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예보: 핵개인의 시대
송길영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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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족이 해체되면서 핵가족이 대세가 된 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핵가족이라는 말보다는 핵개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는 이 책의 주장이 나왔다.


기존의 가족 개념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시대가 변하면 언어가 변하고, 그 언어의 변화를 잘 따라가야 한다고, 그래서 제목이 시대예보인데, 일기 예보처럼 시대를 예보하고자 하는 글이니만큼, 앞으로의 사회는 우리가 알던 가족의 개념이 달라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주장에서 '정상 가족'이라는 말은 설 자리가 없다. 가족에서 '족(族)'을 빼려고 하는 시대에 가족의 형태를 놓고, 정상이다 아니다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일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핵개인이라는 말을 쓴다.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로운 개인을 만나 살아가는 세상. 그런 세상은 기존의 가족 개념과 같을 수가 없으므로, 우리 사회를 핵가족의 시대라고 하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난 일이 된 것이다.


핵개인의 시대는 많은 것이 변한 시대이다. 기존에 고수하던 많은 것들을 버려야 한다.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받아들여야 할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 판단을 조직이, 가족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자유로운 개인이 해야 한다.


혼자 하기 힘들다면 자신처럼 자유로운 개인들과 연결해서 하면 된다. 그 연결이 바로 핵개인 시대의 핵심이기도 하다. 핵개인이라는 말에서 홀로인 개인을 생각하면 안 된다. 핵개인은 자유로운 존재지만 다른 존재와 연결된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다만, 이 네트워크가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평생 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그런 말이 통하지도 않는다. 언제든 직장을 옮길 수 있어야 하고, 여러 직장을 옮기면서 소위 말하는 '스펙'을 쌓는다고도 한다. 그렇게 직장을 옮길 수 있으려면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그만둘 수 있음은 무기가 된다.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는 권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다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남에게 의존하는 전문성이 아닌 스스로 서는 전문성, 이것이 핵개인이 지녀야 하는 기본 요소가 된다.


따라서 핵개인의 시대에는 과거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정서가 깔려 있다. 새로운 권위, 자기에게서 나온 권위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직책이 높다는 이유로, 돈이 많다는 이유로는 권위가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남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이지만, 새로운 세대에게는 무시당하기 쉬운 인정 욕구에 불과하다. 소위 '꼰대' 소리를 듣는 권위다.


사회, 직장, 가족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 사회가 변화에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그러한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지녀야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눈 감고 있다고 사회의 변화가 멈추지는 않으니, 변화를 직시하고, 그 변화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읽으면서 명심할 말들이 많았다. 나를 돌아보기도 했고. 나는 핵개인의 시대에 과연 핵개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가?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미정산 세대'에 속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미정산 세대로서 더 할일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저자가 말하는 미정산 세대는 '앞으로는 다 돌려받지 못하거나 원하는 만큼 다 돌려받지 못했다고 스스로 느끼는 세대'(306쪽)라고 한다.


소위 '낀 세대'라고도 할 수 있는데, 변화는 이런 '미정산 세대-낀 세대'로부터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변화의 중심에 있는 세대니까. 그러니 새로운 세대를 우리와 다르다고만 하지 말고, 과거 세대와 새로운 세대를 이을 수 있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다양성은 형평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맺은 열매입니다. - P64

어떤 것도 반드시 지킬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모든 것은 우리가 지금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명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 P77

언어에는 바뀐 세계의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 P78

언어 표현은 현행화를 게을리 하면 다음 세대의 혐오를 받습니다. 세상을 타자화시키지 않도록 계속 사유해야 합니다. - P85

로봇의 핵심은 물리적, 정서적 행위의 자동화입니다. AI의 핵심은 지능적, 창조적 활동의 자동화입니다. 결국 인간은 창조적 활동, 지능적 활동,, 육체적 활동, 정서적 활동 그 모든 영역에서 로봇, AI와 함께하게 될 운명입니다. - P104

모든 산업 분야에서 부가가치 상승의 수준은 비슷합니다. 첫 번째 전제가 연결성, 두 번째 전제는 지능화입니다. - P129

앞으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일을 열심히 하거나 숙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없애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이 일을 없애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본인은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이냐는 모순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 P145

앞으로의 과업은 지금의 일을 지켜내는 데에 있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발판으로 파괴적 혁신을 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빠르게 인정하고 변화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 P146

권위 빅뱅으로 탄생한 핵개인은 자기 삶의 결정권을 가진 성인입니다. ~ 자체 역량 강화가 가능한 시대에 스승은 유튜브이고, 그것을 돕는 조교는 AI입니다. - P175

하이엔드(가격에 대한 고려없이 만든 최고의 디자인, 성질, 품질을 지닌 상품)는 개별성과 고유성이 교차되는 장소입니다. ~ 소량을 만들고, 단가는 높이고, 세계로 가는 것이 옳습니다. - P197

한국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연된 보상‘입니다. ~ 연공 서열과 기수 문화 모두 이런 이연된 보상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 P223

인구집단의 유지와 번성을 위해서라도 생로병사에 필요한 비용과 노동을 ‘공적 시스템‘으로 세밀하게 설계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 시대의 어려움으로 인해 자립의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사회가 지원과 협력의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 P237

나이듦을 판정하는 중요한 기준 중의 하나가 바로 완고함입니다. - P240

돌봄의 끝은 자립이고, 자립의 끝은 ‘내가 나의 삶을 잘 사는 것‘입니다. 각자 잘 사는 사람들이 예의를 지키며 교류할 때 의무는 경감되고 우리의 삶은 더 다채로워질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현명해지고 함께 도움을 줄 수 있는 각자 ‘나‘를 가질 수 있는 핵개인들의 사회를 꿈꿔봅니다.
- P 263

핵개인의 시대, ‘가(家)‘는 있지만 ‘족(族)‘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 P285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은 ‘서사(narrative)‘입니다. 각자의 서사는 권위의 증거이자 원료입니다. 성장과 좌절이 진실하게 누적된 나의 기록은 유일무이한 나만의 서사입니다. - P286

탁월한 사람은 그렇게 매일 자신을 선배의 자리, 권위자의 자리가 아니라, ‘신인(新人)의 자리‘에 세우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 P289

세계의 누구도 하지 않은 고민을 계속하면 적어도 그 누구보다 앞에 선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결국 인정의 정점에는 나 자신으로부터의 인정이 있습니다. - P297

이 전선의 앞에 서기 위해서는 희귀함을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희귀함이 쌓이면 고유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고유성이 진정성까지 가기 위해서는 축적의 시간이 다시 요구될 수 있습니다. 고유함은 나의 주장이고, 진정성은 타인의 평가이기 때문입니다.

- P 299

앞으로는 다 돌려받지 못하거나 원하는 만큼 다 돌려받지 못했다고 스스로 느끼는 세대가 나올 것입니다. 이들을 ‘미정산 세대‘라 부르고자 합니다. - P306

미정산 세대는 본인 몫을 미래 세대에게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준비하는 새로운 핵개인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 P307

권위자와의 직거래가 가능해진 것이 바로 달라진 세계의 특징입니다. - P313

지금 세대에게 더욱 필요해진 능력은 ‘리터러시literacy‘, 다시 말해 문해력입니다. ~ 새로운 시대의 문해력은 문자에만 머무르지 않고 숫자, 이미지, 영상을 포괄한 디지털에 대한 이해로 확장됩니다.

- P314

이런 핵개인의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네트워크‘입니다. ~ 협업이 전제가 됩니다. 그리고 협업에 있어 충분한 자기 위치와 역할을 찾아가려면 연결성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 역량을 확보하고 있어야 합니다. - P315

그만두어서 평등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만둘 수 있기 때문에 대등해지는 것입니다.

- P320

이기려는 경쟁에서 내려오고 보여지는 것의 구속을 벗어던질 때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도록 자신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권위를 자신 있게 인정하는 사회로의 변화를 꿈꿔 봅니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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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유언들 밀란 쿤데라 전집 12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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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생전에 인정을 받은 작가들도 있지만, 살아 있을 때는 별 주목을 받지 못했거나 또는 엄청난 혹평에 시달린 작가들이 있다. 그들은 예술에 새로움을 불러와 그 시대의 사람들과 불화한다. 


이를 쿤데라는 '어떤 예술 작품의 본질적인 것은 그 새로움(새로운 형식, 새로운 문체, 사물을 보는 새로운 방식)에 있으며, 몰이해에 맞닥뜨리는 것은 당연히 바로, 이 새로움인 것이다. (365쪽)'라 하고 있다.


새로움, 그냥 낯섬이 아니라 낯섬 속에서 무언가를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작품들. 이 작품들은 언제든 우리 곁으로 온다. 우리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품, 작가들도 있고,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작가들도 있다.


잘 알려진 작가로 화가 고흐가 있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상이 있다고 하면 될 테고. 유렵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이상과 같은 작가로 카프카를 꼽으면 카프카에 대한 실례가 될까? 그가 이상보다는 먼저 나고 먼저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이상을 한국의 카프카라고 하면 될 수도 있겠다.


이상이 죽고 김기림은 쥬피터(제우스)에 이상을 빗대어 표현한 시를 썼는데(쥬피타의 추방-이상의 영전에 바침), 이상이 죽은 뒤 우리나라 시단이 반 세기나 뒤로 갔다고 아쉬워하는 김기림. 그런 김기림에 빗댈 수 있는 사람이 카프카의 유언을 배신하고 그가 남긴 글들을 출판한 막스 브로트 아닌가 한다.


카프카를 거의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은 브로트. 하지만 쿤레라는 이 책에서 카프카를 그렇게 규정지은 브로트를 비판하고 있다. 브로트가 처음으로 카프카를 한정지었기 때문에 후속 연구자들도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었다고.


브로트는 카프카를 세계문학에 위치시키기보다는 아주 작고 협소한 부분으로 후퇴시켰다고 쿤데라는 이 책에서 비판하고 있다. 배신당한 유언으로 카프카를 우리가 알게 되었지만, 카프카가 남긴 유산을 더 추적하고자 하는 욕구를 제한당하고 있다는 비판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쿤데라의 말을 직접 살펴보자.


'헤르만 브로흐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스베보와 호프만슈탈과 함께 소(小) 맥락 속에 넣는 것에 항의했었다. 가엾은 카프카, 그에게는 이 소맥락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에 대해 얘기할 때 사람들은 호프만슈탈도, 만도, 무질도, 브로흐도 돌이켜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에게 남겨 둔 유일한 맥락은 펠리체, 아버지, 밀레나, 도라라는 맥락뿐이다. 그는 소설사와 동떨어진, 예술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자신의 전기라는 소-소-소-맥락 속으로 되돌려 보내진 것이다.' (400쪽)


이게 아니다. 소설은 작가의 자서전이 아니다. 그러니 소설 속에서 작가를 찾으려고 너무 애써선 안 된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살아가는 인물을 우리에게 보여줄 뿐이다. 그것이 혹 작가 자신이라 해도, 작가가 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쿤데라가 우려하는 '타인의 사생활을 유포하는 것, 이것이 습관이 되고 규칙이 되는 순간부터 우리는 과연 개인이 생존할 것이냐 멸할 것이냐가 중대 관건이 되는 그런 시대로 들어서게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387쪽)' 이런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 작가에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지금 우리는 이런 위험, 위협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다른 매체들에 의해서. 조심해야 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을 작가의 사생활과 연결시키는 것도 위험한데, 그냥 개인의 사생활을 파헤쳐 까발리려 하는 행위는, 인간이 인간에게 수치심을 주는 가장 지독한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물려준 것은 공에 해당하지만, 카프카가 굳이 출판하고 싶지 않았던 글들까지 출판한 것은 과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과(잘못)보다는 공이 더 많다고 생각하지만.


문학, 예술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이 책이지만, 문학과 예술이 무엇인가? 결국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 아닌가. 그러므로 쿤데라의 이 책에서는 작가를 대하는 태도도 나와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짧은 글들의 모음. 그러나 연결이 되는 글들. 소설로 치면 연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글들은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죽은 뒤에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평가되고 향유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2023년에 세상을 뜬 쿤데라, 노벨 문학상이 놓친 또 한 명의 작가로 이름을 올리게 된 작가. 이렇게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쿤데라에게는 실례일 수 있겠다. 그는 결코 그런 평가를 바라지 않았을테니.


기억할 만한 구절들도 많아, 아래에 남겨둔다.

~라블레의 책은 전적으로,그리고 근본적으로 소설이 된다.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 말이다. - P14

도덕적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 그것은 소설의 부도덕이 아니라 바로 소설의 도덕이다. 즉각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하려 드는,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도덕 말이다. 이 맹렬한 판단 성향은 소설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보면 더없이 고약한 어리석음이요 다른 무엇보다 해로운 악이다.
- P15

웃음이 소설의 공기 속에 보이지 않게 퍼져 있다는 점에서, 소설적 세속화야말로 다른 무엇보다도 해롭다. 그래서 종교와 유머는 사실 양립할 수 없다. - P18

소설은 ~ 다른 법칙에 토대를 둔 다른 세계다. 유일 진리가 맥을 못 추는 곳, 악마적 모호성이 모든 확실성을 수수께끼로 만들어 버리는 지옥 같은 곳이다.
- P 42

유머란 이 세계의 도덕적 모호성을 드러내는,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심판할 수 없는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신성한 빛이다. 유머란 인간사의 상대성이 대한 도취요,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신에서 오는 기이한 즐거움이다. - P50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것이 뭔지도 모르는 채 죽는 것이다. - P190

서정, 서정화, 서정적 담론, 서정적 열정은 흔히 전체주의라 불리는 세계의 구성 요소다. 전체주의 세계는 그냥 굴라그가 아니라 사방의 담이 시로 수놓인, 그리고 사람들이 그 앞에서 춤을 추는 그런 굴라그인 것이다. - P234

곡의 구성(곡 전체의 건축적 편성)을 작곡가가 자신의 창의력으로 채우기 위해 빌리는, 그런 미리부터 존재하는 하나의 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구성 자체가 하나의 발명, 작곡가의 독창성 전체가 투영되는 그런 발명이어야 한다. - P256

진정으로 소설적 사유(라블레 이후 소설이 알게 된 사유)는 언제나 체계와 규율에 반한다. - P259

신념이란 게 무엇인가? 정지된 사유, 굳어버린 사유요, ‘신념을 가진 사람‘이란 곧 한정된 사람이다. 실험적 사유는 설득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영감을 주고자 한다. 어떤 다른 사유에 영감을 주고, 사유 행위 자체를 자극하고자 한다. 그래서 소설가는 자신의 사유를 철저하게 탈 체계화해야 하고, 그 자신이 자기 아이디어들의 주위에 세운 바리케이드에 발길질을 가해야 한다. - P260

인간은 안개 속을 나아가는 자다. 그러나 과거의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 뒤돌아볼 때는 그들의 길 위에서 어떤 안개도 보지 못한다. 그들의 먼 미래였던 그의 현재에서는 그들의 길이 아주 선명하게 보이고,펼쳐진 길 전체가 눈에 들어온다. 뒤돌아볼 때, 인간은 길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의 잘못을 본다. 안개가 더는 거기에 없다. -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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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와 연금술사 - 신화상징총서 5
미르치아 엘리아데 지음, 이재실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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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엘리아데의 이 책을 읽으면 이들에게는 짙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장장이는 금속을 변형시키는 일을 하고, 연금술사 역시 물질을 변형시키는 일을 한다. 그런 변형이 지금 우리 시대에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겠지만.


엘리아데는 이를 신화적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자연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물질들을 우리에게 내놓는다. 즉 자연이 출산을 하는 것이다. 그런 출산을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시간을 앞당겨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과거에 대장장이와 연금술사는 신성한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즉 자연이 보여주는 일들을 인간이 보여줄 때 그에게는 신성성이 부여되고 있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 신화들을 통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연금술 하면 마법을 떠올리고, 얼토당토않다는 생각을 지금은 하지만, 과학이 현실에서 주를 이루고 있는 지금의 사고방식을 잠시 뒤로 젖혀두고 과거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생각하면, 연금술은 자연이 하는 일을 인간이 하고 싶다는 욕망, 또 인간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그들에게 대장장이는 불을 통해 용광로에서 풀무와 망치를 통해 이 물질을 다른 물질로 변형시키는 존재였으니, 연금술사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고 여겨질 만했다.


이런 연금술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신화를 살피는 일이 과거를 살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삶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한 일이라면, 연금술을 살피는 일도 거기에 해당할 것이다.


엘리아데는 이렇게 말한다.


'연금술을 통해서 물질의 완성에 참여하는 동시에 인간은 자신의 완성을 견고히 하게 된다. ... 자연을 변화시키는 책임을 맺게 됨으로써, 인간이 시간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76-177쪽)


자연의 시간을 인간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 일, 그것이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의 역할이었다는 것. 지금은 자연의 시간보다는 인간의 시간이 우세하다는 생각이 드니, 연금술사들의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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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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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많은 사람 중에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지정해준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고려할 수 없고 그냥 구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을 구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면? 그 사람의 심정은 어떨까?


우선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또 한 사람이라도 구했다는 안도감, 아니면 내가 구할 사람을 선택하지 못했다는 무력감. 어떤 마음이 들까?


이래도 저래도 마음은 확실히 편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살린 사람보다는 살리지 못한 사람이 많고, 살린 사람들이 모두 괜찮은(?) 사람이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단적으로 소설에서는 폭력범을 살리기도 하고, 사기꾼을 살리기도 한다. 정작 자신이 살리고 싶은 사람은 살릴 수 없으면서도.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누군가, 그것도 단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일까, 재앙일까? 여기에 대한 세 사람의 반응이 나온다. 아니 어쩌면 네 사람이라고 해야겠다. 나중에 목화의 조카인 루나 역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게 되니까.


임천자의 단 한 명은 기적.

장미수의 단 한 명은 겨우.

신목화의 단 한 명은, 단 한 사람.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233쪽)


소설은 오 남매로부터 시작한다. 아니, 나무로부터 시작한다. 나무, 하늘과 땅을 잇는, 또는 하늘과 인간을 잇는 신목(神木)으로 일컬어지지 않았던가. 두 나무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서로 다르게 자란 두 나무는 뿌리를 연결해 결국 한 나무가 된다. 사람들이 베어버렸을지라도. 


이 이야기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려준다. 나무는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한다. 단 한 사람만을. 그것을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할머니 임천자. 겨우 단 한 명을 살린다는 것에 좌절하는 엄마 장미수, 그리고 왜 자신이 사람을 살리는지 이유를 알려고 하는 신목화. 나중에 신목화는 단 한 사람이지만 그것은 전부인 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어떤 사람이건 생명은 소중한 것. 그는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인 것. 그러므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어떤 가치를 동반할 필요는 없다. 생명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똑같기 때문이다. 이 점을 알려주기 위해 작가는 이 가족의 셋째인 금화의 죽음을(? 명확하게 죽었다고는 나오지 않지만, 나중에 목화와 목수가 나무를 만들어 바다로 보내려는 것은, 금화의 죽음을 인정하고, 금화를 보내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설정한다.


자기 목숨을 대신 가져가라고 할 정도로 소중했던 사람을 살리지 못하지만, 단 한 사람, 바로 세상의 전부인 그 사람을 살리는 일을 인정하게 되는 목화. 그렇다. 우리가 누구를 살릴지 결정할 수 있다면 과연 그 세상이 행복한 세상이 될까?


아닐 것이다. 선택할 수 없기에 누구의 생명이든 소중하다는 것,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생명임을 명심해야 한다. 삼대에 걸쳐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조카인 루나까지 하면 4대에 걸쳐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 


이들 4대에 걸친 사람들만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단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 있을 수도 있음을,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인식하게 한다. 바로 내가 그들이 살려낸 단 한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소설 속에 수많은 죽음이 나온다.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부터 예상하고 받아들이는 죽음까지 다양한 죽음들. 그러나 죽음은 삶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은 두 나무의 뿌리가 하나로 엮이듯이 하나일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지.


삶과 죽음에서 단 한 사람을 삶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것이 비극일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삶의 길은 자신이 걸어가야 한다. 삶의 길을 자신이 찾아야 한다. 자신이 찾을 수 있도록 다시 기회를 주는 일. 그것은 단 한 사람에게도 벅찬 일이다.


그 벅찬 일을 하는 사람. 그래서 더욱 괴로워하는 사람. 더 많은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 살리는 사람을 선택할 수 없다는 무력감. 하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더한 죄책감에 시달릴 수도 있다. 자신의 감정때문에 다른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는. 따라서 단 한 사람을 구하는 일에도 무작위가 작동해야 한다. 구하고 그것으로 끝내야 한다. 삶의 길을 보여준 것으로... 그 길을 가는 것은 그 사람의 몫이다. 거기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자.


세상은 온갖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으니까. 물론 좋은 사람만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어디 그런가.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이 옳음과 그름도 공존하고, 선과 악도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다. 다만, 우리는 삶에 더 중점을 두듯이 옳음과 선 쪽에 더 강조점을 두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할 뿐이다.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다는 가정.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삶이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혹시 아는가? 우리 역시 어느 순간 죽음에 직면했음에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살아남았을지. 우리가 그 단 한 사람일지. 그렇다면 삶의 길에 들어선 우리는 내 삶의 길에서 죽음의 길로 들어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내 삶은 나만의 삶이 아니다. 단 한 사람을 살렸지만, 그 단 한 사람의 생명에는 수많은 죽음이 함께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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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제조공장 문학의 숲 27
카렐 차페크 지음, 요제프 차페크 그림, 김진언 옮김 / 현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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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고는 '절대제조공장'이 무엇을 만들어내는 공장인지 알 수가 없다. '절대'라고 번역을 해서 그런가, 차라리 '완전'이라고 번역을 했으면 좀더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완전을 만들어내는 공장.


'절대'는 무엇인가? '신'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면 신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라는 뜻인데, 과연 인간이 신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는 범신론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신은, 즉 절대는 모든 존재에 깃들여 있다. 이렇게 존재에 깃들여 있는 신을 존재를 완전히 연소시키면 신만 남게 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들을 완전 연소시킨다면 세상에는 신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도 어느 곳에서나 어느 시간에나.


차페크는 이런 상황을 가정한다. 완전 연소시킬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발명자는 이 기계에서 나온 신의 존재를 알고 두려움에 차서 그것을 팔아버리려고 한다. 이것을 사는 사람은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다.


자,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긴 사장은 이 기계를 만들어 세계 곳곳에 팔아넘긴다. 그 결과 세계에는 신들이 넘쳐나게 된다. 성령을 받았다고 신통력을 발휘하는 사람, 사랑이 넘쳐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 사장은 공장을 노동자들과 공유하고 등등.


또한 이 기계는 자신의 힘만으로 생산을 해낸다. 노동력이 필요없다. 세상엔 물건들이 넘쳐나게 된다. 이 풍요로움. 이 신성함.


이것으로 그쳤다면 차페크의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물건은 넘치지만 그 물건이 사람들의 필요와는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또한 물가는 엄청나게 오른다. 


필요를 생각하지 않는 생산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경제에만 국한된다면 사람들이 대책을 세울 수도 있겠지만, 종교의 차원으로 넘어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만들어진 '절대'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인간의 인식으로 '절대'를 인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절대'는 칸트가 말한 '물자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 인식을 넘어서는, 인식의 한계 밖에 있는.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인식한 '절대'를 '절대'라고 믿는다. 자신의 '절대'만이 '신'이 된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절대'는 '절대'가 아니다. '절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다음에 올 일들은 전쟁이다. 자신의 '절대'를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 강요와 강요가 말들과 말들의 다툼으로 끝날 수는 없다.


말들의 전쟁이 아니라 그야말로 생사를 건 전쟁이 벌어진다. 서로 죽고 죽이고... 또 죽고 죽이고... 이런 일들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쟁은 끝난다. 이 기계들이 거의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인간의 시대가 돌아온다. '절대'를 인식할 수 없다는 인식이 생긴다.


내 '절대'로 다 파악하지 못했기에 남의 '절대' 역시 내가 판단할 수 없다. 이 '절대'가 사라진 자리에 인간이 와야 한다. 차페크는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믿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이런 '절대'에 대한 인식을 본디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확신하기 위해서 타인을 살해하는 걸세. 알겠는가? 자신이 신 전체, 진리의 전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일이라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일세.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신,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는 걸세. 만약 그것을 용납한다면 자신이 신의 진리 가운데 겨우 몇 미터, 몇 리터, 몇 주머니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테니.'(285-286쪽)


다른 인물을 통해서 이러한 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에 대한 믿음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데,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의 훌륭한 신은 믿지만, 다른 사람의 것은 믿지 않아. 그 사람도 역시 무엇인가 선한 것을 믿고 있는데도.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믿지 않으면 안 돼.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조금씩 깨닫게 될 거야.' (313쪽)


'알겠는가? 누군가가 가진 믿음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그만큼 더 격렬하게 경멸하게 돼. 하지만 가장 커다란 믿음은 인간에 대한 믿음을 거야.' (313-314쪽)


이렇게 '절대'를 제조하는 기계가 일으킨 일을 통해 인간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가 믿는 신이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이 믿는 신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신의 일부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자신이 신의 모든 것을 알고 신의 뜻대로 행한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으리라.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고, 그렇기에 서로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함께 지내고 있음을 차페크는 이 소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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