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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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마지막 글이라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책으로 엮어 나온 글들이다. 어두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 나치의 광기를 피해 라틴아메리카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그러나 사람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 바로 츠바이크다.


참으로 어두운 시대, 그 어두운 시대에서도 빛을 발견하려고 했던 사람이니 그의 글을 읽으면 어떤 위로를 받는다. 지금 시대에 그의 글을 통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이 시대 역시 어두운 시대임을 반증하겠지만.


나치의 광기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어둡게 만들었다면 지금 우리 시대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대두하는 신나치들... 이와는 다르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이 우리들 생활을 잠식해서 자본으로 인한 무역전쟁과 국가간의 전쟁까지 일으키려 하는 모습, 그리고 여전한 종교 갈등. 당시에는 유대인이 약자였다면 지금은 유대인이 강자가 된 세상. 강자와 약자의 처지는 바뀌었지만 어두운 시대는 사라지지 않았으니...


처음에 실린 글은 자본주의 시대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물론 이 글은 대놓고 자본주의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 만난 사람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가? 자신의 필요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안톤이라는 사람을 통해 츠바이크는 이런 세상을 꿈꾼다.


'모든 사람이 이런 상호 신뢰의 비결을 배운다면, 경찰도 법원도 교도소도 돈도 필요 없을 거라고. 필요한 만큼만 대가를 받고 능력이 닿는 한 힘껏 돕는 이 청년처럼 모두가 산다면, 부조리가 반복되어 '사회문제'가 되는 우리의 복잡한 경제 시스템도 어쩌면 해결될지 모른다.' (22쪽)


처음에 만나는 글부터 따스하게 다가온다. 어둠보다는 밝음이 먼저 우리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다 다음 글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이라는 글이다.


용기, 이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고, 사회를 바꿀 수도 있다.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는 용기, 잘못을 잘못이라고, 잘못이 아님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다. 나중에가 아니라 바로 그때에.


그런 용기가 한 사람뿐만 아니라 사회를 바꿀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어두운 시절에'라는 글이다. 어두운 시절이 그때만이 아니고 지금도 어두운데, 여기서 우리는 별을 찾아야 한다. 그 별을 찾아 보여주고, 별과 같은 삶,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용기이기도 하다.


'영원한 별들이 얼마나 찬란하게 하늘에 떠 있는지 알려면, 먼저 어두워져야 합니다. 몸과 숨을 분리할 수 없듯이 영혼과 자유를 분리할 수 없음을 인식하기 위해 먼저 어둠의 시간이, 아마도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 우리에게 닥쳐야 했습니다.' (116쪽)


어둡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빛나는 별을 보고 자신의 삶을 그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는 말. 명심해야 한다.


짧은 글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느 글 하나 버릴 것이 없다. 특히 마지막 글은 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미래를 선취하고 있음을, 그래서 작품을 읽으면서 그런 미래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으니.


그가 언급한 빈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가 쓴 [묵시록의 네 기사]를 읽지는 않았지만, 츠바이크의 설명에 의하면 그 소설에 등장한 하르트로트라는 인물이 히틀러의 전신임을 보여주면서 '작가가 정치학 교수보다 당대와 미래를 더 잘 이해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보여주었다'(130쪽)고 하고 있으니, 작품을 통해 우리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현실의 세상을 바꿔갈 수 있음을 생각한다.


이처럼 이 책은 어두운 시대 빛을 보여주는 츠바이크의 글들을 모아놓아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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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키스슈타인
지넷 윈터슨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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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괴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이라 불리는 존재를 창조한 사람 이름임에도. 마찬가지로 그 소설을 쓴 사람이 메리 셸리라는 사실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작품을 알아도 작가를 모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이 소설은 신의 능력에 도전하는 인간과 그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 또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서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등등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과연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모든 것을 다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하지만 인류는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하지 않았던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가 하지 않았던가. 그것에 따른 책임은 별개로 하고 말이다.


이렇게 소설은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경우 일어나는 일들, 책임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도 보여주고 있는데,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들이 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은 어떻게 추진되고 있을까? 그것은 인공지능-로봇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지금 엄청나게 발전된 기술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있지 않은가. 그 결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장밋빛 미래를 상상할 뿐이다.


[프랭키스슈타인]은 이러한 추세를 반영한 소설이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시체를 가지고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려 했다면 이 소설에서는 현대 과학이 이미 실행 중인 냉동인간을 이용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려 한다.


즉 뇌를 스캔해, 그 뇌를 이식한다는 발상이다. 인간의 뇌를 이식할 수 있다면, 그 뇌를 이용해 다른 몸을 사용하는 것은 더 간단한 문제라고 할 수 있으니...


그렇다면 인간의 뇌를 이식한다면 그간 몸을 이용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사람은 존재하게 될까? 그는 더이상 인간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뇌로만 남은 인간이 과연 인간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는 계속 될 것인데...


그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그러한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의 발전을 이룰까? 아니면 특정한 집단의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까? 이에 대한 답을 작가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다만 이 소설은 그러한 질문을 넘어서 재미있다. 이미 [프랑켄슈타인]을 읽은 사람이라면 더더욱 재미있게 읽을 수 있고, 여기에 [메리와 메리]를 읽은 사람이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소설에서는 메리가 [프랑켄슈타인]을 쓰는 과정이 나오고, 그 과정에서 어울리는 사람들이 나오기 때문이다. (메리, 메리의 남편인 셸리, 바이런, 클레어, 그리고 의사인 폴리도리)


여기에 현재로 돌아오면 그들의 환생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나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생명체를 탄생하는 과정과 중첩이 되게 소설이 진행된다. 물론 처음에는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로봇을 보여주지만 이것은 시작점에 불과하다. 남성의 욕망만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 즉 불멸하고자 하는 욕망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식된 뇌는 어떤 몸이든 옮겨갈 수가 있으므로 불멸의 욕망을 실현할 수 있다.


아직은 진행형이지만 냉동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현실에서 이미 실행되고 있는 일이기도 한데, 이러한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인간의 행위를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인물과 병치되는 이 소설 속 인물은 메리라고 할 수 있는 라이, 셸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메리가 사랑했던 사람이 셸리니, 이 소설에서 라이가 사랑하는 사람인 빅터를 셸리로 치자. 그리고 빅터는 메리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박사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지칭하기도 한다.


둘 다 메리의 사랑이라고 보면 되지만 빅터는 [프랑켄슈타인]의 빅터와 같다고 보는 편이 더 좋겠다. 메리의 사랑을 받는 셸리의 특성을 지닌 빅터라고 하자. 그는 소설 속 인물과 같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니 말이다.


그리고 바이런이라 할 수 있는 론. 그가 섹스봇 판매자로 나오는 이유는 명확하다. 과거 바이런 역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고 하니... 클레어는 바이런의 정부이자 메리의 이복동생인데, 역시 론과 함께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폴리도리는 좀 다르게 나오지만 이름이 비슷한 폴리 D로 나오니, 과거의 인물과 현재의 인물을 중첩해서 읽는 재미도 좋은 소설이다.


결국 빅터는 성공했을까? 그 성공의 결과는 무엇일까? 그것이 과연 인류를 위한 사랑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우선 재미있게 읽자. 읽으면서 마음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는지 보자.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이 소설에 나온 세상보다 더 많은 변화가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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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를 키웁니다 - 체코 대표작가의 반려동물 에세이
카렐 차페크.요세프 차페크 지음, 신소희 옮김 / 유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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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맞다. 재미있다. 웃으면서 읽고, 맞다, 맞다 맞장구를 치고, 그러다가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구나 하기도 한다.


차페크 글이다. [정원가의 열두 달]을 무척 재미 있게 읽어서 이번엔 반려동물 이야기야? 하면서 읽게 된 책.


개와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들과 함께한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펼쳐보이고 있다. 가끔은 개나 고양이가 말하듯이 표현하기도 하고...


지금 시대에는 맞지 않는 내용도 있지만, 차페크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하자. 지금 생명을 대하는 잣대로 과거를 재단할 수는 없으니. 다만 현재에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야함은 명심하고.


키우던 개가 강아지를 낳았을 때 차페크가 한 행동은 지금은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다. 물론 그가 직접 실행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게했지만 그렇다고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강아지들을 죽이게 한 것.


지금이야 중성화 수술이다 뭐다 해서 개체수를 어느 정도 조절을 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시도를 할 수 없었으니, 태어나는 많은 생명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 개에 관한 이야기에서 차페크 역시 많은 강아지들로 인해 자신이 한 행위를 서술하지만, 그런 행위가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는 개를 반려동물로 여기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애견이라고 하기보다는 함께사는 생명체로 인식하고 있음은 뒷부분에 나오는 고양이 이야기로 알 수 있다. 그러니 그가 행한 잘못은 잘못으로 인식하고 그가 반려동물과 어떻게 지냈는지를 중심으로 이 책을 읽는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그는 사진을 찍기 위해(?) 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차페크가 만든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왜 개 꼬리가 짧아졌는지, 왜 개가 땅을 파는지, 어째서 풀밭을 세 바퀴 도는지, 개의 품종에 따른 몸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지어내 개에게 들려준다. 그것을 우리가 듣고 웃음을 터뜨리게 된다.


고양이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많은 고양이 새끼들을 죽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과 함께하던 고양이가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 한다. 그리고 고양이 새끼들을 분양하기 위해 모임에 참여할까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모습이 분명 진지했을 텐데, 읽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렇게 반려동물들과 함께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도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개와 고양이 이야기를 하다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인간에게 돌아온다. 인간의 이야기를 한다. 차페크가 살았던 시대는 인간 불신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때였으니... 다행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차페크는 2차대전 전에 세상을 떠서 학살을 면했지만 형인 요제프는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하니...


그는 개와 고양이에 관한 글을 쓰다가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을 한다.


'야생동물이란 믿음을 모르는 짐승이며, 길들여짐이란 그저 서로를 믿는 상태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결국 우리 인간도 서로를 믿는 만큼만 야생동물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206쪽) ... 신뢰가 없는 상태는 야만의 제1단계이며, 불신은 정글의 법칙이다. 불신을 부추기는 정치는 야만의 정치다. 사람을 믿지 않는 고양이는 사람을 인간이 아니라 야생동물로 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을 믿지 않는 인간 또한 상대를 야생동물로 보는 것이다. 상호 신뢰는 인류 문명보다 오래된 체제이며 그로 인해 인류는 인류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신뢰 상태를 깨뜨린다면 인류가 만든 세상은 야생동물의 세계가 되고 말리라. (207쪽)


익살스러운 표현을 하지만 그것은 바로 반려동물과 지내는 생활에 믿음이 있었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한 한때를 보냈다는 표현일 것이다. 그것이 동물과 동물,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는 차페크의 마음이 이렇게 글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세계는 과연 차페크가 말하는 믿음이 있는 세계일까? 반려동물들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인간끼리는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재미있게 낄낄거리면서 읽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 생명과 함께 사는 일은 다른 생명들과의 관계도 살피게 만든다는 것을 다시금 깨우쳐준 차페크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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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민음사 모던 클래식 10
재닛 윈터슨 지음, 김은정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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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예측하기 힘들다. 그런데도 제목에서 보면 하나만을 강요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과일은 오렌지말고도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소설의 각 장들은 성경에서 따왔는데, 창세기부터 룻기로 끝난다. 시작에서 방랑으로 끝난다고 봐야 하는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입양된 아이가 그 신앙으로 키워진다. 그런데 어디 부모의 뜻대로 성장하겠는가. 아이는 학교에서도 계속 성경과 관련된 이야기만 해 교사들의 걱정을 받지만, 엄마는 막무가내다. 그것을 오히려 더 바람직해 한다.


성경대로 살아가는 아이를 바라는 부모. 그런데 아이는 성장하면서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 동성애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엄마에게는 재앙이다. 사탄이 아이의 몸으로 들어간 것처럼 여긴다. 목사 역시 마찬가지고.


이것을 견디지 못한 아이는 집을 나오지만, 그렇다고 부모와 연결된 끈이 아주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는 부모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작가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인데... 여기서 과연 종교는 어떠해야 하는가, 부모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종교가 사람을 획일적으로 만든다면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종교가 아니라 그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그들의 말이 과연 성경과 또는 신과 합치하는가. 그들의 말에 의문을 제기하면 이단이라고, 사탄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과연 종교인가?


하나만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견뎌낼 수가 없다. 그것은 광신도들을 양산할 뿐이다. 그러한 광신도들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름은 곧 잘못이고, 잘못은 신과 반대되는 사탄의 행위일 뿐이다. 그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런 주장이 소설 속에서 이런 대사로 나타난다.


"오렌지야말로 유일한 과일이지."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56쪽)


그 많은 과일 중에 오렌지만이 과일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들의 신만이 유일하다는 주장. 그 신을 대변하는 사람들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잘못된 행위라는 것. 그러니 여기서 다른 행위를 하는 또는 다른 성향을 지닌 사람은 자신들의 신념을 받아들이거나 또는 떠나야 한다.


하지만 나중에 어머니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이것이 앞의 말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어머니는 철학적으로 말했다.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니까." (285쪽)


이 말에 다른 과일을 모두 인정한다는 마음이 들어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아니다. 오렌지에서 다른 과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냥 자신들이 과일이라고 하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바뀐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획일성을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의 이야기다. 자신의 특성을 알게되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아이의 모습. 


소설을 읽으면서 과연 종교는, 부모는 어찌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남들도 그대로 따르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나와 우리와 다른 생각, 다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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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기 안내서 - 더 멀리 나아가려는 당신을 위한 지도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반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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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하라고 한다. 낯선 곳으로 가서 낯익은 자신과 결별하는 경험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몰랐던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늘 가던 장소만 가지 말고 다른 장소에 가보는 일. 자신을 고정된 삶에서 변화 있는 삶으로 바꿔가는 일. 습관적으로 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이다. 여행은 그러한 경험을 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솔닛의 이 책은 여행에 관한 책이 아니다. 그렇지만 여행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솔닛이 가보았던 낯선 장소에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런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 잃기 안내서]는 '길 찾기 안내서'다. 우리는 길을 잃었을 때야 비로소 자신이 가고 있던 길을 다르게 본다. 그때서야 의식한다. 의식을 하면 되돌아보게 되고, 앞을 살피고 좌우를 살피게 된다. 또한 빠르게에서 느리게로 바뀌게 된다. 살펴야 하니까.


길을 잃는 일은 길을 찾는 일의 시작이다. 그러니 길을 잃지 않으면 길을 찾을 수가 없다. 여기서 잃는다는 것의 의미를 솔닛의 말을 빌려 정의하고자 한다.


'잃는다는 것에는 사실 전혀 다른 두 의미가 있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차츰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 길을 잃을 때는 다르다. 그때는 세상이 우리가 알던 것보다 더 커진 셈이다.' (42쪽)


자, 여기서 잃는다는 것은 상실이 아니다. 찾음이다. 그것도 이전에 있는 것에 무언가를 더 보태는 일. 그것이 바로 '길을 잃는다'가 지니는 의미다.


인생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실수와 실패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인생에서 실수와 실패가 없을 수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한다. 그런데 그때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다음 인생이 달라진다.


길을 잃었다고 주저앉으면 더 나아갈 수가 없다. 그곳이 자신의 마지막 장소가 된다. 하지만 길을 잃었기에 새로운 길을 찾아나서면 그곳은 마지막 장소가 아니라 시작하는 장소가 된다. 새로운 시작, 그것을 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실수와 실패가 마지막 장소가 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면 누구나 실수나 실패를 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남들이 이미 닦아놓은 길로 가려고 한다. 그냥 그렇게...


여기에서 솔닛의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실수를 두려워하는 태도는 그 자체 크나큰 실수일 수 있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실수일 수 있다. 삶은 늘 위험한 법이니, 조금이라도 덜 위험한 삶은 이미 무언가를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154쪽)


이런 점에서 솔닛의 이 책은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길을 잃으라고, 실수를 해보아야 한다고, 실패도 겪어보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말은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을 때, 실수와 실패가 용인이 되고 또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사회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하여 솔닛의 이런 주장은 개인에게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사회를 변화시키야 한다고, 그런 일들은 이미 길을 잃어본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한다는 주장이 된다. 이런 주장을 솔닛은 글쓰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


'글쓰기는 즉각적인 대답이나 상응하는 대답이 영원히 묵묵부답일 수도 있는 대화, 아니면 긴 시간이 흘러서 글쓴이가 사라진 뒤에야 진행될 수도 있는 대화를 먼저 시작하는 일이다.' (186쪽)


이렇게 먼저 대화를 시작한 솔닛. 우리는 그 대화를 이어받아 계속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가 길을 잃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래서 길 잃기가 여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 길 잃기가 나를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 무언가를 더 보태어서 돌아오게 하는 여행. 그것이 바로 솔닛이 말한 길 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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