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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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페크의 단편소설집인데,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와 짝을 이룬다. 그냥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해도 되겠는데... 이 작품집에는 사건이 많이 나온다. 주로 형사(경찰)와 범인의 이야기인데...


'푸른 국화'라는 소설은 반전이 재미있다. 합리적인 추리로 푸른 국화를 찾으려 하지만, 찾지 못하게 되는데, 이 합리적인 추리를 막는 것이 바로 '보행 금지' 표지판이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이 표지판을 보고 더 이상 가지 않는다.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 소녀만이 자유롭게 통행했던 것. 우연히 푸른 국화가 있는 관사를 발견한 주인공이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그렇게도 찾았던, 온갖 합리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찾았던 푸른 국화를 찾을 수 없던 이유가 바로 그들을 합리적으로 교육했던 것에 있었음을... 자신이 지닌 관점을 벗어던졌을 때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이 소설에서 알 수 있게 되는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자신만의 관점을 고수하면서 살아가는지... 그것이 사회에서 받은 교육으로 더 얼마나 많이 강화되는지, 이렇게 자신은 합리적이라고 믿고 살지만, 그것 때문에 놓치는 것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소설집에서 요즘 우리 사회와 관련지어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는 소설이 '살인 미수'라는 소설이다.


조용히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총성이 울리고 유리창이 깨진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총을 쏘았다. 다행히 빗나갔지만, 생명에 위협을 느꼈다. 그 다음에 할 일은 경찰을 부르는 일. 경찰과 대화를 하는 도중, 당연한 말들이 오간다.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일이 있는가? 당연히 없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죽임을 당할 만큼의 원한을 사는 일이 거의 없으니... 경찰이 간 다음 곰곰 생각해 본다.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잘못을 하지 않았을까?


주인공은 많은 인물들을 떠올린다.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일들이지만, 그것이 상대에게는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음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 행동들이 상대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주인공은 깨닫는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경찰에게 가서 없던 일로 해달라는 것.


이 소설을 읽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데, 좀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권력자들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잘못을 하고 더 많은 상처를 주고, 더 많은 피해를 입히는데, 그들은 이 소설에 나온 사람처럼 자신을 되돌아볼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할 때, 저 사람들 왜 저래 하고 넘어가는 권력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권력자들을 향해 누군가가 폭력을 행사하려고 할 때, 그 사람을 응징하는 것을 넘어서 자기 성찰을 하는 권력자들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다른 말들을 듣지 않으려고 첩첩이 담을 쌓지 않는가. 하다못해 누군가는 차벽을 쌓기도 했으니... 차벽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벽이고, 그런 사람벽보다 더 위험한 것이 바로 자신이 쌓는 마음의 벽 아닌가.


나는 옳다. 남들은 잘못됐다. 나에게 도전하는 사람은 처벌받아야만 한다. 도대체 왜 내 진심을 몰라줄까?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 쌓는 벽. 그 벽을 부술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조금만 자신에게 안 좋은 말, 행동이 보이면 더욱 벽을 쌓는다.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처럼 곰곰이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귀하다.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푸른 국화'에서 사람들을 가리는 사회적 통념이 개인에게로 오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지 못하게 막는 벽으로 작동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벽들은 자신 너머를 볼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을 틀에 가두게 된다.


이 틀을 부수는 것, 통념을 벗어나는 것.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것. 짧은 소설들이 실려 있고, 반전이 있는 소설이 많지만 이렇게 우리들 삶을 성찰하게 하는 소설들도 있으니 차페크의 소설, 여러모로 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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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독다독 2024-01-27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책을 엄청 좋아하시는 분인가봐요. 독서량이 엄청 나시네요ㅎ

kinye91 2024-01-28 07:34   좋아요 0 | URL
책읽기를 좋아해서 틈나는 대로 읽고 있어요.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 / 모비딕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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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짤막한 소설들이다. 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으니 소설이라고 생각하지, 그냥 읽으면 수필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엽편소설이라고 해야 하나? 아주 짧은 소설. 그러나 이 짧은 분량에 반전이 들어 있다. 이런 반전으로 인해서 글을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주로 범죄에 관한 소설들이 많은데,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 읽어도 좋고, 짤막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들의 인생이 이러한 일들이 엮이고 엮어서 이루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삶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필연을 만드는 것이 우연들이 아닐까? 우연이 겹치고 겹쳐 우리들의 삶을 필연으로 이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에는 유독 도덕적인 도둑(살인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인정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으려고 한다. 이게 정의다.


적어도 자신들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를 알고, 그 행위가 지닌 의미도 인식하고 있으므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 그것이 바로 삶임을 생각하게 하는데...


짧은 소설이기 때문에, 이들은 그냥 책임을 진다. 어떤 이유도 제시되지 않는다.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책임을 지고, 자신이 저지른 일이기 때문에 책임을 진다.


'결혼 사기꾼'이라는 소설을 봐도 그렇다. 결혼을 빌미로 사기를 치지만, 그는 자신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비용을 제하고 순순히 경찰에게 잡혀간다. 그것도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넘기려고 하니, 꼭 그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라고 하면서 기다리기도 한다.


자신의 행위를 변명하거나 부인하지 않는다. 첫 소설인 '늙은 죄수의 이야기'도 그렇고, '도둑맞은 선인장'도 그렇다. 이들은 행위를 부인하지 않는다. 인정한 다음 그에 걸맞는 처벌을 받으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소설들이 실려 있는데, 대부분의 소설들은 무겁다기보다는 가볍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풍자보다는 해학이라고 해야 하나. 슬며시 웃음을 머금게 되는 소설들이 많다. 


소설 속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겨운 피냄새가 아니라 우리들 삶에서 겪지 않았으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불쾌한 일들 정도로 여기면서 읽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고 그냥 웃음으로만 넘길 수는 없다. 해학이 그렇지 않은가. 웃음 속에 들어 있는 삶의 진실들. 그 점을 찾을 수 있게 하고 있으니...


이것저것 다 떠나서 가볍게 읽기 시작해도 좋다. 읽을수록 매력을 느끼게 되는 차페크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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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이 나에게 건넨 말
한상희 지음 / 다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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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에 대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적어도 4.3에 대해 말한다고 끌려가 고문을 받지는 않으니까.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4.3에 관한 소설을 썼다고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았던 현기영 작가도 있으니,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좋겠다.


하지만 과연 4.3이 완전히 우리들 마음에 자리잡았는가? 4.3은 4.19를, 5.18을, 6.10을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한때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이루는 토대로 늘 작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과연 완성되었는가? 아니다. 그래서 4.3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4.3을 통해 인류의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하고, 4.3을 통해 회복적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데, 자꾸만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4.3을 통해서 또는 다른 수많은 민주화투쟁을 비롯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왔다고 생각했는데, 다르다는 이유로 아예 배척해 버려야 한다는 생각, 또는 그러한 행동들이 여전히 나오고 있으니... 4.3으로 인해 확립해야 할 회복적 정의는 아직도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가족들이 4.3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왜 4.3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관심을 지니게 된 고1 때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리고 4.3의 역사적 사실과 예술(영화 '지슬', 소설 '순이 삼촌, 돌담에 속삭이는')을 통해서 4.3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그런 학살의 과정에서도 용기를 발휘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지옥 속에서도 천국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선의 시민성'을 발휘한다면 '악의 평범성'이 자리잡지 못하게 됨을 이야기해준다.


그렇다. 4.3은 단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4.3은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여야 한다. 4.3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특히 청소년들이 읽기 쉽게 쓴 책이니, 교과서 밖에서 이렇게 4.3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 제주도에 갔을 때 눈에 보이는 풍광과 더불어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쳤던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풍광 속에 가려져 있던 제주도의 역사까지... 그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의 미래로 나아가야 함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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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채소롭게 - 작지만 단단한 변화의 시작은 채소였어
단단 지음 / 카멜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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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주로 채소를 다루고, 또 가능하면 집에서 만든 음식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가 아주 마음에 든 건 모든 것을 한방에 해결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완벽하게 옳고 완벽하게 무해하고 완벽하게 아름답기 위해 나를 잃고 싶지 않다. 나답게 조금씩 천천히, 이리도 가 보고 저리도 가 보면서, 나다운 일상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12-13쪽)'이라고 하고 있으니.


한때 자주 가던 음식점이 있었다. 음식점이라고 하기보단 술집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주로 막걸리를 마시면서 곁들인 음식을 함께 먹었으니... 그 집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이 책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말 때문에 그 음식점이 생각이 났는지도. 


약식동원(藥食同源)


약과 음식의 근원이 같다. 즉 음식이 약이라는 얘기다. 술집에 어울리는 말 같지가 않지만, 술을 약주(藥酒)라고도 하니,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분 좋게 다음날 무리가 가지 않게 좋은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마시는 술이 어찌 독이 될 수 있겠는가. 그때 술은 약이다. 


그리고 주인장이 정성스레 만들어 내오는 안주 역시 약이다. 약식동원. 약과 음식은 같다는 생각으로 요리를 내오는 주인장의 마음이 요리에 깃들여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자주 가던 그런 음식점이었는데...


꼭 술이 나쁘다고 마셔서는 안 된다고, 육식이 나쁘다고 채식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육식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야기하고 있고, 또 음식을 바깥에서 사먹는 과정에서, 사오는 과정에서 탄소 발생이야 차치하더라도 수많은 쓰레기가 만들어지고 있음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그렇게 생활하는 것은 잘못되었어, 당장 고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채식만을 하는 사람들로 이 지구가 채워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육식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기맛이 난다는 콩고기 등 대체육을 개발하고 있는 지경이니, 누구나 똑같을 수는 없다.


모두가 채식하는 사회도 상상하기 힘들듯이 모두가 육식하는 사회도 힘들다.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채소를 먹는다. 안 먹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정도의 문제가 되지 않을까.


완전한 하나는 없다고 보면 수많은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런 다름의 인정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 책에서 언급하듯이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모든 음식을 채식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았을 경우 죄책감을 느끼거나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자신의 식습관을 하루 아침에 바꾸라고 말하는 것 또한 폭력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채식과 가장 거리가 먼 것 아닌가?


좋은 것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에게 있다. 함께하면 된다. 강요가 아니라. 상대가 싫다고 하면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다. 다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면 된다. 또한 어느 순간 상대 역시 조금씩 변해갈 수 있다고 믿고 지내면 된다.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이면서 상대와 자연스레 어울리다 보면 상대도 나도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이 책은 채소를 통해서 그런 과정을 거친 자신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강요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라고 소곤거리듯이 말하는 듯한 책이다.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 강요하지 않으니 묘하게 함께하고픈 마음이 든다. 채소를 먹는다는 일은 자연과 함께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냥 채식이라고 해서 채소만 먹는 식생활이 아니라 공업과 비슷하게 생산된 채소들이 아니라 제철에 나오는, 키우는 사람들의 정성이 배어 있는 그런 채소를 먹는 일이라는 것을...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외식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외식도 한다. 채식 식당도 많이 늘었다. 또한 고기도 먹는다.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먹는다. 어느 하나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채소로운' 식생활을 하면서 익히게 된 삶의 방식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편하게 해준다. 자연스레 어울리면서 생활이 변하게 된다. 쓰레기를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그것을 상대에 대한 비난이나 강요로 만들지 않는 사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조금씩 해나가는 사람, 그리고 함께할 수 있으면 함께하는 사람. 비난보다는 개선이 될 수 있게 비판을 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채소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엔 그런 삶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읽는 것으로도 음식을 먹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배가 부르다. 영양을 채웠으니 움직이고 싶어진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서두르지 않고 해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다.


약식동원이다. 이 책 역시 약이다. 쓴 약이 아니라 달디 단 약. 참고로 이 책은 채소로 요리하는 법도 나와 있으니 채소 음식 레시피로 이용해도 된다. 눈으로 읽고 마음에 지식을 채우고, 채소를 사서 직접 손으로 요리해 자신의 몸에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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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나라 이야기 세트 - 전7권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스토리 북스)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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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 마법사의 조카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첫권이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를 봤다면, 이 첫권은 좀 생소할 것이다. 주인공이 영화와는 전혀 다르니 말이다. 그렇지만 첫권은 바로 나니아의 시작이다. 나니아라는 나라가 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나니아에서 놀라운 모험을 하는 네 남매의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다. 그러니 이 첫권은 나니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곳에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 또 마법의 옷장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디고리와 폴리가 등장한다. 디고리의 외삼촌이 만들어낸 반지로 다른 세계로 가게 된 아이들. 이 아이들이 다른 세계에서 아슬란이라는 사자를 만나고, 아슬란이 나니아를 창조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젊음, 생명의 사과 - 창조와 사과, 또 아슬란은 아담의 아들, 이브의 딸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니, 이 부분만 보면 기독교적 요소가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조론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정확히 사과라고는 나오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사과라고 하니, 그 사과가 첫권에 등장하는 것은 기독교 문화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가 나온다.


이 사과를 가지고 와 엄마의 병을 고치는 디고리... 그가 남은 사과 몸통을 정원에 심었더니, 곧 사과나무가 되고, 나중에 사과나무가 쓰러졌을 때 디고리가 그 나무를 가지고 옷장을 만든다는 내용으로 첫권이 끝난다.


그러니 첫권은 다음에 전개될 나니아 모험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마법의 반지가 아니라 옷장을 통해서 나니아로 가게 될테니 말이다.


아마도 첫권은 나중에 쓰여졌을텐다. 해설을 읽어보면 이 전집 2권이 먼저 쓰였다고 하니 말이다. 2권부터 시작하기에 개연성이 약하니, 아이들이 나니아로 가게 만들기 위해서 옷장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것이 왜 디고리 교수의 집에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했으리라.


하여 첫권은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다른 아이들로 인한 모험이 시작된다.


2권 --- 사자와 마녀와 옷장


영화로도 만들어진 부분이다. 네 남매의 모험이 그려진 부분. 마녀와 대결하여 승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런데 여기서 아슬란의 희생과 부활이 나타난다.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대속하기 위한 아슬란의 행동. 기독교를 떠올리게 하는데,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고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하지만 두려움에 굴복하기 보다는 두려움을 딛고 나아갈 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이번 편이 보여주고 있다.


마녀의 겨울에 맞서는 네 남매의 모험이 자세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마녀로 인해서 고통받는 세계, 그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네 남매의 모험이라고 하지만 아슬란을 중심으로, 나니아에 거주하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급상황에서도 일상을 유지하려는 비버 부인이라든지, 자신에게 온 손님을 환대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3권 ---  말과 소년


  이번에는 나니아가 아닌 칼로르멘이라는 나라에서 나니아로 가는, 정확히는 아첼랜드로 가는 여정이 나온다.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나니아에서 칼로르멘으로 납치된 말이 둘 나오고, 여행을 함께 하게 되는 아라비스라는 소녀도 나온다. 


  샤스타에서 코르가 되는 이야기. 칼로르멘에서 나니아 이웃인 아첼랜드의 왕자가 되는 아이. 그 과정에서 겪는 모험. 그리고 이 모험을 전부 주관한다고 할 수 있는 아슬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 같지 않은가. 샤스타는 배로 강을 따라 내려오다 어부에게 발견이 된다. 버려진 아이, 구출, 그리고 탈출. 이런 과정은 보통 영웅이야기에서 많이 나온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가 자신을 찾는 이야기. 샤스타가 코르가 되는 과정이 바로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만의 성공이 아니다. 칼로르멘이라는 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아첼랜드를 구해내는 역할을 하게 되니, 이는 거대한 성장 서사가 된다. 


이런 구절이 있다.


'샤스타는 선한 일을 하면 그 대가로 항상 더 힘들고 막중한 일이 기다리게 마련이라는 걸 아직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170쪽)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선한 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더 선한 일들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나니아 이야기 3권은 한 아이의 성장으로 끝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 우리가 이야기에서 기대하고 있는 결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모세'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 그런 걸까? 아닐 것이다. 첫권이 천지창조라면, 두 번째 이야기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는 대속이 나온다면, 3권은 모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 이야기가 순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 이야기에서 성경의 이야기, 또는 교훈을 떠올리기는 쉽다.



4권 ---- 캐스피언 왕자


나니아도 세월이 흐른다. 천년 왕국이 있기는 힘들다. 평화롭던 나니아 역시 다른 왕조로 바뀐다. 왕조의 흥망성쇠야 역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왕조가 교체되면서 나타나는 차별과 탄압이 문제다.


융합이 되면 모르겠지만, 기존 문화, 관습을 바꾸려는 과정에서 저항이 일어나고, 그 저항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폭력은 차별을 낳고, 차별은 억압으로 이어지면서 또다른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다시 왕조 교체가 일어날 시기가 온다. 나니아가 그렇다. 이번 권에서는 나니아가 텔마르 사람들에게 정복당한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텔마르를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니아 이야기에서는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따지지는 않는다. 그가 어떻게 통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나니아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


캐스피언 왕자 역시 텔마르 출신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니아의 전통, 문화를 존중한다. 그러니 그는 통치자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고난과 성공 과정이 펼쳐진다. 그냥 나니아의 통치자가 될 수는 없으니, 이 과정에서 피터 등이 다시 등장한다. 캐스피언이 성공하게끔 도와주는 조력자로서. 그리고 이번 권에서는 피터와 수잔이 다시는 나니아로 돌아올 수 없음을 밝힌다. 그들은 나니아로 올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


이번 권을 읽는 아이들에게는 출신보다는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자신의 출신을 고집하는 난쟁이가 있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난쟁이도 있으며, 작은 몸집으로도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난장이들이 나오니 말이다. 게다가 텔마르의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캐스피언조차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통치자로 받아들인다.


이는 출신이나 신체, 피부색 등이 그 존재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은영 중에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게다가 가장 어린 루시의 눈에 먼저 아슬란이 보이고, 나무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순수한 마음, 열린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또한 이번 권은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과 비슷한 점도 있다. 압도적인 무력 우위를 보이는 집단에 대항해 나무들이 함께 하는 것. 반지의 제왕에서는 엔트라고 나오는데, 이 책애서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즉, 순수한 마음, 정의로운 일에는 모든 존재들이 함께 함을 보여준다.


5권 ---새벽 출정호의 항해


  이번 권은 바다 여행이다. 4권에 나왔던 캐스피언 왕자가 숙부에 의해서 쫓겨난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에드먼드와 루시, 그리고 유스터스와 함께하는 과정이 나와 있다.


  모험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번 권에서는 유스터스의 변화가 눈에 뜨인다. 


  남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제 감정대로만 행동하려 했던 유스터스. 그러나 모험을 통해서 남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용으로 변했을 때 이 점을 깨닫게 되는 데, 탐욕이 눈을 가리고, 자신을 다른 존재로 변화시킨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캐스피언 역시 아버지를 옹호하던 기사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을 겪는다. 가령, 노예제를 알게 되고,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는가를 몸소 체험하게 되며, 탐욕으로 금으로 변해버리는 모습도 보고, 두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때 그곳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이번 권은 여기까지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여기까지라는 말은 자신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춘다는 말이다. 이는 잠을 자는 것과 같다. 자신은 만족해서 잠을 자겠지만, 남들이 보면 더이상 무언가를 하지 않는 상태에 불과하다.


즉 사람들은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삶을 완성할 수 있다. 새벽 출정호의 모험은 생쥐 리피치트를 통해서 그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6권 ---은의자


  또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이번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세계에 있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질. 그리고 전 권에 나왔던 유스터스


  질은 다른 학생들의 괴롭힘을 피해 있다가 유스터스를 만난다. 그리고 둘은 나니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는 사라진 왕자를 찾기 위한 모험.


  사라진 왕자를 찾는 과정에서 아슬란이 준 힌트가 있고, 그 힌트를 잘 따라가야 하는데, 막상 일에 닥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세상 일이 어디 뜻대로 되겠는가?계획한 대로만 일이 되면 좋겠지만, 늘 현실은 계획을 넘어선다. 이들의 모험도 그렇다. 


  나니아 이야기의 전 편들이 그렇듯이, 이번 편에서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떤 생물이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여기서는 마슈위글이라는 종족이라고 하는데, 이름은 퍼들글럼이다. 셋이서 떠나는 모험.


유혹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들은 지하세계에 갇혀 마법에 걸려 있는 왕자를 만나고, 마녀를 퇴치한 뒤 나니아로 돌아온다. 


거인들에게 잡혀먹힐 뻔하기도 하고, 지하세계를 탐험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위험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위험을 이겨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현실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음을 '은의자'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질과 유스터스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라고 한다면, 질은 이야기를 통해서 현실을 이겨낼 힘을 키워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온갖 위험이 있는 모험 이야기. 그런 모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늘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어려운 지경에 빠지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또는 포기하고 굴복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겨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힘을 얻게 된다.


6권을 읽으면서는 이런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7권 --- 마지막 전투


  나니아 나라 이야기 마지막 권. 나니아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 

                              

  나니아의 멸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은데, 이것은 현세에서 내세로 넘어가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현세가 멸망하기 위해서는 혼란이 계속되어야 한다. 혼란을 부추기는 인물이 나온다. 원숭이 시프트가 그 인물인데, 이 원숭이는 우연히 얻은 사자 가죽을 당나귀에게 씌워 아슬란인 척하게 하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얻는다.


  마치 적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그런 발상. 그리고 혼란, 전쟁. 결과는 나니아의 멸망.


  단지, 나니아의 멸망으로 끝났으면 아이들에게 읽히기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이야기는 새로운 세상으로 끝난다.


그동안 나왔던 인물들이 모두 나와 한자리에 모인다. 이들은 이제 새로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천년왕국. 그것이 생각난다. 굳이 기독교 식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현세를 벗어난 내세가 펼쳐진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그것은 현실이 불만족스러울수록 더욱 강하게 자리잡게 된다.


현실과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 현실을 바라보게 되면, 새로운 세상을 위해 한걸음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상,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 이야기의 힘이다.


7권까지 오면서 많은 모험이 펼쳐지지만,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선(善)이다. 선을 추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7권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나니아라는 환상 속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모험. 그 모험을 통해 성숙해가는 아이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 될 아이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그런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준 [나니아 나라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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