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23년 겨울호 - 통권 184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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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를 읽으면서 왜 영화 [서울의 봄]이 생각났을까?


  오지 않은 서울의 봄... 이런 생각을 하다가 레이첼 카슨이 쓴 [침묵의 봄]도 생각났고.


  막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막을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고 싶은 '서울의 봄', 아니 그해 겨울.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었을까? 여러 방법이 제시되었다. 분명 실현 가능했던 방법들이었고, 그 방법들 중에 몇 가지만, 아니 한 가지만 실현이 되었어도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겠지.


  방법은 있었고 실행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못했다. 못했다고 하기보다는 안 했다고 보아야 하나? 안 한 이유는 너무도 안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 즉 '지피지기 백전불패(知彼知己 百戰不敗)'라고 했는데, 적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데서 실패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이미지 출처 : 서울의 봄 - 검색 이미지 (bing.com)


 세상에 반란군이 목숨을 걸고 진격하고 있는데, 평화협정이라니... 또 막을 수 있는 상황인데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돌아서다니, 거기다 제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자리를 비우고 떠나다니,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의견을 묵살하다니...


그래서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고, '침묵의 봄'이 지속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지. 왜, 이번 호를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생각해보니, [녹색평론]이 늘 해오던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기후 재앙이 아닌 생태 재앙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


우리 삶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결국 공멸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 계속해서 이러면 안 된다고, 바꿔야 한다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을 했는데도, [녹색평론]에서 한 주장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몸으로 겪고 있지 않나. 80년대 독재를 겪었듯이, 지금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기후 변화로 고통을 받고 있지 않나. 아주 다양한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오래 전부터 제시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 생태 위기를 온몸으로 겪고 있으니.


그러니 최근에 봄 영화인 '서울의 봄'이 생각날 수밖에. 녹색평론이 영화 속에서 쿠테타를 막으려고 애쓰는 인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영화는, 역사는 순간의 패배로 10년 넘게 그들의 천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정권을 잡은 것이 10년 조금 넘었다면, 다행히도(?)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더 지속되지 않았지만, 기후, 생태 위기는 그렇지 않다.


십 년이 아니라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우리의 미래를 암담하게 만들 수도 있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녹색평론]은 계속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영화와 이번 호를 연결지으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두 편의 글 때문이다. 정성헌/이문재의 대담을 실은 글인 '중심이되 중심이 되지 말라'는 글에서 정성헌의 구체적 실천 지침이 몇 개 실려 있다. 그 중에 이런 것... 결코 포기하지 않는...


'상유십년(尙有十年)! 우리에게는 아직 10년의 시간이 있다. 3년간 해보고 1년 조정기를 거쳐 다시 3년씩 두 번 더 해보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177쪽)


이 말이 희망을 준다. 이번 호 앞부분에 실린 '윤석열 정부 농정 나침반은 어디로 향하나, 뉴미디 시대의 언론과 정치 권력'을 읽으면서 현실의 답답함을 이런 지침을 읽으며 희망이 있음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서평으로 실린 '마음과 행위로 숲 만들기<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라는 글... 난지도를 공원으로 만드는 과정을 쓴 책에 대한 서평인데... 지금은 하늘공원, 노을공원이 시민들이 많이 찾는 숲이 살아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 쓰레기산이었을 뿐.


2012년에 1만 그루의 묘목을 심지만 단 한 그루를 남기곤 모두 죽었다고(254쪽) 한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는다. 12년간 3만 6,258명의 봉사자와 141종의 나무 13만 3,708그루를 심고 돌봤다고 한다.(255쪽)


앞에 언급한 정성헌의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아직도 우리에겐 10년의 시간이 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정성헌의 구체적 실천 지침으로 간다.


'시민을 넘어 천지인민. 국민 5% 즉 250만 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177쪽)


난지도라는 장소를 사람들이 찾는, 숲(자연-동식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장소로 만드는데 오랜 시간, 또 운동가 몇몇이 아닌 함께 하는 여러 사람들의 참여가 있었다. 그렇다면 난지도보다 큰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데는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정치인 몇, 시민단체 몇이 아니다. 시민이 아닌 천지인민이라고 한 것은 보통 사람들의 참여, 국민 5%의 참여가 있다면 사회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가? 아니다. 2016년을 생각해 보라. 우리나라에서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힘이었다. 그때 모인 국민들 5%가 넘지 않았을까? 그러니 바꿀 수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짧게 보지 말고 길게,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한다면 바꿀 수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그냥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나라 정치 상황뿐만 아니라 지구 차원의 환경(생태) 문제에 관련해서도.


그래서 영화 '서울의 봄'과 달리 [녹색평론] 이번 호에서는 희망을 본다. 


이번 호에는 최근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지상군 투입 등에 대한 글도 있다. 읽으면서 생각할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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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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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가지 재료가 나온다. 레시피라는 말이 제목에 있으니, 요리에 관한 글이 있어야 한다. 각 장을 시작할 때마다 레시피가 나온다. 그 장에 해당하는 재료를 쓴 요리의 레시피.


그러나 중심은 재료가 아니다. 그 재료와 연결된 역사, 문화, 경제, 정치다. 그야말로 어떤 재료에도 역사와 문화, 경제와 정치가 녹아들어 있다. 그러니 요리에 여러 재료가 들어가듯이, 경제학에도 여러 요소들이 빠질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어떤 음식 재료들이 나올까? 


마늘, 도토리, 오크라, 코코넛, 멸치, 새우, 국수, 당근, 소고기, 바나나, 코가콜라, 호밀, 닭고기, 고추, 라임, 향신료, 딸기, 초콜릿


총 18가지 음식 재료가 나온다. 이중에 낯선 재료들도 있다.(오크라) 또한 재료가 아니라 이미 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코카콜라)


음식이든 음식 재료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 얽힌 장하준의 경험은 수필을 읽는 느낌을 준다. 자신의 경험을 자유롭고 솔직하게 쓴 글... 하지만 곧 그런 개인의 경험에서 사회로 넘어간다.


재료와 얽힌 역사가 나온다. 가령 마늘하면 영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재료가 마늘이었다고 하는데, 또한 영국은 다른 나라 음식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영국은 다양한 음식을 받아들였고, 그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즉 음식의 다양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그렇다면 지금 영국은 마늘을 예전만큼은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인데...


이렇게 마늘과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경제학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 책의 머리말에 마늘 이야기나 나오는데, 영국에서 겪은 자신의 경험과 연결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마늘을 싫어하던 음식에서는 단일성을 고집하던 영국이 어느 순간부터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었는데, 경제학은 반대로 갔다고 한다.


저자가 영국으로 유학한 이유가 경제학의 다양성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영국에도 경제학은 다양한 이론들이 사라지고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 이론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그것이 문제라고 한다. 경제학은 세상을 읽는 학문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어찌 단일할 수가 있겠는가?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고, 그 관점들이 부딪히면서 세상을 좀더 잘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해야 하는데, 점점 주류경제학만 살아남는다면 그 사회가 경직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마늘로 경제학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면, 이제 다른 재료들은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경제학의 관점에서 풀어간다고 보면 된다.

                  

그 중에 최근에 겪은 코로나19 사태와 관련해서 생각해야 하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를 이야기한다. 그 재료는 바로 '고추'다.


매운 맛, 고추... 향신료와 비슷하게 쓰이지만, 자, 고추와 경제학이 어떻게 연결이 될까? 우선 고추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또 고추의 맵기를 측정하는 단위도 알려주고. 


(여기서 고추의 맵기를 다루는 단위는 스코빌 척도라고 한다. 그냥 알아두자. 251쪽 주에 보면, 우리나라 청양고추는 1만에서 2만 5000 사이를 보인다고 한다. 맵다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 못 먹는 청양고추가 이 정도인데, 아바네로 고추는 10만에서 75만 정도 된다고 하니, 맵기가 청양고추의 5배가 넘는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리퍼 고추는2200만이라고 하니, 상상이 되지도 않는다. 어디 가서 한국 사람들이 매운 것을 잘 먹는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되겠단 생각도 한다) 


친구와 스촨 요리 전문점에 간 이야기를 한다. 스촨 요리는 맵기를 고추 5개로 표시한다고...그런데 고추 표시가 없는 요리를 시키면 과연 고추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아니라고 한다. 여기가 반전이다. 고추 표시는 맵기를 표시한 것이지, 고추가 들어갔느냐 안 들어갔느냐를 표시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고추 표시가 없으면 고추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착각하기 쉽다. 스촨 요리에 고추가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다음 장하준은 고추와 경제학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이야기한다. 바로 고추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림자 노동'이다. '그림자 노동'에 해당하는 일들이 많지만, 돌봄 노동으로 이야기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돌봄 노동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경제총생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노동인데 노동으로 잡히지 않는다. 수치화되지 않는다. 마치 고추가 음식에 들어갔지만 고추 표시를 하지 않는 것처럼.


고추 표시가 없다고 맵지 않은 것이 아니듯이, 그림자 노동 역시 노동이 아닌 것이 아니다. 같은 노동이다. 그것도 코로나19로 인해서 돌봄 노동, 특히 그림자 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뿐.


코로나19의 공포가 지나가자 어떻게 되었나? 돌봄 노동에 대해서 잊지 않았나? 이것은 제도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하준은 개인의 변화만으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개인의 변화를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그 점을 요리의 재료를 시발점으로 역사, 문화, 경제, 정치를 아우르면서 설명하고 있다.


어려운 경제학 책이 아니라 우리가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음식 레시피처럼 경제학 레시피라고 해도 좋을 책이다.


처음부터 끝이 체계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각 장마다 자신만의 특색을 지니고 있어서, 그 장만으로도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요리 레시피가 그렇지 않은가. 각 레시피가 독립되어 있고, 그 레시피로 요리를 할 수 있듯이, 이 책 또한 각 장들이 경제학에 관한 어떤 부분들을 설명해주고 있다. 누구나 따라할 수 있게 쉽고 간결하게 설명한 레시피가 좋은 레시피이듯이, 장하준의 이 책은 경제학과 관련된 내용들을 쉽고 간결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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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는 어떻게 지구를 파괴하는가 - 디지털 인프라를 둘러싼 국가, 기업, 환경문제 간의 지정학
기욤 피트롱 지음, 양영란 옮김 / 갈라파고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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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그래, 이거였어.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친환경이라는 말과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반환경적인 일들이 있는데, 디지털이 바로 그렇지 않나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산화탄소를 직접 내뿜지도 않는다. 이산화탄소뿐만 아니라 디지털을 눈 앞에 두고서는 어떤 오염 물질을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오염 물질이 나오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다고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가? 우선 간단하게 살펴보자. 다른 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디지털 기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스마트폰만 보자.


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물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는가? 옛날 구식 전화기보다, 또 벽돌폰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큰 핸드폰보다, 아주 작은 정말 스마트한 스마트폰이 다른 무엇보다 많은 원재료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


구식 전화기는 10가지 원재로면 된단다. 소위 벽돌폰은 29가지 원재료가, 스마트폰은 54가지의 원재료가 들어간다고 한다. (307쪽. 부록2)


54가지의 원재료는 땅 속에 있는데, 이들을 채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환경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가 스마트하게 쓰는 스마트폰은 이미 그 자체로 환경에 문제를 일으킨다. 여기에 빨리 통화를 하기 위해서는 케이블을 깔아야 한다. 인공위성을 통해서 통신하는 것을 제외하고도, 지금 세계는 바닷속에 광케이블을 깔아놓고 있다고 한다.


한두 나라가 아니고, 한두 곳이 아니고 대양 이곳저곳에 광케이블이 깔려 있다고 한다. 광케이블을 만드는 재료로 인한 환경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바닷속에 있는 광케이블은 그 자체로도 문제가 된다.


또한 스마트폰이나 다른 디지털 기기들을 사용한다면 방대한 데이터를 모아놓을 장소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데이터 창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넓은 부지만이 아니라 적절한 온도도 필요하다. 즉 뜨거움을 냉각시킬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 사용량이 어마어마하다. 세상에 우리가 쉽게 계산할 수 있는 1기가바이트를 예로 들자. 1기가 바이트면 영화 2시간짜리(아주 높은 고해상도의 영화는 2-3기가바이트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정도의 영화해상도라면 1기가바이트면 2시간짜리 영화 한 편이 충분히 들어간다) 양이라고 하는데, 이에 필요한 물의 양이 10만 리터란다. 10만 리터? 감이 잘 안 온다. 어느 정도인가 했더니 대형 빗물 저장 탱크 1개에 맞먹는 양이란다.(310쪽. 부록5)


인터넷을 통해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대형 빗물 저장 탱크 1개에 채워진 물을 쓰는 것인데, 이보다 용량이 큰 행위들을 한다면? 데이터 센터에 필요한 물의 양은 계산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나다.


이 점들만 생각해도 디지털은 자체로 환경에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대로 디지털 문명을 계속 추구해야 할까? 한다... 해저에 광케이블을 설치하는 이유도, 돈이 되기 때문이다. 


막대한 투자비용이 들지만, 투자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을 이익을 남길 수 있다. 게다가 소비자들의 심리가 조금이라도 느린 인터넷은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5G로 넘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렇게 빠르고 편리한 디지털을 주로 어떻게 사용하는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고 사용한다고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파괴되는 환경재해는 어떻게 막을 것인가?


저자는 이렇게 디지털의 보이지 않는 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스마트함 속에 감춰진 문제들을 들춰내고 있다. 그럼에도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지금은 산업혁명 초기의 러다이트 운동처럼 할 수가 없다. 러다이트 운동도 실패하지 않았는가.


저자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디지털을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온 메시아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세속적임을, 디지털이 실제로는 우리를 본떠 만들어진 도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합의에 의해서 인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기술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우리가 하는 만큼만 친환경적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가 식량 자원과 에너지 자원을 낭비하기 좋아한다면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이러한 경향을 한층 심화시킬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한계를 넘어 지속 가능한 지구를 생각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원자 군단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그 도구는 우리의 일상적 솔선수범(그것이 고귀한 것이든 명예옵지 못한 것이든)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그것은 우리가 미래 세대에 물려줄 유산을 증대시킬 것이다." (301쪽)


이 말은 결국 디지털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의 모습을 찾고, 그것을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만이 아니라 이 우주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과 공생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가는 세상. 과연 디지털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사용해야 할지,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그것도 한 나라에서가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윤의 수단으로 디지털을 이용하고, 결국은 디지털로 인해서 우리들 삶이 종속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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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폐지하라 -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세계를 상상하는 법
소피 루이스 지음, 성원 옮김 / 서해문집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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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제목에 찬성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가족을 폐지하라니... 마치 패륜을 저지르라는 말과도 같이 들린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속했던 가족인데, 이 가족을 폐지하면 도대체 어떻게 된단 말인가? 태어남과 자라남, 그리고 죽음에 가족이 모두 관계를 하고 있는데, 이런 가족을 폐지하라고 하면 가족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다. 가족을 해체한 다음, 가족 대신에 어떤 무엇을 넣는다는 생각을 하지 말자고 하는데, 그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가능하다고 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힘을 우리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족을 해체해야 하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굴레로 사람을 뒤집어 씌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공동체가 책임져야 하는 일도 가족이 해야 하고, 일례로 복지 혜택을 받으려고 해도 자식이 있다는 이유로, 또는 부모가 있다는 이유로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니, 이때 가족은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있어서 피해를 주는 가족인데... 또한 가족이 과연 행복하느냐에도 의문이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오히려 경제라는 면에서 가족을 인정하고, 가족이 불변하는,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하는 편이 더 자본주의를 유지하는데, 또한 차별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가족을 유지하는 이데올로기가 계속 강고하게 유지되었고, 가족을 해체한다는 주장은 허황된 주장으로 매도되었다고 한다.


어쩜 타당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경제활동의 주체를 찾아보니, 가계, 기업, 정부라고 한다. 가계라는 말을 쉽게 말하는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기본적인 조직이 가족인 것이다. 그러니 가족이 경제활동을 하고,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경제는 가족이 우선 책임져야 한다는 이런 관념은, 자신들의 생활을 가족이 해결해야 한다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공동체의 의무, 책임은 슬그머니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 살기 힘든 가족을 돌보면 그것은 공동체가 제 할일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무슨 혜택을 베푼 것처럼 여겨지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 가족은 경제를 바탕으로 누군가를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유지되어야 하고, 사회의 책임을 개인이 넘겨받게 만들기 때문에, 이런 가족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예전부터 논의되어 왔던 가족 해체 주장과 새로운 공동체 실험 등을 소개하기도 한다. 아직까지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가족이 해체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인 키부츠만 해도 가족이 해체되지는 않는다. 또한 지금은 사라졌지만 공산주의 국가들에서도 가족은 해체되지 않았다. 인류가 존속한 이래 어떤 형태로든 가족은 존재했다고 할 수도 있는데, 지금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핵가족은 더욱 문제가 많다고 한다. 굳이 가정폭력을 예로 들지 않아도, 핵가족 제도로 인해서 개인들이 지니는 어려움은 많다고 볼 수 있다.


돌봄이나 교육 등을 가족에 맡기고 있으니, 이는 공동체의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를 낳지 않는, 즉 기존의 가족을 거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니, 저자의 주장이 맹랑하다고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기존 가족이 하던 일을 공동체에서 할 수 있다는 상상, 아니 하게 해야만 한다는 실천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는 기존의 가족을 완전히 해체하자는 주장으로 대체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가 책의 말미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국가가 특히 의지처가 필요한 사람들을 자기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돌봄제공자들의 품으로 돌려보내도록 만드는 동시에, 민간에 내맡겨진 돌봄에 반기를 들고, "부모의 권리"에 저항하고, 모든 사람이 다수의 돌봄을 받는 게 정상인 세상을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158쪽)


가족을 핏줄로만 제한하지 말자는 제안, 그리고 다른 여러 종류의 가족들이 있을 수 있음을, 특히 특정 가족으로 한정하면 가족-국가가 구분이 되고, 내 가족이 아닌 다른 가족과는 분리되고, 또한 국가들끼리 분리된 상황을 유지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러한 구별을 벗어나기 위해서도 가족을 해체하자는 주장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제목에서 풍기는 반감을 잠시 묻어두고 한번 읽어보자. 과연 가족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아니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족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가족의 울타리를 공고하게 하면 할수록 사회공동체는 책임을 덜고, 공동체 의식은 더 옅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이 책은 그런 계기를 제공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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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사 사회
송병기 지음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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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들 삶은 각자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이 말에는 공동체는 없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개인은 있지만 사회는 없다. 이런 사회가 과연 행복한 사회일까? 아니다. 각자도생의 사회는 어쩌면 홉스가 이야기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회일 것이다.


내 삶을 공동체가 보살펴주지 않는데, 어떻게 공동체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나 아닌 남들은 모두 내 삶에 위협이 되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는 사회가 될 수밖에.


하여 우리는 복지제도를 통해서 각자도생의 사회를 극복하려고 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으므로, 내가 모든 것을 만들고 쓰고 할 수는 없으므로, 누군가에게 기대어 사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므로,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나아가려고 많이 노력했다.


그런 노력으로 인해 복지제도가 만들어졌고, 한 사람의 삶을 그 사람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기도 했다. 최소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은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는 그런 생각. 그리고 그런 제도.


각자도생의 문제는 이렇게 풀었다. 그런데, 이 책 제목은 각자도생이 아니다. 각자도사다. 세상에 죽음만큼 개인적인 어디 있을까 싶은데,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철저하게 개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 각자도사의 사회라니...


죽음에 이르러서 고립되고 소외된 존재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는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죽음만큼 개인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함께 살아가더라도 죽을 때는 홀로 죽는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죽음이 홀로 겪어야 하는 일일까? 이 책은 죽음 직전에 이른 사람을 돌보는 사람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누가 돌봄을 책임졌는가? 아니 누구에게 돌봄을 전가했는가? 그런 돌봄을 하는 사람의 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돌봄을 하는 사람만이 아니다. 돌봄을 받는 사람은 또 어떤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해지는 온갖 치료들이 과연 사람답게 죽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인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또 노인들을 사회 부담으로 여기고 있는 현실이 바람직한가?


수치로, 젊은 세대는 줄어들고, 늙은 세대는 늘어나, 젊은 세대의 부양 부담이 가중된다는 말을 많이 하면서도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냥 부양해야 할 덤과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1부는 이런 노인들의 죽음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의학적 치료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환자와 보호자, 의사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또 국가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어떤 정책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섬뜩하기도 하다.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것도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1부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1부 각자 알아서 살고, 각자 알아서 죽는 사회

집, 노인 돌봄, 커뮤니티 케어, 호스피스, 콧줄, 말기 의료결정, 안락사


'집'이라고 했는데, 요즘은 집에서 임종을 맞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는 구조라고 한다. 누가 돌보겠는가? 노인 돌봄과 커뮤니티 케어가 대두가 되는데, 이 책에서 노인 돌봄이 생명 유지와 연결이 되어 '콧줄'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존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묻고 있다. 그러니 '말기 의료결정과 안락사'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사회가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쪽으로, 집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것과 비슷한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커뮤니타 케어'를 들고 있는데, 이것이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한다.


그냥 노인이 집에 있으면서 방문하는 의료진이나 돌봄 노동자들에게 돌봄을 받는 것으로는 '커뮤니티 케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호스피스'와 같이 치료가 아닌 돌봄이 이루어지는 곳이 더 늘어나야만 한다고 하는데, 이도 쉽지 않는 일이다. 호스피스와 관련해서는 이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무작정 연명치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게 하는 호스피스.


'호스피스를 죽으러 가는 장소가 아니라 모든 환자를 위한 환대와 돌봄의 시공간으로 더 과감하게 상상해야 한다. 시민들이 호스피스를 어렵지 않게 이용할 수 있는 사회라면 죽음의 풍경도 달라질 것이다.' (74쪽)


이런 1부에 이어 


2부 보편적이고 존엄한 죽음을 상상하다

제사, 무연고자, 현충원, 코로나19, 웰다잉, 냉동 인간, 영화관


을 통해 존엄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제사 풍경이 바뀌어야 하고, 다양한 죽음들을 이야기하면서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가 되는데...


죽음에도 차별이 있었음을 명심하고, 그런 차별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각자도사 사회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우리가 함께 하는, 그런 실질적인 사회적 동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자고 이야기 하는 듯하다.


다만 이 책의 1부가 우리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라면 2부는 좀 약한 감이 있다. 1부에서 의사들이 지닌 문제에 대해서도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요즘 의사 정원 확충과 관련해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는 글들도 꽤 있다.


죽음과 의료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므로... 하여간 각자도생의 사회도 각자도사의 사회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 점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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