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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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재미가 있다. 깊은 뜻을 생각하기 전에 우선 재미있다. 클레어 키건의 작품을 두 편 읽었지만, 비록 번역으로 읽었다고는 하지만 소설을 이끌어가는 글에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결코 길지 않은 문장들. 그리고 어둠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어떤 빛이 비쳐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내용들.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단편이지만 더 짧다고 할 수 있는 소설들이다. 그런데도 내용은 무거운 소설이 많다. 특히 첫 작품인 '작별 선물'은 어떻게 보면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저런 인간을 어떻게 두고 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인물도 등장한다.


자식들을 자기 노예처럼 부리는 아빠. 성적 희롱까지 하는 아빠. 그럼에도 한 소리도 하지 못하는 엄마. 집을 떠나는 자식을 끝까지 희롱하려는 아빠. 참, 현대의 도덕으로는 용서해서는 안 될 사람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덤덤하게 그려낸다. 이 덤덤함이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딸은 집을 벗어나고 있으니,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전에 읽었던 두 소설에 비해서는 좀 어둡다. 두 소설은 어둠보다는 빛이 더 강했다고 한다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빛보다는 어둠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빛을 포기할 수 없게 하는 요소들이 있으니...


현실을 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현실은 결코 빛으로만 차 있지 않으니. 가부장적인 사회의 모습.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일들은 결코 만만치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작가는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기보다는 남성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시의 현실을 보여준다. 


'푸른 들판을 걷다,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물가 가까이, 굴복'은 남성이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주로 어긋남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자꾸 어긋나는 관계를 소설은 보여준다. 사실, 어긋날 수밖에 없다.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남을 중심에 놓고, 남과 나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에 놓고 남을 자신에게 끌어오려고만 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어찌 어긋나지 않을 수가 있으랴. 이런 관계를 어둠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은 어둠도 있지만 빛이 더 강하다. 당연히 어긋남이 있지만 이 어긋남은 어둠 쪽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빛 쪽으로 향하는 어긋남이다. 빛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둠과 어긋나야 한다. 그 어긋남을 인식하고, 자신의 길을 가는 인물들. '작별 선물, 퀴큰 나무 숲의 밤'이 그렇다.


특히 '퀴큰 나무 숲의 밤'은 여성이 자신의 삶을 옭아매던 남자(신부)의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일랜드 설화를 차용해서 소설을 이끌어가는데, 여성이 삶의 주체로 서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과정에 남성은 보조자로서 등장한다. 첫번째 남성과 두번째 남성 모두 여성과 어긋나지만, 첫번째는 여성에게 어둠으로, 두번째는 빛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이 소설은 [맡겨진 소녀]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처럼 빛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완전한 빛이 아닐지라도 최소한 빛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짧은 소설들을 엮은 이 소설집에 주로 나타나는 관계가 '어긋남'이지만, 이러한 어긋남 속에서도 '빛'이 보이게 하고 있으니, 우리 삶에도 수많은 어긋남과 어둠이 있을 테지만, 그러한 삶에도 빛이 있음을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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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연합 0장 위픽
한정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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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장'이란 말을 생각했다. 1장도 아니도 0장이라니. 그러면 시작을 하기 전이라는 말인가? 시작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 그렇게 0장이라는 말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제 시작을 위한 준비일 것이다. 길고 긴 여정을 알리는 소설. 무엇을 위한 여정일까? 0장이라는 말 앞에 있는 '사랑과 연합'이 그 여정을 알려준다.


사랑을 찾아가기 위한 연합, 어떤 사랑을 찾아갈까? 소설은 세 존재를 등장시킨다. 우선 유한한 수명을 지닌 인간. 요정이라고 할 수 있는 엘프와 교배해서 태어나게 된 하프엘프, 드래곤(용)과 교배해서 태어난 하프드래곤.


인물들을 보면 환상 소설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프엘프들의 수명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길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엘프들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하프드래곤들은 그야말로 용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다. ('드래곤 길들이기'라는 영화가 떠오를 수도 있다)


인간과는 다른 존재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현실을 벗어난 듯하지만, 작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인간의 이야기를 다른 존재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함으로써 다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작가 한정현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기 소수자와 역사라면,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른 존재를 등장시킨 이유도 소수자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고립된 지역인 게토에서 살아가는 하프엘프 루비로부터 시작한다. 루비(淚悲)라는 이름은 '눈물 흘리는 슬픔(73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인 비소(悲小) 역시 작은 슬픔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이 소설에 등장하는 하프엘프들은 슬픔을 지닌 존재들이다.


어떤 슬픔인가? 그것은 자신들의 삶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겠지만 자신들이 오랜 시간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존재들에 대한 슬픔이기도 하겠다. 그러한 슬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겠고.


다른 존재들의 사랑에서 나오는 슬픔. 그 슬픔을 넘어서는 것이 사랑일 텐데, 소설은 할머니 비소와 인간 '안'의 사랑을 암시하는 메모에서부터 시작한다. 루비가 자신을 찾아온 인간 '명'과 하프드래곤과 함께 메모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시작하는 마음을 품게 하는 역할을 이 메모가 한다.


인간의 언어를 쓸 줄 아는 루비라는 설정은 루비로 하여금 인간의 삶을 기록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과거의 사건을 추적하면서 겪게 되는 일, 만나게 되고 알게 되는 일들이 앞으로 펼쳐질 일들일 것이다.


그래서 '0장'인데, 이제 소설은 1장, 2장 이렇게 뻗어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역사 속에서 펼쳐졌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의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 하는 존재들은 자신들을 '사랑과 연합'이라고 지칭한다.


이제 이 '사랑과 연합' 팀은 역사 속으로, 현실 속으로 사랑을 찾아 떠날 것이다. 그 사랑의 모험이 어떻게 이루질지를 기대하게 한다. 아마도 1장 이후에서는 한정현 소설 속에 나타난 '역사'와 역사 속 '소수자'를 만나게 되겠지. 어떠한 역사, 어떠한 인물들이 등장할지를 기대하면서 다음 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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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무라타 사야카 지음, 김재원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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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이 실려 있다. 소설이라고 하기보단 작가의 에세이라고 하는 글도 있고. 그렇지만 작가와 작품을 꼭 일치시킬 필요는 없으니, 그런 작품도 그냥 소설로 읽자. (물론 옮긴이의 말에서는 두 편의 에세이-171쪽-를 포함시켰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에세이를 소설집에 싣는다면 맨 뒤로 뺐으면 좋았을 것을, 원래 판본이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로 받아들이고)


첫작품부터 충격을 준다. '신앙'이다. 신념보다 더 종교적인 쪽으로 나아간 마음 상태. 신앙에는 옳고 그름의 잣대를 대기가 힘들다. 아무리 객관적인 증거를 들이대어도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에겐 증거가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신앙과 신앙이 아닌 것을 어떻게 구분할까? 이를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로 생각을 바꾸면, 내가 알고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소설 속 인물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속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어(43쪽)'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미 속고 있는데, 자신만은 안 속고 있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사이비 종교로 돈을 벌겠다고 하는 것을 비웃지만, 무엇이 사이비인가? 사이비를 판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비싼 물건을 사면서 만족하면서 사는 것과 자신만의 믿음을 지니고 사는 것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아니 자신은 하나하나 원가를 따지면서 소비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진실된 삶일까? 그것이 현실에 발붙인 삶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삶은 그만큼 이렇다라고 하나로 정의하기 힘들다. 삶 속에는 다양한 진실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 모습을 두 번째 실린 '생존'이란 소설에서 알 수 있다. 다양함을 잃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지... 생존율을 계산해서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내 눈 앞에 생존율이 떡하니 보이는데, 어떻게 생존율을 높이려 하지 않을까? 그러나 모두가 생존율을 높이려고 하면 그 생존율은 변하지 않는다. 상대적인 비율이 그대로 존속하기 때문에... 어쩌면 상대평가로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나라 수험생들의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단지 대학에 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생존율에 목숨 걸고 살아야 하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를 거부할 수는 없을까?


거부할 수도 있겠지. 거부를 통해 자신만의 삶을 찾아갈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야생'이 될 수밖에 없다. '야생'이란 소설에서 '난 야생으로 돌아갈 거야.(86쪽)'라고 외치는 인물에게서 그런 점을 발견한다. 그냥 예측불가능한 삶으로 자신을 끌고 가는 것. 어쩌면 우리 삶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정해져 있지 않기에 자신의 삶을 자신이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정해져 있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예술이고, 예술은 사람을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전시회'라는 소설이 그렇다. 바로 예술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에 눈을 뜨면 마음을 지배당하고 말아요. ...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이 되고 맙니다(165쪽)'라고 전시회를 여는 사람을 죽이러 온 존재는 말한다. 즉, 다양한 사고를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예술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지배는 '균일' 속에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함이 존재하는 사회는 견딜 수 없는 사회가 된다. '컬쳐쇼크'라는 소설을 보면 그 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런 소설들을 통해 작가는 하나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균일'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양념 식으로 '다양성'을 외치지만 이 '다양성'은 '균일'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인정된다. 또 다양성을 '균일'을 유지하기 위한 놀잇감으로 삼기도 한다. 


'기분 좋음이라는 죄'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내성적인 작가의 모습. 그래서 학교 생활이 힘들었던 모습. '그들의 혹성에 돌아가는 일'이라는 글에도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는데,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것은 '다름이나 다양성'이 '균일'의 틀 안에서만 인정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하는데... 우리 사회 역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개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개성이나 다양성은 사회적 용인의 틀 안에서, 즉 정해진 범주 안에 있어야만 인정하고 있지 않나. 이 틀을 벗어났을 때는 가차 없는 비판과 배제가 따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다시 첫소설 '신앙'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신앙'을 지니고 있는지도, 그 '신앙' 때문에 다른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지닌 '신앙'을 볼 수 있을 때, 그때서야 '신앙'은 '균일'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짧은 소설들, 경쾌한 문장들, 그리고 참신한 발상, 재미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을 우리에게 전해준 소설집이다.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그런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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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셀 테러 - 온라인 여성혐오는 어떻게 현실의 폭력이 되었나
로라 베이츠 지음, 성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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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남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성장하는 남성이 지니게 되는 신념 체계가 내면화 되는 상태. 맨박스에 갇힌 남성들이 많이지면 그 사회는 성평등 사회와는 거리가 먼 사회가 된다.


성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에서는 다른 불평등도 심화된다. 즉 하나의 불평등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인종, 경제, 학력, 지역, 국가, 연령 등등 다양한 분야에서 불평등이 중첩된다. 여기서 여러 불평등이 겹친 사람도 나타나고, 하나의 불평등을 겪는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는 불평등을 옹호하는 일도 벌어진다.


맨박스라는 말도 이러한 불평등한 사회를 이루는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게 맨박스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매노스피어Manosphere'라는 말은 처음 들어왔다. 더불어 '인셀Incel'이란 말도 처음이고.


'인셀 테러'라는 제목을 봤을 때 이게 무슨 뜻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백래시backlash라는 말은 들어봤는데, 이러한 백래시 중의 하나인가 했더니, 백래시를 그냥 반발 정도로 생각했다면(물론 백래시는 반발 정도를 넘어선 상태이다, 거의 폭력 수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셀을 비롯한 매노스피어는 테러에 더 합당하다고 해야 한다.


이 책에는 이러한 '매노스피어'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읽으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그 차이를 무화시켜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들려는 활동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


'매노스피어'에 속하는 활동으로 저자는 '인셀, 픽업아티스르 ,믹타우, 남성권리 운동(두 운동 분야가 있는데, 저자가 언급하는 남성권리 운동은 여성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운동이다), 트롤(게이머게이트)' 등이 있다.

다른 활동들이지만 공통점은 여성을 적대시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인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인셀은 증오를 연료 삼아 타오르는 여성 혐오와 남성우월주의 교리를 의도적으로 확산하고, 무자비한 강간과 여성 살해를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최소 수만 명에 달하는 강성 회원을 보유한 급진적이고 극단주의적인 운동이다'(76쪽) 


끔찍하지 않은가. 이런 것을 운동이라고 해야 하는지 의문이고, 운동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운동을 찬성할 수 있을까? 이런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하지만, 아니다. 이 책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활동에 참여한다. 갈수록 더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서. 그러니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세상은 증오로 유지될 수 없으니까. 성에 따라서 극단적으로 한 성이 다른 성을 억압하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이 책에 든 많은 예시들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오히려 그러한 활동을 알려주는 꼴이 될 테니까. 반대로 어떻게 하면 그런 활동들을 줄이고 없앨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 또한 그들의 행동이 테러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것. 또 젊은이들에게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양성해야 하고,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매노스피어의 활동들은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또 다름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범죄이다. 그것도 혐오범죄, 테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인식을 지니고 대응을 해야 한다고 한다.


다양성이 확보되는 사회에서는 극단이 설 자리는 없다. 그러니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러한 다양성이 꽃피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저자는 주로 영국과 미국의 사례를 들지만, 이것이 어디 그 두 나라에 국한된 일이겠는가. 우리나라 역시 N번방 사건을 겪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책에 나오는 일들이 남일만은 아니다. 우리 역시 대비해야 한다. 


한 성이 다른 성을 또는 성적 지향이 다르다고 해서 억압하고 탄압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이 책은 그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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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우석균 옮김, 알베르토 모랄레스 아후벨 그림 / 열린책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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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하면 떠오르는 작가는? 파블로 네루다. 그렇다. 네루다만큼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작가가 있을까 싶다. 칠레 작가가 네루다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성 작가로 이사벨 아옌데가 있기도 하지만, 영화 '일 포스티노'로도 네루다가 알려져 있고,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라는 소설로도 알려지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로도 유명한 사람이 바로 네루다다.


이 소설에서도 네루다가 나온다. 네루다가 나오니, 칠레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가가 주인공일 거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나 역시도 소설의 주인공이 네루다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니, 당연히 그는 독재국가가 된 칠레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상하다.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건만 아직도 하고픈 말이 너무도 많다. 내 자신과는 평화롭게 지냈는데. 그저 묵묵히 평화를 누렸건만,. 그런데 느닷없이 이 일 저 일 떠올랐다. 그놈의 늙다리 청년 탓이다.' (9쪽)


격동의 나라, 독재의 나라였던 칠레. 그런 엄혹한 시절을 거쳐왔는데, 그것도 작가로서, 비평가로서 명성을 얻으며 살아왔는데, '묵묵히 평화를 누렸'다고 한다. 묵묵히, 이는 사회 문제에 입을 닫았다는 말이다. 눈을 감았다고 해야 한다. 보고도 말을 하지 않으면 적어도 '평화를 누렸'다는 말을 할 수는 없을 테니.


이런 작가가 서술자로 소설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이 처음 문장으로 인해 서술자는 믿음을 주지 못한다. 아옌데 정권이 쿠테타로 무너졌을 때 서술자는 '참 평화롭군'(99쪽)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쿠테타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죽고 독재정권이 들어섰는데, 대통령은 대통령궁을 사수하려고 최후까지 싸우다 죽었는데, '평화롭군'이라니, '정말 조용하군'(99쪽)이라니... 이런 사람이 문학을 한다고? 이런 그가 어떻게 네루다를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볼 수가 있지? 


소설의 초반부에 네루다가 등장하는 것은, 네루다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문학인을 등장시켜서 그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시 칠레의 모습이기도 하겠고.


이런 칠레의 모습은 서술자가 피노체트를 위시한 군부를 위해 마르크스 사상을 강의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도대체 이 작자는 무슨 생각인 거지? 이렇게 문학과 세상이 동떨어질 수도 있나?), 문학인을 위해 파티를 여는 마리아 카날레스라는 사람에게서 절정에 이른다.


이 사람의 남편은 반체제 인사들을 고문하는 정보국 사람이고, 그는 그러한 고문을 자신의 집에서 한다. 집 한 쪽에서는 고문이, 다른 한 쪽에서는 문학을 빙자한 파티가 벌어지는 사회, 그것이 정상적인 사회인가. 그러한 것들이 우연히 알려졌음에도 사람들은 독재정권 하에서 그 파티에 계속 참여한다. 그것을 드러내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은 없다. 이런 문학인들의 모습을 볼라뇨는 이 소설에서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다.


쿠테타로 집권한 독재 정권. 그런 사회가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없음에도 행복한 것처럼 꾸미며 사는 사람들. 겉으로 치장하는 예술가들. 그런 예술가들의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칠레의 모습을 '유다의 나무'로 비유하고 있다. '유다의 나무를 흥얼거리면서 가다가 칠레 전체가 유다의 나무로 변해 버렸다는 깨달음을 얻었다'(143쪽)라고 하는데, 깨달음을 얻었다면 어떤 행동을 해야할까?


유다의 나무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목을 걸고 죽은 나무가 '유다의 나무'라고 한다면, 서술자가 칠레가 유다의 나무라고 하는 것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았다는 것일까?


아니면 칠레 전체가 유다의 나무이니, 자신들의 잘못을 칠레가 나중에라도 단죄한다는 뜻인가? 그래서 늙다리 청년을 등장시켜서 자신이 살아온 삶이 잘못 산 삶이었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인가?


모골이 송연하다는 표현을 하고 싶을 정도로 시대와 사회에 눈 감은 문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들이 어떻게 그러한 문학 활동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칠레에서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도 이러한 때가 있었으니,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서술자와 같은 역할을 한 문학인이 우리에게도 있었으니...


진정 문학을 하는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질문은 시대를 막론하고 늘 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우리나라는 이러한 예술가들보다 현실을 바로보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최근에도 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낸 작가가 있었으니, 우리나라 이런 작가들은 이 작품에 나오는 서술자와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예술가들이 있다는 것,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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