쿄코와 쿄지
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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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평탄해 보이지만, 그러한 평탄 속에는 수많은 주름이 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춰진 주름들. 어쩌면 우리들의 삶은 그런 주름들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주름을 틈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틈들을 가리려고만 해서는 진실을 볼 수 없다. 삶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틈들을 인식하고, 그 틈들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온전한 삶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틈, 주름들을 가리려는 세력들이 있다. 기득권을 지닌 세력, 그들은 주름이 드러나는 순간 자신들의 허위가 밝혀지고, 허위로 누리고 있던 권력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주름이 드러나지 않게, 틈이 나타나지 않게 가리고 메우려 한다.


권력자의 말은 권력 없는 사람들의 말을 억압하고, 말이 발화되지 못하게 한다. 말을 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권력을 지닌 자다. 그렇게 권력을 지닌 자들은 약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그렇다고 약자들이 언제까지 침묵만 하고 있을 순 없다.


그들이 겪은 주름들을 펼 수 있어야 한다. 주름들을 펴서 그들 역시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리베카 솔닛의 말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연대가 필요하다.


침묵이 아닌 말하기는 연대를 통해서 나오게 된다. 그런 연대는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공감의 언어, 진실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의 언어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소설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첫작품에서 '나의 언어 나의 이름'(42쪽)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렇게 언어,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스로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름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도 사회적 제약이 만만치 않다. 권력의 힘은 이들이 자신의 언어, 자신의 이름을 갖길 원하지 않는다. 단지 원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억압하고 배제한다. 철저하게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그래서 약자들은 역사에서 드러나지 않게 된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은 권력을 쥔 자들이거나 한때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다. 어떤 사건을 언급할 때 이름이 불리는 사람들이 그렇다.


한정현은 이것을 거부한다. 한정현은 소설을 통해서 자신의 언어를 쓰지 못하는 사람들, 이름을 내세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틈, 주름에서 그들을 나오게 한다. 주름으로 감춰져 있던 사람들, 삶들을 펼쳐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들의 삶이 더욱 다양함을, 더 많은 삶들이 감춰져 있음을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단지 보여줌을 넘어 연대를 통해 그들이 주체로 서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소설집의 끝에 실린 에필로그에서 인물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떠나올 때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떠나올 때와 다른 모습으로.


소설집 제목이 된 '쿄코와 쿄지'만 봐도 그렇다. 두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아니다. 한 인물이다. 쿄코와 쿄지는 모두 경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글로는 같은 경자지만 한자어로 쓰면 다르다. 남녀 차별이 있던 시대에 동등한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네 명의 친구는 모두 이름에 '자'를 넣기로 한다. 아들이 아닌 스스로 자(自). 이는 남의 눈에 비친 삶이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하지만 '자'로 살기는 힘든 세상이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신부'들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수녀'들에 대한 언급은 없듯이, 운동권에서도 앞에 나섰던 많은 남성 운동권 지도자들은 언급이 자주 되지만, 뒤에서 그들을 받쳐준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은 잘 언급되지 않듯이, 또 삼풍백화점에서 묵묵히 일해야 했던 많은 여성노동자들, 용산 참사에서도 언급되지 않는 인물들, 부마항쟁도 마찬가지로 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을 하나의 주체로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자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건너가 경자라는 이름을 말했을 때 행정을 담당한 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경자의 자를 아들 자(子)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쓴다. 이 이름이 일본어로 쿄코다. 하지만 경자는 스스로 '자(自)'자를 쓰고 싶어한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침묵을 강요하는 권력 앞에서 아직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스스로 자(自) 자를 쓰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과정이 다른 소설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 각기 다른 단편들이지만 읽다보면 인물들이 서로 얽히게 된다. 관계를 맺는다. 즉 약자들의 연대, 감춰진 사람들의 연대가 소설 속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의 삶을 주름으로부터, 틈으로부터 꺼내게 된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 하나로 엮여 나타나는데, 명확히 서술하기보다는 인물들의 삶에서 접힌 주름들을 펴면서 우리에게 그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직면하게 한다. 그 펴진 주름도 다 펴진 것이 아님을, 그래서 더욱 깊은 울림을 주는 소설들이 실려 있다.


한정현의 전작에서도 그렇지만 '낙관하자!'를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언어를 당당하게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음을, 소설집의 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또 그들이 기억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될 테고 그것으로 충분할 것도 같았다. 나 또한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버엔 그들에게 내가 공부했던 부산에 대해, 부산에서 바라봤던 광주에 대해 말해볼까 싶었다.' (451쪽) 


이렇게 자신의 언어를 찾은 사람,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람. 바로 그들이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언어로 말을 하기까지는 수많은 약자들의 연대가 있었음을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작가 중 좋아하는 작가로 한정현을 꼽을 수 있게 만드는 작품집이기도 하고... 기존의 작품들과 연결이 되기도 하니, 읽으면서 한정현 작품들을 곱씹게 되기도 하는 소설집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으면서 경자(京子)가 아닌 경자(京自)들이 있음을, 우리는 그러한 경자들을 주름과 틈에서 나오게 해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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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62-1985 - 생명의 씨앗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유혜인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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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발표된 연대 순으로 묶었기에, 이번 권에서는 1962년부터 1985년까지의 작품이 실려 있다. 영화 '듄'을 보지 않았고, 소설 '듄'도 읽지 않았기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몰라서, 듄의 세계관을 드러내는 단편들이 있다는데, 그것이 내게는 큰 의미를 주지 않았다.


그냥 SF소설이라고, 그런 소설들이 시대와 배경만 다르지 우리 인간들의 삶을, 인간 사회를 표현하고 있다고 여기고 읽을 뿐이다. 이 소설집도 다양한 배경,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인간이 만약 다른 행성으로 이주를 한다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 두 편이 마음에 남는다.


하나는 '생명의 씨앗'이고 또 다른 하나는 '피아노 수송 작전'이다. 둘 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낯선 곳으로의 이주를 주제로 삼고 있다.


만약 우리가 낯선 우주의 다른 행성에 정착해 살아야 한다면 과연 지구와 똑같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 그 행성을 지구와 똑같이 만들어야 할까? 오히려 그 행성에 인간이 맞춰야 하는 것 아닐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 '생명의 씨앗'이다.


철저한 조사를 통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지닌 행성을 발견하고 인간들이 이주해 살아가도록 한다. 초기에 정착하기 위해서 지구에서 씨앗들을 가지고 간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행성에서는 지구의 씨앗들이 살아남지 못한다. 다른 생명들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은 왜 그럴까 고민한다. 그리고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게 살아남은 생명체인 '매'에게서 답을 찾는다. 그렇다. 정착한 행성을 지구와 똑같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행성에 인간들이 적응해야 하는 것이다. 식물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다. 이것이 진화 아니겠는가.


진화론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려 할 때 지구와 똑같은 조건, 똑같은 생물들로, 지구에서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하면 과연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지구와 완전히 똑같을 수 없다. 그 행성은 그 행성대로 수억 년 또는 수백 억년 동안 자신의 환경을 구축해왔다. (현재 우주의 역사를 약 138억 년이라고 하니, 그에 맞추면)


그렇다면 그 행성은 그 행성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 있다는 말이다. 지구에서 씨앗을 가져갔다고 해서 지구에서와 같은 성장을 바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행성에 맞는 성장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그 행성에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


바로 지구에서와 다른 선택을 한 호니다와 크로다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 중심주의를 고수하는 과학자들은 그걸 인정 안 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서처럼.


'과학자들은 인정하지 않을 문제였다. 그들은 이곳을 또 다른 지구로 만들려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 행성은 지구가 아니었고, 지구가 될 수도 없었다. 들여온 생물들 가운데 매가 가장 먼저 이 사실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크로다는 그렇게 생각했다.' (429쪽)


과학자라면 지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진화의 경로를 인간들이, 다른 생물들이 밟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틀에 갇힌 과학자들은 다른 행성을 지구에 맞추려 할 것이다. 바로 이 소설에서 비판하고 있는 과학자들처럼.


하지만 생활에 밀착한 사람들은 과학자와 다른 것을 발견한다. 소설의 크로다가 발견한 것처럼, 그들은 지구가 아닌 행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자신들이 바뀌어야 함을, 지구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살아가려 한다.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는 다른 행성에 이주한 인간들이 마주칠 일들이다.


'피아노 수송 작전'은 이주하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기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하는가? 우주선에 실을 짐의 무게가 정해져 있다면... 


전혀 낯선 곳으로 가는 인간들이 꼭 가지고 가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과연 여기에 예술이 포함될까? 작가는 당연히 필요하다고 본다. 예술은 인간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다른 행성으로 가더라도 예술도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는 무게가 너무 많이 나간다. 물론 그곳에서 조립을 하면 된다. 그러나 과거에서부터 전해져 온 예술품과 같은 피아노라면? 완전히 다 가져가지 못한다면? 일부라도, 아니 과거를 인식시키는 부분이라고 가지고 가야 하지 않을까?


피아노의 무게 때문에 가지고 갈 수 없다고 하지만 자식이 이 피아노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느낀 부모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니, 숨겨서 가져갈 수 없기에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도 조금 양보해야 하고.


이런 과정이 이 짧은 소설에서 펼쳐지고 있는데, 아직까지 화성도 가보지 못한 인간이 낯선 은하로 가서 살아야 한다면, 정말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갈까? 그런 이주에는 무엇이 필요할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밖에도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소설들이 꽤 있다. 타임머신을 생각하는 소설도 있고, 과거에서 사람을 데려온다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도 있고. 


무엇보다도 앞에서 언급한 두 소설처럼 우리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들이 있어서 좋다. 그것이 소설이 보여주는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소설을 읽으면서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도 한다.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듄]을 읽어봐야겠다. 적어도 그의 세계관을 잘 드러낸 소설이라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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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 - 통권 186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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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생태를 중심으로, 지구에서 인간이 지속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살피는 책이다. 


삶에서 꼭 지녀야 할 태도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기도 한데, 생태위기라는 말은 많이 한다. 지금 기후만 봐도 그렇다.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기후 변화가 아니라, 예측불능의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더욱 걱정이 되는데, 기후는 생태, 환경과 잘 연결이 되지만 의료는 생태, 환경과 잘 연결이 안 된다. 그러다 이번 호를 읽으면서 아, 의료도 바로 생태, 환경 문제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긴 인간의 삶에서 생태, 환경과 관련 없는 분야가 어디 있겠는가. 정치나 경제도 생태,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의료 또한 마찬가지다.


의사들이 진료거부를 하고 나서는 지금, 단순히 그들의 진료거부를 비난하기에 앞서 우리가 원하는 의료는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리나라 의료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 이를 단순히 의사 수 부족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의사 수를 늘리는데 반대할 필요는 없다. 의사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의사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게 수요와 공급 법칙을 생각하면 공급이 늘면 수요에 여유가 생겨 가격이 내려간다. 의사 수가 많으면 사람들이 진료를 더 쉽게 받을 수 있고, 의료비용도 줄어들 수 있다. 이건 참 단순한 발상이다. 오히려 의료 수가는 올라갈 수 있다. 자신들의 손익비용을 맞추기 위해 비급여 진료를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의사 수를 이대로 두자는 말은 아니다. 녹색평론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나라 의사 수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 적다고 한다. 이건 객관적인 지표라고 하니 의사 수를 늘려야 하는 방향은 맞다)


그러니 지금의 의료 문제를 단지 의사 수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공공의료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의사 수에 있지 않다.


공공의료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의사가 사람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 병원이 거대한 성채처럼 사람들의 삶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의사가 있어야 한다. 굳이 병원이 아니어도 된다.


진료와 치료가 이루어질 수 있는 장소면 된다. 이런 장소가 있으면 치료가 중심이 아닌 예방이 중심이 된다. 즉 환경과 생태 파괴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질병들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이것이 의료가 생태, 환경과 연결이 되는 지점이다.


그러니 의료는 환경을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삶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그들과 어울리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여기서 의료 개혁이 시작되어야 한다.


지금 지방은 의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진료를 받기 위해서는 멀리 도시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문제다. 또한 의료 활동이 주로 사적인 병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공공의료 자체가 이미 부족하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의사 수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특정 과에 몰리는 현상, 공공의료 현장으로 가지 않는 현상 등등을 염두에 두고 의료개혁을 해야 하는데, 무엇보다도 의료 공백이 큰 지역부터 의료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환경, 생태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지역 의료를 살리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 이런 활동이 이루어진다면 도시로 사람들이 몰리는 일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고, 그렇다면 자연스레 생태,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양창모가 쓴 '농촌 돌봄의 기발한 대안 두 가지'다. 사실 기발하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직 잘 실행이 되지 않아서지 충분히 실행 가능한 일이다. 이미 하고 있기도 하고.


하나는 '마을 진료소'를 설치하는 것이란다. 마을 진료소가 설치되면 시골 사람들이 멀리 도시까지 갈 필요가 없다. 또한 오랜 시간 방치될 일도 없다. 그런데 의료법에 문제가 있단다. 아니 의료법의 기타 사항을 잘 활용하면 될 텐데, 복지부동이라고 먼저 나서지 않으려 하는 것이 문제다.


의료법 제33조 1항에는 의료기관으로 허가되지 않은 공간, 예를 들면 마을회관 같은 곳에서는 진료행위를 하지 못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 예외 규정 3호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장이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요청하는 경우'에는 의료기관을 개설하지 않고도 진료행위를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76쪽)


이 법조항을 살리면 마을회관에 진료소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공공의료가 아니고 무엇인가. 굳이 병원을 새로 짓지 않아도 된다. 있는 공간을 활용하면 되니. 그러면 환경파괴를 할 필요도 없다. 


병원이 먼 사람들에게는 가까운 곳에서 진료 받을 수 있어서 좋고, 또다른 건설로 환경을 침해하지 않아도 좋으니 일석이조인데... 참...


둘째는 '이웃복지사'란다. 그렇다. 바로 이웃들이 서로를 돕는 것이다. 이웃복지사는 함께 사는 이웃이다. 그러니 누구보다 이웃들의 사정을 잘 안다. 이들이 의사가 진료를 왔을 때 그간의 일을 이야기해주면 진료는 훨씬 수월하다. 


그런 점을 정부가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의료개혁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마을 진료소를 개설하기 위해서는 공공의료 확충이 필요하다. 공공의료 확충에 필요한 의사 수도 증원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하겠다는 의사들이 많아져야 한다.


수익보다는 사람들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는 의사들. 그들이 많아지면 이윤보다는 환경, 생태를 먼저 생각하는 사회로 이미 진입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도 환경, 생태와 의료는 연결이 된다.


물론 인간이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았던 많은 질병들이 환경, 생태 파괴로 인해서 발생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서 치료보다는 예방 쪽에 중점을 두는 의료 활동이 더욱 필요하기도 하고.


의료 개혁에 관한 글들이 이번 호에는 많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뜻이기도 하겠다. 이번 호를 읽으면서 의료 개혁과 환경, 생태 문제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야 함을 생각하게 됐으니, 녹색평론은 나에게 무척 의미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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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1952-1961 - 오래된 방랑하는 집 프랭크 허버트 단편 걸작선
프랭크 허버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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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관심을 가진 때가 달라진다. 어릴 적 웰즈의 소설들을 SF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이런 종류의 소설에 관심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소설을 장르로 구분하고, 그런 장르들이 고정불변인양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하지만 르 귄의 소설이나 버틀러의 소설, 클라크나 아시모프, 하인라인 등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종류를 SF소설이라고 한다면 최근에 관심을 가졌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이들의 소설에 관심을 가지니 우리나라 작가 중에 김초엽이나 천선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SF소설을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하기보다는 우리 삶을 다른 세계로 옮겨갔다고 볼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간접 경험을 하게 하는 데 이런 소설보다 더 좋은 소설이 어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는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감정이입을 최대한 미루면서 한 발 떨어져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프랭크 허버트라는 작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사실 영화도 보지 않았고, [듄]이라는 소설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가 없는 작가였는데, 이 작가에 대한 평이 좋고 [듄]에 대한 평도 [반지의 제왕]에 비긴다는 말도 있으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


이 작가가 쓴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1952년부터 1961년 사이에 쓴 단편들을 모아놓았는데, 읽으면서도 이게 그 때에 쓰인 소설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금 쓰인 SF소설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소설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러 상황이 교차되고, 우주인들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인간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에 짤막한 소설인 '무능자'를 보면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인류가 특이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분화된 세상이다. 어떤 이는 이동의 능력을, 어떤 이는 불을 피우는 능력을, 어떤 이는 미래를 보는 능력을 등등 각자 자신만의 능력을 지니고 태어나고, 그 능력을 발휘하면서 사는 세상이 된다.


그렇다면 미래를 보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미래가 보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미래는 이미 고정되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다다. 이것이 인간의 삶일까?


이미 정해진 대로 사는, 마치 성경의 '예정 조화설'대로 이미 신께서 예비하셨더라는 식으로 되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세상에서도 아무것도 아닌, 어떤 능력도 지니지 않고 태어난 무능자가 있다. 그리고 유능자들이 결합을 해도 무능자들은 계속 태어난다. 그렇게 무능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될 수도 있다. 


소설에서는 그런 사회를 끔찍하게 여기지만, 현실은 어떠할까? 자신의 삶이 그대로 정해져 있다면? 자신은 그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이 행복한 삶일까?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다는 피하지 못할 운명을 지니고 있지만, 태어남에서 죽음까지의 과정에는 예측하지 못할 수많은 변수들이 있고, 그러한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운명을 만들어가지 않는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무능자들이 태어난다는 사실은, 기계적으로 정해져 있는 틀을 벗어나는 자율적인 인간의 삶이 탄생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꼭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 수도 있음을. 그래서 소설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우리가 알아서 해 나가야 한다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나간단 뜻이다. 고정되지 않은 미래. 그리고 참견쟁이 예지자들도 우리를 귀찮게 할 수 없다. 여자로서 그게 좀 마음에들었다. 특히 결혼 첫날밤에는.' (213쪽. '무능자' 끝부분)


짧은 이 소설이 현대에 쓰였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최근에 나오는 SF소설과 구별할 수 없다. 그래서 시대를 넘어서 SF란 미래를 선취해서 우리들의 삶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아니 꼭 SF라고 하지 않아도 소설이나 다른 문학 작품들, 예술 작품들이 이런 역할을 해왔기에 인간의 역사와 함께 예술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 '무능자'말고도 '사격 중지'와 같은 소설은 압도적인 무기가 과연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무기로 평화를 얻을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을 이 소설을 통해서 고민할 수가 있다. 그만큼 좋은 소설은 지금 우리에게 질문을 하게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사고의 과정이고 성숙으로 가는 길이 된다.


이 소설집 역시 SF라는 이름에 걸맞게 외계와 접촉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다루고 있는 소설들이 많다. 그렇지만 외계를 정복의 대상이거나 침략의 주체로만 보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소설들이 있기도 하다. 없을 수가 없다. 미지에 대한 두려움, 그것은 인간이 지닌 원초적인 본능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더불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이질적인 존재와 함께하는 모습을 꿈꾸는 것도 인간이다. 이 소설집에는 그러한 것들이 함께하고 있다.


한편 한편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고, 이제 이 시기 이후의 단편집으로 넘어가야 한다. 그 소설들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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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산이 현대사 3 : 정치·경제 - 전우용의 근현대 한국 박물지 잡동산이 현대사 3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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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3권이다. 근대에 다양한 물건(존재)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우리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는데, 정치, 경제와 관련된 것들을 이번 권에서 다루고 있다.


새로운 것이 들어왔을 때 생활이 어떻게 바뀌는지, 과거를 통해서 배우면 미래의 삶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가 있고, 우리가 과학기술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다른 물건들도 언급할 필요가 있지만 이번 권에서 국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태극기가 언제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했는지, 또 성조기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일장기와 욱일기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등을 그것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과정을 살피면서 알려주고 있다.


성조기는, 미국에서 국기에 대한 경의를, 나라에 대한 경의와 등치하면서 신성시되었다는 점. 그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태극기도(사실 태극기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더욱 신성시 되었다) 신성한 존재가 되었는데... 이러한 국기에 대한 태도는 미국인이 성조기를 대하는 태도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기호가 사람들의 정신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라 하겠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쟁이 많지만, 일장기와 욱일기의 차이를 별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책을 보면서 그 차이를 확연히 알게 되었다. 일장기를 올림픽에서 흔들며 응원하는 것은 용인할 수 있지만, 욱일기를 올림픽에서 사용하면 왜 안되는지를...


일장기는 국기고, 욱일기는 군기란다. 군기는 군대의 깃발이니, 올림픽은 평화의 제전이라고 하는데 군대의 군기를 흔드는 것은 올림픽 정신에도 어긋난다. 게다가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깃발이 욱일기니  이는 더욱 사용해서는 안 된다.


일본이 욱일기를 사용하는 것은 그들의 제국주의적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의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니, 반성을 결여한 행위고, 주변 국가들에게 위협이 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국기들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지금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많은 물건(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앞으로도 계속 사용되고 우리들의 삶을 바꿀 '스마트폰과 자율주행자동차'는 현재진행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하는 물건들. 그리고 이런 물건들이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왔나를 살펴보면 앞으로 우리 삶이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3권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이다. 다 기억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들이 우리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앞으로 더 많은 물건(존재)들이 우리 삶에 끼어들테고, 우리는 그들과 함께 우리 삶을 바꿔갈테니, 과거의 물건(존재)들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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