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빨치산의 딸 1~2 세트 - 전2권
정지아 지음 / 필맥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금서였던 책. 금서가 된 이유는 단순하다. 빨치산을 다루고 있기 때문. 빨치산이 누구인가? 북한을 주적으로 하고 있는 지금, 빨치산은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었으니,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용납되지 못하는 존재다.


오죽하면 종북좌빨이라는 말이 상대를 옥죄는 용어로 쓰이겠는가? 그럼에도 예전처럼 금서로 지정해서 판매를 금지할 수는 없다. 형식적 민주주의나마 이루었기 때문인데...


예전에 발간되었다가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다시 시일이 흐른 다음에 발간이 되었다는 소설. 제목은 많이 들어봤지만 읽어보지 못했던 소설.


그러다 의문이 생겼다. 이상하네... 소설을 읽다보니 이태의 남부군 이야기가 나오던데, 남부군이야말로 빨치산의 수기 아닌가. 그런 빨치산 수기도 판매가 되었었는데, 어째서 소설인 이 작품은 판매가 금지되었지?


  무언가 다른 점이 있을텐데... 하다못해 남부군은 영화로도 만들어졌지 않은가. 도대체 이 소설과 남부군이 무엇이 다르지? 궁금증이 일었다.


  이런 궁금증은 읽어가면서 해소되겠지 했는데, 그래도 소설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처음 부분은 제목에 걸맞게 빨치산의 딸이 자라면서 겪는 일을 중심으로 서술이 된다.


  빨치산의 딸. 좀더 강하게 말하면 빨갱이의 딸. 1970년대 빨갱이의 딸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연좌제라는 것이 있어서 취업에도 제한이 있었기 때문. 특히 공무원이 되려면 신원조회라는 것을 해서 공산주의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 친척 중에 없어야 했다.


  하물며 아빠-엄마가 빨치산 출신이라면 살아가는데 엄청난 제약을 받을 테다. 그래서 좌절에 빠진 딸의 성장사가 소설의 첫부분을 장식한다. 슬프다. 자신의 의지가 아님에도 자신의 인생을 뜻대로 살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


그러다 딸은 차츰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해의 결과가 소설에서 펼쳐진다. 아빠의 빨치산으로서의 삶과 엄마의 빨치산으로서의 삶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사실을 개인의 경험에 기반해서 서술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사실성이 높은 소설이다. 그것도 직접 체험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으니.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아산, 백운산 등등 빨치산들이 지내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고, 그럼에도 그들이 지녔던 사상, 희망이 소설 속에서 가감없이 표현되고 있다.


이런 가감없는 표현이 판매금지를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지운다고, 가린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빨치산들이 벌였던 일들 역시 우리 현대사의 일부분이다. 그러니 가려서는 안 된다.


그들이 왜 산으로 들어갔고, 그들이 원하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으며, 그렇게 힘든 조건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야 한다.


사상이 다르다고 해도 역사 속에서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소설은 험난한 빨치산 생활을 그리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그런 조건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지냈던 생활들을 보여준다. 


그들의 꿈과 희망, 그리고 좌절. 그런 역사가 있었음을 소설은 너무도 잘 보여준다. 소설로 읽어도 되지만 빨치산의 수기로 읽어도 좋을 작품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냥 읽으면 될 것을... 아직도 남과 북이 나뉘어 있는 이 현실이. 그리고 소설을 다 읽으면 어떤 점에서 이태의 [남부군]과 다른지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남한에 남겨진 빨치산들.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살아갈 수 없게 된 그들이 느꼈던 마음에 대한 서술에서 두 작품은 차이가 있으니...


이 소설을 읽은 다음 같은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으면 그 후 그들의 삶을 알 수 있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3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 최후의 심판 + 두 개의 세계 + 삼사라 + 제니의 역 +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
한이솔 외 지음 / 허블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섯 편의 소설이 수록되었다. 당선작 1편과 우수작 4편. 작가들은 낯설다. 낯선 만큼 신선한 느낌을 준다. 과학문학상이라는 이름처럼 소위 SF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쓴 소설. 하긴 소설에서 과학적 상상력은 늘 있어왔던 일이니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다만 요즘 이런 소설들이 장르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 예전과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다.


다섯 편의 소설은 내용이 다르지만, 공간을 기준으로 나누어보면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지구를 공간으로 하는 소설, 다른 하나는 지구가 아닌 우주(공간)를 공간으로 하는 소설.


먼저 지구를 공간으로 하는 소설은 한이솔이 쓴 '최후의 심판'과 박민혁이 쓴 '두 개의 세계', 최이아가 쓴 '제니의 역'이다. 지구가 공간적 배경이지만 사건의 전개는 무척 다르다.


'최후의 심판'이 인공지능을 다루고 있다면, '두 개의 세계'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인간들이 나무로 변해가는 디스토피아(등장인물들의 발언에 따라 디스토피아로 또는 다른 세계로 받아들일 여지를 남겨두고는 있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나무로 변하는 일은 재앙으로 주로 여겨지니,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면, '제니의 역'은 다문화 시대에 소통을 위해 도입한 로봇(인공지능)의 역할을 받아들이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인공지능이 판사가 되어 판결을 한다? 이것은 지금도 상상하고 있는 일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수많은 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고 하고, 그에 대비해야 한다고 하는데, 소설은 그 점에 착안하고 있다.


하지만 제목이 최후의 심판이다. 누구를 심판한다는 것일까? 소설에서는 인공지능 솔로 3.0을 재판정에 세운다. 인공지능 판사로 탁월한 판결을 하던 솔로 3.0이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는 이유로 재판정에 선다.


재판정에서는 검사와 솔로 3.0의 논쟁이 전개된다. 결국 인공지능은 파괴되고 마는데, 최후의 심판이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에 설 수 없다는 말일까? 아니면 인간이 인공지능을 창조해 신의 위치에까지 오르려 하지만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함일까?


결국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인공지능을 심판하지만, 심판 당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의미로,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지 않나 싶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을 배경으로 삼는 장르소설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에 문제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최후의 심판'과 같은 소설은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데,'두 개의 세계'와 같은 소설은 지금도 진행 중인 재앙에 대해서, 그것도 인간이 모두 알 수 없는 질병들이 계속 창궐하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다만, 이 소설은 어떤 사람이 살아남는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아서, 다가올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인간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는 인간인지가 나타나 있지 않다. 하긴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신이 아닌데...


'제니의 역'은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한다. 다문화 가족이 많은 지역에서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소설.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로봇 제니를 도입했다. 각 가정에 도입된 제니는 여러 언어를 통역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게 한다. 그럼 된 것 아닌가? 아니다. 권력은 활발한 의사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권력은 일방적인 전달을 원할 뿐이다. 자신의 말을 관철하려고 하지 다른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의 말에 거역할 수 있게, 의사소통이 잘되는 사회가 되면? 그때는 권력구조가 바뀐다.


따라서 권력자들은 언어를 통제한다. 활발한 의사소통을 막는다. 그 점을 다문화 사회에 도입된 의사소통 로봇(일도 잘하는 로봇이니, 만능로봇이라고 해야겠다)인 제니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제목이 명확하게 해석이 안 되는데, '제니의 역'에서 '역'이라는 말이 역할의 줄임말인지, 또는 수학에서 반대를 뜻하는 '역'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역'은 두 개의 의미를 모두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이것도 문제다. 다문화 사회에서 의사소통이 잘 되게 하기 위해 한국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이주민들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는 소리는 잘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주해 온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원주민들도 이주민들의 언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배워서 소통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사람들에게는 제니의 역할이라고 '역'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니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대화가 문제 없이 이뤄지도록 해주고 있기 때문에, 다문화 사회를 성공적으로 정착시키는 역할을 제니가 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니의 역은 제니의 '역할'이다.


반면에 기존에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제니의 역'에서 '역'은 반대다. 부작용이다. 그들의 권력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소설에 나온 이 부분을 보면 이런 사실이 명확해진다.


'... 그는 집사람이 제니를 잘 활용하고 있기는 하나 그것 때문에 자신이 피곤한 일이 많아졌다며 한숨을 쉬었다. 평소 같으면 집사람이 모르고 지나쳤을 내용을 이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긴다는 것이다.' (208-209쪽)


의사소통이 원활해 지면서 권력에는 틈이 생긴다. 그동안 알 수 없던 사실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알면 과거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들에게 제니는 '부작용'이다. 이들에게 '제니의 역'은 '제니의 부작용'이다. 그리고 이런 권력 지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 부분이 그래서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제니를 파괴하는 원주민 남성. 나중에 제니의 부작용만을 보도하는 언론. 그렇게 사회는 다시 한쪽의 언어만을 강조하게 된다. 그런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누군가의 희생 위에 유지되는 사회가.


장르소설의 장점이 잘 나타난 소설이다. '제니의 역'은. 읽으면서 여러모로 토론이 가능한 그런 소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읽을 만하다. 조서월의 '삼사라'와 허달립의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가 이 소설집에 수록된 소설이다.


우주가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유가 지구가 살기 힘들어져서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야 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지구가 인간이 살기 힘든 행성으로 변해간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우주로 나아가는 소설들이 창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지구를 떠나 다른 행성에 정착하려는 인간들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삼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윤회를 뜻한다고 한다. 인과응보라고 해도 좋겠다. 즉 지구와 똑같은 행태를 보이는 인간들은 다른 행성에 정착할 수 없다. 그들은 다른 행태를 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결국 다른 행성에 도달해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음을 이 소설 '삼사라'는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다. 지구를 파괴한 인간이 어떻게 다른 우주 행성에서 제대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발세자르는 이 배에 올랐다' 역시 마찬가지다. 선장을 제외한 모든 승무원들이 다른 행성의 원료가 되어야 한다는 발상. 이는 지구에서 사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바꿔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렇듯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결국은 지구로, 인간의 생활로 돌아온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결국 SF라고 하는 장르소설은 인간에 대한 물음이다. 다른 소설들과 같이. 흥미로우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소설집이다. 


특히 이 중에서 '제니의 역'은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 지금 우리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 사용 설명서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제는 삶이다. 자신의 삶을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경제학자에게만 맡겨서야 되겠는가? 그래서는 자신의 삶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객체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배워오지 않았던가. 그 배움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경제학자에게 경제를 맡겨만 놓아서는 안 된다.


언론에서 경제 관련 소식을 전할 때 무슨 무슨 교수(소위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사람)를 초빙해 그 사람의 말로 현 경제의 상황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언론사에서 선호하는 교수를 초빙해서 그 사람의 의견만 듣는다. 다른 의견은 잘 전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언론을 접하느냐에 따라 경제에 관해서도 다른 관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각자 다른 관점을 지니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의 관점만이 옳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의 관점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매도하는 태도가 옳지 않다는 말이다. 다른 의견도 있음을 생각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의견들을 듣고 스스로 판단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이 책의 끝부분에서 저자는 바로 다른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변화는 힘들기 때문에 이론은 지적으로는 비관주의, 의지로는 낙관주의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에게 도전할 수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세상이 변할 수 있다고)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를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것이다. 경제를 경제학자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 왜냐하면 경제는 바로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내 생활을 남에게 전적으로 의존해서 시키는 대로 하면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문 지식은 꼭 필요하다. 그러나 전문가는 말 그대로 아주 좁은 영역을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삶에서 하나 이상의 넓은 영역이 결부된 문제(즉 대부분의 문제)에서 다양한 인간적 필요와 물질적 제한, 도덕적 가치를 모두 고려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려 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전문 지식을 가지게 되면 시각이 더 편협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전문 지식에 약간 회의론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경제학뿐 아니라 삶의 모든 분야에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포장을 씌운 정치적 주장인 경제학에서는 이 태도가 특히 중요하다.'(441쪽)


이 책을 읽으면 이와 비슷한 말이 계속 나온다. 장하준이 경계하는 것은 바로 남에게 자신의 판단을 의존하는 태도이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점점 어려운 용어로 포장이 되고, 이해하기 힘든 숫자들로 채워진 통계를 앞세우면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고 만다.


이런 포기의 순간, 내 삶은 경제학자들의 손에 넘어간다. 아니 경제학자들의 손이라고 하기보다는 경제학자들을 이용하는 정치권력의 손에 넘어간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정치가들이 경제학자들을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인다. 무슨무슨 경제학 박사들이 늘 정치권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들은 현란한 용어와 통계를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나는 모르니, 전문가가 어련히 알아서 했겠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내 삶에 대한 주도권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게 된다.


장하준은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한다. 경제학이 어렵다고 하지만, 전문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경제학 지식은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아무리 검색을 하면 다 찾을 수 있는 시대라고 해도, 검색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경제학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경제학이 무엇인지, 경제는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 경제학에는 어떤 학파들이 있는지를 이야기한 다음에 경제학의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해준다.


경제학 사용하기라는 2부에서 생산의 세계, 금융, 불평등과 빈곤, 일과 실업, 정부의 역할, 국제적 차원(무역과 이민) 등등에 대해서 설명한다. 명쾌하다. 그리고 어느 한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고 여러 경제학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려주고 있으니, 전문가가 아닌 나같은 일반인들이 읽으면 꽤 도움이 된다. 경제학에 대한 거리를 조금은 좁힐 수 있다. 경제학이 무엇보다도 정치와 관련이 있다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된다.


그냥 경제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치'경제학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을 왜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 경제가 경제로만 떨어져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는 정치와 밀접하게 관련이 되고, 경제 정책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정치를 포함하고 있으니, '정치경제'학이 맞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여 저자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고 나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경제학 전문가들에게 경제를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는'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는 더 이상 경제를 전문 경제학자와 '기술 관료'에게 맡겨 둘 수 없다는 사실을 처참하게 깨닫게 해 주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능동적인 경제 시민이 되어 경제의 운영에 참여해야 한다.' (444쪽) 고 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이 그냥 경제학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부분에 계속 전문가에게만 맡겨두었을 때 정치와 관련이 없다고 여기고 실천을 하지 않을 때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것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이 씁쓸한 뿐인데... 그의 말을 명심하자. 아래 인용한 것이 재반복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일단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은 자신의 잘못이고, 돈을 많이 번 사람은 그럴 만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며, 열심히 노력하면 자신도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 부자들이 살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렇게 설득당한 가난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기의 이익과 상반되는데도 부의 재분배를 촉진하는 세금과 복지 지출을 낮추고 기업 규제와 노동자 권리를 줄일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단지 소비자로서의 선호뿐 아니라 납세자, 노동자, 투표자로서 개인의 선호도 고의로 조작될 수 있고 자주 그렇게 된다. 개인은 개인주의 경제이론에서 묘사하듯 '독립의지를 가진 ' 존재가 아닌 것이다.' (197쪽)



덧글


아주 소소한 오타... 97쪽에 '러스크 벨트(rust belt)'라고 나오는데 이건 누가 봐도 러스트 벨트니 다음 판본에서는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참고로 내가 읽은 책은 2023년 3월 개정판 1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
다시 로크먼 지음, 정지호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회에서의 성차별을 다루지 않는다. 가장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부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을 이야기한다. 


사회에서의 성차별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표시도 잘 난다. 따라서 대응하기가 쉽다. 하지만 가정에서 부부간에 일어나는 성차별은 쉽게 구분하기도 힘들고, 표시도 잘 안 난다.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부부 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사회가 개입하기도 그렇다.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다. 가정에서의 성차별이 결국은 사회의 성차별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에서의 성차별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에는 다양한 가정에서의 성차별, 특히 가정에서 얼마나 일을 많이 하게 되는지, 또 양육에 관해서 누가 더 책임을 지는지를 보여주면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성차별을 이야기한다.


부부가 둘만 살 때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누구의 일이 늘어나는가? 이런 질문을 하면 된다. 당연히(이 당연이라는 말이 당연하지 않아야 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연히라는 말을 쓴다) 여자의 일이 늘어난다.


아이에게 쏟는 관심과 아이를 챙기는 일을 여자들이 더 많이 한다. 그렇다면 직장일이 주는가? 아니다. 직장일은 줄지 않는다. 남자들은? 여전하다. 물론 함께 양육에 참여하는 남자들도 많다. 


가정에서의 일을 공평하게 나누려고 노력하는 남자들도 많다. 그럼에도 성차별이 일어난다고 보는 이유는, 사회 전반적으로 육아에 대한 책임을 남자보다는 여자들에게 더 묻는 관행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도와준다는 말을 쉽게 하는 반면에, 그래서 남편들이 집안일을 하면 아내들은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여자들은 집안일을 하면서 도와준다는 소리를 전혀 하지 않으며, 여자들이 육아에 힘쓴다고 해서 남편들이 고맙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물론 남편들도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이 고맙다는 말은 '온화한 성차별'이라고 할 수 있단다. 이런 말을 통해서 아내들이 집안일을 더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게 한다는 것이고, 성차별을 내면화한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차별은 대응하기가 쉽다. 저항도 쉽게 일어난다. 그러나 은밀하게 일어나는 차별은 대응하기가 힘들다. 가정에서 남편들이 집안일을 돕는다고 나서면서, 아내들이 더 많은 일을 하는 현실이 고착될 때 성차별은 공고화된다. 


이 책에 많은 사례들이 나와 있는데, 직장에서 성공한 여성이 가정에서도 평등하게 살지는 않는다는, 더욱 충격적인 사례는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들의 이혼율이 높다는 사실, 이는 아직도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편견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남성보다 돈을 많이 벌어오는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이러한 편견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데, 이는 직장일로 인해서 가정에 충실하지 않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노력이 나타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여성들은 직장에서 아무리 일을 잘해도 가정에서 맡은 일을 해내야 한다는 관념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 통념도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집안일이 과연 여성만의 일인가? 산술적으로 똑같이 집안일을 나눌 수는 없지만, 서로 의논해서 적절한 일의 분배는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그렇다. 아이 돌보는 일에 본성은 없다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으며, 지금 이 시대에 아이 돌보기는 여성의 일이라고 대놓고 주장하는 사람은 드물 텐데도, 여전히 육아의 부담은 여성이 더 많이 지고 있으니, 그 점을 개선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 책의 끝부분에 나와 있는 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어떤 형태의 가정이든 이처럼 한다면 (성)차별은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양육이 의식적인 협동 작업일 때 남자는 여자와 똑같이 자기의 책임을 점검하고 아이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챙긴다. 아내가 명령이나 지시를 내려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견실한 성 평등주의란 아빠나 엄마에게 더 적합한 활동이 무엇인지, 누가 그 활동을 해야 하는지 미리 정해주지 않는 가정생활을 의미한다.' (368-36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던 드라마에서 남자 인물이 여자 인물에게 한 말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라는 대사.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소설[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돈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나. 떠난 사랑을 돈으로 잡을 수 있을까?


돈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면 될까? 그렇다면 비싼 가격을 부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과연 행복한 세상일까?


아닐테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사랑을, 아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예전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흔히 다루어지던 사법고시에 붙은 가난한 사람 이야기.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소위 마담뚜들이 달라붙는다고 했다. 돈은 있으나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겼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미끼로 결혼을 하자고 한다.


(농담 식으로 판-검사, 의사와 같은 '사'자들과 결혼을 하려면 열쇠가 세 개는 필요하다는 -집, 사무실, 차- 말들이 있었으니,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돈이면 다 된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돈으로 산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사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방법이 많이 있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돈이 우리 삶에 너무도 깊숙이 들어왔다. 대부분이 금전으로 환산이 된다. 돈이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편리를 돈으로 사는 세상, '얼마면 돼?'라는 질문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래 얼마만 줘'가 되는 세상이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 사회를 뒤쫓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돈이 사회를 잠식하는 모습도 미국을 따라간다고 볼 수 있다. 아주 씁쓸한 현실이지만.


샌델은 이 책에서 돈이 얼마나 많은 분야를 잠식해 들어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우선 '새치기'라는 제목으로 1장을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움직일 것 같지만, 아니다. 새치기라는 말에는 도덕적인 비난이 들어 있지만, 우대권이라는 말에는 그런 비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대권. 무엇으로 우대를 받는가? 돈이다. 이것이 보통은 새치기인데, 이들은 표나지 않게 움직인다.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가를 지불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행기 탑승을 생각해 보라. 이제는 대부분의 항공사에서 실시하고 있는데, 돈을 더 많이 지불하면 대기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아예 없어지기도 한다. 남들이 서는 줄에 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 탑승만 이러면 문제가 안 되는데... 의료 문제로 가면 심각해진다. 누구가 평등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비대면진료가 활성화되면, 또 의료민영화가 이루어지면 돈에 따라 진료의 차별이 발생한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 사람이 빠르게, 편리하게 진료를 받게 된다. 이를 샌델은 새치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인센티브'라는 장에서는 이 인센티브가 결국 돈으로 사회를 왜곡하는 현상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인센티브는 잘못에 대한 벌금을 지불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개념을 돈으로 그것을 덮을 수 있는 요금이라는 생각으로 이끈다고 한다.


지각자에게 벌금을 부과하면 지각이 줄까?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돈으로 지각을 대체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조차도 없어진다고 한다.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인센티브를 돈으로 지급하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우리들 삶 곳곳에 침투하고 있는 돈으로 바뀌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물을 주는 문제... 선물을 현금으로 주면 쉽게 해결될 듯한데, 왜 사람들은 굳이 선물을 주려고 할까? 이것은 바로 돈으로만 환산되지 않는 '선물의 경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는 돈으로만 계량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이 점을 깨닫지 않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는 시간과 빈도가 점점 줄고 있는데, 기껏 만나더라도 돈이 개입을 한다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는 벽이 존재하게 된다.


심하게는 죽음(보험)까지도 돈으로 생각하는 사업이 생겨났다고 하니, 이거야 원, 마지막 장에 '명명권'이라는 이름으로 광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광고야말로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공익광고는 예외다)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주 많은 사례들을 들어 돈으로 환산되는 사회가 왜 위험한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경제학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샌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샌델은 경제학이야말로 도덕, 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고, 돈으로 환산되는 눈에 보이는 수치화된 이익만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요소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삶에 더 필요함을 이 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내 삶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런 것들을 얼마큼 지니고 있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많이 지니고 있으면 있을수록 내 삶이 더 행복한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01-29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중학생, 초등학생 아이들하고 토론했어요.^^

kinye91 2024-01-29 11:35   좋아요 1 | URL
토론이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그런 토론하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