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하이쿠'가 있다면 우리나라엔 시조가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시조와 하이쿠의 비슷한 점이나 다른 점에 대해서 세세하게 논할 필요는 없고, 둘은 짧은 형식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는 점만 언급하자.


  또 둘 다 다른 형식의 시에 밀려났다는 (이를 부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로 고전시가로 불리고, 이를 계승한 사람들을 전통시를 쓴다고 하니, 현대시에 분명 한 장르로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느낌을 준다.


  하지만 짧은 시행에 감정과 생각을 담으려면 압축이 필요하다. 언어를 고르고 골라, 그 형식에 맞춰 표현을 해야 한다. 그러니 짧다고 쉬울 수는 없다.


또한 시조는 여러 형식을 시험했다. 시조라고 알고 읽지 않으면 이 시가 시조인가 하는 시들이 꽤 있다. 가령 시 시조집에 실린 시 한 편을 보자.


                     착시 

                             -교단 일기 12


                    신호등 앞에 서서

                    현수막을 즐기다가

                    반가워라 눈 멈춘 곳

                    내 이름이 선명하다


                    되보다

                    쓰게 웃는다

 

                반갑 등록

 

반금현, 백인종 아이들, 등. 2024년. 25쪽. 


이 시조만 보면 시조라고 인식하기 힘들다. 그냥 짧은 현대시이겠거니 한다. 우리가 길을 가다 혹은 글을 읽다 이런 글자를 잘못 읽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다시 보면서 헛웃음을 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기에 너무도 비싼 대학 등록금을 비판하는 마음까지 더해, 이런 반값 대학 등록금이 실현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조다.


보통 3줄로 생각하는 시조를 행과 연을 구분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전통시라고 하는 시조를 현대에 맞게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는데... 시조라는 형식을 고수하는 이유가 어쩌면 짧은 형식 속에 내용을 넣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덧붙이게 하려는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제목이 된 시조를 보자. 씁쓸한 우리나라 아이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백인종 아이들 

                                             - 교단 일기 66


                     어릴 적 친구들은 황인종이 분명했어

                     요즈음 아이들은 백인종이 아닌가 몰라

                     흰 얼굴 서로 보면서 하얀 나라 만들겠지


반금현, 백인종 아이들, 등. 2024년. 79쪽


황인종, 백인종이라고 요즘은 구분을 잘 하지 않지만, 그래서 통상적인 구분으로 하는 이 표현에 의하면 우리나라 아이들이 '백인종이 아닌가 몰라'라고 하는 표현에는 밖에서 뛰어놀지 못하고, 해와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놀면서 피부가 햇볕에 그슬린 우리 아이들의 피부가 이제는 밖에서 거의 놀지 못하고 있어 하얗게 변해 버린 현실의 모습.


그런 모습이 과연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시조인데... 짧은 형식에 지금 우리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렇게 이 시조집에서는 지금 우리 시대의 풍경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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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웠다. 폭염 일수뿐만이 아니라 열대야 일수에서도 다른 해를 넘어섰다.


  단지 폭염과 열대야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더위였다. 추석이 지났어도 더위는 한풀 꺾이지 않았으니...


  처서부터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모기도 기승을 부릴 때가 지났는데, 여전히 덥고, 모기도 많다. 이제야 조금 수그러들었다.


  기후가 변해도 너무 변했는데, 이러다가는 매해 올해가 가장 시원했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나 하는 두려움도 있다.


더이상 남 일이 아닌, 기후 변화, 기후 재앙이다. 폭염이나 열대야가 심해지면 더욱 고통받는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더위, 생명을 유지하기 힘든 더위일수도 있다. 이럴 때 이들을 지키는 것이 무엇일까?


경제? 아니다. 정치다. 정치는 그래서 중요하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닌가.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에서는 가난하다고 해서, 없다고 해서 더위나 추위에 목숨 걱정하는 일은 없다. 아예 그런 환경을 만들지 않는다. 그런 환경을 만들지 않고, 서로가 함께 살아가고자 실시하는 정치가 민주주의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거꾸로 적용해보면 가난때문에 기후 변화로 인해 목숨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이는 공동체라는 기반이 해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민주주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기후 재앙을 해결하는 것도 '정치'이고, 기후 재앙으로 인해 생명에 위협을 받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도 '정치'이며,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는 것도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초고령사회가 되어 노인문제가 불거짐에도 걱정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정치'고, 후쿠시마 오염수를 비롯한 핵발전 문제도 '정치'고 점점 고사되어 가고 있는 농촌 문제를 살리는 것도 '정치'다. 그러니 [녹색평론] 이번 호에 실린 글들은 모두 '정치'와 관련이 되어 있다. 


하긴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치'와 관련되지 않은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정치'라고 하면 '민주주의'를 떠올린다. 민주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 이는 우리가 동의하고 있는 정치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가 제대로 작동해야지만 기후, 전쟁, 초고령 사회 등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과연 그런가? 어떤 형태의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하는가? 지금처럼 '대의 민주주의'가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녹색평론]의 답은 '아니다'다.


'대의'는 대신한다는 의미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주인이 된다는, 정치의 주체가 된다는 의미지, 자신의 권력을 남에게 양도한다는, 그래서 양도받은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여 이번 호에서 다시 '시민의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숙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또는 쉽게 말해서 '추첨'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는 제도에 대해서 말이다.


일명 '제비뽑기'라고 하는데, 무작위로 뽑힌 사람들이 일정한 기간 동안 다양한 의견을 들은 다음, 서로 토론을 통해 논의를 좁혀가고 의견을 최종 결정하는 과정을 거치자는 것. 시간이 걸리고, 논쟁이 길어질 수도 있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결정을 하고 집행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기후' 문제에 대해 특정한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결정이 나올 수 없고,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전쟁을 찬성하는 결정이 나올 수 없다. 마찬가지로 노인이나 농촌 문제를 어느 지역, 어느 세대의 이익을 위하는 쪽으로 의견을 정해질 수도 없다.


그러니 '시민의회' 또는 '숙의, 추첨 민주주의'를 도입, 시행해야 한다고 한다. '정치'가 바로 서야 다른 문제들에 바른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어떤 정치여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도 숙의가 필요하겠지... 그런 점을 이야기하는 것이 [녹색평론]이고.


이번 호를 읽으면서 농촌, 또 초고령사회라는 문제에 대해서 엉뚱한 상상을 해봤다. '늘봄 학교'라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저녁 7시 정도까지 머무르게 하는 정책이 실시 중인데, 이것보다는 오히려 부모들이 일찍 퇴근할 수 있게 노동시간을 조정하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과 비슷하게, 농산어촌에 폐교들이 많은데, 이 폐교들을 마을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


농산어촌에 주로 노인들이 많이 사는데, 폐교를 그냥 방치하지 말고, 여기에 진료소를 마련하고, 또 각종 시설을 만들면, 가령 운동장에는 텃밭, 기술실에는 목공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는 재료들, 가사실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재료들, 도서실에는 책을, 또 빈 교실에는 각종 놀이 기구들을 갖추고, 간단한 카페나 음식점을 만들어 여기에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고용해 늘 그곳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맞이할 수 있게 하면, 언제든 노인이든 아이들이든 청년들이든 학교에 들러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 한다면, 노인들이 갇혀 지내는 삶에서 벗어날 수도 있고, 아이들은 노인들과 함께 지내니 돌봄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고, 청년들도 할 일이 있으니 농산어촌에 머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여기에 간호법이든 의료법이든 바꿔서 간단한 진료 및 처방은 학교 진료소에서 할 수 있게 한다면 더 좋지 않을까. 의약분업이 되기 전에 가벼운 질환은 약국에서 진단받고 처방을 받았듯이, 학교 진료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한다면 일차 진료는 마을에서 해결할 수 있고, 또 마을 돌봄(노인과 아이들)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대도시 집중을 막고, 농산어촌도 살리고, 초고령사회에서 발생하는 노인 문제, 돌봄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되고, 의료 문제도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 물론 가야할 길이 너무도 멀지만...


농산어촌에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사회-문화-경제 기반 환경도 마련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지만, 적어도 폐교가 된 학교를 마을의 생활-문화 중심지로 만들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모아 정책을 마련하는 '정치', 그런 정치를 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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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 있는 줄 알았다. 너무도 유명한 시집이었고, 제목이 된 시는 자주 읽었던 시였으니까.


  그런데 시집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시만 읽고 있었던 거다. 워낙 유명한 시라서 쉽게 만날 수 있던 시였으니까.


  그 한 시로도 충분하지만 시집을 구해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집은 처음 간행된 시집과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시집이 다르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시인이 시집의 시들을 바꾸기도 하고, 제외하기도 했다고. 새로운 개정판 소개가 이렇게 되어 있다.



 19권. 맑고 부드러운 언어로 전통 서정시의 순정한 세계를 펼쳐온 '우리 시대 최고의 감성 시인'으로서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정호승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1993년 첫 개정판에 이은 두번째 개정판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부 가름을 다시 하고 연작시를 해체하여 작품마다 제목을 새롭게 달았으며, 초기 시 4편을 추가로 수록하였다. 1979년 초판이 출간된 지 3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냉철한 현실 인식과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과 '슬픔을 수반한 아름다움'이 보석처럼 빛나는 정결한 시편들이 여전히 가슴을 적시는 뭉클한 감동을 일으키며 고요한 울림을 선사한다.


내가 읽은 시집은 2004년 개정판 16쇄니, 첫 개정판일 것이다. 표지 그림이 다르다. 그렇다면 수록된 시도 조금 다를테고. 


뭐, 그런 사정이야 그렇다치고, 시집에 나오는 주된 낱말은 '슬픔''이다. 다른 낱말들 중에 빈도수가 높은 말도 있지만 '슬픔'만 취급하자.


아직도 우리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시인이 그렇게 슬픔을 주겠다고 하고,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슬픔이 기쁨에게' 중에서 - 13쪽)고 했지만, 아직도 우리는 슬픔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자신의 기쁨에 취해서, 슬픔을 외면하는 생활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지금 시대에는 더더욱 슬픔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슬픔을 멀리하면서 기쁨만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렇게 기쁨만을 바라보려고 한다고 슬픔이 사라질까.


아니, 오히려 슬픔을 바라보고, 슬픔을 만나고, 슬픔과 함께해야 슬픔이 사라지지 않을까.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슬픔으로 가는 길'에서 - 8쪽)고 했다.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슬픔을 위하여'에서 - 9쪽)


이렇게 살다 보면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보아라. /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은 /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슬픔 많은 이 세상도'에서 - 14쪽)라는 시구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슬픔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정호승 시는 그렇다고 슬픔 속에 함몰되어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정호승 시는 움직임이 있다. 가고 있다. 끝에서 멈추지 않고, 그 끝에서 움직인다. 이는 그의 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정호승의 '봄길' 중에서)라는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결국 그가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쁨의 세계로 함께 가기 위해서다.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만들기 위해서다.


각자도생의 사회라고 한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라고도 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다. 그런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니 슬픔을 생각하자. 나의 슬픔, 남의 슬픔, 우리의 슬픔을 생각하면 그런 슬픔 속에서 우리는 기쁨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정호승 시집을 읽으면 그런 슬픔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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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에 세 도시가 나온다. 세 도시? 그렇다면 이 도시가 의미하는 사람들은?


  시집이니, 당연히 시인일 거라 생각한다. 아니, 꼭 시인일 필요는 없다. 문인이라고 하자. 


  강릉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이율곡, 신사임당, 허균, 허난설헌? 어라, 모두 예전 사람이다. 그리고 이들이 시를 쓰기도 했겠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하고 생각을 해보면, 강릉은 바로 시인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강릉에 산다고 하기보다 강릉 사람이라고 하자. 그에게 강릉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장소다. 그러니 시인의 삶에, 시인의 시에 영향을 미친 장소가 바로 강릉이다.


그렇다면 프라하는? 프라하 하면 카프카가 떠오른다. 카프카? 변신... 소설가... 하지만 최근에 읽은 카프카의 시집도 있으니 그를 꼭 소설가로만 기억할 필요는 없다. 카프카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물론 체코어로 작품을 쓰지 않고 독일어로 썼지만, 그를 프라하 사람이라고, 프라하는 바로 카프카의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엔 함흥이다. 함흥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별로 없다. 그러다가 함흥? 백석?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석이 함흥에서 교사 생활을 했으니까. 그곳에서 자야를 만났으니까. 함흥은 백석과 깊은 관련이 있는 도시가 된다.


이렇게 세 도시는 바로 작가의 삶을 이루는 장소가 된다. 시인은 강릉에서 이렇게 카프카와 백석을 자신 시의 자양분으로 삼고 있다.


즉 이 시집에는 시인 자신만이 아니라 카프카와 백석이 함께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시집 제목이 된 시를 보자.


강릉, 프라하, 함흥


카프카는

살아서 프라하를 떠나지 않았다

뾰족탑의 이끼와

겨울 안개가

그를 기억한다


내곡동 지나

보쌀 지나

남대천 둑방을 따라

바다로 간다

안목에 가면 바다가 둥지고, 바다가 무덤인

갈매기들이 산다


이홍섭, 강릉,프라하,함흥. 문학동네.2023년 3판 1쇄. 19쪽.


이시에서 왜 함흥? 할 수도 있다. 함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앟으니... 그렇다면 비슷한 제목을 가진 시 한편을 더 보면 된다. '춘천, 프라하, 함흥'이다.


춘천, 프라하, 함흥


이렇게 안개가 내리면

귀가 커 외롭던 카프카가 좋고

모르긴 해도, 당나귀를 닮았을 백석이 좋다


멀리 불빛, 불빛 같은 것도 잠기고

살아 있는 것들 모두 겸손하게 사라질 때

언덕 위 자취방에 돌아와

주인집 노부부가 아끼는 노란 국화를 바라보는 일도


이홍섭, 강릉,프라하,함흥. 문학동네.2023년 3판 1쇄. 36쪽.


이 시를 보면 분명하게 백석이 나온다. 그러니 시인의 시에 영향을 준 사람은 카프카와 백석이라고 할 수 있다. 꼭 이 문인들이 아니더라도 도시는 장소가 되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함께 시에 영감을 준다.


그렇게 시가 탄생하기도 한다.


서정적인,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 많이 있는 시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카프카나 백석의 작품을 찾아 읽게 만드는 시집이다. 그런 문인들처럼 되고 싶다는 시인의 바람을 느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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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그 이미지들이 하나로 합쳐져야 하는데, 합쳐지지 않는다. 시를 읽으면서 막연한 이미지를 떠올리고, 그런 이미지들이 어렴풋하게 계속 무엇으로 합쳐지려 하고 있다. 합쳐진 이미지가 시인이 의도한 이미지가 아닐지 몰라도...


  퀼트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조각조각들을 모아 다른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하나의 형태 속에 다른 형태들이 있는데, 그 형태들은 독립해 있으면서도 전체의 구성으로 존재하는 것. 모자이크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시집에는 서랍이 참 많이도 나온다. 그래서 제목이 된 시에 나온 시어 '퀼트'와 '서랍'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랍 역시 독립된 부분이다. 그러나 퀼트의 조각이 그렇듯이 서랍 역시 홀로는 완전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 때로는 다른 서랍들과 함께 더 큰 존재 속에 있어야 한다. 그때서야 서랍은 서랍으로서 기능을 하게 된다.


퀼트가 여러 조각들의 모임이듯이, 서랍은 더 큰 존재의 일부로 존재할 때 제 기능을 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잃고 내용물도 잃는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 인생이 바로 퀼트와 서랍 아닐까 한다. 삶의 단편들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 않던가. 삶의 단편들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삶이라는 전체 속에서 조망했을 때 우리 삶을 이루는 부분이 된다. 그러니 단편들이라고 하지.


이런 단편들이 모여 우리 삶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우리들 삶에는 수많은 서랍들이 있다. 그 서랍에 채워놓은 것이 무엇이든, 많은 서랍들을 지니고 살고, 때로는 그 서랍들을 열어 밖으로 내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서랍을 꺼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면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서 '퀼트와 서랍'을 통해 삶의 조각조각들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삶들이 나라는 삶을 구성하고 있고, 이것들을 결코 없앨 수 없다는 것도. 시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늘 말하지만 오독도 독해니까...


한밤의 퀼트(43쪽), 서랍들(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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