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


  동화작가로 알고 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동화를 쓴 작가.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니... 세월은 그렇게 갔구나.


  정채봉 작가가 원하던 사랑이 넘치는 세상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


  몇 해 전에 순천 여행을 할 때 김승옥과 정채봉 문학을 기념하는 곳이 있었다.


두 작가가 한 곳에 있는 모습. 서로 다른 문학 작품을 썼다고 하지만, 그렇게 문학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들.


이 시집은 정채봉 동화와 마찬가지로 따스하다. 그리고 순수와 사랑이 넘친다. 세상에 이런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일찍 세상을 뜨다니.


이런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더 많아지면 질수록 세상은 더욱 따뜻해질텐데.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고 다투는 일이 줄어들텐데.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이 우주에 평화와 사랑이 넘칠텐데.


시집에 있는 시들이 모두 따스하고 좋지만, 특히 이 시. 이런 마음, 이런 행동. 허투루 살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


                들녘


  냉이 한 포기까지 들어찰 것은 다 들어찼구나

  네 잎 클로버 한 이파리를 발견했으나 차마 못 따겠구나

  지금 이 들녘에서 풀잎 하나라도 축을 낸다면

  들의 수평이 기울어질 것이므로


정채봉,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 샘터. 2020년 개정증보판. 13쪽.


풀잎 하나도 생각하는 마음. 세상에 그냥 있는 존재, 쓸모 없는 존재는 없다는 생각. 모두가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들.


세상에 내려온 천사다. 이 세상에 따스한 마음을 전해주려고 내려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시로 나타났다. 이 시집이다.


이제 곧 봄이다. 입춘이 지났으니, 봄이라고 해야 하나. 세상은 아직도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봄이 왔으면 좋겠다. '차마'라는 마음.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시'가 과연 설 자리가 있나 싶다. 참 시적이지 않은 세상이다.


  '이전투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진흙탕에서 서로 뒹굴고 있으면서, 서로가 상대가 더럽다고 말한다.


  서로에게 묻은 진흙만 보고, 제 몸에 붙은 진흙은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싸움은 멈추지 않는데...


  자신들이 진흙탕 속에서 싸우고 있음을 깨달아야 진흙탕에서 나오려는 노력을 할 텐데, 전혀 모르고 있다.


  왜? 멈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멈춤! 여기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긴다. 시선을 바깥에서 안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시 안에서 바깥을 볼 수 있게 한다.


멈출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관성의 법칙을 거스를 염두도 두지 못하고, 그냥 가는 대로만 가려고 한다. 멈추고, 성찰하고, 질문하고, 다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거친다면, 진흙탕 속에서 싸울 이유가 없어질 텐데.


이렇게 해서 '시'는 요즘 세상에 필요하다. '시'는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잠시 멈춰서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런 시들이 좋은 시다. 신미나 시를 읽다가 '시'라는 제목을 단 시를 발견했다.


이 시에서 '멈춤'을 생각했고, 시는 곧 생명을 주는 피라는 생각, 그러나 자신의 안에 머무는 피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영양을 주는 피인 선지와 같은 피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에만 고여 있어서는 안 된다. 피는 밖으로 나와 응고되어서 다른 사람의 영양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시들은 그냥 안에만 고여 있든지, 또는 나와도 응고가 되지 않고 뿔뿔이 달아나버리고 만다.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응고되어야 하는 피, 시들. 그렇게 잠시 멈춰서 성찰을 할 수 있게 하는 시들. 하지만 세상은 '한쪽 귀가 흔들리는 냄비'와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넘어져 버리고 만다.


응고되기 전에 쏟아져 흩어지게 한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잠시 멈추게 하는 것, 바로 시다. 이 시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닷새면 피가 상한다고 했다


     선지피 받아온 날

     한쪽 귀가 흔들리는 냄비를 들고 가다

     눈 쌓인 마당에 자빠졌다


     돈벌레의 작은 발처럼 

     수백갈래로 퍼져서

     흰 눈을 갉아 먹는 붉은 다리들, 붉은 이빨들


     응고된다는 것은

     누군가 잰걸음을 멈추고

     문득 멈춰 선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 지금 고인 것은

     한사발의 붉음인데

     처음 본 붉은빛은 다리를 달고 달아났다

     뿔뿔이 흩어져 천만갈래 비슷한 붉기만 번지고 있다

   

신미나, 싱고,라고 불렀다, 창비. 2016년 초판 3쇄. 50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목련 2023-03-01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저도 좋아해요^^

kinye91 2023-03-01 09:58   좋아요 0 | URL
가끔 시를 통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돼요. 이 시집도 좋았어요.
 

 

[삶이보이는창] 132호를 읽다.


나와 같은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특별한 삶이 아니라, 일상의 삶이다. 그런 일상의 삶이 위협받을 때가 있다. 그냥 살고자 할뿐인데 제약이 있을 때가 있다.


특히 돈이 없거나, 권력이 없거나 하면 더더욱.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나라, 법질서가 잘 지켜지는 나라, 공정이 실현되는 나라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자신이 살 집을 얻지 못할 자유, 아님 지상이 아닌 반지하에 살 자유, 몸이 불편하니 자유롭게 이동하지 않을 자유, 직업을 얻지 못할 자유, 권력이 없으면 아무 소리도 못하고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할 자유.


이런 자유 앞에서 평등은 능력에 따른 평등으로 전락하고 만다. 네가 노력하지 않았잖아?라는 능력주의가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압박한다. 


공정은 능력이고, 능력에 따른 차별이 평등이자 자유다. 그러니 우리는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을 자유를 지니고 있다.


자, 네 능력을 키워라!


하지만 능력이 자신만의 힘으로 키워지나? 내가 돈을 많이 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의 능력으로 벌게 된 걸까?


보이지 않지만 나와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 과거-현재-미래, 이곳-저곳 등등에서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로 인해서 내 능력이 발휘된 것 아닐까? 


그러니 오로지 나만의 능력으로 이루었다는 성과, 그런 능력주의는 문제가 있다. 우리들이 누리는 자유, 평등, 공정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삶창은 그런 점을 일깨워주고 있다. 삶창에는 바로 이렇게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으니까.


삶창에는 능력주의를 우선하는 사람들보다는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남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가 있으므로,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학교 교육을 무려 12년 이상이나 받았는데, 과연 내가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나는 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이, 현대 기술이 만들어낸 도구들 없이 무인도에 있다면, 어떻게 살아남을까?


  불도 못 피울텐데. 무엇을 잡을지도, 또 어떤 식물이 먹을 수 있는 식물인지도 모르고, 잠자리를 마련하는 일도, 주변의 위험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는 일도 못할텐데.


아니 현대 도구를 가져갔다고 해도 과연 그 도구들을 잘 쓸 수 있을까? 도구들을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름이 필요한데, 기름이 떨어지면, 전기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막연히 학교에서 배운 기술들이 그야말로 내 삶을 유지하는데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은 그렇게 책에서만 배울 수 없을텐데... 자신이 혼자 살겠다고 하는 일도 힘든 일이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는 일도 어려울텐데. 


살아가기 위한 기능, 또 함께 살아가기 위한 자세를 과연 배웠던가. 그냥 제멋에 겨워 살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 


지금부터라도 나만이 아니라 함께를 생각하는, 그리고 내 삶을 내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


제목만으로도 마음을 끄는, '새로운 인생'이라는 시. 물론 이 시가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해석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새로운 인생을 꿈꾸지 않나. 


그런데 그 새로운 인생이 위로 위로, 일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밑으로 밑으로, 일과 관련있는 곳으로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 아니겠는가.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인생. 그래 일본의 어느 학자가 벌레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지 않은가. (김해자가 쓴 '벌레의 눈, 시인의 눈'이란 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그렇게 낮은 곳에서 함께 사는 삶. 그런 새로운 인생. 그렇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


  새로운 인생


바람이 긴꼬리도마뱀처럼

비닐문을 들치고 들어오나 보다

어둠이 미끈거리며 목덜미를 감쌀 무렵

방안에 웅크렸던 나라는 짐승을 본다


사람 하나였다고 믿었던 나의

껍질을 빈방에 결박해 두고


신원미상의 얼굴을 하고선

행자승처럼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지어먹고

신발끈을 매고

쫓기는 사람처럼 집을 나선다


나는 당분간 일용노동자로 살기로 했다


내 등을 떠밀어 다오

서투른 몸동작으로

삽과 괭이와 해머와 철사와 커터 들을 다루는 나를

이제야 그들의 눈빛에서

체념과 순응의 본능을 읽을 줄 알게 된 나를

내 어머니에게 이런 나를 보여주고 싶다


새로운 인생을 향해

꿀꺽 침을 삼키는 나를


송태웅, 새로운 인생, 산지니. 2018년. 20-2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주인공이 청소년이라서 그런지 잊고 지냈던 과거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 나도 저런 생각을 했었지, 저런 행동을 했었는데... 그 시절이 까마득한 과거가 되어버린 듯, 아예 기억에서 지우고, 나날을 살아가는데 허덕허덕거렸던 지금.


  이 지금이 과거를 잊고 살아가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와 함께 하는 현재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 시집이다.


  우리는 한때 청소년시기를 거쳤으므로. 


  아직 청소년 시기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이런 시집을 읽는다면 현재에서 미래를 만나는 경험을 할 테고,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이라면 자신의 삶을 시를 통해서 만나게 될 테니.


청소년 시집은 누구에게나 현재를 풍요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이 시집의 시인은 교사의 역할을 한다고 한다. 


자신의 시를 통해서 수업 시간에 많은 문학적 용어들을 설명한다고 한다. 시인이자 교사, 교사이자 시인이니 학생들을 통해서 청소년들의 삶을 자주 또 깊게 만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남을 시를 통해서 표현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누구나 시를 읽으면서 현재를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그래서 이 시집에는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내용도 어렵지 않다. 그냥 청소년의 마음, 행동을 일상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상이 시로 다가온다고 해야 할까? 이 점을 다른 말로 하면 청소년들의 삶을 어려운 언어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들의 말은 쉽다. 간결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삶도 간결하다. 그것을 공연히 어려운 말로 번역할 필요가 없다.


난해한 말로 가릴 필요도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온전한 존재. 그렇게 오롯한 존재로 청소년을 받아들이면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찾아 간다.


이 시집에 나온 시들 중에 '뜬구름'이란 시. 청소년기에 뜬구름을 잡으려고 하지 않으면 언제 할까? 청소년 시절 엉뚱한 상상을 하던 때를 떠올리게 하는 시다. 그러나 엉뚱한 상상이 필요없을까? 아니다. 엉뚱한 상상은 필요하다. 그것들이 우리들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니까.


  뜬구름


뜬구름 잡는 얘기 좀

그만 하란다


비누 거품 비행선

고양이 말 통역기

하늘을 걷는 신발

몸이 커졌다 작아지는 알약

양치질을 해 주는 사탕

시험 문제 답이 보이는 안경

눈물을 멈추게 하는 향수

웃음이 나오는 껌

       .

      .

      .


뜬구름도 쌓이면

비가 되어 내릴 거다

그럼, 잡을 수 있다


이장근, 나는 지금 꽃이다. 푸른책들. 2013년. 5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