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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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을 보면 다윈을 떠올린다. 다윈이 진화론을 펼치게 만든 곳. 갈라파고스. 학교 다닐 때 핀치 새에 관하여 배운 적이 있다. 고립된 섬에서 다르게 진화한 새. 이 새를 통해 진화의 고리를 발견했다고. 


그럼 소설 제목이 갈라파고스면 뭘까? 이 섬에서 일어나는 일? 진화와 관련 있는 사건?


보니것의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풍자에 놀라기도 하는데, 이번에 그는 인간의 뇌가 일으키는 사건을 문제삼고 있다. 지나치게 큰 뇌라고 하는데, 이때 지나치게 크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조차도 위협할 만큼 인간을 지배하는 뇌라는 말로 해석하면 된다.


이 소설에서 갈라파고스로 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여행을 기획한 사람들도 있고, 화려한 유람선에 (군함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부유하거나 유명한 사람들을 태우고 갈라파고스를 여행하려는 계획.


그러나 세계는 인간의 통제불가능한 뇌로 인해 위험에 빠지게 되고, 원인 모를 질병으로 대다수의 사람이 불임이 된다. 여기에 경제난으로 세계는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하여 여행이 취소되고 폭동의 혼란 속에서 우연찮게 배에 탄 사람들이 갈라파고스 제도의 한 섬인 산타로살리아 섬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이제 이들은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된다. 새로운 인류로 진화하게 된다.


다윈이 갈라파고스에서 핀치 새를 보고 진화론을 생각했음에 소설은 갈라파고스의 한 섬인 산타로살리아 섬에 사람들을 떨쳐두게 된다. 남자 하나와 여자 여럿. 그리고 이들은 다시 대륙으로 나가지 못하는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니... 여기서 인류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소설에서 보니것은 인류는 손이 퇴화하고 지느러미가 발달한 거의 어류와 비슷한 종으로 진화한다고 말하고 있다. 백만 년이 지난 후에 인류의 뇌는 아주 작아지고 손은 없어지고, 바다에 자신들의 생명을 맡기게 되는 종이 되는 것.


이런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이끌어가지 않는다. 백만 년 후라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인류가 이미 그렇게 변했다는 것을 유령이 된 서술자를 통해 말하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종횡무진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인류가 인류를 파멸에 이르는 무기들을 개발했고, 그것들이 우연히 사용될 수 있음을, 인류의 파멸이 어떤 큰 결심과 결정적인 순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연찮게 일어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가 인류를 파멸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뇌가 하는 역할이고, 이러한 뇌를 잘못 사용하는 인간들이 있음을 냉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하여 그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쓰는 말을 이 소설에서도 반복하고 있다. 물론 [제5도살장]에서는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을 쓰고 있다면 이 소설에서는 '에이, 할 수 없지 뭐.... 어쨌든 그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제목은 아니었잖아.'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다른 지식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을 예로 들고 있다. 이는 그가 과학기술이 위험하고, 인류가 반드시 추구해야 할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반전 사상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를 서술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해병대 출신의 서술자. 그는 스웨덴으로 망명해 배를 만들다 죽는다. 그리고 유령이 되어 인류가 파멸하고 새로운 인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백만 년을 통해 지켜본다.


이렇게 인류의 파멸과 새로운 인류로의 진화를 다루고 있지만 이 소설은 공포를 자아내지 않는다. 가볍게 웃음을 유발하면서 우리를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이 풍자의 힘이다.


보니것 특유의 풍자. 반전 사상, 인류를 위협하는 과학기술 만능주의, 잘못된 지도자의 위험성 등을 날카로운 풍자, 그러나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웃음으로써 잘 비판하고 있다.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 '백만 년 전, 사람이 하던 일을 최대한 많이 기계에게 넘기려는 그 이해하기 힘든 열의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뇌가 전혀 쓸모없다고 다시 한번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49쪽)라는 말.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일을 모두(그렇다. 많이가 아니라 모두다) 넘기려고 하고 있다. 하다못해 인간의 독특한 영역이라는 예술까지도 넘기려 하고 있으니, 보니것이 오래 전에 비판한 모습, 우리의 뇌를 이렇게 스스로 쓸모없다고 인정하는 꼴이 아니겠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이런 뇌를 가진 인간들이 능력 없고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갈 지도자를 선택하는 모습. 그것을 갈라파고스에 갈 선장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으니...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적용이 되는 말이다.


소설 속의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야 않겠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대로 가면 인류는 서로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반전, 평화주의자가 된 것도 그러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인데, 서술자 역시 베트남 전쟁을 겪은 인물로 설정해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여전히 세계는 전쟁 중인데...


그가 소설에서 '나는 이제 백만 년 전 내가 살았던 시대를 '바람직한 괴물들의 시대'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 시대를 살던 괴물 같은 인간들 대부분이 몸보다는 인격 면에서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이었기 때문이다'(94쪽)고 하고 있는데,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1986년이다. 과연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더 나아졌는가? 작가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한 때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 속처럼은 아니겠지만 인류 역시 파멸의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갈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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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한 말들 - 차별에서 고통까지, “어쩌라고”가 삼킨 것들
오찬호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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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인권, 공정, 연대.


참 좋은 말이다. 누구나 쓰는 말이고, 자신은 이것을 잘 지킨다고, 실천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고.


이 말들에서 하나의 연관 관계를 찾는다. 굳이 찾아야?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관통하는 네 단어를 고르라면 이 넷이기 때문에, 이 넷이 제목이 된 '납작한 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선 납작한 말들이라는 것은 입체적인 것을 눌러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적용을 하면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사람을 말을 통해서 하나로 규정해버린다는 뜻으로 쓸 수 있다.


하나로 규정된다는 것, 남에게 규정당하는 사람은 주로 배제의 대상이 되거나 무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인권이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유, 인권, 공정, 연대를 끌어오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말들은 납작하게 눌려서는 안 되는 말이다. 이 말들은 우리가 우리를 연결해주는, 함께 사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말들이다. 아니, 말을 넘어서는 실천이다.


저자는 그 점을 이 책을 통해 계속 말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이 말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쓰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이 말들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자고. 그래서 나만이 아니라 남도 판단할 수 있는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눈 앞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자고. 그것이 성숙한 사회고 문화 사회라고. 다양한 사례를 들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유, 인권, 공정, 연대에는 '관계'라는 공통점이 있다. 홀로가 아니라 관계다. 자유는 홀로와 연관이 깊을 것 같지만 아니다. 세상에 혼자 존재한다면 자유란 말조차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숨쉬는 것이 당연할 때 공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듯이.


그래서 자유란 말을 쓰는 것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관계다. '자유는 '없는 자'만이 느낀다'(88쪽)고 했다. 없는 자가 있으면 있는 자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있는 자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자가 '자유, 자유'한다. 이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혐오할 자유, 착취할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혐오고 착취다. 그것을 착각하면 안 된다. 따라서 '관계'를 망각하고 내뱉는 자유라는 말은 '자유'가 아니다.


인권 역시 마찬가지다. 인권은 상대적이 아니다. 절대적이다. 하지만 아직도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여러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인권 역시 '관계'에 해당한다. 이 관계들을 통해서 인권 개념도 다르게 쓰인다. 그러면 안 된다. 


'공정'이야 당연히 홀로가 아닌 상대를 전제하고서 하는 말인데, 이 공정을 시험으로 정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시험의 결과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공정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관계가 개입되어 있는지, 시험을 잘 본 것이 과연 나만의 능력일까? 시험 성적의 결과는 남과 관계없는 나만의 것일까? 아니다. 이 시험 결과에는 수 년에 걸친 관계들이 걸쳐 있다. 사회, 문화, 경제, 여기에 대인관계까지. 그러니 공정은 관계일 수밖에 없다. 내 결과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연결된 결과라는 것.


그러니 우리(이때 '우리'는 편가르기 하는, 내 편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내 편을 뜻하는 우리는 연대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동맹일 뿐이다. 이는 연대가 아니라 배제다. 배제를 통한 자신들의 연대라고 해야 하나. 그런 관계에는 연대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 그건 담합이다.)는 연대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바꾸기 위해서는 홀로가 아니라 함께여야 하기 때문에. 이때 연대는 다른 존재를 동등하게 여기는 동등한 관계의,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행위를 하기 위한 관계맺기이다. 이런 연대들이 있어야 사회가 변한다.


이렇게 이 책은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고 그들을 노력이 부족했다고, 또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사회를 돌아보고, 함께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납작한 말들이 판치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또한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면서 자신도 납작한 말을 쓰고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자고, 그러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고...


하여 저자의 말로 글을 맺는다. 이 말에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좋은 사회란, 바늘구멍을 통과한 '누구에게만' 주목하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바늘구멍을 넓힐 지혜와 한쪽을 개천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 연대를 갖추는 동시에, 설사 개천일지라도 그게 개인의 굴레가 되지 않도록 편견을 깨야만 가능하다.'(188-189쪽)


'좋은 사회란 어떤 개인이 대단한 결심 없이 평범하게 살아도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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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송세월
김훈 지음 / 나남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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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수필집이다. 1948년에 태어났다고 하니 70을 훌쩍 넘어 곧 80이 되는 나이다. 예전에 60이 되면 이순(耳順)이라고 했다. 귀가 순해진다고... 그리고 70을 고희(古稀)라고 해서, 귀한 나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70이면 노인이라고 명함 내밀기도 그렇다. 80넘은 사람이 수두룩하다. 90에 고종명해도 좀 이른 나이라는 소리를 듣는 시대가 되었다. 8899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젠 100세 시대다. 그런 시대에 60이나 70은 청춘이다. 그래야 한다고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70-80대의 몸이 이렇게 많은 인구를 차지한 적은 최근의 일이다.


몸은 아직 예전의 상태를 이겨내지 못하니, 정신은 말짱한데, 몸은 여기저기에서 이상 신호를 보내온다. 그렇다. 확실히 나이를 먹은 것이다. 몸이 그것을 일깨워준다. 아마 김훈도 그러리라.


이 책의 앞부분에서 자신이 아끼던 등산장비를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이야기가 있으니... 또한 병원에 가는 이야기, 친구들의 부음을 듣고 문상을 가는 이야기가 있고, 그리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오랜 이야기, 6.25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으니, 이 분이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이듦. 지혜로워짐. 나이든 사람의 말을 흘려듣지 말라고 했는데, 그만큼 살아오면서 몸으로 겪은 지혜가 있기 때문이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나이쯤이면 말보다는 귀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순(耳順)이라는 말, 귀가 순해진다는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말을 자신의 잣대로 구분하여 듣지 않는다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줄 수 있는 귀를 지녔다는 말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자신의 틀에 가두지 않고 그 사람 자체로 보고 듣는 나이가 되면 자연스레 남과의 관계 정립에서 지혜로워진다. 또한 특정 경계에 매어 있기 보다는 경계를 허물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그것이 어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은데... 요즘은 60-70대에도 어른스럽지 못한 나이든 사람이 많으니... 특히 정치권을 보라. 이들 대부분은 이순(耳順)인데도 귀가 순하기는커녕, 오히려 귀가 더 사나워졌다.


자신의 잣대를 굳건하게 지키고, 자기 틀을 절대로 깨지 않으려 하며, 남의 말도 자신의 틀에 끼워맞추는 듣기를 하는 경우, 그리고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물리적 시간이 몸을 채우고는 있으나, 현대 의학의 힘으로 과거 중년의 몸을 지니고, 정신은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필을 읽는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삶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어떤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면 읽으면서 그 선입견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으니까.


김훈이 한 이 말... 


'나는 공적 개방성을 갖춘 글 안에 많은 독자들을 맞아들이려는 소망을 갖지 못한다. 나는 나의 사적 내밀성의 순정으로 개별적 독자와 사귀고, 그 사귐으로 세상의 목줄들이 헐거워지기를 소망한다. 글을 써서 세상에 말을 걸 때 나의 독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다. 나의 독자는 나의 2인칭(너)이다.' (331쪽)


그렇다. 이 책은 김훈이 내게 건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는다. 물론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다. 김훈은 내 앞에 없으므로. 하지만 일방적이지는 않다. 내 앞에 없는 김훈에게 말을 건네면서 읽을 수 있으므로.


이렇게 나와 작가의 소통을 할 수 있는 책이 바로 수필이다. 이런 수필을 읽을 때는 자신만의 틀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틀을 내려놓고 작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면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왜 그런지 생각해 보고. 속으로 반박도 해보고. 또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읽다보면 귀가 순해진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므로. 나 홀로만 세상에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홀로들이 모여 함께하는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므로. 


김훈의 사적인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 그러한 일들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책에 실린 글 중에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언어'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데... 순한 귀를 갖기 힘들게 하는 상대를 어떻게든 추락시키려는 언어들.


그런 언어들이 판치는 사회는 견디기 힘든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이런 책을 읽으면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김훈이라는 작가가 '말-언어'에 대해서 얼마나 고심하고 고민하고 글을 쓰고 말을 하는지 알아가는 것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말, 서로가 서로를 배척하는 말. 소통이 아니라 불통의 말. 그런 말들이 넘쳐나는 현실은 우리가 만들지 말아야 한다. 김훈의 이 말,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의 문명화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소통 불가능한 언어의 창궐입니다. 지금, 언어는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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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 - 세상을 경악시킨 집단 광기의 역사
맥스 커틀러.케빈 콘리 지음, 박중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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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라는 말은 전통 종교와는 다른 신앙 체계를 보유한 종파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한때는 어떤 가수나 텔레비전쇼의 열성 팬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가, 찰스 맨슨 사건을 겪은 이후 '파괴적 컬트'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는 타인이나 자신에게 해악과 살해를 체계적으로 자행하는 집단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19쪽)


한 마디로 말하면 누군가를 맹신해서 그 사람의 말을 전적으로 따르는데, 그 사람조차도 자신의 신념에 대한 회의 없이 맹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맹신이 여러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게 되었는데, 이를 통칭해서 '컬트'라고 한다.


다른 나라, 아주 오랜 예전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세계 최강대국이자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나라인 미국에서 이러한 컬트 집단이 많이 발생했다 사라졌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도 컬트 집단이 있었다고 하니, 컬트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그것도 특정 개인이 여러 사람을 이러한 길로 이끄는데, 이 책은 그러한 컬트 집단들에 대한 이야기다. 읽으면 섬뜩하다. 이렇게 사람들을 호도하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데... 살해는 기본이고 집단 자살로 몰아가기도 하니...


예전 우리나라 오대양 사건도 '컬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컬트에 관련되는 사람이 다양해서, 특정한 성향의 사람들만 컬트에 빠져든다고 할 수 없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사회에서 엘리트 집단에 속하는 사람도 있고, 부유한 경제력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으니, 이들조차도 컬트에 빠지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현란한 말솜씨, 그리고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어서 자신에게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것, 계속 되는 사상의 주입으로 그것만이 옳다고 여기게 만드는 사고 개조, 그리고 성적인 억압 등등.


참 다양한 컬트 사례가 나와 있는데, 컬트를 주도한 사람들의 성향은 대략 이해가 되지만, 이들에게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점을 알고 싶었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이 책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컬트가 어떻게 해서 세력을 얻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결말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사건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어서 과거 컬트 사건을 아는 데는 도움이 된다.


이러한 컬트를 주도한 사람들은 대략 세 가지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를 심리학자들이 성격 특성의 '어두운 3요소'라고 한다고 한다. 그것은 사이코패스성, 즉 후회의 결여와 악성 자기도취증, 즉 가학적 과대망상, 그리고 마키아벨리즘, 즉 자기 이익을 위한 타인 착취(78쪽)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들이 이런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남들을 끌어들이고 착취한다고 하지만,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어떤가다. 이들 홀로 컬트를 만들고 운영할 수는 없는데, 이 책을 보아도 2인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컬트 지도자의 권위를 이용해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는데, 역시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한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마음으로부터 컬트 지도자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일까? 그들 중에는 여전히 컬트 지도자를 추종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 이쯤되면 맹신이라고 할 수 있다.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사고 개조를 당했다고 봐야 하나, 컬트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 틈을 파고들어온 컬트 지도자에게 자신을 의탁하게 된다. 그리고 무언가 이상하다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경우도 있고, 한번 빠져든 컬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여전히 컬트 집단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회유 및 협박을 지속적으로 받는다는 것, 어쩌면 그런 점이 두려워서 그냥 컬트 집단에 속한 사람들, 자의가 아니라 어쩔 수 없다고 그냥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행동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긴 사람들.


그런 사람들... 그렇지만 문제는 이들의 행적이 범죄라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거나 해치고, 성 착취를 하고, 그리고 경제적 착취까지... 


결국 컬트에서 사람들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은 사회다. 사회에서 컬트와 컬트 아닌 집단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준으로 다양한 집단을 판단해야 한다. 아니,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 속에서는 더 볼 수 있는 것이 없고, 비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 컬트는 그래서 외부와 접촉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폐쇄적인 집단에 대해서는 좀더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컬트와 컬트가 아닌 집단을 구분할 수 있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공유해야 한다.


그래야 컬트에 빠지는 일을 줄일 수 있다. 또한 컬트로부터의 해악을 방지할 수 있다. 남의 일, 옛날 일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세심하게, 비판적인 눈을 지니고 살펴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을 읽은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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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9수를 시킨 엄마를 죽였습니다
사이토 아야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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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제목을 보고 '4세 고시, 7세 고시'라는 말이 떠올랐다. 무슨 고시? 의대에 보내기 위한 준비를 만 4세부터는 해야 한다는 말. 예전이라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7세부터 할 텐데, 이제는 그마저도 당겨졌다는 말이다.


그러면 4세부터 의사가 되기 위해 준비한 아이들이 행복할까? 설령 그렇게 자란 아이가 의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의사가 아픈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 의사라는 직업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의사인 본인에게도 그 의사에게 진료와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도 그다지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가 중학교 입시와 고등학교 입시를 폐지한 이유는, 아이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입시에 쪼들리는 일을 막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오로지 입시에 매달려 다른 것을 해보지도 못하고, 다른 경험도 못하고, 주변의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 여기는 풍토를 없애기 위해서 (다른 의도가 있었을지 몰라도 표면적으로는) 중고등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평준화 정책을 썼는데...


다시 의대로 인해서 4세, 7세 고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으니... 해마다 의대에 가기 위해서 다른 대학에 합격해도 등록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고, 성적 우수자들은 먼저 의대를 지망하는 이 현실에서... 이 책은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라는 생각이 드는 것. 의대에 너무 목숨을 거는 것. 아니 정말 의사가 되고 싶어 의대에 가기 위해 몇 수를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본인이 그렇게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다면... (이 말은 좀 생각해볼 문제가 있는데,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의사, 의사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부모의 희망이 자신의 희망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의지라고 하지만 그것이 가정 환경에서 만들어진 경우도 있음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의사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지니고, 어렵더라도 도전을 하겠다고 하면)


하지만 자신은 별 생각이 없었는데 부모의 희망에 의해 의대에 가야만 한다면, 그것이 한번에 가지 못하고 몇 번을 거쳐서 가야 한다면... 자신은 포기하고 싶은데 부모가 안 된다고 계속 하라고 한다면...


그것도 못 하느냐고, 왜 노력을 안 하느냐고, 의대에 못 가면 집을 나가라고... 넌 자식도 아니라고 한다면? 이런 일을 9년이나 겪는다면?


하다하다 안돼 간호대에 갔는데, 다시 조산사가 되라고 한다면? 자신이 간호대에 적응해 수술실 간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꿈을 이루기 직전까지 갔는데, 부모가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한다면...


아예 자식 취급을 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패륜이다. 존속 살해는 가장 해서는 안 될 패륜임이 확실하다. 여기엔 이론을 제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바로 '그러나'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렇게 자식에게 강요하는 부모가 있을까? 우리 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는데, 아닐 수도 있는가? 일본은 좀 다른가? 아닐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아카리의 아빠는 살인을 저지른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족이니까."(221쪽)


이 의미를 아카리가 알고 있었다면, 엄마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아빠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자신을 믿어주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런 때 극단적인 행동을 자제할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을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존재가 있음을 아니까.


자신이 쉴 곳이 있음을 아니까. 그런데, 아카리는 살인을 하기 전까지 몰랐다. 그냥 자기 고민 속에 빠져 지냈다.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음을.


그래서 엄마에게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 처음엔 해방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몬스터를 무찔렀다. 이제 안심이다.'(33쪽)라는 말을 통해서 이 점을 알 수 있는데, 엄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자신이 죄인처럼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이때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아빠를 만나고, 재판장의 판결을 들으면서...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깨달음이 너무 늦게 왔지만, 늦게라도 왔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사람도 많으니.  


논픽션이다. 사실에 기반했다.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엄마의 강요로 자신의 삶을 잃었던 딸이 엄마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 일이다.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지금 복역 중이라고 한다. 물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지만, 죽은 사람은 살아오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되기 전에 무언가를 했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그것도 힘든 일이다. 엄마와의 생활에 갇혀 있었을 테니까. '엄마는 악마 같은 간수였고 나는 비굴한 죄수였다.'(167쪽)고 하고 있었으니, 이 말 곱씹을 필요가 있다. 정말 4세, 7세 고시를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부모들은 그러한 '간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일본도 우리와 같이 의대에 가기가 몹시 힘들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의사가 안정적인 직업이기 때문이다. 의대 합격선이 높아진 것은 일본도 거품 경제가 붕괴한 1990년대 이후라고 하니, 우리나라도 'IMF'이후에 의대 합격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니... 자식이 잘살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이야 이해하겠지만, 이 잘산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살인을 저지른 딸에게 '가족이니까'라고 말을 하는 아빠, 그렇게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족쇄가 되는 그런 일은 없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모든 가족이니까 무조건 받아주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 잘못 이 말이 악용이 되면 가족이니까라는 말로 강요하게 된다. 엄마는 가족이니까라는 말로 자식을 속박했다면, 아빠는 다른 의미로 즉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가족이니까라고 했다고 봐야 한다.)


참 처참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읽어볼 필요는 있다. 적어도 부모가 '몬스터나 간수'가 되어서는 안 돼야 하니까.


아카리가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 성인이 된 자식을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계속 간섭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부모를 둔 자식의 심정이 어떻겠는지... 


이 책 앞부분에 나와 있는 이 말, 부모 역시 자식에게서 독립할 필요가 있음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부모나 자식이나) 서로의 삶이 다름을, 각자의 삶이 있음을 인정해야 함을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생각한다.


'아카리가 엄마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은 9년이나 의대 재수를 강요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엄마의 폭언과 집착으로 얼룩진 지옥 같은 시간을 벗어나 이제 겨우 자기 발로 서게 되었는데 또다시 그 지옥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했기 때문이었다. 

20대에는 어떻게든 버티고 흘려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9수 끝에 대학이라는 바깥세상을 경험한 지금은 그렇게 버틸 자신이 없었다. 나이도 이미 서른이었다. 아카리에게 입시 지옥은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곳이었다.'(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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