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우어
천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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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선란 소설을 읽을 때 늘 기대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따스함. 따스함으로 인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모난 마음이 둥글어지면서, 다른 존재들에 대한 공감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천선란의 소설을 읽는 일은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일이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 속, 인물들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것이 분노나 증오, 또는 몰이해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 이해로 다가오면 소설을 읽는 일은 즐겁다. 결말이 비록 비극으로 끝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비극이 아니다. 우리 마음 속에 따스함이라는 씨앗을 남겼으니까. 그 씨앗이 언젠가는 싹이 틀 테니까.


여러 편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공통점은 역시 따스함이다. 이 따스함이 천선란 소설을 계속 읽게 만든다. 또한 이러한 따스함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에게서도 이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러한 따스함은 다른 존재들에게로 퍼져나간다.


공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른다. 서로의 마음이 함께 울리는 상태. 그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뼈의 기록'이다. 


로봇이 등장하는데, 이 로봇이 하는 일이 장례지도사다. 세상에 사람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하는 로봇이라니... 반려 동물을 넘어서 반려 로봇이 나오는 세상이지만,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삶의 끝자락을 로봇에게 맡기다니...


로봇이 함께한다고 해서 사람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나? 오히려 로봇보다도 못한 인간들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면,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로봇을 보면 인간 이외의 존재에게 편견을 지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례를 치르고 휴식 시간에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청소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는 로봇. 그 사람과 마음이 통하는 로봇. 그 사람이 죽자 평소에 뜨거운 것을 싫어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주로 관을 보내려는 로봇. 규칙을 어긴 로봇을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그 로봇을 옹호하고 도와주는 사람들. 이것이 바로 공감이고 공명이다.


그렇다. 우리가 관계를 맺는 존재들을 어떠하다라는 인간의 관점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고정불변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들이 변해가듯 다른 존재들도 변할 수 있음을. 그것이 비록 로봇일지라도.


이렇게 천선란의 소설에는 다른 존재들이 나오지만, 그 존재들을 무조건 배척하지는 않는다. 공존하는 모습. 아니, 공존해야만 하는 모습을 천선란의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들과도 공명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인간끼리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공명이 이루어지는 경우를 '서프 비트'에서 만날 수 있다. 인간치고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태어난다.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영웅처럼,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겨야 할까. 아니면 우리와 함께 살아가지만 다른 모습을 지닌 존재로 봐야 할까? 


영화 [X맨]을 보면 돌연변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인간들의 다른 반응이 나온다. 또한 돌연변이들이 인간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나오고. 그 영화와 연결이 될 수도 있지만, 천선란의 소설은 그들을 영웅시 하지 않는다. 


물론 자신의 능력을 아직 다 깨닫지 못한 인물을 내세워서 그렇겠지만,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냥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들과의 공감, 공명이 바로 우리 삶을 더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서프 비트'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 이들은 그 다른 능력을 우리들의 삶에서 소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일들을 해결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물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인물은 물 속 쓰레기를 치우는 일에, 밤에도 낮만큼 잘 보이는 눈을 지닌 인물은 길 잃은, 또는 위험에 처한 동물을 구해주는 등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드러내지 않고... 이러한 존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있음을 생각하게 해주는데...


그러니 우리 상대를 나와 다른 너로 선을 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 겹치는 경계가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어떤 존재들과도 겹치는 경계가 있음을, 그 경계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공감, 공명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음을 천선란의 이번 소설집 [모우어]를 통해 생각한다. 


읽는 내내 마음이 따뜻했다는 것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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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Philos Feminism 4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임옥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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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 참 답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 '인간'이라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인간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인간'의 범주를 확정하기도 힘든데,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범주에 들지 못했던 존재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들이었다.


우선 여성은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종속된 존재였다. 과학 연구를 한다고 해도, 여성의 관점이 아닌 남성의 관점에서 연구가 된 경우가 많았고, 이는 '여성'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해러웨이의 이 책은 영장류를 연구하는 학문에서 여성이 어떻게 배제되어 있었는지, 그러한 연구에 여성들이 참여하면서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내용이다.


과학은 객관적인 것 같지만 아니다. 과학은 투쟁의 장이다. 여러 논쟁들이 겹치는 장이 바로 과학이다. 따라서 과학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 어떤 관점으로 연구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도출되기도 하니까.


여성도 남성과 더불어 '인간'이라는 관점이 자리잡게 되지만, 여기에 다시 '여성'의 범주에서 비켜간 존재들이 있다. 바로 '유색인' 여성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범주에도 '여성'의 범주에서도 소외되었다.


이제는 수많은 투쟁을 통해서 유색인 여성들도 '여성'의 범주에 들게 되었다. 그것을 부정하는 현대인은 없다. 그렇다면 유색인 여성도 이제는 '인간'의 범주에 들게 되었는데... 여기에 다시 '성소수자'들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 역시 '인간'의 범주에 들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거부당하는 경우도 있다.


'성소수자'들이 그렇다면 사이보그는 어떤가? 사이보그는 '인간'의 범주에 들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김초엽,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다 되다]란 책을 생각하게도 되는데... '인간'의 범주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해러웨이의 작업이다. 그의 '사이보그 선언문'에 이런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여전히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는 않지만, 인간을 확장하는데 '사이보그' 역시 한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해러웨이의 책은 '인간'에 대해 질문하고, '인간'의 범주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 가능한,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계가 확정된 것이 아니라, 경계 속에서 유동하는, 끊임없이 그 경계가 바뀌고 있는 그런 상황. 그 상황에서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있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페미니즘'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니,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인간'에 대해 지니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도록 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그동안 서구에서 연구되었던 결과들과 많은 문학작품들을 통해서 해러웨이는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이 책이 1991년에 나왔다고 하니, 지금은 이 논의에 더 많은 것을 덧붙여야겠지만, 그럼에도 방향은 의미가 있다. 


해러웨이의 글들이 결국은 '인간'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그 '인간'에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존재만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광활한 우주로 우리의 시야를 넓히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 몸이라는 우주 속으로 더 깊게도 들어가야 함을... 이러한 과정이 모두 '인간'에 대한 이야기임을 해러웨이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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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장민 외 지음 / 허블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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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편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과학문학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과학적인 내용을 가미한 소설들이다. 영어로 SF소설이라고 해도 좋겠다. 최근에 이런 경향의 작품들이 많이 읽히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공상이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겠다고 생각하던 일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해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소설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작품을 통해서 경험하게 해준다.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작가가 만들어낸 세상은 그냥 허구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세상은 현실 속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삶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소설들을 허무맹랑한 소설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처음에 실린 작품 '우리의 손이 닿는 거리'를 보면, 인간이 우주를 개척하기 위해서 거대한 로봇을 만들어낸다. 이 로봇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중추신경계와 연결되어 인간의 몸을 확장한다.


즉 우리는 확장된 몸으로 우주에 나가게 된다. 무려 18미터 짜리 로봇(몸)이다. 18미터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 우리의 행동은 어떻게 될까? 거기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물론 진화를 생각하면 수천 년 또는 수만 년이 걸리겠지만, 그러한 유전적 진화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자신의 조건에 맞게 신체 활동을 조절하게 된다.


커다란 유기체가 된 인간. 그런 인간은 본래 인간의 몸과 같은 행동을 할 수가 없다. 그러니 그들이 로봇 옷을 벗었을 때 자꾸 부딪히게 된다. 그들의 감각은 로봇을 입었을 때의 감각과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치면 괜찮겠지만 시간이 달라진다. 


보통 인간의 몸으로 겪는 시간과 거대 로봇을 입고 행동하는 인간의 몸으로 겪는 시간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단위가 달라진다고 해야 하나. 이것이 문제가 된다. 인간의 욕망이 더 거대한 로봇을 원하게 되고, 인간의 시간은 점점 길어진다.


즉, 수명의 연장이 자연스레 일어나게 된다. 이것이 축복일까? 재앙일까? 과연 이러한 거대 로봇과 인간의 신경이 연결될 필요가 있을까? 소설은 이 점에서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과연 인간은 할 수 있으면 다 해야 하는가? 그것이 거대 로봇을 계속 키워서 인간 신경망의 속도로를 늦추는 쪽으로 발전한 소설의 결말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바람직한가? 우리는 할 수 있는 일과 가치의 균형을 생각해야 하지 않나?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두 번째 소설 '개인의 우주'를 읽으면 더 잘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백 년이라고 잡아도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짧다. 그럼에도 인간은 저 먼 우주를 탐구하려 한다. 비록 자신이 결과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후대가 결과를 만날 수 있을 테니.


개인이라는 인간에서 인류라는 종으로 넘어가면 인간은 할 수 있는 일을 무한히 할 수 있다. 당장의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말이다. 그러니 더욱더 '가치'의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없다. '가치'를 윤리라고 해도 되리라. 첫번째 소설에서 계속 제기되는 문제가 바로 과학기술과 윤리 아니겠는가.


이런 균형이 깨질 때의 모습을 '하늘의 공백'에서 만나볼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들이 일관된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현재의 과학기술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는 공통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로봇이 주인공인 소설이라고 생각하지만 결말의 반전이 기가 막히다. 과연 그런 세상이 행복한 세상일까? 읽어봐야 반전의 묘미를 알 수 있으니,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겠고,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들이 어떻게 분류되고 억압받는지를 '피폭'이라는 소설에서 만날 수 있으니, 일종의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소설인 '피폭'을 읽어보면 좋겠다.


마지막 작품인 '달은 차고 소는 비어간다'는 다중우주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인간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다중우주가 있다면, 거기에 개입하는 순간 우주가 달라질테니...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겠지만.


다섯 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할 수 있으니 해야 한다'는 신념을 고수해야 하는가? 할 수 있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있지 않은가? 어쩌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해버려서 위기에 빠진 적은 없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은 좋은 생각거리가 된다. 다른 세상을 만나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통해 미리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소설은 준다. 이 작품집들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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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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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트우드 소설집이다.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작품들을 쓴 작가라는 생각에, 작품이 나오면 읽어보려고 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이번 작품집에는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그 중 앞부분에 실린 '알핀랜드, 돌아온 자, 다크 레이디'는 내용이 통한다. 작중 인물이 겹치기 때문이기도 한데, 주로 세월이 흐른 뒤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젊은 시절 겪었던 격정을 이제는 잊은 나이. 그럼에도 과거의 격정을 기억하는 나이. 그때 겪은 일들을 용서도 하고, 때로는 여전히 상처를 지니며 살아가는 인물들 이야기.


그렇지만 이 소설들에서 중심은 알핀랜드라는 창조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물들이 갈등을 겪지만 그들의 모습이 소설 속 알핀랜드에서 다시 구현되고 있고, 그러한 알핀랜드로 인해서 현실 속에서는 더 심한 갈등, 심지어 살인까지도 가능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다.


문학이 하는 역할. 자신의 삶을 새로운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나머지 소설들은 서로 관련이 없는데, 그럼에도 공통점을 찾으라면 젊은 나이의 인물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은 나이든 사람들이다. 이제 애트우드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동년배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이 들어서 과거를 회상하고, 과거의 치열했던 갈등들이 어느 정도 무마가 되는, 또는 생각하지 못했던 반전이 일어나는 소설들이다.


물론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보복을 하는 소설도 있다. '스톤 매트리스'가 그렇다. 살인 사건을 다룬다. 발견되지 않는 살인 사건. 그러나 이 살인에는 동기가 있다. 자신의 잘못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성과 그 남성으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버린 여성이 나온다.


나이들어 만나게 된 둘. 남성은 물론 여성을 알아보지 못한다. 어린 시절 여성은 그 남성의 성적 노리개에 불과했을 뿐이다.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은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만이 중요했고, 욕망을 채운 뒤에는 거기에 따른 책임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 오히려 자기 욕망의 결과를 여성에게 뒤집어 씌우기만 했을 뿐.


이는 남성우월주의 세상,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생각이 팽배했던 시대에 벌어진 일이다. 그런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지만, 그럼에도 표면적으로는 그때와 같은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퍼져 있으니.


시대가 변했다. 그렇다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가? 그가 반성을 하고, 자신의 행동을 고쳤다면 아마도 여성은 그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 사회분위기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 그러나 자신의 과오를 깨우치고 고쳤다면 용서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남성은 여전히 과거에 매여 있다. 그는 자기 욕망 충족 욕구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자신 외의 여성들은 모두 욕망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은 바뀐 시대를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니 그에겐 죽음이 다가올 수밖에. 


이러한 살인을 다룬 소설도 노년의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좀 낯선 소설이 있다. 노년의 삶이 좀더 이해의 폭이 넓은 사회를 이루어야 하는데, 마지막에 실린 작품인 '먼지 더미 불태우기'는 살벌하다.


노인들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진다. 노인들은 먼지 더미에 불과하다. 그들이 살아온 삶 전부가 부정당한다. 그들은 짐조차 되지 않고, 털어버려야 할 먼지 더미에 불과해진다. 그것도 젊은 이들에 의해서. 소설 속에서는 아기 가면을 쓴 인물들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행위에 경찰 등을 비롯한 국가권력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


이는 노년의 삶을 불안하게 하는 사회 현실을 꼬집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세대 갈등을 넘어, 그것을 해결해야 할 사회가 손을 놓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화가 아닌가 한다. 노인들은 과거의 행위로 안락하게 살고 있는데, 젊은이들은 직업을 갖지 못해 힘들게 살고 있으니, 그 노인들을 치워야 젊은이들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잘못된 믿음. 잘못된 행위. 그러나 이를 개인의 갈등으로 몰아가고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공권력. 


그렇다. 어쩌면 세대 갈등을 공권력이 부추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코 세대들끼리 갈등이 일어나서는 안 될 상황임에도 이를 조장하고, 조정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런 모습이 애트우드의 소설에 잘 드러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다른 소설들도 있지만, 모두 노년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을 통해 소설은 과거의 신산한 삶을 넘어 조금은 여유로워진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들의 삶도 이렇게 노년에 조금 여유럽고, 이해심이 많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세대갈등이 일어나게 그냥 내버려두어서도 안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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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5-02-07 16: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독들이고 있는 책이였어요. ^^

kinye91 2025-02-07 16:50   좋아요 0 | URL
애트우드 글에 실망한 적이 별로 없어서 좋아요.
 
언어는 자유의 마지막 보루다 - 프랑크푸르트대학교 문예창작이론 강의
하인리히 뵐 지음, 안인길 옮김 / 미래의창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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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래된 책이다. 문학이론이야 원래 어렵지만, 이 책 역시 이해하기 힘들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샀던가? 왜 구입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작년에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만,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들에 대한 경외심을 지니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른다. 하인리히 뵐 역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니까.


짧은 글들이 실려 있다. 문학에 관한 그의 생각. 전후 독일문학에 대한 생각 등등. 밑줄을 칠만한 구절은 꽤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콕 박히지는 않는다.


이미 시간이 꽤 흐른 문학이론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일 문학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일까. 그러니 굳이 찾아 읽을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들지만... 몇몇 마음에 드는 구절.


'좋은 눈은 작가의 연장 중의 하나이다.' (15쪽)


그래 작가는 남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겠지. 그것도 편향되지 않은, 사람을 위하는 쪽을 볼 수 있는 눈. 권력을 향한 눈이 아니라 약자들을 위한 눈. 자신이 창조하는 세상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겠지. 그래서 이 말을 뵐은 이렇게 부연하고 있다.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사물이 똑똑히 보인다. 그가 사물을 똑똑히 보게 마련이다. 사물은 언어를 매개로 똑똑히 보고 들여다볼 수 있다. 작가의 눈은 인간적이고 절조가 있다.' (19쪽)


'다른 선택이 없다는 건 위대한 말이다. ... 나쁜 걸 만들었다고 예술가이기를 포기하는 게 아니다. 모험을 무서워하는 순간에 예술가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25쪽)


어떤 작가들은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도저히 쓰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하기 때문에 썼다고. 그렇다. 뵐의 이 말은 쓰는 수밖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고, 자신은 예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백이다. 이럴 때 모험은 필수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모험. 그것이 예술이다. 


그는 작가의 역할을 이렇게 말한다. 지금 작가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다.


'작가가 권력자에게 굴복하고 심지어 비위를 맞추려고 하면 무시무시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절도 이상의 죄를 짓는 것이다. 살인 이상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33쪽)


그렇기에 작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는 자신이 써야할 것들을 쓸 수밖에 없다. 이때 권력은 고려 사항이 되지 않는다. 이것이 작가다. 이런 작가에게 누가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절망의 시기에 문학이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가 존재할 수 없다는 말. 아도르노가 비슷하게 말했다고 하는데... 그런데 뵐은 절망의 시대이기 때문에 문학이 존재해야 한다고 한다.


문학은 절망을 받아들이고, 절망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보여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절망이 문학에서 표명되면 그것도 질적 차이점이 있다. 절망은 세로의 y축만으로는 값어치가 없다. 가로의 x축인 책임을 합쳐야 비로소 가치를 얻게 된다. 소설가의 책임이란 크나큰 말이다.' (63쪽)


아마도 여기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작가를 고르라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아닌가 한다. 물론 다른 작가들도 많다. 최인훈, 황석영 등등. 그렇지만 노벨문학상을 받았음에도 논란이 된 한강의 작품들이 있으니... 바로 우리는 그 작품들을 통해서 절망의 y축과 x축이 만나는 점을, 아니 그들이 속한 사분면을 만나게 된다. 소설가의 책임을 다한 작가가 바로 한강 아닌가 한다.


이러한 작가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사회 속 개인, 역사 속 개인이기도 하다. 그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나를 한 개인으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시대와 그 시대의 사람, 한 세대가 경험하고 체험했던 일 그리고 보고 들었던 것과 연결되어 있다.' (80쪽)


이러니 작가의 책임은 클 수밖에 없다. 앞의 말을 좀더 구체적으로 '문학이 에로와 섹스 그리고 종교와 사회 문제를 떠맡아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정치가 실패하고 패배하는 곳에서는 바로 작가들의 책임 있는 말이 필요하다.'(87쪽)고 하고 있다. 


'작가는 현실을 쓰는 것이 아니다. 있는 현실로 다른 현실을 창조하는 것이다.'(108쪽)는 말, 마음에 와닿는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다른 현실을 만나게 된다. 그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통해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작가는 저항을 많이 할수록 더 잘 쓸 수 있다.'(152쪽) 이때 저항을 권력에 대한 저항만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관습, 틀, 고정관념 등 그러려니 하는 것들에 저항하는 것이다. 있는 것 뒤에 있는 것을 보는 눈을 갖는 것이다. 그것이 작가의 저항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작가는 저항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몇몇 구절들은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다. 그것이면 됐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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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5-02-07 16: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췌한 문장들이 힘이 넘치네요. 관심가는 책 추가하며~ 감사합니다. ^^

kinye91 2025-02-07 16:49   좋아요 0 | URL
마음에 드는 말들이 많아요. 우리 사회도 하인리히 뵐이 말하는 작가들이 있어 그의 말이 잘 다가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