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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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릴린 먼로일까 생각했다. 뜬금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마릴린 먼로, 섹시 심벌로 유명한 미국 배우 아니던가. 우리나라하고 인연이 있다면 6.25전쟁 때 방문했다는 정도.


소설 속에서 마릴린 먼로는 사진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많은 것을 함의한다. 마릴린 먼로를 남성들이 좋아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자신들의 환상에 맞았을 때만이다. 마릴린 먼로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때는 온갖 비난을 쏟아부었다.


그것은 마릴린 먼로는 남성들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행동해야 하는 사람. 그런 존재가 마릴린 먼로였다. 즉,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사람으로만 존재해야 했다. 결코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어서는 안 되었다.


소설은 이 점을 마릴린 먼로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라는 말은 다른 존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존재로만 있겠다는 말일까? 아니다. 마릴린 먼로를 통해 여성들이 겪는 억압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단지 여성들만이 아니라 다르다는 이유로, 약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들을 드러내고자 이런 제목을 붙였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사라진 사람(셜록)으로부터 메시지가 온다. 그 메시지를 풀어나가는 과정이 소설의 서사다. 서술자는 둘. 한 명은 성형외과 의사인 구연정, 또 다른 한 명은 윤설영. 


셜록의 친구인 설영은 셜록이 사라지기 전 8개월 간의 기억이 없다. 분명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을 터. 소설은 이 기억 상실의 공간을 메우는 일로 내용이 전개된다. 그 상실의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가 성형외과 의사인 구연정이다.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은 곧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깨달아가는 여정이다. 소설 속에서 선택과 배제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선택과 배제를 누가 하는가?


누가 선택하고 누가 배제하는가? '하다'란 말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 말에 해당하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이다. 위계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사람으로 국한시키면)


그런 사람들은 누구인가? 권력을 쥔 사람, 경제적 부를 축적한 사람, 명예를 획득한 사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이것도 아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도 다시 위계가 나뉜다. 바로 성별에 의해서.


위계의 피라미드 가장 윗층에는 권력을 쥔 이성애자 남성이 속한다. (나머지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같다고 가정하자) 중간층에는 권력을 쥐지 못하고 권력을 추구하는 이성애자 남성이 속한다. 하층은 또 나뉘는데, 이성애자 여성이 하층의 맨 위를 차지한다. 그 밑에 동성애자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이 자리잡는다.


(성별로 나누지 않았을 때의 위계는 여기서 생각하지 말자. 전쟁이 났을 때 또는 위급상황일 때 어떤 존재들이 가장 피해를 입는지 살펴보면 이 위계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위계의 피라미드는 시시때때로 작동한다. '위계에 의한~'이라는 말이 붙은 억압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럼 마릴린 먼로는 어디에 속할까? 하층에 속한다.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라고 불리는 배우도 그들의 위계 속에 있을 때만 선망의 대상일 뿐이다. 위계를 벗어나고자 하면 곧장 배제와 탄압이 들어온다.


'선택하다, 배제하다'라는 말의 상대 편에 '선택당하다, 배제당하다'라는 말이 있다. 주체적으로 생동하지 못하고 다른 존재에 의해 행동을 하게끔 당하는 상태. 피동이나 수동이라고 부르는 상태다.


위계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선택하지 못하고, 배제하지 못하고 선택당하고, 배제당한다. 소설은 바로 그 점을 보여준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다르다는 이유로 선택당하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렇다고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선택당하고 배제당하지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능동적인 존재임을 보여준다. 


배제당한 존재인 도영의 말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 말이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라는 말의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 강아지가 한 마리일 때는 힘이 약하잖아요. 근데 호랑이가 욕심껏 먹어서 강아지들이 오히려 더 많아지게 되었어요. 그래서 강아지들이 힘을 합칠 수가 있었대요. 강아지들이 힘을 합쳐서 호랑이를 물리쳤대요!"(371쪽)


이때 호랑이에게 먹히는 강아지들이 바로 마릴린 먼로다. 그러니 마릴린 먼로임을 인식했을 때 힘을 합칠 수가 있다. '나'가 아니라 '우리'가 되고, '마릴린 먼로들'이 된다. 그럴 때 선택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다고 똑같이 선택하고 배제하는 존재로 살아가지 않는다. 마릴린 먼로들은 선택과 배제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으로 감싸안는 존재가 된다.


설영이, 연정이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다름을 인정한다.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사랑이 된다. 또한 이 사랑은 배제된 사람들에게 배제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역할도 하게 된다.


연정과 설영이 서로 소통하는 트위터 비공개계정 이름이 왓슨들이다. 왓슨은 셜록 홈즈가 사건을 해결할 때 같이 있으면서 그가 어떻게 사건을 해결했는지를 기록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기록이 중요하다. 기록은 남는다. 기억은 지워질 수 있어도 기록은 남는다. 기록은 결국 사건을 해결하게 한다.


그들이 계정 이름을 왓슨들이라고 지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건의 전모를 기록해두겠다는 결심. 단지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기록을 통해서 변해간다. 자신들의 삶을 찾아간다. 


소설은 이렇게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과 그 과정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추리 소설의 기법을 택해 우리 사회에 여전히 만연하는 '위계에 의한 폭력'이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연정이 성형외과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사라는 이유로 특별한 까닭없이 당하는 일들과 설영이 박사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대우, 그리고 일본인 남성 신바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받는 배제는 소설 속 사건이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음을 생각하게 한다.


하긴 우리가 힘이 있다고 여기는 직업에서도 성별이 얼마나 위계로 작용하는지는 몇 년 내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일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많은 선택과 배제가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마릴린 먼로들이 있었는지를...


법을 통해 정의를 구현한다는 사법부에서 벌어진 온갖 성추행들, 사람을 살린다는 의사를 양성한다는 의대에서 벌어진 성추행들, 이렇게 사회적 위계에서 위에 있는 집단들에서도 다시 위계를 나누어 폭력이 행사되고 있는데, 사회적 위계에서 아래에 있는 집단들에서랴.


그러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을 없던 것으로 묻어버리는 일이 없게 기록하는 왓슨들이 필요하다. 이런 왓슨들로 많아져 배제당했던 사람들이 배제당하지 않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소설, 한번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게 된다. 박진감 있게 전개되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느끼는 현실감, 그리고 분노. 단지 분노에 머물지 않고 한발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선택과 배제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 작동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소설이다. 그러므로 왓슨은 바로 '사랑'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소설 뒷부분에 있는 설영이 하는 말, "폭력에 폭력으로 대항하는 건 하수나 하는 일이죠."(376쪽)

이것이 이 땅의 왓슨들이 하는 말이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읽게 한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을 쓴 작가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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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기담 수집가 헌책방 기담 수집가
윤성근 지음 / 프시케의숲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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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주 즐겁게, 또는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때로는 낄낄거리며, 때로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때로는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면서 읽게 되는 책.


책 자체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 이야기의 힘으로 책은 디지털 시대에도 살아남았다.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책이 지닌 이야기를 디지털로 만나는 것보다 직접 손으로 만지며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까.


이 책은 헌책방을 운영하는 저자가 책과 관련해서 만나게 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 형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에는 세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는 헌책방을 운영하는 주인장 이야기다. 자신이 그 책과 관련해서 어떤 경험을 하는지를 이야기해 준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 문학작품이 계속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책에 관한 이야기부터 책에 관련된 사람들 이야기, 이 책에서는 책찾기에 도움을 주는 사람 두 명이 나온다. 한 명은 시계 수리를 하는 N씨, 시계 수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지만 헌책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는, 헌책방 주인장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다. 이 사람과 함께하는 장면도 무척 흥미롭다. 여기에 책 보부상이라고 할 수 있는 H씨. 이 사람에 관련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세상 괴짜들 정말 많다.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도 많고, 그들이 교수랍시고, 박사랍시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보다도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 집중해서 실력을 쌓고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 훨씬 더 멋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경제적 부유함을 추구하지도 않고, 그냥 즐기는 모습들이다.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


이 책에서 '독창적'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N씨와 H씨의 삶은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책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사람들의 사연이 이 책의 핵심이다. 왜 그들은 그때 그 책을 구하려고 할까? 새로운 판본이 나온 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꼭 자신이 그때 읽었던 또는 지니고 있었던 책이어야 할까? 이것이 이 책에 나온 이야기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깊은 울림을 준다. 그 책에 얽힌 사연이 삶의 일부분이라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분이 바로 자신의 삶이기 때문에 꼭 함께해야 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공짜로 들을 수는 없다. 때문에 주인장은 자신이 책을 구하기 위해 발품을 팔아야 하는 수수료 대신 이야기로 대체한다. 어쩌면 이야기가 더 값질 수 있는데, 책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다시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게 되고, 주인장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좋은 거래 (? 이 말은 쓰고 싶지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짜는 없다는 말에 대응하는 취지에서 그냥 쓴다)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나같은 독자들은? 책값을 내고 사서 읽고 있으니, 역시 그 대가를 치르고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보면 된다. 단지 듣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셋째는 바로 책이 주는 이야기다. 책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이 문학작품이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철학책이나 기타 다른 책이라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개된 책들의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으니, 자연스레 그 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관심을 가지면 언젠간 읽게 되지 않을까? 아니, 읽을 운명인 책이라면 읽게 되겠지, 이렇게 [헌책방 기담 수집가]라는 책을 통해 만난 책들의 이야기도 만나게 되겠지. 그러니 이 책을 읽은 것도 역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간혹 소개된 책 중에 읽은 책도 있지만 안 읽은 책이 더 많다. 또한 읽은 책이라도 책을 구하려는 사람이 경험한 것과는 다르고, 살아온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그가 구하는 책과 다른 판본인 경우도 있다. 책 속의 이야기는 같을지 몰라도 판본에 따라 느낌은 다를 것이기 때문에 각자 다른 읽기를 했다고 봐야 한다.


책이 지니고 있는 이야기는 똑같지 않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다. 이처럼 세 가지 이야기가 중첩되어 있는 책. 하나하나의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 이야기들이 합쳐져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한다. 이야기 속에 이야기 속에 이야기. 


읽는 내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드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다음 편도 나왔다고 하는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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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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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 깨달았다. 아, 이 소설들을 한 편으로 볼 수도 있겠구나. 캐나다 판 '여자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하고.


각 소설들이 독립적이지만 읽다보면 연결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래, 주인공이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어린 여자아이부터 죽음을 앞둔 여자까지, 여자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이 잘 표현되고 있다.


제목이 된 소설 '도덕적 혼란'부터 보면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여인의 모습이 나온다. 그녀는 도덕적이다.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남의 어려움을 쉽게 넘기지도 못한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이혼하지 않은 남자와 함께 산다. 여기에 그 남자의 공식적인 아내에게서 이런저런 간섭을 받는다. 마치 우리나라 옛날 '첩'처럼. 


소설을 읽다보면 이렇게 살아갈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착하다는 말을 넘어서서 이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삶이 아닌가 하기도 한다. 세상에 같이 사는 사람의 아들들이 온다고 주말 내내 나가 있어야 하기도 하고, 그 아이들에게 이것해라, 저것해라 하는 부인의 간섭을 받는 삶이라니...


하지만 여자는 자기 할 도리를 다한다고 한다. 남자는 그러한 일에 일절 간섭을 하지 않는다. 간섭이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여자에게 미룬다고 보면 된다. 자신이 나서서 정리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들이 지니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여자 (작중 이름은 '넬'이다. 그리고 이 작품집에서는 '넬'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는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삶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물론 부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양 하고 있겠지만) 여기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하면서 살아간다.


결코 능동적이지 않은데, 그렇다고 완전히 수동적이라고 볼 수도 없이,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넬.


그러니 도덕적 혼란이다.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 모른다가 아니라, 여자들에게 강요되는 도덕적인 굴레들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통이란 말이 폐지된 사회에서도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예전 도덕이 강요된다. 남자에게는 그럴 수 있지라고 넘어가는 일들도 여자에게는 비난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을 '넬'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되는데, 다른 작품들에서도 남자들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기껏해야 '래브라도의 대실패'에서 아버지가 등장할 뿐. 


이 소설집의 대부분은 여성 화자가 중심이다. 그리고 여성들의 삶이 중심을 이룬다. 직장을 가졌어도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상태. 여기에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 여성이 처리해야 하는 상황. 


이혼 문제마저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는 남자와 함께 살면서 그 사람의 감정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생활. 그런 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모습.


어린 시절에는 동생을 보살펴야 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돌보고, 아이를 낳으면 다시 아이를 양육해야 하고, 이제 나이 든 부모가 있으면 그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여자의 삶.


소설집 첫 작품이 '나쁜 소식'인데, 그럼에도 삶을 살아가는 여인들이 주인공이다. 첫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다.'(26쪽)


여기에 마지막 작품인 '실험실의 소년들'에는 엄마가 남겨둔 종이에 "완벽하게 아름다운 날!!!'(382쪽)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그들의 삶에 고난이 많았을지라도 그들 역시 아름다운 날들을 지나왔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날들을 기억한다. 하지만 삶에서 몇 안 되는 아름다운 날이 아니라, 아름다운 날들이 더 많은 그런 삶들을 여성들이 누려야 한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 까닭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여기에 이제 여성들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인 존재임을 말하면서 이 소설집은 끝난다. '나쁜 소식'으로 시작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여성이다. 그 점을 마지막에 실린 '실험실의 소년들'에서 '소년들의 운명은 이제 내게 달려 있다'(384쪽)고 여성 서술자가 말하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주체.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그리고 이제 여성은 남성에 매인 존재가 아니라 남성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주체로서 등장하게 된다. 


결국 캐나다 판 '여자의 일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집에서는 여성이 삶의 주체로 우뚝 섬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한편 따로 떼어서 읽어도 무방하지만 전체를 다 함께 읽는 것이 훨씬 작품을 이해하는데 좋겠단 생각이 드는 작품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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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영화로 만나는 아프가니스탄 푸른사상 교양총서 19
박일환 지음 / 푸른사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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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얼마 전에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온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있다. 탈레반이라는 이름도 많이 들어본 조직이 다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자, 그곳에서 살 수 없는, 우리나라를 돕던 사람들을 망명이라는 이름 대신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로 오게한 것.


그들은 우리나라에 자리잡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아프가니스탄은 우리에게는 낯선 나라다. 그냥 전쟁이 수시로 벌어지고 있는 나라, 탈레반이 불교 유적을 파괴한 나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을 알고 있을까? 잘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갖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별기여자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와 있는 사람들이 있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우리와 관계가 없지 않다. 그러니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보다는, 문학과 영화를 중심으로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권력자들이 아니라 땅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문학과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알려진 작품들이 많지 않아서 이 책에 소개된 문학작품이나 영화가 생소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문학과 영화를 내용 중심으로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으며, 그 작품들에 나타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생활 모습, 그들이 꿈꾸는 세상을 알려주고 있다.


소련과의 전쟁, 탈레반 집권,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다시 탈레반 집권. 현대에 이르러 아프가니스탄은 전쟁에서 벗어난 시기가 많지 않다.


자신들의 나라를 건국했지만 종족별로 갈등이 있으며, 이러한 갈등이 봉합이 안 된 상태에서 소련과 미국의 진주가 있었고, 이 틈을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탈레반이 파고들기도 했다. 지금은 다시 탈레반이 집권하고 있고, 탈레반은 여성들의 활동을 금지(공식적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하고 있기 때문에 여성들은 더욱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


아프가니스탄 소설과 시를 통해 그 나라의 상황을 잘 전달하고 있고, 영화를 통해서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다른 나라의 시선으로 본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다룬 영화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의 시각이 지닌 문제점도 알려주고 있다.


특히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을 다룬 작품들을 언급하면서 여성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그럼에도 그들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들,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에 또는 다른 나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음을. 그래서 여전히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은 계속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아프가니스탄 소설이나 영화들이 대부분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 만들어지지 않고 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 그만큼 그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럼에도 이들이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는 이유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세계 시민들에게 알리고 아프가니스탄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함이라는 것... 


그렇다면 이제 우리나라에 온 특별기여자들 가운데서도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또는 주제로 한 작품활동을(시든 소설이든 영화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등등) 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들의 예술도 우리 사회에서 자유롭게 발표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생소한 아프가니스탄의 문학과 예술을 이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유튜브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영화 소개한다. [학교 가는 길]이다. 이 영화를 보면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이란 감독이 만들었지만 배경은 아프가니스탄이고,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아이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는 영화다.


참고로 이 영화는 하나 마흐발바프라는 영화 감독이 만들었는데, 그때 나이가 19세였다고 한다. (이 책 153쪽 - 159쪽 참조)





영화 볼 수 있는 주소


https://www.youtube.com/watch?v=vblXsh0h5w0


https://www.youtube.com/watch?v=jNVJuqVrk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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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 항해하는 글쓰기 - 망망대해를 헤매는 고독한 작가를 위한, 르 귄의 글쓰기 워크숍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보은 옮김 / 비아북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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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 있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글쓰기에 관한 책도 많은데 굳이 외국 작가가 쓴 글쓰기에 관한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나라 작가들이 쓴 글쓰기가 한국어를 잘 활용한 글쓰기고 우리나라 사람들 정서에도 어울리기 때문에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따라할 수 있어서 좋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그 점을 찾아내지 않으면 이 책은 우리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다른 글쓰기 책처럼 글쓰기에 관한 이론을 설명하고, 예시문을 실어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로 글을 써보라고 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대부분의 글쓰기 책에서도 보인다. 비슷한 글쓰기 책들이 넘쳐나는 시대 왜 르 귄의 글쓰기 책을 읽어야 할까?


우선 르 귄은 꼭 이렇게 쓰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반드시(이 반드시라는 말은 시험에나 통용되는 그런 말이 아닐까 싶다. 다양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정답만을 찾아야 하는 우리나라 시험 제도에서는 '반드시'가 잘 먹혀든다. 글쓰기 책들도 그래서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라'를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자신에게 맞는 글쓰기가 있다는 점이 르 귄의 책을 관통한다. 그래서 르 귄은 이렇게 쓰면 좋다고 하지만 그것이 꼭 정답은 아니라고 한다. 다양한 예문을 보여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여럿이다. 그 여럿 중에 고를 수도 있고, 자신이 정답을 만들 수도 있다.


책 제목이 왜 항해하는 글쓰기겠는가! 항해는 바다에서 가는 일이다. 망망대해(茫茫大海). 엄청난 바다에서 길을 찾아 항해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좌초하고 만다.


바다에서 좌초하지 않고 항해를 잘하려면 길을 잘 찾아야 한다. 해도를 보고 항로를 따라가야 한다. 바로 이 해도가 '글쓰기 책'이다. 항로를 따라가는 일, 이것이 글쓰기다. 작품이다.


그런데 해도가 단 하나뿐인가? 아니다. 해도는 많다. 또 같은 바다라도 길은 여럿이다. 항로가 여럿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이미 밝혀진 항로로만 갈 것인가? 그것은 안전한 길이다. 무난한 길이다. 그렇지만 자기만의 길은 아니다.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도 없다.


마젤란, 바스코 다 가마, 콜럼버스 등이 왜 지금도 이름을 남겼는가? 망망한 바다에 자신의 항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이 왜 승리를 했겠는가? 바닷길을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바로 글쓰기다. 르 귄이 말하는 글쓰기도 이렇다. 기존의 해도와 항로를 참조해야 한다. 그렇다고 꼭 그것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지도에 없는 길도 가야 한다. 그런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르 귄의 글쓰기는 글쓰기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이 점이 좋다. 글에서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말로 글쓰기 책을 시작하고 있다.


'자기 글에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의식할 줄 아는 기술은 작가에게 필수적이다. ... 좋은 작가는 좋은 독자와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귀가 있다. 우리는 대개 글을 눈으로만 읽지만 많은 독자가 예민한 내면의 귀로 글의 소리를 듣는다. ... 서사 작가는 내면의 귀로 자신의 글을 듣는 훈련을 해야 한다. 쓰면서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21쪽)


음성과 문자는 다르다고 하지만 문자에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은 좋은 독자가 갖추고 있는 자세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작가 역시 자신의 글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이 부분을 읽으면서 카프카가 생각났다.


시인이 아닌 카프카 역시 자신의 작품을 친구들 앞에서 낭독하지 않았는가. 이 낭독을 듣고 감탄한 친구들. 만약 낭독이 실패로 끝났다면 그 작품에는 문제가 있다고 여기고 고치려고 하지 않았을까. 물론 카프카는 낭독하기 전에 고치고 또 고치고 했겠지만.


이렇게 소리와 문자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이것은 곧 글을 쓸 때 문법이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문법! 이건 시험 볼 때나 필요한 것 아니었나 하지만, 아니다. 우리가 말하기를 잘한다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는 상황에 맞춰 어법에 맞는 말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기에도 어법이 중요한데, 글쓰기에서랴. 르 귄은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간과하기 쉬운 점을 잘 지적해주고 있다.


소리와 어법으로 글쓰기 책을 시작해서 마지막은 대부분의 책이 그렇듯이 퇴고로 끝난다. 그런데 이 퇴고를 '메우기와 건너뛰기'라고 한다. 벌어진 틈은 메우고,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띄어야 한다고. 이 과정에서 르 귄은 말의 무게를 이야기한다. 


'글을 줄이려면 단어들의 무게를 잴 수밖에 없고 그러면 그중에 어떤 것이 스티로폼이고 어떤 것이 묵직한 금인지 찾아낼 수 있다. 글을 가혹하게 줄이다 보면 문체가 강화되고 메우기와 건너뛰기를 둘 다 소화할 수 있게 된다.' (200쪽)


말에도 무게가 있고, 당연히 단어에도 무게가 있다. 그 상황에 맞는 말은 무게가 있는 말이고, 그런 말은 '금'이 된다. 하지만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은 일회용인 '스티로폼'이 된다. 단어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르 귄의 글쓰기 항해술은 글쓰기라는 바다를 어떻게 헤쳐나갈까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


르 귄은 이 책을 취미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아닌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썼다고 했다.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과 함께 글쓰기 워크숍(합평회)을 진행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혼자 연습할 수도 있게 구성되어 있다. 물론 르 귄이 책 뒤에서 알려주고 있듯이 여러 사람이 모여 합평회를 하면 더 좋겠다.


글쓰기 방법뿐이 아니라 다양한 작품의 예문들을 만날 수도 있어서 좋은 글쓰기에 관한 책. 그렇다고 이 책을 무슨 법전 섬기듯이 모시면 안 된다. 그건 르 귄이 바라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해도로 삼아 자신만의 항로를 개척하길 바라면서 쓴 책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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