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붕의 메타버스 이야기 - 디지털 신대륙에 사는 신인류, 그들이 만드는 신세계
최재붕 지음 / 북인어박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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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라는 말이 유행이다. 뜻이 무언지 잘 몰라도 하도 많이 나오니, 중요한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메타버스를 모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고.


하지만 메타버스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필요한지, 또 미래를 어떻게 이끌어갈지 잘 모르고 있다. 하루하루 살기 힘든 사람들에게는 생각할 여유도 없다. 자칫하면 격차가 더 벌어질 수도 있다. 세대간 격차만이 아니라 경제적 차이에 의해서 메타버스 세계에서도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


신세계가 눈 앞에 있다고 해도, 그 신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늘 그런 갈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신세계로 나아간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미래 세계를 이끌어 갔다.


지금 우리가 거부하려고 해도 메타버스라는 신세계는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미 우리 생활에 들어와 있다. 그 신세계에 발을 딛고 그 세계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도 있다. 그 반면에 메타버스가 뭐야 하면서 여전히 메타버스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메타버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미 와 있는 세계를 마냥 부정할 수는 없다고. 거부할 수 없는 세계라면 '하필이면'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가김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2020년이 지나면서 인류는 코로나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메타버스의 세계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그런 점을 이야기하면서 이제는 '디지털 문해력'을 지닌 인간들이 미래를 주도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디지털 신대륙, 즉 메타버스의 세계를 부정하고, 거부하지 말고, 그 세계로 들어가야 한다. 지금 우리 눈 앞에 있는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그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그 세계에서 자리를 잡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고.


이 메타버스의 세계에서는 중앙집중이 아니라 자율적인 개인들이 의견을 내고 만들어가는 세상이 된다고 한다. 또한 메타버스의 세계가 환경에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지만 오히려 인간과 환경을 생각하는 메타버스로 가고 있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미 우리 앞에 다가온 새로운 세계. 그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그렇게 하려면 지금까지 지녀왔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고 해야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메타버스의 세계가 인간에게서 멀어질 것이라 예측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메타버스의 세계는 인간이 인간에게 공감하는, 인간이 환경에 공감하는 그러한 공감이 기본이 되는 세계여야 한다고 한다.


하나의 표준을 강제하는 세계가 아닌 다양한 표준이 있는, 그러면서도 서로가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는 그런 세계. 


하지만 저자는 메타버스의 세계는 우리에게 기회의 세계이기도 하지만, 실패의 세계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저자가 성공한 예로 든 사람들만이 있지는 않다. 실패한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신세계에 처음 나아갈 때 당연히 실패가 더 많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신세계에서 살 수 있게 된다. 다만,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망설이고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그 세계에서 불편함이 없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단지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성공사례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의 실생활과 연결되는 또다른 세계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계가 메타버스가 되어야 한다.


저자가 말하듯이 앞으로의 세계는 1등, 최초가 중요한 사회가 아니라, 그곳에 적응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중요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런 준비를 하는 곳이 바로 메타버스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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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재판정 참관기 - 100년 전, 안중근 의사와 일본인 재판관이 벌인 재판정 격돌, 현장 생중계! 재판정 참관기 시리즈
김흥식 엮음 / 서해문집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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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그에 대해서 대부분 사람들이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뒤에 받은 재판에 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재판이 비공개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고, 재판 기록을 살펴보는 일은 학자들에게 맡겨져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제인가 발렌타인데이를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로 기억하라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2월 14일. 연인들의 날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독립, 동양평화를 위해 일한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역사적인 날.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 날을 너무도 쉽게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해 나라가 잊고 있다고 비판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잊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되기도 하는데...


이 책은 안중근 의사의 재판기록에서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부분을 실어놓았다. 그래서 재판정에서 어떤 말들이 오고갔는지를 알 수 있다. 안중근 의사가 무엇을 주장했고, 그 주장을 일본 재판정에서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재판정에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을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한다. 자신은 대한제국의 의병이고,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일반 살인죄로 기소당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쏜 이유는 대한제국의 평화와 일본의 평화, 그리고 동양 평화를 위해서라고 한다.


개인의 복수나, 자신의 이름을 드날리려는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의병이니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일본 재판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들이 안중근 의사를 살인죄로 처형하는 과정이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인 변호인 선임을 거부하고, 오로지 일본인들만으로 이루어진 재판정. 이들은 안중근 의사의 주장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인으로 구성된 일본인 변호인단의 변호 역시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고.


그런 점,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재판 과정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날이 10월 26일이라는 점에 역사의 다른 한 사건이 겹치는 걸 막을 수가 없다.


참 이런 우연히 있을 수가 있나 싶기도 한데... 최근에 김훈 작가가 [하얼빈]이라는 소설을 썼는데,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책을 먼저 읽은 것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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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9-22 09: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우연치곤 전개가^^ 하얼빈 읽으시면 더 이입이 잘 되실 것 같아요ㅎㅎ 소감도 궁금합니다^^*

kinye91 2022-09-22 10:08   좋아요 1 | URL
네. 시간 내서 하얼빈 읽어보려고요. 김훈 작가에 대한 기대도 있으니까요.

프레이야 2022-09-22 13: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김훈 작가가 참정기를 많이 참고했어요.
소설은 소설이지만 많이 절제한 느낌입니다.
하얼빈, 읽은 후 저도 이 책 구입해 읽었습니다.^^

kinye91 2022-09-22 17:52   좋아요 2 | URL
프레이야 님처럼 두 책을 같이 읽으면 좋겠네요. 저도 조만간 그렇게 하겠습니다.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 - 근현대 한국에서 장애·젠더·성의 재활과 정치
김은정 지음, 강진경.강진영 옮김 / 후마니타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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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밖에 나가면 장애인들을 만날 때가 있다. '가끔'이라고 했다. 늘 보지는 못한다. 관심이 없어서일 수도 있지만, 밖에서 만날 수 있는 장애인은 그리 많지 않다.


어느 곳에서는 장애인이 커피를 파는 이동식 커피차 있었고, 어느 때는 출근 길에 시각장애인을 만나기도 했다. 휠체어를 타고 지하철에서 출근하는 장애인을 본 적도 있고. 이게 왜 기억에 남을까? 


많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소하기 때문에 기억에 남아 있다. 장애인을 일상에서 늘 본다면 그런 기억이 남아 있을까?


학교에서 통합교육을 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장애인들은 분리된 교육을 받고 있다. 그들은 장애인들은 여전히 비장애인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겠다는 투쟁이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으니...


이 책은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치유라고, 장애인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장애인들을 분리하고 가두지 않았나, 그들을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어내지 않았나 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장애는 치유해야 할 무엇이라고 정의내린 순간, 장애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장애인, 비장애인의 구분이 아니라, 장애인, 정상인의 구분으로 바뀐다. 그리고 장애는 질병으로 치환되고, 질명이므로 치유되어야 한다고, 장애의 치유를 당연하게 여긴다.


장애인도 장애를 당연히 치유받기를 원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의견보다는 당연이라는, 정상이라는 관점에서 치유를 단행한다. 이 치유가 때로는 장애인의 몸을 위한다기보다는 장애인의 가족이나 보호자들의 편리를 위해서 이루어질 때도 있다. 


또는 사회와 국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장애와 우생학이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고 한다. 이것은 폭력이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라 장애를 치유해야 할 무엇으로 보고 그들에게는 현재가 없고 미래만 존재한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 역시 폭력이다.


그러므로 장애를 치유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일은 장애의 현재를 생각하기보다는, 과거 또는 미래만을 보는, 현재를 접어놓고 있는 상태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현재를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후천성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모습을 되살리려는 치유, 또 선천성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없는 미래를 살게 하려는 치유가 당연하다는 듯이 실행이 된다. 대부분은 그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이렇게 장애를 정상의 상대 개념으로 놓으면 장애가 지니고 있는 많은 면을 놓치게 된다. 그들에게도 현재가 있음을,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을 놓치게 된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장애인의 삶을 과거와 미래로만 재단하지 말라고.. 장애인들의 삶을 현재로 끌어오자고. 그들의 삶, 그들의 의견. 그리고 장애를 치유의 관점으로 가져가는 일은, 장애를 질병으로 인식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장애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듯이,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모습이 있다. 또한 치유의 수준도 다양하고. 이를 하나로 뭉뚱그리면 안 된다는 것이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치유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이 가해졌는지 문학작품, 영화들을 통해서 분석하고 있다. 또 장애에도 성별 차이가 존재하고 있음도 보여주고 있고. 여기에 장애에 들어갈지 잘 모르겠지만, 한센인들에 대한 이야기. 이들은 대표적으로 분리된 삶을 살게 되었는데, 전염이 안 되고, 유전도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이들은 분리된 삶을 살고 있음을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한센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장애를 지녔다고 많은 부분을 포기하게 된 경우가 제시되고 있는데 이는 장애와 정상을 짝으로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가 첨예하게 발생하는 부분이 바로 성(性)에 관련된 문제다. 장애인의 성(성욕, 성교)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몇 편의 영화를 통해서 분석하고 있다. 성에 관한 부분에서도 많은 경우 장애-정상의 대비가 문제가 된다. 성은 결코 장애와 관련된 정상-비정상의 문제가 아님에도. 


이 책을 읽으면 장애와 비장애가 짝이 되고, 장애는 신체나 정신의 다름이고, 장애는 비정상과 하나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행동한다면, 이 책에서 살펴 온 치유라는 이름의 폭력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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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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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나라들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면서 은근슬쩍 핵발전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다. 소형 핵발전은 해롭지 않다고, 오히려 친환경 발전이라고도 한다. 친환경 발전에 원자력을(그들은 절대로 핵발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포함시키려는 움직임도 있다. 체르노빌, 후쿠시마가 아직 해결도 되지 않았는데...


이 책은 좀 오래 되었다. 10년도 전에 나온 책이다. 그렇다고 유효하지 않을까? 몇 십 년 만에 핵방사능이 다 사라졌다면 이 책은 과거의 목소리를 기록한 책일 뿐이겠지만, 체르노빌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리고 그 뒤에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일본 정부는 거의 해결이 되었다고 하고, 오염수들을 바다로 방류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여전히 진행 중인데,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 책에서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왜 나한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나!" (172쪽)


지금 많은 나라들에서는 말해주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핵발전은 오히려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체르노빌 전에도 그랬단다. 러시아 주전자(사모바르)보다도 더 안전하다고. 모스크바 크렘린 궁 옆에다 지어도 안전하다고.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아왔다. 그런데도 안전하고 환경적인 에너지가 핵에너지라고 한다.


체르노빌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평화적 핵도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264쪽) 이 말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미 체르노빌에서 후쿠시마에서 평화적 핵도 죽음을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었는데... 아직도 모르고 있나? 그렇다고 또다른 핵폭발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데... 핵폭발뿐만이 아니라 핵발전으로 인해 나오는 엄청난 방사성 물질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아직도 제대로 된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당장 눈 앞에 닥친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핵발전을 고집하다가 당을 대표했던 사람이 했던 말을 또다시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는 당시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합리화한다. "나는내 시대의 사람이었다. 나는 범죄자가 아니다." (346쪽)


이 말로 끝날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또 미래 사람들도 살기 힘든 땅이 되었다. 폭발 사고가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해결하는 방법은 신속해야 했다. 우선 사람들을 대피부터 시키고 봐야 했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만 했다. 감추었다. 사람들을 자원봉사 명목으로 제대로 된 장비도 지급하지 않고 폭발 현장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일한 사람들, 나중에 죽어갔다. 나중에서야 그 까닭을 알게 된 채. 그런 나라는 사람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사람의 나라가 아닌 권력의 나라였다. 국가가 중요하다는 데엔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는다. 그런데 사람 생명의 귀중함은 온데간데없다." (361쪽) 이것은 권력의 나라에 불과하다. 이런 비극이 재반복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핵발전은 여전히 위험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핵발전은 너무도 오랜 시간이 소모돼야 폐기물을 처리할 수가 있다. 고준위, 저준위 물질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이들은 모두 사람에게 해롭다. 그래서 이 물질들을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해야 한다. 완전히 처리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양보다 새롭게 다시 나오게 되는 폐기물의 양이 더 많다. 그러니 이들이 완전히 안전해지는 데는 매우 긴 시간이 걸린다. 


현재 세대가 사용해도 그 책임은 미래 세대가 질 수밖에 없다. 이 책 작은 제목에 '미래의 연대기'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에 사용한 사람들, 건설한 사람들이 책임을 다 지지 못한다. 책임을 미래에 전가한다. 과연 그런 에너지를 청정에너지라 할 수 있을까? 그런 발전을 환경적 발전이라 할 수 있을까?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는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지구라는 곳에 잠시 다니러온 손님이다. 손님이 남의 집에 들어가 그 집에 해로운 물건을 남겨두고 오면 되겠는가? 손님은 그 집에 가능하면 쓰레기를 남겨서는 안 된다. 자신이 쓸 수 있는 물건들만, 또 방문한 집에 필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가야만 한다. 


그 집에서 주인인 양 지내고, 나중에 주인이 치워야 할 쓰레기, 그것도 엄청나게 부담되는 쓰레기를 남기고 와서는 안 된다.


이 지구, 미래세대에게 빌려 현재를 살아간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구에 우리는 손님으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손님으로 머물다 간다면 손님 역할을 해야지 주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이 땅에 손님으로 왔다는 걸,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라는 것을 신이 보여주신 거야. 우리는 손님으로 왔어." (234쪽)


이렇게 손님으로 왔음을 체르노빌을 통해서, 후쿠시마를 통해서 보여주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손님이기를 거부하고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손님, 자신이 불편하다고... 주인집보다는 자신의 필요를 생각해서 물건을 가지고 간다. 그리고 쓰레기로 남긴다. 


그러면 안 되는데... 기후 재앙이라고 할 정도의 변화가 심각한 현대... 잠깐의 기후 재앙을 벗어나겠다고, 미래의 기후 재앙을 예비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구에 들른 손님이라는 생각을 하면, 지구에 살아갈 주인은 미래세대를 비롯해 모든 생명체임을 생각한다면, 어떤 에너지를 써야 할지 더 깊게 생각해야 한다.


핵발전을 옹호하는 사람들, 이 살아있는 목소리들을 먼저 들었으면 한다. 듣고 생각하고 판단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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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26 12: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전기차, 원자력발전소 보다는 수소차, 대체에너지 쪽인데 정책은 당장 눈앞에 효과가 나타나는것을 선호하지요

kinye91 2022-08-26 13:05   좋아요 2 | URL
저도 에너지 문제는 장기적으로, 그리고 미래 세대와 환경을 생각해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레이스 님 말씀처럼 당장 눈앞에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선호하는 정책이 문제라고 생각해요.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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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읽을 때마다 실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페미니즘 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페미니즘이 한 범주로만 정의될 수 없듯이 솔닛의 책도 그렇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말은, 사람이 지녀야 할 권리를 주장한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솔닛이 무지권(privelobliviousness)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보았듯이 (특권을 뜻하는 'privilege'와 무지 혹은 무심함을 뜻하는 'obliviousness'를 합한 말이라고 한다.특권 있는 사람, 재현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의식할 필요가 없는 사람, 실제로 자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다. 241-242쪽) 이미 권리가 있는 쪽은 권리에 대해서 주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고, 이 침묵을 깨는 말하기가 주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책 처음에 실린 글이 '침묵의 짧은 역사'인데, 얼마나 많은 침묵들이 강요되어 왔는지 이 글을 읽으면 알 수 있게 된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눈치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은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반대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반대하는, 또는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난무하는 모습은 말할 권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고난을 겪고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자꾸 같은(비슷한) 질문을 한다. 이것은 아직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단 태도다. 발언을 인정하지 않고 발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 하는 질문들이다. 계속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일은...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같은 질문이 계속될 때 피해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왜냐,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니까. 결국 같은 질문은 침묵의 강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책 처음이 '침묵의 짧은 역사'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짧은' 역사가 아니라 '긴' 역사일텐데, 솔닛이 짧은 역사라고 한 이유는,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야 할 역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변했고, 침묵에서 발언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영화 '자이언트'로 끝맺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볼 때마다 영화에서 느끼는 점이 달라졌음을 이야기하면서, 솔닛은 영화 '자이언트'를 '거대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이 한 번에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변할 수 있음을 이 영화를,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사람은 어느 한 쪽으로만 규정해서도 안 됨을. 어느 범주에 사람을 가둬놓고, 그 범주 안에서만 판단해서는 안 됨을. 영화를 보면서 솔닛은 같은 영화임에도 볼 때마다 관심을 두는 주안점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만큼 영화에는 많은 요소가 담겨 있는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다양함이 사람들에게는 있다. 남성이라고 여성이라고 또는 백인이라고 흑인이라고 딱 규정지을 수 없다. 범주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해야 한다.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받아왔던 존재들은 기존에 권력을 지고 있었던 권리를 충분히 누리고 있던 존재였다. 그리고 약자들은 범주 속에서 녹아들어버렸지, 개별성을 인정받지는 못했었다.


그러니 이제는 모든 존재들이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솔닛은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범주 속에서 개별성을 인정한다면 같은 질문을 자꾸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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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9 09: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권리가 있는 쪽에서는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없죠. 약자가 불편함과 권리를 주장해서 스스로 쟁취해야할 것이 많은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죠. 솔닛을 페미니스트의 범주에 넣기에는 그가 문제삼는 범주가 그보다 넓고 확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kinye91 2022-08-19 10:35   좋아요 2 | URL
맞아요, 어느 한 분야로 규정짓기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권리 전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요.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들이 같은 질문을 많이 받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