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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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런 사건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절대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기도 하는데, 무소불위의 위력을 지닌 사람은 그 위력에 취할 수밖에 없다. 위력에 취하지 않기 위해서는 성인(聖人)에 가까운 노력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권력을 지닌 사람들 곁에는 그 권력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 꼬여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권력에 아첨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다 보면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을 넘어서는, 더 막강한 인(人)의 장막이 설치된다.

 

그 다음부터는 권력의 입맛에 맞는 말들만 권력자의 귀에 들어간다. 권력자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지당하는 칭송의 말과 함께 곧장 실행된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권력자는 권력의 맛에 취해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자신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도 그에게 쓴소리를 하지 않고 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쓴소리를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충언역어이(忠言逆於耳)라고 진실을 담은 말들은 귀에 거슬리는 것이 당연할 텐데도, 권력의 맛에 취하면 그런 말을 듣지 않는다. 듣지 않으니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떠나가게 되고,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만 곁에 남게 된다.

 

세상에! 민주주의 시대에 지방자치단체장이 무슨 왕이란 말인가? 왕처럼 군림하는 지방자치단체장이 있다면 그는 단체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왕처럼 군림하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차기 권력을 노리는 유력한 정치인이라면 더더구나...

 

이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거야 원... 정말 마음이 답답하다. 아직도 이런 사람이, 그것도 민주주의 운동을 했다는 사람이... 싸우면서 닮아간다더니, 니체가 경고한 대로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느덧 예전 민주투사라고 하던 사람들, 그들 자신이 전제권력이 되었음을 깨달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섬뜩한 말이다.

 

안희정의 참모진들은 나를 '순장조'라고 불렀다. ... 수행비서는 왕과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비서는 누구도 모르는 왕의 비밀을 알고, 죽을 때까지 함구하다, 죽음으로 그 입을 끝까지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조직 내에서 안희정의 지위는 절대적이었다. (15쪽)

 

이게 말이 되나? 이 민주주의 시대에, 수행비서가 무슨 예전 내시들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인가. 순장조라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정치권에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니...

 

더 답답한 것은 미투 선언이 있고나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다. 권력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권력자만큼이나 권력에 중독되어 있다. 자신들의 권력을 위협하는 이러한 폭로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폭로한 사람을 파렴치한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권력을 쥐고 있음으로.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이겠는가. 우리나라 내부고발자들도 이런 일을 겪지 않았는가. 공익제보자들이 당한 일도 엄청난데, 성폭력 피해자들에게는 이들보다 더한 고통이 따르는 일들이 벌어진다. 김지은은 자신이 겪은 일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삼인성호(三人成虎)라고 했던가. 그런 식으로 몇몇이 모여 거짓말을 말하니 순식간에 나는 세간에서 '그런 여자'가 되었다. 사심으로 일을 한, 지사의 사생팬인,, 신뢰할 수 없는 이상한 여자. (20-21쪽)

 

사실이 중요한 것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채로 여론과 선정성만이 중요한 상황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상황을 만드는 데 얼마 전까지 나의 동료였던 사람들이 참여했다. 2차 피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큰 배신감과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꼈다. 권력 앞에서 사인 간의 우정은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음을 배웠다. 인간은 없고, 조직만 있었다. (156쪽)

 

대부분의 성폭력은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되기에 가해자들은 여전히 조직의 핵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피해자를 향한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2차 가해다. 가해자는 여전히 해당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서 피해자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피해자가 그 힘 밖으로 나오려면 그 분야에서 쌓아온 자신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 한다. (296쪽)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그것은 정치인 주변에서 이런 인식들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 권력 옆에서 함께 권력을 누리다 다음에는 자신이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 거기까지 가지 못하면 최소한 권력 옆에 계속 있을 수 있게 되는 것. 그러니 바른 소리보다는 입맛에 맞는 소리를 할 수밖에 없고, 일을 할 때 주변을 의식 안 할 수가 없다. 이런 구절이 나온다. 권력자 주변의 사람들이 권력자를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성폭력을 폭로한 사람 편에 서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캠프는 단순히 일하는 능력이나 학위 같은 스펙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평판을 중요시 여겼다. ... 누군가의 눈 밖에 나면 그것은 곧 커리어의 끝을 의미했다. (79쪽)

 

이런 사람들이 모여 캠프를 이루고, 그들을 중심으로 정책이 마련된다. 무언가 이상하다. 사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그들에게는 권력이 더 중요하다.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겉모습이 중요하다. 평판이 중요하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 가까이서 지내면서 알게 되면 환멸에 빠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 말로는 미투 운동에 찬성한다 하면서, 자신이 성폭력을 자행하는 사람이라면, 정말...

 

정치인 안희정의 대외적 이미지와 내가 업무를 통해 겪는 실상은 낱낱이 상반되었다. 그는 신분과 계급이 존재하는 세계에 살았다. 나의 자리에서는 그에게 아주 기본적인 인권이나 노동권도 존중받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101쪽)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인권, 노동권도 지켜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국민의 인권, 노동권을 지킨다는 것인지...

 

가끔 뉴스를 보면서 의아할 때가 있었는데, 검사들이 피의자를 조사할 때 밤샘조사를 하는 것, 왜 남들 근무하는 시간에 하면 되고, 시간이 지나면 집에서 쉬게 했다가 다음 날 다시 조사하는 것이 기본적인 인권 보호 아닌가 하는 생각.

 

법을 집행한다는 검사들조차 이렇게 수면권, 또는 8시간 노동권을 무시하면서 일을 하니, 어떻게 국민들의 인권, 노동권을 보장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지금도 지니고 있는데...

 

또 국회의원들은 어떤가? 그들 역시 어떨 때는 (이들이 일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 보면 참 부끄러운 결과가 나올 테지만) 늦은 밤에도 회의를 한다. 회의는 낮에 하면 되는 것이고, 낮에 그들이 회의 한 결과를 국민들에게 발표하면 될 텐데... 이들 역시 기본적인 노동권을 지키지 않고 있다.

 

사법부나 입법부에서 일하는 것이 이런데.. 정치인들은 이보다 더한가 보다. 수행비서 역할을 하려면 인권과 노동권을 포기해야 할 정도라니... 어떻게 이렇게 하면서 보편적 인권, 노동권을 운운하는지...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고 재판을 거치면서 여러 증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김지은은 단지 성폭력만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 노동권에서도 엄청난 침해를 받았음을 다시 인식하게 된다. 이런 비민주적인 활동들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니...

 

범죄 피해 사실과 관련된 수행 일정, 출장 기록, 영수증, 메시지, 사진 등 관련 자료를 모두 찾아서 제출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당한 범죄는 성폭력뿐 아니라 노동권과 인권 침해에까지 이른다는 사실을 하나둘씩 스스로 깨우쳐갔다. 그동안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무기력 속에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었을 뿐이다. (51쪽)

 

이런 일을 겪다 드디어 세상에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폭로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 폭로를 한 순간부터 더 큰 어려움이 닥친다. 바로 2차 가해다. 이런 2차 가해로 인해 김지은은 자해, 대인기피증 등 여러 질병에 시달리게 된다.

 

성폭력이 신체와 정신에 가하는 살인이라면, 2차 가해는 현재의 삶, 과거와 미래, 자아, 인격에 대한 살인이었다. 성폭력이 비공개 살인이라면, 2차 가해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칼로 난도질 하는 살인 같았다. (275쪽)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피해자를 가해자로 몰아가려는 사람들.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댓글을 통해 피해자를 난도질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니 피해자는 폭로한 순간부터 또다른 폭력과 싸워야 한다.

 

다행스러운 점은 이러한 피해자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 권력자 주변에서도 피해자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증언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피해자는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피해자가 어떤 식으로든 2차 가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2차 가해는 엄연한 범죄임을, 그또한 심각한 성폭력임을 명심하게 해야 한다. 피해자가 또다른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과 더불어 피해자가 일상 생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

 

피해자의 잘못이 아님에도 피해자가 그 이후에 더 힘든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김지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해자는 처벌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법에 의한 처벌로 자신의 행위를 무마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에게는 그런 행위가 일회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피해자에게는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지속되는 행위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러니 피해자가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그래야만 성폭력과 같은 일들을 막을 수 있다.

 

읽으면서 짠한 마음이 들었다. 재판은 끝났지만 김지은에게는, 또 피해자들에게는 이 일이 끝나지 않고 지속되고 있음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 우리 모두도 이러한 가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부끄럽다. 이 부끄러움이 지속되지 않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고, 인권, 노동권에 대한 감수성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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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제임스 볼드윈 지음, 박다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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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흑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아야 한다면? 그게 온당한 일일까? 아니 온당하다는 표현을 넘어서 그것은 범죄에 해당하지 않을까? 혐오 표현, 혐오 행동을 세계적으로 범죄로 취급하고 있는데, 피부색을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것 역시 혐오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것도 강하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에서, 걸핏하면 미국을 본받자고 성조기까지 들고 나와 시위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 그렇게도 선망하는 미국에서 흑인은 여전히 차별받는, 혐오당하는 존재다.

 

노예해방이 이루어지고, 흑백 분리가 철폐되었지만 현실에서 흑인은 주변부로 밀려나고 있다. 주변부로 밀려날 뿐만 아니라 백인의 폭력에 희생되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대놓고 흑인을 폭행하는 백인 경찰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대다수의 흑인이 사는 동네는 할렘이다. 도시에서 공동화된 곳. 그곳에는 마약과 폭력이 넘쳐난다. 백인들은 감히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지금 미국 흑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그들이 그런 삶을 원하겠는가. 원하지 않음에도 어떻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에 나온 볼드윈의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이 슬프고, 그가 외친 것들이 실현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답답하다. 그렇지만 현실을 부정할 수 없으니...

 

이 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내용과 자신의 체험을 담은 글. 두 편 모두 흑인이 겪어야 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런 흑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 주장들이 지금도 실현되지 않고 있어서 씁쓸하지만, 이 주장을 피부색에만 적용하지 말고 우리의 삶에 적용을 하면 '혐오 표현'에 대해서 반성하게 되기도 할 것이다.

 

조카에게 쓴 편지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네가 백인처럼 되려고 애쓸 까닭은 없다. 그들이 너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제넘은 가정에는 근거가 없다. 내 오랜 친구야, 정말 끔찍한 사실은 네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다. 아주 진지하게 하는 말이다. 너는 그들을 받아들이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저 순진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희망이 없으므로. 과연 그들은 아직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의 덫에 걸려 있고, 그 역사를 이해하기 전에는 덫에서 풀려날 수 없다. (27쪽)

 

늘 강자로 살아온 사람은 약자의 설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한다. 자신은 그런 처지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의 주변에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들만이 있을 뿐이므로.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 아님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니 볼드윈이 조카에게 백인처럼 되려고 애쓰지 말고 오히려 네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것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모르고 있음으로. 아는 네가 우위에 있는 것이므로. 너는 더 잃을 것도 없으므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길도 흑인들에게는 험난한 길임을 조카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자(백인이다. 문맥상 보면)들은 네 형제들이다. 네가 잃어버린 어린 형제들이다. 만약 <통합>이라는 단어에 의미가 있다면 이런 뜻일 테다. 우리 형제들이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보고, 현실 도피를 그만두고, 현실을 바꾸기 시작하도록 우리가 사랑으로 강요해야 한다는 것. (28-28쪽)

 

그런데 백인들은 여전히 현실을 보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렇게 그들 주변은 왜곡되어 있다. 진정한 현실을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흑인이다. 그 짐을 흑인들이 기꺼이 져야 한다고 볼드윈은 말한다.

 

다른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흑인들만의 나라를 미국에서 만드는 것에 반대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흑인들의 권리 향상이 이루어진 것도 흑인들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상황과 맞물려 이루어진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흑인들이 증오가 아닌 사랑으로 백인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이 책이 나온 지 60년이 되어가는 지금 미국에서 보여주고 있으니...

 

그가 이 책에서 쓴 글은 지금도 유효하다. 몇몇 내용을 인용한다.

 

교회에는 진실로 사랑이 없었다. 증오와 자기혐오와 절망을 가리는 가면만이 있을 뿐이었다. 성령의 거룩한 힘은 예배와 함께 끝났고, 구원은 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나는 모두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말은 신을 믿는 <우리>에게만 해당되었고, 백인에게는 전연 해당 사항이 없었다. (66쪽)

 

대학을 나와도 버젓한 직장을 가질 수 없었던 미국 흑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무대는 교회였다. 이것이 초기 흑인 민권운동에서 목사들이 많았던 이유라고 한다. 볼드윈 역시 교회에 나가 설교를 한다. 그런데, 그는 교회의 한계를 깨닫는다. 그 점을 드러내고 있는 말이다. 지금 교회는 어떤가? 미국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도 볼드윈의 이 말에 해당되지 않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자, 가진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글이 있다. 명심해야 할 말이다.

 

예속된 자들에게 잠재되어 있는 미개척의 힘과 마주하기 위하여, 도덕적 무게를 지니고 움직이는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하여 미국과 다른 서구 국가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있다. 스스로를 점검하고, 현재 신성시되는 것에서 풀려나고,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들의 삶과 고뇌와 범죄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해 온 대부분의 전제를 버리는 것이다. (72쪽)

 

그들의 조상이 자유를 사랑하는 영웅들이었다는 미신, 그들이 최고로 위대한 나라에 태어났다는 미신, 미국인들이 전시에는 무적이고 평시에는 현명했다는 미신, 미국인들이 멕시코인과 인디언과 다른 이웃이나 약자들을 언제나 명예롭게 대했다는 미신, 미국 남성이 세상에서 가장 솔직하고 정력적이며 미국 여성들은 순수하다는 미신. 니그로들은 그런 미신을 믿기에는 백인 미국인들을 너무나 잘 안다. (140쪽)

 

자신을 걸지 않는 한 아무것도 줄 수 없다. 자신을 걸 수 없는 사람은 단순히 줄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자유를 주는 유일한 방법은 그를 자유롭게 풀어 주는 것이다. 미합중국은 니그로에게 자유를 줄 만큼 충분히 성숙한 적이 없었다. (122쪽)  

 

이런 백인에게 흑인들의 처지를 맡길 수만은 없다고 한다. 그렇다.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그것도 서로를 증오에 빠뜨리는 폭력이 아닌, 서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포용의 방법으로. 볼드윈의 이 말들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분쟁에도 적용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사람은 자존감 없이 살 수 없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 그것이 잃을 것 없는 사람이 어떤 사회에서든 제일 위험한 피조물인 이유다. 그런 사람이 열 명이나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한 명이면 족하다. (109쪽)

 

자신의 상태를 견딜 수 없지만 심한 억압에서 자신의 상태를 바꿀 능력도 없는 사람은 항상 부도덕한 권력자들의 손바닥 위에 놓이기 때문이다. (126쪽)

 

백인이 해방되는 대가는 도시와 시골, 법 앞과 정신 속에서 흑인이 완전하게 해방되는 것이다. (134쪽)

 

증오를 쏟아부으며 당신의 목을 짓밟는 자를 마주 증오하지 않으려면 대단한 영적 회복력이 필요하다. 당신의 아이들에게 증오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으려면 그보다 더 큰 기적에 가까운 통찰과 관용이 필요하다. (138쪽)

 

유한한 지구다. 우주 역시 무한하다고 하지만 인간의 한계일 뿐, 우주 역시 유한하다. 그렇다면 유한한 공간에서 유한한 시간 속에 사는 인간들이 서로를 보듬고 살면 좋지 않겠는가. 똑같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내가 다른 존재들이 있음으로 해서 유한한 삶을 무한하게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피부색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다름도 차별이 되어서는 안 됨을 다시금 생각하는 글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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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8-28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으려고
빌려 놓았는데 아직도 민기적거리고
있네요.

최근 위스콘신에서 또다시 총에 맞은
세 아이의 아버지 뉴스에 충격을 받았
습니다...

어떤 종류의 차별에도 반대합니다.

kinye91 2020-08-29 09:50   좋아요 0 | URL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동경하는 미국에서 여전히 차별이 존재하고, 차별이 생명을 위태롭게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는 것, 그것이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안타까워요. 어떤 형태든 차별은 사라져야 한다고 저도 생각해요.
 
포노 사피엔스 - 스마트폰이 낳은 신인류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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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발전을 뒤로 돌릴 수는 없다. 이미 시작된 기술변혁의 시대에 뒤따라가기만 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 적어도 이미 변하는 시대라고 인식했다면, 그 변화에 적응하는 것을 넘어 변화를 이끌 수 있어야 한다.

 

현대는 스마트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손 안에 든 그 작은 기계가 우리들 삶 전반을 움직이고 있다. 이제는 결제도 현금으로 하지 않는다. 현금의 시대가 카드 시대로 넘어간 지 오래지만 이제는 카드 시대로 저물어 가고 있다. 그냥 핸드폰 하나면 다 된다.

 

심지어 자신을 인증하는 것도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핸드폰으로 인증을 하게 된다. 주민등록증을 제시해도 인증을 하지 못해 물건을 구입 못할 때도 있다. 핸드폰이 없다면. 그만큼 우리들 생활에서 핸드폰은 사치품, 기호품이 아니라 필수품이 되었다.

 

핸드폰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핸드폰을 이용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로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원격수업을 하는데, 컴퓨터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아이들은 핸드폰으로 한다. 언제 어디에서고 핸드폰만 있으면 학습이 가능해 진 것이다.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더더욱 필요해진 것이 핸드폰이다.

 

실시간 수업을 하는 것도 핸드폰으로 할 수 있다. 그러니 가장 보수적이라는, 시대가 변한 다음에야 비로소 변하기 시작하는 교육에서도 핸드폰은 이미 대세가 되고 있다. 핸드폰 소지를 아무리 금지해도, 학생들은 몰래몰래 들고 다닌다. 핸드폰을 걷어서 보관하고 방과 후에 준다고 하더라도 학생들은 공기계를 내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들의 핸드폰을 떠나보내려 하지 않는다.

 

아직도 학교는 뒤처져 있다. 핸드폰에 관한 온갖 규제들이 학생들을 얽어매고 있는 상황. 그나마 코로나19로 인해 핸드폰이 교육 활동을 할 수 있는 도구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 책 최재붕 교수의 '포노 사피엔스'는 이런 시대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규제가 여전한 우리나라에서 이대로 가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것.

 

다른 나라들은 이미 스마트폰을 이용한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규제가 심해 많은 부분에서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미 세상은 변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은 우리들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스마트폰 하나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교육부터 금융까지, 심지어는 사교까지.

 

그러니 이런 현실을 읽고 스마트폰 시대를 살아갈 수 있도록 발상을 전환해야만 한다고 한다. 그렇지 못하면 도태될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스마트폰, 인공지능 등 이미 전세계는 이쪽으로 가고 있다. 이게 기반한 삶의 방식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아직 온라인 플랫폼이 미국이나 중국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그만큼 우리는 오프라인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보라.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광통신망과 거의 모든 국민이 지니고 있는 스마트폰으로 인해 대응을 즉각적이고 적절하게 할 수 있었다.

 

아직 빅데이터를 활용하지 않고 있지만, 방역부분에서는 이런 빅데이터를 이미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연스레 방역을 통해 스마트폰을 활용한 활동들이 우리들 삶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들 삶의 방식을 바꿔가고 있다. 기업들이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하고, 교육 부분도 바뀌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마트폰 시대를 인식하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우리는 그런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이 바뀌어서는 안 된다. 최재붕 교수도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스마트폰 시대를 살아가고자 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좀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사람이 기계에 종속되는 삶이 아닌, 더 여유를 가지고, 좀더 자유롭고 평등하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기반으로 스마트폰 시대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시대는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포노 사피엔스 시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인류를 만났다. 그런 포노 사피엔스들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세상의 변화를 잘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 변화해야 할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는 사람 이 책을 읽어보라. 왜 변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스마트폰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사람,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스마트폰이 주가 아니라 사람이 주라는 것. 사람을 위해서 스마트폰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 사람을 위한 세상을 위한 기반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포노 사피엔스들의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러모로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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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나는 이렇게 본다 보리 한국사 3
김용심 지음 / 보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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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마워 하면서 더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런가? 지금 우리나라를 보자. 3D업종이라고 하는 데에는 주로 이주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하는가? 고마워 하는가? 아니면 없는 나라에서 왔다고 무시하는가?

 

그들을 존중하지 않더라도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데, 과연 그렇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여전히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차별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주노동자뿐만 아니라 결혼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 역시 차별을 받고 있지 않은가.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오랜 전 옛날 우리 조상들은 도살하는 일에 서툴렀다. 그래서 동물을 잡아 먹기 위해서 북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그들을 양수척, 화척, 재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함께 살게 했다. 함께 살게 했으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멸시와 차별이었다.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 대우하지 않고 사회에서 격리해서 그들만의 공간에서 지내게 하는, 자신들은 그들이 생산한 물품과 잡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정작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천시하고, 멸시했다. 그것이 고려 시대에 동물을 도축하는 과정이 이랬다고 서긍이 전한다고 한다.

 

잡을 때는 먼저 네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넣고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가르는데 위장이 다 끊어져서 똥과 오물이 흘러넘친다. 따라서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다. 서긍, <고려도경> 권23 '도축' (140쪽)

 

이렇게 고기조차도 제 맛을 모르게 먹던 사람들이 백정들의 도움으로 제대로 맛을 낸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마워 해야 하는데, 그들을 오히려 천시하고, 자신들이 그런 일에 종사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조선시대에는 군대조차도 소를 잡지 못했다니 하니 그 한심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양수척, 화척, 재인 등등은 백정으로 용어가 통일된다. 일반 백성으로 대우하겠다는 의도로 백정이라는 말을 쓰도록 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멸시받는다. 하다못해 노비에게도 무시를 당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일에 나름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 책에서 새롭게 알게 된 내용

 

소는 그냥 짐승이 아니라 극락의 태자.

그러므로 소를 잡는 일은 극락에 가고자 도를 닦는 일이다, 따라서 소를 잡는 백정 또한 고귀하고 신성한 존재라는 믿음은 백정들에게 하나의 구원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소도 그냥 부르지 않고 하늘나라 왕자라고 소 우牛를 붙여 '우공태자'라 불렀다. 소를 잡는 칼도 영험한 칼로 여겨 소중히 대했고, 소를 잡기 전에는 늘 몸가짐도 정결히 했다. ... 백정들은 하늘에 오르면 왼쪽이 극락이, 오른쪽에 지옥이 있다고 믿어 왼쪽을 특히 신성하게 여겼다. 그래서 소를 잡을 때도 왼손만 썼다. (151쪽)

 

천시받던 그들의 대표적인 예가 중종반정에 참여한 당래와 미륵이라는 사람이다. 특히 당래는 벼슬까지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무시. 결국 다시 강도짓을 하게 되고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공신이 되어도 또 벼슬을 해도 백정은 그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한다. 이렇게 천시받던 백정들이 가끔 집단적으로 저항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저항이 조직적이고 지속적이 되는 것은 일제시대에 벌인 '형평사'운동이다.

 

이 운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강상호의 이야기를 통해서 백정들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양반임에도 백정들의 권리를 위해 평생을 살았던 강상호. 그가 받은 멸시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지만, 그가 죽었을 때 전국의 백정들이 와서 그를 저세상으로 보낼 때의 모습을 보면 강상호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강상호와 같은 사람의 행동을 보면 평등이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평등을 추구해야 함을 백정들의 삶을 보여주는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자, 지금 우리 시대에 '백정'들은 없는가? 주위를 살펴보라. 우리 주변에 아직도 '백정'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아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런 존재들을 찾아낼 수 있는 눈, 그리고 그런 차별을 바꿀 수 있는 행동. 그것이 사회를 조금 더 평등한 사회로 이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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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 폭풍의 시대 - 치명적 신종, 변종 바이러스가 지배할 인류의 미래와 생존 전략
네이선 울프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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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미 알고 있었다. 모두는 아니지만, 우리 인류는 앞으로 우리에게 판데믹(팬데믹이라고도 한다)이 여러 차례 올 거라는 사실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냥 당장 닥친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무기에 들어가는 돈의 몇 십분의 일도 안 되는 투자만 하고 있었을 뿐.

 

그 결과가 무엇인가? 현재 코로나19로 전세계가 고통받고 있다. 판데믹이 올 거라고, 그에 대해서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들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결과가 지금 세계가 겪고 있는 비극이다.

 

판팬데믹을 겪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고 있다. 잠시 통제가 풀리니 수천 명이 모여서 몸을 부딪치며 즐기는 현실, 한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이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코로나19를 말하는 모습. 마스크가 중요함에 대해서는 더이상 논란거리도 되지 않는데도 여전히 마스크 착용을 거부하는 어떤 대통령. 이런 사람들이 정치를 하면 판데믹은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겪지 못한 질병이 나타난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시작한다. 그러다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사람들은 공포에 빠지고, 정치권은 어떤 대응책도 내놓지 못한다.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이란 기껏해야 봉쇄다. 격리과 봉쇄. 그러나 헌신적인 의료인들이 나타난다. 의료인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나타난다. 이들의 피나는 노력으로 질병은 점차 사그러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질병은 사라진디. 퇴치된 것이 아니라.

 

이런 공식이 되풀이 된다. 중세나 근대나 현대나 비슷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과거로부터, 실패로부터 무언가를 얻는 것이 인간 아니던가. 그런데도 우리는 기존에 겪었던 감염병들에서 무언가를 얻지 못했다. 그냥 대응방식이 좀더 구체적이고 세련되어졌을 뿐. 그 질병을 예방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또다시 판데믹을 겪고 있다.

 

판데믹이 될 수 있는 여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고 한다. 현대는. 우리들 편리한 생활이 감염병을 순식간에 퍼뜨릴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도로망의 확충, 교통수단의 개발, 장기이식과 수혈을 할 수 있는 의학기술, 생태계 파괴 등등이 이런 조건이다. 우리가 빨리 세계 전역으로 갈 수 있듯이, 우리들과 더불어 세균과 바이러스들도 세계 전역으로 빠른 시간 안에 퍼져 간다.

 

그리고 동물들이 살아가는 환경을 파괴하고 무분별한 동물고기 섭취로 인해 동물이 지니고 있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들이 우리 몸에 들어온다. 이것들이 변종을 일으켜 사람 간에 전염이 되는 순간, 판데믹은 이미 일어난 것이다.

 

네이선 울프가 쓴 이 책, 2011년에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읽어도 현실과 맞아떨어진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네이선 울프는 판데믹을 예방하기 위해 기구를 조직하고 그에 대한 활동을 하고, 또 수많은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판데믹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했다. 이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자, 우리에게 다가올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는 이런 경로를 거쳐 판데믹을 유발할 수 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들은 인간과 돼지와 조류가 동거하는 농장에서 재편성될 수 있다. 돼지는 인간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받아들일 수 있고, 철따라 이동하는 철새들을 비롯하여 온갖 조류의 바이러스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 철새들은 닭과 오리 같은 가금류를 통해 직접 혹은 간접으로 돼지를 감염시킬 수 있다. 조류에서 옮겨진 새로운 바이러스가 돼지와 같은 가축의 체내에서 인간 바이러스들과 서로 영향을 미칠 때 예상되는 결과 중 하나가, 인간 바이러스의 일부와 조류 바이러스의 일부를 지닌 완전히 새로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출현이다. 이 새로운 바이러스는 자연항체로도, 그리고 과거에 유행한 인플루엔자 계통의 백신으로도 억제하기 힘들 정도로 다르다. 217쪽.

 

인간과 동물, 특히 야생 포유동물의 긴밀한 접촉에서 새로운 판데믹이 출현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상적인 예측 시스템이 완성되기 전이라도 이런 형태의 접촉을 줄이는 방향으로 우리의 행동방식을 바꿔가야 한다. 319쪽.

 

지극히 다양한 병원균들로 뒤범벅인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야생동물을 사냥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병원균의 출현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드는 셈이다. 온 세상을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 병원균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위의 문제는 사냥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함게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320쪽.

 

사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 차원의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비용을 아깝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 야생동물고기가 세계인의 건강을 위협한다. 321쪽.

 

이런 문제제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10년 동안 무엇하고 있었나 싶다. 도대체 인간은 질병과의 싸움에서 무엇을 배웠던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꾸준히 이야기되고 있었음에도 이렇듯 모르쇠로 일관해 오다니...

 

코로나19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그런 전조는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우리가 무시하고 있었을 뿐. 네이선 울프와 같은 사람이 계속 판데믹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생활방식을 바꾸지 않았을 뿐더러, 더 빨리, 더 많이 이동할 수 있는 도구들을 만들어냈고, 또 더 많은 동물들과 접촉하고 있지 않았던가. 또 너무도 많은 야생동물들의 생활터전을 파괴함으로써 그들이 인간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올 수밖에 없게 하고, 또 그들을 잡는 과정에서, 또 날것으로 먹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인간에게 없던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를 인간의 몸으로 옮겨놓지 않았던가.

 

그렇다. 코로나19에 대한 백신이 나올 것이다. 치료제도 나올 것이다. 언젠가는.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생활방식을 유지한다면 코로나19가 종식되어도 또다른 바이러스들이, 박테리아들이 우리를 판데믹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니 감염병을 단지 치료 차원에서 접근하지 말고 지구에서 살아가는 생명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존재하는 것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들이 다른 존재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는 생활방식. 그것이 필요하고, 거기에 대한 전세계적인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1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293쪽에 보면 이 책은 2011년에 나왔다고 한다. 내가 읽은 책은 2015년에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책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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