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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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발표 시기와 지면에 따라 내용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통하는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읽으면서 그 무엇을 찾는 일이 읽기를 더 재미있게 한다.


읽는 사람마다 '그 무엇'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내게 이 소설집에서 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는 경계'다.


첫소설에서도 그렇다. 물론 천선란 소설이 SF소설이라는 평을 듣는 만큼 외계생명체의 존재나,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과는 다른 존재들이 등장하지만, 그런 존재들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를 인식하게 해주는 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즉, SF소설 자체가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과 공상의 경계라고 하면 허황된다는 느낌을 주니까,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라고 하면 좋을 듯하다. 


처음에 실린 '흰 밤과 푸른 달'에서는 바로 지구를 떠나는 존재들이 나온다. 다른 생명체와 싸우기 위해 더욱 강하게 진화(?)된 인물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지구인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외계 생명체가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지만, 외계 생명체가 없는 지구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된 이들에게 선택지는 외계로 나가는 것이다.


자, 이들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가야 한다. 자발적이든 강요가 되었든 이들은 다른 세계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 지구에 사는 우리들이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리는 일... 그런데 지구가 살 수 없어진다면, 당연히 우주로 가야 한다.


지금도 환경, 생태 문제로 지구가 견딜 수 없게 된다면? 하고 화성으로 이주를 꿈꾸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우주로 날아가는 새'라는 소설을 보면 지구를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미 인간에 의해서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던 새들과 연결지어, 작가는 인간 역시도 그렇게 우주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푸른 점'이라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연상시키는 소설. 그러나 태양계를 벗어나는 보이저호에서 보내온 사진은 푸른 점(지구)는 없다.


소설에서는 지구는 이미 푸른 점이 아닌 보이지 않는 행성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푸른 점이어야 한다. 즉, 진실보다 믿음이 중요하다(106쪽)는 인물의 말처럼, 사람은 믿음을 잃지 않아야 살아갈 동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갈 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다. 바로 자신들의 믿음을 공유하는 것. 그런 믿음의 공유가 인간들을 지구가 아닌 다른 우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여전히 우주에서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듯이. 또 지구와 다른 행성에서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듯이.


우주라는 공간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내부에서도 가능하다. 공간이 아니라 인간에게서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자, 무엇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가? 내가 나임을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나와 남의 경계는 무엇인가? 또 남이 내가 될 수 있는 경계는 무엇인가? 


작가는 '기억'을 말하고 있다. '옥수수밭과 형'이란 소설에서 '사람은 다른데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이란 주인공의 질문에 형은 '그래도 같은 사람이지.'(117쪽)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소설 속의 나는 여러 형을 만난다. 물론 여러 형을 동시에 만나지는 못한다. 같은 기억을 지니고 있는 형은 순차적으로 내게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그 형들은 내게는 형이 된다.


같은 사람인데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으면?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옥수수밭과 형'에서는 다른 인물들이 모두 형이 되는 남이 내가 되는 문이 열렸다고 한다면, '제, 재'라는 소설에서는 내가 남이 되는 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육체 안에 있는 다른 기억을 지니고 살아가는 '제와 재'. 이들은 같은 인물일까? '제'에게는 '재'는 다른 사람일 뿐이다. 즉 제의 세계와 재의 세계는 다른다. 그렇지만 이들은 한 몸에 있다. 이 세계와 저 세계가 한 몸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


이를 좀더 확장한 소설이 '두 세계'라는 소설이다. 소설 속 인물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자신을 옥죄고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 세계가 아니다. 아예 다른 세계, 즉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고 싶어한다. 어떻게 해야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 문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단절이다. 이 세계의 끝남. 그런데 이 세계의 끝남이 완전한 끝이 아님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소설은 본래 인물이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는 배에 타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설의 결말이 죽음으로 끝난다. 그 세계에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해야 하는 일...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전혀 다른 시공간에 나타나게 된다. 다른 존재의 몸을 빌려서. 그렇다면 이 세계에 있는 존재는 또 어떤가? 다른 세계, 즉 밖을 꿈꾸는 인물들은 죽음으로 다른 세계로 간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굳이 육체적인 죽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세계의 종교들이 대부분 거듭남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저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를 넘는 과정을 거치는 과정이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천선란은 소설을 통해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다른 세계를 잇는 존재는 이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 세계에 발을 딛고 있으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소설 제목은 '노랜드'다.


'두 세계'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근무하는 곳이 '노랜드'인데 땅이 아니다 또는 땅이 없다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곳. 이곳에서는 현실의 땅이 아닌 소설 속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것을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라고 한다면, 이 세계에 착 발붙이고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떠 있는 존재들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떠 있는 존재들이고, 이런 존재들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 소설들이 흥미진진하다. 재미도 있고, 무언가를 생각할 수도 있게 하고...작가의 말에서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 두 번째 소설집을 엮어 당신께 보낸다'(418쪽)고 하고 있다.


사랑을 하고 싶어,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는 말에 동의한다. 물론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소설에 나타나는 삶들을 내 삶들과 연결지으면, 소설은 결국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경계'라고 할 수 있으니...


이쪽 저쪽을 다 살필 수 있는 소설. 지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일이 될테니... 이런 경계의 체험, 새로운 문을 발견하는 일은 지치기도 하지만, 그 지침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으니...


작가의 말처럼 소설을 읽자. 이 소설은 작가가 말한 세 가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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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3년 겨울호 - 통권 184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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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를 읽으면서 왜 영화 [서울의 봄]이 생각났을까?


  오지 않은 서울의 봄... 이런 생각을 하다가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도 생각났고.


  막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싶은 '서울의 봄', 아니 그해 겨울.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었을까? 여러 방법이 제시되었다. 분명 실현 가능했던 방법들이었고, 그 방법들 중에 몇 가지만, 아니 한 가지만 실현이 되었어도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겠지.


  방법은 있었고 실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못했다. 못했다고 하기보다는 안 했다고 보아야 하나? 안 한 이유는 너무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즉 '지피지기 백전불패(知彼知己 百戰不敗)'라고 했는데, 적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서 실패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미지 출처 : 서울의 봄 - 검색 이미지 (bing.com)


 세상에 반란군이 목숨을 걸고 진격하고 있는데, 평화협정이라니... 또 막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돌아서다니, 거기다 제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자리를 비우고 떠나다니,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의견을 묵살하다니...


그래서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고, '침묵의 봄'이 지속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지. 왜, 이번 호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보니, [녹색평론]이 늘 해오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기후 재앙이 아닌 생태 재앙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


우리 삶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결국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 계속해서 이러면 안 된다고, 바꿔야 한다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을 했는데도, [녹색평론]에서 한 주장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몸으로 겪고 있지 않나. 80년대 독재를 겪었듯이, 지금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기후 변화로 고통을 받고 있지 않나. 아주 다양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오래 전부터 제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 생태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으니.


그러니 최근에 봄 영화인 '서울의 봄'이 생각날 수밖에. 녹색평론이 영화 속에서 쿠테타를 막으려고 애쓰는 인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영화는, 역사는 순간의 패배로 10년 넘게 그들의 천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 10년 조금 넘었다면, 다행히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더 지속되지 않았지만, 기후, 생태 위기는 그렇지 않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 수도 있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녹색평론]은 계속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영화와 이번 호를 연결지으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두 편의 글 때문이다. 정성헌/이문재의 대담을 실은 글인 '중심이되 중심이 되지 말라'는 글에서 정성헌의 구체적 실천 지침이 몇 개 실려 있다. 그 중에 이런 것... 결코 포기하지 않는...


'상유십년(尙有十年)! 우리에게는 아직 10년의 시간이 있다. 3년간 해보고 1년 조정기를 거쳐 다시 3년씩 두 번 더 해보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177쪽)


이 말이 희망을 준다. 이번 호 앞부분에 실린 '윤석열 정부 농정 나침반은 어디로 향하나, 뉴미디 시대의 언론과 정치 권력'을 읽으면서 현실의 답답함을 이런 지침을 읽으며 희망이 있음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서평으로 실린 '마음과 행위로 숲 만들기<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라는 글... 난지도를 공원으로 만드는 과정을 쓴 책에 대한 서평인데... 지금은 하늘공원, 노을공원이 시민들이 많이 찾는 숲이 살아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쓰레기산이었을 뿐.


2012년에 1만 그루의 묘목을 심지만 단 한 그루를 남기곤 모두 죽었다고(254쪽) 한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12년간 3만 6,258명의 봉사자와 141종의 나무 13만 3,708그루를 심고 돌봤다고 한다.(255쪽)


앞에 언급한 정성헌의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아직도 우리에겐 10년의 시간이 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정성헌의 구체적 실천 지침으로 간다.


'시민을 넘어 천지인민. 국민 5% 즉 250만 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177쪽)


난지도라는 장소를 사람들이 찾는, 숲(자연-동식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장소로 만드는데 오랜 시간, 또 운동가 몇몇이 아닌 함께 하는 여러 사람들의 참여가 있었다. 그렇다면 난지도보다 큰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데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정치인 몇, 시민단체 몇이 아니다. 시민이 아닌 천지인민이라고 한 것은 보통 사람들의 참여, 국민 5%의 참여가 있다면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가? 아니다. 2016년을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힘이었다. 그때 모인 국민들 5%가 넘지 않았을까? 그러니 바꿀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다면 바꿀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그냥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 정치 상황뿐만 아니라 지구 차원의 환경(생태) 문제에 관련해서도.


그래서 영화 '서울의 봄'과 달리 [녹색평론] 이번 호에서는 희망을 본다. 


이번 호에는 최근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지상군 투입 등에 대한 글도 있다. 읽으면서 생각할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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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매일의 진화생물학 - 진화는 어떻게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만들었는가
롭 브룩스 지음, 최재천.한창석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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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 물론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생물학계에서는 거부할 수 없는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윈에 관한 책들이 다시 많이 나오고 있기도 하고, 다윈의 학설을 계승한 학자들도 많은데... 이 책의 저자 또한 다윈의 학설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과학자들만의 용어로 심오한 논의를 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냥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일들과 진화론을 연결짓고 있다.


진화론을 경제학과 연결한다든지, 로큰롤이라고 하는 음악과 연결짓는다든지 이렇게 진화론이 생물학에 머물지 않고 우리들 삶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진화론을 설명하는 책 답게 우리 몸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몸뿐만이 아니라 동물들의 몸도 진화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왜 이성을 지닌 인간이 비만이 될까?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훑어간다. 수렵채집을 하던 시기부터 농경을 하게 된 시기까지... 각종 합성식품을 만들어내는 현대까지.


먹을 것이 귀했던 인류는 저장하는 몸으로 진화를 했고, 그런 진화의 결과 소비량보다 많은 지방을 흡수하게 된 지금은 자연스레 비만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만이 진화의 결과라는 것인데, 단지 진화의 결과라고 생물학에만 책임이 있다고 하지 않고, 경제와 문화를 융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어쩌면 진화는 (특히 자연선택은) 경제학의 원리와 같을지도 모른다. 최소비용으로 최대 효용을 얻는 것. 그것이 진화로 우리 몸에 굳어졌다면 최소비용으로 너무도 많은 효용을 내는 음식들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또 그렇게 필요한 영양소(맛)를 섭취하도록 진화해 온 몸이 어찌 비만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비만을 이야기하면서 다음은 인구로 넘어간다. 여기서 인구라고 이야기했지만 일명 성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섹스'에 관한 내용이다. 하긴 인구와 섹스가 연결이 안 될 수가 없지.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라는 말이 있듯이 섹스 없이 인구도 없다. 물론 인간복제가 가능해진 지금은 섹스 없이도 인구를 늘릴 수 있지만, 아직까지도 섹스 없이는 인구를 늘릴 수는 없다.


그러니 섹스는 진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단지 진화와만 관련이 있지 않고 경제와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 그런 점을 여러 장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일부다처제'를 생각해 보자.


'일부다처제'라고 하면 모든 남성들이 찬성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부다처를 하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선 많은 여성에게 경제적인 윤택함을 부여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그 다음에는 권력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보다도 많은 권력을 지니면 더 많은 혜택을 지니게 된다.


그런데 소수가 많은 여성과 결혼을 하면 결혼을 하지 못하는 남성이 남는다. 이들은 어떻게 될까? 그냥 나는 어쩔 수 없어 하고 말까? 아니다. 자포자기한 사람들, 어떤 행동을 해도 손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미래가 없기에, 그들은 사회불안 요소가 된다. 사회학적으로도 그렇다. 이는 단순한 진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전적으로 우수한 종자가 자신의 종자를 퍼뜨리기 위해서 다른 약한 종들을 억압하면 약한 종들은 도태되지만, 도태되기까지의 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일어난다.


특히 인간들처럼 70억명이 되는 개체수를 지닌 집단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자연스레 '일부다처제'가 '일부일처제'로 변화하게 된다. 물론 여전히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 또 성적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은 순차적인 일부다처제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순차적인 일부다처제는 결혼-이혼-결혼-이혼-결혼 등의 과정을 거쳐 두 명 이상의 배우자로부터 자손을 낳는 경우를 말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 사회에서 우성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다른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기회가 없다. 기회가 없기 때문에 무모한 행동도 한다. 사회불안이 야기된다. 우성유전자들도 혼란에 휩쓸리면 자신들의 유전자를 남기기 힘들어진다. 그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타협이 필요하다. 일부일처제가 다수의 문화로 정착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로큰롤(락 앤 롤)도 마찬가지다. 가장 성적인 음악이 로큰롤이라고 한다. 이들 스타들은 바로 성적으로 우수하다고 뽐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락스타에 열광하는 것은 진화의 결과라고 한다.


화려하고 멋진 수컷... 우수하다고 진화를 통해서 선택되었지 않은가. 락스타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동물을 보라. 화려한 수컷들은 자신들의 유전자를 전파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어야 한다.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천적들에게 잡힐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암컷들의 선택을 받아 자신의 유전자를 남길 가능성 또한 높다. 락스타들의 이른 죽음을 이렇게 동물 수컷들의 화려함과 연결을 짓는다. 


화려함 뒤에 있는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이 책은 진화론과 비만, 인구, 음악을 연결짓고 있다.


학술적인 논의를 한다기보다는 우리가 늘 접하고 있는 부분을 진화론과 연결지어서 설명해주고 있다.


그래서 진화론에 대해서 반감을 지니지 않게 된다. 또한 진화론이 생물학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학, 역사학, 문화인류학, 그리고 예술과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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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2023-12-20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락스타에 열광하는 것이 진화의 결과라는 주장이 정말 흥미로운 것 같습니다 음악에도 진화론이 엮일 줄은 몰랐는데요..!!!! 제가 락스타를 사랑하는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나봅니다..😻

kinye91 2023-12-20 14:20   좋아요 0 | URL
저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이 책을 읽어보니 진화론과 락음악이 어느 정도 관계가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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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집이다.


주인공들은 대체로 젊은이들이다. 대체로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나의 방광, 나의 지구'에 등장하는 인물은 중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젊은이가 겪는 고통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소설의 인물들은 모두 현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을 대변한다. 부유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날 그날 먹고 살기 바쁜, 자신의 미래를 점치기 힘든 그런 사람들.


미래를 살아갈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위해서 현재의 고통을 참고 견디라고 해서는 안 된다. 현재의 고통이 미래에도 계속 될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현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좌절한다.


집을 구하기도 힘들고, 결혼을 하기도 힘들며, 가족들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놓인 젊은이들이 이 소설집에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다.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 아주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지도 않는다.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기에는 그런 삶이 만연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래가 불투명할지라도 그들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런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너희 미래는 없어!'라고 얘기해서는 안 된다. 그들에게 고단한 삶일지라도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소설집의 제목이 된 소설 '젊은 근희의 행진'을 봐도 그렇다. 요즘 추세에 맞게 유튜브 방송을 하는 근희. 그런 근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문희. 하지만 문희가 아무리 못마땅하게 여기더라도 근희는 근희의 생활이 있다.


이 점을 근희의 편지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의 잣대로 평가하지 말라는, 그런 평가는 편견으로 이루어지고 더욱 강화될 뿐이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아달라는 근희의 편지. 그것이 바로 기성세대의 눈으로 청년들을 평가하지 말라는 의미다.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관점(그것이 옳다고 여기면서 젊은이들의 행동을 잘못되었다고 재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을 고수하면서 젊은이들에게 훈계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훈계는 훈계가 아니라 잔소리, 또는 꼰대짓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삶을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만큼 이 소설집에서는 200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잘 그려지고 있다. 그런 젊은이들의 모습, 힘들지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기성세대들이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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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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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가지 재료가 나온다. 레시피라는 말이 제목에 있으니, 요리에 관한 글이 있어야 한다. 각 장을 시작할 때마다 레시피가 나온다. 그 장에 해당하는 재료를 쓴 요리의 레시피.


그러나 중심은 재료가 아니다. 그 재료와 연결된 역사, 문화, 경제, 정치다. 그야말로 어떤 재료에도 역사와 문화, 경제와 정치가 녹아들어 있다. 그러니 요리에 여러 재료가 들어가듯이, 경제학에도 여러 요소들이 빠질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어떤 음식 재료들이 나올까? 


마늘, 도토리, 오크라, 코코넛, 멸치, 새우, 국수, 당근, 소고기, 바나나, 코가콜라, 호밀, 닭고기, 고추, 라임, 향신료, 딸기, 초콜릿


총 18가지 음식 재료가 나온다. 이중에 낯선 재료들도 있다.(오크라) 또한 재료가 아니라 이미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코카콜라)


음식이든 음식 재료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 얽힌 장하준의 경험은 수필을 읽는 느낌을 준다. 자신의 경험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쓴 글... 하지만 곧 그런 개인의 경험에서 사회로 넘어간다.


재료와 얽힌 역사가 나온다. 가령 마늘하면 영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재료가 마늘이었다고 하는데, 또한 영국은 다른 나라 음식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영국은 다양한 음식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음식의 다양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그렇다면 지금 영국은 마늘을 예전만큼은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인데...


이렇게 마늘과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경제학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책의 머리말에 마늘 이야기나 나오는데, 영국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과 연결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마늘을 싫어하던 음식에서는 단일성을 고집하던 영국이 어느 순간부터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었는데, 경제학은 반대로 갔다고 한다.


저자가 영국으로 유학한 이유가 경제학의 다양성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영국에도 경제학은 다양한 이론들이 사라지고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 이론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그것이 문제라고 한다. 경제학은 세상을 읽는 학문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찌 단일할 수가 있겠는가?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고, 그 관점들이 부딪히면서 세상을 좀더 잘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해야 하는데, 점점 주류경제학만 살아남는다면 그 사회가 경직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마늘로 경제학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면, 이제 다른 재료들은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풀어간다고 보면 된다.

                  

그 중에 최근에 겪은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하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 재료는 바로 '고추'다.


매운 맛, 고추... 향신료와 비슷하게 쓰이지만, 자, 고추와 경제학이 어떻게 연결이 될까? 우선 고추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또 고추의 맵기를 측정하는 단위도 알려주고. 


(여기서 고추의 맵기를 다루는 단위는 스코빌 척도라고 한다. 그냥 알아두자. 251쪽 주에 보면, 우리나라 청양고추는 1만에서 2만 5000 사이를 보인다고 한다. 맵다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못 먹는 청양고추가 이 정도인데, 아바네로 고추는 10만에서 75만 정도 된다고 하니, 맵기가 청양고추의 5배가 넘는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리퍼 고추는2200만이라고 하니, 상상이 되지도 않는다. 어디 가서 한국 사람들이 매운 것을 잘 먹는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단 생각도 한다) 


친구와 스촨 요리 전문점에 간 이야기를 한다. 스촨 요리는 맵기를 고추 5개로 표시한다고...그런데 고추 표시가 없는 요리를 시키면 과연 고추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아니라고 한다. 여기가 반전이다. 고추 표시는 맵기를 표시한 것이지, 고추가 들어갔느냐 안 들어갔느냐를 표시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추 표시가 없으면 고추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착각하기 쉽다. 스촨 요리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다음 장하준은 고추와 경제학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이야기한다. 바로 고추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림자 노동'이다. '그림자 노동'에 해당하는 일들이 많지만, 돌봄 노동으로 이야기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돌봄 노동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총생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노동인데 노동으로 잡히지 않는다. 수치화되지 않는다. 마치 고추가 음식에 들어갔지만 고추 표시를 하지 않는 것처럼.


고추 표시가 없다고 맵지 않은 것이 아니듯이, 그림자 노동 역시 노동이 아닌 것이 아니다. 같은 노동이다. 그것도 코로나19로 인해서 돌봄 노동, 특히 그림자 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


코로나19의 공포가 지나가자 어떻게 되었나? 돌봄 노동에 대해서 잊지 않았나? 이것은 제도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하준은 개인의 변화만으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의 변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그 점을 요리의 재료를 시발점으로 역사, 문화, 경제, 정치를 아우르면서 설명하고 있다.


어려운 경제학 책이 아니라 우리가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음식 레시피처럼 경제학 레시피라고 해도 좋을 책이다.


처음부터 끝이 체계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각 장마다 자신만의 특색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장만으로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요리 레시피가 그렇지 않은가. 각 레시피가 독립되어 있고, 그 레시피로 요리를 할 수 있듯이, 이 책 또한 각 장들이 경제학에 관한 어떤 부분들을 설명해주고 있다. 누구나 따라할 수 있게 쉽고 간결하게 설명한 레시피가 좋은 레시피이듯이, 장하준의 이 책은 경제학과 관련된 내용들을 쉽고 간결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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