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갇힌 사람들 - 불안과 강박을 치유하는 몸의 심리학
수지 오바크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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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몸이 지금 우리 시대의 화두다. 

얼짱을 지나 몸짱이라는 말이 유행한 지도 오래되었고, S라인이니, 빨래판 복근이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여기에 성형미인이라는 말은 이제 자연스러운 말이 되었고, 오히려 자신이 성형한 사실을, 성형으로 인해 이렇게 되었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오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몸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제공해준다. 

"몸에 갇힌 사람들"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의 생활이나 생각을 몸에 조정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몸에 조정당한다는 의미는, 우리 자신이 우리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서 규정된 몸을 올바른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몸을 고쳐야 할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글쓴이는 어리 시절 부모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아이의 행동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몸에 대한 태도가 결정된다는 여러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몸을 우리 자신이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나 태도는 은연중에 부모가 자신의 몸을, 또는 자식의 몸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읽으며 우리나라 생각을 했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성형 열풍에 휩싸인 까닭은 결국 우리 윗세대들이 자신들의 몸에 많은 불만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를 부끄럽고 고쳐야 할 대상으로 여긴 태도가 우리에게 알게모르게 감염이 되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이 책의 주장에 의하면 지금 몸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우리 윗세대들의 몸에 대한 태도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을테고, 그렇다면 우리의 몸에 대한 태도가 우리 아래 세대들에도 상당한 영향을 줄텐데...  

지금대로 나간다면 우리 아래 세대들은 자연스러운 한국인의 몸을 지닌 사람들이 거의 희귀할 정도로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또한 어린 시절 다른 사람들의 몸에 대한 태도 말고도, 지금 우리가 몸에 대해 이렇듯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기준을 지니고, 그것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몸을 고칠 수 있는 어떤 대상으로 여기게 된 데에는 사회,문화적인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도 한다. 

이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우리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광고들을 보라. 다들 너무도 좋은 몸을 지닌 사람들의 모습만이 나오고 있지 않은가. 온갖 다이어트 식품, 건강 관련 기구들의 광고가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 이 책에서는 셀레브리티 문화라고 하는데, 그들을 보면 그들의 몸을 따라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던가. 하다못해 개그프로그램에서도 살빼기, 아니면 몸짱 만들기 꼭지를 만들어 방송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면을 이 책의 글쓴이는 '몸이라는 개념 자체는 이제 우리가 제조하고 창조해야 할 상품이 되었다'(255쪽)고 한다.

이렇듯 이 책은 앞부분에서는 어린시절 어른들의 아이의 행동에 대한, 또는 몸에 대한 태도에서 뒷부분에서는 사회,문화적인 문제로 내용을 더 확대 심화하고 있다. 

그런데 좀 아쉬운 점이 있다. 문제점은 정말 잘 분석해 놓았는데... 이게 문제다. 이런 문제는 이렇게 해서 발생했다까지는 이해하겠는데... 해결방법이 추상적이다.

물론 마지막 부분에서 임산부와 초보 엄마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몸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고, 허위 광고를 일삼는 기업들을 고발해야 하며, 몸을 당연한 것이자 즐거운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누구나 다 아는 말에 그칠 공산이 크다. 이미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몸은 고쳐야 할 어떤 표준이 있으며, 그렇게 고칠 수 있다는 생각을 바꾸기 위해서는 더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구체적인 실천 방법들은 이 책을 읽은 우리들이 하나씩 하나씩 채워가고 실천해가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몸은 유일무이한 자신의 몸이라는 생각을 우선 나부터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의 마지막에 글쓴이가 한 말처럼 내 몸을 당연한 것이자 즐거운 것으로 여겨야겠다. 내 몸은 기계의 한 부분이 아닌, 전체적인 몸, 그 자체라는 생각을 먼저 해야겠다. 

성형천국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한 번에 성형열풍, 몸짱 열풍이 줄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몸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금씩은 늘어날테니... 조금씩이라도 변해가지 않겠는가.

 

덧말 

1. 이 책의 앞 부분을 읽으며 "가족 세우기를 통한 교실 혁명"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이 책에서도 아이들의 어떤 행동들은 가족들 중 누구와 분명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가족의 문제를 직시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말처럼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다. 내 행동을 결정하는 요인은 나만이 아니다. 어릴 때 나와 관계 있는 사람들이 우선 큰 영향을 주었을테고, 지금은 함께 만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들이 영향을 준다. 가족세우기를 통한 교실 혁명은  몸에 갇힌 사람들의 앞부분과 연결된다. 

2. 또 이 책의 뒷부분은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라는 책과 연결된다. 각 나라의 독특한 문화가 미국의 표준화된 기준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예리하게 포착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각 나라의 특성에 맞는 치료방법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책에서 의료의 문제가 미국으로 통일되어 가는 과정이 "몸에 갇힌 사람들"에서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같은 광고로 사람들 몸을 통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3. 제목이 "몸에 갇힌 사람들"인데... 오히려 "몸을 가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다. 우리가 외부에서 주어진 몸에 대한 생각(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으로 몸에 갇혀 다른 몸을 상상하지 못한다는 뜻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오히려 의식, 무의식적으로 우리 자신이 어떤 틀에 몸을 가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몸을 가둔 사람들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단 생각을 해봤다. '몸을 가둔'이라고 하면 '몸에 갇힌'보다는 우리 자신이 몸을 가두지 않을 수도 있는, 우리가 주체가 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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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넘어 교육으로 - 누스바움 교수가 전하는 교육의 미래
마사 누스바움 지음, 우석영 옮김 / 궁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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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 위기 

지금 교육은 위기에 처해 있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교육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 물론 몇몇 나라에서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그 중에서 교육이 경제 성장에 이바지하지 못한다고, 이게 문제라고 하는 말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우리나라도 어떻게 하면 경제성장에 이바지하는 교육을 할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고 있고, 대학에서도 사회에서(사실 말은 사회라고 하지만, 이 사회는 바로 회사를 의미하고, 이는 경제성장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관점이 깔려 있다) 필요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학부를 개편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진학하는 모습을 보면 최상위권의 학생들은 의대로, 법대(이제는 로스쿨이라고 해야 하나?)로 빠져나가고 순수과학을 하는 학생들이나 인문학을 하는 학생들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럼에도 아직도 교육은 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교육을 관장하는 기관의 이름을 보라. 교육과학기술부이다. 이 말에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 기관의 이름 어디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강조는 찾을 수가 없다. 

돈이 되지 않는 학문은 학문으로서 존립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교육의 위기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위기의 교육을 살리는 법 

누스바움의 책은 이러한 문제제기에서 출발한다. 지금 교육은 전부 시장중심주의로 흘러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이익을 위한 교육일 뿐이다. 이익을 위한 교육에서 인간은 주체적인 인간이 되지 못하고, 수동적인, 시키는대로 하는 인간으로 길러질 뿐이라고 한다. 이 때 필요한 교육이 무엇일까?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이라고 한다. 그런데 민주주의를 위한 교육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토론교육이다. 토론 교육, 이는 바로 시민이 되게 하는 교육이기도 하다.  

그러면 토론의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식의 논쟁법을 익히는 일이라고 누스바움은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명료하게 펼치되, 남의 주장을 경청할 줄 아는 인간, 주장의 맹점을 살필 줄 아는 사람으로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교육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자기검토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야 한다고 한다. 자기검토를 하지 못하는 인간, 즉 자기성찰이 없는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는 우리가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인간은 목표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고, 서로를 공경심 없이 대하기 십상이라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한다. 

우리 교육에 비춰보자. 우리는 과연 자기검토, 자기성찰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을 길러내고 있는가? 오직 주어진 것만을 달달 외우도록, 생각이 거세된, 주어진 것만을 학습하도록 하지 않는가? 수많은 자기주도학습법이 난무하고 있지만, 말만 자기주도학습법이지 사실, 이마저도 주어진 학습방법을 밥을 받아먹듯 그냥 받아들이게끔 하지 않는가? 

그래서 소크라테스식 논쟁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식 사색은 그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중요하다'(104쪽)고 누스바움은 주장한다. 

이런 논쟁 방식에 이어 누스바움은 '세계 시민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세계 시민 교육은 자기 것을 잊고 세계인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기 것을 익히되, 남의 것도 익히는, 남의 것은 남의 것대로 나름의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교육을 하자는 것이다. 이는 어릴수록 좋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다름을 틀림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말 그대로 다름은 다름일 뿐이고, 이 다름들이 바로 다양성을 이루고, 우리들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다름을 몸으로 익히기 위해서 필요한 요소가 바로 상상력을 기르는 일이다. 이 상상력은 문학과 예술을 통해서 습득이 될 수 있다. 많은 나라에서, 또 우리나라에서도 문학과 예술을 홀대하며, 기술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미래를 보고 교육을 한다면, 그리고 온전한 인간으로 홀로 설 수 있으며, 남과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은 이런 인문학을 통해서 형성된다고 누스바움은 주장하는 것이다. 

단지 문학과 예술만이 아니라, 놀이를 통해서도 형성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놀 시간이 없는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놀 시간을 줘야한다는 데 동의하게 된다. 

 

이대로 가면 

교육은 희망이 없다. 무언가 방향을 바꿔야 한다. 방향은 명확하게 나와 있다. 단지 우리가 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교육과정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전면적인 개편을 해야 한다.  

놀 시간이 없는 우리 아이들에게 놀 시간을 마련해줘야 한다. 그리고 평가방식을 바꿔야 한다. 지금과 같은 일제식, 선다식 평가로는 학생들의 토론 능력, 자기성찰 능력, 남과 공감하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다들, 위기다, 위기다 한다. 그럼에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고쳐야 하는데...  

따라서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읽고, 우리 교육을 이런 방향으로 이끌어가자고 압력을 넣을 수 있어야 한다. 단 한 번에 교육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은, 마치 우연히 잡혔던 토끼를 나무아래서 기다리는 어리석은 나무꾼의 모습과 같다.  

우리들 스스로 바람직한 교육의 방향에 대해 토론하고, 토의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은 교육분야에서 영향력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 

그들이 읽고, 이 책에 나온 내용과 우리나라 교육현실과 비교를 하고, 바람직한 교육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하자가 아니라, 이렇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야 한다. 

국민들이 단일한 집단인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지니고 있는 개개인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 되게 교육해야 한다. 

그것이 교육이 살 길이다. 나라가 살 길이다. 지금처럼 가면... 앞날은 어둡다. 

 

덧말 

이 책의 옮긴이의 말. 참 읽을 만하다. 여러모로 생각할거리가 많다. 누스바움의 논의를 읽고, 이를 우리나라의 현실에 적용하려고 한, 적용해야 한다고 하는 글이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두면 좋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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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셀레브리티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17
조약골 지음 / 텍스트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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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아나키스트 조약골

그래서 제목이 운동권 셀레브리티인가 보다. 운동권의 유명인사쯤 되나?  

아니, 그는 결코 유명인사가 아니다. 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유명 연예인 이름은 알아도, 그들의 신상은 알아도 조약골이라는 이름을 보통 사람들이 들어보았겠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약골은 운동권 내에서 유명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이런저런 현장을 다녔던 사람에게 조약골은 '아, 그 사람' 하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누구? 이름이 왜 이래?'할 사람이다. 

이런 조약골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쓴 책이 이 책이다.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17번째 책으로 나왔다. 고은의 만인보, 민중의 소리에서 펴내는 만민보와는 달리, 이 만인보 시리즈는 해당하는 사람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젊은이들 중에 이 사회에서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젊은 만인보를 기획했으리라 추측을 하고, 이 책들을 읽으면 이렇게 다양하게 이 사회에 반응하면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리라.  

이 책을 읽으면 조약골이 꽤 유명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리라. 그리고 자신의 시야가 더 넓어지리라.

조약골은 아나키스트라 칭해진단다. 아나키스트는 굳이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한정하지 않는다. 조약골도 마찬가지다. 그 자신이 아나키스트라고 내세우지 않고, 어떤 때는 생태주의자이기도 하고...어떤 때는 뭐이기도 하고, 그 때 그 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삶은 어린 시절, 배봉산, 중랑천에서부터 생태적인 싹이 틔워졌고, 학창시절에는 건대사태(우리는 이렇게 부른다)를 목격하면서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깨달았으며, 학교 교육을 통해서도 억압된 현실만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생활을 하면서 강경대, 김귀정 열사의 일들을 겪으며 국가의 폭력성을 몸으로 체득하고, 이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런 국가의 폭력을 거부하는 몸짓이 바로 아나키즘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아나키즘을 공부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자신의 행동을 만들어 나간다.  군대 거부 운동, 반전이 아닌 비전(非戰) 운동을 해야 한다는 깨달음도 얻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들에 그가 참여하게 된다. 대추리, 용산참사, 성미산 개발 반대, 두리반 등 그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늘 함께 한다. 그런 행동들이 그를 '운동권 셀레브리티'로 만들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이 책의 앞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위해, 내 삶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새로이 거듭나는 실험들을 통해 차근차근 나의 일상을 재미있게 구성해 보자. 그게 내 깨달음이자 혁명이었다." (11쪽) 

그렇다. 

그는 운동권이라고 희생을 한다는지, 무슨 종교적인 엄숙성을 띤다든지 하지 않는다. 자신이 좋아서 한단다. 재미있게 살려고 하고, 활동하는 일이 고통스러운 부분들도 있지만, 그것을 해방으로 여긴다고, 아니 그것이 자신에게는 해방이라고(227쪽) 한다. 

그가 이렇듯 힘든 현장에 계속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삶을 자신의 삶이라고, 그런 삶 밖에 있는 자신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이는 희생도, 대가를 바라는 어떤 것도 아니고, 그냥 자신의 삶이니까, 이 삶 외에는 다른 삶을 생각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리라.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조약돌이 활동하는 시간과 겹치고, 아직도 우리나라는 이러한 사건들의 연속이니, 불행하게도 아직도 그가 더 활동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여기서 내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도 분명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으니, 우리가 아무리 눈 감으려 해도 우리 눈 앞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니, 단지 눈 감고 회피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청춘들의 이야기를 읽고, 들으면서 어떻게 눈감고 모른체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만큼 이 책은 직접 내세우지는 않지만,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자신의 삶에 가장 충실한 행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있다. 단, 자신을 희생한다는, 남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다는 그런 마음을 지니고 행동을 하면 안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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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구의 문인기행 - 글로써 벗을 모으다
이문구 지음 / 에르디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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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문구 하면 "우리동네", "관촌수필"이 떠오른다.  

또한 그의 유려한 문장이 떠오르고, 도무지 사전 없이는 읽기 힘들었던 낱말들이 떠오른다.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말들을 이리도 잘 썼던 작가가 있을까 싶을 만큼 그는 우리말을 참 다채롭게도 썼다. 그것도 순우리말들을. 그렇다고 그가 한자에 약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의 글에 나타나는 한자말들이 들어간 문장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나, 여기 있소'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만났던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썼다. 예전에 쓴 글들을 그의 사후 다시 모아 발간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문구는 문학단체에 꽤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기에 그는 문학인들 중에서도 마당발에 속한다. 그런 그가 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썼으니..  

비록 그는 잡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글들은 지금 우리들에게는 소중한 한 편 한 편의 글이 되고 있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사람'하는 작가들도 있고, 이런 작가도 있었나 하는 작가도 있지만, 당대에 이문구가 자신의 기준으로 좋은 작가, 훌륭한 작가라고 이야기를 할만한 작가들임에는 틀림없는 사람들이다. 

이 책에는 21명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마지막에 실린 서정주에 대한 글을 빼놓고는 (서정주에 대한 글은 미당 사후, 추도문 형식으로 쓴 글이다. 앞 부분에 실린 다른 문인들에 대한 글과 비교하면 분량부터가 상당한 차이가 난다) 대부분 문인들의 일생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또 그와 얽힌 이야기를 싣고 있다.  

60-70년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작가의 길을 놓지 않고 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가 읽는 시나 소설이 그냥 글자로 놓인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그들 삶의 전부가 녹아 있는 그 사람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동리, 신경림, 고은, 한승원, 염재만, 박용래, 송기숙, 조태일, 임강빈, 강순식, 황석영, 박상륭, 김주영, 조선작, 박용수, 이정환, 이호철, 윤흥길, 박태순, 성기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정주. 

이 작가들이 이문구가 만난 많은 작가들 중에 이 책에 나오는 작가들이다. 한 번쯤 들어봄직한 작가가 많지 않은가. 적어도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는 이들 중 많은 작가들의 이름에 낯익어 할 것이다. 

이런 낯익은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 우리들은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던가. 작가들의 속살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을 수가 있다. 이문구 특유의 문체까지 가세하니, 읽는 재미가 배가 된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문학동네에 가까워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독자가 누구라도 상관이 없다. 문학에 관심이 없어도 상관이 없다. 예전 사람들의 일화를 읽는 재미로 읽으면 되니까. 하지만 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읽으면 좋다. 재미도 있고, 나름 얻을 것도 있고, 생각할거리도 많으니 말이다. 

특히 문학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배우고 익히게 될테니 말이다. 

 

덧말 1

149쪽 조태일 편에서 구자운, 김관식, 방봉우, 천상병, 신경림 등이 나오는데, 방봉우는 박봉우가 아닌지 싶다. 박봉우는 알아도 방봉우는 모르는데.... 

 

덧말 2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예전에 나온 책과 겹치는 인물이 많다는 점이다. 이미 이문구 전집에도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호철도 문단 이야기를 책으로 썼으니...더불어 이호철의 "문단골 사람들"도 읽으면 좋다.  

이와 함께 1930년대 문인들에 얽힌 이야기들을 읽고 싶으면 조용만의 책을 찾아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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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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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란 말이 많이 들린다. 자신은 강남 사람들처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혜택을 누리면서도 말은 좌파적, 진보적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던 말이다. 그런 말이 요즘은 그래, 난 강남 좌파다. 내 이런 조건이 내 사상을 좌파로 규정하지 말란 법 있느냐는 말로 바뀌어 쓰이고 있기도 하다.  

하여 강준만은 이 책에서 강남 좌파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세 가지 분류 기준을 제시한다. '강남'의 성격, 주체의 위상, '좌파'의 실천. 이렇게 세 가지 기준에 의해 다시 세 가지씩 나뉘어 강남 좌파는 9가지의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첫번째 '강남'의 성격에서는 경제적 강남 좌파(경제적으로 상류층에 해당하는 사람들), 문화적 강남 좌파(생활방식-문화향유 방식이 부유층과 유사한 사람들), 연고적 강남 좌파(소위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로 나뉜다고 한다. 이런 기준을 보면 강남 좌파가 꼭 부자일 필요는 없다. 

두번째 주체의 위상에서는 공적 강남 좌파(지도자, 정치인, 고위 공직자 등), 중간적 강남 좌파(언론인, 시민운동가, 대학교수 등), 사적 강남 좌파(일반 시민)로 나누고 있다. 

세번째 '좌파'의 실천에서는 이타적 강남 좌파(이념과 삶의 수준을 일치시키려는 사람), 합리적 강남 좌파(이념은 좌파지만, 생활은 나름의 이기심을 발휘하는 사람), 기회주의적 강남 좌파(자신의 이익을 위해 좌파의 이념을 이용하는 사람)로 나누고 있다. 

이런 다양한 강남 좌파의 개념이 칼로 무를 썰듯 명확히 구분되지는 않고, 그때그때 이합집산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강남 좌파라는 말보다는 진보를 표방하는 엘리트 집단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2  

강남 좌파는 노무현 시대에 나왔다고 한다. 그런 개념이 예전에는 없다가 노무현 시대에 들어와서 강남 좌파라고 제 생활은 우파인데, 사상만 좌파인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노무현 시대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다을 강준만은 민주확 이루어진 시대 이후에는 엘리트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고, 그래서 예전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들이 이 시대에서는 문제로 불거지게 되었다고 한다. 즉 엘리트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한 것이다. 

예전에는 개인적인 결함이 민주화 운동이라는 대의에 묻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민주화 이후의 시대에는 개인적인 결함이 치명적으로 다가오게 되고, 사람들이 더 문제삼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건, 정치가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했다는 이야기고, 이는 개인적인 실천과 이념을 비교, 판단할 수 있는 시대적인 여건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즉, 민주화 운동을 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용서되던 시대에서, 이제는 개인의 생활과 자신의 신념이 얼마나 일치하느냐 하는 쪽으로 평가 기준이 옮겨갔는데, 그걸 인지 못하고, 왜 우리만 갖고 그래라고 항변한 그 시대 정치가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3  

강남 좌파는 아닐지라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강준만 특유의 실명 비판이 시작된다. 여기서 굳이 강남 좌파로 분류된 사람만 다룰 필요는 없다. 강준만이 지적하듯이 우리나라에서 정당은 이념으로 뭉친 집단이 아니라, 인물을 중심으로 모인 집단이고, 이들은 선명한 이념을 내세우기 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증오로 그 이념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남 좌파에 속하는 인물만이 아니라, 힘을 지닌 정치 엘리트들을 대상으로 다루고 있다. 

문국현, 조국,  박근혜, 손학규, 유시민, 문재인, 오세훈이 그가 다루고 있는 인물이다. 이들에 대한 평들 중에 우리가 받아들일 내용이 많다. 물론 우리는 정치를 이들 중심으로 하면 안된다. 인물 중심이 아닌, 바로 우리들 생활을 중심에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치인들에게 이야기한다. 아니 우리들에게 이야기한다. 어느 정당, 어느 인물을 중심으로 사고하지 말고, 진정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방법, 즉 민생 현안 중에서 서로 함께 공유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찾자'(336쪽)고 한다. 

말로만이 아니라, 사로 함께 할 수 있는 공약수, 그 중에서도 최대공약수를 찾고, 이 최대공약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함께 행동하자고 한다. 그런 정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강남 좌파의 문제를 정치의 문제에서 교육의 문제로, 아니 학벌의 문제로 끌어온다. 이 학벌이 능력주의로 흘러, 결국 개인의 책임으로 문제를 돌리고 있으며, 학벌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지를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그래서 그는 학벌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으로 최근에 이야기됐던 서울대 폐지론보다는 조세정책의 변화를 제시한다. 그는 '입시, 사교육 문제는 교육정책이 아니라 조세 정책으로 풀어야 한다. 많이 버는 만큼 세금을 많이 내게 하자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워렌 버핏이 생각났다. 그가 돈을 버는 방식이 내 맘에 들지 않을지라고, 그는 자신은 세금을 너무 적게 내고 있다고, 자신의 세금을 더 많이 걷어 가라고, 자신과 같은 투자가들 중에 세금이 무서워서 투자 안한다는 사람 본 적 없다고 했다.   

부자 감세 운운되는 우리 사회에서는 참 부러운 일이다. 세금을 통해 소득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면 굳이 대학에 가려고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대졸과 고졸의 임금 격차, 정규직 유무, 그리고 승진 유무가 심하게 차이나고 있지 않은가? 단지 공부하겠다는 열망이 아니라, 이러한 생활의 격차 때문에 대학, 특히 학벌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런 학벌들이 정치집단 사이에서는 더욱 공고하게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의 다른 분야에서 이러한 학벌 체제에 균열이 일어난다면 정치 집단에서 작동하는 학벌도 많이 약화되리라고 본다. 

또한 많이 벌수록 세금을 더 내면 능력주의의 환상도 어느 정도 사라질테고, 더불어 사회적 평등도 어느 정도 당겨질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대학 가려고 아둥바둥 대는 이유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이니, 강준만의 해결책은 타당성이 있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개그콘서트의 어느 한 꼭지가 생각이 났다. N극과 S극들이 나와 서로 붙었다 떨어졌다 하는 내용. 의도하지 않게 다른 사람과 결합이 되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을 밀어내는 모습 속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꼭지다. 

그런데 이 꼭지가 우리나라 정치 현실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은가?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고 이들은 서로를 밀어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서로 잘 결합이 되어 있고, 함께 결합이 되어 있어야 할 진보와 서민들은 서로 밀어내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많이 보이니 말이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 속에 모두 N극과 S극을 지니고 있다. 특정한 어느 극만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내 안의 극들을 내 스스로 성찰하고, 이를 남들과 소통할 때 조절할 수 있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소통의 정치, 이를 말로만 하지 않고, 앞에서 이야기 했던 민생의 최대공약수에서는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 그게 정치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끼리의 정권 쟁취 싸움, 이권 쟁취 싸움밖에는 안된다.

 

강남 좌파를 읽으면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 엘리트들, 소위 사대부란 사람들, 양반이란 사람들의 최종 목적은 평천하다. 그렇다면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순차적인 개념일까? 아니면 병렬적인 개념일까?  

꼭 수신을 해야 제가를 하고 치국을 하고, 평천하를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치국, 평천하를 하면서 수신과 제가를 함께 할 수 있을까? 

강남 좌파란 치국, 평천하를 하겠다는 사람이 수신, 제가에서 실패했을 때 들을 수 있는 말 아니던가? 

그렇다고 수신하고 제가한다음에 치국을 할 수 있을까? 이것도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만든 것이 치국을 할 때, 제가를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즉 감시기구를 작동시키는 것 아니겠는가? 수신이야 치국, 즉 정치활동을 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는 말로 대신하면 될테고 말이다. 

자신의 정책 실패를 성찰하고 다시 실패하지 않도록 대안을 마련하는 정치가, 이는 수신에 성공한 정치가이리라. 그리고 가족 비리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한 감시기구를 작동시키는 정치가 이는 제가에 성공할 가능성이 많은 정치가 이고...이들은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로 발목을 잡히지 않을테니, 더 나은 정치를 할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남 좌파란 말대신 정치 엘리트, 아니면 그냥 엘리트들이라고 썼으면 좋겠다. 엘리트란 말이 외래어라서 좀 그렇다면 지식인라고 하자. 어짜피 정치가들은 이들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지 않는가? 물론 진보 정당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지식인들이 아닌 사람들이 정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이 이미 진보 정당에서 주요한 위치에 들었을 때는 일반 민중이 아닌 지식인처럼 행동하고 사고한다고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지식인으로 이야기해도 별 무리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식인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말이 아니지 않은가? 민중과 유리된 지식인이 아니라, 지배층에서도 지식인이 나오고, 민중에서도 지식인이 나와야 한다. 지식인은 계층과 분리된 개념으로 생각하면, 또다른 하나의 사회 집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들 지식인이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좌파냐, 우파냐가 결정되지 않을까? 

그람시의 용어를 빌면 전통적 지식인이 되느냐, 유기적 지식인이 되느냐 하지 않을까? 강남 좌파라는 말이 이 '강남'이란 말 때문에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면 우리는 진보를 지향하는 지식인을 유기적 지식인, 보수를 지향하는 지식인을 전통적 지식인이라고 명명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좌파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함의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선이 내년이다. 많은 정치적인 논쟁들이 일어나고, 많은 지식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것이다. 이 때 나는 어떤 입장을 지닐 것인가? 무엇이 정말 많은 사람을 위하는 것인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책의 표지에 '모든 정치인은 강남 좌파다'란 말이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모든은 아니다. 이 모든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인들이 유기적 지식인이 될 테다. 그리고 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좋아질테고... 

우리는 모든 정치인이 강남 좌파가 되지 않게 해야 하지 않을까?  

'강남'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치하는 모습, 이건 허황된 꿈에 불과할까?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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