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주제로 편집되어 있지 않다. 여러 주제가 동시에 실려 있다. 그런 다양성의 동시성이 누구나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한다.


 징글징글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 세상의 그 삭막함에 치를 떠는 사람에게는 '귀여움'이라는 주제가 마음을 다독거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귀여움이 얼마나 많은지, 어느 순간 귀여움을 만나게 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무장해제되는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귀여움이 도처에 있음을, 귀여움을 우리가 눈에 담을 수 있음을 이번 호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세상이 너무 거칠다고 여긴다면 이번 호에서 귀여움 부분을 읽어보시길!


케이팝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번 호는 좋다. 케이팝을 즐기는 사람들이 전세계로 뻗어가는 케이팝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떤 노력을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단지 케이팝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 케이팝이 우리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모임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으니, 이 글도 좋고.


반려동물의 사회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반려동물이 많아졌는데... 그럼에도 늘어나는 반려동물에 비해 버려지는 반려동물도 많다는 사실.


그러한 버려진 반려동물들이 다시 사람들과 어울리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개도 이번 호에 있다.


굳이 해러웨이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제는 여러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친족사회가 되어가고 있으니, 혹 반려동물에 관심이 있다면 이번 호 커버스토리에 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좋다.


여기에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노숙인들에 대한 이야기, 빅판에 대한 이야기 등등.


2월을 맞이하여 합본호로 나온 이번 호에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자신이 관심 갖고 있는 분야의 글을 찾아 읽으면 좋을 이번 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동엽 50주기 기념 신동엽문학상 역대 수상자 신작시집'이다. 2019년에 발간되었다. 그렇다면 신동엽 시인은 1969년에 돌아가셨단 말인데...


  강산이 다섯 번이 바뀌었을 시간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신동엽은 소중한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의 시도 가끔 인용이 되고, 예전에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시가 실려 있었는데...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주로 '통일'을 바라는 시였다. '봄은'이라는 시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가 있었고... 그렇게 그는 남북이 통일되기를, 남북이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를 회복해서 함께 지내기를 시를 통해서 표현했다.


  그런데 다섯 번이나 강산이 변했는데, 이놈의 남북관계는 돌고돌아 제자리로 와버렸으니...


더 갈등이 심화되고, 서로를 적이라고 하는 지경이 되어버렸으니, 시인이 알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이라는 시에서 


'총부리 겨누고 있던 /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 // 하더니, 눈 깜빡할 사이 / 물방게처럼 / 한 떼는 서귀포 밖 / 한 떼는 두만강 밖 / 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 / 총칼들 내던져 버리데 // 꽃피는 반도는 / 남에서 북쪽 끝까지 / 완충지대,  / 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이 씻겨가고 // 사랑 뜨는 반도, / 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 / 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 /나부끼데.' (신동엽전집. 창작과비평사. 1985년 3판. 76쪽.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은' 부분)라고 했는데...


그것이 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제밤에 꾼 꿈이었다고 했는데... 그 꿈이 개꿈이 아니라 실현가능한 꿈일 거라고 시인은 믿었을텐데. 그런데, 지금은 어떤지.


신동엽 50주기 기념시집을 읽으면서 신동엽 시인이 꿈꾸던 세상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만 들었으니.


그럼에도 이 기념시집의 제목처럼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희망찰 것이라 믿고 싶다. 시인은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라고 했다. (앞의 책 106쪽-107쪽)


이런 의미에서 이 시집은 의미가 깊다. 시인의 꿈이, 바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신동엽 시인의 시처럼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송경동 시인의 '잊지 못할 여섯 번의 헹가래'라는 시를 읽으며 웃음 속에 슬픔을 느끼게 된다.


남과 북만이 아니라 아직도 제 삶을 제대로 누릴 수 없는 사람이 있음을, 그들이 있음을 잊지 않으려는 시인이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고 있는 시이기 때문이다.


총 21명의 시인들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한편 한편이 모두 귀한 시라 특별히 어느 한 시를 선택해서 인용하기도 힘들다. 그냥 지금 다시 '밤'처럼 어두운 시절, 어둠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다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아니 나아가야 함을 시인들이 보여주고 있음을 이 시집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독다독 2024-02-02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통일이 되면 좋겠지만, 갈수록 어려워보이네요. 통일이 된다해도 대부분 공산국가들과 맞닿고 있어서 오히려 더 혼란스러워질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북한이 없었으면 남한이 이 정도로 안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글을 읽다보니 드네요. ㅎ

kinye91 2024-02-02 17:09   좋아요 1 | URL
통일이 되기까지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겠지요. 통일이 되지 않더라도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월 시문학상 작품집을 읽는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시인. 적어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김소월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데...


  그의 시를 많이는 몰라도 또 '진달래꽃'을 몰라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는 시구를 들으면, 아, 그 시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만큼 김소월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시인을 기리는 문학상도 의미가 있다.


  아마도 시인들에게 김소월 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큰 즐거움이리라.


이 작품집의 수상 소감에서 수상자인 정일근 시인도 그런 식으로 말을 했으니... 서정성. 이것이 우리 마음을 울리기도 하리라. 김소월의 서정성이 지금까지도 우리 마음을 울리듯이, 김소월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도 계속해서 우리들 마음을 울리리라는 생각을 한다.


이번 수상작은 정일근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이다. 둥글다는 표현과 두레라는 말, 그리고 밥상이라는 말이 모두 모여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다.


모나지 않았음은, 다른 존재를 밀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래서 둥근이라는 말에서는 보름달을 연상하기도 하고, 또 보름달 중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한가위(추석)의 달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한가위의 보름달... 풍요롭고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만족을 전해주는 달 아닌가. 여기에 두레라고 하면 홀로가 아닌 함께라는 의미가 있으니, '혼밥'이 대세인 요즘과 달리 '함께하는 밥'이라는 의미로 '두레밥상'이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식구(食口)라는 말 자체가 밥을 함께 먹는 존재들이라는 의미니, 두레밥상에는 이미 식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가족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확장된 가족이 바로 식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식구들이 모여 함께 먹는 밥상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너 잘났니, 나 잘났니 싸울 필요가 없다. 


그냥 따스한 밥 한 끼 함께 먹으면 된다. 그렇게 모여 함께 먹는 밥, 함께 모이는 밥상은 둥글 수밖에 없다. 두레밥상이 둥근 까닭이 여기에 있겠다.


서로의 모난 점들을 서로 보듬어주어서 둥글게 둥글게 만드는 두레밥상. 시인이 꿈꾸던 두레밥상이 벌써 20년이 지났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두레밥상'은 의미가 있다. 우리 마음을, 몸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시를 읽으며 마음을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 듯이 그냥 내어주면 된다. 그러면 된다. 더 말이 필요없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2004년도 제18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03년 초판.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15-1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편집자의 말 제목이 '수취인 불명'이다. 누가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수취인 불명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누구나 받아서 보라는 얘기가 된다.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말은 거꾸로 하면 누구도 받지 않을 수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이러니 수취인 불명은 참 어려운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특정해서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힘들 때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고 그냥 말한다.


  그 누군가가 글을 읽는 당신이기를 바라면서... 읽는 사람들이 건네고 싶은 말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수취인 불명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다.


빅이슈 이번 호를 읽으면서는 이런 수취인 불명이라는 말과 벽이라는 말을 연결짓게 된다. 벽, 담장, 장벽 등... 남과 나를 가르는 존재. 그것이 바로 벽이다. 그리고 내가 벽을 느끼면 수취인을 명시하지 않게 된다.


그냥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달을 한다.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당신이라고 지칭하지는 않겠다. 다만,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수취인 불명이라고 하지만 그건 당신과 나 사이에 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발 그 벽을 허물어달라는 말이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동물권행동 카라 조현정 정책기힉팀장'의 인터뷰 글과 '승리일 수 없는 승리'라는 글, '산양 집 빼앗고 15분 만에 설악산 정상 정복하고 싶어?'라는 글과 '우리, 오프라인에서 더 많이 만나자'라는 글을 읽으면서 이들이 말하는 대상이 바로 수취인불명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딱히 누구라고 꼭 집어 말할 수가 없다. 다들 욕망을 지닌 인간들이고,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나 말고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나만큼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존중할 때 벽은 허물어지지 않을까 하는데...


이렇게 벽을 허물기까지 수취인 불명으로 계속 말을 걸어야 한다. 수취인이 정해지면 그 수취인이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하면서 벽을 더 두텁게 쌓을 수 있으니...


결국 내 말을 듣는 사람을 특정한다는 것은 그 존재와 나 사이에 신뢰관계가 쌓였다는 뜻, 또는 적어도 내 말을 말로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일테니.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상대의 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귀는 있으나 들을 귀는 없다. 들을 귀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노여워하는 귀만 있다. 내 귀에 거슬리는 말은 듣지 않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말을 못 하게 막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들, 수취인 불명으로 말들을 할 수밖에 없다. 수취인 불명이 아니라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도 자연스레 할 수 있는 관계, 이는 자꾸 만나야 한다. 만나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벽이 점점 얇아진다.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예전 같으면 오해로 갈등이 커질 문제들이 대화로 해결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된다. 그래야만 한다. 예전에 철의 장막(구 소련), 죽의 장막(중국)이라는 말이 있었다. 여기에 인의 장막이라고 가장 무서운 장막은 사람들이 가로막는 벽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인의 장막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자신이 마음에 쌓은 마음의 벽(마음의 장막, 심의 장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에 장벽이 쌓이면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냥 내 맘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만 곁에 두게 된다. 그러니 편견은 확증이 되고, 그 확증은 상대를 배척하는 근거로 활용이 된다. 


이런 마음의 장벽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국 말은 수취인 불명으로 닿을 수밖에 없다. 그가 그런 말들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때 마음의 장벽이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그가 들을 수밖에 없도록 더욱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다. 말을 걸어야 한다. 이때 하는 말들이 수취인 불명으로 말해지게 된다.


하, 수취인 불명이라니...개인 신상이 몇 분이면 다 털리는 세상에서... 이 말이 슬프게 들리지 않으려면 누구나 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바꿔야 하겠지.


이렇게 [빅이슈]가 누군가에게 건넨 말. 수취인 불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수취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에게 들을 귀를 만들어주는 잡지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해에는 희망을 노래하자'라고 하려다가, 희망보다는 행복이라는 말을 쓰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그래서 현재에는 없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인데, 현재에 없는 것을 바라다가 자칫 현재에 있는 것을 놓치는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바로 지금-여기에서 내게 있는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일이 행복일 수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직 오지 않았을지라도 나는 그것이 오기를 기대하는 지금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해에는 행복을 노래했으면 좋겠다. 모두들... 빅이슈 새해 첫호를 읽으면서 여성 홈리스들에 관한 이야기. 그들에게 미래의 희망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행복이 중요함을 생각하게 됐다.


자립하기 위해서 자격증을 따는 일. 그 일을 하면서 홈리스들도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 빅이슈 판매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주거 독립을 위해서(많은 빅판들이) 빅판을 하고 있지만, 빅이슈 판매원 일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사실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다. 먼 미래의 대학을 위해서 초,중,고등학교를 희생하라고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초,중,고등학교 생활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


빅이슈가 그런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아주고 있는 것 또한 ('청소년의 사치생활'이라고 하여, 오디세이 학교'를 다닌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러한 행복을 누리는 모습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나의 행복이 남들의 행복으로 퍼져나가게 해야 한다. 그래서 새해에는 우리가 행복을 노래했으면 좋겠다. 행복한 마음에 노래가 마음 속에서부터 절로 나오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희망과 행복, 그것은 이번호에 실린 '슬기로운 문화생활'이란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비움과 채움의 미학'인지도 모른다.


희망은 아직 비어있음을 인식하고 그 비움을 채움으로 바꾸려는 기대라면, 행복은 비움이 채움이 되어 있는 상태, 또는 비움 자체를 채우는 과정이나 기대에서 오는 또다른 채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비움과 채움의 공존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빅이슈]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비움과 채움이 적절히 어울리는 삶을 사는 새해였으면 한다.


적어도 내게는 [빅이슈]를 읽는 순간만은 비움이 채움으로 전환되는 행복한 시간이었으니... 누구나 이런 행복을 지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