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시집이다. 


  당연히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너무도 인용이 많이 되어서 집에 구비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이 시집을 손에 넣었는데, 찾아보니 집에 없다. 잘 됐다. 보관해 두고 틈 나는 대로 읽으면 좋을 시집이다.


  시란 시대에 갇히지 않고, 시대를 넘어 다가오기 때문에 오래 되었다고 내 곁을 떠나게 할 필요가 없다.


  언제든 필요한 때 다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니까.


  제목이 된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너무도 많이 인용이 되어 더 인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 시집에서는 소위 '민중가요'로 불렸던 노래도 있으니, 그 중에 한 편이 바로 '너를 부르마'라는 시다. (검색하면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런 시 말고도 지금을 생각하게 하는 시가 있다. 집중호우가 너무 심해 산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난 올해. 이 집중호우가 꼭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온몸으로 맞고 있는 집중호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비를 내리는 집단들이 있으니..


첨단과학기술로 무장하고, 이제는 아이티(IT) 강국이라고 그렇게 자랑하고 있는,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우리나라지만, 기후 재앙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이 당하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었고,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지금에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난이 있으니...


하긴 기후 재앙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이 더 울창했다면, 산사태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민주주의란 결국 사람들이 숲을 이루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숲을 파괴해 버린 결과가 이렇게 산사태, 홍수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이제는 되었다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숲 이루기를 그만두고 있어서 이런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이것이 어찌 자연에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국민들을, 시민들을, 사람들이 숲을 이루지 못하게 오로지 나무로만, 식물로만 존재하게 만드는 갈라치기에 우리들 역시 숲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시인이 광화문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숲을 이루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듯이, 숲을 이뤄야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는 함께 있어도 각자인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시가 더 귀하다. 1970년대 엄혹했던 시절, 국민들이 숲을 이루지 못하고 개별로만 존재하게 했던 시절에 숲을 그리워했던 시인의 마음이, 지금 2020년대에도 마찬가지가 되었다면...


촛불이라는 숲을 이루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숲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개별로만 남아 있다. 혼자서는 힘을 쓸 수도 없는데, 버티기도 힘든데...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1979. 동아일보>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93쪽.1997년 개정 6쇄.


숲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모여 숲을 이루자고 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숲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이 시집에 실린, 민중가요로도 불린 '너를 부르마'에 나오는 말처럼, 다르게 쓰이고 있는 그 '너'를 다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 된 시집, 그러나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시집. 정희성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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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보이는창] 134호를 읽었다. 여러 삶들이 책에 실려 있다. 세 달에 한 번 만나는 많은 삶들.(계간지니까) 부유한, 권력있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삶들이 나와 있다.


이번 호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으면 '듣기'가 아닐까 싶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 점점 찾기 힘들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귀를 열라고 했는데, 이 말을 나이가 아니라 권력을 지닐수록 귀를 열고 입을 닫으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나이를 권력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니...그냥 나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말하다 논리로 밀린다 싶으면 꺼내는 말, "너, 몇 살이야? 민증 까.")


권력이 있으면 자기 말만 하게 된다. 그러면 남 말을 듣지 않게 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해줄 사람이 없을테니. 이 상황을 거꾸로 뒤집으면 듣기는 바로 사랑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한다.(박총, 들음이라는 사랑)


세상 모든 성인들이 듣기를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 권력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별명(?)이 '59분'인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1시간이 주어진다면 자신이 말을 하는 시간을 59분 가진다는 뜻이란다. 이런, 이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언제 말하지? 아니 다른 사람의 말을 언제 듣지? 앞에 언급한 이번 호 박총이 쓴 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김범준 선생의 말을 빌렸다고 한다.


"대화 전체의 일 퍼센트 정도를 말하기 위해 긴 시간 상대방의 말을 듣는 태도에는 그야말로 사랑이 담겨 있다"고.(79-80쪽)


이런 듣기의 실종이 어디 한 사람만의 일인가? 정치권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 않은가. 자기들 말만 하고, 다른 정당 또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말은 '가짜 뉴스'로 몰아세우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니 말이다.


대표적인 예를 이번 호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바로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하는 '농촌유학'이다. 대도시에 사는 아이들에게 농촌을 경험하게 해주고자 실시하는 교육정책.


그런데 서울시의회에서 그런 활동을 하는 '조례'를 폐지하겠다고 했다 한다. 당연히 서울시교육청은 반발하고 있다. 아래 링크 참조


<‘농촌유학 조례’ 폐지, 시의회 발목잡기에…조희연 “거부권 검토” : 교육 : 사회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삶창]에서 몇 호에 걸쳐 소개하고 있는 것이 이런 농촌유학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케어팜care farm'에 대한 소개글이다.


농업을 통해서 치유하는, 사회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을 농촌에서 함께 일하면서 치유도 하고 수익도 올리는 그런 활동.


수익을 앞에 두기보다는 함께 함에 중심을 두는 그런 활동. 네덜란드에서 케어팜을 운영하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가 고객들에게 기대하는 첫 번째는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이고,두 번째는 자신감을 갖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생산성까지 좋을 수 있다면야 더 좋겠지만 그게 우선은 아니죠. 그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27쪽)


이런 흐름이 있다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귀를 닫고 있는 행태가 바로 '생태전환교육 사업 관련 조례안' 폐지하겠다는 발상이지 싶다. 다른 정치적 관점을 지녔다고 아예 말을 듣지 않겠다는, 귀를 꽉 막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그런 모습.


더 강화해도 시원찮을텐데... 생태교육은 이 시대 화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귀를 막고 살아서야 어디.


수익성에 현혹되어 귀를 막고 사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우리에게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 점을 삶창 이번 호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특히 김인호가 쓴 '지리산 10.19 생명평화 기행'을 읽다보면 가슴이 턱 막힌다. 지리산에 이런 일이?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라는 슬로건이 있는 곳에'지리산 골프장'이 들어선다고 한다. 나무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내고 있다고 한다. 


자연에 대해 귀를 닫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지리산도 이런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 조병범이 쓴 '입문자들과 함께 새 보기'를 읽으면 우리가 어떤 귀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런 귀를 지니고 있으면, 그렇게 들을 수 있다면 지리산에 골프장을 건설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59분'이라는 말이 듣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자기 말은 1분, 다른 사람, 다른 존재의 말을 듣는 시간은 59분. 그렇게 된다면 자연(환경-생태)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사회도 갈등보다는 조화와 협력이 주를 이룰 것이다.


들을 귀, 갖춰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기보다 나먼저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래야 모든 사람들의 삶이 좋아진다.


나를 돌아보게 한 삶창 이번 호였다. 과연 나는 '들을 귀'를 지니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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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아침. 


  길을 걷다가 길가에 쪼그리고 앉아 무엇을 하는 아이를 발견했다.

  무엇을 하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멈춰서서 살펴보니, 아이의 손에는 나뭇가지가 들려 있다.


  그 나뭇가지로 아이는 보도블록 위에서 무언가를 들어 화단으로 넘겨준다.


  무얼까? 무엇인지는 금방 알게 됐다. 비 온 다음날 보도블록으로 나온 지렁이들. 꿈틀꿈틀, 천천히 기어다니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타는 듯한 햇볕에 타 버릴 지렁이들.


그런 지렁이를 징그럽다 하지 않고 조심스레 나뭇가지로 들어서 화단으로, 흙이 있는 곳으로 보내주고 있는 아이.


감동이었다. 이런 아이가 있구나! 이렇게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가 있었구나! 세상에 동심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마음이 따스해졌다. 자연스레 동시가 떠오르기도 했고, [샬롯의 거미줄]이라는 동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래, 이런 동심들이 글로 표현되어 많은 아이들이 읽으면 좋겠지. 아이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지.


이런 상황에서 '동시집' 읽게 되었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봄처럼 세상 만물을 따스히 감싸주는 손길은 되지 못할지라도 깜냥껏 제 몫을 다하고 싶습니다. 동시를 쓰는 일도 그런 몫 중의 하나라는 걸 잊지 않으려 합니다.'(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동시를 쓰는 시인과 지렁이를 화단으로 보내주는 아이의 마음이 통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모두가 잘되는 세상이 과연 문제가 있을까 하는 생각.


최근에 우리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수능 킬러 문제'에 관한 논란. 변별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아주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낼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 그런 문제는 사교육만 키운다고 하는 사람들. 아니, 문제가 쉬워지면 오히려 더 사교육이 는다고 하는 사람들.


여기에 '카르텔'이라는 말까지 나돌면서 이런 말 저런 말들이 우리 사회를 뒤덮었는데... 수능으로 등수를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로 이야기가 진전되지는 않는다.


수능을 자격고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니, 논의가 좀 진전되고 있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이 동시집에서 '정말 그런 걸까?'라는 시를 보았다. 모두가 수능을 잘 보면 안 되나? 만점이 수두룩하게 나오면 안 되나? 그럼 교육이 망하나? 그런 생각.


       정말 그런 걸까?


     시골 사는 큰삼촌이

     양파 농사가 잘돼서 좋다더니

     이 마을도 양파 풍년

     저 마을도 양파 풍년

     너도나도 양파 풍년

     그래서 한꺼번에 모두 망했단다.


     내 친구들이 시험을 잘 봐서

     얘도 백 점

     쟤도 백 점

     너도나도 백 점

     그러면 학교도 망하게 될까?


    망하지 않게 하려고

    시험 문제를 어렵게 내는 걸까?


박일환, 토끼라서 고마워. 2023년. 60쪽.


이 질문에 무어라고 답할 것인가? 아니, 답할 수가 있나? 어떤 교사는 문제가 쉬워 아이들 점수가 높게 나오면 자존심이 상한다고도 한다던데... 아이들 점수가 잘 나오면 교사가 자랑스러워 해야 하지 않나, 내가 가르친 내용을 아이들이 잘 이해했구나 하면서...


오로지 등급을 나누기 위해서 변별력을 확보해야 한다고 어려운 문제를 내는 것, 그것은 전제가 잘못 되지 않았나?


누구나 똑같은 농사를 지으면 잘 되면 잘 될수록 이익을 남길 수가 없다. 같은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농사를 지어야 하고, 그 농사들이 모두 잘 되면 다 좋을 수가 있다.


획일성을 벗어난 농사, 단작이 아닌 다작을 하는 농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1연에서는 다양한 농사가 필요함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면, 2연에서는 시험을 통해서 평가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아이들이 얼마나 시험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시험은 배운 것을 평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고 등급을 매기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있는 현실을, 오히려 그런 시험으로 인해 학교(교육)가 망해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아이들이 너도나도 백점을 맞으면 그것이 서로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백점을 토대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있게 찾아가게 된다는 것. 오히려 너도나도 백점이어야 학교가 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너무도 어려운 문제로 백점을 맞기 힘든 시험이 계속되는 학교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이 과연 보도블록 위를 기어가다 바짝 말라 죽어가는 지렁이를 볼 수 있을까?


너도나도 백점을 맞아 시험을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을수록 시험지만이 아닌 주변의 다른 존재들을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다.


조용히, 조심스레 지렁이를 살리려고 한 아이, 그런 아이들이 넘쳐나는 학교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학교를 꿈꾸어본다. 동시를 쓰고 읽는 이유도 바로 그런 따스함을 간직하기 위함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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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를 하나의 생태계로 보면, 모든 존재들이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존재 의미가 없지 않다.


  모두가 나름 자기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살아갈 장소가 필요하다.


  그런 장소들을 적절히 나누고, 공유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 지구다. 


  이 지구, 과연 적절한 공생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지구온난화란 말이 나온 지 꽤 되었듯이, 인간이라는 종에 의해 지구 환경이 바뀌었는데, 단지 기후 변화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지구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가, 다른 종들이 살아갈 수 있는 장소를 없애고 있기도 한데.


이제는 처음이라는 수식어를 단 질병들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만큼 서로가 살아가는 공간이 구별되지 않아 질병들이 사람과 동물에 공통적으로 발생하기도 한다. 소위 말하는 인수공통감염병이라고 하는 것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자신들의 영토에서 쫓겨날 뿐만 아니라, 지구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아 멸종 위기까지 처한 생물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미 많은 종이 사라지기도 했고.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도 그러한데...


이 시집은 동물을 우리에게 불러왔다. 우리와 함께 살던 동물들을 시로 표현함으로써, 그들과 우리가 함께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일명 생태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시를 통해서 생태 감수성을 깨우치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에는 생태시란 무엇인지, 생태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글도 함께 실려 있다.


인공지능 시대, 변화가 막심한 이 시대에, 인공지능에 의해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런 일들이 우리 인간에 의해 밀려난 종들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 우리 영토를 없애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수많은 내륙동물과 바다동물에 관한 시들이 실려 있다.


그 중에 웃음을 머금게 하는 시 한 편. 꼴뚜기...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는 속담이 있는데, 이 시는 이 속담을 비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꼴뚜기


         멸치에 뒤섞여

         멸치볶음으로 볶아지다

         망신이다


최계선, 은둔자들, 강. 2021년.117쪽.


꼴뚜기도 꼴뚜기의 삶이 있다. 다른 존재에 딸려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생물이 마찬가지다. 기생하는 생명체들도 숙주의 생명을 완전히 끊지는 않는다. 기생 또한 어찌보면 공생이다.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남의 삶에 종속되는 삶은 망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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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시인들이 쓴 시를 모은 책이다.


  여성 시인들로 한정하지 않고 젠더에 관한 시들을 모았으면 더 좋았으련만 하는 생각도 있지만.


  아직도 여성 시인이라는 말을 쓰나? 하는 생각. 그럼에도 이런 시집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여성'이라는 점에 방점이 찍힐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남성 시인이라는 말은 없는데, 젠더라는 성 중립적인 말(?)을 달고 여성 시인들의 시들을 엮은 것은, 여전히 남성 시인은 없고 여성 시인만 있는 세상에 대한 문제 제기라고 여기기로 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이런 시집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으니... 하지만 여성과 남성이 대립해서는 안 되고, 또 성을 남성과 여성으로만 나누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고 하지만 현실을 바로 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시집은 여전히 필요하다. 아직은 우리가 젠더를 생각하려면 여성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의 삶에 대해서, 여성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고서는 젠더에 대해 더 깊이 나아갈 수 없으므로.


시 한 편을 읽자.


  Ghost

             - 강성은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땐 죽은 여자 같더니

죽고 나선 산 여자처럼


밤의 정원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 다니는 작은 새처럼

밤하늘을 떠다니는 검은 연처럼


장갑을 끼면 손가락이 생겨나고

양말을 신으면 발가락이 생겨나고

모자를 쓰면 머리가 생겨난다


책을 읽으면 눈이 생겨나고

음악을 들을 땐 귀가 생겨나고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면 입술이 생겨나는데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입이 있어도

말은 못한다


김지은 이광호 엮음, #젠더 시, 문학과지성사. 2021년. 164-165쪽.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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