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24년 겨울호 - 통권 188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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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侍民)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우리가 시민하면 떠올리는 그 시민(市民)이 아니라, 백성을 섬긴다는, 백성을 사람으로 바꿀 수 있으니 사람을 섬긴다는 그 말. 동학에서 쓰는 시민(侍民). 


동학에서 쓰는 시천주(侍天主)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이 아니다) 천주를 모신다는 말. 그런데 천주가 꼭 하느님이어야 하는가? 아니다. 하느님은 바로 곁에 있는 우리들이다. 사람들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다. 땅도 하늘도, 물도, 풀도, 동물도 모두 하느님이 된다.


그러니 시천주라는 말은 결국 시민이라는 말과 통하고 시민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섬긴다는 말과 통한다고 보면 된다.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는 말, 결국 사람이나 동물들 또는 다른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하늘이 하늘을 먹는 삶이 곧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또다른 하늘을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일, 언제가는 나도 그들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면 어떤 생명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모두가 하늘이므로.


이런 정신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먹을거리가 남아돌아 어디서는 버리고, 어디서는 없어서 굶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중한 생명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강제로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남 역시 나일 테니까. 다른 존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경시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생명을 중시하는 삶, 그런 삶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가는 일, 그것이 바로 시천주고, 시민(侍民)이다. 이런 시민(侍民)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면 자신의 권력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도한 짓을 하는 존재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 그는 시민(侍民)과는 반대에 있는 존재이므로, 하늘을 해치는 자이므로, 그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민(侍民)을 하는 자세다. 의무다. 책임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무도한 자와 그를 비호하는 자들. 시민(侍民)이 뭔지 생각도 하지 않는 자들. 평화를 깨뜨리는 자들. 도무지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 저들만 옳다고 생각하는 자들.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무도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길은 시민(侍民)의 마음을 우리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다. 시민(侍民)의 마음이 깃들었다면 이제 행동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민(市民)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시민(市民)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존재가 바로 시민(侍民)이므로.


예전 동학 혁명에서 그러했듯이. 그런 행동이 폭력으로 나타나는가? 아니다. 시민(侍民)은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에 평화로운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평화가 권위를 지녀 무도한 자들이 어쩔 수 없게, 어찌할 수 없어 따를 수밖에, 그렇게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회심의 순간이 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시위 현장이 돌이 날아다니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색색의 응원봉들이 펼쳐지고 있는 평화로운 현장. 이런 평화로운 시위야말로 시민(侍民)의 정신이다. 우리는 이미 시민(侍民)의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니 평화로 무도함을 대체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람만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 정착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런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侍民)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공론장을 형성하고, 그것이 안착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시민(侍民)의 정신은 지금 지구가 처해 있는 기후 위기도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위기도 이겨내게 할 것이다.


[녹색평론] 188호를 읽으면서 이 시민(侍民)이라는 말이,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시민(市民)과 겹쳐졌다. 그렇다. 시민(市民)은 결국 시민(侍民)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侍民)들이 우리 사회를

평화롭게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물'에 관한 글이나 '농업'에 관한 글, 그리고 영화 또는 영화 감독에 대한 이야기도 시민(侍民)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자연을 거스리는 물 관리법은 시민(侍民)이 아니다. 성장을 위한, 자본을 위한 농업 역시 시민(侍民)이 아니다. 단지 시간을 보내거나 또는 폭력이 난무하는 그런 영화 역시 시민(侍民)이 아니다. 


우리 삶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 문학, 예술이 시민(侍民)이고 자연의 흐름을 살리는 물 관리가 시민(侍民)이며, 성장이 아닌 모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농업이 바로 시민(侍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


이름만 지방자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지역에 맞는 정책이 실행되어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또 지역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들을 고려하는 정책이 실시되어야 진정한 지방자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자치는 바로 시민(侍民)의 실현이 될 것이다.


[녹색평론] 188호에는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이 많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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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이언 매큐언 지음, 박경희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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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왜 '암스테르담'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전개다. 도대체 암스테르담은 언제 나오는 거야? 그러다 끝부분에 가면 아, 이래서 제목이 암스테르담이구나 하게 된다.


등장인물들이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 장소가 암스테르담이다. 그것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남에 의해서.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파국을 향해 달리면서도 그것이 자신들이 파멸로 가는 길임을 알지 못한다.


그냥 자신들의 일에 취해 있을 뿐이다. 즉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데, 자신들의 그러한 허상이 다른 사람들 눈에는 제대로 보인다. 오로지 자신들이 보지 못할 뿐이다.


한 여인의 죽음으로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드러난다. 죽은 여인의 숨겨진 애인들 셋과 그 여인의 법적 남편.


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잘 알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할까. 자신의 허상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 역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죽은 여인인 몰리의 애인이기도 한 정치인을(가머니) 파멸시키려는 편집국장 바먼과 위대한 음악가라고 착각하고 사는(사실은 어느 정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과연 그의 음악적 재능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발휘될까 하는 점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그가 현실 세계와 부딪히는 장면에서 재능이 허상이고 환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클라이브, 그리고 외무장관까지 올라간 정치인 가머니가 그들이다.


가머니의 성적 취향이 드러나면서 이들의 관계를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왜 가머니의 성적 취향이 문제가 될까? 그의 성적 취향과 정치적 활동은 별개의 것이 되어야 하는데도 버넌은 그러한 관점을 취하지 못한다. 그는 성적 취향이 다른 사람이 정치인으로서 훌륭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신문을 통해 폭로하려 한다. 


물론 신문 발행부수를 올리려는 목적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몰리의 애인이라는 점에서 질투심도 작동하고... 그렇다면 그가 정치인은 공인이라고 생각하고,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사생활에서도 책임이 있다고 여긴다면, 자신이 그러한 가십거리를 기사로 내보내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것이 그가 파멸하게 되는 이유다.


클라이브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악상을 위해 다른 사람이 희생되는 것을 무시하려고 한다.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문제와 동떨어져 있다는 발상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지, 그의 그러한 점을 경찰서에서 범인을 지목하는 모습을 통해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버넌과 클라이브는 친구라고 생각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게 되면서 죽음을 이끌어내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머니 역시 사퇴하게 되고...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이것이 몰리의 남편인 조지의 음모가 작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부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의 허상이 현실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제공한 사진이 세 사람을 모두 파멸로 이끌게 되니, 결국 승자는 조지다. 이렇게 소설은 처음에 친구들의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그 관계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또 겉으로는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상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모습이 드러난다.


겉으로만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위기 상황이 되자 적나라하게 드러나게된다. 이것이 바로 소설이 보여주는 점이다. 위선으로 만들어진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음을...


결말까지 가야 작중 인물들의 모습과 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전개될지 예상하기 힘든데, 후반부로 갈수록 소설의 윤곽이 잡히면서 더욱 흥미로워진다. 


그러면서 과연 내가 추구하는 삶, 내가 맺고 있는 관계는 어떤지 생각해 보게 된다. 허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형식적인 관계로 남들과 지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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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 기후-생태 위기에 대한 비판과 전망
이송희일 지음 / 삼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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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은 더더욱 기후 위기를 몸으로 겪는다.


영화감독인 이송희일은 기후 위기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공부하고, 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많은 자리에서 기후 위기에 대한 강연을 해왔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결과를 정리했다. 특히 기후 위기를 피상적으로 대하지 않고, 기존의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들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조목조목 따지면서 비판하고 있다.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을 세 단어로 정리하면 '저항, 대안,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현재 기후 위기를 불러낸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단지 개인의 방만한 삶이라고, 개인에게 책임을 지워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기후 위기를 불러온 것은 성장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체제라고 한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또 무엇을 바탕으로 하고 있나? 바로 식민주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종종 우리는 기후위기를 자연적 재앙으로 이해하지만 명백히 정치적 재앙이다. 그것은 가부장제 재앙이고, 자본주의 재앙이며, 인종주의 재앙이다.'(23쪽)


'지구 경관을 파괴적으로 변경하고 자연과 인간을 노예화했던 식민주의가 바로 기후변화의 뿌리다.'(34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지금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는 우리들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삶이 불안정해지고 있는데, 특히 사회적 약자들은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 중에 특히 여성, 또 성소수자 등은 더한 상황으로 내몰린다.


'전세계 빈곤층의 80%도 여성이고 기후 이주민의 80%도 여성이라는 유엔의 통계는 이 같은 잔인한 현실을 적확히 폭로한다. 여기에 더해, 기후재난이 증가하면 젠더 기반 폭력이 급증한다.'(20쪽)


이런 현실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저항은 대안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냥 반발이 아니라, 이런 세상도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 개인이 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함께 하는 것. 땅으로 말하면 공유지가 될 것이고, 삶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연대와 공유가 될 것이다. 그러한 조직을 만들어 함께 하면 기후 위기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지닌 문제가 무엇이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차분하게 이 책을 통해서 풀어가고 있다.


꼼꼼하게 읽으면서 저자의 주장을 곱씹으면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찾고,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일지 찾고 실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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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씽 -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의 가치
앤디 앤드루스 지음, 김정희 옮김 / 드림셀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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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고 싶으면 높고 멀리 보라고 한다. 당연하다. 자신의 앞만 보고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말에서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높고 멀리 보되, 발걸음은 현실에 디디고 있어야 한다는 것.


즉 이상은 높게 잡지만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현실 속에서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멍이 숭숭 뚫리게 된다.


큰 것만을 추구하다가는 틈새가 벌어져 어느 순간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큰 것을 추구한다면 작은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작은 것들이 큰 것을 이룬다. 


이 책은 그 점을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상은 크게 가져야 한다. 저자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작은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성실하게 실천하라는 말에는 결국 큰 것을 이루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들어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간단하다. 바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만 해서는 안 된다. 자신만의 관점을 지니되, 맹목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들을 제시하고 있어서 설득력을 지닌다. 게다가 어렵지 않게, 누구나 실천할 수 있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좋은 말들로 가득한 자기계발서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힘들다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으라고 하지 않는다. 어려움을 견뎌야 할 때는 견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견딤 자체가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자신이 미식 축구 선수 생활을 할 때 온갖 두통에 시달려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을 때, 사실 그 자체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고통만 가중시키는 선수 생활이었지만, 저자의 아버지는 계속 하라고 한다. 그래서 저자는 미식 축구를 그만둘 수 없었다고 한다. 


이때 저자의 아빠가 했다는 말 


'그만두는 것이 당장은 별 것 아닌 사소한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게 널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고, 또 그걸 정상을 향한 마음이나 태도를 갖게 만들 수도 있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만두는 것이 정상이기도 하지. 계속 도전하고 밀어붙이는 것보다 그만두는 것이 항상 더 쉬운 법이란다.'(107쪽)


자, 그만두는 것은 사소한 일일까? 아니다. 그것은 포기다. 도전하지 않는 삶은 더 이상의 발전이 없다. 그러니 자꾸 실패하고 견디는 과정을 거치게 해야 한다. 이런 일을 언제 경험해야 할까? 바로 학창시절이다.


젊은시절에 도전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명심해야 한다. 있는 존재를 보지 않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 자신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한다는 것. 그렇게 꾸준히 뚜벅뚜벅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다른 이들과 다른 성취를 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누구나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면 성취의 결과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지 않다.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지 목표는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성공했다고 할 수 있으니...


사소한 것들이라고 무시하지 말자. 그 사소함이 바로 위대함을 이룬다는 것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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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운명 - 세기의 걸작들은 어떻게 그곳에 머물게 되었나
이명 지음 / 미술문화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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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유명한 그림들이 있는 미술관이 있다. 왜 그 그림이 그 자리에 있을까? 이런 질문은 해보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같은 화가가 그린 그림이 자신이 원하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도 있고, 자신의 뜻하는 곳에 있기도 하고,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있기도 한다. 


그림은 화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경우도 있지만, 의도와 다르게 움직이는 경우도 있다. 이미 화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그 자신의 운명을 찾아간다.


이 책은 그러한 그림들이 왜 그 장소에 있게 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그냥 '그 미술관에 있어'가 아니라 어떤 경로를 거쳐 그 미술관이 소장하게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그림들도 참 다양한 운명을 겪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가령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라는 그림은 피카소 자신이 루브르 박물관에 걸리길 원했지만, 그림을 인수한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걸리게 되었다는 이야기.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잘 알고 있는 <모나 리자>가 왜 루브르에 있는지, 모네의 <수련>이란 작품이 일본에 있게 된 계기도 알려주고 있고, 마티스의 그림이 미국에 전시되어 있는 이유 등등이 잘 설명이 되어 있다.


여기에 어떤 작가들의 작품은 작가의 주장 또는 여러 이유로 인해 거의 한 곳에 모이게 되었으며 (로스코, 고흐, 달리의 작품들, 이들은 자신의 이름을 딴 공간을 지니게 되었다), 로댕의 작품이 전세계적으로 퍼지게 된 이유 등도 설명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을 읽으면서 작품도 자기들의 고유한 운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 책은 그러한 작품에 얽힌 이야기와 더불어 작품 감상도 할 수 있고, 작가의 생애도 짤막하게 설명이 되어 있어 작가에 대한 지식도 얻을 수 있는 여러 장점을 지닌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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