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사람책'이라는 말을 다시 떠올렸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일은 당연한 일.


  그 영향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좋은 책이든 좋지 않은 책이든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영향을 받듯이 사람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그냥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기에 누구의 삶도 소중하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겨우'라는 말을 쓴다. 시인이 국립국어원에서 낸 표준국어대사전을 공부하고, 그에 대해서 책도 냈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 있는 뜻풀이를 그대로 가져와 본다.


'어렵게 힘들여, 기껏해야 고작'이라고 풀이해 놓았다. 그렇다면 시인의 말에서 하는 '겨우'는 무엇일까? 둘 다에 해당하겠다. 


'젊어서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굴리려고 했다 /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돌아보니 / 겨우 옆으로 살짝 밀어놨을 뿐이다'


여기서는 '기껏해야 고작'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다음 구절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 겨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그런 겨우를 위해 당신이나 나나 참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다 // 앞으로 겨우를 갸륵하게 여기기로 했다 / 그런 겨우를 위해 당신이나 나나 참 애쓰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고 있으니, '기껏해야 고작'인 인생을 위해서 '어렵게 힘들여' 살아왔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겨우'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힘들여 살아왔던가. 그러니 겨우라고 비관하지 말자. 삶은 겨우 '여기'까지 왔을 뿐이니까.


그러니 이 '겨우'를 찾아내는 일. 이것이 바로 삶이고, 우리가 사람책을 읽는 이유 아닌가 싶다. 어떤 사람에게도 '귀를 접'을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는 일.


시인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존재를 보고 우리에게 알려주듯이,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의 삶에서 '겨우' 이룬 것들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귀를 접다


   책을 읽다 눈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으면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

   위쪽 귀를 조금 접어둔다


   삶은 읽으면서 동시에 쓰는 거라는 걸

   앞서간 이들로부터 진작 배우긴 했으나

   책을 읽다 귀를 접는 건

   읽는 힘이 쓰는 힘을 불러오기 때문이겠다


   돌아보면 내가 써 내려간 글들은

   비문투성이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마침내 한 권의 책이 되고

   표지를 덮듯 관 뚜껑을 덮고 사라졌을 때


   누군가 나라는 책을 들추다

   살짝 귀를 접는 페이지들이 있을까?


   내 귀는 잘 접히지 않아

   늘 소란이 들끓는 시간을 살며

   우물쭈물 여기까지 왔다


   접히지 않는 귀를 지그시 눌러본다

   바깥 소리 대신 내 안의 소리를 담아

   제대로 된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습이 필요하겠다


박일환, 귀를 접다. 청색종이. 2023년. 124-125쪽.


이렇게 시인의 시를 읽다보니 내 삶에서도 귀를 접는 부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나를 읽는다면, '겨우' 이렇게 살아온 내 삶에서도 귀를 접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삶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도 그런 삶을 살도록 '더 많은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책 역할을 하고, 그들에게서 귀를 접을 부분을 발견하고 내 삶에 옮겨오려고 노력하듯이, 내 삶도 누군가에게는 귀를 접고 옮기려고 노력하게 만들 수 있다면, '겨우'인 내 삶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시가 이렇게 내 삶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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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새'를 생각한다.


  말과 당나귀가 교접하여 태어난 동물. 힘이 세어 일 부리는 데는 적격인 동물.


  죽어라 일을 하고는 자신의 후손을 남기지도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동물.


  노새다. 일하는 동물이. 그런데 이런 노새 생각이 많이 난다. 요즘엔 특히 더.


  노동자를 노새 취급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경제성장, 선진국. 누구 덕인가?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 노동자들이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가.


평생을 일했는데, 노후가 불안한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일할 때는 열심히 열심히, 더 많이 더 많이 하라고 하더니, 막상 일을 놓으면 네 생계는 네가 책임지라는 식.


후손을 낳지 못하는 노새와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은지...


양성우 시집을 읽다가 직접적으로 '노새'를 언급한 시 두 편을 발견하고는,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21세기가 되기까지 죽어라 일만 하고 살아온 노동자들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노새 일기


오늘도 천리를 걸었읍니다

큰 짐에 눌리고 굵은 채찍에

속으로 울며불며

입술 깨물며

지는 잎 산비탈 억새밭 지나

물을 건너 흙먼지 아득한

길,

오늘도 천리를 걸었읍니다. (예전 표기 그대로 쓴다. 요즘엔 '걸었습니다'라고 쓰지만)


양성우, 그대의 하늘길, 창작과비평사. 1996년 8쇄. 96쪽


   노새의 꿈


끝도 갓도 없이 쌓이는 궂은일 속에서도

골고루 나누는 기쁨으로 넘치도록 행복하고

그리고 드디어 내가 사는 이 땅 위에

나란히 엎드려 가는 모든 이들과 함께 등 따숩고 배부르며,

오직 사랑을 위한 옳고 곧은 일 하나로

누구나 공연히 사람 손에 함부로 따돌림받지 않는

맑고 밝은 세상에서 내 맘대로 날개 펴고 살고 싶습니다.

내 두껍고 질긴 굳은살 겹겹이 저미는

이 긴 고삐 가시굴레를 모조리 벗고

얼씨구나 네 굽으로 곳곳의 기름진 흙을 차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스스로 즐기는 일 속에서

나 또한 남들과 어울려 밤낮으로 땀에 절며

늘 넘치도록 행복하고 싶습니다.


양성우, 그대의 하늘길, 창작과비평사. 1996년 8쇄. 100쪽.


'노새 일기'에서 '노새의 꿈'으로... 과연 노새의 꿈은 실현되었는가? 긍정적인 답을 하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여전히 노새는 힘들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노동자는 노새가 아니다. 노새여서는 안 된다. 노새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생활을 누리는, '노새의 꿈'에 나오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 한데...현실은... 


최일남이 쓴 소설 '노새 두 마리'가 생각난다. 죽어라 일을 하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 아버지를 노새에 빗댄 소설. 그 소설과 양성우 이 시들을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노새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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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희상 시는 어렵지 않다. 어려운 말이 거의 없다. 그래서 읽기 편하다.


  읽기 편한 만큼 짧은 시도 많다. 물론 산문시에 해당하는 시들도 있다. 그리고 삶에 관한 많은 일들이 시로 표현되어 있다.


  시인이 겪었음직한 일들도 시로 나와 있는데, 그 중에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시도 있으니...('사진 안에 내가 있다' 60-61쪽)


  하지만 이 시집을 읽으면 무엇보다도 시란 무엇인가, 책이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책을 통해 인간은 인간답게 된다고 하면 오만일까? 아니, 책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존재들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배움을 주는 존재. 무엇에게도 배울 수 있으니, 그런 존재는 바로 책이다. 이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가 그런 울림을 준다.


 마지막 말


신은 없다

그러니, 책을 의지하면서 살아라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106쪽.


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나 책은 보인다. 아니, 보이지 않는 존재조차도 책이 될 수 있다. 책은 무궁무진하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영향을 미친다.


그 중에 가장 큰책(물질적으로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많은 영향을 준다는 의미로) 자연이다. 자연은 늘 인간과 함께 해 온 책이었다.


시인은 말한다.


  땅이 책이다


책을 읽지 못하면서 사는 것이 안타깝다는 농부에게

내가 말했다


별말씀을요

괜찮아요

땅이 책이잖아요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27쪽.


땅은 책이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그런데 이런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 있다. 멀리할 뿐만 아니라 아예 안중에도 두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


또 읽으려고 하지 않고 버리려 하는 사람이 있다. 책은 읽어야 하는데, 무슨 땔감으로 쓰듯이 한번 쓰면 그뿐이라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땅을 죽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책을 없애는 사람들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사람책'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종이로 된 책만이 아니라 사람도 책이 될 수 있음을, 하긴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라는 공자의 말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스승이 된다는 말, 시인의 말대로 하면 사람이 책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사람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악서가 양서를 구축한다.' 특히 사람책에서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어야 하는데, 반면교사가 아니라 그냥 교사가 되는 사람책들이 있다. 참 안 좋은 영향을 주는,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하고 고쳐야 하는데, 와, 저렇게 해도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책.


그래서 시집에서 한 시인의 '마지막 말'이란 시에서 '책에 의지하면서 살아라'는 말을 의지할 수 있는 책을 읽으면서 살아라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든다.


책도 책 나름이다. 악서가 양서를 구축하면 안 된다. 사람책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반면교사라는 말이 통하기 위해서는 '반면'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요즘같이 급변하는 사회에서는.


그렇게 '반면'을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기를 바라면서... 시집을 읽는다.


사실 이 시집을 사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윤희상 시인이 쓴 '소를 웃긴 꽃'이라는 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차례를 훑어보다 발견한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 묘소를 내려 오면서'를 읽고서다.


내게도 최인훈이라는 작가는 그의 소설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사람책이었기 때문. 물론 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최인훈에 관한 시.


  소설가 최인훈 선생님 묘소를 내려오면서


  어느 해 선생님 댁의 거실에서, 

  선생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생간난다


  생각해봐라 우리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고 말했을 때,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니 우리가 프랑스를 예술의 나라라고 말했을 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니


윤희상, 머물고 싶다 아니, 사라지고 싶다. 강. 2021년. 38쪽.


그래, 적어도 사람책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런 사람책을 가까이 한다면 '반면'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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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된 시집이다. 


  당연히 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전에 너무도 인용이 많이 되어서 집에 구비하고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이 시집을 손에 넣었는데, 찾아보니 집에 없다. 잘 됐다. 보관해 두고 틈 나는 대로 읽으면 좋을 시집이다.


  시란 시대에 갇히지 않고, 시대를 넘어 다가오기 때문에 오래 되었다고 내 곁을 떠나게 할 필요가 없다.


  언제든 필요한 때 다시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니까.


  제목이 된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너무도 많이 인용이 되어 더 인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이 시집에서는 소위 '민중가요'로 불렸던 노래도 있으니, 그 중에 한 편이 바로 '너를 부르마'라는 시다. (검색하면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런 시 말고도 지금을 생각하게 하는 시가 있다. 집중호우가 너무 심해 산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난 올해. 이 집중호우가 꼭 하늘에서 내리는 비만은 아니다. 우리가 지금 온몸으로 맞고 있는 집중호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비를 내리는 집단들이 있으니..


첨단과학기술로 무장하고, 이제는 아이티(IT) 강국이라고 그렇게 자랑하고 있는,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우리나라지만, 기후 재앙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이 당하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었고,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고 자부하는 지금에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난이 있으니...


하긴 기후 재앙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이 더 울창했다면, 산사태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민주주의란 결국 사람들이 숲을 이루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숲을 파괴해 버린 결과가 이렇게 산사태, 홍수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이제는 되었다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숲 이루기를 그만두고 있어서 이런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이렇게 이것이 어찌 자연에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국민들을, 시민들을, 사람들이 숲을 이루지 못하게 오로지 나무로만, 식물로만 존재하게 만드는 갈라치기에 우리들 역시 숲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시인이 광화문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숲을 이루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듯이, 숲을 이뤄야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데, 우리는 함께 있어도 각자인 사회를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시가 더 귀하다. 1970년대 엄혹했던 시절, 국민들이 숲을 이루지 못하고 개별로만 존재하게 했던 시절에 숲을 그리워했던 시인의 마음이, 지금 2020년대에도 마찬가지가 되었다면...


촛불이라는 숲을 이루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 숲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개별로만 남아 있다. 혼자서는 힘을 쓸 수도 없는데, 버티기도 힘든데...


       


     숲에 가보니 나무들은

     제가끔 서 있더군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숲이었어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낯선 그대와 만날 때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1979. 동아일보>


정희성,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작과비평사, 93쪽.1997년 개정 6쇄.


숲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 모여 숲을 이루자고 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숲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이 시집에 실린, 민중가요로도 불린 '너를 부르마'에 나오는 말처럼, 다르게 쓰이고 있는 그 '너'를 다시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오래 된 시집, 그러나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시집. 정희성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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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보이는창] 134호를 읽었다. 여러 삶들이 책에 실려 있다. 세 달에 한 번 만나는 많은 삶들.(계간지니까) 부유한, 권력있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삶들이 나와 있다.


이번 호에서 이야깃거리를 찾으면 '듣기'가 아닐까 싶다. 들을 귀를 가진 사람, 점점 찾기 힘들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귀를 열라고 했는데, 이 말을 나이가 아니라 권력을 지닐수록 귀를 열고 입을 닫으라는 말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는 나이를 권력으로 보는 경우가 많으니...그냥 나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말하다 논리로 밀린다 싶으면 꺼내는 말, "너, 몇 살이야? 민증 까.")


권력이 있으면 자기 말만 하게 된다. 그러면 남 말을 듣지 않게 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알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해줄 사람이 없을테니. 이 상황을 거꾸로 뒤집으면 듣기는 바로 사랑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들을 수 있는 귀를 갖게 한다.(박총, 들음이라는 사랑)


세상 모든 성인들이 듣기를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과연 우리 사회 권력을 지닌 사람들 가운데 들을 귀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별명(?)이 '59분'인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인가 했더니 1시간이 주어진다면 자신이 말을 하는 시간을 59분 가진다는 뜻이란다. 이런, 이런!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언제 말하지? 아니 다른 사람의 말을 언제 듣지? 앞에 언급한 이번 호 박총이 쓴 글에는 이런 말이 있다. 김범준 선생의 말을 빌렸다고 한다.


"대화 전체의 일 퍼센트 정도를 말하기 위해 긴 시간 상대방의 말을 듣는 태도에는 그야말로 사랑이 담겨 있다"고.(79-80쪽)


이런 듣기의 실종이 어디 한 사람만의 일인가? 정치권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 않은가. 자기들 말만 하고, 다른 정당 또 다른 관점을 지닌 사람들의 말은 '가짜 뉴스'로 몰아세우는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니 말이다.


대표적인 예를 이번 호와 관련지어 말하자면, 바로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하는 '농촌유학'이다. 대도시에 사는 아이들에게 농촌을 경험하게 해주고자 실시하는 교육정책.


그런데 서울시의회에서 그런 활동을 하는 '조례'를 폐지하겠다고 했다 한다. 당연히 서울시교육청은 반발하고 있다. 아래 링크 참조


<‘농촌유학 조례’ 폐지, 시의회 발목잡기에…조희연 “거부권 검토” : 교육 : 사회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삶창]에서 몇 호에 걸쳐 소개하고 있는 것이 이런 농촌유학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케어팜care farm'에 대한 소개글이다.


농업을 통해서 치유하는, 사회에서 소외되기 쉬운 사람들을 농촌에서 함께 일하면서 치유도 하고 수익도 올리는 그런 활동.


수익을 앞에 두기보다는 함께 함에 중심을 두는 그런 활동. 네덜란드에서 케어팜을 운영하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가 고객들에게 기대하는 첫 번째는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이고,두 번째는 자신감을 갖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생산성까지 좋을 수 있다면야 더 좋겠지만 그게 우선은 아니죠. 그 사이에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27쪽)


이런 흐름이 있다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귀를 닫고 있는 행태가 바로 '생태전환교육 사업 관련 조례안' 폐지하겠다는 발상이지 싶다. 다른 정치적 관점을 지녔다고 아예 말을 듣지 않겠다는, 귀를 꽉 막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그런 모습.


더 강화해도 시원찮을텐데... 생태교육은 이 시대 화두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귀를 막고 살아서야 어디.


수익성에 현혹되어 귀를 막고 사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우리에게 심각한 위험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 점을 삶창 이번 호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특히 김인호가 쓴 '지리산 10.19 생명평화 기행'을 읽다보면 가슴이 턱 막힌다. 지리산에 이런 일이? '자연으로 가는 길, 구례'라는 슬로건이 있는 곳에'지리산 골프장'이 들어선다고 한다. 나무들을 무자비하게 베어내고 있다고 한다. 


자연에 대해 귀를 닫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으니, 지리산도 이런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 조병범이 쓴 '입문자들과 함께 새 보기'를 읽으면 우리가 어떤 귀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런 귀를 지니고 있으면, 그렇게 들을 수 있다면 지리산에 골프장을 건설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59분'이라는 말이 듣는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자기 말은 1분, 다른 사람, 다른 존재의 말을 듣는 시간은 59분. 그렇게 된다면 자연(환경-생태)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사는 사회도 갈등보다는 조화와 협력이 주를 이룰 것이다.


들을 귀, 갖춰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기보다 나먼저 갖추려고 노력해야 한다. 특히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그래야 모든 사람들의 삶이 좋아진다.


나를 돌아보게 한 삶창 이번 호였다. 과연 나는 '들을 귀'를 지니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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