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장류,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 - 자연의 재발명 Philos Feminism 4
도나 J. 해러웨이 지음, 황희선.임옥희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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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하면 참 답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이 '인간'이라는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인간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인간'의 범주를 확정하기도 힘든데, 역사를 살펴보면 '인간'의 범주에 들지 못했던 존재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들이었다.


우선 여성은 '인간'의 범주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종속된 존재였다. 과학 연구를 한다고 해도, 여성의 관점이 아닌 남성의 관점에서 연구가 된 경우가 많았고, 이는 '여성'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해러웨이의 이 책은 영장류를 연구하는 학문에서 여성이 어떻게 배제되어 있었는지, 그러한 연구에 여성들이 참여하면서 어떤 변화가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그것이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내용이다.


과학은 객관적인 것 같지만 아니다. 과학은 투쟁의 장이다. 여러 논쟁들이 겹치는 장이 바로 과학이다. 따라서 과학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 어떤 관점으로 연구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결과가 도출되기도 하니까.


여성도 남성과 더불어 '인간'이라는 관점이 자리잡게 되지만, 여기에 다시 '여성'의 범주에서 비켜간 존재들이 있다. 바로 '유색인' 여성들이다. 이들은 '인간'의 범주에도 '여성'의 범주에서도 소외되었다.


이제는 수많은 투쟁을 통해서 유색인 여성들도 '여성'의 범주에 들게 되었다. 그것을 부정하는 현대인은 없다. 그렇다면 유색인 여성도 이제는 '인간'의 범주에 들게 되었는데... 여기에 다시 '성소수자'들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들 역시 '인간'의 범주에 들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거부당하는 경우도 있다.


'성소수자'들이 그렇다면 사이보그는 어떤가? 사이보그는 '인간'의 범주에 들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김초엽, 김원영이 함께 쓴 [사이보그다 되다]란 책을 생각하게도 되는데... '인간'의 범주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해러웨이의 작업이다. 그의 '사이보그 선언문'에 이런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여전히 개념이 확실히 잡히지는 않지만, 인간을 확장하는데 '사이보그' 역시 한몫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해러웨이의 책은 '인간'에 대해 질문하고, '인간'의 범주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 가능한, 치열한 논쟁을 통해서 계속 만들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경계가 확정된 것이 아니라, 경계 속에서 유동하는, 끊임없이 그 경계가 바뀌고 있는 그런 상황. 그 상황에서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있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페미니즘'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니,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인간'에 대해 지니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도록 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그동안 서구에서 연구되었던 결과들과 많은 문학작품들을 통해서 해러웨이는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이 책이 1991년에 나왔다고 하니, 지금은 이 논의에 더 많은 것을 덧붙여야겠지만, 그럼에도 방향은 의미가 있다. 


해러웨이의 글들이 결국은 '인간'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그 '인간'에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존재만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광활한 우주로 우리의 시야를 넓히기도 해야 하지만, 우리 몸이라는 우주 속으로 더 깊게도 들어가야 함을... 이러한 과정이 모두 '인간'에 대한 이야기임을 해러웨이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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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
J. M. 버거 지음, 김태한 옮김 / 필로소픽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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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를 간단하게 정의하면 그야말로 극단주의가 된다. 극단이라는 것은 복잡한 무엇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한두 가지만 남기고, 그것으로 자신이 하는 행동의 근거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남은 그 무엇으로 다른 것들을 배제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그 무엇을 공고하게 만드는 것들만 받아들이는 것. 아마도 과학기술이 첨단으로 갈수록 극단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릴지도 모른다.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쏟아지는 현대사회에서 극단주의라니? 스마트폰으로 어떤 것이든 실시간으로 만날 수 있는데 어떻게 극단주의가? 할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극단주의는 더욱 쉽게 다가올 수도 있다.


수많은 정보 중에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구미에 맞는 정보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정보를 알고리즘을 통해서 계속 보내주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찾지 않아도 내 정서에 맞는 정보가 계속 나를 찾아오고 있는 상태에서, 굳이 나를 불편하게 하는 정보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 내 신념은 더욱 굳어지고, 다른 신념은 잘못된 것으로 치부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안정된 사회라면 걸러지고 토론이 되며 발현이 안 될 수도 있는데, 불확실성이 사회에 대두하기 시작하면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는 행위가 강해지게 된다. 남을 밀어내고 나를 강화하는 것들만 받아들이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극단으로 가게 된다. 즉 다른 복잡한 것들을 덜어내고, 자신에게 맞는 것만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극단주의로 가는 길이 된다.


하지만 극단주의를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워낙 다양한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저자의 정의를 따르면 '내집단의 성공이나 생존이 외집단을 겨냥한 적대 행위의 요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신념'(165쪽)이다.


즉 극단주의는 자신의 반대 편에 다른 집단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집단이 자신의 집단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위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다른 집단을 없애야 한다고 여기는 신념, 이것이 극단주의를 이루고 있는 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신념에는 불안정성, 불확실성이 존재하게 되는데... 자신의 현재, 미래가 불확실할수록 극단주의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이렇게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 사회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극단주의에 빠지지 않았는가?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 사회는 지금 불확실성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가 없다. 


또한 양극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이미 극단주의라고 할 수 있는 집단이 등장했다고도 할 수 있다. 맹목적으로 자기 주장만을 하는,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확고하게 할 수 있는 것들만 증거로 모은다. 그리고 그 증거들로 자신들의 이론을 정교하게 한다.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나중 문제다. 음모론에 쉽게 빠진다고 저자가 주장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 역시 음모론이 나돌고 있지 않은가.


또한 이들은 다른 집단을 포용하지 않는다. 다른 집단을 포용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무조건 배척한다. 그들은 무조건 잘못되었다. 그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다. 우리 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음모론을 분쇄해야 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집단이 있다. 버젓이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하는 온갖 인터넷방송들이 있다. 


백가쟁명의 시대가 아니라,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들만 취사선택해서 들어도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남들 주장에 귀를 기울일 시간도 없다.


극단주의는 이럴 때 발호한다. 그리고 한번 나타난 극단주의는 사라지게 하기가 매우 힘들다. 극단주의가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회가 안정되어야 한다.


미래가 예측가능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내 생각을 돌아볼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지녀야 한다. 남을 포용할 수 있는 유연한 사고를 지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경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경제를 해결하는 것은 경제만으로 안 된다. 정치가 개입되어야 한다.


정치가 손을 놓으면 경제에서 예측이 힘들어지고, 그렇게 되면 불확실성에 빠져 극단주의가 들어올 틈이 생기게 된다. 이 극단주의가 한번 들어오면 너무도 거세게 들어와 틈은 더욱 갈라지고 집단과 집단에 벽이 생기게 된다. 그 다음은? 생각하기 싫다.


이 책은 이러한 극단주의를 정의하려고 한 책이다. 물론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극단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극단주의의 작동 방식을 안다면 대처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도 찾을 수 있겠지. 


그것은 우선적으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누구나 다 알고 있겠다 여기고 말은 하지 않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극단주의라 할 수 있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지금 우리 사회와 연관지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더 많은 생각을 해야하기는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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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향모를 땋으며 - 토착민의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 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니콜 나이트하르트 그림, 이채현 옮김, 모니크 그레이 스미스 각색 / 북스토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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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교육을 생각한다. 학교 교육이 자연과 얼마나 가까운가? 아니, 질문이 바뀌어야 한다. 학교 교육은 자연에서 얼마나 멀어졌는가?


자연은 격리가 아니라 함께함이다. 함께하면서 주고받는 관계, 그것이 자연이다. 또한 자연은 다 다름이다. 달라야 한다. 똑같은 것들이 모여 있으면 지속하기 힘들다. 그래서 자연은 서로 다른 종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룬다. 하나라고 하지만 하나가 아닌 여럿이 모여 있는 하나, 그것이 자연이다.


그렇담 학교는 어떤가? 자연에서 떨어져 있다. 학교는 격리되어 있다. 담장과 교문으로. 특히 우리나라는 학부모들의 민원으로 인해 이제는 '학교방문예약제'도 실시하고 있다. 교육의 3주체를 학생-학부모-교사라고 하면서(이에 대해서는 많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주체가 학교에 들어오려면 특정한 절차를 밟게 만들고 있다. 자신들의 주장과도 어울리지 않는 제도이지만, 이런 제도로 인해 학교는 더더욱 격리되어 있다.


또다른 주체인 학생과 교사를 보자. 이들 역시 학교라는 공간에 들어오면 정해진 시간이 되지 않으면 나갈 수가 없다. 나가려면 특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 자유롭게 왔다갔다 할 수 없는 공간이 바로 학교다. 세상에 어떤 자연에 이런 경계, 격리가 있단 말인가.


더 심하게는 학교 안에서도 격리가 이루어진다. 구획이 있어서 서로 단절되어 있다. 교실과 교실, 특별실과 특별실, 또 교무실도 교무실 별로 격리되어 있다. 격리가 일상인 공간이 바로 학교다. 여기에 자연과의 격리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런 학교는 자연과 동떨어진 학교다.


말로는 자연에서 배우라고 하면서, 자연 속에서 지내야 한다고 하면서 자연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지닌 학교에서 정반대로 교육하고 있는 곳이 학교인데... 다름이 어디 있는가? 판에 박은 듯 같은 모습의 학생들을 양산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곳이 학교 아닌가.


창의성, 개성 운운하지만 사실은 공통성을 기반으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 창의성과 개성 아닌가. 아직도 교복을 입히고 온갖 규칙을 적용하고 있는 곳이 학교니까.


왜 학교가 생각났을까? 바로 이 책이 학교이기 대문이다. 토착민의 지혜가 담긴 교과서이자 그 지혜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게 하는 학교.


아메리카 대륙의 토착민인 저자가 사라진 토착민의 지혜를 찾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찾으며 지금 현대인들의 생활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생활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향모'를 매개로 이야기하고 있다.


자연과 하나되어 사는 삶. 그것은 결코 빈곤한 삶이 아니다. 오히려 더욱 풍요로운 삶이다. 우리는 풍요를 추구하지만 풍요를 추구하는 소비 속에서 오히려 더 빈곤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선물이 아니라 상품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상품으로 받아들이면 감사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감사하는 마음이 없으면 서로 주고받는 호혜성이 사라지고 일방적인 개발로 인해 파괴만이 남는 현실, 그런 현실을 벗어나는 방법은 토착민의 지혜에서 찾아야 한다고.


이것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비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의 생활이 과학으로 증명될 수 있음을 저자는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냥 미신이 아니라 그것이 바로 공생의 과학임을.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풍요라는 말을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우리가 풍요를 다르게 받아들어야 한다. 넘치는 것이 풍요가 아니다. 필요에 맞게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풍요다. 이런 풍요는 자연과 동떨어져서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할 때 이룰 수 있다.


  저자가 말해주는 '섬기는 수확'을 보자. 지금은 남기기 위해서 즉 이윤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잉여를 추구하지만, 그것은 결국 부족을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수많은 개발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음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섬기는 수확'은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이 섬기는 수확에는 상품이 아니라 선물이라는 개념이 우선한다.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결정하고, 사고가 행동을 유발한다면, 선물이라는 말과 상품이라는 말은 엄청난 차이를 지니고 있다.


  '수확'을 얻음이라고 한다면 현대인들 중 누가 '섬긴다'는 말을 하겠는가.


  하지만 섬긴다는 말을 하면 그때 얻는 것은 상품이 아니다. 선물이다.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고, 또 감사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갚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받은 만큼 갚는다는 행위. 이미 생명 자체가 다른 생명 또 다른 존재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말이니, 그 빚을 갚으려고 노력해야 우리 생명이 가치 있게 된다는 생각. 그것이 전통 토착민의 지혜라고 한다면, 그런 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지구라는 곳에서 우리 모두는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함께 삶이 이 책에 다양한 식물들, 동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물론 죽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다른 생명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그 점을 명심하고 생명을 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이 해야 할 행동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학교에서 교재로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라나는 청소년들부터, 아니 교사들부터 이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할 수 있는 방안을 토론했으면 좋겠다. 인공지능 교과서가 아니라 획일적인 교과서가 아니라, 자연과 격리된 학교가 아니라 이렇게 모든 존재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이런 책을 교과서로, 함께, 학교 밖으로도 나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그런 학교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그런 학교에서 이런 책으로 교육을 받는다면 지금처럼 감수성이 메마른 존재들이 사회의 윗층을 차지하고 있어도 그들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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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1-12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학교는 집이 모인 마을에 세웁니다.
오늘날 ˝집이 모인 마을˝은 하나같이 도시입니다.
오늘날 도시는 ˝들숲바다를 삽질로 밀어서 세운 잿더미˝입니다.
그러니 학교교육에 ‘숲‘이 없을 만합니다.

이미 ‘학교‘에 앞서 ‘집‘과 ‘마을‘부터 숲하고 한참 멀기에
˝감수성 메마른 아이어른˝이 가득하니,
이런 모습을 그대로 둔 채
학교교육만 바꿀 수 없다고 느낍니다.

kinye91 2025-01-12 08:37   좋아요 0 | URL
저도 숲노래 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지금 집들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자연과 담을 쌓고 있지요. 아파트들은 물론이고, 단독주택이라고 하는 곳도 자신의 집에 자연을 흉내내고 있을 뿐, 자연과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 집과 마을이 자연과 이어져 함께 어우러지는 장소도 있기는 하지만, 도시는 자연과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감수성 메마른 아이어른들˝이 가득하겠지요. 우리의 이러한 삶을 다시 생각할 때, 학교교육도 바뀔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녹색평론 2024년 겨울호 - 통권 188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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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侍民)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우리가 시민하면 떠올리는 그 시민(市民)이 아니라, 백성을 섬긴다는, 백성을 사람으로 바꿀 수 있으니 사람을 섬긴다는 그 말. 동학에서 쓰는 시민(侍民). 


동학에서 쓰는 시천주(侍天主)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은 많을 것이다.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이 아니다) 천주를 모신다는 말. 그런데 천주가 꼭 하느님이어야 하는가? 아니다. 하느님은 바로 곁에 있는 우리들이다. 사람들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이다. 땅도 하늘도, 물도, 풀도, 동물도 모두 하느님이 된다.


그러니 시천주라는 말은 결국 시민이라는 말과 통하고 시민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섬긴다는 말과 통한다고 보면 된다.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고 하늘로서 하늘을 먹는다는 말, 결국 사람이나 동물들 또는 다른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의 생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니, 하늘이 하늘을 먹는 삶이 곧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또다른 하늘을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일, 언제가는 나도 그들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면 어떤 생명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모두가 하늘이므로.


이런 정신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먹을거리가 남아돌아 어디서는 버리고, 어디서는 없어서 굶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중한 생명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강제로 자신의 의지를 남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남 역시 나일 테니까. 다른 존재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생명을 경시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 생명을 중시하는 삶, 그런 삶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세상을 향해 가는 일, 그것이 바로 시천주고, 시민(侍民)이다. 이런 시민(侍民)의 자세를 지니고 있다면 자신의 권력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일을 할 수가 없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무도한 짓을 하는 존재를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 그는 시민(侍民)과는 반대에 있는 존재이므로, 하늘을 해치는 자이므로, 그가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시민(侍民)을 하는 자세다. 의무다. 책임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 무도한 자와 그를 비호하는 자들. 시민(侍民)이 뭔지 생각도 하지 않는 자들. 평화를 깨뜨리는 자들. 도무지 다른 존재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 저들만 옳다고 생각하는 자들.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무도한 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길은 시민(侍民)의 마음을 우리 마음속에 새기는 것이다. 시민(侍民)의 마음이 깃들었다면 이제 행동으로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민(市民)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 시민(市民)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존재가 바로 시민(侍民)이므로.


예전 동학 혁명에서 그러했듯이. 그런 행동이 폭력으로 나타나는가? 아니다. 시민(侍民)은 모두를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에 평화로운 행동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평화가 권위를 지녀 무도한 자들이 어쩔 수 없게, 어찌할 수 없어 따를 수밖에, 그렇게 따르다 보면 어느 순간 회심의 순간이 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모인 시위 현장이 돌이 날아다니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색색의 응원봉들이 펼쳐지고 있는 평화로운 현장. 이런 평화로운 시위야말로 시민(侍民)의 정신이다. 우리는 이미 시민(侍民)의 정신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니 평화로 무도함을 대체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평화가 지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람만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 정착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런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侍民)의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 공론장을 형성하고, 그것이 안착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시민(侍民)의 정신은 지금 지구가 처해 있는 기후 위기도 극복할 수 있게 할 것이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위기도 이겨내게 할 것이다.


[녹색평론] 188호를 읽으면서 이 시민(侍民)이라는 말이,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시민(市民)과 겹쳐졌다. 그렇다. 시민(市民)은 결국 시민(侍民)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侍民)들이 우리 사회를

평화롭게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물'에 관한 글이나 '농업'에 관한 글, 그리고 영화 또는 영화 감독에 대한 이야기도 시민(侍民)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한다. 자연을 거스리는 물 관리법은 시민(侍民)이 아니다. 성장을 위한, 자본을 위한 농업 역시 시민(侍民)이 아니다. 단지 시간을 보내거나 또는 폭력이 난무하는 그런 영화 역시 시민(侍民)이 아니다. 


우리 삶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 문학, 예술이 시민(侍民)이고 자연의 흐름을 살리는 물 관리가 시민(侍民)이며, 성장이 아닌 모두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농업이 바로 시민(侍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


이름만 지방자치가 아니라 실질적인 지방자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지역에 맞는 정책이 실행되어야,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또 지역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존재들을 고려하는 정책이 실시되어야 진정한 지방자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자치는 바로 시민(侍民)의 실현이 될 것이다.


[녹색평론] 188호에는 이런 점을 생각하게 하는 글들이 많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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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위기 시대에 춤을 추어라 - 기후-생태 위기에 대한 비판과 전망
이송희일 지음 / 삼인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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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고 있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은 더더욱 기후 위기를 몸으로 겪는다.


영화감독인 이송희일은 기후 위기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공부하고, 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많은 자리에서 기후 위기에 대한 강연을 해왔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러한 결과를 정리했다. 특히 기후 위기를 피상적으로 대하지 않고, 기존의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방식들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조목조목 따지면서 비판하고 있다.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을 세 단어로 정리하면 '저항, 대안,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현재 기후 위기를 불러낸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 단지 개인의 방만한 삶이라고, 개인에게 책임을 지워선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의 기후 위기를 불러온 것은 성장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체제라고 한다 이러한 자본주의는 또 무엇을 바탕으로 하고 있나? 바로 식민주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종종 우리는 기후위기를 자연적 재앙으로 이해하지만 명백히 정치적 재앙이다. 그것은 가부장제 재앙이고, 자본주의 재앙이며, 인종주의 재앙이다.'(23쪽)


'지구 경관을 파괴적으로 변경하고 자연과 인간을 노예화했던 식민주의가 바로 기후변화의 뿌리다.'(34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에 저항해야 한다. 지금도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자본주의는 우리들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다. 


삶이 불안정해지고 있는데, 특히 사회적 약자들은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 중에 특히 여성, 또 성소수자 등은 더한 상황으로 내몰린다.


'전세계 빈곤층의 80%도 여성이고 기후 이주민의 80%도 여성이라는 유엔의 통계는 이 같은 잔인한 현실을 적확히 폭로한다. 여기에 더해, 기후재난이 증가하면 젠더 기반 폭력이 급증한다.'(20쪽)


이런 현실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저항은 대안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냥 반발이 아니라, 이런 세상도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이런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는 일, 개인이 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서 실현되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함께 하는 것. 땅으로 말하면 공유지가 될 것이고, 삶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연대와 공유가 될 것이다. 그러한 조직을 만들어 함께 하면 기후 위기에 대해서 제대로 대처할 수 있다고 한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지닌 문제가 무엇이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차분하게 이 책을 통해서 풀어가고 있다.


꼼꼼하게 읽으면서 저자의 주장을 곱씹으면서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찾고, 주변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무엇일지 찾고 실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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