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9수를 시킨 엄마를 죽였습니다
사이토 아야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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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제목을 보고 '4세 고시, 7세 고시'라는 말이 떠올랐다. 무슨 고시? 의대에 보내기 위한 준비를 만 4세부터는 해야 한다는 말. 예전이라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7세부터 할 텐데, 이제는 그마저도 당겨졌다는 말이다.


그러면 4세부터 의사가 되기 위해 준비한 아이들이 행복할까? 설령 그렇게 자란 아이가 의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런 의사가 아픈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 의사라는 직업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의사인 본인에게도 그 의사에게 진료와 치료를 받는 환자에게도 그다지 좋을 것 같지는 않다.


우리나라가 중학교 입시와 고등학교 입시를 폐지한 이유는, 아이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입시에 쪼들리는 일을 막기 위해서 아니었던가. 오로지 입시에 매달려 다른 것을 해보지도 못하고, 다른 경험도 못하고, 주변의 친구들을 경쟁 상대로 여기는 풍토를 없애기 위해서 (다른 의도가 있었을지 몰라도 표면적으로는) 중고등학교 입시를 폐지하고 평준화 정책을 썼는데...


다시 의대로 인해서 4세, 7세 고시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으니... 해마다 의대에 가기 위해서 다른 대학에 합격해도 등록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많고, 성적 우수자들은 먼저 의대를 지망하는 이 현실에서... 이 책은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운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라는 생각이 드는 것. 의대에 너무 목숨을 거는 것. 아니 정말 의사가 되고 싶어 의대에 가기 위해 몇 수를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본인이 그렇게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선택했다면... (이 말은 좀 생각해볼 문제가 있는데,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의사, 의사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부모의 희망이 자신의 희망인 줄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의지라고 하지만 그것이 가정 환경에서 만들어진 경우도 있음을 고려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의사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지니고, 어렵더라도 도전을 하겠다고 하면)


하지만 자신은 별 생각이 없었는데 부모의 희망에 의해 의대에 가야만 한다면, 그것이 한번에 가지 못하고 몇 번을 거쳐서 가야 한다면... 자신은 포기하고 싶은데 부모가 안 된다고 계속 하라고 한다면...


그것도 못 하느냐고, 왜 노력을 안 하느냐고, 의대에 못 가면 집을 나가라고... 넌 자식도 아니라고 한다면? 이런 일을 9년이나 겪는다면?


하다하다 안돼 간호대에 갔는데, 다시 조산사가 되라고 한다면? 자신이 간호대에 적응해 수술실 간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꿈을 이루기 직전까지 갔는데, 부모가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한다면...


아예 자식 취급을 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패륜이다. 존속 살해는 가장 해서는 안 될 패륜임이 확실하다. 여기엔 이론을 제기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바로 '그러나'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렇게 자식에게 강요하는 부모가 있을까? 우리 말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는데, 아닐 수도 있는가? 일본은 좀 다른가? 아닐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아카리의 아빠는 살인을 저지른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족이니까."(221쪽)


이 의미를 아카리가 알고 있었다면, 엄마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아빠에게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자신을 믿어주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그런 때 극단적인 행동을 자제할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을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존재가 있음을 아니까.


자신이 쉴 곳이 있음을 아니까. 그런데, 아카리는 살인을 하기 전까지 몰랐다. 그냥 자기 고민 속에 빠져 지냈다. 주변을 살피지 않았다. 자신을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음을.


그래서 엄마에게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 처음엔 해방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몬스터를 무찔렀다. 이제 안심이다.'(33쪽)라는 말을 통해서 이 점을 알 수 있는데, 엄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자신이 죄인처럼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이때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아빠를 만나고, 재판장의 판결을 들으면서...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깨달음이 너무 늦게 왔지만, 늦게라도 왔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세상을 뜨는 사람도 많으니.  


논픽션이다. 사실에 기반했다.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엄마의 강요로 자신의 삶을 잃었던 딸이 엄마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 일이다.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지금 복역 중이라고 한다. 물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지만, 죽은 사람은 살아오지 않는다. 그렇게까지 되기 전에 무언가를 했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지만.


그것도 힘든 일이다. 엄마와의 생활에 갇혀 있었을 테니까. '엄마는 악마 같은 간수였고 나는 비굴한 죄수였다.'(167쪽)고 하고 있었으니, 이 말 곱씹을 필요가 있다. 정말 4세, 7세 고시를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부모들은 그러한 '간수'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일본도 우리와 같이 의대에 가기가 몹시 힘들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의사가 안정적인 직업이기 때문이다. 의대 합격선이 높아진 것은 일본도 거품 경제가 붕괴한 1990년대 이후라고 하니, 우리나라도 'IMF'이후에 의대 합격선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으니... 자식이 잘살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이야 이해하겠지만, 이 잘산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살인을 저지른 딸에게 '가족이니까'라고 말을 하는 아빠, 그렇게 가족이기 때문에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는데,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족쇄가 되는 그런 일은 없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모든 가족이니까 무조건 받아주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 잘못 이 말이 악용이 되면 가족이니까라는 말로 강요하게 된다. 엄마는 가족이니까라는 말로 자식을 속박했다면, 아빠는 다른 의미로 즉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가족이니까라고 했다고 봐야 한다.)


참 처참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읽어볼 필요는 있다. 적어도 부모가 '몬스터나 간수'가 되어서는 안 돼야 하니까.


아카리가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 성인이 된 자식을 성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계속 간섭해야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부모를 둔 자식의 심정이 어떻겠는지... 


이 책 앞부분에 나와 있는 이 말, 부모 역시 자식에게서 독립할 필요가 있음을,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부모나 자식이나) 서로의 삶이 다름을, 각자의 삶이 있음을 인정해야 함을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생각한다.


'아카리가 엄마를 죽이기로 결심한 것은 9년이나 의대 재수를 강요당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엄마의 폭언과 집착으로 얼룩진 지옥 같은 시간을 벗어나 이제 겨우 자기 발로 서게 되었는데 또다시 그 지옥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절망했기 때문이었다. 

20대에는 어떻게든 버티고 흘려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9수 끝에 대학이라는 바깥세상을 경험한 지금은 그렇게 버틸 자신이 없었다. 나이도 이미 서른이었다. 아카리에게 입시 지옥은 두 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곳이었다.'(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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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 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 Philos 시리즈 23
네이딘 스트로슨 지음, 홍성수.유민석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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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저자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저자의 주장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혐오표현금지법'은 제정되어어서는 안 된다이니까.


혐오표현이 좋지 않은 표현을 넘어 폭력이 되는 현실에서, 그러한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법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고, 또 혐오표현금지법을 제정한 나라도 꽤 있다.


법을 통해 국가가 직접 혐오표현은 범죄라고 명시하는 것, 이것이 혐오표현금지법인데, 이 법이 과연 혐오표현을 줄이거나 없애는데 기여를 했는가 하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는 좀 힘들다.


우리나라에서 명예훼손죄가 있는데, 이것이 혐오표현금지법이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혐오표현을 막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법을 생각해 보자. 이 법이 약자에게, 진정으로 인격을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적용이 되는가? 이 생각을 하면 오히려 명예훼손죄는 약자를 옭아매는 역할을 더 많이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라고 해서, 약자가 강자에게 당한 것을 폭로해도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어버린다. 그러면 돈과 시간, 권력이 없는 약자는 법망에 걸려 여러가지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된다. 강자에 의해서 또는 고의적으로 상대를 비하하는 표현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법의 취지와는 다르게 약자에게 족쇄를 채우는 역할을 한 경우가 꽤 있으니...


이렇게 명예훼손죄를 생각하면, 저자가 혐오표현금지법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도 이해가 되긴 한다. 이 혐오표현금지법이 소수자에게 더 가혹하게 다가온 경우가 있고, 또 차별을 하는 사람들을 누르기는 커녕, 그들이 지하로 들어가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고 행동하게 만듦으로써 혐오표현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기 힘들게 하기도 했다는 것.


또한 혐오표현금지법이 있는 나라에서 극단적인 정당이 계속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에 대한 지지도가 만만치 않음도, 혐오표현 금지법이 혐오표현을 막는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부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이 책에서 혐오표현금지법을 반대하는 주요 논거 중의 하나다.


여기에 혐오표현금지법이 없어도 현행법으로도 충분히 처벌이 가능한데도 혐오표현금지법을 제정한다면 그것은 '자유, 평등 및 민주주의의 보편 원칙을 훼손한다'(57쪽)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집단 간 갈등을 줄이거나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법전쟁lawfare이 아니라 협력적이고 화해적인 접근'(235쪽)라고 하고 있다. 즉 더 많은 대화를 통해서, 대항 표현을 통해서 혐오표현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개인과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표현의 잠재적 힘보다 더 나쁜 것은 혐오표현금지법을 시행함으로써 똑같이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정부의 잠재적 힘이다. 예상대로, 이 탄력적 힘은 반대 의견, 대중적이지 않은 발화자, 그리고 권력이 없는 집단을 침묵시키는 데 사용될 것이다'(45쪽)는 주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명예훼손죄에 대한 법도 그 법의 취지와는 다르게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혐오표현금지법 역시 그러한 전철을 밟고 있거나 밟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차별금지법이 먼저 제정이 되어야 하고, 여기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지 않는다.


아직 차별금지법이 없는 우리나라인데... 이 법이 먼저 제정이 되고 시행이 된 다음에, 현재 있는 법으로도 혐오표현을 처벌할 수 있으면 강력하게 처벌하되, 대항 표현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하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되 그것이 토론으로 나아가 서로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분명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저자는 혐오표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반대한다. 또한 처벌받아야 할 혐오표현은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 저자가 혐오표현금지법을 반대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지,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표현을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혐오표현이 일어나지 않도록 환경과 또한 대항 표현을 더 활발하고 강하게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것을 법의 영역으로 보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 말을 곱씹어 보자. 


'폭력적 차별적 행동은 즉시 처벌해야 한다. 그리고 차별적, 혐오적 생각을 전파하는 표현은 강력하게 논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혐오적이거나 차별적이라고 여기는 생각을 처벌하는 것은 위에서 소개했던 표현의 자유 근본 원칙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집단 내의 불신와 차별을 줄이는 게 아니라 증가시킬 수도 있다.' (35-36쪽)


그래서 저자는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는 두꺼운 피부를 발달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더 얇은 피부를 발달시켜야 한다'(268쪽)고 한다.


즉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논박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더 민감한 감수성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혐오표현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은 점점 더 없어질 테고...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모든 것을 법의 영역으로 넘기면 해결은 더욱 멀어진다는 점은 명심해야 한다. 자신의 문제를 남에게 넘기고 방관하게 되기 때문인데, 그러면 대항 표현은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혐오표현금지법에 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법 이전에 사회가 그러한 표현을 할 수 없도록 대항 표현을 비롯한 자유로운 토론 문화가 만들어지게 하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을 했다.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문제다. 이것은.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차별금지법이 제정되고 시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 차별을 금지하자는데 반대하는 사람도 있나 싶지만, 이 법이 왜 제정이 안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각자의 생각이 있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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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날 세계에서 - 내란 사태에 맞서고 사유하는 여성들
강유정 외 지음 / 안온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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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만날'이라는 미래형이 아닌 '만나는'이라는 현재형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탄핵소추를 당해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심판을 받는 동안에 쓰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비상계엄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를 떠올리는 사람들, 그리고 비상계엄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무시무시한 포고령 내용을 보고 놀라 거리로 나온 사람들. 비상계엄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나온 사람들 등등.


이들이 탄핵을 찬성하는 이유는 다시는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그것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정치인은 이 나라에서 정치를 할 자격이 없다는 것. 그럼에도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는 국민의 힘으로 끌어내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엄동설한에...


'키세스'라고 불릴 정도로 은박 담요를 둘러싸고 추위에도 포기하지 않고 거리로 나온 이유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켜야 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 또 우리 후대들이 사는 세상이 민주주의 세상이어야 하기 때문.


그런 민주주의는 미래형일 수 없다. 민주주의라는 미래의 때를 맞이하기 위해 지금 독재를 용인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바로 지금-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만날 세계이다.


따라서 광장에서는 민주주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누구나 자신의 말을 할 권리. 자신을 존재 자체로 인정받을 권리가 지켜지는 장소, 그것이 광장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보듬고 도와주려는 마음. 상대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 물론 처음에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밀어내려는 모습도 보였지만, 광장에 모이면서, 탄핵을 함께 외치며 우리가 만날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고민하면서 차이를 차별로 보지 않고 차이로 보는, 그러한 다양성이 민주주의를 더욱 풍요롭게 함을 깨닫는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글서 그들은 이미 광장에서 다시 만날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번 경험한 세계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남아 지속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한다.


광장에서 외쳤던 수많은 외침들이 이제는 실현되어야 할 단계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탄핵이 완료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서 새로운 정치가 시작되고 있으니...


이 새로움이 그 전에 있었던 탄핵 이후를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만나는 세계일 테고. 한번 경험한 것을 다시 반복하지는 않을 테니, 광장에서 터져나온 다양한 목소리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기억을 다시 떠올렸다. 추운 날씨에도 광장에 모인 사람들, 서로가 서로를 보듬던 사람들. 네것 내것 할 것 없이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주던 사람들. 지방에서 올라오던 농민들이 남태령에서 막혔을 때 지체없이 남태령으로 달려갔던 사람들.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말을 할 때 그것을 받아들여주던 사람들의 모습.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모습을 이미 보여준 그 광장의 모습. 그것을 잊지 않게 이 책은 그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다. 기억은 강하다. 기억은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 책은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나는 세상이 어떤 세상이어야 할지를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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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치된 믿음 - 무속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해 왔는가?
이성원.손영하.이서현 지음 / 바다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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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무속이 우리 사회에서 큰 관심을 끈 적이 있었을까? 물론 무속은 우리 사회 전반에 존재해 왔다. 지금도 거리에 나가 보면 많은 곳에 점집 표시가 있다. 또 현수막에도 신내림을 받았다고 광고하는 것들도 있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점을 보러 가야 하나 하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고, 타로점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만큼 무속은 우리 곁에 있는데... 


점집에 깃발이 달려 있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백기는 점을, 적기는 굿을, 둘 다 걸려 있으면 점과 굿을 모두 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소에 점에 관심이 없었으니, 점집의 표시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이렇게 표시를 하는 점집도 있지만 서울 논현동에 있는 점집들은 대부분 점집 표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임대인이 꺼리기도 하고, 또 지역 특성도 있다고... 여기에 요즘은 유튜브와 같은 방송으로도 무속에 관해 홍보를 하고 있다고 하니...


사회적 관심을 끌기 전에도 무속은 늘 우리 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사회적 관심을 끈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합리성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존 상식에 반하는 것을 했을 때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게 된다.


특히 무속이나 특정 종교와 관련이 없어야 할 사람이 관계를 맺었음이, 그것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음이 드러날 때는 사회적 관심은 증폭된다. 이때 사회적 관심이 긍정적인 쪽이 아니라 부정적인 쪽으로 폭발하고.


이것은 결국 무속인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무속인 개개인이 벌였던 범죄 행위나 또 다른 행위들을 넘어서 이는 무속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속에 대해서, 사실은 무속인에 대해서 심층 취재를 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기자 셋이 우리 사회에서 무속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등을 살펴보고 있는데, 먼저 무속인들의 일탈 행위(범죄라고 하고 싶지만,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경우도 꽤 있으니)를 취재하고, 무속인들을 인터뷰해서 그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무속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논의의 마무리로 삼고 있다.


무속인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당연히 처벌해야 한다. 그것은 어떤 종교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범죄라고 판결을 할 수 있는 기준이 무속의 경우엔 명확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서 일탈행위가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인데...


'법원은 피해자가 위안을 받았다면 사기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53쪽)라고 하는데, 이는 피해자를 중심에 놓은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중심에 놓은 판결이 아닌가 한다. 이런 판결을 하는 기저에는 무속을 종교로 보는 관점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데...


종교로 본다면 종교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윤리를 지키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데도 마음의 위안을 주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자 하는 무속인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도 명확한 판결이 있어야 하겠는데...


무속에 사람들이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완전히 빠지지 않고 재미 삼아 보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의 상태에 따라 무속에 심취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대개 '공통적으로 낮은 자존감과 높은 의존성, 수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174쪽)다고 하는데, 이는 기존의 종교에 대한 믿음이 줄어들고, 또 사회가 안정적이지 않을 때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나약해졌을 때 강하게 끌어주는 무속인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무속을 개인의 문제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무속을 공론화하고 어디까지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지, 또 무속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공통의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점에 대해서 무속이 사회적 관심사가 된 지금 다양한 방면으로 공론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냥 개인의 문제로 남겨두지 말고.


무속에 대하여 다방면으로 취재했는데, 이들이 말하고 있듯이 무속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의 수나 그들의 수입 등등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들이 명확해져야 무속이 '방치된 믿음'으로 남겨지지 않을까 한다.


또한 적어도 공적인 자리에 무속을 끌어들이는 일은 하지 않게 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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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기원
토니 모리슨 지음, 이다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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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랑하는 인간이, 배제하는 존재를 만들고, 그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현실. 그것도 힘이 있는 자들이 그 힘을 인정받으려 다른 존재를 상정하는 행위. 이것이 타인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의미다. 그냥 단순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일컫기보다는.


나와 다른 존재, 타인. 우리와 다른 존재, 이방인. 이는 곧 배제를 해야 한다는 말로도 들리는데, 타인이나 이방인이라는 말에는 단순한 다름이 아닌 다르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배울 수 있고, 보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강자가 아니라 약자다. 물론 이때 약자는 현실에서의 약자가 아니다. 약자가 강자를 배제한다고 한들 강자에게 어떤 어려움을 줄 수 있겠는가.


강자가 약자를 배제하면 약자는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그러므로 이때 쓰는 약자는 스스로 서지 못하고 자신이 홀로 서지 못하고 상대를 통해서 존재 의의를 찾는 존재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백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부릴 때 자신들의 생활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노예에게 의지했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인간 이하의 존재로 취급하는 모습들, 그런 모습들이 바로 백인에 의한 흑인의 타자화라고 할 수 있다.


인종 문제, 현대에서는, 특히 인권이 강조되는, 다른 나라의 인권 문제까지 걸고 넘어가는 미국에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문제같지만, 아니다. 미국에서는 여전히 인종 문제가 심각하다. 오죽했으면 몇 년 전에, 불과 몇 년 전이다. 흑인 대통령을 (뭐 이 책에도 나오지만 한 방울의 피가 섞여도 흑인은 흑인이라고 했던 때가 있었으니) 배출했음에도 흑인들은 여전히 경찰에 의해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구호가 지금도 유용하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토니 모리슨이 쓴 이 책은 그러한 인종 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젠더나 경제적 차별도 있지만 흑인들이 생활에서 겪는 인종 차별. 문학에 나타난 인종 차별을 이야기하면서, 백인들에 의해 흑인이 어떻게 타인이 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우선 모리슨은 '인간은 우리 부족 사람과 그 밖의 사람을 구분지은 뒤 상대를 적으로, 즉 취약하고 결핍이 있으며 통제가 필요한 대상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26쪽)'고 한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결집하기 위해 타인을 설정하고, 그들을 자신들이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행동한다는 것, 이는 '자기 집단의 신념을 강화하기 위해 타자를 만들어 세움으로써 비슷한 방식으로 타 집단을 통렬히 비난해왔다'(29쪽)는 말로 표현된다.


이런 역사가 있으니 타인을 배제하는 마음이나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강자들에게는 더더욱. 이들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약자들을 타인으로 규정하고 배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오면서 자연스레 그러한 모습들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모리슨은 '타자화는 강의나 교육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배우게 된다'(30쪽)고 한다. 이는 생활에서 자연스레 몸에 배게 되는 것이다. 한번 몸에 밴 습관을 바꾸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나라 속담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에 잘 나와 있으니...


이렇게 보고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것 하나하나에 신경써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단어 하나, 몸짓 하나가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를 고려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서로 무해하게 접근하기 위해, 고작해야 푸른 공기일 뿐인 우리 사이의 거리를 뛰어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은 적지만 강력하다.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경험이다'(71쪽)고 모리슨이 말하고 있는데, 언어와 이미지, 경험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문학을 비롯한 예술이다. 예술이 간접경험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고, 토니 모리슨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허구적 서사는 타자, 즉 이방인이 되거나 혹은 이방인이 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통제된 야생 상태를 제공한다. 이곳에서 동정심과 명료한 눈을 가져볼 수 있고 자기 성찰의 위험을 감수할 기회도 얻는다'(143쪽)고 모리슨은 주장하고 있으니... 


문학(예술)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그리고 문학(예술)에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를 이보다 명료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고 본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서 타인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이런 노력을 해야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토니 모리슨이 주장하듯이 '언어와 이미지, 경험'이 중요한 자원이라고 하면 이것들을 동시에 만날 수 있는 것이 문학(예술)이니, 문학(예술)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글에서 토니 모리슨은 문학에 나타난 인종차별에 대해서 따끔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타인을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이런 작품은 비판을 받아야 하고, 그러한 작품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눈을 길러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더불어 이 책을 읽으면서 토니 모리슨이 쓴 작품 중에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을 읽고 싶단 생각도 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에 나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고로 좋은 책은 다른 책으로 독자를 인도하는 책이기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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