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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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개인적인 체험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바꾸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한 소설이 오랫동안 읽힌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중 인물이 겪는 개인적인 체험이 자신의 삶 어느 부분과 일치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즉 개인적인 체험이 보편적인 경험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이다. 오에겐자부로의 이 작품도 그렇다.


작가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썼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이 작중 인물인 버드가 겪은 일들이 작가 오에겐자부로가 겪은 일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오에겐자부로는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을 작중 인물 버드로 하여금 소설 속에서 다시 개인적인 체험을 하게 하지만, 그럼으로써 독자들에게 보편적인 경험을 안겨준다고 할 수 있다.


아이가 태어났다. 그런데 아이가 정상이 아니다. 수술에 성공해도 정상적으로(?) 살 수가 있는지 의문이다.


소설은 여기서 시작한다. 그리고 주인공 버드는 아이를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아이로부터 도피하고 싶다. 아이가 차라리 죽었으면 한다. 아이가 자신에게 준 비극을 받아들을 수가 없다. 그는 대학교 때 친구 히미코에게로 도피한다.


히미코와 함께 지내며 아이를 잊으려고 한다. 아니, 아이를 없애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 그것은 도피에 불과함을 깨닫는다. 이 도피의 끝은 자신의 망가진 삶뿐이라는 것을.


소설의 끝부분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기 괴물에게서 도망치는 대신 정면으로 맞서는, 속임수 없는 방법은 자기 손으로 직접 목을 조르거나, 아니면 받아들여 기르는 것, 두 가지뿐이야. 애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걸 인정할 용기가 없었던 거지." (271쪽)


이런 버드의 체험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삶에서 도피하고 있는지 또는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의 거의 끝까지 계속 도망만 치는 버드의 모습에서 고난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우리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생각하게 된다.


불현듯 버드는 자신이 도망만 치고 있음을 깨닫는 듯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동안 그가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런 과정 속에서 고민하던 그가 그 고민을 떨쳐버리는 것은 한 순간에 불과하다.


그가 술이든 히미코든 관계없이 현실을 잊으려고, 벗어나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그는 그가 처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는데... 그런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현실과 마주서는 것밖에는 없음을 알게 된다.


그가 술을 토해내는 것과 히미코와 가기로 한 아프리카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그렇지만 그가 받아들인 현실이 결코 녹록치는 않으리라.


소설은 그가 '인내'라는 낱말을 찾아볼 작정이었다(276쪽)고 끝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 길은 결코 쉽지 않다. 쉽지 않음에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버드. 그는 긴긴 방황과 도피를 끝내고 이제는 현실로 돌아왔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바로 희망과 인내다. 소설은 이렇게 희망과 인내로 끝난다. 가능성으로 끝나는 것.


버드의 며칠이 어두운 분위기로 시작하지만, 아니다. 그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댈 때 만났던 젊은 불량배들을 대하는 모습과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는 불량배들을 대하는 모습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가 불량배들을 알아보지만 불량배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버드는 도피의 늪에서 빠져나왔던 것이다. 늪에서 빠져나왔다고 해도 그 길이 결코 평탄치는 않겠지만, 그 길을 똑바로 걸어가겠다는 버드의 의지가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버드라는 [개인적인 체험] 속 인물이 겪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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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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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 아직 명나라에 여인들을 공녀로 바치던 시대. 공간적 배경은 제주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외딴 곳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던 곳. 


제주도에서 열세 명의 소녀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실종사건을 수사하던 민 종사관도 실종이 된다.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제주도에 오는 민환이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환이에게는 제주도에는 남겨두었던 동생 민매월이 있다.


도대체 왜 소녀들이 사라진 것일까? 누가 사건의 주범인가? 누가 환이와 매월을 도와줄 수 있는가? 두 자매를 중심으로 유선비라는 술주정뱅이와 문촌장과 죄인 백씨, 그리고 매월을 키워주고 있는 노경 심방. 촌장의 딸과 죄인 백씨의 딸. 환이의 고모, 제주 목사가 등장한다.


처음부터 환이는 난관에 봉착한다.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 단서는 없다. 그러다 하나하나 단서를 찾고 문제를 풀어가게 된다. 결국 범인을 찾아내고 사건을 해결하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이, 그 전 나라였던 고려가 겪었던 여인을 공녀로 바쳐야만 했던 역사적 비극이 나타난다.


이런 비극을 힘을 모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제주 목사는 실종이 아닌 가출로 판단하고 수사를 하지 않고, 촌장 역시 손을 놓고 있는 상태. 


이것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태도이고, 이런 태도는 오히려 지배층에서 더 잘 나타난다.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딸을 대신 보내려는 사람들. 사건의 중간 쯤 가면 사라진 소녀들은 누군가의 딸을 대신해서 끌려갔음을 짐작하게 된다. 힘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 저지른 일.


힘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 단지 힘있는 자들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륙이 아닌 제주도에서 소녀들을 구한다. 왜냐하면 지배층들이 자신의 딸을 대신하여 공녀로 보내려는 소녀를 내륙에서 구한다면 이는 사건이 공론화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제주도에서 소녀들을 구해 대신 보내려 한다. 


제주도. 내륙에 비해 차별을 받는 곳. 여기에 제주도 여인들은 더한 차별을 받으니, 이중 차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층민들의 삶은 더더욱 그렇다. 비밀을 밝히려는 소녀들은 죽음에 이르고, 이를 지배층들은 무마하기만 하고.


돈과 권력과 개인의 이익이 결탁했을 때 피해를 보는 사람은 하층민들이다. 이 하층민들은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슬퍼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기만 할 뿐.


그러다 환이가 등장한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문제를 알아가는 환이. 나라가 겪는 비극을, 힘없는 나라에서는 여인들이 더욱 수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환이를 통해서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아름답게 태어났다는 사실이 죄가 될 수 있는 나라. 자신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의지에 휘둘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인들. 환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살아왔던 환이.


환이의 세상은 아버지의 세상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실종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환이는 자기 세상을 만나기 시작한다. 자신과 비슷한 여인들이 겪는 어려움도 알게 되고. 


약한 자신을 의식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하지만 옳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옳음을 포기하지 않는 길이 자신과 동생 매월이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고.


범인은 결국 지배층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제주도에서 지배층이라고 해야 내륙에서는 보잘것없는 직위겠지만, 그럼에도 제주도에서는 나름 돈과 권력을 쥐고 있다. 물론 제주 목사로 내려온 사람처럼 자포자기하는 관료도 있지만, 토착민으로서 촌장의 지위에 오른 자는 강한 권력을 쥐고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환이는 문제를 해결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사라진 소녀들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수사 일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일지를 써나가는 환이. 그런 환이를 도와주는 매월. 두 자매가 갈등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의지해가는 과정을 통해 이들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서게 되는 환이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은데, 그 과정에서 공녀라는 역사적 비극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비극 앞에서도 계층에 따라 비극의 강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캐나다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영어로 쓰인 소설을 번역했다고 하지만 번역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작가에 대한 소개가 없이 또 책 표지에 옮긴이를 밝히지 않았다면 그냥 한국에서 한국어로 출판한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매끄럽게 진행된다.


때때로 다른 길로 들어서는 환이의 모습에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단서를 해석하면서 사건의 본질에 다가갈 때는 응원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 같은 여성으로서 알게모르게 도와주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 약자들의 연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까지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사건 해결 후에는 환이가 어떤 삶을 살지, 주체로 서게 되는 환이의 모습이 후일담으로 나와 흐뭇한 마음으로 책을 덮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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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없는 노동 - 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
필 존스 지음, 김고명 옮김 / 롤러코스터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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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노동(microwork)'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이크로(micro)를 작다는 뜻의 미세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데, 주를 보면 이 용어에 대한 통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microwork는 아직 우리 사회에 합의된 용어가 마련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미세노동'이라고 번역한다-옮긴이. 12쪽)


그런데 미세노동이라고 번역을 해서인지 이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주 작은 또는 세세한, 아니면 사소한 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작은 단위로 잘라서 전체를 볼 수 없게 만든 노동이라고 해야 한다. 


즉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을 왜 하는지, 그 일이 누구에게 어떻게 필요한지, 쓰임새는 어떠한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동이라는 말이다. 그냥 주어진 대로 아주 간단한 일을 짧은 시간에 해내야만 하는 노동. 그것도 적절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액수의 보수만을 받을 뿐이다.


왜 이런 노동이 만연하게 되었는지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선 플랫폼 자본주의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운영하는 플랫폼 기업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사업을 운영한다.


다만 정보를 얻은 다음 그 정보들을 분류해야 한다. 이 분류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자동화, 또는 인공지능, 로봇들을 활용할 수가 있다. 자동화된 기계들이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이런 정보를 분류하고, 라벨링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확보할까? 두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잉여 인력의 양성이다. 자동화로 실직한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시킬 작업을 한다. 실직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적은 보수에도 일을 할 수밖에 없다.


플랫폼 노동은 이렇게 잉여 인력을 기반으로 운영이 된다. 미세노동 역시 잉여 인력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화, 기계화로 인해 실직한 사람들이 다시 그런 자동화, 기계화를 강화하는 일에 투입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열악한 환경으로 몰아가는 일을 자신들이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 책에서는 잘 지적하고 있다.


'지금 가난한 피박탈자들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들의 공동체를 겁박하기 위해, 혹은 노동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들을 부지불식간에 훈련시키고 있다. 이른바 마르크스의 생생한 악몽보다도 더 악몽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기계학습 시스템에 원료를 공급하는 것이 노동의 일차적 혹은 이차적 목적이 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미세노동은 매우 심각한 노동의 위기를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128쪽)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할까? 당연히 노동자들의 단결이 필요하다. 단결을 통한 집단 행동이 필요한데, 미세노동은 노동자들이 모일 공간과 시간을 제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지면 이들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들과 더불어 이런 자동화-기계화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것을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쪽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미세노동은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최소한의 노동력을 투입하는 쪽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노동을 적게 하면서 삶의 다양한 면들을 추구하는 생활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생산성이 발달해서 사람들의 생활이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미세노동'이란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바로 임금노동에서 벗어났을 때나 가능하다.


이는 사회가 임금 사회가 아닌 무임금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희망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지만, 무임금 사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최소한의 생활을 기본소득이 책임져준다면 그때는 임금노동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임금노동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는 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을 미세노동으로 만들어 한 사람이 4시간 할 일을 4사람이 한 시간씩 또는 40 명이 6분씩 할 수 있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저자 역시 이런 노동방식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지금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보이지 않는 미세노동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들이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쪽이 아니라 더욱 나빠지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근거를 들어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저자는 미세노동이 반대로 사람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쪽으로 작동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겠지만, 이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미세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단결이, 그들의 행동이 필요함도 간과하지 않는다. 이 책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우리의 편리 속에 다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혹은 노동력 착취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회적 전환이 필요한 때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우선은 보이지 않는 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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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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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SF소설이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쓴 소설을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F라고 하고 싶다고 한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 이는 독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읽어달라는 주문과도 같다.


즉, 자신이 쓴 소설을 과학과 기술이 사회와 맺는 관계 또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읽고, 그 소설을 통해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당신이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만큼 지금 과학기술이 곧 이룰 미래의 모습이 소설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소설에서는 외계 생명체가 등장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 소설집에서도 원소기호의 이름을 딴 외계에 사는 생명체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그것도 불멸(부활)과 독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이는 독재정권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가 있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소설 '아스타틴'(229쪽-360쪽)이다. 란타넘족 원소기호에서 이름을 따오고, 이들이 절대권력을 잡기 위해서 싸우는 장면을 무협이나 폭력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설을 연상시키면서 전개하지만, 독재자가 영구 집권을 할 수 없음을,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존재가 나타남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한 편의 활극을 통해 독재정권의 말로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을 예외로 하면 나머지 소설들은 모두 배경이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다.


제목이 된 소설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증강현실을 다룬다. 증강현실로 자신이 보고자 하는 면만 볼 수 있는 세상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할까? 내가 심한 욕을 해도 상대는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로 번역해서 듣게 된다.


마찬가지로 비루한 현실을 보지 않고, 증강현실로 왜곡된 현실을 보게 된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실제와 일치할 필요가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러한 증강현실로 세상을 보게 되면 과연 그 세상은 어떻게 될까?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을 보거나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굳이 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다른 쪽으로 넘겨보면 '데이터 시대의 사랑'이 된다. 옛날에는 점쟁이를 찾아가 만남의 의미를 들으려 했다면 이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통계 또는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통계로 만남을 예측하는 세상이 된다면.


이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데이터에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데이터로 분석한 내 행동이 이러했기에,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데이터의 예측대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해지지 때문이다. 이는 증강현실로 현실을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삶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이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동한다고 볼 수 있는데, 데이터에 기반한다면 자유의지를 부정하게 된다. 이미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는, 예정설로 회귀하게 된다. 이것이 증강현실 속 인간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럼에도 장강명은 '데아터 시대의 사랑'에서 결말을 데이터 시대에서 인간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시대로 끌어온다. 이게 인간이라는 듯이.


이 불확실성을 다른 면으로 살펴보면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이 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차용한 이 소설은 인간의 뇌에 다른 사람이 겪은 경험을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탄생시킨 아이히만에게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경험하게 하는 기술이 있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상대의 경험을 자신의 뇌에 이식한다고 해서 그 경험이 온전히 자신의 경험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이식될 수 있을까?


그런 감정의 전이가 된다면 사람들이 서로 맺는 관계에서 불확실성이 없어질 것이다. 그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까? 저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 내가 똑같이 알 수 있다면? 또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상대가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면? 


그럼 인간 관계가 좋아질까? 오히려 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관계에서는 틈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과 상대가 함께 채워야 할 틈. 거리라고 해도 좋다. 이런 틈과 거리가 바로 불확실성에서 비롯하고, 불확실성은 함께 노력하면서 틈과 거리를 채우는 역할을 하기에 인간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우리는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 하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 때문에 오히려 더 생동감 있는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글쓰기에 적용해 보자. 작가들은, 굳이 작가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글을 쓰다가 막히는 때가 있다. (사이보그의 글쓰기)


글이 도통 써지지 않을 때,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이 불확실성에 빠지는 경우다. 그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뇌를 자극하는 기계가 발명된다고 하자. 그 기계를 사용하면 이런 단절을 겪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서 글을 자동적으로 쓰게 된다면? 


이런 글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자.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논쟁이 있겠지만 '뇌'가 빠지지는 않는다. 뇌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니까.


따라서 뇌를 중요하게 여겨서 뇌만 남겨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뇌에 대해서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작품과 비슷하게 뇌만 지니고 우주로 나아간 사람들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뜨거운 별에'다.


뇌를 로봇에 장착해서 금성을 탐사한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그 뇌를 또 이익집단이 통제할 수 있다면? 자신의 뇌지만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이 자극을 통해 뇌를 통제한다면 과연 그때의 나는 나인가? 오히려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니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점을 생각해야 한다. 뇌만 남은 인간, 아니 뇌를 다른 기계에 이식한 인간. 그리고 그 뇌를 다른 집단이 통제하도록 하는 인간. 이는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이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불활실성을 제거했다는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는 인간이 과연 행복할까? 작가는 인물이 탈출하는 것으로 그런 세상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데...


여기까지 언급한 소설들은 지금 우리 시대에 개발을 하려 하고 있는 기술들이다. 이런 기술들이 실용화된다면 그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우리가 행복한 사회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작가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의 삼단논법을 보자.


1. 오늘날 과학기술은 나의 삶과 내가 사는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2.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싶고,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

3. 그러므로 나는 과학기술을 통제해야 한다. (401쪽) 


이 삼단논법을 통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술이 우리 삶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그 변화는 바람직한가?'하고 폭넓게, 적극적으로 따져 묻고 싶다. 우리가 어떤 기술에 대해서는 개발하거나 사용하지 말자고 혹은 사용을 제한하자고 합의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다.' (401-402쪽)고 말하고 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이유다. 그리고 자신이 쓴 소설에 그냥 SF소설이 아니라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F라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에 있는 소설들 읽으면서 현대 과학기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논의해야 한다. 우리는 계속 이 지구에서 살아가야 함으로.


읽으면서 역시 장강명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에게 잘 읽히는 소설을 쓰는 작가, 사람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가 장강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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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시스 - 우주, 지구, 생명의 기원에 관한 경이로운 이야기
귀도 토넬리 지음, 김정훈 옮김, 남순건 감수 / 쌤앤파커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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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런 의문을 가진다. 무궁무진하다고 하는 우주도 처음 시작이 있었을 것인데, 그 시작을 알아내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했다고 하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어가고 있고, 그에 관한 증거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우주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곳이라고 하는데...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한다. 처음 시작을 하기 전에 존재하는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하면 더 이상 생각이 나아가지 않는다.


처음 이전에 무엇이 있다고 하면 처음은 처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인데, 빅뱅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공간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다면 그 공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책은 이러한 우주 탄생의 순간을 다루고 있다. 전문적인 학술 책이 아니라 과학에 관심있는 사람이 읽을 수 있게 한 책이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어렵다. 왜냐하면 현대에 확립된 물리학 이론들이나 천문학적 지식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아무래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읽으면서 무슨 소린가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럼에도 한 편의 서사시처럼 주욱 읽어가자 하면서 읽었다.


빅뱅.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진공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이 진공을 저자는 0에 비유한다. 0은 있으면서도 없는 숫자. 진공 역시 없음이 아니라고 한다. 이는 있는데 없고, 없는데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진공에서 빅뱅이 일어나고 순식간에 우주가 팽창하기 시작한다. 이때 우주를 구성하는 물질들이 있을텐데. 이 물질들이 질량을 지니게 되는 것은 뒤의 일이라고 한다.


질량을 지닌 물질이 등장하고, 그 물질들이 융합해 다른 물질을 형성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원소들이 등장하기까지는 며칠이 걸린다. 이런 원소들이 등장한 다음에는 행성들이 등장하게 된다. 지금의 우주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우주의 형성을 성경 창세기에 빗대어 7일로 장을 나눠 설명하고 있다. 우주 탄생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데, 여전히 어렵지만 막연하게나마 어떤 상이 잡히기도 한다. 뚜렷한 상이 아니라 막연한, 흐려서 실체를 알 수 없는 상이기는 하지만.


결국 우리가 밝혀내지 못한 암흑물질, 암흑에너지에 대한 연구가 더 깊어져야 우주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다.


빅뱅 당시에는 대칭이었다가 이 대칭이 깨지면서 빛이 웆에 퍼질 수 있고, 질량을 지니지 않았던 물질들이 질량을 지니게 되고, 우주가 계속 팽창하면서 다른 물질, 행성들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주장.


그런 주장의 끝에 지구와 인류가 나오게 된다. 이제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 의심을 하는 생명체인 인간이 등장하는 것이다.


광활한 우주를 탐색하는데, 눈에 띄지 않던 물질을 벌견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그 물질들이 우주 탄생의 시점에 대한 비밀을 우리에게 풀어놓을 수 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아직 우주의 비밀을 다 풀지는 못했지만 인류는 계속해서 우주의 비밀을 풀어나갈 것이며,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있는 우주를 발견하리라는 희망 역시 버릴 수 없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한 번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몇 번을 곱씹으면서 읽어야 할 책이다. 광활한 우주에 대한 탐구는 우리들 삶과도 관련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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