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노동으로 - 신동문 전집 시 솔시선(솔의 시인) 2
신동문 지음 / 솔출판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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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인이라면 자신만의 시집을 갖고 싶지 않을까. 

명색이 시로 업을 삼은 사람치고 시집 한 권 지니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살아서 시집을 내지 못한 시인을 안타까워 하고, 그 시인을 위해 유고시집을 내주지 않는가. 

우리 시사(詩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육사, 동주의 시집도 살아생전에 나오지 못하고, 사후에 지인이나, 동생에 의해서 발간되지 않았던가. 하다못해 신동문과 친했던 천상병만 해도 그가 행방불명 되었을 때, 친구들이 그의 유고시집 "새"를 발간하는 일도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신동문은 시집을 딱 한 권 내고 더 이상 시집을 내지 않았다. 그에 대한 다른 글을 읽어보면 시집을 내자는 제의도 있었다는데, 그는 쓰레기를 양산하기 싫다고 내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그만큼 자신이 낸 처음 시집에는 애착이 있다는 얘기도 되고, 또 기존에 발표한 시들에도 불만은 있을지 모르나 발표를 했다는 자체에 어느 정도 자부심과 애착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이 "내 노동으로"는 신동문이 발표한 시들을 찾을 수 있는 대로 찾아 수록한 그의 전집이다. 전집이 보통 시인들의 시집 한 권 분량밖에 안된다는 사실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시집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시집을 읽을 때 기억에 남는 시, 마음을 울리는 시 하나만 있어도 시집을 잘 샀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는데, 마음에 들어와 나가지 않는 시, 이렇게 세상을 볼 수도 있구나,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구나 하는 시, 이런 시들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시집을 산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이 즐거움이 다음에 시집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신동문의 시전집에서는 너무도 잘 알려진 '아, 신화(神話)같이 다비데군(群)들' 말고도 여러 시들이 내 맘에 들어왔다. 이 시인은 과거의 시인이 아니라, 과거의 현실만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 시들이었다. 

그 중의 하나를 들면 '연령'이란 시다. 무엇을 얘기하려 했는지 생각하기보다, 그냥 마음에 쏙 들어왔다. 나 역시 나이 먹어가고 있단 얘기인가. 그렇다면 나이를 의식하는 사람에게 이 시는 마음에 들어올 수 있단 얘기가 되는데... 

어느 날 들녘에서 청자빛 새금파리 같은 것이 석양에 반짝 빛나는 걸 봤다. 

하루는 여자의 두발 같은 것이 쓰레기통가에 버려진 걸 봤다. 

어제는 길 가다 말고 무심코 엉엉 통곡하는 시늉을 해보고 웃었다. 

오늘은 아침 양치질 때 칫솔에 묻은 피를 보며 노후의 독신을 공상해봤다. 

내일은 그 오래 못 만난 우울한 친구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신동문, 연령 전문  

이 시 외에도 통렬하게 박정희 정권을 풍자하고 있는 '모작조감도'(다들 모작오감도라고 해야 이상의 시를 모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시인은 모작조감도라고 했다고 한다. 오자인지, 아니면 이조차도 이상의 시를 패러디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다), 세상과의 불화을 이야기하고 있는 '의족' 그리고 노동을 하고 살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내 노동으로' '산문 또는 생산' '바둑과 홍경래' 등이 있다. 

무엇보다 우울한 마음이 들 때 읽을 수 있는 시로 '절망을 커피처럼'이 있다.  

절망을 커피처럼 / 절망을 아침 차례 진한 커피처럼 / 아침부터 마시면 / 빈 창자 갓갓이 / 메마른 가슴 구석까지 / 절망은 커피처럼 스미고 / 가벼운 미열과 함께 / 나는 흥분한다.  

-절망을 커피처럼 부분

 절망이 내 온몸 구석구석 혈관을 타고 스며드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처럼 이 시집에는 지금의 우리 마음에 다가오는 시들이 꽤 있다. 이런 시들로 인하여 이 시는 문학사적인 가치뿐이 아니라, 내 맘을 위로해주고 풍성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이런 점으로 하여 신동문은 단지 과거의 시인이 아니라, 현재에도 읽혀야 하는 시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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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동문 평전 - 시대와의 대결
김판수 지음 / 북스코프(아카넷)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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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문 하면 4.19를 노래한 시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활동했는지, 시적 경향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시집을 몇 권이나 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잊혀진 시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염무웅의 평론집을 읽다가 신동문을 다룬 글을 읽고,어, 이 사람, 그리 만만하게 봐서는 안되네, 그냥 잊혀져선 안 되는 시인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항시인, 참여시인 하는데, 60년대 하면 주로 김수영, 신동엽만 이야기 하지 신동문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 나라에서 평균보다는 높은 학력에, 평균보다는 많이 시들을 읽고 있고, 시집도 평균보다는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신동문은 그냥 4.19를 노래한 시를 하나 쓴 시인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으니.. 참.. 

하긴 시인이 꼭 시를 많이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함형수는 '해바라기 비명'으로 우리 시단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신동문도 '아, 신화(神話)같이 다비데군(群)들' 이란 이 시 하나로 문단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이미 이 시 하나로 60년대 대표적인 참여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신동문이 이 시 하나만을 발표한 것도 아니고, 다른 시도 있고, 비록 시집은 한 권만 내고는  끝이었고, 나중에 전집으로 묶인 시집도 한 권밖에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각광받는 시인이었다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이게 이 평전을 읽게 된 이유인데... 

읽어가면서... 신동문의 생애와 겹쳐, 머리에 박봉우의 '창(窓)이 없는 집'이란 시가 자꾸 떠올랐다. 

어쩌자는 건가 / 괴로운 시대에 / 시인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 어둠이 깔리는 / 

대지에 서서 / 별들에게 / 고향을 심는 것인가 / 어쩌자는 건가 / 어둠이 쌓이는 / 

무덤가에 서서 / 시인은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 / 구름이 흘러가는 심중(心中)에 /  

그래도 저항할 것인가 / 자유지대에서 / 괴로우며 / 시인의 혁명은 / 싹트는 건가/ 

창이 없는 하늘에 / 남겨 둔 꽃씨를 뿌리는 건가. - 박봉우, 창이 없는 집, 전문 

신동문의 삶이 바로 이 시에 나온 시인의 삶이 아니던가.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세상에 나름대로 씨앗을 하나 뿌려두는 삶의 태도. 그는 그래서 독재가 판치던 6,70년대 저항시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 아닌가. 시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름을 건호에서 동문이라는 필명으로 바꾼 일화도 새길만하다. 동문이란 병원에서 중환자들이 죽음에 이르러 실려나갈 때 쓰던 문이란다. 서울로 말하면 시구문일텐데, 결핵을 앓으며 언제 죽을지모르는 그는 죽음과 늘 대면하면서, 자신의 이름에도 죽음의 문인 동문(東門)을 쓰고 있으니, 그가 현실에서 벗어난 시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작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편집자로서, 발행인으로서, 그리고 산문을 쓰는 문필가로서 활동을 더  많이 하고 어느 순간 그는 어떤 글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충청도 단양 땅으로 가 거기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농민으로서, 침술가로서 살아간다. 

이렇듯 그의 삶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젊은시절, 시인으로서의 신동문이라면, 중년시절이후는 농민, 침술가로서의 신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시인으로서의 삶을 끝냈다고 보기보다는 시인으로서의 삶을 활자로서의 활동에서 온몸으로 하는 활동으로 전이했다고 봐야한다고 평전의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시를 지으려면 마음이 들뜨거나 흥분할 수밖에 없어. 얼음같이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로 어찌 좋은 시를 내놓을 수 있겠나. 침술은 그렇지 않아. 냉정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제 시각에 제 자리에 정확하게 침을 꽂아야 해. 그것이 곧 정곡 찌르기야."(316쪽)라고 하듯이 젊은시절 열정이 넘치던 때는 시로 세상을 대하고, 나이가 들어 열정을 다스릴 수 있을 때는 침으로 세상을 대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대목에서 그가 저항시인 소리를 들을 때 참여문학 대 순수문학 논쟁이 벌어질 때 비판했던, 서정주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신동문 시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신동문의 이 말은 서정주의 국화옆에서 중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이 구절을 생각나게 했다. 그는 이제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침술이라는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영위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그의 침술은 일찍이 시로써 현실에 참여하고 독재에 저항했던 일에 못지 않은 존재감이었다"고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그는 평생을 시인으로서 살아갔다고 말할 수 있다.  

자, 그가 한 일을 정리해 보자. 그는 시인으로서 시를 썼고, 문필가로서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썼으며,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서 많은 좋은 책(특히 전집류 중에서 우리 문학계를 풍성하게 했던 좋은 전집이 처음에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고 한다)을 냈고, 좋은 시인(신경림 등), 소설가(이병주 등)를 발굴해 내었으며, 농민으로서 농촌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을 해서, 양잠업, 과수원 경영, 그리고 젖소 사육까지 수양개 마을이 충주댐으로 인해 수몰되기 전까지 수양개 마을 사람들과 한 마음, 한 몸으로 잘 지냈다. 

국가권력의 횡포로 마을이 수몰되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하나 떠나가 공동체가 파괴되었을 때, 그의 몸도 파괴되기 시작하여, 용하다고 소문난 자신의 침술로도 자신의 몸을 고치지 못해, 담도암으로 93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잊혀지기 시작한 시인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문단사에서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를 추억하기 위해 시비를 건립하고, 아직도 수양개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 살아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 때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신동문 시인을 복원한다는 의의가 있다. 그리고 그의 삶, 그의 성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까지 많은 것을 전해주고 있다. 온몸으로, 자신의 삶 자체가 시였던 신동문, 그가 다시 우리 문학사에 복원이 되는 순간, 우리 문학사는 좀더 풍요로운 문학사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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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2011-06-12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동문 시인은 언젠가 제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 시가 왜 공공장소마다 걸려 있는 거야? 당신, 저 시에 속아서는 안 돼! 먼 나라의 시인이 남의 나라에 와서, 남의 나라 사람들의 삶을 걱정해준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돼!>
1980년대 후반 어느 날 식당에서였습니다. 러시아 시인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액자로 만들어져 걸려 있었는데, 이 시를 가리키며, 못마땅하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있으리니...> 어쩌구저쩌구 하는 싯구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당시 이 시는 식당 뿐 아니라 버스터미널, 기차역, 이발소 등 공공장소에 널리 걸려 있었지요. 신동문 시인의 지론은 <삶에 속았다고 생각되면 슬퍼하거나 노하라>는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는 언제부턴가 갑자기 사라져, 지금은 공공장소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 당시 저희 세대는 김소월의 <진달래꽃>만큼이나 이 시를 즐겨 외우곤 했습니다.
하긴, 그 번역 시가 이 땅에서 널리 유행했다가 갑자기 썰물처럼 사라진 연유를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구운몽의 불교적 해석과 문학치료교육
이강옥 지음 / 소명출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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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구운몽을 배울 땐 인생은 허무하다고 결국 현실에 너무 상심하지 말고 지내라고 그것이 이 소설의 주제라고 배웠는데... 

자식 하나 잃고, 남편 잃고, 남은 자식은 유배생활을 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자 하루만에 썼다는 이야기도 있는 이 소설은, 양소유를 중심으로 읽으면 양반들의 꿈이 실현되어 가는 과정이 펼쳐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양소유가 황제를 제외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고, 그가 그 자리에 오르자 그는 극심한 회의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참선을 하고, 결국 다시 성진으로 깨어나게 되는데... 이 부분을 가지고, 인생무상, 또는 현실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이야기한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항상, 기억이란 자신조차도 속이는 경우가 많으니, 구운몽을 불교적으로 해석한다는 이 책의 제목이 흥미를 끌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처음과 끝부분은 분명 불교의 교리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육관도사나 성진이나 다 불교의 도를 닦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결국 성진으로 시작해서 성진으로 끝나는 이 소설은 불교적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설명도 들은 기억이 나서이다. 

불교와 유교와 도교(선교)가 섞여 있는 작품이라고 그냥 뭉뚱그려서 기억을 하는데, 이번에 이강옥이 쓴 이 책을 읽으니, 구운몽은 유교나 선교보다는 불교의식이 더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부는 불교적 해석으로 구운몽을 다루고 있으며, 2부는 문학치료의 대상으로 구운몽을 다루고 있다. 두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는 없으나, 종교나 문학이 이미 치료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면 이 두분은 각각 따로따로 발표가 되었겠지만 한 책에 묶여 있다고 해서 이질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1부에서 불교적 해석에 공감을 하면 2부 문학치료 이론을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신선했던 점은 제목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 점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구운몽이라는 제목에 대한 해석이 있었지만, 이 책에서는 이들을 종합해서, 불교와 관련지어서 해석을 하고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제목에는 작가의 주제나 표현하고자 하는 방향이 잘 드러나 있는데, 우리는 그냥 구운몽을 아홉개 구름의 꿈, 또는 아홉 사람의 꿈이라고만 해석하고 말지 않았던가. 이 책에선 구운몽을 '아홉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아홉 개의 구름이 꿈임을 성찰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 구운몽은 우리의 생각이 이루어짐을 알려주기도 하고, 또한 양소유의 활동이 단지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성진의 깨달음을 이루는 한 요소임을 알려주기도 한다. 즉 우리의 현실을 가까이에서, 또는 멀리서 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저자는 살활론(殺活論)이라고 하여, 살활자재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양극단을 벗어나 그 각각에 들어있는 중도를 내면화하는 것이라고 하여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 구운몽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고등학생 수준에서는 다소 어려울 수 있으나, 한 번 소설을 깊이 있게 읽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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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시대현실 - 염무웅 평론집
염무웅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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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염무웅의 문학평론집이다. 소위 386세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486으로 업그레이드 되었지만, 염무웅은 백낙청과 더불어 친숙한 평론가이다. 마치 60년대에 이어령이 친숙한 평론가이듯이 말이다. 

소위 평론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전문가에 해당한다. 바둑으로 말하면 프로기사가 되고, 무협으로 따지면 무림고수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가 평론가가 아닌 이상 평론집을 읽는 행위는 아마추어가 프로에게 도전하는 일이고, 이제 갓 무술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이미 일가를 이룬 고수에게 대련을 신청하는 일이 된다. 

시작부터 불공정한 게임이 된다. 그러나 이 불공정한 게임은 즐거운 게임이다.  

비유를 하자면 이미 평론집 읽기 행위는 자신도 어느 정도 문학에 대해서는 해석을 할 능력이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이다. 이 자신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마추어가 프로를 이길 수 없듯이, 또 갓 무림에 입문한 사람이 고수를 이길 수 없듯이 고수들의 현란한 기술에 초심자는 혀를 내두룰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금방 기가 죽는다.  

하지만 기 죽어서는 안된다. 이미 시작부터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평론가는 그 작품들을 다 읽고 자기만의 관점에서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고 문학을 해석하지만, 초심자에게는 아직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초심자가 평론가가 비평하고 있는 작품을 다 읽을 필요는 없다. 그 작품들을 다 읽기로 하고 덤벼든다면, 이미 초심자는 평론가를 따라갈 수가 없게 된다. 그 작품을 읽고 생각을 다듬는 동안, 평론가는 다른 작품들을 읽고 자기만의 글쓰기를 하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배워야 할까. 우리는 스승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어리석은 제자가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는 우리를 범하지 않기 위해, 또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배에서 내리지 않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평론가의 해석을 따라가지 말고, 그가 어떤 관점에서 문학작품을 바라보고 해석을 하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그의 해석방법이 내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생각해보고, 나만의 해석방법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조언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면 된다. 염무웅은 문학을 사회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관점을 유지하고 있다. 자, 나는 작품을 사회와 관련지어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와는 전혀 관련짓지 않는 그 무엇으로 작품을 해석할 것인가. 

나는 염무웅의 관점에 동의한다. 그렇다고 그의 해석 전부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작품을 사회와 관련지어 보더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전부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김광섭, 임화, 팔봉 김기진, 신동문, 그리고 최하림, 이성선, 김영무를 다루고 있는데, 이성선, 최하림, 김영무 부분이 좀 낯설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앞 부분의 작가들은 치열하게 현실과 대립하면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갔다고 볼 수 있는데(김광섭은 후기시로), 이 세 작가들은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에 의탁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든지, 관조하며 자연을 노래하든지, 자신과 하나된 자연을 노래했겠지만, 앞의 시인들과는 이질적은 느낌을 주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이들을 3부에 속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2부에서는 고은과 신경림,조태일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들은 다르면서도 비슷한 시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 작가의 경험과 시인들의 이야기가 잘 표현되어 있어 읽기에도 좋았다. 개인적으로 신경림 시인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신경림 시인 부분이 가장 좋았다고 할까.

3부에서는 시집에 대한 해설로, 소개된 시집을 다 읽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저자가 어떤 관점에서 시를 바라보고 있나를 중심으로 살피면 나름대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다 마음에 끌리는 시집이 있으면 한 권 사서 읽어도 좋고. 

4부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소설이라는 것이 문학사에 살아남은 몇 소설을 빼고는 대부분 잊혀진 소설이라서, 시중에서 쉽게 구하기 힘든 것도 많고, 또 읽기에도 시간이 많이 걸려 우리가 작품의 해석에 결코 저자를 따라갈 수 없는 부분으로 남게 된다. 김정한, 송기숙, 황석영이야 문학사에서도 언급이 되니 그렇다쳐도, 95년의 소설풍경1,2,3,4와 성석제, 최인석의 소설집은 우후죽순처럼 나오고 있는 그 많은 소설 속에서 지금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니, 이 평론들은 지금의 현실에서 잘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이 작가들의 소설집을 읽었는데도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만큼 많은 세월이 지났다.  

시와 달리 작품을 전혀 모르고 평론을 읽는다는 것은 글자는 글자대로 생각은 생각대로 놀고, 자칫하면 저자의 생각에 백기를 들고 따라갈 수밖에 없다. 2010년 말에 출간된 책에 1995년의 소설평이 들어가다니, 좀 당황스러웠다.  다만 염무웅이 지금까지 견지하고 있는 일관된 생각, 문학관이 지금도 유용하고 작품 분석에 적용되기에 이 글들이 이 책에 실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5부는 남북문학, 서양문학과의 관련 글들이라, 지금도 유효하고, 생각할 거리가 많다. 둘 다 진행형이지 않은가. 이는 저자의 생각에 우리의 생각을 덧붙일 수 있는 부분이니, 관심을 가지고 깊이 있게 읽으면 좋다. 특히 서양문학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영문학, 독문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는 말은 외국문학을 전공하려는 사람들이 심도 있게 고민해봐야 할 문제거리이다.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글들이 쉽게 읽힌다. 역시 고수는 다르다. 글을 결코 어렵게 쓰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한 번 손에 잡으면 주욱 읽게 된다. 특히 7,80년대 대학에서 문학에 대해서 고민을 한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향수까지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문학평론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문학평론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알려주는 구실도 하는 책이다.  

한 번 염무웅과의 문학작품을 사이에 둔 불공정 게임에 참여해보자. 불공정한 게임이지만 즐거운 게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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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코바치의 텍스트 읽기 혁명 - 모든 텍스트의 진실을 가려내는 6가지 툴
빌 코바치.톰 로젠스틸 지음, 김원옥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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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땡전 뉴스'라고 들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보도지침'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우리나라에서만 통용되던 이 말은 우리에게 뉴스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는데 일조를 한 말들이다.  

9시를 알리는 시간이 땡하고 치면 '전두환 대통령께서는~'으로 시작한다 하여 땡전뉴스, 어떤 것은 보도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라는 지침을 아예 내렸던 보도지침. 이 때 일반 사람들은 뉴스에 대해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 뉴스와 뉴스 사이에 숨어 있는 행간을 읽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마찬가지로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문화방송 광주지국을 불태웠다고 들었는데, 이는 문화방송이 제대로 된 뉴스를 보내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방송은 제대로 방송했을까. 아니다. 사람들이 한국방송은 아예 불공정 방송을 한다고 제쳐놓았고, 문화방송만은 그래도 공정방송을 하겠지란 기대를 했다가 그 기대가 무너지자 방송국을 불태웠던 것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일까? 나는 이 정보를 어디서 얻었는가. 책을 통해서 얻었다. 그렇다면 책은 1차정보인가, 2차정보인가. 믿을만한 정보인가, 아니면 왜곡된 정보인가. 

이런 점들을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해주는 책이 바로 이 책 텍스트 읽기 혁명이다. 텍스트 읽기 혁명이라는 제목보다는 사실, 뉴스를 바르게 인식하는 법 정도가 더 어울리는 책인데, 그 정도로 이 책에서 말하는 텍스트란 뉴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선 텍스트를ㅡ 여기서는 저널리즘이라고 한다- 분류하면 확인의 저널리즘, 주장의 저널리즘, 단언의 저널리즘, 이익집단의 저널리즘, 통합의 저널리즘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고, 어떤 텍스트를 읽을 때 이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 구분부터 해야 한다고 한다. 

그 다음은 텍스트가 완전한지, 무엇이 빠졌는지 알아내야 하고, 텍스트의 출처, 정보원에 대해 알아내야 하며, 증거가 어디 있는지 찾아내고, 주장과 단언만이 넘치는 텍스트를 경계해야 하며, 정말로 나에게 중요한 것인지 숙고하라고 한다. 이것이 이 책의 글쓴이가 주장하는 텍스트를 읽는 여섯가지 방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로운 미디어 저널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데, 입증자, 의미부여자, 조사자, 증인, 권한 부여자, 똑똑한 통합자, 포럼구성자, 역할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저널리스트만이 게이트키퍼 역할을 하는 시대에서 이제는 우리 모두가 게이트키퍼 역할을 해야 하는 시대, 그리고 시민 기자들이 만들어가는 인터넷 언론도 생긴 지금 모두가 텍스트를 바르게 읽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는 이 책 저자들의 주장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르게 읽고,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행동한다면 민주주의는 더욱 가까이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 기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만 읽을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하고, 마찬가지고, 기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겠다는 사람도 이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 

이 책의 말미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정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엄청나게 많이 주어지는 정치적인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지 않고, 우리들의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판단할 수 있는 어떤 틀, 도구를 우리들 자신이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우리나라 텔레비전 뉴스나 인터넷 뉴스, 신문 등을 분석해 보자. 아니 생각해보면서 한 번 그 텍스트를 읽어보자. 과연 우리나라 언론들은 사실을, 진실을 보도하고 있는가.

아마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텍스트를 보게 될 것이다. 

덧말1 : 이 책은 바야르종이 쓴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이나 바지니가 쓴 "가짜 논리" 와 함께 읽으면 더 좋다. 

덧말2 : 그런데, 다산초당은 인문사회 전문 출판사인데, 특히 텍스트를 다루는 이 책에서 가끔 눈에 거슬리게 오타가 나타난다. 문장의 뚯이 연결되지 않는 오타가 심심찮게 보이는데, 읽기에 방해가 된다. 사소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런 문제. 조금만 더 출판사가 신경을 썼으면. 물론 많이 신경을 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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