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 - 이성아 소설집
이성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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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참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도 그렇고, 국어시간에 배운 소설들을 더 읽어보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또 소설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그래서 서점에 가면 어떤 소설들이 나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아는 작가의 소설이 나오면 망설이지 않고 사기도 했었는데...

 

하다못해 최신 경향의 소설을 알아야 한다고 문학상 작품집들을 읽기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 부터 소설이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존에 사 모았던 소설들은 헌책방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고.

 

이럭저럭 소설을 잘 읽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현실이 더 소설 같아서. 도대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들이, 아니 소설보다 더한 일들이 현실에서 펑펑 터지는데, 소설을 읽을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또 소설들이 지나치게 무슨 기법을 시험하는지, 읽어도 마음에 와 닿지 않고,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드는 소설들도 많았으니, 이래저래 소설에서 멀어지게 되었는데...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문학사회학에서 주장을 했고, 따라서 소설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문제에 다가갈 수 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문제적 개인이었고, 이 문제적 개인에 대한 판단에 따라 어떻게 우리 삶을 꾸려갈 수 있나를 고민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요즘은 삶이 너무 팍팍한데, 소설을 읽으면 더 삶이 퍽퍽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소설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거리두기, 소설을 읽을 때도 필요한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베르테르 효과도 소설에 거리를 두지 못한 결과 아니던가. 그런데, 요즘 소설은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만든다. 현실이 더 팍팍한데, 어떻게 소설 속에 들어갈 수 있겠는지, 소설을 읽으며 오히려 현실과 비교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되었는지, 이제는 소설의 인물에 몰입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읽으면서 분석하고 비판하고, 자신을 되돌아 보는 나이가 되었다고나 할까? 소설의 장년에 비유한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이미 자신의 삶의 치열성에서 조금은 빗겨난 나이... 그러한 나이에 읽는 소설은 다른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소설은, 이러한 장년의 나이도 아니다. 읽으면서 이 소설은 노년의 나이에 읽어야 하는 소설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총 8편의 단편들로 묶여 있는 소설집인데, 이 책의 제목이 된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는 단편의 제목이 아니다. 이는 이 소설집의 첫번째 소설인 '저 바람 속 붉은 꽃잎' 중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로 제목을 삼았다. 그리고 이 소설의 내용은 제목에 있다고 봐야 하는데...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가 아니라, 태풍이 지나간 다음, 그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는 태풍, 우리 인생에 한 번쯤 휘몰아치는 그런 광풍을 고스란히 겪은 후 그 다음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 소설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를 마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주듯이 조근조근 들려주고 있고, 또 아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이,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편지를 읽듯이 읽을 수 있게 소설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특히 주요 인물들이 인생의 격랑을 거친 여성들... 그래서 이 소설은 여성주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 시대는 여성성을 회복해야 하는 시대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여성성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들이 이 소설집에는 많다.

 

삶의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오롯이 겪어낸 여성이 이미 나이가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소설들... 그 과거의 장면은 바로 태풍이 몰아치는 장면이고, 잠시 행복했던 순간은 태풍의 눈에 들었던 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평온하고, 행복에 젖어 있더라도 그 순간이 태풍의 눈 속의 순간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네 삶은 결국 태풍을 온몸으로 견디는 일이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남편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속칭 불륜에 빠지기도 하고, 장애인 자식을 두기도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삶을 유지해 나간다. 그러한 강인함, 그 강인함을 부드러움으로 감싸안는 사랑, 이것이 바로 여성성이고, 이 소설에 나타난 모습이기도 하다.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아니, 이 소설의 제목을 바꾼다. 우리는 어디쯤 서 있을까? 바로 내 인생에서 태풍은 지금 다가오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한 번 겪고, 지금은 잠시 평온한 상태인 태풍의 눈에 있을까, 아님 태풍의 눈 시간이 지나고 다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 있을까?

 

이 소설에 나오는 여인들은 이미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서서, 태풍을 겪던 시절을 생각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노년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의 삶은 어디쯤 와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삶에서 지금 태풍은 도대체 어디쯤 와 있을까?

 

나는 태풍을 어떻게 맞이하고 보낼까?

 

태풍이 지나간 자리의 황량함. 태풍이 지나간 삶의 황폐함. 그러나 삶은 살만한 것이므로, 그 황폐함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모습. 이미 쓸려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이 비록 비루할지라도.

 

따라서 이 소설은 노년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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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약속 푸른숲 필로소피아 14
한나 아렌트 지음, 제롬 콘 편집, 김선욱 옮김 / 푸른숲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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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철학자 아렌트. 그의 유고집이다. 그러므로 체계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아렌트의 사고 전반을 알 수 는 책이므로 읽어야 한다. 물론 쉽지는 않다. 앞에서 번역자의 해설과 뒤에 있는 편집자의 해설이 그나마 이해에 도움을 주지만, 하여간 상당히 고민하면서 읽어야 하는 책은 맞다. 그렇다고 읽기로 끝내서는 안된다. 읽기란 삶을 변화시키는 행위 아니던가.

 

그리고 읽기 자체가 아렌트의 말로 하면 정치 행위 아니던가. 우리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책을 읽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읽기란 곧 대화이고, 이 대화는 읽는 사람과 쓰는 사람의 대화이기도 하고, 읽는 사람 자신의 하나 속의 둘의 대화이기도 하고, 이 책을 읽은 사람, 또는 읽을 사람과의 대화이기도 하니, 읽기는 결국 자신의 관점을 다른 사람의 관점과 비교하는 행위가 되고, 이러한 행위는 바로 정치적 행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아렌트의 말을 인용해 보자.

 

정치는 인간의 복수성에 기초한다.(132쪽)

 

단수의 인간이 아니라, 복수의 인간이기에 정치가 필요하고, 우리는 정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정치를 할 수 있나? 아렌트의 말을 또 인용하면 여기에는 판단이 필요하다.

 

정치 영역에서 우리는 판단 없이는 전혀 기능할 수 없는데, 정치적 사고는 본질적으로 판단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140-141쪽)

 

그렇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판단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아렌트는 '우리의 삶과 연관된 우리의 사적인 경험과 가족적 연관관계에서 벗어남으로써만'(164쪽) 가능하다고 한다. 우리가 소위 정치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아렌트의 지적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지는 말 안해도 다 알겠고, 이들은 공적 영역을 사적 영역으로 바꾸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정치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정치가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아렌트의 관점에서 올해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올해가 얼마나 중요한 해인지 알 수 있게 된다. 무려 선거가 두 번이나 있는 해이고, 이 선거가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정치적 행위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라면, 국회의원과 대통령이라는 소위 정치가를 뽑는데 우리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해야지만 올바른 정치행위를 하게 된다고 본다. 우리가 정치 행위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렌트가 말하는 이러한 정치가를 선출하지 못할테니 말이다.

 

정치가란 정당체제라는 우회적 방법을 통해 인민들의 대표자를 자처하며, 또한 국가 내에서, 필요하다면 국가에 대항해서 인민의 이해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185쪽)

 

자. 이런 사람을 정치가로 뽑아야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고, 우리들이 제대로 된 정치 행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치 행위를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 바로 불편부당성이다. 불편부당성은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는, 편견을 극복하는, 그래서 우리의 의견으로 남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자세를 지니고 행위함을 말한다.

 

불편부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관조할 수 있는 능력, 여기서 판단이 나오고, 사유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즉, 이전투구 판에 끼어들어 함께 진흙을 묻히며 뒹군다면 우리는 행위에 매몰되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제대로 된 판단을 하려면 거리를 두어야 한다. 과거를 살필 수 있어야 하고, 미래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며, 과거와 미래 사이인 현재에 내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사유해야 한다.

 

최소한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정치판을 보고, 그 정치판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 그는 정치판에서 거리를 두고, 불편부당성의 관점에서 판단을 하고, 그 정치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순간의 행위를 영원으로 기록하고, 이야기로 전달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하기, 이건 엄청난 정치행위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적어도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지 않게 하려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널리 퍼지면,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될 수가 없다.

 

과거 747공약으로 대표되는 많은 공약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판단하고, 이야기 할 수 있다면, 올해 정치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내걸고 있는 수많은 공약들의 실현가능성,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게 될 테고, 그렇다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게 됨으로써 우리들은 우리들 나름대로 정치 행위를 하게 된다.

 

정치,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무슨 무슨 정치 집단, 또는 정당에 가입한다고 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정치는, 이러한 행위들을 보고, 판단하고, 이야기하는 행위 속에 있다. 이 행위들이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 때 정치는 바로 우리 곁에 있게 되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정치적 인간'이 된다.

 

우리 정치적 인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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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약속 푸른숲 필로소피아 14
한나 아렌트 지음, 제롬 콘 편집, 김선욱 옮김 / 푸른숲 / 2007년 10월
품절


설득은 진리가 아니라 의견에서 온다. 그리고 설득만이 다수를 다루는 방법을 헤아리며, 또 알고 있다.-41쪽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듣고 보도록 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능력에 속한다. -43쪽

이 세계의 공통성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시민들과 그들의 의견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할 것이다.-47쪽

오직 사유에서만 하나-가운데-둘의 대화가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53쪽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구체화할 수 없는 사람, 즉 모든 형태의 사유에 필요한 고독을 결여한 사람은 자신의 양심을 지킬 수 없다.-54쪽

상식이란 우리의 다른 감각들에서 나오는 특수하고 개성적인 자료들을 우리가 함께 거주하고 공유하고 있는 세계 속에 맞추는 것이다. ... 상식은, 복수성이라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이 자신의 특수한 감각 자료들을 다른 사람들의 공통적인 자료들에 비추어 점검하고 조정하는 것을 가리킨다. -73쪽

행위와 말이 두 개의 탁월한 정치적 활동이라면, 차이와 평등성은 정치체의 두 구성 요소인 것이다.-94쪽

정치는 인간의 복수성에 기초한다.
... 정치학은 서로 다른 인간들의 공존과 연합을 다룬다.-132쪽

정치란 인간들 사이에 놓여 있으며, 관계로서 성립된 것 안에서 일어난다.-134쪽

자유는 정치라는 독특한 중개적 공간에서만 존재한다. ... 시작부터 정치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그들 사이의 상대적 평등성을 목적으로, 그들의 상대적 차이들에 견주어 조직한다.-135쪽

인간은 편견 없이 살 수 없다. .. .어떤 특정 시기에 있어 경각심과 마음의 개방성 정도가 그 시대의 전반적인 모습과 정치적 삶의 수준을 결정한다.-139쪽

정치 영역에서 우리는 판단 없이는 전혀 기능할 수 없는데, 정치적 사고는 본질적으로 판단에 기초하기 때문이다.-140,141쪽

정치의 의미는 자유라는 것이다.-148쪽

자유의 기적은 시작을 하는 능력에 내재해 있는데, 이 능력 자체는 모든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에도 또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는 세계 속에 탄생하기에 인간 자신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에 내재해 있다.-154쪽

우리의 삶과 연관된 우리의 사적인 경험과 가족적 연관관계에서 벗어남으로써만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정치 영역인 일반적인 공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164쪽

정치가란 정당체제라는 우회적 방법을 통해 인민들의 대표자를 자처하며, 또한 국가 내에서, 필요하다면 국가에 대항해서 인민의 이해를 대표하는 사람이다.-185쪽

동일한 것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는 능력은 인간 세계 안에 있다. 그것은 본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관점을 어떤 다른 사람의 관점과 단지 교환하는 것이다. -211쪽

정치적 인간의 자유는 타인의 현존과 평등성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212쪽

이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특정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을수록 그들 사이에 형성되는 더 많은 세계가 존재하며 그 세계는 더욱 더 크고 풍부해진다.-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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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층이동의 사다리 - 빈곤층에서 부유층까지, 숨겨진 계층의 법칙
루비 페인 지음, 김우열 옮김 / 황금사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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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원제목을 우리말로 직역을 하면 빈곤을 이해하는 틀 정도가 될텐데... 계층이동의 사다리라고 붙인 까닭은 원래 제목에 연연하지 않고, 이 책의 내용을 가장 잘 대변하는 제목을 붙이겠다는 의도였으리라 추측을 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대대로 교육을 계층이동의 수단으로 여겼고, 또 실제로 교육이 그러한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 이 제목은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계층에 대한 이해가 확실해야 하는데, 계층을 나누는 기준을 무엇으로 삼느냐, 또 몇 개의 계층으로 나누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되는데, 이 책은 단순하게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

 

빈곤층, 중산층, 부유층. 아주 간단하다. 물론 이들의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우리들은 통상 이런 식으로 나누곤 하니, 이 책의 분류가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여기에 이 책은 빈곤층에 초점을 둔다. 원래 제목이 빈곤을 이해하는 틀이니, 빈곤층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밖에 없다.

 

빈곤을 어떻게 하면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나? 빈곤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가를 통계를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문제를 파악했으니 해결을 해야 한다.

 

해결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한다. 그만큼 학교 교육에 기대를 걸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교사가 빈곤층의 자녀들을 바라보는 틀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책의 내용은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 계층이 행동하는 방식이라든지, 말하는 방식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일례로 음식의 예를 든다. 너무도 적절하다는 생각이 드는데...빈곤층은 "배 부르게 먹었니?", 중산층은 "맛있게 먹었니?", 부유층은 "차려진 음식이 보기 좋게 나왔니?"라고 묻는다고 한다. 빈곤층은 굶주림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기에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급급하다면, 중산층은 배를 채우는 문제는 이미 해결이 되었기에 맛을 따지게 되고, 부유층은 이러한 중산층을 넘어섰기에 눈에 보기 좋은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듯 각 계층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이나 말하는 방식,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이 다 다르니, 교사들은 빈곤층 학생을 가르칠 때, 빈곤층의 삶의 방식, 사고 방식을 이해한 상태에서, 그보다는 조금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다른 사고 방식, 삶의 방식을 가를쳐야 한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가 역할 모델을 할 필요가 있고, 학생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다. 프랭클도 말했듯이 삶에서 의미를 상실하면 더이상의 희망을 발견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삶의 의미를 파악하려면 기본적인 지식이 습득되어야 한다. 즉, 빈곤층은 언어에서도 다른 계층에 비해 많이 떨어지기에 이러한 언어 습득 및 사용 방식에 대해서도 교육을 통해 알려줘야 한다고 한다. 언어 능력이 비슷해지면 그 때부터는 지식을, 세상을 바라보는, 삶을 바라보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자신의 삶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자신의 삶을 관조하면,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성찰할 수 있게 된다.

 

베르베르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교육을 받지 못한 대부분의 빈곤층들이 "왜, 나는 가난한가?"라는 질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면, 이제 교육을 받은 빈곤층들은 "어떻게 하면 나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왜?"라는 말이 원인을 파악하는 아주 좋은 말처럼 보이지만, "왜?, 왜?"하다보면 과거에 집착하는 경우가 더 많아진다. 그래서 자신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과거에만 매달려 현재를 잊게 해주는 존재에 집착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빈곤층에서 주로 번지는 술, 마약같은 종류에 매달리는 행태가 바로 이러한 사고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어떻게?"는 미래지향적이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 때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자산들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과거를 떨치고, 현재를 발판으로 삼아, 더 나은 자신의 미래를 개척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만드는 데 교육의 목적이 있고, 학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이 책에는 자신이 또는 교육자가 고려해야 하는 자원이 8개가 나온다.

재정적, 정서적, 지적, 영적, 신체적, 지원 시스템, 관계.역할 모델, 불문율 지식이다. 이들을 고려한다면 학교에서 상황을 몰라 갈등을 빚는 일을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즉, 이미 부모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빈곤층 학생에게 교사가 부모의 목소리로 얘기를 한다면 빈곤층 학생은 엇나가기 마련이니, 이 때는 어른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이해하고 공감하되, 해결방안을 제시해줄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개천에서 용은 안 날지라도, 개천이 썩게 내버려둘 순 없다. 개천에서도 잘 살게 해야 하고, 또 더 넓은 강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층 한 층 올라가려는 노력을 하게 해야 한다. 그게 교사의 몫이다. 의무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계층이동의 사다리다. 절대적인 비약이 아니라, 하나하나 단계를 밟으면 언젠가는 다른 자리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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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
수잔 에바 포터 지음, 심혜경.유재봉 옮김 / 교문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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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재현

 

졸업식. 서로 축하하고, 한 단계를 마친 기쁨의 날, 그러나 교문이나 동네에는 경찰들이 깔려 있다. 일명 알몸 졸업식, 또는 교복 찢기, 밀가루, 계란 던지기, 아니면 선배가 후배를 폭행하는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왜 자신이 3년간 다녔던 학교를 마치는데 이런 행사들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도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볼 수 있을텐데... 그렇게 보지 않고, 오로지 일탈행위로만 간주한다. 일탈행위, 이는  잘못된 행위이니 바로잡아야 한다. 바로잡아야 한다는데 동의한다. 그런데 그것이 경찰이 지키고 있음으로 해결이 될까? 더 은밀한 곳을 찾아가지 않을까. 아니면 그날을 피해 다른 날을 잡지 않을까. 해결이 아니라 은폐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있을테니 말이다. 그 원인을 캐서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일은 해결되지 않는다. 해결되기는 커녕 잠재적으로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

경찰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생각났다. 엄석대에게 눌렸던 아이들이 과연 제 힘으로 그런 폭력을 극복했던가. 아니다. 아이들은 단지 더 큰 폭력에 기댈 수 있었을 뿐이다. 더 큰 폭력이 작은 폭력을 힘으로 눌러버리고 이를 해결했다고 하는 상태, 그것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아니었던가.

지금 우리 사회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재현하고 있는가? 그러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러한 일탈행위가 나타난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한다.

 

줄타기

 

교사는 줄타기 하는 사람과 같다. 자신이 원하는 지점까지 가기 위해서 위태위태한 줄 위에서 자신의 전존재를 걸어야 한다. 잠시 방심하다간 줄에서 떨어져 버리고 만다. 이 책을 읽으며 교사란 어떤 존재일까 생각했는데, 바로 교사는 줄타기 하는 사람과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는 학생에게 해주어야 할 교육적 관점을 견지하고, 발은 줄에 의존하기에 학생과 학교와 현실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하며, 손은 균형을 잡기 위해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하는. 그래서 어느 한 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존재. 자신이 원하는 지점까지 갔어도 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다른 지점까지 또 가야 하는 존재다. 학생이라는 사춘기에 접어든 존재와 생활하는 교사는 바로 자신이 줄 위에 서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화이부동

 

줄타기하는 교사는 학생과 동일시하기 보다는 학생들과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학생에게 동조하되, 동일시하지는 말아라. 동일시하는 순간, 교육에서는 멀어지게 된다. 즉 학생과 어울리되, 같아져서는 안되는 존재, 바로 그런 존재가 교사이다. 학생들을 충분히 이해해주고 격려해주되, 자신의 관점을 잃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교사는 바로 어른이기 때문이다. 어른이기에 자신을 형성해나가는 청소년들에게 어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청소년들이 자신을 잘 형성해나갈 수 있다.

함께 하되 따로 가는, 그래서 따로 가되 함께 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교사이다. 참으로 힘든 줄타기다.

 

성찰

 

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또 어울리되 하나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찰이 필요하다. 자기반성, 아니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 이 능력이 바로 어른됨을 알려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나이 먹음과 어른됨이 같을 수 없다면, 나이먹음을 어른됨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 성찰이다. 자기를 끊임없이 들여다보기. 그렇게 하다보면 남과 나를 판단할 수 있게 된다. 교사에게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바로 이 성찰이다. 청소년들과 오랜 시간을 지내는 직업을 가진 교사는 자신을 성찰하지 않으면 이 책에서 말하는 '사춘기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청소년들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교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된다. 학생들을 위해서 또는 자신을 위해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또 습관을 지녀야 한다.

 

줄탁동시

 

학생은 학생 나름대로 교사는 교사 나름대로 노력을 해야 한다. 교사의 노력이 억압으로 나타나지 않고, 학생들 스스로 변하게 한다면 교육은 성공이다. 그런 성공을 교사들은 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사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보아야 한다. 건강을 챙기기 못하는 교사는 좋은 교사라 할 수 없다고 이 책은 주장한다. 교사들이 자신의 몸과 정신을 돌보는 모습을 보이는 것, 그것도 역시 교육이라고 한다. 어른으로서 만족스러운 삶을 온몸으로 보여주면 학생들도 어느 순간 그런 교사의 모습에 감염이 된다. 즉 여기서 필요한 요소는 '병행 교육과정'이라고 하는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는 교육이다. 삶을 위한 교육이 된다.

이러한 교사의 모습이 학생을 변하게 하고, 줄탁동시처럼, 교사는 밖에서 학생은 안에서 알을 깨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한 단계 올라간 학생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불가근 불가원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된다. 참 어려운 일이다. 교사는 이런 거리두기에 성공해야 한다. 거리두기에 실패할 경우 교육은 무산되고 만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책에서 제시한 몇 가지가 유용하겠단 생각이 든다. 하나만 들면 학생과 교사는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 같은 인간이되,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면 교육에서 거리두기는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깨달은 교사라면 학생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바람직한가를 성찰한다면 이러한 거리두기는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거리두기가 성공하면, 학생을 위해서 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교사는 그리 좋은 교사가 아니라는 이 책의 주장에 공감할 수 있다. 희생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자신이 지쳐가기 때문이다. 몰입과 희생은 다르다. 그러나 교사도 사람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자신의 삶을 충분히 영위하는 모습을 보이는 편이 더 교육적이라고 한다.

거리두기에 실패했을 때 이런 희생이 나올 수 있다.

 

내가 만일

 

교과부 장관이라면 그많은 연수들을 가지고 교사들을 평가하지 않겠다. 오히려 이런 책을 학교에 배포하고, 교사들이 이 책을 읽고 각 학교의 실정에 맞게 자신들을 계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천편일률적인 연수보다는 각 학교에서 이렇게 교육에 관한 책을 읽고 함께 교육하는 교사들끼리 그 학교의 상황에 맞게 자신들의 것으로 만드는 편이 더 연수에 맞는다. 이 책은 제목이 청소년은 왜 그렇게 행동할까지만, 사실, 이 책은 교사들은 이래야 한다는 책이다. 여기에 학교 관리자(교장, 교감)는 이래야 한다는 내용까지도 있으니, 현장의 교사들에게 꽤 유익한 책이다. 작은 제목이 교사를 위한 소통과 공감의 기술이다.

아마도 교사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책일텐데...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실현가능한 내용들이 나오기 때문에 웬만한 연수보다는 각 학교 교사들이 함께 읽고 고민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교사들 뿐만 아니라, 학교 관리자들도 반드시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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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en 2012-02-25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공감되는 리뷰를 써 주셨군요..
참으로 유용한 내용입니다!
다른 리뷰들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