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에는 작가가 직접 등장한다. 그렇다고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 소설이니까. 그 점을 명심하고 읽으면 소설가를 등장시켜 작품을 전개해 나가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소설가가 직접 등장해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은 예술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소설과 시와 음악, 그리고 영화, 연극이 나온다. 사진까지 치면 다양한 예술이 나오는데, 그런 예술들이 융합되어 일본 현대사와 한 개인의 아픔이 융합되고 있다.


일본은 패전국이다. 지금은 패전국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지만, 그들도 패전이 된 다음에는 미군에 점령당한 경험이 있다. 점령군으로서의 미군. 하지만 일본인들은 점령군인 미군에게 어떤 반항도 하지 않는다. 


이런 미군에게 보호를 받고 성장한 한 여배우가 있다. 이 여배우를 중심으로 소설가인 클라이스트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미하엘 콜하스 계획'을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하기로 한다. 즉 그의 작품인 '미하엘 콜하스'를 각 나라에 맞게 각색하여 상영하겠다는 것.


본래 한국에서 하기로 했는데, 김지하의 투옥과 더불어 한국에서는 할 수가 없게 되고, 이를 일본에서 하기로 했다는 것. 김지하 석방 운동에 관여했던, 또 여러 작품을 발표했던 오에 겐자부로에게 시나리오를 맡기고 싶다는 것. 여배우로 출연하는 이미 오에 겐자부로도 알고 있던 '사쿠라' 씨와 만나고 오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 '사쿠라' 씨는 오에가 좋아했던 에드가 알렌 포의 '애너벨 리'라는 시를 인용한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던 것. 거기서 하얀 옷을 입고 있던 소녀. 그리고 그 영화를 어린 시절에 봤던 오에. 하지만 무언가 고통에 시달리는 사쿠라.


내막은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촬영 도중에 여학생들의 사진을 몰래 찍던 서양 작가의 활동이 밝혀지고, 영화가 무산될 때 사쿠라가 처음 나왔던 영화의 다른 버전을 보게 된 것. 거기서는 사쿠라를 보호해줬던 사람의 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공개되지 않았던 것은 어린 소녀의 몸을 유린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쿠라 씨는 그렇게 유린 당했던 것.


한국은 이렇게 일본에 유린당했던 과거가 명확하게 드러났지만, 일본은 미국에 당한 것들이 이 영화의 다른 버전처럼 아름답게 미화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인데... 진실은 소녀를 유린하는 미군처럼, 일본 역시 미국에 알게모르게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더 나아가야 한다. 30년이 지난 뒤, 그들은 다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이번에는 내용이 바뀐. 민간 전승에서 이어지던 내용을 계승해서.


일본에서 일어났던 민중반란,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여성, 메이스케 어머니에 대해, 사쿠라 씨가 충격을 받았던 애너벨 리의 영화 끝부분에 나오는 음악을 차용해서 하기로.


결국 작품 속의 작품에서도 여성은 유린을 당한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더 한발 나아간다. 너희가 우리를 유린했지만 우린 꺾이지 않는다고... 우린 더 나아갈 거라고. 그런 다짐을 보여주는 넋두리로 영화를 찍기로...


결국 소설은 시와 소설, 영화와 음악을 통해 한 개인이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미하엘 콜하스'라는 클라이스트의 작품을 통해서 반항하지 못하고 있던 일본의 당시 모습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미하엘 콜하스'는 남의 나라 일인 것처럼 여기는 일본 사회.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도 이러한 '미하엘 콜하스' 늘 있어 왔음을... 그것을 메이스케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 있으며, 이런 저항의 중심에 여성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여성은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서, 결국 역사의 주역이 되고 있음을, 사쿠라와 메이스케 어머니의 존재를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멜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곱 편의 수상작이다. 다 다른 결을 지니고 있는 소설들. 다양한 소설을 맛볼 수 있는 소설집이라고 할 수 있다. 


김멜라, 이응 이응

공현진,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김기태, 보편 교양

김남숙, 파주

김지연, 반려빚

성해나, 혼모노

전지영, 언캐니 밸리


한편 한편이 모두 여러 생각을 하게 하지만, 그 중에서 김멜라 소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응 이응이라니. 이응 이응을 붙여서 '응'이라고 해야 하나 '0ㅣ0'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 소설이 성을 다루고 있으니 '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읽으면서 문정희가 쓴 시 "응"이 생각나기도 했고... 이 시 구절 중에 '너와 내가 만든 / 아름다운 완성'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때 '응'에서 이응 이응은 너와 나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김멜라 소설은 이와 다르다. 오히려 빌헬름 라이히의 '성'에 대한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성적 억압이 파시즘을 유발한다는 라이히의 주장. 그래서 성적 욕구의 해소가 중요하다고 하는 그의 주장이 어쩌면 이 소설과도 통할지도 모른다.


'이응'이라는 기계가 소설에 나온다. 성적 욕망을 해소해주는 기계다.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하면 된다. 하지만 이 기계로 인해 성적 불만은 해소된다.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성적 만족을 취할 수가 있다.


그런 이응이라는 기계를 한 축으로 하면서도 또 할머니를 등장시켜 죽음과 삶을 연결시키기도 한다. 죽음과 성이라는 것이 연결될 수도 있음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데...


사람이 가장 원하는 욕구와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이 바로 '성과 죽음' 아닐까. 하지만 할머니를 통해서 죽음 역시 인간이 해소해야 할 무엇이라고 하고 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쌓아둔 응어리. 그것들을 계속 쌓아두면 삶이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그런 응어리들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과학기술의 힘으로 '이응'을 만들어 성적 욕구를 해소한다고 해도, 기계만으로 안 되는 것들도 있다. 


어쩌면 그 이유로 소설에서 '위웅'(우리-we-의 포옹)이라는 모임이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상대를 존중하면서 상대와 함께하는 그런 모임.


개인의 욕구를 해소해주는 기계 '이응'과 함께 서로를 느낄 수 있는 모임인 '위옹'이 소설에 함께 나오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의 욕구가 다면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기계 속에서 상상을 통해 해소될 수 없는, 관계를 통해서 해소되어야만 하는 욕구들이 있음을, 그런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제목이 그냥 '이응'이 아니고 '이응 이응'이 아닐까. 단수가 아닌 복수. 관계 속에서 만들어가고 해소하는 그런 상태.


공현진의 소설은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김기태 소설은 입시 교육에 찌든 학교 교육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단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육, 또는 교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다른 소설들도 할 말이 많지만, 그 중에 한 소설을 더 덧붙인다면 성해나의 '혼모노'라는 작품이다. 일본어로 된 제목이지만 '진짜'라고 번역할 수 있다. 가짜가 아닌 진짜. 그러나 우리 삶은 대부분 진짜를 흉내내는 가짜로 이루어져 있지 않나. 


오죽하면 자신의 진짜 모습이 어떤 건지 자신도 모르겠다고 하지 않나. 소설에서는 무당이 나온다. 신과 접신한 존재. 신이 들어와 신의 말을 전달해주는 무당이 진짜 무당인가, 신의 말을 흉내내는 무당은 가짜 무당인가. 답은 뻔할 것 같다.


신의 말을 전달해주는 무당이 진짜 무당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지? 예측의 적중도로 알 수 있나?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는 정해져 있는가? 


신이 자신에게서 빠져나간 뒤에도 처절하게 굿을 하는 박수 무당을 통해서 진짜와 가짜를 생각해 보게 된다.


자신의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박수 무당을 통해 과연 신은 누구에게 깃들어야 하는지, 아니 굳이 신이 깃들지 않더라도 그렇게 처절하게 굿을 하는 무당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사실 이 소설집은 오래 전에 사놓고 지금에야 읽었다. 오래 전에 산 이유는 단 한 가지. 어차피 읽을 소설인데, 작가들이 발표하지 않은 짧은 소설들을 모아 놓은 부록을 덤으로 준다고 해서 산 것.

한편의 소설을 읽고 그 부록을 읽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부록의 표지와 그 부록에 실려 있는 작가의 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젤소민아 2024-08-20 11: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김기태 작가의 행보는 놀랍네요~~~2년전인가 신춘문예 당선, 작년에 이상문학상 우수상, 젊은 작가상 수상, 올해 신동엽 문학상 수상! 본인도 숨가쁘실 듯..ㅎㅎ 물론, 작품 좋더라고요!

kinye91 2024-08-20 11:39   좋아요 1 | URL
김기태 작가 이름은 많이 들었어요. 요즘 많이 읽히는 작품을 쓰는 작가더군요. 이 수상집에 실린 작품도 좋아서, 이 작가의 작품들 찾아서 읽어봐야겠어요.

페크pek0501 2024-08-20 15: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하신 책을 갖고 있습니다. 사 놓고 아직 못 보았어요. 2024 신춘문예 당선소설집을 읽고 있는데(어찌나 작품 수가 많은지) 몇 작품이 남아 이걸 다 읽고 그걸 읽을 생각입니다.^^

kinye91 2024-08-20 16:09   좋아요 2 | URL
저도 부록 때문에 미리 사놓고, 천천히 읽었지만, 소설에 시효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천천히 여유 있게 읽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죽이고 싶은 아이 - 2021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 죽이고 싶은 아이 (무선) 1
이꽃님 지음 / 우리학교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두 친구. 남들이 보기에 친해 보이기도 하고,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이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


남들의 눈에 비친 이 아이들의 모습 중에 어떤 것이 진실일까? 과연 둘 사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친구란 우정을 나누는 사이라고 한다면, 친구라는 말에는 이익이라는 말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관계, 그런 관계를 맺고 지내는 사이를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친구 사이에서는 친해 보인다는 말도, 이용한다는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냥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두 친구 사이를 사람들이 다르게 평가하는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을테다. 그 이유를 찾아가는데 이 소설의 핵심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를 '위악과 위선'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싶어졌다. 주연이는 위악, 서은이는 위선. 그렇게 딱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아니, 소설 속 서은이는 위선이 아니라 선함을 지닌 아이다. 


그런데 그런 선함이 가장을 통해 나타나는 경우가 바로 주연이와의 관계에서다. 선함. 능력 없는 선함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다. 남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 


"넌 착하니까 ...:란 말 속에서 그런 힘없는 착한 사람을 이용하려는 태도가 숨어 있다. 하지만 이런 착함을 남에게 보여줄 때도 있다. 무언가 자신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때 착함으로 무장할 수도 있는 것. 이것을 '위선'이라고 해도 좋다.


서은이는 착하다. 본성이 착하다. 가난한 집에서 살지만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는다. 남에게 군림해 본 적도 없다. 그렇게 착한 아이를 대부분의 영악한 아이들은 무시한다. 대놓고 따돌릴 수도 은근히 따돌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것에 대해 대응을 하지도 않는다.


이때 서은이에게 다가온 주연. 집이 부유하고,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는 주연이는 서은이의 친구가 되어 준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운동화나 옷도 준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주는 법을 잃었다.


기대에 찬 부모, 자신들의 결핍을 딸에게서 충족하려고만 한 부모 밑에서 자란 주연은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잘 모른다. 늘 받고만 살았기 때문에 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기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악으로 대응한다. 속으로는 한없이 약한데, 그 약함을 감추기 위해서 '악'을 가장한다. '위악'이다.


그러니 주연은 서은이에게 자신의 온 마음을 주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마치 군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군림하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것은 군림이다. 자신의 뜻대로 서은이를 움직이게 하는 것.


이것은 주연이 생각하기에 '위악'이지만, 서은에게는 '악'이다. 견딜 수 없는 행위이다. 지금은 없어서 참고 있지만, 언젠가는 참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하는. 자신의 행동이 자신의 마음을 감춘 '위악'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았으련만, 주연은 그것이 '위악'인지 알지 못하고 좋은 행동, 친구를 위한 행동이라고 착각을 한다. 


왜? 서은이가 마치 그것을 진심인양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주연이 앞에서 서은이는 '위선'이었으니까. 진실을 감추고, 지금 필요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 관계. 그것을 지탱해주는 것은 바로 주연이의 비위를 맞춰주는 것. '위선'이 필요하다.


자, 어떤 사람이 더 약한가? '위악'은 약한 자신의 내면을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다. '위선'은 자신의 착하지 않음을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 꾸며내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내면의 강함은 '위악'보다는 '위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집안의 경제 형편과는 다르게 내면은 서은이 훨씬 강하다. 단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겉으로는 강한 것 같은 주연은 내면의 약함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위악'으로 나타날 수밖에.


이 둘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은 바로 이 '위악과 위선'을 판단하려 한다. 아니 그들은 '위악과 위선'을 판단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과 선'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주변인들에게 보인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악과 선, 위악과 위선'을 우리가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음을.


무엇보다 친구라는 관계에서는 이러한 '위악과 위선'이 작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친구란 그렇게 꾸며 보이는 관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신들을 드러내고, 그것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과연 '친구'가 있는지를 묻게 한다. 두 아이를 둘러싼 다른 아이들을 봐도 그렇고... 두 아이의 관계도 그렇다. 이는 두 아이의 관계를 통해서 학교 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도 생각하게 한다.


우정을 키우는 장으로서의 학교. 옛말이다. 지금은 '위악과 위선'이 판치는 관계들만 있는 학교가 아닌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2권이 나왔던데,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를 건너 너에게 갈게 - 제8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39
이꽃님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은유'가 느린 우체통에 써 넣은 편지가 어떻게 과거의 다른 '은유'에게 전달이 된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편지. 일본 작가가 쓴 [나미야 백화점의 기적]은 현재와 현재를 잇는 편지로 치유가 되는 과정이라면, 이 소설은 현재의 은유가 과거의 '은유'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엄마를 기억하지 못하는 현재의 은유. 아빠가 재혼을 한다고 하는 바람에 반발심이 생기고, 늘 뚱한 표정과 무덤덤한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아빠가 미소를 짓고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에 적응이 안된다. 게다가 엄마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은유.


평소에 하던 행동과 달라진 아빠 때문에 쓰게 된 편지. 그리고 받은 과거의 은유가 보낸 편지. 여기서 작가는 우리에게 은유의 엄마에 대해서 추측하게 만든다. 도대체 은유의 엄마는 어떻게 된 것인가? 왜 아빠와 할머니-할아버지는 은유에게 엄마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엄마에 대한 은유의 추적이 과거의 은유 도움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이름이 같다. 그리고 현재의 은유에게는 딱 편지 올 시간만큼만 흐른다면, 과거의 은유에게는 편지 한 통을 받고 쓰고 다시 받는데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한참 어리던 과거의 은유가 어느덧 동갑, 언니, 그리고 이모 나이까지로 성장해 갈 동안, 현재의 은유는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터놓게 된다.


고민. 마음 속에 쌓아두면 병이 되지만 밖으로 표출하면 없앨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해소되기도 하고. 즉 누군가와 함께 고민을 나누면 그 고민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현재의 은유가 그렇다. 물론 편지를 통해서 청소년들이 좋아할 내용도 작가는 보여준다.


청소년기에 하는 가족에 대한 고민은 편지를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고, 또 청소년기에 꿈꾸던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을 이들의 편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같은 시기를 거쳐간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서 현재의 은유는 점점 아빠를 이해하게 되고, 과거의 은유가 쓴 편지를 통해 엄마가 누구인지를 서서히 눈치채게 된다.


작가는 도처에 은유의 엄마에 대한 복선을 깔아놓고 있는데, 그러면서 왜 아빠가 은유에게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추측을 하게 한다. 


그에 대한 답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 아빠의 편지에 실려 있고, 과거의 은유가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알게 된다.


엄마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아빠가 왜 은유에게 무덤덤했는지, 사실은 무덤덤이 아니라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해서,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였음을 알게 되는데...


소설은 은유가 아빠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과거의 은유와의 편지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가족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님을, 가족이라서 더 많은 갈등이 있을 수 있음을, 그래서 가족이라는 말로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표현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열어야 함을 보여준다.


지금 자신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 가족이라고 해도 자신의 몸 속에 또 마음 속에 함께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문학동네 청소년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만큼 청소년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 수 있는 소설이다. 특히 가족에 대해서 불만을 지니고, 왜 우리 가족은 이래? 하는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부모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청소년에게 이 소설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과거의 은유를 통해 현재의 은유가 가족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현재 자신에게 연결되어 있는 엄마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편지 형식을 통해서 잘 전개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술, 인간을 말하다 - 예술로 만나는 삶의 기쁨과 슬픔 전원경의 예술 3부작
전원경 지음 / 시공아트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예술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준다. 다른 동물들과 구별할 수 있는 요소가 바로 예술 아닌가 하는데... 이 책은 미술과 음악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이 지닌 요소들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다양한 인간 요소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젊음, 사랑과 결혼, 실연과 이별, 병과 죽음, 예술가의 고독, 밤, 미녀와 팜 파탈, 신화, 노동과 휴가, 집과 식탁, 친구, 자연과 계절, 미인과 누드, 여행과 유학, 경제, 군주의 초상, 정치


인간들의 삶이 바로 이런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책은 이러한 삶의 요소들을 미술과 음악을 통해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다양한 그림들이 나와서 눈을 호강하게 해주고, 각 장이 끝날 때마다 큐알 코드로 그와 관련된 음악들을 들을 수 있게 해주고 있어서 귀도 즐겁게 된다.


무엇보다 삶을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에 이 책의 장점이 있겠다. 결코 짧은 분량이 아니지만, 장황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만큼 그림을 보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가 겹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작가가 그린 그림이, 작곡한 음악이 어디 한 분야에만 머무르겠는가. 인생의 다양한 면모를 그림과 음악을 통해서 나타냈기 때문에, 이 책에 같은 작가가 여러 번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삶이 반복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 반복이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 다양한 변주들을 통해서 우리 삶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예술을 통해서 그러한 삶의 다양성을 살펴보는 것도 좋겠단 생각이 든다.


이 책의 후반부에 예술과 정치 부분이 있는데, 예술가와 정치가 아니다. 예술가는 사람인만큼 당연히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지녀야 한다. 그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작가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작품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것과 작품성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즉, 정치적 잣대로 작품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작품에 굳이 정치적 잣대를 들이밀 필요도 없고. 작품을 작품 자체로 보면서 그 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가 정치든 경제든 아름다움이든 무엇이든 작품을 통해 잘 드러냈는가를 평가해야지 외적인 기준으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을 지금 우리 사회에 적용한다면 예술을 좌파, 우파로 나누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지를 알 수 있다. 작품 속에 주제가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주제를 드러내는데 성공했는지 아니면 어거지로 그냥 밀어붙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렇게 다양한 삶의 부분들을 미술과 음악을 통해 들여다보게 해주고 있는 이 책. 더위로 지쳐가는 요즘, 시간을 내서 읽으면 어느 정도 시원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