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가족이라는 말이 광고에 쓰이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진짜 가족처럼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라는 말을 이용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말로 그 사람에게 희생을 요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은 조금 희생을 해도 그것이 가족이니까 하고 넘어가지 않나 하는 생각.


지나친 생각이다. 가족을 그렇게 이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믿고 싶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이 포용보다는 배제를 전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에, 이때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 가족이라는 개념이, 그러니까 무조건 함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한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말은 나쁠 수가 없다. 빅이슈 이번 호를 보면 표지에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말이 있다.


이때 '가족'은 다름을 인정하되 함께하는, 즉 함께한다고 해서 모두 똑같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솔직히 가족 구성원들도 같지 않다. 다 다르지 않나, 그러니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살고 있지 않나. 똑같을 수 없는 존재, 그런 존재들이 이 지구에 모여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가족처럼 여긴다면 누가 누구를 배제하고, 또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 그런 세상은 아니겠지.


그래서 가족이라는 말에 좋은 감정과 좋지 않은 감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데, 역시 말이란 어떤 맥락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 이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가족이라는 말이 지닌 양가 감정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사실 많이 다르다. 이 젊은 정치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정치를 싫어하지는 말되 정치인을 싫어하자고 말하고 싶다.'('정치는 당신의 삶에 관심이 있다'중에서 120쪽)


정치인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으련다. 다만, 그가 한 말. 그렇다. 정치는 우리의 생활이다. 하여 정치를 싫어하면 안 된다. 다만, 정치인은 싫어해도 된다. 어떤 정치인? 제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 정치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나서는 정치인, 정작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는 정치인. 말만 앞세우는 정치인. 내 편 네 편을 갈라, 우리가 남이가를 몸소 실천하는 정치인, 혐오 표현을 혐오 표현인지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아니라고 우기는) 내뱉는 정치인 등등. 그런 정치인은 싫어해야 한다. 아니, 싫어해야 하는 것을 넘어서 그런 정치인이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가족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지 않을까 싶다. '가족'이라는 말이 서로에게 힘을 주는 쪽으로 쓰이는 그런 말이 될 수 있는 사회, 어쩌면 [빅이슈]가 추구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가 아닐까 한다.


내가 읽는 [빅이슈] 335호는 아래 사진과 같은 표지였는데, 검색해보면 다른 표지 모델이 나온다. 두 표지가 함께나온 듯. 그렇지만 내가 본 책의 표지가 이것이고, 여기에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말이 있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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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목표가 있다. 주소가 있으니,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는 셈. 하지만 그 주소는 낯설다. 처음 가보는 곳이다.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른다. 그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안내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은 아직 오지 않았다.


 나는 이만큼 떠나왔는데, 주소지에는 도착하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은 그 자리에 멈춰야 한다. 그리고 살펴야 한다. 내가 떠나온 곳을 뒤돌아보고, 내가 가야 할 주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주소로 어떻게 가야할지를 생각하고. 함께 갈 사람을 기다리면 된다.


  그 사람이 안 오면? 안 와도 나는 갈 수 있다. 시간이 더 걸리고, 좀더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뿐. 왜냐하면 내게는 주소가 있기 때문이다. 주소는 목표다. 지향점이다. 


하여 지향점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있다는 것은 안다. 있음을 알기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그러니 이 주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꼭 쥐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주소를 모르는 일처럼 황망한 것은 없다. 아예 주소를 모르면 출발도 하지 않는다. 분명 주소를 알고 출발했는데, 도중에 주소를 잃어버렸다. 잊어버렸다가 아니라 잃어버렸다. 목표의 상실이다. 그러면 나는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 하지 못한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누군가가 올 것이다. 나를 그 주소로 데려다 줄, 그러한 믿음이 있다면 기다린다. 시간이 걸릴지라도. 그러한 기다림 속에서 많은 생각들이 오가기는 하겠지만, 주소를 쥔 손을 펼쳐 주소를 버리지 않으면, 내게는 희망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한다. 이때 주소는 희망, 목표다. 그리고 나는 과거로부터 여기까지 와서, 내가 앞으로 갈 주소를 확인한다. 또 기다린다. 홀로 가지 않고 함께 가기 위해서.


윤은성 시집에 실린 '주소를 쥐고'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주소를 쥐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은 희망이 있다고. 그것이 우리를 버티게 해준다고. 지금까지 떠나왔던 곳에서 희망의 다른 곳으로 우리를 갈 수 있게 해준다고. 아니 힘든 이곳의 상황을 버티게 해준다고.


주소를 쥐고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제는 기다리면 되니까. 하차한 바로 그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사람들은 지나간다. 마주할 일이 있다고 하면 겁을 먹기도 하면서. 더 많은 노력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 견주면서. 거대한 밤과 통로.


  폭죽을 떠뜨리고 싶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지 상관이 없다는 게 어떤 선을 그어대도 괜찮다는 뜻인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 안내견과 그의 주인이 지나가고 동행인의 옷깃을 쥔 노인이 천천히 지하도로 사라지고.


  멀다.


  나는 계속 기다린다. "왔구나"라는 말을 대신할 말을 찾으면서. 보이지 않게 된 사람들이 다시 나타나는지 건너편 플랫폼을 살피기도 하면서.


  겨울을 여기서 맞는다면 커다란 커튼을 살 것이다. 창을 다 덮고도 바닥까지 늘어뜨려지는. 닦거나 감싸거나 누군가 잠시 숨겨줄 수도 있는.


  왔구나

  왔구나


  손을 쥐었다 펼쳐본다. 한번 죽어본 사람처럼 여기도 새가 산다. 여기도 새가 살고. 밤이 되면 어둡다.


  가방을 끌어안고 벽에 기대 조는 아이.

  아이와 인사를 주고받고 싶다.


윤은성, 주소를 쥐고. 문학과지성사. 2024 초판 5쇄. 2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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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삶이다.


어려웠던 시기를 거쳐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탄핵.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 왜 탄핵이 되었는지, 탄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 하나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그동안 지체되었던 개혁을 해나가는 일이다.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법 조항들은 개정해야 하고,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들은 미래를 향해서 고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치 자신들은 아닌 양 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국민을 대변하라고 있는 정당, 정당의 목적이 집권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정책은 바로 국민의 바람이다. 국민의 바람을 실현하지 못하는 정당은 정당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정당은 공당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좌지우지하는 정당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게 해야 한다. 큰 소리로, 더 강하게.


[삶이보이는창]은 그러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들의 목소리가 정치권에까지 가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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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으며 뭐야, 이거? 시들이 왜 이렇게 길어? 그리고 무슨 주가 이렇게 많아. 논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가 사실이냐 하면 아니다. 주는 시인이 창작한 내용일 뿐이다.


  그런데 이 주가 시의 내용을 또 말해준다. 그래서 주를 안 읽을 수가 없다. 여기에 등장인물들, 시에서 등장인물을 따지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낯설다. 외국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한 나라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나라의 사람이 등장한다. 이름이 낯설기만 하니까.


  이 낯선 인물들이 지구에 사는 인간을 대표한다면, 다양한 인물들은 결국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인간들을 의미하고, 이들이 아무리 다른 척을 한다고 하지만 멀리서 보면 지구에 사는 생물, 즉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는 생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생물들이 자기만이 최고인 양 다른 생물들을 무시하는 모습, 지금 이것이 바로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 아닌가. 그러한 인간들이 계속 이런 갈등을 지속하다 보면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는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겠지. 지구는 분명 그때까지도, 아마도 거대한 핵폭발로 지구 자체를 날려버리지 않는 한, 태양이 폭발할 때까지 존속할 것이다. 이 시집에 나오는 지구는 그렇다. 인간은 멸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시들에 나오는 연도가 2444년이든지, 2888년이다. 왜 이런 년도를 쓰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그냥 농담식으로 말장난을 해보면 444는 죽어죽어죽어가 되니, 인류의 멸망이 일어나는 해라고 할 수 있고, 888은 팔팔하다라고 할 수 있으니, 지구를 벗어나 저 멀리 우주에서 계속 살아가는 인류의 후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2888년에 먼 우주에서 지구로 통신을 보내도 지구에서는 어떤 답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 왜냐하면 인류는 멸종되었으니까. 그런 내용으로 시집이 전개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로베르토 볼라뇨가 쓴 소설 [2666]이 연상되기도 했다. 완전히 다른 내용이지만 숫자의 겹침이 그러한 연상을 유발한 것인지도 모르고, 이 시집에서 반복되는 내용들이 [2666]에서 반복되는 수많은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장과 거울의 방'(50-53쪽)에 보면 육십팔각형의 거울 방이 나온다. 육십팔각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육십팔각형 거울의 방은 나를 육십팔 개로 비춰준다. 내가 육십구 명이 있는 셈. 그런데 그 육십구 명이 같은 사람일까? 모두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모두 다르다. 각도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비슷비슷한 삶을 살 수는 있지만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다.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지막 부분에 이 거울의 방에서 나온 화가와 거장이 (거장은 시인이다) 서로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술은 이 비슷함에서 탈출해야 하는 것이라고, 예술가들은 서로에게 그러한 자극을 주어야 한다고. '문 앞에서 화가는 거장의 따귀를 때렸다 거장도 화가의 따귀를 때려주었다' ('거장과 거울의 방' 중에서. 53쪽)고 하고 있으니... '때렸다'와 그것에서 깨우친 사람이 다시 되돌려주는 행위가 '때려주었다'라는 표현이니.


이러한 자각은 우리를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고, 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면 아주 작은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곳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이곳에서 비슷하게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견뎌내지 못한다면, 그 비슷함 속에서 서로의 독창성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기계마저도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 기계에 인간성을 부여하려는 인간의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다양성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단일성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는데,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엇비슷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편 한 편의 시가 다 독특한 자신만의 내용을 지니고 있으니,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육십팔각형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하나로만 여기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육십팔개의 모습은 모두 다른 모습이다. 여기에 비춰지는 존재인 나까지 육십구 명은 모두 다르다. 그렇게 우리 삶도 모두 다른 삶들이다. 다른 삶이긴 하지만 또한 비슷한 삶이기도 하다. 그러한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굳이 지구에서 다른 존재들을 무시하고 또 나의 삶과 똑같은 삶으로 끌어들이려 할 필요가 있을까?


제목이 된 '아이들 타임'(16-21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미래의 시간에 살고 /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 ... 너의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될까' ('아이들 타임' 중에서.  20쪽, 21쪽)


자기만의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되는 아이를 바라는 것. 그런 사회, 그런 지구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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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5-05-18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존 밴빌의 ‘오래된 빛‘을 읽고 있어요.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 이 대목이 절묘하게 서로 스치네요~~시와 소설의 교차라...멋집니다!

kinye91 2025-05-18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작품들은 서로 통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시인이 표현한 문장 중에 슬픈, 너무도 슬픈,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어찌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무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현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면서, 이런 현실이라면 이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현실이 아직도 그렇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문장들이 화살이 되어 와 박힌다. 이들의 삶이 이런데 도대체 왜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령 '감정노동자'라는 시를 보면 '빨리 지옥을 빠져나가리라 / 이 지옥을 빠져나가자, 나가자, 나가자……'('감정노동자' 중에서. 16쪽) 하지만, 지옥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눈이 없는 길로 내몰리는 샌드백'(앞의 시 중에서)이 되어 '사자, 순식간에 튀어나와 / 육중한 발바닥으로 샌드백을 후려친다 / 갈기갈기 물어뜯는다 / 샌드백, 주저앉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흔들리다' (앞의 시 중에서)는 표현처럼 그렇게 당하고 산다.


이것이 어디 감정노동자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강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또는 그들은 폭력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내뱉는 말들, 행동들)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 아닌가.


약강강약(弱强强弱). 강자에게는 끽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약자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 아닌가.


그러니 이 시는 너무도 슬프게 다가온다. 벗어나야 하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의 풍경이라니... 정말, 이 시에 표현된 내용이 사실일까 의문이 든다면, 한승태가 쓴 [어떤 동사의 멸종]'을 읽어보라. 작가가 직접 경험한 콜센터 직원의 일상이 드러나 있으니까. 그러한 감정노동자들의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아무리 대화를 녹음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이런 어른들의 폭력이 아이들에게까지 번져나간다면 그 사회가 과연 가능성이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모범이 되는 어른이 있는 사회, 그런 어른이 많은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일지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이 시집을 읽다가 섬뜩한 마음에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가 있는데, 그 시는 바로 '병아리'다. 병아리, 얼마나 귀여운가? 그 자체로 여리고 귀여운 생명체인데, 병아리를 대하는 아이의 모습, 이런 아이가 없다고 믿고 싶지만, 어쩌면 폭력에 무감한 사회는 이런 아이들을 키워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연신 병아리를 조몰락대던 아이 / 느닷없이 테니스공처럼 병아리를 벽에 내던졌다/ ... /하얀 백지처럼 웃으며 / 아이는 연거푸 허공에 공을 던지고 / ... /비틀거리던 몸, 안도의 숨 내쉴 때 / 아이의 손 다시 / 상자 안으로 쑥, 들어갔다'('병아리' 중에서. 59-60쪽)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까? 일어나지 않겠지.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지. 그럼에도 시인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서 약자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경고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사는 샌드백이나 병아리 같은 존재들이 이 사회에 있다고, 그것을 못 본 체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눈 감고 살지 말라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시인은 그런 사회를 바라고 있기에 이렇게 우리가 보여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어른이 주목받고 있는 우리 사회다. 그냥 나이 먹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답게 살아가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어른 노릇을 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대다. 잘못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약한 사람들을 '샌드백이나 병아리'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이 시집을 통해 시인은 우리 사회의 좋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 그것을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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