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씽 -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의 가치
앤디 앤드루스 지음, 김정희 옮김 / 드림셀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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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고 싶으면 높고 멀리 보라고 한다. 당연하다. 자신의 앞만 보고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에서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높고 멀리 보되, 발걸음은 현실에 디디고 있어야 한다는 것.


즉 이상은 높게 잡지만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현실 속에서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멍이 숭숭 뚫리게 된다.


큰 것만을 추구하다가는 틈새가 벌어져 어느 순간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큰 것을 추구한다면 작은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작은 것들이 큰 것을 이룬다. 


이 책은 그 점을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상은 크게 가져야 한다. 저자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성실하게 실천하라는 말에는 결국 큰 것을 이루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들어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간단하다.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만 해서는 안 된다. 자신만의 관점을 지니되, 맹목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들을 제시하고 있어서 설득력을 지닌다. 게다가 어렵지 않게, 누구나 실천할 수 있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좋은 말들로 가득한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힘들다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으라고 하지 않는다. 어려움을 견뎌야 할 때는 견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견딤 자체가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자신이 미식 축구 선수 생활을 할 때 온갖 두통에 시달려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을 때, 사실 그 자체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고통만 가중시키는 선수 생활이었지만, 저자의 아버지는 계속 하라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미식 축구를 그만둘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저자의 아빠가 했다는 말 


'그만두는 것이 당장은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게 널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고, 또 그걸 정상을 향한 마음이나 태도를 갖게 만들 수도 있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만두는 것이 정상이기도 하지. 계속 도전하고 밀어붙이는 것보다 그만두는 것이 항상 더 쉬운 법이란다.'(107쪽)


자, 그만두는 것은 사소한 일일까? 아니다. 그것은 포기다. 도전하지 않는 삶은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 그러니 자꾸 실패하고 견디는 과정을 거치게 해야 한다. 이런 일을 언제 경험해야 할까? 바로 학창시절이다.


젊은시절에 도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심해야 한다. 있는 존재를 보지 않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 그렇게 꾸준히 뚜벅뚜벅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다른 이들과 다른 성취를 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면 성취의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지 않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지 목표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성공했다고 할 수 있으니...


사소한 것들이라고 무시하지 말자. 그 사소함이 바로 위대함을 이룬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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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운명 - 세기의 걸작들은 어떻게 그곳에 머물게 되었나
이명 지음 / 미술문화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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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유명한 그림들이 있는 미술관이 있다. 왜 그 그림이 그 자리에 있을까? 이런 질문은 해보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같은 화가가 그린 그림이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뜻하는 곳에 있기도 하고,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있기도 한다. 


그림은 화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지만, 의도와 다르게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이미 화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그 자신의 운명을 찾아간다.


이 책은 그러한 그림들이 왜 그 장소에 있게 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그냥 '그 미술관에 있어'가 아니라 어떤 경로를 거쳐 그 미술관이 소장하게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그림들도 참 다양한 운명을 겪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가령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라는 그림은 피카소 자신이 루브르 박물관에 걸리길 원했지만, 그림을 인수한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걸리게 되었다는 이야기.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모나 리자>가 왜 루브르에 있는지, 모네의 <수련>이란 작품이 일본에 있게 된 계기도 알려주고 있고, 마티스의 그림이 미국에 전시되어 있는 이유 등등이 잘 설명이 되어 있다.


여기에 어떤 작가들의 작품은 작가의 주장 또는 여러 이유로 인해 거의 한 곳에 모이게 되었으며 (로스코, 고흐, 달리의 작품들,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딴 공간을 지니게 되었다), 로댕의 작품이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된 이유 등도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을 읽으면서 작품도 자기들의 고유한 운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책은 그러한 작품에 얽힌 이야기와 더불어 작품 감상도 할 수 있고, 작가의 생애도 짤막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 작가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는 여러 장점을 지닌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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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
브라이언 키팅 지음, 마크 에드워즈 그림, 이한음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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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과학자들을 천재라고 부른다. 과학계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룬 그들을 보통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천재들이 우리들과 다른 사람일까? 천재들은 우리와 다른 존재로 본다면, 노력이라는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미 타고난 천재들이 업적을 이룰테니까.


그런데 아니다. 천재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보통사람이다. 보통사람인데 남들보다 뛰어난 업적을 이룬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고 모두가 천재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 상을 받았다는 것은 물리학계에서 뛰어난 성과를 이루었다는 얘기니... 그들이 성공을 거둔 이유를 찾으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품을 수 있겠다.


이 책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9명의 과학자를 만나 질문하고 대답을 듣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대담에서 이 책이 견지하고 있는 방향은 이들은 보통사람과 다른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보통사람과 같지만 노력을 하고, 남들을 배려하고 함께 경쟁하면서 존중하는, 그럼에도 하나의 이론에 머물지 않고, 편견에 물들지 않고 끊임없이 증거를 찾아 노력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또 성과를 이룬 다음에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 무엇보다 이들이 지닌 자세는 겸손이다.


겸손은 자신을 높여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지 않는 자세다. 자신을 열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바로 겸손이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주변에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많다. 함께할 사람이 많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은 마음이 닫혀 있지 않다. 다른 사람에게 열려 있다. 열려 있으므로, 자신의 주장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주장도 살핀다. 살필 때 편견을 지니지 않는다. 객관적인 증거가 나오면 흔쾌히 인정한다.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과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다.


이 책에 나온 아홉 명의 과학자들이 공통으로 지닌 태도가 그렇다. 자신의 업적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들은 꾸준히 발전해온 과학에 한 발을 더 내디뎠을 뿐이라고... 또한 자신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은 후대들이 해결할 것이라고.


지금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고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자신들은 그러한 미래를 위해서 지금 할 일을 하면 된다는 자세를 지닌 사람들이다.


이들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이유에 관한 학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과학에 관한 책이 아니다. 삶에 관한 책이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책이다. 그것을 과학자들을 빌려 말하고 있을 뿐이다.


삶을 살아가는데 과학자와 비과학자를 나눌 필요가 없으니, 어떤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지닌 자세는 다른 사람들도 배울 필요가 있다. 물론 배운다고 똑같이 따라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방향에 대한 도움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책이 아니라 삶의 자세에 대한 책이다. 읽으면서 그래 이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이 말이 성공은 운이 좌우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노력(기술)이 좌우한다고 해석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


즉 누구에게나 운은 70%정도 있다. 삶의 성공 여부를 가리는데 운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장소에 그 시대에, 그 사람들과 함께 어떤 일을 했다는 것, 그것은 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지는 않는다. 바로 기(技) 30%가 작동해야 한다.


즉 실력, 노력이 반드시 작동해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들은 운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력에 의해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 30%의 노력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실패한다면? 그것은 70% 운에 속한 일이다.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또는 다른 세대에게 넘기면 된다는 것. 그렇게 되기까지 30%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면 된다는 것을 이 책에 나오는 과학자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런 점에서 청소년, 청년들이 읽으면 좋겠단 생각이 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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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의 문 앞에서 - 홍세화와 이송희일의 대화
홍세화.이송희일 지음 / 삼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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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과 이송희일 영화감독이 만나 대담을 한 책이다. 총 여섯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논의를 했다. 두 사람 모두 진보라고 할 수 있으니,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진보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때 말하는 진보는 정치권을 진보와 보수로 나눌 때 쓰는 말과는 좀 다르다.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에서 진보 쪽이라고 불리는 민주당을 진보라고 하지 않으니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탈성장, 차별과 혐오, 죽음의 행렬, 한국 진보정치, 교육, 언론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이야기를 읽어갈수록 마음은 답답해졌다.


이 책이 나온 것이 2022년인데 그동안 홍세화 선생은 돌아가셨고, 코로나는 끝났으며, 이 책에서 언급한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어 우리나라 정치를 몇십 년 뒤로 돌려버리고 만 사건까지 일어났으니...


이들이 다룬 내용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즉 진보하지 않고 오히려 퇴보하고 만 현실에 씁쓸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다.


홍세화 선생이 한 이 말이 여전히 우리 사회를 관통하고 있지 않나 한다. 비상 시국에 나돈 말들이 다 이런 선동의 말이지 않나 싶었으니 말이다.


'저는 한국 사회가 선동은 가능하지만 설득은 무척 어려운 사회라고 봅니다.' (227쪽)


설득을 하려면 우선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한다. 자신을 객관화 하고, 다른 사람도 역시 객관화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득을 하기 전에 자기 주장만을 펼치는 선동을 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설득을 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있는가? 교육은 오히려 일방적인 생각을 주입받는 형식으로 진행되어 오지 않았던가.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찾아 써야 하는 그런 형식. 


이런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 어른이 되면 자연스레 내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그것도 힘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답을 찾고, 그것을 받아들여 남에게 강요하는 형태로 결정되지 않을까 한다.


이것이 바로 선동이 난무하는 사회다. 교육과 마찬가지로 언론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우리나라 언론이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오죽하면 '기레기'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이런 기레기라는 오명을 벗으려면 언론이 진실을 보도해야 하는데, 진실을 보도하기 위해서는 선동이 아닌 설득이 필요하다. 자신들에 대한 비난도 참고 견디면서 다른 사람들을 진실에 다가가게 설득하는 일, 그것이 언론이 할 일인데... 언론이 이 역할을 하지 못하면 사회는 그야말로 선동에 휩싸이게 된다. 이 선동에 의해 진실은 가려지고, 설득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따라서 두 사람의 대담에서 우리나라 정치 지형을 진보와 보수로 규정하지 않고, 홍세화는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는 두 정치세력에 포박당해 있는데, 하나는 '하면 안 되는 행위를 주로 저지르는 정치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일을 거의 하지 않는 정치세력'이라는 생각이요.'(324쪽)


'하면 안 되는 행위를 주로 저지른 정치세력'이 어느 정당인지는 이 책을 읽어보지 않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정당은 달랑 둘이다. 원내 교섭단체를 결성할 수 있는 정당이 둘이니... 둘 중 하나겠지. 그러면 나머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정치세력'이 어느 정당인지도 알 수 있다.


꼭 이 구분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타당한 구분이다.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는 것보다는 현실에 더 다가간 구분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전히 하루에도 몇 명씩 노동자들이 죽어가고 있는 이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 표현이 스스럼 없이 발화되고 있는 이 현실에서, 성장 성장, 오로지 경제 성장이 목표라는 듯이 성장우선주의를 외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이 현실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정당이 바로 진보 정당이다. 그런 진보 정당이 있는가? 질문을 해야 한다.


진보 정치에 대한 대담이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아마 읽기 불편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양 거대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대담이 쓴 약이 아니라 헛소리, 구름 따먹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정치란 무엇인가? 나하고 생각이 같은 사람들하고만 하는 것이 정치가 아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정치다. 누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 명확하지 않은가. 바로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이때 다른 사람들을 다른 정당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다. 꼭 정당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 시민들, 다양한 의견을 가진 시민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런 다음에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람직한 방향에 맞는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대의민주주의다.


공론장을 형성하고, 공공성을 추구하는 의견을 따르는 것, 대의란 바로 이것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민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포퓰리즘이라고 폄하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의견만을 밀어붙이는 정치인, 그들을 소환할 방법이 없다. 시민들의 뜻과 다른 정치를 하는 정치인을 소환할 수 없는데 어떻게 '대의 민주주의'가 되지? 우리들 의견을 대신하지 않고 제 의견만 고집하는 정치인을 견제할 수 없다면, 그것은 공론장을 형성하지 못하고, 공공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사회가 될 뿐이다. 대의 민주주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이 책에서 홍세화 선생이 말한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327쪽. 19세기 반동적 보수주의자 조제프 드 매스트르가 한 말이라고 한다)는 말, 명심해야 한다. 


즉 국민이 정부를 견제하고 견인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부가 하는 대로 자신들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은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


제대로 국민의 뜻을 대의할 수 있는 정부, 그런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이 대담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데, 특히 내가 지니고 있었던 관점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준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서로 다른 많은 생각들, 그 생각들이 부딪히고 부딪쳐 서로의 생각을 모아가는 과정, 그것이 공론장의 형성이고, 이러한 공론장은 공공성을 실현하는데 이바지할 것이다. 지금은 이런 공론장을 만들어야 할 때다. 두 사람의 대담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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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4-12-25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읽어보겠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kinye91 2024-12-25 13:07   좋아요 1 | URL
다른 관점을 만나게 해주는 책이었어요. 그래서 제게는 의미 있는 책이기도 했고요.

숲노래 2024-12-25 1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무리 하나와, 하라는 일을 안 하는 무리는, 둘 다 왼오른도 아니고 진보보수도 아니지만, 둘이 왼오른이나 진보보수인 척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 눈높이를 그대로 보여주는 잣대이지 싶어요. 그래서 이 슬픈 우리 눈높이부터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우리 삶자리부터 스스로 바꾸어 가는 일을 여는 하루부터 이 나라를 바꿀 만하리라고 느낍니다.

kinye91 2024-12-25 17:01   좋아요 0 | URL
숲노래 님의 댓글을 읽으니 자신을 사람에 비춰보라는 경어인이란 말이 생각나네요. 그들 무리를 우리가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 삶자리부터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겠지요.
 
한국 여성문학 선집 1 - 1898년~1920년대 중반 여성문학의 탄생 한국 여성문학 선집 1
여성문학사연구모임 엮음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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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여성문학의 탄생이라고 했지만, 사실 여성문학은 예전에도 있었다. 알려진 것만 해도 조선시대에 한시를 쓴 사람부터 가사 작품에는 여성이 쓴 작품들이 꽤 있었으니, 근대 여성문학의 탄생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여성문학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은 여성이라는 자각을 담은 문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조선시대 문학에도 여성의 자의식을 담은, 여성이라서 겪는 어려움을 표현한 작품들이 꽤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남녀평등이라는 개념이 사회에서 통용이 되고, 실현이 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라고 할 수 있으니,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등장으로 이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것들이 서서히 여성들도 할 수 있는 일로 인식되고, 또 실제로 한 여성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책은 한국 여성문학 선집 7권 중에 첫번째 권이다. 근대 들어 여성들을 중심에 놓는 글쓰기를 다루고 있다. 처음부터 여성문학이라고 하지만 이 책에는 주장하는 글도 있고, 잡지의 창간사도 실렸다. 물론 소설과 시, 희곡도 실렸으니...


통상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이라고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이 1917년에 나왔는데, 여기에 결코 뒤처지지 않게 여성문학도 나왔다. 즉 근대 들어서는 남성과 여성의 활동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문학에 여성들이 뒤늦게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근대문학에는 남녀가 거의 동시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성의 참여가 동시성이 있다고 해도 인정을 동등하게 받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단적인 예가 바로 김동인의 [김연실전]이다. 여기서 김동인은 당시 신여성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비꼬고 있는데, 그만큼 여성들은 근대 들어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비슷한 시기에 작품 활동을 했더라도 편견을 지닌 시각으로 판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편견을 딛고 자신들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 있다. 이 책에서 다룬 김일엽, 김명순, 나혜석이 바로 그들이다. 나혜석이 쓴 [경희]만 하더라도 1918년에 쓰였다. 이는 [무정]과 별 차이가 나지 않게 발표되었다는 점이고, 여기서 신여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경희의 고민과 결단이 잘 드러나 있다.


여성도 남성과 같은 동등한 인간이라고... 남성 여성이기 전에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이들은 자신들의 글에서 주장하고 있다.


동등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으로 독립이 되어야 하나, 물질적 독립 이전에 먼저 정신적으로 독립이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주체로 설 수 있는 마음, 정신을 지녀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각종 단체를 세우고, 다양한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김일엽이 쓴 '우리 신여자(新女子)의 요구와 주장'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믿습니다. 정신상의 굴복은 물질상의 굴복에 반(伴-따르는)하는 것임을. 그러기에 완전히 정신상의 자유를 얻고자 하면 반드시 또 물질상의 자유를 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질적 자유의 욕구는 먼저 정신적 자유의 동경으로 우리의 두뇌 중에 나타나는 것이로소이다. 그리고 열렬한 정신적 자유의 동경이 있은 연후에 진실한 물질적 자유의 욕구가 생기는 것이올시다. 하므로 우리는 신시대의 신여자로 모든 전설적, 인습적, 보수적, 반동적인 일정의 구사상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습니다.' (234쪽)


이러한 사상을 작품에 담아 활동하기 시작하는 때, 바로 근대다. 그리고 이 근대에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이 등장했다. 개화기(애국계몽기)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무슨무슨 '소사(召史)'로 나오는 여성들이 있지만 곧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종속된 존재가 아닌 주체적인 존재로 서게 되었다는 의미고, 아직은 물질적 독립을 이루기 힘든 시기이기는 하지만 독립된 생활을 해야만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각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질적으로 독립하려고 해도 앞선 여성들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그러한 여성들을 과거의 여성으로만 보려고 하는 남성들도 많고... 이런 현실이 김명순의 희곡 [두 애인]에 잘 나와 있다. 


같은 여성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동경했던 남성들에게는 버림받은 신여성의 모습. 그러나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려는 모습이 이 희곡에 잘 나와 있다. 이제 이러한 여성들은 사회에서 당당한 주체로 서게 된다. 그 다음 시대에... 하여 1930년대에 가면 우리 문학사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여성들이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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