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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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깨달았다. 아, 이 소설들을 한 편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캐나다 판 '여자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고.


각 소설들이 독립적이지만 읽다보면 연결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래, 주인공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어린 여자아이부터 죽음을 앞둔 여자까지, 여자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잘 표현되고 있다.


제목이 된 소설 '도덕적 혼란'부터 보면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이 나온다. 그녀는 도덕적이다.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남의 어려움을 쉽게 넘기지도 못한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남자와 함께 산다. 여기에 그 남자의 공식적인 아내에게서 이런저런 간섭을 받는다. 마치 우리나라 옛날 '첩'처럼. 


소설을 읽다보면 이렇게 살아갈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착하다는 말을 넘어서서 이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삶이 아닌가 하기도 한다. 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의 아들들이 온다고 주말 내내 나가 있어야 하기도 하고, 그 아이들에게 이것해라, 저것해라 하는 부인의 간섭을 받는 삶이라니...


하지만 여자는 자기 할 도리를 다한다고 한다. 남자는 그러한 일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는다. 간섭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여자에게 미룬다고 보면 된다. 자신이 나서서 정리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들이 지니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여자 (작중 이름은 '넬'이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서는 '넬'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는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삶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물론 부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하고 있겠지만) 여기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결코 능동적이지 않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수동적이라고 볼 수도 없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넬.


그러니 도덕적 혼란이다.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 모른다가 아니라, 여자들에게 강요되는 도덕적인 굴레들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통이란 말이 폐지된 사회에서도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예전 도덕이 강요된다. 남자에게는 그럴 수 있지라고 넘어가는 일들도 여자에게는 비난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넬'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는데, 다른 작품들에서도 남자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래브라도의 대실패'에서 아버지가 등장할 뿐. 


이 소설집의 대부분은 여성 화자가 중심이다. 그리고 여성들의 삶이 중심을 이룬다. 직장을 가졌어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상태. 여기에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 여성이 처리해야 하는 상황. 


이혼 문제마저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남자와 함께 살면서 그 사람의 감정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생활. 그런 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모습.


어린 시절에는 동생을 보살펴야 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돌보고, 아이를 낳으면 다시 아이를 양육해야 하고, 이제 나이 든 부모가 있으면 그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여자의 삶.


소설집 첫 작품이 '나쁜 소식'인데,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이 주인공이다. 첫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다.'(26쪽)


여기에 마지막 작품인 '실험실의 소년들'에는 엄마가 남겨둔 종이에 "완벽하게 아름다운 날!!!'(382쪽)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그들의 삶에 고난이 많았을지라도 그들 역시 아름다운 날들을 지나왔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날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삶에서 몇 안 되는 아름다운 날이 아니라, 아름다운 날들이 더 많은 그런 삶들을 여성들이 누려야 한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까닭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여기에 이제 여성들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존재임을 말하면서 이 소설집은 끝난다. '나쁜 소식'으로 시작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여성이다. 그 점을 마지막에 실린 '실험실의 소년들'에서 '소년들의 운명은 이제 내게 달려 있다'(384쪽)고 여성 서술자가 말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이제 여성은 남성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주체로서 등장하게 된다. 


결국 캐나다 판 '여자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집에서는 여성이 삶의 주체로 우뚝 섬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편 따로 떼어서 읽어도 무방하지만 전체를 다 함께 읽는 것이 훨씬 작품을 이해하는데 좋겠단 생각이 드는 작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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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로 만나는 아프가니스탄 푸른사상 교양총서 19
박일환 지음 / 푸른사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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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얼마 전에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있다. 탈레반이라는 이름도 많이 들어본 조직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자, 그곳에서 살 수 없는, 우리나라를 돕던 사람들을 망명이라는 이름 대신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로 오게한 것.


그들은 우리나라에 자리잡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아프가니스탄은 우리에게는 낯선 나라다. 그냥 전쟁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는 나라, 탈레반이 불교 유적을 파괴한 나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을 알고 있을까? 잘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갖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와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우리와 관계가 없지 않다. 그러니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보다는, 문학과 영화를 중심으로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자들이 아니라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문학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알려진 작품들이 많지 않아서 이 책에 소개된 문학작품이나 영화가 생소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문학과 영화를 내용 중심으로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으며, 그 작품들에 나타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생활 모습,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알려주고 있다.


소련과의 전쟁, 탈레반 집권,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다시 탈레반 집권. 현대에 이르러 아프가니스탄은 전쟁에서 벗어난 시기가 많지 않다.


자신들의 나라를 건국했지만 종족별로 갈등이 있으며, 이러한 갈등이 봉합이 안 된 상태에서 소련과 미국의 진주가 있었고, 이 틈을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이 파고들기도 했다. 지금은 다시 탈레반이 집권하고 있고, 탈레반은 여성들의 활동을 금지(공식적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아프가니스탄 소설과 시를 통해 그 나라의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고,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다른 나라의 시선으로 본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룬 영화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시각이 지닌 문제점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을 다룬 작품들을 언급하면서 여성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그럼에도 그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 또는 다른 나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음을. 그래서 여전히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은 계속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아프가니스탄 소설이나 영화들이 대부분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만큼 그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이들이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는 이유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세계 시민들에게 알리고 아프가니스탄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함이라는 것... 


그렇다면 이제 우리나라에 온 특별기여자들 가운데서도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또는 주제로 한 작품활동을(시든 소설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등등) 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들의 예술도 우리 사회에서 자유롭게 발표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생소한 아프가니스탄의 문학과 예술을 이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유튜브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영화 소개한다. [학교 가는 길]이다. 이 영화를 보면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란 감독이 만들었지만 배경은 아프가니스탄이고,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아이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참고로 이 영화는 하나 마흐발바프라는 영화 감독이 만들었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고 한다. (이 책 153쪽 - 159쪽 참조)





영화 볼 수 있는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vblXsh0h5w0


https://www.youtube.com/watch?v=jNVJuqVrk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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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 항해하는 글쓰기 - 망망대해를 헤매는 고독한 작가를 위한, 르 귄의 글쓰기 워크숍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보은 옮김 / 비아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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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 있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글쓰기에 관한 책도 많은데 굳이 외국 작가가 쓴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글쓰기가 한국어를 잘 활용한 글쓰기고 우리나라 사람들 정서에도 어울리기 때문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따라할 수 있어서 좋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그 점을 찾아내지 않으면 이 책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다른 글쓰기 책처럼 글쓰기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고, 예시문을 실어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로 글을 써보라고 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대부분의 글쓰기 책에서도 보인다. 비슷한 글쓰기 책들이 넘쳐나는 시대 왜 르 귄의 글쓰기 책을 읽어야 할까?


우선 르 귄은 꼭 이렇게 쓰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반드시(이 반드시라는 말은 시험에나 통용되는 그런 말이 아닐까 싶다. 다양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정답만을 찾아야 하는 우리나라 시험 제도에서는 '반드시'가 잘 먹혀든다. 글쓰기 책들도 그래서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라'를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자신에게 맞는 글쓰기가 있다는 점이 르 귄의 책을 관통한다. 그래서 르 귄은 이렇게 쓰면 좋다고 하지만 그것이 꼭 정답은 아니라고 한다. 다양한 예문을 보여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여럿이다. 그 여럿 중에 고를 수도 있고, 자신이 정답을 만들 수도 있다.


책 제목이 왜 항해하는 글쓰기겠는가! 항해는 바다에서 가는 일이다. 망망대해(茫茫大海). 엄청난 바다에서 길을 찾아 항해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좌초하고 만다.


바다에서 좌초하지 않고 항해를 잘하려면 길을 잘 찾아야 한다. 해도를 보고 항로를 따라가야 한다. 바로 이 해도가 '글쓰기 책'이다. 항로를 따라가는 일, 이것이 글쓰기다. 작품이다.


그런데 해도가 단 하나뿐인가? 아니다. 해도는 많다. 또 같은 바다라도 길은 여럿이다. 항로가 여럿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이미 밝혀진 항로로만 갈 것인가? 그것은 안전한 길이다. 무난한 길이다. 그렇지만 자기만의 길은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도 없다.


마젤란, 바스코 다 가마, 콜럼버스 등이 왜 지금도 이름을 남겼는가? 망망한 바다에 자신의 항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왜 승리를 했겠는가? 바닷길을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바로 글쓰기다. 르 귄이 말하는 글쓰기도 이렇다. 기존의 해도와 항로를 참조해야 한다. 그렇다고 꼭 그것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지도에 없는 길도 가야 한다. 그런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르 귄의 글쓰기는 글쓰기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이 점이 좋다. 글에서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로 글쓰기 책을 시작하고 있다.


'자기 글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의식할 줄 아는 기술은 작가에게 필수적이다. ... 좋은 작가는 좋은 독자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귀가 있다. 우리는 대개 글을 눈으로만 읽지만 많은 독자가 예민한 내면의 귀로 글의 소리를 듣는다. ... 서사 작가는 내면의 귀로 자신의 글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쓰면서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21쪽)


음성과 문자는 다르다고 하지만 문자에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좋은 독자가 갖추고 있는 자세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작가 역시 자신의 글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 카프카가 생각났다.


시인이 아닌 카프카 역시 자신의 작품을 친구들 앞에서 낭독하지 않았는가. 이 낭독을 듣고 감탄한 친구들. 만약 낭독이 실패로 끝났다면 그 작품에는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고치려고 하지 않았을까. 물론 카프카는 낭독하기 전에 고치고 또 고치고 했겠지만.


이렇게 소리와 문자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것은 곧 글을 쓸 때 문법이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문법! 이건 시험 볼 때나 필요한 것 아니었나 하지만, 아니다. 우리가 말하기를 잘한다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는 상황에 맞춰 어법에 맞는 말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기에도 어법이 중요한데, 글쓰기에서랴. 르 귄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간과하기 쉬운 점을 잘 지적해주고 있다.


소리와 어법으로 글쓰기 책을 시작해서 마지막은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이 퇴고로 끝난다. 그런데 이 퇴고를 '메우기와 건너뛰기'라고 한다. 벌어진 틈은 메우고,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띄어야 한다고. 이 과정에서 르 귄은 말의 무게를 이야기한다. 


'글을 줄이려면 단어들의 무게를 잴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중에 어떤 것이 스티로폼이고 어떤 것이 묵직한 금인지 찾아낼 수 있다. 글을 가혹하게 줄이다 보면 문체가 강화되고 메우기와 건너뛰기를 둘 다 소화할 수 있게 된다.' (200쪽)


말에도 무게가 있고, 당연히 단어에도 무게가 있다. 그 상황에 맞는 말은 무게가 있는 말이고, 그런 말은 '금'이 된다. 하지만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은 일회용인 '스티로폼'이 된다.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르 귄의 글쓰기 항해술은 글쓰기라는 바다를 어떻게 헤쳐나갈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르 귄은 이 책을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아닌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고 했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 글쓰기 워크숍(합평회)을 진행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혼자 연습할 수도 있게 구성되어 있다. 물론 르 귄이 책 뒤에서 알려주고 있듯이 여러 사람이 모여 합평회를 하면 더 좋겠다.


글쓰기 방법뿐이 아니라 다양한 작품의 예문들을 만날 수도 있어서 좋은 글쓰기에 관한 책. 그렇다고 이 책을 무슨 법전 섬기듯이 모시면 안 된다. 그건 르 귄이 바라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해도로 삼아 자신만의 항로를 개척하길 바라면서 쓴 책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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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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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술술 읽힌다. 글들이 긴박하고 빠르게 사건을 이끌고 간다. 잠시 망설임 틈도 없이 내용이 전개된다. 짧은 호흡으로 글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 새, 끝에 이른다. 이런 결말이 나버렸네. 이렇게 결말이 나는군 하고 소설 읽기를 끝낸다.


두 편의 소설이 길지는 않다. 중편 소설 두 편이라고 봐도 좋다. 하나는 책 제목이 된 '감상적 킬러의 고백'이고 또 다른 하나는 '악어'다.


둘 다 살인 사건이 등장한다. 제목에 킬러란 말이 들어갔으니 당연히 살인이 나온다. 킬러다. 의뢰받은 사람(소설에서 이 킬러는 표적이라고 한다)을 죽이는 일. 그는 깔끔하게 처리한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 이것은 자신의 킬러 생활이 끝나는 것으로 나아간다.


킬러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는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생활을 없앤다는 말이다. 그런 킬러가 다른 사람과 비슷한 생활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과 비슷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킬러로서 지녀야 할 차가움을 잃는다는 말이니.


하여 그는 마지막 의뢰를 끝으로 실업자가 된다. 마지막 의뢰, 멕시코 사람을 표적으로 받았을 때 든 느낌. 그리고 그가 한 말. 마약을 공급하던 사람인데, 그는 주로 미국에 싼 값으로 마약을 공급한다. 이유는? 미국을 타락으로 이끌려고. 미국에 당한 멕시코 사람들을 위해서.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을 지나치듯이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세풀베다가 사회적 현실을 눈 감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킬러가 등장하는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다. 킬러는 무감각해야 하지만, 왠지 라틴아메리카 사람을 표적으로 삼는 일에는 망설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소설에서 자신의 생활을 파탄내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 결론이 나기까지 소설은 빠르게 진행이 된다. 킬러의 입장에서 서술이 되면서. 


이 소설에는 라틴아메리카가 처한 현실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감출 수 없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


반면 '악어'란 소설은 자본이 환경을 파괴하고, 원주민들의 삶을 파탄내고 있음을 살인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보호해야 할 동물을 죽여 밀수입하면서 환경을 파괴하는 자본의 횡포. 그런 자본의 횡포에 맞서는 원주민들. 그런 갈등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살인 사건을 쫓아가는 형사(보험사 직원)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하나하나 밝혀질 뿐이다.


빠른 속도로 사건은 결말에 이르지만, 이 과정에서 환경보호를 위한다는 자본가의 딸이 지닌 이중성을 만나게 된다. 원주민들을 도와주지만 결코 원주민이 될 수 없는 사람. 그러기에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삶터를 지키기 위해 이국 땅까지 와서 환경을 파괴하는 사람을 죽이지만, 자신들도 돌아가지 못하고 죽게 된다.


결국 파괴된 환경에서는 원주민들 역시 삶을 영위하기 힘든 것이다. 그들이 몇몇 자본가들을 처치한다고 해도 삶터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그만큼 자본은 깊숙이, 치명적으로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악어'란 소설을 통해 세풀베다는 그 점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국가가, 자본이 자행하는 환경 파괴, 또는 삶의 방식을 파괴하는 일은 몇몇의 복수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개인적인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풀베다의 이 두 소설을 읽으면서 문제 해결을 하기 위해서는 개인을 넘어서 집단이(또는 사회가) 함께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킬러가 표적을 없앤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또 개인적으로 한 사회를 타락시킨다는 복수를 행한다고 해서 원주민들의 삶 또는 자신이 꿈꾸는 세상이 펼쳐지지는 않는다. 개인보다는 좀더 넓고 깊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함을 두 소설에 나오는 살인들을 통해서 세풀베다는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경 파괴, 전쟁 등을 보라.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정 개인을 없애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제도와 구조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개인들이 모여 더 큰 힘을 발휘해야만 한다. 그래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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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 문학동네 시인선
최승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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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발간한 시집이 199권이 넘었다.  50권, 100권, 200권째는 그동안 시집을 냈던 시인들의 시를 모아놓은 시집을 (50권은 기념 자선, 100권, 200권은 티저 시집이다) 냈고, 또 두 번 이상 시집을 낸 시인들이 있으니, 총 시인은 200명이 채 안 된다.


그럼에도 시집에는 시인의 말들이 실렸으니, 시인의 말이 그들의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도 해줄 수 있고, 때로는 시의 이해를 방해할 수도 있다.


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시인의 말은 그야말로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때로는 시인의 말이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올 때도 있다.


그런 시인의 말을 만나면 반갑다. 그리고 기쁘다.


하지만 가끔 시인의 말이 시를 이해하기 힘들게 할 때도 있다. 이럴 때 시인의 말은 '사족'에 가깝다. 물론 대부분 시인의 말은 화룡점정이라고 해야겠지만, 가끔은 도대체 시도 난해한데, 시인의 말은 그런 난해함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차라리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면 좋았으련만 하는 그런 시인의 말은 사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공연히 뱀발을 그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예전에 문학의 갈래를 정리하는 글에서 시는 '세계의 자아화'라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즉 시는 자아의 외적 대상을 자아로 끌어들여 자아로 말하는 문학이라고 해석해도 된다. 그렇다면 시는 세계를 자신에게로 끌어온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시를 읽는다는 것은 자아로 들어온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 즉 존 버거의 말을 빌리면 세계와 자아의 거리를 없애는 것.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 사람과 동물, 사람과 식물, 동물과 식물 등등 존재하는 것들의 거리를 없애는 것이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인의 말을 읽으면서 시와 다른 존재와의 거리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런 시인의 말이 바로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문학동네에서 펴낸 이 책, 시인의 말 모음집은 또 한편의 시집을 읽는 것처럼 읽어도 좋다. 대부분의 시인의 말이 '사족'보다는 '화룡점정'에 가까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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