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 - 말과 글을 단련하고 숫자, 언어, 미디어의 거짓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기술
노르망 바야르종 지음, 강주헌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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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온갖 정보 속에서 자신의 관점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또한 잘못된 정보에 속아넘어가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홍수 속에 살고 있는지는, 몇 년 전과 비교해도 알 수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 비하면 지금은 우리 주변에는 정보가 넘치고 넘친다. 이런 정보들을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였다간 자신이 누구인지, 또한 자신의 이익과는 반대되는 정보에 넘어갈 위험도 있다.  

이럴 때 나 자신을 지적으로 지키는 법을 알면 세상의 정보에 쉽게 속아넘어가지는 않을터. 

이 책 제목은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으로 되어 있는데, 촘스키는 미국의 언어학자로, 단지 언어학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생각하여 올바른 관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는 지식인이다. 하워드 진과 함께 현 시대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은 어떤 정보에 대해서 표면적으로, 비판적 생각없이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고, 자신의 관점에서 꼼꼼하게 따져본 다음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법이다. 꼭 촘스키를 따를 필요도 없고, 이 책을 읽고 촘스키의 주장을 무조건 따를 필요도 없다. 오히려 촘스키의 주장을 무조건 받아들이면 이 책을 잘못 읽은 것이다. 

원제가 아마도 자기보호를 위한 지식의 단기 과정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데, 촘스키를 내세운 건 촘스키가 워낙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일테고, 마지막 장이 거의 촘스키 주장을 알리는데 있어서라는 생각이 든다. 

언어, 숫자, 경험, 과학, 그리고 미디어에 관한 다섯 장으로 구분이 되어 있으며, 언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논리의 오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생각하지 않으면 넘어가고 마는 언어의 속임수가 얼마나 많은가. 찬찬히 읽으면 논리학 공부도 되고, 또 다른 사람의 주장을 살펴 자신의 관점을 세우는데도 도움이 된다.  

숫자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숫자가 제시되면 우선 눈을 감고, 뭐 맞겠지 하고 만다. 특히 통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숫자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숫자를 통해 생각을 한다면 숫자로 조작된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거라고 한다.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 등에 제시된 숫자의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고 한다. 

경험은 더 얘기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자신도 우리의 경험을 다 기억하지 못하고, 기억이 경험을 재구성하는 경우도 많이 겪었을테니까. 같은 학교를 다닌 학생들이 나중에 기억하는 경험은 다 다르다. 따라서 경험, 기억을 완전히 믿지 않고 합리적으로 따져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해야 한다고 4장에서 주장하고, 제어된 변수가 있는 실험, 대조군이 있는 실험, 이중맹검 실험을  과학의 기본 실험으로 제시하고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장을 참조하면 온갖 사이비 과학에 속지 않을 방법을 마련할 수 있다. 

미디어, 이것을 비판적으로 읽는 방법이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기업화된 미디어는 정치 엘리트와 미디어를 소유한 엘리트의 관점을 소개하고 옹호하며 널리 알리려는 경향을 점점 띠게 된다. 두 엘리트 계급의 관점이 희한하게도 일치하기 때문에 미디어의 방향은 언제라도 예측 가능하다. ... 그들의 입맛에 맞는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실상을 은폐하거나 조직적으로왜곡할 가능성이 크'(296쪽)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종합방송편성 문제로 많이 시끄러웠는데 이 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최근엔 공영방송에서 수신료의 가치를 생각한다는 광고를 많이 내보내는데, 이는 수신료를 올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고, 또 과연 수신료의 가치를 생각하며, 그 가치에 맞는 방송이 되고 있는지도 우리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이는 이 책에 나온 미디어에 접근하기 위한 31가지 전략을 참조하여, 이를 익힌다면 미디어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는 우를 범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이렇듯 우리가 실생활에서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지적인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지식인만이 지녀야 할 자세는 아니다. 민주주의라면 우리 자신의 의견을 언제든 피력할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으니, 자신의 의견이 무엇인지 정리하는 자세를 지녀야만 민주주의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조금 이 책이 어렵다고 생각되면 미디어 부분을 먼저 읽고, 언어부분을, 그리고 경험부분을 읽고,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촘스키가 하늘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고 우리와 같은 사람이니, 우리 역시 그처럼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따라서 나는 이 책은 그 능력을 살리는데 일조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생각하기에 고등학생 이상에서 꼭 읽어두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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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시간에 생각 키우기 국어시간에 읽기
충북국어교사모임 엮음 / 나라말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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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이 그랬던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는 고전적인 정의가 있듯이 생각할 수 있는 힘, 그건 바로 인간을 규정짓는 중요한 조건이 되리라. 

그런데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나? 

그냥 생각해, 생각 좀 해 하면 생각을 할 수 있나? 

몇 년 전에 학생들의 사고능력이 떨어진다고, 학생들의 사고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논술을 강화해야 한다고 대학입시에 논술을 반영한다고 했었다. 논술을 통해 종합적 사고력을 키운다는 취지에서 시행되었는데... 

학생들은 이 논술을 위해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철학자들, 사회학자들의 글을 읽어야 했다. 아니 읽으면 좋은데,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시간은 없는데, 내용은 알아야 글을 쓸 수 있고, 결국 그들이 택한 방법은 학원을 찾아가 요약된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사고력을 측정하겠다고 도입한 논술이 결국은 학생들의 암기력과 글쓰는 요령만을 평가하게 되는 부작용을 낳고 있었다. 

결국 논술은 많은 대학에서 흐지부지 사라지고 말았는데... 

그렇다고 논술이 필요없는 것일까? 아니다 논술은 필요하다. 학생들의 사고력을 키우는 데는 논술이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삼다(三多)방법은 학생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교육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삼다를 실천하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조건은 학생들의 여유이다. 시간이 있어야 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의미에서 좋은 책이다. 바쁜 학생들에게 별도의 과제를 내주지 않고, 수업시간에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시간 읽고 생각하고 내용을 정리하기 알맞게 구성이 되어 있다.  

또 이 책에 실린 내용들이 학생들의 흥미를 자극할 수 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중심으로 글을 엮었다. 이런 일이 있었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나도 한 번 내 주위의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성이 나로부터, 사회, 역사까지 나아가서 깊은 생각을 할 수 있게 유도하고 있다. 소재는 원심형으로 더욱 깊고 넓게 나아가고 있으며, 글 하나 하나의 구성이 우선 읽고, 그 다음 생각하고, 직접 써 보는 쪽으로 되어 있어, 자연스레 삼다의 방법을 활용하게 되어 있다. 

이 밖에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단지 생각하는 요령, 글쓰는 요령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어떤 삶이 옳은 삶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하는데 있다. 즉 읽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더욱 바람직한 삶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이 점이 이 책이 학교 수업에서만이 아니라, 학교가 아니더라도 그냥 집에서도 읽을 수 있게 한다.  

자식을 둔 부모가 아이의 사고력을 키우게 하고 싶을 때 아이와 함께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사족 : 한 가지 아쉬운 점..편집과정의 실수이겠는데... 244쪽의 조선일보 사설이 실린 날짜 

1969년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1960년의 오타이겠지. 역사를 이야기 하는 부분인데, 연도는 중요하다. 4.19 전의 이야기이니, 69년일 리가 없고 이는 분명 60년이리라. 다들 한 번 살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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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지식인의 길, 육두피아 - 한국의 인텔리겐치아, 육두품에게 대한민국의 길을 묻다
정영훈 지음 / 팬덤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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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 이들을 저자는 육두품이라고 한다.  

왕족이 아닌 사람들이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한계. 

결국 신분이 아닌 자신의 능력으로 그 자리에까진 올라가지만 더 이상 오르지 못하는 어떤 한계를 지닌 존재, 그것이 육두품이다. 그래서 그들은 시대와 끊임없이 불화하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이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고민을 한다. 어떤 이는 시대를 변혁하려고 하고, 어떤 이는 시대에 영합하려고 하고, 어떤 이는 시대에서 벗어나려 하기도 한다. 이들을 모두 육두품이라 칭하지만, 저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육두품은 아무래도 진보적인 의식을 지닌 육두품인 듯하다. 그리고 육두품들의 세상인 육두피아에서 그가 원하는 육두품들은 이 세 종류의 육두퓸을 모두 말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육두피아란 무엇일까? 

처음에 이런 육두품으로 세 명을 불러내고 있다.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 이들을 삼최라고 하고, 이들은 당나라에 유학을 하고 온 신라 말기의 지식인. 서로 삶이 달라 최치원은 은둔생활을, 최승우는 견훤의 편에, 최언위는 왕건의 편에 선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을 통해 육두품은 어떤 존재인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때의 육두품과 21세기의 육두품에 대하여. 

여기서 한 가지 정말로 우리는 육두품이 되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육두품이라는 존재는 어떤 목표를 뚜렷이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 경제, 사회 분야든 자신의 일이 사회지도층의 일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꼭 상위 몇 %가 되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모두가 육두품이 되는 사회를 육두피아라고 했는데, 이게 머리 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육두피아라, 모두가 지식인이 되는 사회라는 건가? 모두가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로 대우받는 사회라른 뜻인가? 이 개념에 대한 실질적 내용은 독자가 채워야 할 몫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음에는 육두품이라고 할 수 있는 정몽주, 정도전, 정약용을 불러내어 조금씩 논의를 구체화해나간다. 이들의 논의에서 21세기의 육두품은 '지식과 자본을 많이 가진, 그러면서도 풍부한 정신 세계를 향유하는 자'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지식과 자본을 많이 가진이란 말은 성장과 분배가 조화를 이룬 사회, 제도를 구현해야 한다는 말이고, 풍부한 정신세계란 나만이 아닌, 인간만이 아닌, 자연과 우주와 인간을 아우를 수 있는 정신세계를 지닌 인간이란 뜻이리라. 결국 육두피아는 모든 국민이 경제적인 고민이 없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제도와,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회제도가 갖춰진 사회에서 풍부한 영성을 지닌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오면 육두품이라고 다같은 육두품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육두피아에 살 육두품은 누구와 같은 더 구체적인 내용은 역시 독자가 채워야 할 몫일밖에. 

그 다음에 또 불러내는 세 명은 이익, 신채호, 박은식이다. 이들을 불러내는 이유는 지금 우리나라의 정통성에 대해,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앞에서 정리한 내용에다 실현의 과정에 대한, 방법에 대한 생각을 덧붙이면 육두피아란 정통성과 정의가 넘치는 사회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머스 모어, 사마천, 정도전을 불러내 육두피아에 대해서 더 자세한 논의를 하려 한다. 이들이 꿈꾸었던 세상과 지금 우리가 꿈꾸어야 할 세상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구, 조만식, 조봉암을 불러내 한반도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 적어도 육두피아를 꿈꾼다면 남북문제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을 불러내 남북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 통일을 위한 노력을 어떤 식으로 해야하는지 이야기 하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통일논의는 현재진행형이기에 우리 자신도 이 저자의 논의에 덧붙여 우리들의 논의를 첨가해야 한다. 그래야만 통일이 남 얘기가 아닌 우리 얘기가 되고, 어느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노력해서 얻은 결실이 된다. 이렇게 되어야지만 충격이 덜 할 테니까. 

끝부분은 언뜻 보면 사족같지만...저자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육도사를 불러내 함으로써 이 땅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세 명씩(마지막 장은 빼고) 불러내 이야기를 해서, 어느 한 주장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는 느낌이 든다. 다만 이들의 논의가 치밀하게 전개되지 못한 관계로 이들의 대화에 숨어있는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즉 많은 것이 나타나 있지 않기에, 대화를 통해서, 또는 등장인물을 통해서 작가가 꿈꾸는 육두피아가 어떤 것인지, 내가 꿈꾸는 육두피아는 어떤 것인지 덧붙여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는 재미를 찾을 수도 있다. 저자의 주장을 죽 따라가는 것이 아닌, 그건 아닌데, 아냐, 여기에 이런 내용을 더 붙이는 훨씬 좋을 거야 하면서 읽은 맛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즐거움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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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 교육의 방법과 실천
최광석 지음 / 역락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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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렀던 은행에서 우연히 펼쳐보았던 잡지. 여성잡지였는데, 온갖 화려한 화보들로 가득한. 그 책에서 '서양, 고전교육 열풍'이라는 내용이 눈에 확 띠었다. 

독일도, 영국도, 네덜란드도 학생 때 고전교육을 강조한다는. 

우리나라는 고전교육을 강조할까. 오히려 한 쪽으로 밀어넣고 관심을 두지 않지 않을까. 

홍길동전, 춘향전, 심청전 등 내용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끝까지 읽어보지는 않은 고전이 얼마나 많은가. 

말들이 너무 어렵다거나,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라거나 하며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학교 다닐때는 얄팍한 지식을 암기하느라 작품의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지나가지 않았던가. 

이 책은 이러한 고전문학에 대한 교육이 잘못되어 왔음을 이야기하며 어떻게 하면 고전문학을 재미있게 학생들의 삶에 다가오게 할지에 대해 고민한 결과물을 엮었다. 

고전문학 교육의 방법론부터 학교에서 구체저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법까지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읽을 필요없이 필요한 부분들만 읽어도 많이 도움이 된다. 

특히 2부에 실린 글들은 현직 국어교사들이 읽고 토의하고 자기 나름대로 재구성한다면 학교에서 수업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과서가 검인정으로 바뀌면서 엄청나게 많은 작품들이 각 교과서에 실려 있는데, 이 중에 공통적으로 실려 있는 작품들도 교과서마다 학습의 방향이 다르니, 교사들이 이를 살펴 통합적으로 재구성해서 수업을 해야 한다는 홍길동전에 관한 내용으로 교사는 교과서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것이고, 교과서는 교육과정을 구현해내는 소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지만 그게 현실에서는 쉽지 않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고... 

적어도 수업하기 전에 한 번 이런 책을 읽으면 방향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시간을 가지고, 또 자기만이 아니라 함께 교사들이 고전문학에 대해서 고민한다면 학생들도 자연스레 고전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을까. 

고전은 먼 옛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내 삶을 규정짓는 한 요소라는 사실을, 홍길동을 통해서도, 춘향을 통해서도, 허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는 사실... 그걸 깨닫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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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숲에서 나오다 - 천성산 도룡뇽과 그 친구들의 이야기
지율 스님 지음 / 도서출판 숲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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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 

자연과 하나인 산,  

인간의 마을에 살았지만 자연과 하나이고자 하던 아시타카 

인간의 마을에서 자연을 정복하려 한 에보시 

결국 사슴신(시시신)의 죽음으로 자연은 인간에게 굴복당하고 

거대한 존재로 다가왔던 자연이 

인간보다 작은 존재로 변하고 

다시 시작하자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다는 아시타카의 말 

산은 자연에서 아시타카는 자연에서 함께 할 수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었는데, 

산 속에서 자연과 하나되어 살던 스님,  

지율 

그가 숲에서 나와 단식을 하고 고속철도 터널의 흉폭함을 알리기까지 

글자 하나하나가 삶의 진정성이다. 

랭보는 글자에서 색깔을 보았다는데, 

나는 이 글에서 진실한 삶을 볼 수 있었다.  

지율과 지율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결국 소송에서는 지고, 공사는 강행이 되었지만 

이 글은 과거로 끝나지 않는다. 

천성산 터널에 이어 지금은 4대강으로 

오히려 더 흉폭하게 변하고 있지 않은가 

천성산의 과거는 우리의 현재이고, 우리의 미래인데, 

하나하나 잃어가고 있으니. 

과거를 회상해 보면 

한 때 미국은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간다더라 

참 좋겠지 

우리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고 

부러워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자연과 떨어져 사는지, 

그런 삶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 생각도 못한 채 

어느덧 우리도 흙을 밟을 기회가 사라지고, 

집을 나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콘크리트, 아스팔트 

흙이라곤 밟을 수 없고, 낙엽조차도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현실에서 

우리는 자연을 정복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삼아왔다. 

자연이 바로 우리라는 것을 망각한 채.   

꼬리치레 도롱뇽이 말한대로

자연의 죽음이 곧 우리의 죽음이 됨을 잊은 채. 

거대한 자본의 움직임에 맞대응을 하지 못하지만 

한 때 결심한 것 

스키장은 가지 않는다. 골프는 하지 않는다. 

한 여름에 보았던 스키장,  

헐벗은 채로 자신의 몸을 드러내 오들오들 떨고 있던 

그 산을 본 뒤로 스키는 내 삶에서 지워졌고, 

있던 자연을 파헤치고, 메우고, 약을 뿌리며 조그만 공을 치는 

골프도 내 삶에서 지워졌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스키장, 골프장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크게 터널이나 4대강 뿐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얼마나 자연과 멀어지고 있는지를 성찰해야 하는데. 

이 책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님을 

너무도 진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글자 하나하나에 삶의 무게가 담겨, 자연의 무게가 담겨 

과거의 일이 아닌, 현재, 미래의 일임을 

각성하게 해주고 있다. 

유마거사 

세상이 병들었으니 나도 병들었다. 

그래, 우리가 건강해지기 위해선  

자연도, 세상도 건강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함께 할 때  

우리 모두가 건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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