏 /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 허공 중에 흩어나는 너의 향기 따라 / 나를 던지느니, 저 포말의 몸으로 태어날 건가 / 벼랑의 컴컴한 틈에 아슬아슬히 /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나를 잡아채니 / 너는 내 안의 오랜 나였구나 // 한 꽃 속에 모든 여성이 들어 있고 / 한 여성 속에 모든 꽃이 숨어 있으니 / 나는 내 육체의 경계를 빠져나와 / 네 몸으로의 험난한 벼랑을 기어오른다네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94쪽.


'너는 내 안의 오랜 나였구나'라는 구절을 통해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 중에 너도 있음을, 그래서 너를 추구하는 일이 결코 나를 잃는 일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요즘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성적 지향과 몸의 불일치를 이루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운 경우가 있다. 스스로도 버거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인은 이를 '게이 4'라는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게이 4


내 몸이 / 내게 맞지 않다 // 몸에 갇혀 /끙끙거리는 / 나 아닌 / 몸 속에 / 다른 이의  / 애타는 / 목소리. // 덜컹거리는 몸에 실려 / 나의 일생을 떠메고 가는 / 잘못 입은 너의 / 몸의 / 쓸쓸한 뒷모습.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98쪽.


여전히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줄 필요가 있을까? 그가 자신 속에 있는 수많은 나와 너들을 받아들이고 '너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 역시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여러모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 준 채호기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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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혼'.  혼을 부르다. 지금 이 세상을 떠난 존재를 다시 불러오는 일. 


   혼을 다시 부르는 일은 현실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혼이 현실을 인정하고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정희 장시집을 읽으면서, 우리 가락의 우수성을 한 유산으로 활용하고 싶었다(시인 후기. 175쪽)고 말하고 있는데, 굿의 형식으로 쓴 시들이 이 시집에는 많다.


  이렇게 쓴 시들에는 우리 현대사의 사건들이 등장하고, 그 사건들을 통해서 무언가 한을 풀어야 한다는 의식이 개입하고 있다고 보는데...


  시들이 4.19나 6.25 또는 독재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들에서 고정희가 우리들의 한을 풀어주려 했는데...


혼을 부르는 일은 단지 혼이 이곳에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혼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혼이 해결하지 못했던 응어리를 풀어주려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초혼'이라 함은 개인의 한이나 사회의 한을 푸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쉬쉬하고 감춰진 일들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 또한 '초혼'에 해당할 수도 있겠다.


이 시집에 실린 시 한 구절... 이 구절을 읽으면서 2017년 3월과 2022년 3월을 떠올렸으니... 이런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혼을 제대로 부르지 못했나 하는 생각도 드니... 그게 아니어야 하는데.                                                        


 '천구백칠십*년 시월 그날을 / 우리는 '한얼'의 종지부라 적어두자 ' 천구백칠십*년 시월 그날을 / 우리는 한민족의 꿈이라 불러두자 / 천구백팔십년 모월 모일을 / 우리는 우리들의 죽음이라 전해주자' (고정희, '그 가을 추도회' 중에서 76쪽) 



몇 년 뒤 다시 혼을 부르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 혼들이 다시 오지 않게 이 사회가 명징해져야 하는데...


오래 된 시집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혼을, 신을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앞앞이 기원축수 받고 내리소서 / 앞뒤 가리지 말고 내리소서 /가타부타 하지 말고 내리소서 / 한반도 이땅에 절로 깊은 이들에로 내리소서 / 한반도 이땅에 절로 닫힌 문앞으로 내리소서 / 한반도 이땅에 절로 나는 탄식소리 / 한반도 이땅에 절로 오는 생이별 / 단번에 쫓으시려 내리소서 내리소서 / 기왕지사 인연맺은 아땅이기로서니 / 이번에 한번만 내리시기만 하면 /석삼년 병든 전답 옥답으로 일구고 / 석삼년 풍년들게 하겠나이다 / 석삼년 풍어제 바치겠나이다 / 석삼년 태평성대 바치겠나이다 / 막힌 물꼬 터주고 / 닫힌 항로 길을 내어 / 강줄기 바다가슴 어디서나 만나서 /수천대 이을 후손 기르게 하겠나이다 / 민주통일 후손 낳게 하겠나이다' (고정희, '그 가을 추도회' 중에서 90-91쪽) 


이렇게 다시 부르지 않도록... 이미 이루어지도록...그렇게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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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내용도 간명하다. 분명하다. 할 말을 에둘러 하지 않고 하고 있다.


  시를 읽으면서 시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1부에서 생각하게 한다면, 2부와 3부에서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 현대사를 통해 일어났던 일들. 부끄러웠던 일들을, 권력자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그 권력을 비판하는 관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내용은 짧지만 서사가 있다. 쌍용자동차 파업에 대해서도,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에 대해서도, 세월호에 대해서도, 그리고 소위 폴리페서라고 하는 권력을 추구하는 지식인 집단들에 대해서도, 이 시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서정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지만, 아니다. 서정이 어디 개인의 감정을 노래하는 데서 그치겠는가. 서정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느끼는 마음을 밖으로 표현한 것 아니겠는가. 


함께 느낌. 함께 생각해 봄. 이 시집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사회와 동떨어져 살 수 없는 인간이라면 사회 속에서 삶을 잘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시를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공명을 얻기 위해서 아니던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일. 


가령 이런 표현이 있다. '땅에 깃들지 못한 자 / 오욕의 삶을 등에 메고 하늘로 오른다 // 디딜 땅이 없는 자 / 비바람 피할 길 없는 굴뚝에 둥지를 튼다'('굴뚝' 1, 2연. 68쪽)


사람이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땅, 그러나 떠밀려 하늘로 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들의 소리를 알리기 위해서. 그들이 그곳에서 내려오는 일. 결코 쉽지 않다. 그들의 소리를 듣는 일. 저 위에 있는 권력자들은 하지 않는다.


소리는 땅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그들의 몸이 다시 땅으로 내려오면 권력자들은 그들을 가둔다. 그렇게 사람들의 소리를 가두려 한다. 


하지만 가둘 수 없다. 눈귀가 밝고 결코 입을 다물 수 없는 시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채형복의 이 시집처럼 말이다.


지금, 말을 가두려는 집단이 있다. 말을 가두겠다는 오만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말을 가둘 수 없음을 알텐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으니... 앞으로 시인들, 더 바빠지겠다.


갇히려는 말들을 구출해야 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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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gial 2023-10-20 14: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대를 반영하는 시인이군요.
68쪽 구절은 마치 80년대의 시구 같습니다.
역사계에서 지금을 분서갱유라 비판하는 글을 봤습니다. ( https://m.khan.co.kr/article/202310182010025 )
서늘한 때입니다.

kinye91 2023-10-20 14:49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역사가 반복이 되면 안 되는데... 서늘한 때 맞습니다.

그레이스 2023-10-22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 제목이!!!

kinye91 2023-10-23 15:39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었어요. 시집 앞부분이 시와 시인에 대한 시들인데, 그 중 한 구절이더라고요. 제목도 서늘해요.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