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지고 있다. 최근 서울역에 간 적이 있었다. 서울역 지하보도에 노숙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많이 추울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들에게는 여전히 자신의 집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더 쓸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자신이 머물 주거공간이 없다는 것. 인간이 생활하는데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의, 식, 주' 중에 벌써 하나가 없다는 것은 생활의 결핍이다. 그런데 집이 없다는 것에서 그칠까?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레 앞의 두 가지도 따라다닌다.


  먹을거리를 장만하기 힘들다. 무료 급식소를 찾아가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음식을 찾아먹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니 주거 문제는 곧 식생활 문화와 연결이 된다.


집이 없고, 먹을거리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옷은 어떤가? 옷 역시 그들에게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 된다. 옷도, 음식도, 집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 곳에서는 옷과 음식이 버려지고, 집을 수십 채 보유한 사람도 있다. 


사회적 양극화를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을 보면 체감할 수 있다. 몇 호 전부터 빅이슈에 옷을 나누는 캠페인 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쓸모 있는 옷이지만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는 옷을 필요한 사람에게 보내자는 운동.


이런 운동으로 '의식주' 중에서 의를 어느 정도는 해결하려 하고 있다. 환경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고. 여러모로 바람직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호 [빅이슈]에서 다룬 흑백요리사,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이들의 음식 대결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또 다양한 음식을 알 수 있는 기회도 준다는 장점이 있지만...


삐딱한 생각도 해본다. 이렇게 좋은 음식을 과연 노숙인들은 맛볼 수 있을까? 이런 화려한 요리 경연대회에 가려져 그런 음식에 대해 알아도 맛볼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떨까?


물론 [바베트의 만찬]이라는 소설을 보면, 또 [빵과 장미]를 보면 없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음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런 기회를 줄 수 있다면...


그래서 이번 호에서 '흑백요리사'를 다룬 것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는데, 이런 요리를 어떻게 하면 없는 사람들에게도 향유할 기회를 줄 수 있을까 하는 글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터무니 없는 상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흑백요리사들에게 무료급식소에서 그들이 경연에서 선보였던 음식을 돌아가면서 요리해 제공하는 봉사를 하게 하는 방법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방송에는 내보내면 안 되고, 조용히 자신들의 요리를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맛볼 기회를 제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날이 추워지니 이런 엉뚱한 상상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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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도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마치 예정조화설처럼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삶은 행복보다는 불행 쪽으로 가지 않을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어떤 행동을 해도 정해진 대로 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그러니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이 꼭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즉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운명도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지 않을까?


알고 고칠 수 있고, 또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으니, 그때 운명은 나에게 행복으로 다가올 수 있다. 즉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운명. 그것은 운명을 알고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운명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우선 자신의 성격을 알아보는 MBTI(16개의 성격유형이 있으니)가 있고, 9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 애니어그램이 있고, 점과 비슷하게 타로 점이 있고, 그리고 우리나라 점, 또 주역이 있다. 


이보다 더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많이 알려진 방법들인데, 최근에 사주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설마 저번 대선의 영향은 아니겠지...


사주를 고정된, 불변의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것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한다면 사주, 좋다. 그것을 맹신하지만 않는다면.


왜냐하면 사주를 본다는 것은 그것에 자신을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빠져 있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거울을 추가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 지금 내가 이래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구나.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그것이 사주의 의미다. 즉 사주는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같은 사주라도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이 하는 행위나 마음가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이 달라지면 운명도 달라진다. 그것이 요즘 사주보는 사람들, 또는 자신의 사주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지닌 자세다.


그 점을 이번 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사주를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판단하는 또 하나의 거울로 사주를 보고 해석하는 것. 그것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사주를 미신의 영역이나 맹신의 영역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행동하는 영역으로 옮겨놓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이 이번 호, 사주에 대한 글들이다.


또 이번 호에서 많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오후 작가가 제시하고 있다. '값비싼 치료, 국가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나'라는 글에서.


의료 문제가 붉어진 한국 사회에서 의사 문제도 문제지만, 의약품 문제도 문제다. 건강보험으로 모든 치료를 보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너무도 비싼 약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국가에서 건강보험으로 모두 보전해주면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반가운 일이겠지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므로, 무한정 국가가 나설 수는 없는 일.


세상에 약값이 28억 원이나 되다니... 이것을 건강보험이 보전해줘서 600만 원에 투약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런 약들이 계속 개발이 된다면, 돈이 많은 환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겠지만,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더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약들은 국가가 지원해줘야 하는데, 마냥 할 수도 없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개발한 제약회사의 이윤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그러니 그러한 인간의 생명에 관련된 연구는 세계적인 협업으로, 세계정부 차원에서(유엔이라고 해야 하나) 해야 하지 않을까. 이윤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우선한다면, 세계 각국에서 차등적으로 비용을 충당해 그런 연구를 지속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도 품어보는데...


이게 아직 안 되고 있으니, 오후 작가의 말인 '의학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과거에도 건강은 부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제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뿐이다. 부디 건강 잘 챙기시길.'(81쪽)이라는 말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런 현실이 아니길... 부가 건강에 어느 정도 영향은 끼치겠지만 결정적 영향은 끼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그런 사회를 꿈꾸는 것이 [빅이슈]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잡지가 계속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나. 우린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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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 특집 기사가 '결심했다, 소비와 멀어지기로'다. 소비는 자본주의의 꽃이다. 소비가 있어야 생산이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자본주의는 반대다.


  생산이 소비를 촉발한다. 소비를 유도하기 위한 온갖 광고들을 보라. 수요를 창출해내는 생산.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니 좀 생경한 언어를 쓰면, 자본주의는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가 더 중요한 사회다.


  그러니 주식도 하고, 가상화폐(블록체인)도 나온다. 생산품을 받고 그 대가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가 하나의 생산품이 된다. 돈이 돈을 낳는 세상이 된다.


이런 세상은 소비 진작이 기본이다. 소비가 축소되면 경제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소비를 권장한다. 교환가치가 계속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필요한 소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생존에, 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다. 그런 소비에 그치지 않고 소비를 위한 소비를 하는 것은 아닌지, 내게 꼭 필요하지 않은데도 소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기회를 준 것이 이번 호 특집 기사다.


소비를 줄이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나타나는데, 이 중에는 주식을 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으니, 참조할 만하다. 단순히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줄인 소비를 다른 곳에 투자를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투자를 해도 되고, 환경에 투자를 해도 되고, 방법은 다양하다. 그런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도 이제는 많이 나오고 있다. 그 점을 [빅이슈]가 보여주고 있다.


이 특집 기사 말고 생각해 볼 글이 바로 '집'에 관한 기사다. '핀란드에서 홈리스가 줄어든 이유'라는 글이 읽을 만하다. 아니 읽어야 한다.


집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정책을 추진했다는 핀란드. 이들에게 홈리스(노숙인)들은 내쳐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주거공간을 마련해주는 정책을 마련하는 것은 당연한 일.


전세 사기를 당해 오갈데가 없어진 사람들, 피해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나라는 언감생심 홈리스에 대한 주거 정책을 입에 올리지도 못한다.


내 돈으로 간신히 마련한 전세집조차도 사기를 당해 전세금을 날리고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도 구제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능력이 없다고, 집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집을 구해주는 정책을 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길일까? 아니다. 홈리스들도 자신들의 집에서 생활할 수 있을 때 사회는 더 풍요로워지고 사회적 비용도 감소한다. 즉 사회에서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줄기 때문에 사회적 행복도는 높아질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은 우리나라 주택 정책에 시사점을 준다.


이밖에도 읽을 만한 많은 글들이 있다.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 (음악, 영화, 전시 등) 새로운 사실을 알게 해준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는 이번 327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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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를 읽으면서 모두들 열심히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들.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말에는 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즉, 최선을 다한다는 삶은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위하는 방향으로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다.


  다른 존재를 위해서 나를 갉아먹어서도 안 되고, 나를 위해서 다른 존재를 이용해서도 안 된다. 사람을 비롯해 모든 존재는 자신에게 목적이 되어야 하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칸트의 말을 변주하면)


이런 당연한 사실을 [빅이슈]를 읽다보면 새삼 깨우치게 된다.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구나. 이런 사람들 덕에 이 험난한 사회에서도 희망이 있구나!


SNS가 유행하는 요즘, SNS를 하지 않으면 원시인 취급받는 요즘, 다시 책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


SNS로 충족되지 않는 무엇을 책이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 실린 오후의 시각 'SNS는 마약? 세계에 퍼지는 SNS 금지법'이라는 글이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많은 나라에서 SNS로 인해 일어나는 부작용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좀 살벌한 법률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법률로 규제한다고 해결이 될까? 아마도 안 될 것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지 말아라."라고 금지하기보다는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것들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SNS를 금지한다고 하지 않을까? 청소년기에는 오히려 금지를 하면 더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을까? 더욱 음성화된 SNS활동을 어떻게 하려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후는 시원시원한 결단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가령 종교적인 분쟁이 일어났다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아예 배제하자고 하면 참 간단한 해결책이긴 하지만, 결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의 본질은 건드리지 않는 방법일 뿐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토론을 통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스스로 정리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가 말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민주주의란 원래 끝없는 토론과 불협화음, 무엇보다 불만족스러운 결과로 완성되는 것이니까'(27쪽)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 SNS가 아니더라도 열심히 사는 모습,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하지 마라"가 아니라 "이렇게 해도 좋겠네"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하면 좋겠네, 이렇게 해도 되겠네. 이렇게 한번 해봐야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순간의 혼란을 견디지 못하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없다. 마찬가지다. 순간의 혼란을 견디지 못하고 늘 정리되어야 하고, 간단 명료한 해결책을 추구하는 것이 열심히 산다는 것과 통하지 않을 수 있다.


'열심히'라는 말에는 다양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 실린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다. 그들의 열심이, 나도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고 있으니까.


더운 여름, 더 두터워진 [빅이슈]를 읽으면서 더위를 잠시 잊을 수 있어서 좋다. 이제 다음 호는 선선한 때에 만나게 되겠지. 그만큼 우리 사회도 선선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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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편'


  좋은 쪽으로 변화를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개편'이라는 말에는.


  이런 생각이 무너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많은 방송 개편들이 좋은 쪽이 아니라 특정한 세력을 옹호하는 쪽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편'은 그냥 바꾼다는 의미가 될 테다. 그냥 바꾼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이 지니는 어떤 방향성이 없이 '개편'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아니다. 좋은 쪽이든 특정한 집단을 옹호하는 쪽이든 개편에는 방향성이 있다. 이런 방향성을 절대로 무시할 수는 없다.


[빅이슈]도 개편을 했다. 한 달에 두 번 나오는 잡지에서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잡지로. 그대신 가격을 올렸다. 왜냐?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본다.


한 달에 두 번 나오면 빅이슈 판매원에게 돌아가는 수익금은 7,000원이다. 그런데 가격 인상을 하지 않고 한 달에 한 번만 나오면 빅이슈 판매원에게 돌아가는 수익금은 3,500원에 불과하다. 수입이 절반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노숙인 자활을 돕는 잡지라는 이름이 무색해진다. 그렇다면 개편을 할 때 [빅이슈] 관련자들이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일 터이다.


고심 끝에 그들은 12,000원으로 가격을 올렸겠지. 그러면 수익이 6,000원이 되니까. 천 원을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더 올리기는 힘들었으리라.


직접 전철(지하철) 입구에서 오다가다 사는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가격은 부담이 될 수도 있고, 선뜻 잡지를 구매하도록 이끌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또한 가격을 올린 만큼 내용도 더 많아졌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잡지에 내용이 늘어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다. 


고정된 연재만이 아니라 한 달 동안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의 글을 쓰는 사람을 찾아 섭외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빅이슈가 자신들의 방향성을 지키면서 '개편'을 한 것은 시대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치열한 고민과 노력을 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역시 다양한 기사들이 있다. 우리들이 생각할 글들이 많다. 환경부터 주거, 생활 등등. 더 긴 시간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개편이라고 생각하련다.


'개편'이 된 첫호에 이어 나오는 다음 호에는 어떤 글들이 실릴지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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