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어쩌면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들뿐이라는 사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과연 나에게 보이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내게 보이지 않는 면이 분명 있을텐데, 나는 그 보이지 않는 면을 보려고 노력했던가?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가짜뉴스는 사라진다. 빅이슈에서 가짜뉴스를 다뤘는데, 가짜뉴스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진실은 그만큼 단순하다. 너무 어렵게 진실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그 단순함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데는 꽤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에겐 가혹하게, 타인에겐 관대하게, 그리고 잘못한 것이 생긴다면 인정하고 사과할 것'(17쪽. 오후, '가짜뉴스 속에서 일단 대충 살아남기' 중에서)


참 단순하다. 그런데 참 어렵다. 자신에게 가혹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옛 성현의 말도 실천하기 힘든데,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나를 가혹하게 대하는 일... 남을 관대하게 대하는 일.


이런 자세만 지니고 있어도 지금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망사고는 막을 수 있다.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데, 그 노동으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는 일이 빈번하다니...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어떤 환경인지 꼼꼼하게 챙기는 사업주, 관리자들이 얼마나 될까? 이윤보다도 노동자의 안전을 생각하는 경영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내는 이윤이 어디서 오는지, 노동이 없으면 이윤도 없음을 잘 알고 있을텐데...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가혹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권의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가 떨어지거나 끼이거나 절단되거나 또는 서서히 몸 속에 스며드는 독으로 인해 죽는 경우가 많은데, 사과, 진정성 있는 사과가 이루어진 적이 있던가. 그때그때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형식적인 사과만 있지 않았나.


그러니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하긴 자신이 한 말을 기억도 하지 못해 사과조차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게 된다. 그 이면에 가려져 있는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빅이슈 이번호에는 그런 보이지 않던 면들이 실려 있다. 그런 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동물영화제 소개를 통해서 동물들의 삶을 생각하게 하고, 영화를 통해서 특성화고를 나오고 취업을 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유의 비극은 단 하나의 명징한 이유로 발생하지 않는다. 겹겹의, 연쇄의 원인 그 속에서 침묵한 입과 방관한 눈 속에서 오랜 시간 꾸준히 퇴적돼온 결과다. 열하홉 살 외주업체 노동자의 죽음, 현장실습 고교생의 죽음,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뉴스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30쪽. 정지혜, '우연을 기다리는 유연함으로' 중에서)


영화 <다음 소희>에 대한 글에서 나오는 말이다. 소희란 주인공이 겪는 일들을 그린 영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그런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한다. 


이 글에서처럼 사고는 정말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때마다 사과, 사과... 그러나 그 사과가 잘못을 바로잡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지... 오히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가혹한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한다.


계속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으로... 그래서 정문정이 이번 호에 쓴 '내가 아는 세상이 평균이 아니니까'라는 글에서 한 말을 곱씹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것이 상대에게도 통할까? 아닐 수 있음을...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면 가짜뉴스부터 시작해서 타인에게 가혹한 그런 환경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은 복잡한 일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간단하고 단순한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시 명심하자. 나에게는 가혹하게, 타인에게는 관대하게, 그리고 잘못은 진심을 다해서 사과하기.


빅이슈 이번 호, 내 태도를 돌아보게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내게 보여준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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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 읽다가 불현듯 박완서의 '도둑맞은 가난'이 생각났다. 상황은 좀 다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방송에서 보는 가난은 가난을 치장한, 보여주기식 가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


  방송에 나오는 가난은 이상하게도 가난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가난의 냄새를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지만, 봉준호 영화 '기생충'에서 냄새로 인해서 극명하게 갈린 빈부 차이를 느끼게 하는 그런 냄새.


  이들은 아무리 행복하게 지내도 가난의 냄새를 없애지 못한다. 몸에 배인 그 냄새는 향수로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기생충'에서도 사실 가난의 냄새는 절실하지 않다.


반지하에 사는 그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행복이다. 그들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서도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다만, 집이 침수되고 물건들이 못 쓰게 되었을 뿐, 그들은 가난에도 행복의 냄새를 풀풀 풍긴다.


가족들이 풍기는 그런 행복의 냄새. 과연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 그럴까? 그런 집도 있다. 물질이, 돈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으로 인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가족을 불행으로 이끄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가난의 냄새는 행복의 냄새로 덮어지지 않는다. 행복의 냄새를 가난의 냄새가 압도한다. 그리고 처절하다. 처절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더 처절하기도 하다. 


박완서 소설에서는 부자들이 가난을 체험한다고,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을 빼앗아간다고 나와 있지만 (부자들이 가난을 탐내리라고는 꿈에도 못 생각해 본 일이었다. 그들의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안 차 가난까지를 훔쳐다가 그들의 다채로운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에피소드로 삼고 싶어 한다는 건 미처 몰랐다. 나는 우리가 부자한테 모든 것을 빼앗겼을 때도 느껴보지 못한 깜깜한 절망을 가난을 도둑맞고 나서 비로소 느꼈다. 박완서, 틀린맞춤법으로 읽는 도둑맞은 가난, 알라딘 비매품, 75쪽.)


이 구절을 생각나게 한 글이 바로 박현주 글 '가난이 드러날 때 감춰지는 것들'이다. 이 글 마지막 부분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렇게 진짜 가난은 뒤로 더 물러나고 숨겨진다. 나는 드라마가 그려내는 건 대체 어떤 가난인가 생각하게 된다.(16쪽)'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가난한 집이 가난하지 않다. 물론 가난을 상대적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드라마에 나오는 반지하 생활과 실제 반지하 생활은 하늘과 땅 차이다.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경민, 누군가의 기억 속에 살아 았을 을지로의 풍경들.32-37쪽)과도 다르다. 


그러니 이번 호에 실린 지수의 글 '반지하 SOS 재난에 잠기지 않는 집에 살 권리'에서 말하고 있는 '개발주의를 내세우며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이 존재할 자리를 없애버리는 지금, 불평등이 곧 재난임을 잊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재난에 잠기지 않는 집에 살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가 필요하다. 집은 인권이다. 주거권은 생명이다. (57쪽)'는 말이 가슴에 더 와닿는다.


가난은 포장될 수 없다. 방송에 나오는 가난이 아쉬운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처절한 가난, 이는 화면으로 보여주기 힘들다. 그렇더라도 가난을 덮는 그런 가난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삶, 거기서 겪는 어려움, 그 어려움으로 인해서 가족들이 힘들어하는 모습, 그럼에도 정말,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모습... 


어쩌면 영화 '똥파리'에 나온 가족의 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하는 생각. 이 영화에서 가난은 정말 지지리도 가난한, 그런 가난의 냄새, 불행의 냄새가 스멀스멀 나오는데,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잘 나타나고 있으니... 그런 영화, 드라마를 방송에서 보고 싶단 생각.


이번 호를 읽으면서 그래서 반지하를 주거공간으로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말이 공허한 울림으로, 그들을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니...


집, 홈리스, 빅이슈. 그리고 사회의 책임. 국가의 책임. 나라도 가난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 이제는 사라져야 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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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부고(訃告)


  세상에, 시집 제목이 '죽마고우'인데 시인은 첫장부터 죽음을 이야기한다.


  삶과 죽음이 함께 간다고, 죽음을 잊지 말라고(메멘토 모리)하지만, 죽음이 삶의 친구라니. 그것도 오랜 친구.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죽음은 도처에 있다. 삶이 시작된 순간부터 죽음은 삶과 함께 한다. 어찌 죽마고우가 아니랴.


  이 친구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더욱 풍성해진다. 제대로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죽음을 없는 것으로 여기지 말고, 또 감추려고 하지도 말고, 함께 하는 친구로 생각하자.


시를 읽으면서 요즘 하나 둘 날아오는 부고를 생각했다. 어느 순간, 죽음은 이렇게 가까이 와 있구나. 부고 하나하나에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삶에서 죽음으로 건너간 사람들 이야기.


죽마고우


젊었을 때는 곁에 말 걸 상대라도 없으면 / 세상 혼자 떨어져 사는 거 같아 싫었다.

그것보다는 늙으면 더 외롭다 하는데 / 딱히 그렇지는 않다.

늘 곁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 / 둘러보니 없긴 없는데 있는 것 같다.

가만히 보니 죽음이다. / 당연히 죽음이 날 데려 갈 테니'

외톨이로 살아 고독하여도 두렵지 않다. / 왜 그런가 생가해보니 미리미리

죽마고우처럼 /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다.

사람이니까 죽음도 죽마고우라 부른다.


강우식, 죽마고우. 리토피아. 2022년. 83쪽.






둘. 술


시인은 시도 죽마고우라고 했다. 시인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다. 평생을 시와 함께 했으니, 죽음과 시는 시인에게 죽마고우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 술이다.


술술 넘어가서 술인지, 자신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존재. 죽음이 영원한 망각의 세계로 사람을 이끈다면, 술은 잠깐 동안 망각의 세계로 이끈다.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그러나 때로는 기억을 하지 못하는, 죽음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듯이, 술 또한 기억을 지워버리기도 한다.


그러면 안 되는데, 절제가 되어야 하는데, 달리 알콜 중독이란 말이 나왔겠는가. 하지만 중독이 되면 잠시 망각의 세계에 들었던 정신이 지속적으로 이 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중독은 어찌 됐든 좋지 않다. 중독은 이곳과 저곳을 나누고, 저곳에서 다시 이곳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된다.


'술 권하는 사회'라는 현진건 소설. 일제시대 때만 그랬을까. 아니다. 지금도 사회가 술을 권한다. 자꾸 이곳을 잊으라고 한다. 그냥 저곳으로 가라고 한다. 등을 떠미는 사회. 하지만 사회에 등을 떠밀려 술을 마시다보면, 사회도 잊는다.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몸만, 자신의 정신만 축날 뿐이다. 그러니 술을 즐겨도 좋지만, 중독으로 가지는 않게 하자.


사회가 술을 권하면 적당히 마셔주어도 좋지만,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이곳을 잊을 때까지는 마시지 말자.


숙취


어디서 잘못 배운 술인지 모르지만 / 나는 술버릇이 나쁘다.

혼자서는 술을 절대 안 먹지만 / 가까운 친구와 마시는 술에 흥이 오르면

내가 앞장서서 일 배 일 배 부일배가 아니라 / 한 병 한 병 또 한 병이 된다.

내일은 죽어도 좋다며 술을 마신다. / 그리고는 술을 이기지 못한 이튿날은

아이고, 아이고 내가 간다는 영어 같은 / 그 신음 속에 열물 쓴물 단물을 다 토한다.

거기에 어머니인지 어머나인지 / 분간 못하며 찾는 어머니도 반드시 계시다.

그저 지나가길 바랄 뿐 약이 없는 숙취 / 그리고는 좀 원상 복귀되면 

돌본 마누라에게는 미안했는지 / 일평생 못 버리는 거짓말 금주 맹세를 하며

당신 보며 사는 것이 내 유일한 소망인데 / 못보고 죽는 줄 알았다고 입을 뗀다.


강우식, 죽마고우. 리토피아. 2022년. 70쪽.






셋. 기후 위기 또는 기후 재앙


10월이다. 이제는 선선해져야 한다. 계절은 어김없이 제 역할을 하니.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계절이 제 역할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냥 더위를 지속하기도 한다. 9월. 과연 선선해졌던가. 한여름과 같은 더위가 지속된 때도 있었다. 물론 일교차가 생겨, 아침-저녁으로는 살 만했지만, 낮에는 한여름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기후가 이상을 일으키고 있다. 기후가 이상을 일으켜? 


아니지, 사람이 기후를 이상하게 만들었지. 자신들이 만들고 기후 위기라고 한다. 기후 재앙이라고 한다. 고치려고 하지는 않고.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당연히 해야겠지만, 사회가, 나라가, 세계가 함께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데 하지 않는다. 특히 가장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미국.


미국은 기후 위기에 대해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세계 경찰을 자처하면서, 세계 평화를 자신들이 유지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를 다른 지구로 데려가려 하고 있다.


자신들의 생활습관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다른 나라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그냥 지금 그대로 살려고 한다.


그들이 지금 그대로 살면 지구는 다른 지구가 된다. 죽음이 개인을 다른 세계로 데려가고, 술이 잠시동안 다른 세계로 이끌어가지만, 이것은 개인의 문제에 더 가깝다면 기후 위기는, 기후 재앙은 개인이 아니라 가이아라 불리는 지구 전체의 문제가 된다. 지구를 통째로 다른 지구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지구가 살기 힘들다고 몸서리치니 기후 재앙이 일어난다. 이것을 모르쇠하면 안 된다. 하여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해야겠지만, 사회가, 나라가, 전세계가 해야만 할 일을 하게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 시에서 삼한사온이 사라진 것처럼, 우린 다른 지구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살 지구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삼한사온


살면서 실감나게 믿었던 / 말들의 교과서

살면서 입에 달고 다니던 / 말들의 신조

어렸을 적에는 삼한사온이라 / 자주 입에 담았는데…

사라진 옛날이 됐다.


강우식, 죽마고우. 리토피아. 2022년. 61쪽.


덧글


이 시집에는 83편의 시가 실렸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세어 봐도 82편이다. 도대체 어디서 한 편 차이가 날까. 차례를 세어 봐도 82편인데, 작가의 말이 두 편이 있으니, 그것을 합치면 84편이고, 작가의 말을 빼고 여적을 넣으면 83편인데... 여적은 시가 아닌데.


아이들 같은 발상이지만 내 나이가 올해로 여든 셋이다. 시집에 실린 시도 83으로 여기에 맞췄다. (餘谪 112쪽.)

 

숫자를 잘못 세었나 쪽수로 계산해 보았다. 98쪽-15쪽=83쪽+1쪽이니 84쪽이고, 이 중 2부 제목이 2쪽이니 -2쪽을 하면 82쪽. 한 쪽당 시 한편이니, 82편이 맞다. 시인이 실수를 했는지, 출판사에서 한 편의 시를 뺐는지, 아니면 만 나이로 계산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님, 내가 무엇에 홀렸나. 걔속 82편이니... 참.


둘째, 이 시는 특이하게 가나다 순으로 시를 배열했다. 그래서 제목을 알면 시를 찾기 쉽다. 가나다 순이 시 내용이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런 시집을 봤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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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말, 무엇을 덧붙일까... 그래, 빅이슈를 읽고 무엇을 덧붙일까 하는 고민을 한다.


  굳이 무엇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냥 읽으면 되는 잡지 아니던가.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점들을 생각하게 해주니, 그 자체가 이미 내 삶에 덧붙여지고 있는 셈인데...


이번 호에는 직업에 관한 글들이 제법 있단 생가을 했다. 다양한 직업에 대한 소개.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커버스토리는 늘 어떤 직업을 지닌 사람들 이야기니, 더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교 교사의 이야기도 있고, 행사를 기획하는 사람 이야기도 있다.


이런 직업과 더불어 집에 대한 이야기.. 가족에 대한, 소위 정상가족이라는 말이 얼마나 문제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글, 김경서의 '비정상적 빈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자신의 빈곤을 증명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빈곤한데도 호소할 수가 없는, 정상가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왜 그들의 삶에 정상-비정상이라는 말로 덧붙이려고 하는지, 그냥 그들의 삶을 그대로 인정해주면 되는데... 


이런 덧붙임은 쓸모가 없는데, 빅이슈를 통해서 그 점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번 호에서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담은 존재를 소개하고 있는데, 급속도로 디지털화 된 세계에서 예전의 존재들에 대해서 느끼는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글들이다.


아, 나도 그랬었지. 나도 저런 존재들과 함께 했었지...카세트 테이프... 한참 듣다보면 테이프가 늘어져서 소리가 길어지던 그런 테이프에 대한 생각.


한 곡 한 곡을 빈 테이프에 녹음하던 시절에 대한 생각. 테이프에 좋아하는 노래를 녹음해 선물하고 선물을 받던 그때에 대한 추억. 그런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다.


그렇게 다시, 지나온 세계를 생각하고, 지금 사는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고, 좀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빅이슈.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내 삶에 무언가를 더 채워주는 잡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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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신문 토요판에 실린 시. 노회찬. 이 한 시가 이 시집을 불렀다. 그 시를 읽으면서 노회찬이 생각났고, 노회찬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시인이라면 다른 시들도 마음에 들겠단 생각을 했다.


  위로 위로, 위만 보고 가는 그런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라 아래, 밑에 있는 존재들을 살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들 이야기가 시에 있으리라는 믿음.


  시집을 펼쳐서 읽는 순간 그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잘 골랐다는 생각. 시란 이렇게 별 부담없이 자연스럽게 마음으로 들어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집.


  우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고, 무언가를 또는 누구를 칠 수 있을 것 같다고, 분노가 도무지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을 만났다. 이 시집을 읽고 있을 때였다. 마침 '산불은 봄비를 이길 수 없습니다'를 읽고 난 후였다.


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시가 떠올랐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고, 마음에 불이 났구나! 화가 났을 때 열불 난다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시 한 번 들어볼래? 하면서 그냥 읽어 준다. 첫 시행을 읽고 지금 너야. 두 번째 시행을 읽고 지금 네 마음에 불이 났어. 네 번째 다섯 번째 시행을 읽고 그래서 다 태워버렸어. 지금 네가 머리 끝까지 화가 난다고 하는데, 그거와 같아. 온몸이 불덩이로 타버릴 것 같아. 여섯 번째 행을 읽어주면서 마침 옷도 까만 색 옷을 입고 있는 사람에게 봐, 다 타버려서 검게 변했잖아. 근데 어떤 생각이 들지. 


그 생각이 번지면서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하지. 이 시 뒷구절처럼 말이야. 잔뜩 난 화를 가라앉히는 비와 같은 역할. 그것이 바로 한번 더 생각하는 마음이야.


화 난다고 무작정 행동하지 않고 지금 이렇게 앉아서 이 말 저 말 하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고 있잖아. 마음에 비가 내리도록 하는 거야. 그러다 보면 마음이 가라앉지. 이 시는 지금 그런 네 상태와 같다고 봐. 잘 들어 봐.


산불은 봄비를 이길 수 없습니다


홑동백 한 그루 키웠습니다

꽃잎이 불씨였는지 마음이 불씨였는지

이른 봄 소소리바람 타고 산에 오르더니

뒷산 앞산 할 것 없이 굴참 졸참 할 것 없이

개울 건너 언덕길 솔밭까지 다 태웠습니다

하 붉었던 탓인지 숫제 까맣습니다

재로 변한 잿등 아래 넋 잃고 주저앉아

낡은 서럽 꺼내듯 잔불들을 뒤적여 봅니다

마른 땅 마른 바람 메마른 가슴

미워하는 마음이 욕망이었습니다

집착하는 마음이 산불이었습니다

비가 옵니다, 사나흘 잔뜩 흐리고

오갈 데 없는 마음에 봄비가 내립니다

꽃 덤불 그리며 온 산야를 적십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듯

산불은 봄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유진수. 바로 가는 이야기는 없다네. 문학들. 2022년 초판 1쇄. 87쪽.


분노에 차서, 증오에 차서, 미움으로 가득해서는 밝고 희망찬 생활을 할 수 없다. 분노를 분노로 해결하지 않고, 분노를 용서로 해결하는 법. 


산불을 봄비로 이겨내는 법. 그것이 필요함을... 마음이 화로 가득찼을 때, 그 화를 누그러뜨리는 비를 불러올 수 있는 힘.


이것이 바로 마음의 힘이고, 이성의 힘이다. 인간이 지닌 강한 힘은 바로 증오를 증오로 대하지 않고, 비껴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데서 온다.


그렇게 이 시, 어쩌면 분노와 미움이 넘치는 사회에서 사랑과 용서가, 그리고 화해가 필요함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분노와 증오는 결국 나를 갉아먹으니, 내가 살기 위해서도 이 분노와 증오의 불을 꺼뜨릴 봄비를 불러올 수 있어야 한다.


그 사람에게 들려주었듯, 아니 그 사람에게 들려주면서 다시 내게 들려준 이 시. 내게도 봄비가 필요함을. 산불은 봄비를 이길 수 없다는 시 구절. 그렇게 다시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생각하면서, 내 마음에 봄비를 불러오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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