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서 나를 본다. 나는 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바로 수많은 너들 덕분이다.

 

  그런데 가끔 그런 너를 잊을 때가 있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잊는다. 그냥 나만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말하고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러다 너란 존재가 없으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 그때서야 너란 존재는 바로 나임을 깨닫게 된다. 너와 내가 함께 해야 함을 인정하게 된다.

 

  너는 나를 이루는 존재다. 모든 존재다. 내 곁에 있는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존재가 바로 너가 된다.

 

시인은 이런 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주로 나무나 새들과 같은 자연에서 너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사람에게서도 너를 발견한다. 너를 발견하는 일은 바로 나를 찾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나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너를 보는 일이다.

 

제목이 된 시 '상처 있는 나무는 다 아름답다'에서 시인은 나무가 피는 꽃을 상처에서 발견한다.

 

'(중략) 나무는 자신의 몸에서 / 그 꽃이 아름답게 필 수 있도록 / 상처를 내 / 꽃길을 반든다 / 그 처연한 아픔 속에서 / 꽃의 한 생을 위해/ 기꺼이 상처마저 / 넉넉히 받아들이는 걸 보면은 / 상처 있는 나무는 다 아름답다 (생략)' (이 시집 12쪽)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시에서 시인은 결국 나무만이 아닌 사람을 발견한다.

 

'(중략) 상처 하나 없는 사람보다는 /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가 / 아름답습니다 (생략)' (13쪽)

 

이 시에서 상처에 주목할 수도 있지만, '살아온'이라는 말에 더 마음이 간다. 누구나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상처 속에 주저앉는 사람도 많다. 상처를 애써 가리는 사람도 있다. 상처를 부인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가 아름다운 것이다.

 

상처를 안고 살아온 사람, 그 상처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감싸안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름다운 것이다.

 

이렇게 시인은 너를 통해 나를 이야기한다.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가 아름답다는 얘기는 자신도 상처를 받아들이고 살아가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 '동거'에서는 나이들어가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병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겠다는 시인의 다딤이 나온다. 그렇게 상처를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모습, 상처까지도 또다른 너, 나의 일부라는 사실을 시인은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나'에 갇혀 '너'를 보지 못하고, '너'를 생각하지 않고 살아온 적이 많다. 수많은 '너들'이 바로 '나'임을 잊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이 시집을 읽으며 다시 수많은 너들이 나임을 생각한다.

 

'공상'이란 시를 소개한다. 이것이 단지 공상일까? 아니. 너가 바로 나임을 이 시를 통해서 더 생각하게 된다. 이를 상동성이라고 해도 좋겠다.

 

  공상

 

밤나무에

밤꽃이 익어

밤꽃 냄새가 피는 것을 보면은

가끔은

내 은밀한 몸도 익어

밤꽃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은

어쩌면

나와 밤나무의

조상은 같은 것이 아닐까

 

김산, 상처 있는 나무는 다 아름답다. 책만드는집. 2013년. 6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면 그냥 산문이다. 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물의 속성을 좀 바꾸면 시가 될 수 있다.

 

  허만하 시인의 시집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이 주는 충격. 비가 수직으로 서서 죽다니... 그럴 수가 있나? 끝없는 하강. 땅으로 직행. 이것이 죽음인가?

 

  꿋꿋하게 자신을 잃지 않고 떨어지는 비...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 그래서 시가 된다.

 

  이번엔 물이다. 물은 중력의 법칙을 너무도 잘 드러낸다. 낮은 곳으로 한없이 흘러가는 물. 비도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던가.

 

그런데 이번엔 비는 아래로가 아니라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고 했다. 언뜻 보면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물은 중력의 법칙을 거슬러 위로 흐를 수도 있다.

 

물이 위로 흐를 때 생명이 유지된다. 그렇게 생명에의 목마름, 그곳으로 물은 흐른다. 제목 자체가 시가 된다. 이렇게 제목이 된 시는 '육십령재에서 눈을 만나다'이다.  3연에 이 구절이 나온다.

 

  물은 낮은 쪽으로 흐르는 비굴이 아니다. 물은 언제나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거꾸로 서서 흐르는 물은 가혹한 의지意志만으로 한 그루 오리나무처럼 비탈에 서 있다.

 

허만하,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솔. 2002년 초판 2쇄.육십령재에서 눈을 만나다. 3연. 16쪽  

 

삶에의 욕구. 그것으로 향하는 물. 물에서 생명의 운동을 보고 그것을 노래하는 것, 이것이 시다.

 

이 시집에 실린 첫시.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바벨탑 공화국'이라고 일컬어 지는 우리나라, 자꾸자꾸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아만 가는 건물들, 그런 건물들에서 가장 높은 곳, 전망이 좋은 곳. 그러나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어떻게 달동네를 전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달동네는 전망이 좋은 곳이라기보다는 전망이 어두운 곳이다. 생활에 치여 살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 시인은 달동네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라고.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높은 곳은 어둡다. 맑은 별빛이 뜨는 군청색 밤하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골목에서 연탄 냄새가 빠지지 않는 변두리가 있다. 이따금 어두운 얼굴들이 왕래하는 언제나 그늘이 먼저 고이는 마을이다. 평지에 자리하면서도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높이는 전망이 아니다. 흙을 담은 스티로폼 폐품 상자에 꼬챙이를 꽂고 나팔꽃 꽃씨를 심는 아름다운 마음씨가 힘처럼 빛나는 곳이다.

 

  아침노을을 가장 먼저 느끼는 눈부신 정신의 높이를 어둡다고만 할 수 없다.

 

허만하,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 솔. 2002년. 초판 2쇄. 15쪽

 

바벨탑 공화국에서 이렇게 사람 냄새 나는 곳들을 하나하나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없애고 있다. 위로 위로만 가는 건물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비록 삶은 힘들지라도 그곳에서 '정신의 높이'를 잃지 않고 세워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 그런 곳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그늘이 먼저 고이지' 않도록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

 

'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경에 대한 추억이다'라고 시집을 시작하기 전에 시인은 말하고 있다. 이렇게 시인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우리 눈 앞에 펼쳐보인다. 이래서 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혹 자기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자기가 말할 때가 아니라 녹음해서 들리는 자기 목소리를.

 

  참 낯설다. 저것이 내 목소리라니... 아닌데... 내가 말하면서 듣는 목소리와 다른 매체에 녹음되었다가 들려오는 소리는 다르다. 내가 모르던 소리다.

 

  그렇다면 내가 막말을 하고, 그 소리를 녹음해서 듣는다면, 내가 막말을 할 때 듣는 소리가 아니라 시간을 두고 녹음 한 소리를 듣는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막막할 때와 같은 마음을 지닐 수 있을까? 이것이 내 목소리라는 것을 모르고 들을 때 나는 그 막말을 하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느낄까?

 

궁금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온갖 막말들을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자기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김경주의 시집, '고래와 수증기'를 읽다가 '비어들'이란 시를 발견하고, 지옥으로 초대하는 말을 떠올리게 됐다.

 

    비어들

 

거울 앞에서 입을 벌린다

입안은 저승이다

 

저승은 거울 속에 있다

 

입을 벌리고

우두커니 거울 앞에 서 있는 그는

잠시 저승을 엿본다

 

오직 그의 한 눈만이

입안의 저승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한 눈은 아직 이쪽에 있으므로

저승의 언어는 입안에 있다

 

입을 닫으면

저승은 닫힌다

 

지금 저승은 저곳의 세계가 아니라

이곳의 언어다

 

거울은 우리에게 저승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물성이다

우리의 눈은

거울 속 입으로 걸어가는

이승의 언어다

 

언어가 피해갈 수 없는 저승은

그 사람의 입안에 있다

침묵처럼

 

김경주, 고래와 수증기, 문학과지성사. 2014년. 72-73쪽.

 

'들'이란 말이 붙었으니 어떤 대상을 나타내는 말일 테고,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비어'에 해당할 수 있는 말이 이 정도일 거라고 추측했다. 날치를 뜻하는 말인 비어(飛魚)는 아닐 것이고, 시의 내용으로 말과 관련된 낱말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시인이 한자어를 같이 쓰지 않았기 때문에 추측을 하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세 낱말이 모두 해당될 듯하다.

 

비어 01(卑語/鄙語):「1」점잖지 못하고 천한 말. ≒비언02(鄙言).

                          「2」대상을 낮추거나 낮잡는 뜻으로 이르는 말.

비어03 (飛語/蜚語):  근거 없이 떠도는 말

비어04 (祕語): 비밀스러운 말. 범죄자들이나 비밀 단체 요원이 남몰래 자신들만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쓴다.

 

이 풀이를 참조해서 시를 읽어보면 입안이 지옥이라는 말은 우리가 뱉은 말들이 지옥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입안에 있는 컴컴해서 보이지 않는 심연, 그곳이 지옥일 수 있다는 것은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그것도 좋지 않은 말을 하는 순간, 지옥의 문이 열린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지옥을 보지 못한다. 지옥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이 필요하다. 다른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가 뱉은 말을 그 자리에서 듣는 것으로는 지옥을 볼 수 없다. 그 말을 뱉은 순간을 다른 존재들을 통하여 다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지옥을 볼 수 있다. 눈 앞에 보이지 않던 지옥이 눈 앞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지옥은 부정하기 쉽다. 한 눈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한 눈으로만 본다는 것, 지옥을 부정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지옥을 닫을 수 있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니 지옥을 보아야 한다. 나 자신에게 지옥이 있음을, 그 지옥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나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지옥 문을 활짝 열고 온갖 비어들로 지옥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자기 몸 속에 난 엄청난 지옥을, 그 지옥으로 초대하는 온갖 말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정치가들... 자기 생각에 갇힌 사람들...

 

이들은 자신의 입안에서 나온 비어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옥으로 초대하는 말임을 알까? 그런 생각을 할까? 그래서 거울이 필요하다. 자신의 반대편에서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실제 생활에서 거울을 볼 수 없다면, 굳이 그것이 거울이라는 물체여야 할까? 거울은 도처에 있지 않은가. 바로 자신 곁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거울이 될 수 있지 않은가. 그런 거울을 보지 않게 아예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이 눈을 뜨고 거울을 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을까.

 

수많은 막말들, 갑질들-여기엔 비어들이 한몫 한다-이 지옥으로 초대하는 말임을, 김경주 시 '비어들'을 읽으며 생각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2-25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5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은 이제 황혼에 접어들었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았고, 할일도 어느 정도 이루었다.

 

  인생이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계절로 치면 겨울이리라. 시간으로 치면 자정에 가깝거나 자정을 막 지났거나. 예전엔 자정이 하루의 끝이자 시작이었지만 요즘은 막차가 연장된 관계로 자정이 넘어서야 하루가 끝나고 다시 시작한다.

 

  이 시집 제목, 겨울밤 0시 5분이다. 인생을 살 만큼 살아온 시인이 자신의 인생 막바지에 바치는 노래라고 해도 좋겠다.

 

  그만큼 이 시집에는 나이든 삶에 대한 시가 많다. 황동규 시인이 1938년생이고, 이 시집은 2009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그의 나이 70이 넘어서 낸 시집이다.

 

고희라는 말, 예전부터 희귀했다는 나이 70이 이제는 별 것 아닌 나이가 되었지만 사회에서는 한발 물러나 이제는 삶보다는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끝일까? 아니, 시작이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살아온 날보다는 분명 적을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는 나이니까 말이다.

 

시집에서 그런 감정이 담긴 시어를 발견했다. '다행이다' 그래 지금껏 잘 살아왔잖아, 그것이 비록 평탄한 삶은 아니었지만, 온갖 굴곡을 겪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살아 있고, 또 살아갈 것이니 얼마나 다행이랴.

 

인생 70. 겨울이 아니다. 가을이라고 해야 한다. 열매를 맺고, 잎새를 떨굴 나이. 잎새를 떨군 맨몸으로 세상에 설 나이. 그렇게 가을이 깊어가고 겨울을 맞이하게 되지만, 이것은 어김없는 법칙이니...

 

지금껏 살아온 것, 다행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가을날, 다행이다

 

며칠내 가랑잎 연이어 땅에 떨어져 구르고

나무에 아직 붙어 있는 이파리들은 오그라들어

안 보이던 건너편 풍경이 눈앞에 뜨면

하늘에 햇기러기들 돋는다.

 

냇가 나무엔 지난여름 홍수에 실려 온

부러진 나뭇가지 몇 걸려 있고

찢겨진 천 조각 몇 점 되살아나 팔락이고 있다.

쥐어박듯 찢겨져도 사라지긴 어렵다.

찢겨져도 내처 숨쉰다.

 

검푸른 하늘에 기러기들 돌아온다.

다행이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놈은 아직 없다.

오다 말고 되돌아가는 하루도 아직은 없다.

오늘은 강이 휘돌며 모래 부리고 몸을 펴는 곳

나그네새들과 헤어진 일 감춰둔 곳을 찾아보리라.

 

황동규, 겨울밤 0시 5분. 현대문학. 2013 년 초판 8쇄.  115쪽.

 

무성한 잎을 떨구고 그동안 감추어두었던 것들이 드러날지라도 세상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런 인생, 다시 내가 만나왔던 것들을 찾을 수 있는 것. 나이듦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를 읽으며 내 늙음을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드러낼 것이며, 무엇을 반추할 것인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민들레 121호를 읽다.

 

  여러 주제의 글이 실려 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호칭 문제가 기획되었고, 가족, 양육, ADHD, 발도르프, 페미니즘 등 다양한 주제의 글들이 실려 있다.

 

  다 생각해 봐야 할 것들이지만, 지금 우리나라는 호칭 문제로 많이 갈등을 하니 민들레에서도 이에 대해서 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기획으로 잡은 것을 보니.

 

  공자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이라고 했다. 즉, 정확한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를 잘못 썼을 때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같은 말을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것들을 떠나서 언어 중에 다른 사람을 부르는 호칭은 더 문제가 된다. 호칭에는 관계가 들어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이 호칭에 따라서 위계가 결정이 되기도 한다.

 

'너의 성별을 불러주겠다(이라영)'는 글에서 '부력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39쪽)고 했는데, 어찌 성별뿐이겠는가. 학력, 경제력, 지위, 나이에 따라서도 부력의 법칙과 중력의 법칙은 작용한다.

 

누구나 자기보다 낮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말을 놓는다. 중력의 법칙이다. 말이 자꾸 내려간다. 그만큼 상대를 자기보다 못한 존재, 낮은 존재로 파악하게 된다. 아무리 말로는 평등하다고 해도 이미 호칭 속에 불평등이 들어 있으니, 그 말을 쓰지 않는 한 이런 위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반대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위라고 생각하면 말을 높인다. 부력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이다.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말은 이미 높여서 나간다. 그러면 자연스레 위계가 작동한다.

 

이렇듯 호칭은 사회적 위계를 명확히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이것이 친척간에도 작용을 하니, 주로 '시-'자가 들어가는 집안의 사람들에게 쓰는 호칭과 '처-'자가 들어가는 집안의 사람들에게 쓰는 호칭이 차이가 난다.

 

'시-'자가 들어가는 집안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도 부력의 법칙이 작용한다. 말을 높이게 된다.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남편의 동생에게도 '도련님, 아가씨'라는 높임말을 사용한다. 반대로 '처-'자가 들어가는 집안 사람들에겐 중력의 법칙이 작용한다. 아내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아내의 남자 형제는 모두 '처남'이다. 그뿐이다. 손위 여자 형제는 '처형'이니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어린 여자 형제는 '처제'다. 그냥 위아래를 구분하는 한자어를 썼을 뿐이다. '-님'이나 '아가씨' 또는 '서방님'과 같은 말을 쓰지는 않는다.

 

호칭의 불평등... 관계의 불평등으로 나아간다. 그러니 여성가족부에서도 이런 불평등한 호칭을 어떻게 고칠지 의견도 모으고 있지 않나.

 

이런 친척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실 가장 평등해야 할 부부간에도 호칭에서는 불평등이 일어나고 있다. 이 글에도 지적하고 있듯이 (33-34쪽) '연상연하' 커플이라고 하면 어떤 관계를 떠올리는가? 많은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보다 나이가 많은 관계를 떠올린다. 이상하지 않은가?

 

또한 연상연하에서도 남자가 나이가 많을 경우는 '오빠'라고 여자들이 부른다. 여자가 나이 많을 경우에는 처음에는 '누나' 그러다가 곧 '너'가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전에 꽤 인기를 끌었던 노래, '내 여자라니까'에 나오는 가사. 호칭 문제의 문제, 성별의 문제를 잘 드러낸 가사 아닌가 싶다.

 

'... 누난 내 여자니까 너는 내 여자니까 / 너라고 부를께 뭐라고 하든지 / 남자로 느끼도록 꽉 안아줄께 / 너라고 부를께 / 뭐라고 하든 상관 없어요 / 놀라지 말아요 / 알고보면 어린 여자라니까 ...' (이승기, 내 여자라니까 부분)

 

예전엔 별 생각없이 흥얼거렸던 노래, 많이 부르고 즐겼던 노래, 그러나 지금 호칭이 문제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는 이 노래 가사 역시 이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제기, 호칭에서의 남녀 불평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가사가 아닌가 싶다.

 

그만큼 호칭에 대해서 가정이든, 직장이든, 기타 다른 곳이든 많이 생각해야 한다. 적어도 수평문화를 추구한다면 우선 호칭에 관해서 고민해 봐야 한다. 그리고 서로를 동등하게 대할 수 있는 호칭에 대해서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내야 한다.

 

서울시교육청에서 한때 교사와 학생, 교사와 교사, 교사와 교육청 관료들 사이의 호칭을 '-쌤'이나 '-님'으로 하자고 제안한 것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선생님'과 '쌤' 사이 -한희정)

 

문제제기는 좋았으나 환경을 바꾸려 하지 않고, 구조를 바꾸려 하지 않고 호칭을 문제삼고, 그것도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위에서 지시한 모습으로 제시한 것은 수평 문화를 만들겠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중론이었다. 결국 서울시교육청에서 그 문제를 없던 것으로 했지만...

 

그렇지만 문제제기는 옳다. 그렇게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가장 평등한 관계를 보여줘야 하는 교육기관에서 불평등한 호칭이 난무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호칭에 대한 문제제기... 바람직하다. 사회에서 계속 이 문제를 가지고 논의해야 한다. 그런 논의과정 속에서 감춰져 있었던 불평등한 모습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말해졌다는 것, 언어로 등장했다는 것, 고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점을 '민들레 121호'에서 다시 한번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좋은 기획이었다.

 

그밖에 다른 것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데... 아이들과 관련해서.. 좀더 깊이 있게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ADHD문제 아닌가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얘 혹시 ADHD 아냐?"라는 말의 무게 -김경림'의 글을 참조할 만하다. 우리가 너무 쉽게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았나, 어쩌면 그것은 책임 회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글이다. 좀더 많은 연구, 논의가 필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