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사 사회
송병기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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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들 삶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이 말에는 공동체는 없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개인은 있지만 사회는 없다. 이런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아니다. 각자도생의 사회는 어쩌면 홉스가 이야기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일 것이다.


내 삶을 공동체가 보살펴주지 않는데, 어떻게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나 아닌 남들은 모두 내 삶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사회가 될 수밖에.


하여 우리는 복지제도를 통해서 각자도생의 사회를 극복하려고 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므로, 내가 모든 것을 만들고 쓰고 할 수는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므로,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나아가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런 노력으로 인해 복지제도가 만들어졌고, 한 사람의 삶을 그 사람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최소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생각. 그리고 그런 제도.


각자도생의 문제는 이렇게 풀었다. 그런데, 이 책 제목은 각자도생이 아니다. 각자도사다. 세상에 죽음만큼 개인적인 어디 있을까 싶은데,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각자도사의 사회라니...


죽음에 이르러서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죽음만큼 개인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가더라도 죽을 때는 홀로 죽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죽음이 홀로 겪어야 하는 일일까? 이 책은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누가 돌봄을 책임졌는가? 아니 누구에게 돌봄을 전가했는가? 그런 돌봄을 하는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돌봄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다. 돌봄을 받는 사람은 또 어떤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해지는 온갖 치료들이 과연 사람답게 죽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또 노인들을 사회 부담으로 여기고 있는 현실이 바람직한가?


수치로, 젊은 세대는 줄어들고, 늙은 세대는 늘어나, 젊은 세대의 부양 부담이 가중된다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냥 부양해야 할 덤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1부는 이런 노인들의 죽음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의학적 치료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환자와 보호자, 의사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또 국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정책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섬뜩하기도 하다.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도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1부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1부 각자 알아서 살고, 각자 알아서 죽는 사회

집, 노인 돌봄, 커뮤니티 케어, 호스피스, 콧줄, 말기 의료결정, 안락사


'집'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집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구조라고 한다. 누가 돌보겠는가? 노인 돌봄과 커뮤니티 케어가 대두가 되는데, 이 책에서 노인 돌봄이 생명 유지와 연결이 되어 '콧줄'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존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묻고 있다. 그러니 '말기 의료결정과 안락사'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사회가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쪽으로,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과 비슷한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커뮤니타 케어'를 들고 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한다.


그냥 노인이 집에 있으면서 방문하는 의료진이나 돌봄 노동자들에게 돌봄을 받는 것으로는 '커뮤니티 케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스피스'와 같이 치료가 아닌 돌봄이 이루어지는 곳이 더 늘어나야만 한다고 하는데, 이도 쉽지 않는 일이다. 호스피스와 관련해서는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무작정 연명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하는 호스피스.


'호스피스를 죽으러 가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환자를 위한 환대와 돌봄의 시공간으로 더 과감하게 상상해야 한다. 시민들이 호스피스를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면 죽음의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74쪽)


이런 1부에 이어 


2부 보편적이고 존엄한 죽음을 상상하다

제사, 무연고자, 현충원, 코로나19, 웰다잉, 냉동 인간, 영화관


을 통해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제사 풍경이 바뀌어야 하고, 다양한 죽음들을 이야기하면서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가 되는데...


죽음에도 차별이 있었음을 명심하고, 그런 차별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각자도사 사회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우리가 함께 하는, 그런 실질적인 사회적 동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고 이야기 하는 듯하다.


다만 이 책의 1부가 우리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면 2부는 좀 약한 감이 있다. 1부에서 의사들이 지닌 문제에 대해서도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요즘 의사 정원 확충과 관련해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는 글들도 꽤 있다.


죽음과 의료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므로... 하여간 각자도생의 사회도 각자도사의 사회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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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로운 식탁 - 우리가 놓친 먹거리 속 기후위기 문제
윤지로 지음 / 세종(세종서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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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기후 위기가 우리 식탁에서도 일어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기후 위기 하면 좀더 거시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먹는 일에서도 기후 위기를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생각에 씁쓸해진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식탁에 오른 음식들은 기후 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선 우리는 기후 위기 하면 화석 연료를 생각하고, 공장과 자동차가 내뿜는 배기 가스를 생각하는데 식탁에 오르기까지 음식들은 공장과 자동차를 거치게 된다.


즉,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식품들도 공장과 자동차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만이 아니다. 육식이 기후 위기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는 잘 알려져 있으니, 이 책에 나온 내용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채식 또한 기후 위기와 관련이 있다고 하니,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농업이 기후 위기를 일으키는 요소로도 작용한다고 하는데, 특히 땅을 갈아엎는 농사는 땅 속에 있는 탄소를 대기 중으로 배출한다고 한다. 그 양이 무시할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양이라고 하니 그것 참.


대안으로 땅을 갈아엎지 않는 농사를 제시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농업이 자리잡지 못하고 있음도 지적하고 있고, 대안으로 나온 스마트팜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경재배도 있는데, 하지만 그 수경재배 역시 많은 에너지를 들여 짓는 농사이기에 기후 위기를 완전히 해결할 수 없다.


축산업과 농업이 나왔으면 이제 어업이다. 어업과 기후 위기를 연결지어 본 적은 없는데, 이 책을 통해 어업 역시 기후 위기에서 멀어질 수 없음을 알게 됐다.


단지, 어획량이 줄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어획을 하기 위해서 나가야 하는 배들에 쓰이는 연료가 문제라는 것. 엄청나게 많은 배들이 많은 연료를 소비하고 있는데, 이런 일들로 인해 많은 양의 탄소가 배출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원양어업을 줄이고 양식업을 하면 어떨까? 아니다. 양식을 하는데 전기가 엄청 든다. 그리고 전기는 탄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친환경으로 전기를 생산하면 좋겠지만, 아직도 전기의 많은 양이 친환경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기 소비가 많다는 얘기는 탄소 배출이 많아진다는 얘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 식탁과 관련 있는 농업, 축산업, 어업이 모두 탄소 배출에서 기후 위기와 관련이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육식을 줄이자는 주장에 동의한다. 지금처럼 육류 소비가 많아지면 축산을 하기 위해서 많은 숲들이 사라진다는 사실은 대부분 동의하기 때문이다. 육류 소비를 줄이고 채식을 강화하면 탄소 배출을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다.


농업도 마찬가지다. 유기농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제도를 뒷받침해야 한다. 제도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유기농으로 전환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때 유기농 비율이 늘었다가 다시 줄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깨끗하고 예쁜 농산물을 원하는 소비자들의 심리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유기농을 뒷받침할 제대로 된 제도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농업이나 어업에서 탄소를 줄일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식탁이 기후 위기와도 관련이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문제는 이 다음이다. 문제를 알았으니 풀어야 한다.


그 푸는 방법이 문제다. 답은 보이는데, 그 답을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과 제도 차원이 함께 가야 하는데, 공업에 관해서는 제도들을 정비하고 있지만, 농,어,축산업에 대해서는 아직도 제도 정비가 요원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기후 위기가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탄소는 계속 배출되고 있고, 배출되는 양을 포집되는 양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다른 분야에서는 연구가 많이 된 탄소 배출에 대해서 '한국의 농축어업이 '3무(無)'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데이터가 없었고, 정책이 없었다. 그리고 정책이 있는 곳엔 감시가 없었다.'(335쪽)고.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공업 분야만큼 농축어업 분야에서도 탄소 배출에 대해서 고민하고,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저자가 제시한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하지만 이 단순한 방법이 실현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운지 지금까지 탄소 발생 과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순한 방법이라도 우리는 자꾸 말해야 한다. 미래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현재를 위해서도.


'소비자로서 저탄소 먹거리를 고르고, 시민으로서 탄소를 줄이는 시스템을 요구하는 것, 그 두 가지가 탄소를 발생시키는 '탄소로운 식탁'을 바꿀 것이다 이제 잘 먹고, 잘 요구하자.'(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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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는 착각 (리커버 에디션)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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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하다. 참 좋은 말이다. 누구에게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이래서 공정한 사람이라는 말은 칭찬이다. 우리는 공정을 추구한다. 


하지만 공정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공정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공정이라는 말을 쉽게 쓰지만, 그 공정을 실현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아니, 무엇이 공정인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된다.


그렇다면 가장 쉽게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은 기회의 공정이다. 누구에게도 기회를 박탈하지 않고 동등하게 주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공정하다고 한다. 기회의 공정을 넘어서, 결과의 공정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결과의 공정은 너무도 다양한 해석을 나을 수 있어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단지 기회의 평등만이 아니라 결과물의 평등도 추구해야 한다고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자. 결과물을 평등하게 공유한다? 이것이 공정인가?


아니면 기회를 공정하게 주었기 때문에 결과물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어야 하는가? 여기서 논쟁이 시작된다.


기회의 공정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지금 시대는 신분에 따라, 인종에 따라, 또는 경제적 능력에 따라 기회가 달라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회는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져야 한다는 데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결과는? 기회가 공정하다면 결과는 불공정해도 좋다. 아니 이것은 불공정이 아니라 자신이 한 행위의 당연한 결과다. 그러니 여기에 기계적인 평등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결과물은 사람에 따라 달라야 하고, 달라질 수밖에 없다.


기회가 공정하니, 결과가 다르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 말은 자명하게 들린다.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여기서 샌델은 질문을 한다. 우리가 말하는 공정은 능력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능력주의를 합리화하고 있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그리고 능력주의는 결코 기회의 공정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즉, 기회조차도 공정하지 않음을 인식해야 하는데, 능력주의가 이를 가리고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명문대 입학률이다. 대부분 부유층이거나 기득권층의 자녀들이 입학을 많이 한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미국의 입학시험인 SAT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수학능력시험(수능)이다.


아주 공정하게 동일한 시험을 봐서, 자신이 얻은 결과로 대학에 진학하게 하는 일. 얼마나 공정한가?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졌다. 결과는 자신의 능력이다.


능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회를 공정하게 주었기 때문이다. 정말,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는가? 학생들의 처지에 따라서 시험을 보기 전에 주어진 기회가 같을까?


다르다. 다르다는 것이 샌델의 주장이다. 누군가는 고액 과외나 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오로지 학교 수업으로만 시험을 보아야 한다. 이런 모습이 과연 기회의 공정인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같은 기회에서 더 나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이미 출발선에 서기 전에 다른 경험을 했다. 다른 능력치를 부여받았다. 출발선이 같다면 결코 결과가 같아질 수 없다. 그럼에도 공정하다고, 다른 결과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승자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고, 패자는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된다. 즉, 능력주의가 만연하면 사회는 공동체를 이루기가 힘들다. 누군가에는 깊은 패배감을 심어주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샌델이 주장하는 능력주의의 폐해다. 경제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고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결과물도 많이 가져가야 한다고 여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패배감만 심어줄 뿐이다.


사회에서 도태되고 있다는, 자신은 실패자일 뿐이라는 생각. 이것이 능력주의가 보여주는 문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공정을 능력주의와 연결짓는다.


능력에도 우연이 많이 작동함을, 따라서 자신의 결과물을 나눌 수도 있어야 함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 바로 능력주의라고 한다. 그러므로 능력주의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 없다고 샌델은 주장한다.


처음부터 분석은 명쾌하다. 왜 능력주의가 문제가 되는지, 미국이라는 나라도 우리나라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준다. 그럼에도 해결책은 별로 없다. 샌델 역시 일반적인 이야기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쉬운 답은 없기에... 거꾸로 말하면 답은 너무도 쉬운데, 우리가 실행하지 못하고 있기에...


샌델의 주장은 이렇다.


'대체 왜 성공한 사람들이 보다 덜 성공한 사회구성원들에게 뭔가를 해줘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우리가 설령 죽도록 노력한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자수성가적 존재나 자기충족적 존재가 아님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 사회 속의 우리 자신을,그리고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운명의 우연성을 제대로 인지하면 일정한 겸손이 비롯된다.' (353쪽)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삶의 결과물은 어쩌면 운칠기삼(運七技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조상들이 자주 말하던 '운칠기삼' 이 말을 명심한다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결과물에서 다른 사람들을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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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폭식 사회 : 기술은 어떻게 우리 사회를 잠식하는가? - 2022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2023년도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 선정 우수과학도서
이광석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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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인공지능에 환호하고 있을 때 그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디지털이나 인공지능이나 또는 메타버스나 다 기술이다. 기술이 발전하는 것을 진보라고 보고, 이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나라 역시 예외는 아니다. 어쩌면 다른 나라보다도 더 빨리, 더 강하게 디지털화를 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교 교육에서 이 점은 두드러진다. 학교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학습을 시켜야 하며, 칠판은 전자칠판으로 바뀌어야 하고, 교과서는 디지털 교과서가 되어야 하며, 학생들 개개인에게는 디지털 기기를 하나씩 보급해야 한다.


대면으로, 서로 몸을 부딪히며 경험해가는 교육에서, 교사와 학생이 얼굴을 맞대고 수업을 하던 장면에서 이제는 중간에 디지털 기기가 끼어들어 교사는 디지털 기기를 작동시키고(또는 학생들이 디지털 기기를 작동하며), 학생들은 그 기기를 통해 배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미래 교육의 모습이다. 과연 좋을지? 코로나19로 대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밝혀졌음에도, 학교라는 공간에 나오더라도 학습은 디지털 기기와 하는 비대면 교육이 강조되고 있으니, 가히 디지털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학교가 이런 정도에 이르르면 사회의 다른 부문에서는 더욱 디지털화가 가속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대체로 교육은 어떤 기술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기술을 우선시 하는 태도는 질병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인수공통감염병조차도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더욱더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현실에서 저자는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런 사회를 '디지털 폭식 사회' 또는 '기술 폭식 사회'라 부르고 있다. 저자가 정의하고 있는 기술 폭식 사회는 이렇다.


'기술 폭식 사회는 그 어떤 때보다 사회가 기술에 매달리고, 기술 그 자체를 사회문제의 직접적 해결책으로 보고, 자본주의 기술 그 자체에 대한 이성적 판단이나 성찰의 여유가 적을 때 발생하는 이상 현상이다.' (205-206쪽)


과학기술이 초래한 문제는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보다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기술을 개발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자신들의 생활 형태를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기술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발상. 또 그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디지털 사회가 어떤 문제를 야기할지에 대한 논의도 없이 그렇게 나아가야 한다고 믿고 추진한다.


이런 사회에서 기술을 통제하는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지금도 그렇다. 인터넷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좋아요' 아닌가. 팔로워 숫자와 좋아요 숫자로 자신의 처지를 가늠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검증되지 않은 일들을 얼마나 빠르고 쉽게 유통시키는가?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우리가 몇 해 동안 계속 경험해 오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이를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기술 권력의 문제는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도덕성, 개인의 책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기술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술 권력의 품에 안기게 된다. 저자의 말을 인용한다.


'기술 권력의 문제는 곧 기술을 오남용하는 사회에 대한 급진 정치적 개입이나 기술 실험과 연결되어야 문제의 해결 지점이 보인다. 이 점에서 개인의 데이터 역량을 키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술에 대한 개인 성찰 능력에 더해, 묵은 기술과 새로운 기술의 도시설계 속 배합과 앙상블, 거의 모든 연령과 세대에 두루 친숙한 기술의 보편적 접근과 사회 공통의 보편적 '기술 감각' 마련,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술 도입 시 시민 숙의 과정의 정례화, 풀뿌리 대안 생태 기술의 장려 등 기술 대안의 상상력을 동시다발적으로 창안해내야 한다.' (236쪽)


이런 주장이 있음에도 사회적으로 민감한 기술에 대해 과연 시민 숙의 과정을 거친 적이 있었던가? 디지털, 인공지능 시대가 되었다고 뒤처지면 안 된다고, 더욱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있지만, 여기서 잠시 멈추고 디지털 사회가 초래할 문제를 생각해 보자는 주장은 언급이 되지 않는다.


이런 주장은 소수에게서 나오고 있지만, 더이상 퍼지지 않는다. 지지자를 획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기술 권력을 쥔 자들이 이런 주장을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장은 쉽게 퍼뜨리지만 반대하는 주장은 묻어두는, 그

런 행태. 이것이 바로 기술 권력이다.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는 지금. 성장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가 겪었던 큰일들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저자는 묻고 있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이대로 나가면 우리가 겪었던 감염병이나 기후 재앙보다 더 심한 일들을 겪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모두가 우 몰려 가는 방향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고 한다.


특히 이런 기술 개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 더욱 극한 상황으로 내몰린 노동자들, 그리고 디지털이 초래하는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한다.


지속적으로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데 저자는 '생태 기술과 공생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고 한다. 기술 개발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방향에서만은 생태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생태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 자연-사회 생태계에 걸쳐, 생태 기술과 공생 기술의 문제를 전면화한 채 인공-자연, 생명-기계, 가상-실제, 물질-비물질 사이의 기술 배합 비율을 적정 수준에서 조절하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지구 곳곳에 만연한 기술 독성을 치유할 자율 능력을 우리 스스로 익히는 길이기도 하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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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3년 가을호 - 통권 183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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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을 읽다. 길을 잃은 시대에 길찾기를 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여전히 녹색평론에서 하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내는 녹색평론에 응원을 보낸다.


후쿠시마 오염수... 오염수라고 하지 말고 처리수라고 하자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흘러나오고 있다고 하는데, 일본에서 그렇게 하자고 한다면 제 나라니까, 자기들 이익이 걸려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익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피해만 쌓여갈 뿐인 우리나라에서 오염수 방출을 반대하기는커녕 용어를 바꾸어야 한다는 소리도 나오고 있으니...


무엇이 과학인지 정말 알고 떠드는지 궁금하다. 원자력이라는 말을 당연하게 쓰고, 핵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하는 집단에서, 인체에 해롭지 않은 피폭량이 있다고 하는 말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우리 몸에 들어온 방사능물질들이 그냥 사라져 버리나? 아주 작은 양은 몸이 견뎌낼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는 말이 과연 과학적인가?


진정 과학적이라면 아주 적은 양이라도 인체에 해가 될 수 있음을 가정하고, 오랜 시간 동안 검증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그냥 주어진 자료만 보고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핵 오염수부터 시작하여 기후재앙, 그리고 정치의 후퇴 등을 다루고 있는데, 진정 민주주의라면 과학이라는 이름을 오용하면서까지 국민들 정서에 맞지 않는 정치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너무도 후퇴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수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그들을 통제할 수단을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주의를 선거로만 국한시킨 결과이기도 하겠고.


문제는 경제야가 아니라 문제는 정치다.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당연히 정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정치적인 사람들이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확립되어야 한다. 


4년에 한 번, 또는 5년에 한 번 투표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늘 함께 할 수 있는 민주주의, 남에게 자신의 권리를 맡기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확립되었다면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왈가왈부 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또한 국회의원들 자기들 이익을 위해서 제대로 하지 않는 선거법 개정, 예전에 이루어졌으리라. 그나마 형식적 민주주의는 이루었다고 자부했었는데, 그 형식마저도 하나하나 무너져 가고 있으니...


이런 정치적 후퇴는 삶의 퇴보를 부른다. 아니 퇴보가 아니라 위기다. 재앙이다.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온갖 재난을 보라. 이는 정치의 퇴보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방향을 잃은 정치인데, 견제를 하지 못하고 바꾸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지 공론을 모으는 일을 하지도 않고 있으니, 이런 일이 생기게 된다.


녹색평론 이번 호를 읽으면서 지금 정치의 모습, 또는 경제 성장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이제석 광고가 떠올랐다.


앞으로, 적에게 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총구는 자신의 뒤통수를 겨누고 있는 광고..


<사진 출처 : [광고 천재 이제석] 개정판. 156-157쪽.>


이것이다. 성장을 외치는 지금의 모습은 이렇게 앞으로 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성장만능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제까지 성장, 성장 하고 있을텐가? 지금의 삶을 방식을 유지하면서 기후재앙을 벗어난다는 것은 망상이다. 이 성장이 결국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이 광고처럼

<사진 출처 : [광고 천재 이제석] 개정판. 158-159쪽.>


그러니 우리는 삶을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녹색평론 이번 호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성장 중심에서 벗어나 자급 중심의 사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공업이 아니라 농업을, 그것도 소농 중심의 농업을 중시해야 한다고. 


큰집단보다는 작은집단이 공동체를 이루어 그곳에서 생활이 가능해지도록 해야 한다고... 그렇게 외치고 있다. 계속해서.


성장을 중심으로 하는 바위가 언젠가는 뚫리고 깨진다는 믿음으로 그렇게 녹색평론을 꾸준히 외치고 있다. 아직까지도. 한편 한편의 글을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이번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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