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채소롭게 - 작지만 단단한 변화의 시작은 채소였어
단단 지음 / 카멜북스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주로 채소를 다루고, 또 가능하면 집에서 만든 음식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가 아주 마음에 든 건 모든 것을 한방에 해결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완벽하게 옳고 완벽하게 무해하고 완벽하게 아름답기 위해 나를 잃고 싶지 않다. 나답게 조금씩 천천히, 이리도 가 보고 저리도 가 보면서, 나다운 일상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12-13쪽)'이라고 하고 있으니.


한때 자주 가던 음식점이 있었다. 음식점이라고 하기보단 술집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다. 주로 막걸리를 마시면서 곁들인 음식을 함께 먹었으니... 그 집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이 책에도 이런 말이 나온다. 이 말 때문에 그 음식점이 생각이 났는지도. 


약식동원(藥食同源)


약과 음식의 근원이 같다. 즉 음식이 약이라는 얘기다. 술집에 어울리는 말 같지가 않지만, 술을 약주(藥酒)라고도 하니,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분 좋게 다음날 무리가 가지 않게 좋은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여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 마시는 술이 어찌 독이 될 수 있겠는가. 그때 술은 약이다. 


그리고 주인장이 정성스레 만들어 내오는 안주 역시 약이다. 약식동원. 약과 음식은 같다는 생각으로 요리를 내오는 주인장의 마음이 요리에 깃들여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자주 가던 그런 음식점이었는데...


꼭 술이 나쁘다고 마셔서는 안 된다고, 육식이 나쁘다고 채식만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육식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야기하고 있고, 또 음식을 바깥에서 사먹는 과정에서, 사오는 과정에서 탄소 발생이야 차치하더라도 수많은 쓰레기가 만들어지고 있음은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도 알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그렇게 생활하는 것은 잘못되었어, 당장 고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채식만을 하는 사람들로 이 지구가 채워질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육식을 끊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기맛이 난다는 콩고기 등 대체육을 개발하고 있는 지경이니, 누구나 똑같을 수는 없다.


모두가 채식하는 사회도 상상하기 힘들듯이 모두가 육식하는 사회도 힘들다.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채소를 먹는다. 안 먹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정도의 문제가 되지 않을까.


완전한 하나는 없다고 보면 수많은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그런 다름의 인정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 책에서 언급하듯이 채식주의자라고 하면 모든 음식을 채식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았을 경우 죄책감을 느끼거나 비난을 받는 경우가 있는데,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까?


자신의 식습관을 하루 아침에 바꾸라고 말하는 것 또한 폭력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폭력은 채식과 가장 거리가 먼 것 아닌가?


좋은 것을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에게 있다. 함께하면 된다. 강요가 아니라. 상대가 싫다고 하면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다. 다만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면 된다. 또한 어느 순간 상대 역시 조금씩 변해갈 수 있다고 믿고 지내면 된다.


내가 좋아하고 즐기는 모습을 보이면서 상대와 자연스레 어울리다 보면 상대도 나도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이 책은 채소를 통해서 그런 과정을 거친 자신의 경험담을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강요가 아니라 나는 이렇게 지내고 있어요라고 소곤거리듯이 말하는 듯한 책이다.


그래서 더 설득력이 있다. 강요하지 않으니 묘하게 함께하고픈 마음이 든다. 채소를 먹는다는 일은 자연과 함께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냥 채식이라고 해서 채소만 먹는 식생활이 아니라 공업과 비슷하게 생산된 채소들이 아니라 제철에 나오는, 키우는 사람들의 정성이 배어 있는 그런 채소를 먹는 일이라는 것을...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외식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외식도 한다. 채식 식당도 많이 늘었다. 또한 고기도 먹는다. 완전히 거부하지 않는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먹는다. 어느 하나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이 저자가 말하는 '채소로운' 식생활을 하면서 익히게 된 삶의 방식이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편하게 해준다. 자연스레 어울리면서 생활이 변하게 된다. 쓰레기를 만들어내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지만 그것을 상대에 대한 비난이나 강요로 만들지 않는 사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조금씩 해나가는 사람, 그리고 함께할 수 있으면 함께하는 사람. 비난보다는 개선이 될 수 있게 비판을 하는 사람. 이것이 바로 '채소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엔 그런 삶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읽는 것으로도 음식을 먹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배가 부르다. 영양을 채웠으니 움직이고 싶어진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서두르지 않고 해나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한다.


약식동원이다. 이 책 역시 약이다. 쓴 약이 아니라 달디 단 약. 참고로 이 책은 채소로 요리하는 법도 나와 있으니 채소 음식 레시피로 이용해도 된다. 눈으로 읽고 마음에 지식을 채우고, 채소를 사서 직접 손으로 요리해 자신의 몸에 영양을 공급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니아 나라 이야기 세트 - 전7권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스토리 북스)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권 --- 마법사의 조카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첫권이다. 영화 나니아 연대기를 봤다면, 이 첫권은 좀 생소할 것이다. 주인공이 영화와는 전혀 다르니 말이다. 그렇지만 첫권은 바로 나니아의 시작이다. 나니아라는 나라가 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나니아에서 놀라운 모험을 하는 네 남매의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다. 그러니 이 첫권은 나니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곳에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 또 마법의 옷장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디고리와 폴리가 등장한다. 디고리의 외삼촌이 만들어낸 반지로 다른 세계로 가게 된 아이들. 이 아이들이 다른 세계에서 아슬란이라는 사자를 만나고, 아슬란이 나니아를 창조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젊음, 생명의 사과 - 창조와 사과, 또 아슬란은 아담의 아들, 이브의 딸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니, 이 부분만 보면 기독교적 요소가 많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조론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정확히 사과라고는 나오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사과라고 하니, 그 사과가 첫권에 등장하는 것은 기독교 문화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가 나온다.


이 사과를 가지고 와 엄마의 병을 고치는 디고리... 그가 남은 사과 몸통을 정원에 심었더니, 곧 사과나무가 되고, 나중에 사과나무가 쓰러졌을 때 디고리가 그 나무를 가지고 옷장을 만든다는 내용으로 첫권이 끝난다.


그러니 첫권은 다음에 전개될 나니아 모험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마법의 반지가 아니라 옷장을 통해서 나니아로 가게 될테니 말이다.


아마도 첫권은 나중에 쓰여졌을텐다. 해설을 읽어보면 이 전집 2권이 먼저 쓰였다고 하니 말이다. 2권부터 시작하기에 개연성이 약하니, 아이들이 나니아로 가게 만들기 위해서 옷장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것이 왜 디고리 교수의 집에 있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야 했으리라.


하여 첫권은 나니아 나라 이야기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다른 아이들로 인한 모험이 시작된다.


2권 --- 사자와 마녀와 옷장


영화로도 만들어진 부분이다. 네 남매의 모험이 그려진 부분. 마녀와 대결하여 승리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런데 여기서 아슬란의 희생과 부활이 나타난다.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대속하기 위한 아슬란의 행동. 기독교를 떠올리게 하는데, 결국 정의는 승리한다고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들, 하지만 두려움에 굴복하기 보다는 두려움을 딛고 나아갈 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음을 이번 편이 보여주고 있다.


마녀의 겨울에 맞서는 네 남매의 모험이 자세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마녀로 인해서 고통받는 세계, 그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는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네 남매의 모험이라고 하지만 아슬란을 중심으로, 나니아에 거주하는 존재들의 이야기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급상황에서도 일상을 유지하려는 비버 부인이라든지, 자신에게 온 손님을 환대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3권 ---  말과 소년


  이번에는 나니아가 아닌 칼로르멘이라는 나라에서 나니아로 가는, 정확히는 아첼랜드로 가는 여정이 나온다.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나니아에서 칼로르멘으로 납치된 말이 둘 나오고, 여행을 함께 하게 되는 아라비스라는 소녀도 나온다. 


  샤스타에서 코르가 되는 이야기. 칼로르멘에서 나니아 이웃인 아첼랜드의 왕자가 되는 아이. 그 과정에서 겪는 모험. 그리고 이 모험을 전부 주관한다고 할 수 있는 아슬란.


  어디서 많이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 같지 않은가. 샤스타는 배로 강을 따라 내려오다 어부에게 발견이 된다. 버려진 아이, 구출, 그리고 탈출. 이런 과정은 보통 영웅이야기에서 많이 나온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가 자신을 찾는 이야기. 샤스타가 코르가 되는 과정이 바로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신만의 성공이 아니다. 칼로르멘이라는 나라의 위협으로부터 아첼랜드를 구해내는 역할을 하게 되니, 이는 거대한 성장 서사가 된다. 


이런 구절이 있다.


'샤스타는 선한 일을 하면 그 대가로 항상 더 힘들고 막중한 일이 기다리게 마련이라는 걸 아직 배우지 못했던 것이다.' (170쪽)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선한 일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더 선한 일들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게 나니아 이야기 3권은 한 아이의 성장으로 끝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 우리가 이야기에서 기대하고 있는 결말이다.


이 이야기에서 '모세'가 떠오르는 것은 나만 그런 걸까? 아닐 것이다. 첫권이 천지창조라면, 두 번째 이야기는 인간의 죄를 대신해 죽는 대속이 나온다면, 3권은 모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 이야기가 순서대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이 이야기에서 성경의 이야기, 또는 교훈을 떠올리기는 쉽다.



4권 ---- 캐스피언 왕자


나니아도 세월이 흐른다. 천년 왕국이 있기는 힘들다. 평화롭던 나니아 역시 다른 왕조로 바뀐다. 왕조의 흥망성쇠야 역사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문제는 왕조가 교체되면서 나타나는 차별과 탄압이 문제다.


융합이 되면 모르겠지만, 기존 문화, 관습을 바꾸려는 과정에서 저항이 일어나고, 그 저항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폭력은 차별을 낳고, 차별은 억압으로 이어지면서 또다른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다시 왕조 교체가 일어날 시기가 온다. 나니아가 그렇다. 이번 권에서는 나니아가 텔마르 사람들에게 정복당한 이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텔마르를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니아 이야기에서는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따지지는 않는다. 그가 어떻게 통치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러니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피터, 수잔, 에드먼드, 루시가 나니아를 다스릴 수 있었던 것.


캐스피언 왕자 역시 텔마르 출신이다. 그렇지만 그는 나니아의 전통, 문화를 존중한다. 그러니 그는 통치자가 될 자질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그의 고난과 성공 과정이 펼쳐진다. 그냥 나니아의 통치자가 될 수는 없으니, 이 과정에서 피터 등이 다시 등장한다. 캐스피언이 성공하게끔 도와주는 조력자로서. 그리고 이번 권에서는 피터와 수잔이 다시는 나니아로 돌아올 수 없음을 밝힌다. 그들은 나니아로 올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고.


이번 권을 읽는 아이들에게는 출신보다는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자신의 출신을 고집하는 난쟁이가 있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난쟁이도 있으며, 작은 몸집으로도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난장이들이 나오니 말이다. 게다가 텔마르의 이방인이라 할 수 있는 캐스피언조차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통치자로 받아들인다.


이는 출신이나 신체, 피부색 등이 그 존재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은영 중에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게다가 가장 어린 루시의 눈에 먼저 아슬란이 보이고, 나무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는 점에서 순수한 마음, 열린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또한 이번 권은 톨킨이 쓴 [반지의 제왕]과 비슷한 점도 있다. 압도적인 무력 우위를 보이는 집단에 대항해 나무들이 함께 하는 것. 반지의 제왕에서는 엔트라고 나오는데, 이 책애서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즉, 순수한 마음, 정의로운 일에는 모든 존재들이 함께 함을 보여준다.


5권 ---새벽 출정호의 항해


  이번 권은 바다 여행이다. 4권에 나왔던 캐스피언 왕자가 숙부에 의해서 쫓겨난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에드먼드와 루시, 그리고 유스터스와 함께하는 과정이 나와 있다.


  모험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면, 이번 권에서는 유스터스의 변화가 눈에 뜨인다. 


  남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제 감정대로만 행동하려 했던 유스터스. 그러나 모험을 통해서 남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용으로 변했을 때 이 점을 깨닫게 되는 데, 탐욕이 눈을 가리고, 자신을 다른 존재로 변화시킨다는 점을 알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캐스피언 역시 아버지를 옹호하던 기사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일들을 겪는다. 가령, 노예제를 알게 되고,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지경에 처해 있는가를 몸소 체험하게 되며, 탐욕으로 금으로 변해버리는 모습도 보고, 두려움으로 인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때 그곳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이번 권은 여기까지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여기까지라는 말은 자신이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멈춘다는 말이다. 이는 잠을 자는 것과 같다. 자신은 만족해서 잠을 자겠지만, 남들이 보면 더이상 무언가를 하지 않는 상태에 불과하다.


즉 사람들은 계속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삶을 완성할 수 있다. 새벽 출정호의 모험은 생쥐 리피치트를 통해서 그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6권 ---은의자


  또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이번에 등장하는 인물은 이 세계에 있는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질. 그리고 전 권에 나왔던 유스터스


  질은 다른 학생들의 괴롭힘을 피해 있다가 유스터스를 만난다. 그리고 둘은 나니아로 여행을 떠난다. 이번에는 사라진 왕자를 찾기 위한 모험.


  사라진 왕자를 찾는 과정에서 아슬란이 준 힌트가 있고, 그 힌트를 잘 따라가야 하는데, 막상 일에 닥치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세상 일이 어디 뜻대로 되겠는가?계획한 대로만 일이 되면 좋겠지만, 늘 현실은 계획을 넘어선다. 이들의 모험도 그렇다. 


  나니아 이야기의 전 편들이 그렇듯이, 이번 편에서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인물이 등장한다. 어떤 생물이라고 말하기 힘들지만, 여기서는 마슈위글이라는 종족이라고 하는데, 이름은 퍼들글럼이다. 셋이서 떠나는 모험.


유혹에 굴복하기도 하지만 결국 이들은 지하세계에 갇혀 마법에 걸려 있는 왕자를 만나고, 마녀를 퇴치한 뒤 나니아로 돌아온다. 


거인들에게 잡혀먹힐 뻔하기도 하고, 지하세계를 탐험하기도 하는데, 이는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위험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위험을 이겨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현실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음을 '은의자'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질과 유스터스가 겪은 일들을 이야기라고 한다면, 질은 이야기를 통해서 현실을 이겨낼 힘을 키워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온갖 위험이 있는 모험 이야기. 그런 모험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서는 늘 성공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어려운 지경에 빠지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으로 또는 포기하고 굴복하지 않는 마음으로 이겨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힘을 얻게 된다.


6권을 읽으면서는 이런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7권 --- 마지막 전투


  나니아 나라 이야기 마지막 권. 나니아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 

                              

  나니아의 멸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은데, 이것은 현세에서 내세로 넘어가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현세가 멸망하기 위해서는 혼란이 계속되어야 한다. 혼란을 부추기는 인물이 나온다. 원숭이 시프트가 그 인물인데, 이 원숭이는 우연히 얻은 사자 가죽을 당나귀에게 씌워 아슬란인 척하게 하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얻는다.


  마치 적그리스도를 연상시키는 그런 발상. 그리고 혼란, 전쟁. 결과는 나니아의 멸망.


  단지, 나니아의 멸망으로 끝났으면 아이들에게 읽히기 힘들었으리라. 그래서 이야기는 새로운 세상으로 끝난다.


그동안 나왔던 인물들이 모두 나와 한자리에 모인다. 이들은 이제 새로운 세상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천년왕국. 그것이 생각난다. 굳이 기독교 식으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현세를 벗어난 내세가 펼쳐진다.


즉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그것은 현실이 불만족스러울수록 더욱 강하게 자리잡게 된다.


현실과 다른 세상을 꿈꾸면서 현실을 바라보게 되면, 새로운 세상을 위해 한걸음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세상,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 이야기의 힘이다.


7권까지 오면서 많은 모험이 펼쳐지지만,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바로 선(善)이다. 선을 추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7권까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나니아라는 환상 속의 나라에서 펼쳐지는 모험. 그 모험을 통해 성숙해가는 아이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게 될 아이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그런 이야기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준 [나니아 나라 이야기]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트러블과 함께하기 - 자식이 아니라 친척을 만들자
도나 해러웨이 지음, 최유미 옮김 / 마농지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관점을 확 바꿔주는 책이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다른 생물체들의 생존에도 위협이 되는 시기라서, 이를 인류세라고 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어느 정도 타당하다. 환경 파괴, 지구 파괴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일이라서 자본세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다. 역시 타당하다.


그런데, 인류세나 자본세에는 현상을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내는 데는 유용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데는 별로 힘을 쓰지 못한다. 너무도 거대한 체제와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인류는 성장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늘 언론에서 접하는 성장률에 관한 기사들을 보라. 성장이 안 되는 인류가 망하는 것처럼 서술된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에 인구 감소가 심각한 문제라고 주장하는 글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구도 계속 늘어나야만 한다고 하는 발상은 성장주의 발상이고, 인류중심주의 발상이다. 이런 관점이 바뀌지 않는 한, 인류세, 자본세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들이 말하는 인류세, 자본세의 틀 안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 끝부분에 실린 카밀 이야기를 읽어보라. 해러웨이는 인류가 계속 늘면 그것은 공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카밀 5세에 가서 인류 인구를 30억으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이때 해러웨이는 '쏠루세'를 주장한다.


'사람들이 그것의 일부이고, 그 속에서 지속성이 위기에 처한, 역동적이고 지속적인 공-지하적symchthonic 힘과 권력을 위한 이름. 어쩌면, 단지 어쩌면, 다른 지구인들과 함께하는 진지한 헌신과 협동적인 일과 놀이가 동반돼야만, 사람들을 포함한 풍부한 복수종 무리를 위한 번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과거, 현재, 그리고 다가올 것으로서) 쏠루세 Chthulucene라고 부르겠다.' (173-174쪽)


즉 시 쏠루세에는 일방이 없다. 무조건적인 조화도 없다. 트러블이 있다. 갈등이 없을 수가 없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죽음은 삶과 떨어져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생성과 파괴도 함께해야 한다. 생성을 위해서 파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쏠루세라는 말을 가장 잘 드러내는 비유가 바로 퇴비다. 퇴비는 죽은 것들과 산 것들이 공존하는 세계다. 이 공존을 통해 새로운 것으로 나아간다. 바로 쏠루세가 그렇다.


이런 쏠루세를 받아들이면 지금 원인 분석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려움과 함께하기 때문에, 실천이 늘 동반된다. 그것도 어느 한 종의 우세로서의 실천이 아니라 여러 종들이 함께하는 실천.


해러웨이의 이 책을 읽다보면 인구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솔닛이 [야만의 꿈들]에서 말했던 원주민들이 불을 질러 나무들을 불태우는 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에 대해서도.


다른 종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본다. 즉, 얽히고 얽혀서 새로운 매듭을 만들어 내는 실뜨기처럼 우리들의 삶도 그래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종과 어울려 살다보면 자연스레 자식이 아닌 친척을 만들게 된다. 즉,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생물학적 자손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든 종들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쏠루세'라는 개념에 들어있는 실천이고, 해러웨이가 말하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다. 바로 퇴비의 삶이기도 하고.


다양한 종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이 터무니 없는가? 아니다. 우리는 예전에 다양한 종들과 함께 살아왔다. 하다못해 귀신, 정령들과도 함께 살아오지 않았던가. 즉, 삶과 죽음이 함께하고, 다양한 종들이 함께 했었다.


어린 시절 이야기들을 보면 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나니아 나라 이야기]를 봐도 말하는 동물들이 나오고, 나니아에서는 모든 생물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또 [샬롯의 거미줄]을 보라. 어린 시절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던 시절이 있다. 그것을 스스로 삭제하고 살아온 것이 현대인들의 삶, 즉 인류세와 자본세를 살아온 인간들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라는 장소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살기 힘든 장소가 될 테니... 해러웨이의 글들 읽을 필요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만의 꿈들 - 장소, 풍경, 자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양미래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닛의 글들은 여러 생각할거리를 준다. 단지 생각할거리가 아니라 실천해야만 하는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는 걷는다. 그냥 걷는 것이 아니다. 걸으면서 문제를 만나고, 문제에 대응을 한다. 걷기는 개인적인 행위이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행위이기도 하다.


이 책은 네바다 사막과 요세미티 공원을 장소로 하고 있다. 물론 솔닛은 이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이 장소들을 걷는다.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기 위해서.


솔닛에게 걷기는 '문제를 향해 걷는 행위는 책임을 지는 행위, 되돌리는 행위, 기억하는 행위다. 걷기 운동가들은 과거의 짐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진 채 핵폭탄 수백 개의 낙진이 있는 고국으로 걸어간다.(492쪽)'고 하듯이, 문제를 알고 해결하려는 행위다.


네바다 사막을 장소로 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네바다 사막은 미국이 핵실험을 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핵실험을 하기 전에 이곳에는 사람이 없었을까? 아니다. 단지 모래만이 펼쳐진 자연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던 장소였다.


하지만 정부는 네바다에서 사람들을 소거했다. 그곳은 사막이어야 했다. 먼저 살고 있던 사람들이 없는 그런 사막. 그래야만 핵실험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방사성의 위험을 알릴 필요도 없이. 하지만 아무리 넓은 사막이라도 방사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방사능이 한 곳에만 머무를까?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솔닛은 네바다로 간다. 네바다를 자유롭게 걷고자 한다.


핵실험장으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올 수 없게 울타리 처놓은 곳으로 솔닛은 간다. 울타리를 넘는다. 체포된다. 또다시 걷는다. 체포된다. 그곳은 사람들이 걸을 수 없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이 살지 않던 곳이 아니다.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던 장소였다. 그런 장소를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솔닛은 걷는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요세미티 공원도 마찬가지다.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는 오래 전부터 살아오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원주민이라고 불러도 좋다. 미국 정부가 그들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해도 존재했던 사람들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또 솔닛은 걷는다. 이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한 장소는 불모의 사막이라고 할 수 있고, 또 한 곳은 자연이 살아 있는 공원이기는 하지만, 솔닛은 이 두 장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아니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들이 없는 것처럼 두 공간을 인식하도록 했는지를...


따라서 솔닛과 다른 사람들이 그 공간을 걷는 행위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그렇기에 솔닛의 글을 읽으며 우리는 네바다와 요세미티에서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걷기는 문제와 대면하는 행위라고 했다. 솔닛의 이런 걷기가 끝났으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걷기는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만 봐도 그렇다. 


삼보일배, 오체투지... 그냥 걷는 것이 아니다. 온몸을 던지면서 걷는다. 왜? 그냥 걸으면 봐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몸을 던져야 겨우 그제서야 아, 사람들이 있구나! 사람들이 걷고 있구나! 무슨 문제가 있구나! 한다.


솔닛이 걷고 또 걸었지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았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온몸을 던지면서 걸어도 문제를 없는 것처럼 나 몰라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홀로 걷지 않고 함께 걷는다면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다.


문제가 보이지 않을 수가 없다. 문제가 보이면 해결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걷기는 문제를 우리 앞에 가져다 놓는다. 


솔닛이 말하듯이 걷기는 바로 책임을 지는 행위, 기억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현대를 이끌어간다고 하는 과학자들, 기술자들 역시 걷기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솔닛이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걷기의 장점이 현대 과학자들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유럽 물리학자는 고전 교육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과학은 물론 정치, 시, 음악에도 일가견을 가진 엄청난 교양인이었다. 그들의 산책은 풍경 감상, 낭만주의적이고 괴테적인 전통에 따른 자연 숭배, 허물 없고 위계적이지 않은 소크라테스적 전통에 따른 걷기, 사무실이나 교실에서가 아니라 길 위에서 걸으며 나눈 대화 등에 대한 취향을 분명히 보여주기도 했다.'(180쪽)   

   

단지 과학 분야만 그럴까?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들, 걷기를 통해서 공간과 시간, 인간이 합쳐진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 점을 솔닛의 글이 다시금 깨우쳐 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4-01-16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공간은 걷는 행위는 그 공간에서 사람들을 인식하는 행위이다. 공간을 장소로 만드는 일이다˝
이 문장에 꽂혀서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kinye91 2024-01-16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솔닛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해요. 특히 ‘걷기‘에 대해서는 더더욱요.
 
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날 아침 영리하지만 전혀 심오하지는 않은 짐 샘스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거대 생물체로 변신해 있었다.' (13쪽)


카프카 [변신]에서 게오르그 잠자가 깨어났더니 벌레로 변해 있었다는 문장을 상기시킨다. 그렇게 시작은 변신으로 시작한다. 무엇이 변신했다는 말인가? 첫문장을 보면 잘 알 수가 없다. 카프카처럼 사람이 다른 존재로 변신한 것일까? 아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곧 사람이 다른 존재로 변신한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사람으로 변신한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짐 샘스는 사람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 바퀴벌레 이름이다. 그리고 그가 변신한 거대 생물체는 바로 인간이다. 그것도 영국의 수상.


마찬가지로 다른 각료들도 바퀴벌레들이 변신한 존재로 나타난다. 몇 각료를 빼고는. 하지만 본래 인간이었던 장관은 그들의 세상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바퀴벌레로 장악된 정부에서 역방향주의가 통과가 된다.


그렇다면 역방향주의란 무엇일까? 지금까지 해오던 것과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어떤 것? 설명을 보면 이 소설은 영국의 브렉시트를 풍자하고 있다고 한다.


즉, 영국의 브렉시트는 세계가 나아가는 방향과 반대 방향이고, 그것이 과연 영국민의 행복을 보장할까에 대한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바퀴벌레의 변신으로 나오고, 또 그들의 정책이 역방향주의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브렉시트에 반대하고 있다.


여기에 미국 대통령으로 나오는 인물은 누가 읽어도 트럼프를 연상시키고 있으니, 영국과 미국에서 벌어진 경제 정책이 국민의 행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소설의 끝부분을 보라. 과연 역방향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생각하게 하는데...


'우리는 우회적인 수단을 통해, 그리고 많은 실험과 실패 끝에, 인간의 파멸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전쟁과 지구온난화는 확실한 전제조건이고, 평화로운 시기에는 고착화된 계급, 부의 집중, 뿌리 깊은 미신, 루머, 분열, 과학과 지성과 낯선 이들과 사회적 협력에 대한 불신을 꼽을 수 있지요.' (123쪽)


이 말은 역방향주의는 개방이 아니라 폐쇄로, 협력이 아니라 갈등으로, 다수의 이익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한 정책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다음 구절을 보면 역방향주의가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알게 된다.


'역방향주의라는 광기가 일반 대중을 더 가난하게 만들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 우리는 번성할 것입니다.' (123쪽)


이때 바퀴벌레를 우리가 아는 바퀴벌레로 생각하지 말자. 보통 사람들에게 기생해 사는 존재로 보면, 대다수의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바퀴벌레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바퀴벌레들의 농간을 간파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삶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잘 보여준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잠자는 결국 죽음에 이른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그들은 성공해서 의기양양하게 돌아간다. 자신들의 보금자리로...


그런데 이 소설에 나오는 미국 대통령이 왜 트럼프만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까?  이 소설에 나오는 바퀴벌레와 같이 변신한 종족들이 우리들의 삶을 파탄으로 몰아가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이 소설이 꼭 영국의 브렉시트를 풍자한 소설로 국한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드니, 소설을 읽으면서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