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치핀 -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
세스 고딘 지음, 윤영삼 옮김 / 라이스메이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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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경전이 많다. 경전이 한 권이라면 아마도 세상 사람들이 싸울 일이 없겠지. 하지만 그 많은 경전들을 관통하는 내용이 다 다를까? 몇몇은 다르기도 하다. 유일신, 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경전처럼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신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 경전이 설파하고 있는 인간들이 실천해야 하는 내용을 보면 대동소이하다. 


그러니 어떤 경전을 읽고 그 경전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다면 세상은 자비와 사랑과 평화가 넘치게 될 것이다. 상대를 비방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내 일처럼 돕고, 자신을 항상 뒤돌아보고 개선하려고 하며, 나의 이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린치핀]이란 이 책도 마찬가지다. 경전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경전에 비유하기가 너무 거창하다면 교과서에 비유하면 된다. 물론 이 책에서는 학교를 비판한다. 학교에서는 린치핀이 아닌 톱니바퀴를 양산한다고 하니까. (학교에서 배운 대로 톱니바퀴가 되는 길밖에 없다. 이는 곧 실패를 의미한다. -431쪽)


교과서란 말은 틀에 박힌이란 의미로 많이 쓰이니, 틀을 벗어나자고 주장하는 이 책의 취지와는 맞지 않으니 빼자. 경전이 맞다. 경전은 순응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전은 단순히 순응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순응이 아니라 경전대로 살아간다면 세상을 바꾸는 힘을 얻을 수 있다. 


기독교만 보아도 그렇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는 경전에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 아니었다. 불교는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계급으로 나뉘어진 사회를 비판했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불교 교리는 바로 혁명적이다. 누구나 소중한 사람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교 역시 마찬가지다. 공자의 사상이 순응을 이야기한다고 하지만 맹자를 보라. 왕을 쫓아낼 수 있는 근거를 제기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사람답게 사는 방법, 그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놓은 책들이 경전이다.


이런 점에서 경전은 우리 삶에 많은 도움을 준다. 왜 [린치핀]이란 책을 이야기하면서 경전을 들먹였냐고? 그것은 이 책이 바로 경전과 같은 소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읽으면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런 자세를 지녀야 한다. 그래야 린치핀이 되고, 이 사회에서 우리는 톱니바퀴가 아니라 린치핀으로 살아야 한다고 한다. 특히나 인공지능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시대에는 대체불가능한 린치핀이 되어야 한다고...


린치핀은 <다음 백과사전>에서 검색해 보니 다음과 같이 풀이되어 있다.


린치핀은 마차나 수레의 바퀴를 고정시키기 위해 축에 꽂는 핀으로서 안보 ・ 외교적으로 구심점 역할을 하는 핵심 국가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미국은 린치핀이란 용어를 미국 ・ 일본 간 동맹 관계에서 주로 쓰다가 오바마 행정부인 2010년 6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처음으로 한미동맹 관계를 린치핀이라고 표현했다. (출전 : 린치핀 - Daum 백과)


영어 사전을 보면 linchpin : 1. 바퀴를 굴대에 고정시키는 핀 2. 중핵을 이루는 중요인물 3. 급소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린치핀은 중요한, 빠져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현대사회에서 대체불가능한 인물이 바로 린치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린치핀이 될 수 있는가?


많은 방법이 - 이 책에서는 방법이라기 보다는 방향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구체적인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는 방향을 보여주고 있으니 - 있지만, 그 방법은 경전에서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즉, 실천은 개인의 몫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말이 경전에 쓰여 있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린치핀이 되는 방법을 읽고 머리 속에 간직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니 이 책은 경전이다.


하지만 경전에도 우리가 기억하는 문구들이 있기 마련이니, 이 책의 저자가 말한 린치핀이 되기 위한 자세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물론 학교에서는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고, 저자는 학교의 교육은 톱니바퀴를 양산하지 절대로 린치핀을 길러내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긴 경전을 학교에서 배우지는 않으니까...


린치핀이 가진 일곱 가지 능력이라는 장을 기억하면 된다. 적어도 이런 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면 되니까...


1. 조직 구성원들이 접촉할 수 있는 고유한 통로를 만든다.

2. 고유한 창의성을 발휘한다.

3. 매우 복잡한 상황이나 조직을 관리한다.

4. 고객들을 이끈다.

5. 직원들에게 영감을 준다.

6. 자신의 분야에 깊은 지식을 제공한다.

7. 독특한 재능을 지닌다.  (417-418쪽)


이런 말들을 뭉뚱그릴 수 있는 말이 '관계, 예술, 선물'이라는 말들이다. 이 세 단어는 이 책에 많이 나온다. 


관계는 중요하다. 기술보다 중요한 것이 관계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진심을 다한 만남, 이런 만남은 선물이다. 선물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좋아서 준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좋은 것, 그것이 선물이다. 이런 선물을 주는 자세, 그것은 기술이 아니라 예술이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그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 즉 관계에서 예술은 선물로 나타나게 된다.


[린치핀]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나는 린치핀인가, 톱니바퀴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행동들은 린치핀에서 멀어진 행동들이 아니었나. 내 삶도 린치핀이 아닌 톱니바퀴에 불과하지 않았나, 언제든 대체가능한 존재가 나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도 들었지만...


이 책의 저자가 말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하니, 그것이 린치핀이 되는 가장 기본이라고 하니, 어쩌면 이 책은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경전이 아무리 좋은 소리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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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모모 2024-01-0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천하는 움직임이 되는 오늘이 되도록 !!! 다짐해 봅니다.

kinye91 2024-01-09 10:52   좋아요 0 | URL
아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요즘입니다.
 
귀향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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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가 '투우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게 번역을 했으면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을 수도 있다. 물론 주인공의 이름이 후안 벨몬테인데, 이는 유명한 투우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작중에서 이름을 댈 때마다 사람들은 투우사의 이름을 들먹인다.


주인공이 왜 투우사의 이름을 같고 있을까? 투우가 무엇인가? 소와 정면으로 맞대면해서 결국 소의 등에 창(칼)을 꽂아 소를 죽이는 일을 하는 일 아닌가. 요즘은 동물학대라고 해서 많이 비판받고 있는데, 그 점은 언급하지 않더라도 투우는 한쪽의 목숨을 건 대결이다. 물론 사람이 죽는 경우는 드물다. 한쪽이 당하는 일. 결과가 잘 바뀌지 않는 일.


그렇다면 귀향은 무엇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예전의 생활을 되찾는 일까지 포함한 장소의 이동이 귀향이라고 한다면, '귀향'도 쉽지 않다. 소설 속 벨몬테 역시 제대로 된 귀향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배경은 독일과 칠레다.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나라가 '나치'에 의해 연결이 된다. 나치 부역자들이 남미로 많이 피신을 했었으니,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소설은 이 두 나라를 연결짓는 고리로 나치 시절에 금화를 훔쳐 달아난 독일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나치 치하에서 경찰이었지만 나치에 동조한다고는 할 수 없다. 나치가 숨겨둔 금화를 훔쳐 달아나려 한다. 어디로? 남미로...칠레로...


하지만 이들은 성공 단계에서 한 사람만 빠져나가고 한 사람은 잡히게 된다. 잡힌 사람이 끝까지 동료의 행방을 불지 않고 세월은 흘러 흘러 사회주의권이 붕괴되고 사건은 다시 시작된다. 이 금화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을 도와줄 사람을 고용한다.


그러니 소설은 두 축으로 시작한다. 금화를 가운데 두고 이를 찾기 위해 나서는 나치와 관련이 있는, 아니면 구동독 정보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과 금화를 찾으려는 보험회사. 


갈린스키가 구동독 정보부를 대표한다면 벨몬테는 보험회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갈린스키가 구동독 정보부를 대표하는 것은 맞지만 벨몬테는 보험회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그는 귀향을 꿈꾸기 때문이다.


남미의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게릴라 출신인 벨몬테. 그는 고문으로 말을 잃은 베로니카를 치료해준다는 조건에 일을 맡고 나선다. 그에게는 금화를 찾는 일은 귀향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귀향하는 곳이 독일이든 칠레든 아니면 그가 조건으로 내건 베로니카를 치료할 수 있는 덴마크 건 그것은 상관이 없다.


즉, 갈린스키에게 금화는 자신의 옛 영화를 대변하는 존재라면, 벨몬테에게 금화는 베로니카와 함께 귀향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금화를 사이에 두고, 이들은 투우처럼 대치하게 된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승자를 예측할 수 있다. 벨몬테가 승자가 된다. 그렇지만 그의 귀향이 이루어지는지는 알 수 없다. 칠레가 민주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완전한 민주화라고는 할 수 없다. 그 점을 세풀베다는 벨몬테를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국은 민주주의 체제 하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  체제가 <회복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분 명 입 밖으로 토해 내지 않았다. 칠레가 민주주의 체제에 <있다>는 말은 그것이 좋은 길로 나가고 있다거나 , 그 반대로 그 길에서 당장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153쪽)  


자, 아직 진행 중이다. 그러니 벨몬테의 귀향도 진행 중이다. 그가 베로니카에게 가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고 있는 것은 그의 귀향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사실에서부터 남미의 민주화 투쟁 시기를 금화를 둘러싼 두 인물을 통해서 소설은 긴박하게 전개된다. 


금화를 먼저 찾기 위한 여정, 두 사람에게 다른 의미를 지닌 귀향. 그렇지만 이렇게 긴박하게 진행되는 소설 속에서도 정지된 장면이 등장한다. 아니, 정지되었다기보다는 이런 쫓고 쫓기는 삶에서 한발 비껴선 이들의 삶.


금화를 숨긴 독일인이 숨어 살던 곳, 그곳에 살던 사람들... 이들은 "그 빌어먹을 것들을 어서 가져가시오."(212쪽)라고 한다. 이들에게는 과거의 금화, 또는 현재의 삶을 더욱 부유하게 해줄 금화는 필요없다. 그들에게는 평화롭게 살아가는 자신들의 삶이 더욱 소중하다. 그러니 그 금화를 빨리 갖고 사라지라는 말을 한다.


이들의 구성원이 깜빡깜빡하는 노인이나 듣지 못하는 여인들과 함께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투우처럼 피비린내 나는 일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 자신들의 삶에 만족하고 남들을 돕고 사는 사람들. 


세풀베다는 작품의 말미에 이런 삶을 보여준다. 결국 베로니카에게 가면서 벨몬테가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니 벨몬테가 베로니카와 만나는 순간, 그의 귀향은 완성될 수 있다.


'나의 사랑 베로니카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삶 앞에서 왜 죽음의 황금빛 섬광들만 바라보았는지를 생각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213쪽)   


그렇다. 여기서 '투우'는 끝나고 '귀향'이 시작되며 완성된다. 죽음의 황금빛 섬광들을 과거로 여기고 이제는 삶에 충실하려는 모습... 벨몬테가 마지막에 만났던 사람들의 삶 아니던가.


세풀베다의 소설,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몇 권 읽을 때마다 좋은 느낌을 받는다. 재미도 있고, 생각할거리도 풍성하고...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2020년에 세상을 뜬 세풀베다를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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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이미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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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 미루고 미루다가 2023년이 다 갈 때쯤 되어서야 읽은 소설집. 젊은작가상이라는 이름에 맞게 등단한 지 얼마되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집이다. 그런데도 이미 소설집을 여러 권 작가들이 많다. 문단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 받아들여도 되겠지.


또 최근 소설의 추이를 알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가끔은 의무적으로라도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시와 소설의 홍수라고 해야 하나? 인문학이 죽어가고 있는 시대에, 문학 역시 인문학의 한 분야이니 죽어가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출판 분야를 보면 인문학이든 문학이든 참 많은 책들이 나온다. 그 많은 책들이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는지 물으면 그렇다라는 대답을 하기 힘들지만.


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홍수 속에서 그래도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작품들을 선정해 책으로 발간했으니 많이 읽혀야 하는데... 많은 소설들이 많은 독작에게 가 닿지 못하고 작가와 평론가들의 세계에서만 머무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학교 교육이 중요한데, 요즘 학교 교육을 보면 소설이나 시를 수록한 교과서는 별로 없다. 


오로지 대학 입학을 위해서 국어(문학)공부를 한다고 하면 수능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 문학보다는 다른 글들이 많이 실리고 문제도 많이 나오니, 이제는 학창 시절에 문학을 공부하는 비중도 적고, 그렇기 때문에 학교를 통해 문학과 만나고, 그 만남을 지속하는 경우도 드물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은 없다. 소설이 사람들의 마음에 닿아야 하겠지.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는 평론가들의 평론보다는 일반 사람들의 말이, 글이 더 소설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게 한다.


즉, 소설은 전문가들의 홍보가 아니라 일반 사람들의 홍보를 통해서 널리 퍼지게 되는데, 일반 사람들이 홍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려야 한다. 야, 이건 우리 이야기구나! 하거나 완전 내 이야기네 하는 마음이 들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젊은 작가상'은 일반인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여지를 더 많이 두고 있다고 하겠다.


첫소설인 이미상이 쓴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은 그런 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이 소설을 읽으면서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이 살아가는 모습을 생각하게도 된다. 그들의 삶이 바로 소설이라고 보면서...


목경은 우리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즉 목경을 평균적인 삶에 놓고 보면 모래 고모와 무경은 평균에서 벗어난 삶을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단편소설이라 무경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무경은 사회 생활을 거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모래 이모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변변한 직업을 갖지 않고 가족을 돌보면서 생활을 하는 모래 이모, 그러나 모래 이모는 가끔 가출을 감행한다. 그 가출이 다른 가족에게로 가는 경우가 많지만 나중에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결말로 간다. 무경은 반대다. 무경은 가출을 하지 않는다. 무경은 원가족을 벗어나지 않는다. 원가족이 무경의 삶을 책임지게 한다.


이와는 다르게 목경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냥 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려는 사람... 그런데 소설은 '모험'이라는 말을 썼다. 어떤 삶이든 모험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삶도 하루하루가 모험이다. 이런 평범에서 벗어난 삶 역시 모험이다. 작가는 어떤 모험이 바람직한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할 수도 없다. 우리네 삶 자체가 모험이라면...


그렇다면 소설 역시 이런 삶을 표현해야 한다. 이런 삶이 표현된 소설 역시 모험이다. 어떤 소설이든 모험일 수밖에 없다.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한 모험... 삶의 모험과 소설의 모험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겹쳐졌다.


"단편소설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만든다는 것은 어떤 한 포인트를 융기시킨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 불쑥 솟은 한순간 아래 모든 문장과 장면이 깔리게 되는 거죠. 좀 비민주적이지 않아요?"(41쪽)


소설 속 동생인 작가가 하는 말이다. 그래서 한 포인트가 융기되지 않는 소설을 쓰기 때문에 인기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런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또는 쓰지 못한다고 하고 있으니, 우리 삶을 대비해 보자.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한 순간이 융기했다면 나머지 삶들은 어떠했을까? 그 삶들은 융기한 한 순간을 위해 존재했을까? 아니다. 삶은 융기했든 평평했든 다 소중한 삶이다. 어떤 삶이든 다 모험이고, 순간순간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긴장된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 삶에서 어떤 한 순간만을 만들어내려고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삶도 그렇다. 내 삶과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하면서 저 사람의 삶은 저렇게 훌륭한데 왜 내 삶은 이다지도 형편없을까 라고 할 필요가 없다. 아니, 해서는 안 된다. 돋보이는 삶과 대비되는 보통의 삶들이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삶도 소중하지 않은 삶이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나왔다는 자체만으로 삶은 모험이고, 누구에게나 소중한 체험이다. 그것을 알아줄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삶의 여정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다.


소설을 비롯한 문학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융기한 작품이 아니라 쓰인 한편한편이 모두 소중한 작품이고, 그 작품들이 자신을 알아줄 존재를 찾아 모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 이미상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작품집에 실린 다른 작품들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해주고 있으니 이들의 모험을 만나볼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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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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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발표 시기와 지면에 따라 내용이 다르기는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통하는 무엇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읽으면서 그 무엇을 찾는 일이 읽기를 더 재미있게 한다.


읽는 사람마다 '그 무엇'이 다를 수 있겠지만, 내게 이 소설집에서 찾을 수 있는 '그 무엇'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는 경계'다.


첫소설에서도 그렇다. 물론 천선란 소설이 SF소설이라는 평을 듣는 만큼 외계생명체의 존재나,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과는 다른 존재들이 등장하지만, 그런 존재들이야말로 이 세계에서 저 세계를 인식하게 해주는 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즉, SF소설 자체가 경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과 공상의 경계라고 하면 허황된다는 느낌을 주니까,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라고 하면 좋을 듯하다. 


처음에 실린 '흰 밤과 푸른 달'에서는 바로 지구를 떠나는 존재들이 나온다. 다른 생명체와 싸우기 위해 더욱 강하게 진화(?)된 인물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지구인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외계 생명체가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지만, 외계 생명체가 없는 지구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된 이들에게 선택지는 외계로 나가는 것이다.


자, 이들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가야 한다. 자발적이든 강요가 되었든 이들은 다른 세계를 향해 갈 수밖에 없다. 지구에 사는 우리들이 지구 밖으로 눈을 돌리는 일... 그런데 지구가 살 수 없어진다면, 당연히 우주로 가야 한다.


지금도 환경, 생태 문제로 지구가 견딜 수 없게 된다면? 하고 화성으로 이주를 꿈꾸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우주로 날아가는 새'라는 소설을 보면 지구를 떠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미 인간에 의해서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던 새들과 연결지어, 작가는 인간 역시도 그렇게 우주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푸른 점'이라는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연상시키는 소설. 그러나 태양계를 벗어나는 보이저호에서 보내온 사진은 푸른 점(지구)는 없다.


소설에서는 지구는 이미 푸른 점이 아닌 보이지 않는 행성일 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푸른 점이어야 한다. 즉, 진실보다 믿음이 중요하다(106쪽)는 인물의 말처럼, 사람은 믿음을 잃지 않아야 살아갈 동력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갈 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진실이 아니라 믿음이다. 바로 자신들의 믿음을 공유하는 것. 그런 믿음의 공유가 인간들을 지구가 아닌 다른 우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여전히 우주에서 지구와 같은 행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듯이. 또 지구와 다른 행성에서도 살 수 있다고 믿고 있듯이.


우주라는 공간만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인간 내부에서도 가능하다. 공간이 아니라 인간에게서도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자, 무엇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가? 내가 나임을 무엇으로 증명하는가? 나와 남의 경계는 무엇인가? 또 남이 내가 될 수 있는 경계는 무엇인가? 


작가는 '기억'을 말하고 있다. '옥수수밭과 형'이란 소설에서 '사람은 다른데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이란 주인공의 질문에 형은 '그래도 같은 사람이지.'(117쪽)라고 답한다. 그러면서 소설 속의 나는 여러 형을 만난다. 물론 여러 형을 동시에 만나지는 못한다. 같은 기억을 지니고 있는 형은 순차적으로 내게 나타날 뿐이다. 그리고 그 형들은 내게는 형이 된다.


같은 사람인데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으면? 같은 사람일까? 다른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옥수수밭과 형'에서는 다른 인물들이 모두 형이 되는 남이 내가 되는 문이 열렸다고 한다면, '제, 재'라는 소설에서는 내가 남이 되는 문이 열렸다고 할 수 있다.


같은 육체 안에 있는 다른 기억을 지니고 살아가는 '제와 재'. 이들은 같은 인물일까? '제'에게는 '재'는 다른 사람일 뿐이다. 즉 제의 세계와 재의 세계는 다른다. 그렇지만 이들은 한 몸에 있다. 이 세계와 저 세계가 한 몸에서 공존하고 있는 것.


이를 좀더 확장한 소설이 '두 세계'라는 소설이다. 소설 속 인물이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자신을 옥죄고 있는 환경이 아니다. 그 세계가 아니다. 아예 다른 세계, 즉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고 싶어한다. 어떻게 해야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갈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그 문은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단절이다. 이 세계의 끝남. 그런데 이 세계의 끝남이 완전한 끝이 아님을 소설은 이야기한다. 소설은 본래 인물이 다른 세계를 찾아 떠나는 배에 타는 것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소설의 결말이 죽음으로 끝난다. 그 세계에서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로의 이동을 해야 하는 일... 죽음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고 전혀 다른 시공간에 나타나게 된다. 다른 존재의 몸을 빌려서. 그렇다면 이 세계에 있는 존재는 또 어떤가? 다른 세계, 즉 밖을 꿈꾸는 인물들은 죽음으로 다른 세계로 간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굳이 육체적인 죽음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세계의 종교들이 대부분 거듭남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서 죽음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저 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경계를 넘는 과정을 거치는 과정이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천선란은 소설을 통해서 그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뿌리가 하늘로 자라는 나무'를 보아도 마찬가지다. 다른 세계를 잇는 존재는 이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 세계에 발을 딛고 있으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없다. 그래서 소설 제목은 '노랜드'다.


'두 세계'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이 근무하는 곳이 '노랜드'인데 땅이 아니다 또는 땅이 없다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곳. 이곳에서는 현실의 땅이 아닌 소설 속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것을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라고 한다면, 이 세계에 착 발붙이고 사는 존재들이 아니라 떠 있는 존재들이 나와야 한다. 그렇게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떠 있는 존재들이고, 이런 존재들이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각 소설들이 흥미진진하다. 재미도 있고, 무언가를 생각할 수도 있게 하고...작가의 말에서 '사랑하고 싶어 소설을 읽고,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듯 가끔은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으리라 믿으며 두 번째 소설집을 엮어 당신께 보낸다'(418쪽)고 하고 있다.


사랑을 하고 싶어, 삶을 알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는 말에 동의한다. 물론 더 지치고 싶어 소설을 읽는다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소설에 나타나는 삶들을 내 삶들과 연결지으면, 소설은 결국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경계'라고 할 수 있으니...


이쪽 저쪽을 다 살필 수 있는 소설. 지칠 수도 있겠다. 그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일이 될테니... 이런 경계의 체험, 새로운 문을 발견하는 일은 지치기도 하지만, 그 지침이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있으니...


작가의 말처럼 소설을 읽자. 이 소설은 작가가 말한 세 가지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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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3년 겨울호 - 통권 184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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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를 읽으면서 왜 영화 [서울의 봄]이 생각났을까?


  오지 않은 서울의 봄... 이런 생각을 하다가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도 생각났고.


  막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싶은 '서울의 봄', 아니 그해 겨울.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었을까? 여러 방법이 제시되었다. 분명 실현 가능했던 방법들이었고, 그 방법들 중에 몇 가지만, 아니 한 가지만 실현이 되었어도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겠지.


  방법은 있었고 실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못했다. 못했다고 하기보다는 안 했다고 보아야 하나? 안 한 이유는 너무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즉 '지피지기 백전불패(知彼知己 百戰不敗)'라고 했는데, 적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서 실패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미지 출처 : 서울의 봄 - 검색 이미지 (bing.com)


 세상에 반란군이 목숨을 걸고 진격하고 있는데, 평화협정이라니... 또 막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돌아서다니, 거기다 제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자리를 비우고 떠나다니,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의견을 묵살하다니...


그래서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고, '침묵의 봄'이 지속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지. 왜, 이번 호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보니, [녹색평론]이 늘 해오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기후 재앙이 아닌 생태 재앙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


우리 삶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결국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 계속해서 이러면 안 된다고, 바꿔야 한다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을 했는데도, [녹색평론]에서 한 주장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몸으로 겪고 있지 않나. 80년대 독재를 겪었듯이, 지금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기후 변화로 고통을 받고 있지 않나. 아주 다양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오래 전부터 제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 생태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으니.


그러니 최근에 봄 영화인 '서울의 봄'이 생각날 수밖에. 녹색평론이 영화 속에서 쿠테타를 막으려고 애쓰는 인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영화는, 역사는 순간의 패배로 10년 넘게 그들의 천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 10년 조금 넘었다면, 다행히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더 지속되지 않았지만, 기후, 생태 위기는 그렇지 않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 수도 있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녹색평론]은 계속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영화와 이번 호를 연결지으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두 편의 글 때문이다. 정성헌/이문재의 대담을 실은 글인 '중심이되 중심이 되지 말라'는 글에서 정성헌의 구체적 실천 지침이 몇 개 실려 있다. 그 중에 이런 것... 결코 포기하지 않는...


'상유십년(尙有十年)! 우리에게는 아직 10년의 시간이 있다. 3년간 해보고 1년 조정기를 거쳐 다시 3년씩 두 번 더 해보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177쪽)


이 말이 희망을 준다. 이번 호 앞부분에 실린 '윤석열 정부 농정 나침반은 어디로 향하나, 뉴미디 시대의 언론과 정치 권력'을 읽으면서 현실의 답답함을 이런 지침을 읽으며 희망이 있음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서평으로 실린 '마음과 행위로 숲 만들기<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라는 글... 난지도를 공원으로 만드는 과정을 쓴 책에 대한 서평인데... 지금은 하늘공원, 노을공원이 시민들이 많이 찾는 숲이 살아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쓰레기산이었을 뿐.


2012년에 1만 그루의 묘목을 심지만 단 한 그루를 남기곤 모두 죽었다고(254쪽) 한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12년간 3만 6,258명의 봉사자와 141종의 나무 13만 3,708그루를 심고 돌봤다고 한다.(255쪽)


앞에 언급한 정성헌의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아직도 우리에겐 10년의 시간이 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정성헌의 구체적 실천 지침으로 간다.


'시민을 넘어 천지인민. 국민 5% 즉 250만 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177쪽)


난지도라는 장소를 사람들이 찾는, 숲(자연-동식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장소로 만드는데 오랜 시간, 또 운동가 몇몇이 아닌 함께 하는 여러 사람들의 참여가 있었다. 그렇다면 난지도보다 큰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데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정치인 몇, 시민단체 몇이 아니다. 시민이 아닌 천지인민이라고 한 것은 보통 사람들의 참여, 국민 5%의 참여가 있다면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가? 아니다. 2016년을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힘이었다. 그때 모인 국민들 5%가 넘지 않았을까? 그러니 바꿀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다면 바꿀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그냥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 정치 상황뿐만 아니라 지구 차원의 환경(생태) 문제에 관련해서도.


그래서 영화 '서울의 봄'과 달리 [녹색평론] 이번 호에서는 희망을 본다. 


이번 호에는 최근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지상군 투입 등에 대한 글도 있다. 읽으면서 생각할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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